세찬 물살이 가동교를 넘고, 갈지(之)자 모양의 좁은 소로를 따라 90도로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기어올라 다시 원통형 나무와 철사로 얼기설기 짠 사다리를 모두 오른 후에야, 필자는 말로만 듣던 ‘낭떠러지 초등학교’ – 얼핑춘(二坪村) 초등학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 체력에 자신이 있었던 20대 초반 청년인 필자는 대여섯 시간이 넘는 산행길로 이미 발에 피 멍울이 가득 생긴 상태였습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저는 고개 하나를 더 넘고서 결국 말을 타고 지나가는 동네 주민에게 짐을 맡기고서야 다시 힘겨운 걸음을 떼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기자생활 이래로 가장 힘겨웠던 인터뷰 중 하루로 기억되었습니다.
얼핑춘 초등학교로 향하는 길 중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사다리타기였습니다. 5미터 가량 길이의 사다리는 절벽에 완전히 붙어있어 지면과의 경사각이 90도에 달했습니다. 주위엔 붙잡거나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시설도 없는데, 발 아래는 아찔한 낭떠러지입니다. 사다리를 오르는 와중에도 돌멩이와 모래가 쉬임없이 부서져 내립니다. 위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다리 전체가 후들거릴 지경이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겨우겨우 세 번째 사다리를 정복하고 숨을 좀 돌리려는 찰나에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 지나온 사다리보다 훨씬 가파른 사다리가 두 개나 더 기다리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낭떠러지 학교’를 처음 봤을 때는 필자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초등학교가 있다니! 철부지 아이들이 환호성으로 깊은 산 속의 적막을 깨뜨렸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장엄한 국기 게양 의식까지 거행하며 필자를 환영해주었습니다. 이 학교의 리구이린 선생님이 풍금으로 중국 국가를 연주하자 아이들이 대열을 갖추어 선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신성하게 느껴졌습니다. 학생들이 게양한 국기는 2000년에 읍내에서 사온 것이라니 벌써 9년 째 쓰고 있는 셈입니다.
이 학교는 중국 쓰촨성 량산저우의 다징산 해발 2800미터 위에 홀로 서있는 초등학교입니다. 학교 주변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고, 아래에는 세찬 물살이 일렁이는 강이 흐릅니다. 학교 근처 산등성이와 굽이굽이에는 중국 소수민족인 이족의 부락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이곳의 소수민족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학교입니다. 학생들은 등굣길마다 다섯 개의 위험천만한 사다리를 오르는데 성공해야만 교실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학교의 교사인 리구이린, 루젠펀 부부는 이곳에서 19년째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출근해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유명한 ‘문맹촌’이었던 마을을 ‘문화촌’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2009년 2월 5일, 19년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중국 cctv ‘2008 중국을 감동시킨 올해의 인물’ 시상식에 섰습니다. 리구이린씨는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저희는 평범한 산촌 교사에 불과합니다. 이 상은 마땅히 우리 ‘낭떠러지 학교’의 아이들, 그리고 다징산에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빈곤지역의 낙후를 개혁하기 위한 필수 요소는 바로 교육입니다. 만약 저를 대신해 낭떠러지를 올라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면, 저는 죽는 날까지 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낭떠러지 학교의 전교생은 80명. 그 중 집이 낭떠러지 아래인 17명이 매일 위험천만한 사다리를 타고 등교하고 있습니다. 리구이린 부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이 안전하게 사다리를 오르내리도록 등하굣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총 40미터에 달하는 이 사다리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오릅니다.
올해 11살인 이족 소녀 아가카라는 오늘도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등지고 한 손은 등나무 줄기, 또 한 손은 리 선생님의 손에 의지해 어른도 오르기 힘겨운 사다리에 발을 디딥니다. 그의 뒤로 열 여섯 명의 꼬마친구들이 뒤따릅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두 교사는 잠시도 한 눈을 팔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이지만 신기하게 안전사고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학교는 벌써 7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총 졸업생 수는 189명이나 됩니다. 낭떠러지 학교에서 배움의 빛을 얻었던 학생들은 산골 마을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갔습니다.
표준어와 이족 방언을 모두 구사했던 리구이린 선생님은 1990년 처음으로 얼핑춘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가 원래 근무했던 읍내와는 천양지차의 근무환경이었습니다. 처음 산골마을로 부임하던 날은 이미 해가 져 어둑어둑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횃불로 길을 비추고, 한 주민은 집안에 단 한 마리뿐이었던 늙은 암탉을 잡아 대접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교사 인력이 부족해 벌써 10년 째 학교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주민들의 문맹률은 지폐의 숫자도 식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배움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눈망울 사이에서 고민하던 리구이린씨는 결국 이 곳에서 교편을 잡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부모님은 당연히 극력으로 반대했죠. 1년만 있어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이 산골짜기로 들어온 후로 열 아홉 번의 봄과 가을이 지나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무너져가는 학교 건물을 보수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이 오지마을에도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 것입니다. 남편과 뜻을 함께 했던 아내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낭떠러지 학교’의 교사를 자청해 더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에 어떠한 의료, 편의 시설도 없기 때문에, 린구이린씨는 사비로 약품을 가져와 학교에 구비하기도 하고, 이발을 배워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기도 합니다.
그가 19년이나 오르내린 사다리는 과거 공포의 대상에서 지금은 일상이자 생활 습관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아찔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등나무 줄기가 갑자기 끊어지는 바람에 아래로 굴러 떨어져 겨우 목숨을 건졌던 일도 있었고, 폭우 속에서 학생을 집에 데려다 주다가 급류에 휩쓸릴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졌던 순간을 회상하며 그는 하늘이 감동해 도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리구이린 선생님은 오지마을 교사 위치에서 벗어나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약을 살 단돈 8위안을 벌기 위해 병든 아내가 위험천만한 산길을 내려가 옥수수를 팔아야만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때도 있었지만, 리씨는 교사 월급의 열 두 배를 벌 수 있는 회계사 자리, 월 6000위안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업 파트너 기회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들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결코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낭떠러지 학교’는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리구이린씨와 몇몇 주민들이 사비를 털어 수력발전기를 구입했지만 불안정한 전압 때문에 정전되기 일쑤입니다. 두 교사 부부는 오늘날에도 남포등을 켜고 아이들의 숙제를 첨삭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42세인 리구이린씨의 월급은 겨우 800여 위안입니다. 루젠펀씨는 아직도 기간제 교사 신분으로 230위안의 월급을 받습니다. 슬하의 두 아이들은 각각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계부채는 10000위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은 늘어가는 빚이 아니라, 그들을 뒤이어 아이들을 계속 가르칠 선생님을 찾는 일입니다. 두 선생님은 제자들 중에서 한 명이 그들의 뒤를 이을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전 우리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래요.” 하산하는 길, 이족 소녀 아가카라가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학교에 엘리베이터를 만들 거예요. 지금처럼 힘들게 학교에 갈 필요가 없도록요.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긴 하지만요.” “…….”
장런제. 노숙자, 넝마주이, 벽돌공장 막노동 등 밑바닥 생활 경험 후 중국 최대 자선 사이트 ‘감은중국(感恩中國)’을 설립. 이 사이트를 통해 현재까지 1150명의 노숙자, 장애인, 투병중인 어린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넴. 40세 시한부 인생을 판정 받았으나, 앞으로 17년이나 더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함. 이것이 ‘감은중국’ 설립자 장런제의 이야기이다.
베이징 북서쪽의 한 쓰레기장 같은 공터와 다리를 지나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낡고 허름한 2층 벽돌건물이 하나 나온다. 이곳이 장씨가 운영하는 감은중국 사이트의 사무실이다.
중국 최대 민영 자선사이트의 사무실 치고는 허름하다
인터뷰 당일, 장씨는 몸이 안 좋았고, 쉬고 싶다는 말을 했으나 베이징대부속 제3병원에서 막 수술을 마친 두 어린이의 문병을 미루진 않았다.
그는 2005년 베이징에 와 헬스클럽 트레이너라는 비교적 괜찮은 직장을 얻었다. 그 후 그는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고, 베이징 거리 곳곳에 나앉은 노숙자와 걸인들을 찍고 다니기 시작했다. 장씨는 그들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주고, 그들을 위해 옷을 마련했다.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장씨는 휴가를 써가며 노숙자들을 도왔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상사로부터 일에 전념하지 않을 거면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
장씨는 정말로 직장을 그만두고 홈페이지를 개설, ‘감은중국’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이 사이트에 불우이웃들의 사진을 올리고 그들의 사정을 상세히 알렸다. “인터넷은 미디어입니다. 수많은 소식을 인터넷에서 전할 수 있으니까요. 인터넷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사정을 알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제 바람이었습니다.”
사이트를 운영하며 그는 1인 다역을 수행했다. 혼자서 기자, 포토그래퍼, 에디터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며 ‘감은중국’을 운영했다. 지금 그의 사이트는 중국 최대 규모의 자선 사이트가 되었다.
장런제씨가 운영하는 자선사이트 '감은중국'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자전거만을 이용한다. 베이징 시내라면 아무리 먼 거리라도 자전거만 탄다.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자전거 수명이 남아나지 않아 지금 그가 타는 자전거가 벌써 5번째다. 그는 이 자전거와 ‘감은중국’이라 쓰여진 가방, 그리고 그 안의 오래된 디카를 가지고 베이징의 방방곡곡을 누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선에 쓰는 그는 생계를 위해 주말에만 일을 한다. 얼마 못 버는 만큼 최대한 아껴 쓴다. 사무실 임대료와 통신비가 100위안이고 인터넷은 다른 사람 인터넷선을 빌려 해결한다. 밥은 길에서 대충 때우거나 국수 따위로 해결한다. 식사를 제대로 하는 때는 친구나 인터뷰 하러 방문한 기자가 대접하는 때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가 한 달 지출하는 비용은 겨우 300위안.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는 방 세 칸짜리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말해두었다고 한다.
그는 도움을 준 이들에게도 자신의 진짜 생활을 숨기고 있었다. 허름한 사무실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맙다고 찾아오겠다는 사람도 절대 사무실에 오지 못하게 한다. “제가 이런 허름한 곳에서 입을 옷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걸 보면 그 사람들이 제 도움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안되지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겨울에 나름 따뜻하고 편하단다. 그러면서도 그는 집도 없이 거리에서 겨울을 나게 될 노숙자와 걸인들을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는 밤 열한 시가 넘으면 옷을 한 짐 실은 자전거로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노숙하는 노인들을 찾아 다닌다. 노숙자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밤마다 찾아 다니며 옷을 나눠준다. 새벽 서너 시 귀가한 후엔 인터넷에 접속해 ‘감은중국’ 사이트를 업데이트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장런제는 안후이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때 어머니가 길에서 주워온 포대기 속 신생아가 그의 여동생이 되었다. 장런제의 부모는 병을 앓고 있었던 아기를 고치기 위해 집안의 하나뿐인 소를 팔았다. 그러나 여동생은 세 살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기가 죽고 3일 후, 작은 날벌레 한 마리가 어머니의 팔에 앉았는데, 어머니는 ‘우리 새끼 엄마 보러 왔구나’라며 우시더란다.
집안의 하나뿐인 재산을 팔아버린 부모님은 피를 팔아 장런제의 학비를 댔다. 어린 장씨는 벽돌공장에서 일하고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며 푼돈을 모았다. 그러다 우한의 한 노인이 장런제를 후원해줘 그를 무술학교에 보내준다. 장런제는 노인 덕분에 그곳에서 싼다(중국의 무술격투기)를 배울 수 있었다. “제 평생의 한은 이름도 몰랐던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아마도 이러한 기억들이 그가 자선활동에 그토록 열정을 바치는 이유일 것이다.
그가 자선사이트 운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지에 장애를 가진 어린 앵벌이 소녀였다. 시장통에서 소녀를 본 장런제는 언론의 관심을 요청하지만 아무런 주목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감은중국’ 사이트를 만들어 이 소녀의 사진과 사연을 소개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한 달 만에 자선단체의 후원을 받게 되고 수많은 네티즌의 기부행렬이 이어졌다. 이 소녀는 2005년 수술을 받아 이듬해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발로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년 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화도 얘기해주었다. 2005년 12월 5일, 베이징의 수은주가 영하 9도를 가리키던 때이다. 한밤중 그는 길거리에 엎어져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는데 신발도 없어 비닐봉지로 발을 칭칭 감고 있었고, 발은 몇 번 동상에 걸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곪아 있었다. 그는 당장 할머니를 근처의 여관에 모셨다. 할머니는 도대체 며칠이나 물을 못 마신 건지 자신이 떠온 그 뜨거운 물을 정신 없이 벌컥벌컥 마셔대더란다. 이 뜨거운 물 한 잔으로 저 분의 차디찬 몸을 녹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여관주인에게 빨리 국수 한 그릇만 삶아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할머니는 보호시설에 보내졌는데,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할머니는 장런제가 찾아갈 때마다 외손자라고 부르며 고향에 가자고 했다. 결국 각계의 도움으로 할머니의 고향과 주소를 알아내고, 할머니는 2006년 5월 드디어 고향에 돌아가 36세의 외아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4년 만에 실종되었던 어머니를 만난 아들은 평생 뵙지 못하는 줄 알았다며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물론 그가 돕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장런제는 2005년 길에서 구걸을 하는 모녀를 알게 되었고, 엄마와 함께 있던 7살 소녀가 심장병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의 집안은 수술할 돈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릴없이 도시로 와 구걸이라도 하며 수술비용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장런제는 수술비용 2만 위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소녀의 병은 하루하루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유명 자선사업가가 강연차 베이징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장런제는, 기회다 싶어 그를 찾아가 울면서 도움을 구했다. 눈물의 호소 끝에 그는 강연자로부터 자선단체의 책임자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 차례 전화를 걸어 소녀의 위급함을 호소한 장런제는‘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병원에 찾아가 돈은 나중에 갚을 테니 먼저 수술을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비웃음만 산 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한 자선단체의 후원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2006년 12월, 그는 다급하게 소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돈이 마련되었으니 베이징으로 와 수술을 받게 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들려온 대답에 장런제는 한참을 멍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바로 전날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소녀는 죽기 전날까지도 ‘아저씨가 수술을 받게 해줄 것’이라며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
장런제는 지금도 여전히 낡고 허름한 집에서 변변한 돈도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젊음이란 재산이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니냐며 웃고는 다시 일에 열중했다.
로또 안 하시는 분도 많겠지만..허황된 꿈은 아니더라도 한번쯤 재미로 5000원 정도로 일주일동안 대박을 꿈꾸며 희망에 부풀어 있는 행복감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봅니다. 저도 가끔씩 5000원 안팎에서 재미로 몇번씩 해보곤 하는데..4등도 2번씩이나 당첨되는 행운을 잡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5000원에 다시 한번 대박의 희망을 품어봅니다... 가끔 로또를 수학적으로 분석하셔서..상당히 고민하면서 번호 고르시는 분이 있으시던데..말짱 꽝입니
노벨평화상은 정말로 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분들에게 주어야 합니다.작은 봉사라도 하시는 분들은 덜 하겠지만 봉사를 하지 않는 이 사람은 참 부끄럽군요.아름다운 마음이 널리널리 전염되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길 바랍니다.존경합니다.항상 많은 후원자가 있어 많은 아픈 이웃의 마음을 보살필 수 있길 빕니다.
1999년 독학으로 CET-4(중국 대학졸업요건인 국가공인 영어시험) 합격, 뒤이어 PBT 토플에서 630점 고득점 획득
2004년 <영어신 주방장> 출간, 칭화대학 음식서비스센터에서 행정업무 종사. 곧이어 베이징대 국제무역학 학위 취득, 공청단 <중국청년 학습성재상> 수상, 인민일보 <중국 10대 올해의 인물> 선정.
2008년 올림픽을 맞아 시행된 ‘베이징 시민 영어로 말하기’ 프로젝트 특별 고문. 현재는 영어교육기업의 CEO로 대변신.
칭화대학교 식당의 중졸 주방장에서 명문 칭화대생도 힘든 토플 고득점으로 영어의 신이 되기까지, ‘칭화대 만두신’ 장리용의 인생 굴곡과 공부에 대한 열정은 아마도 가난에서 시작된 듯 하다.
장시성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장리용, 그의 집안은 작은 마을 안에서도 손꼽힐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가정환경은 어려웠으나, 장리용은 학교에서 줄곧 모범생이었다. 그가 고교 중퇴를 결심할 때까지.
학업을 포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가난이었다. 집안의 가난은 아버지가 매일같이 쌀과 돈을 꾸러 다녀야 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결국 1992년에 이르러, 장리용은 고교 2학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외지로 나가 돈을 벌게 된다. 그는 공부에 대한 미련을 간직한 채,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품고 광저우로 갔다.
광저우에서 잡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장리용은 직장 생활을 경험하며 영어의 중요성을 차츰 깨닫게 된다. 영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광저우를 떠나 중국의 명문인 칭화대학교 학생식당에 취직해 야채를 써는 잡부가 된다. 그에게 있어 명문 칭화대학교만큼 공부와 일을 병행하기 좋은 환경은 없었기 때문. 대우는 광저우에서만 못했으나, 그는 자신의 공부를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에 만족했다. 그렇게 칭화대에서의 영어 독학이 시작되었다.
칭화대 내의 네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장리용의 숙소. 장리용은 그곳에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7-8시간씩 공부하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공부하다가 새벽 두 시를 넘기는 일도 있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의 영어 공부는 그쳐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극기’라는 두 글자와 함께 칭화대의 교훈 ‘행승우언(行勝于言)’이 붙어있다.
칭화대 식당은 규정상 학생들에게 배식하기 전에 직원들이 먼저 식사를 하게끔 되어 있다. 이 식사시간은 겨우 15분. 이 시간마저도 아까웠던 장리용은 7분 안에 식사를 마치고 남은 8분 동안 식당 구석에서 영단어를 외웠다. 그의 동료들은 이상한 녀석이라고 수군댔다.
“저는 칭화대 학생들처럼 시간이 많지도, 정식으로 공부하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해선 부단히 자투리 시간을 모아야 했죠. 1분 1초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영어 공부가 뭐 그리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그저 필요한 것은 용기, 그리고 의지라 생각합니다. 소리 내어 영어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용기와 그 노력을 계속하게 만드는 의지,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겁니다.
또한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른 공부 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에는 결혼식이나 생일 파티 등에 저를 초대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돈도 없는 데다가 공부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모두 거절했었죠. 돈 쓰기 싫어서 저러는 거라고 수전노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래도 제가 성공한 후에는 다들 절 이해해 주더라고요.”
칭화대 식당은 매년 인사고과가 이루어진다. 장리용은 칭화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식당에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만을 도맡았다. 동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실한 업무 태도만이 칭화대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영어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일이 더 우선이었다. 영어 공부를 한다고 일에 소홀했던 적은 없단다.
장리용이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땐, 부족한 시간이 최대의 애로사항이었다. 퇴근 후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에 열 한 시간을 일하고 돌아와 다시 영어책을 붙잡았다.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일종의 신념이었다고 장리용은 고백했다.
중졸 학력의 학교식당 잡부가 오직 독학으로 CET-4를 통과하고 PBT 토플 630점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퍼지자, 칭화대 인터넷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장리용은 순식간에 칭화대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명문 칭화대생들이 일개 식당 잡부에게 편지를 써 영어공부 비법을 묻기 시작했고, 대학교 강연 초청이 이어졌다. 그의 일화가 전국에 알려진 후에는, 매일 수십 통씩 날아드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해 인민일보는 장리용을 <중국 10대 올해의 인물>에 선정했다.
현재 그는 영어교육사업에 종사하며 대학에 출강하는 등 사회 각계에 영어공부법을 전수하고 있다.
제발 좀 제대로 알고 말하세요.구라가 너무 심하시군요.중국어 와 영어의 어순 많이 다릅니다.아주 일부분만 비슷한 경우가 있고 ,그리고 문장 만드는 방식(너무 아마추어 적인 표현)?도 너무 달라요.중국인 영어 배울때 결코 유리 하지 않습니다.검증 되지 않는 지식을 이제 그만 올리세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금에 우리나라 아이들이 보고 본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하루에 5개 이상씩 학원 다니며 아침 7시에 나가 밤에 11시가 넘어서
귀가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현실과 잘못 되어가는 교육제도에도
한탄하는 바 입니다
아마 장리용 같은 사람이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에 받침이 되었다면
! ! !
열심히 공부하세요. 저도 하도 영어가 안되어 다시 영문학과에 들어갔죠. 물론 학위도 어느 정도 다 땃고. 하지만 영어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니 깊이있는 대화가 안되더군요. 예전에 일본어를 배웠는데 6개월정도에 같이 술먹고 가라오케도 신나게 되더군요. 원인을 분석해보니 아무리 제 3의 언어일지라도 투입량이 부족하다는 결론. 열심히 하면 됩니다.
중국어 영어 비슷한것은 사실,그림으로 소통하며 상징적이며 어순도 비슷한게 많음 한글과 일본어는 알타이어계통으로 서로비슷,즉 중국애들이 영어를 배운다는것은 우리가 일본어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됨 ,근거로 중국애들이 외국인상대하는데 우리보다 두려움이 없어보인다 우리는 일단 전혀다른 언어에 일단 두려움부터,,,,
요전에 중국 대입시험 천태만상에서 한 번 소개했었던 10살짜리 중국 최연소 대학생 장신양 군이 있었죠.
현재 12살인 신양 군은 3년 만에 학부를 졸업하고 올해 베이징공업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친구가 어떻게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대학생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져서 웹 상에 돌아다니는 장신양 군의 스토리를 정리해봤습니다. 그의 공부방법도 함께요. ^_~
장신양 군이 최연소 대학생이 되기까지, 그간의 이력
장신양 군은 95년생이고요, 만 다섯 살 때인 2000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만에 2학년으로 월반, 2학년 과정을 한 달 만에 끝내고 3학년 진급, 다시 4개월 후 4학년을 건너뛴 채 바로 5학년으로 월반, 이 역시 두 달 만에 이수, 1년 후 중학교 진학. 6년제인 초등학교 과정을 단 2년 만에 마친 셈입니다.
중학교 입학 후 1, 2학년을 학교에서 보내고, 3학년 과정은 집에서 독학한 신양 군은 곧바로 고교 3학년에 입학했습니다. 그리하여 2005년, 어려서 신분증도 없는 꼬마는 호적증명서를 신분증 삼아 중국 최연소의 나이로 대입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는 비교적 높은 점수인 505점으로 톈진의 한 대학에 정식 입학합니다. 이때 장신양 군은 동갑내기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을 나이인 열 살이었습니다. -ㅁ-
여기까지 보면 대단한 천재소년이 아닐까 싶은데요, 여러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보면 오히려 한창 놀기 좋아하는 나이의 꼬마소년의 모습이 더 강합니다. 방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게임과 만화 보기, 축구와 농구 등을 좋아하는 여느 사내 아이와 다를 바도 없더란 거죠. 단지 차이점이라면, 노는 것 못지 않게 공부도 좋아한다는 점이랄까요.
신동 장신양 군의 공부 방법
열 살짜리 꼬마가 어떻게 대학에 들어가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죠.
신양 군의 아버지 장후이샹 씨는 아들의 총명함이 유전이거나 타고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양 군을 키우는 동안 달리 특별한 교육 방법을 쓰지도 않았다는 군요.
단지 그는 “아이의 타고난 재능 못지않게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부모가 먼저 공부하고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줘 아이가 공부를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거죠. 실제로 신양 군의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교사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두 사람 다 평소에 학구열이 높고 독서를 생활화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신양 군은 아주 어렸을 적엔 말도 더디고 다른 아이들보다 딱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살이 지난 후로는 세 달 만에 천자문을 떼고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2000여 자의 한자를 읽는 등 뛰어난 기억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기억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의 공부법은 무작정 암기가 아니라, 원리와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과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신양 군 자신도 “공부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 하는 게 아니죠. 배운 걸 할 줄 알면 그걸로 된 거니까.”라고 말합니다.
시험에 대해서도, 반드시 몇 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중압감을 느끼기보단, 문제를 풀고 답을 얻어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편입니다. 신양 군의 높은 아이큐가 학습 능력의 주요인이겠지만, 이처럼 공부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 역시 중요해 보이는군요.
또한 부모의 역할도 중요한 듯 합니다. 신양 군의 부모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 때마다 상급 학교의 과정을 조금씩만 미리 가르쳤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중압감 없이 아이 스스로 호기심을 느끼고 알아서 공부하게끔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양 군의 시험 성적이 낮아도, 나무라지 않고 격려해 줘 자기 스스로 더 노력하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장신양 군이 빠른 학습능력으로 월반을 계속했지만, 정작 한 번도 반에서 1등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장후이샹씨는 “반드시 1등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더 발전하고 나아지는 모습으로 충분하다”가 자신의 교육관이라고 밝혔습니다. 학교에서 1등을 한다고 반드시 사회에 나가서 성공하는 것이 아닌 만큼, 아들이 어린 나이에 중고교에서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것 만으로 이미 장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실제로 고교 진학 후 장신양 군의 성적은 전교생 680명 중 219등이었으나, 그의 가족들은 성적을 올리라고 종용하기보단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장신양 군이 대입시험 준비를 몇 년 더하면 명문인 베이징대나 칭화대에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왜 그리 하지 않았는지 말이죠. 그의 대답은 아이답게 간단합니다. “붙었으면 된 거죠.”
그의 아버지 역시 욕심을 부려 아들을 명문대에 보내기보단 결과에 순응하고 싶었답니다.
“재수를 시킬 수도 있지만 아이에게 공연히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점수 올리기만 강요하면 아이가 공부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죠. 나이도 어리니 대학은 지나친 스트레스 없이 다니게 하고, 석사나 박사를 더 좋은 곳에서 해도 늦진 않으니까요. 사실 저 나이에 학부에 진학한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몇 등 안에 들고, 무슨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아이가 남들보다 좀 더 일찍 많은 것을 배우길 바랄 뿐입니다.”
주위의 우려와 달리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학생활을 보낸 장신양 군은 올해 베이징에서 석사과정을 밟게 됩니다. 학업 완수와 더불어 사회생활 적응과 성숙한 성인으로의 성장,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기대를 극복하는 일이 앞으로 신양 군이 해결해야 할 도전이 될 듯 합니다.
위분말이 맞는듯. 기억력좋고 문제잘풀고 많이알아 공부잘한다고 천제는 아니다.그건 기계적인 사람일 뿐이다.
인간보다 컴퓨터가 더기억력 좋고 많이안다. 하지만 도구일 뿐이다. 컴퓨터를 다루고 창조하는 인간이 더 뛰어나다. 그런식의 공부잘 하는 사람이 어른되서 잘되지 않는데 문제내주는 사람이 있어야 문제푸는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은 천제가 아니다.기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