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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에어차이나 유니폼 변천사

2009.01.28 17:00 | 중국의 볼거리 | 양꼬치

http://kr.blog.yahoo.com/jhkey03/367 주소복사






70년대 군복 차림의 승무원들. 언뜻 보면 공장 직원들 기념 촬영같기도 합니다-ㅂ-;;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항공사인 에어 차이나는 원래 중국 공군의 민항 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여승무원들도 군복 차림이죠. 이 당시 여승무원들의 유니폼은 색깔이나 디자인 모두 상당히 수수합니다. 물론 해외의 국제적 항공사와 비교하면 많이 뒤쳐지는 수준이죠. 








70년대 승무원 유니폼. 지금과는 정말 느낌이 많이 다르군요.






1980년대 초의 유니폼



당시 중국 민항이었던 에어차이나는 1980년에 공군에서 분사됩니다. 이를 기점으로 승무원들의 유니폼도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가게 됩니다.





1988년 7월 1일, 에어 차이나 승무원 유니폼이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가르뎅의 디자인으로 바뀐다




1988년 중국 민항이 체질 개선을 단행하며 중국 내 기타 항공사들도 본격적으로 기업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개성없이 모두 똑같았던 중국 항공사 승무원들의 유니폼도 회사에 따라 차별화, 다양화하게 되지요.



또한 같은 해 중국 민항이 지금의 에어 차이나로 정식 출범하면서 승무원 복장도 다시 한 번 바뀝니다.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 피에르가르뎅의 디자인이 이때부터 에어 차이나의 정식 유니폼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에어 차이나 승무원 유니폼. 2003년부터 빨간색으로 바뀌었습니다.




2003년부터는 프랑스 디자이너이자 오뜨꾸뛰르의 일원인 라피두스의 디자인을 차용했습니다. 새로 바뀐 유니폼은 블루 컬러와 차이나 레드 컬러 두 종류라고 합니다.




출처
http://news.xinhuanet.com/photo/2008-10/26/content_10253640.htm


*All about China*
http://kr.blog.yahoo.com/jhkey03

스케일이 다른 중국의 신년 행사

2009.01.28 16:29 | 중국의 볼거리 | 양꼬치

http://kr.blog.yahoo.com/jhkey03/366 주소복사






1월 27일 홍콩의 신년맞이 불꽃축제 모습












이 행사는 총 500만 홍콩달러를 들여 성대하게 치루어졌으며, 총 23888개의 폭죽이 하늘에서 빛을 발했다.







1월 26일 개최된 2009 광저우 춘제 불꽃놀이의 모습. 화려한 불꽃이 파저우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불꽃이 어탄강의 야경과 함께 장관을 이루었다.






이날 행사에는 총 20만개의 불꽃이 발사되었고, 40만 명의 시민이 행사를 관람했다.








1월 26일, 정저우 시내에서 거리 퍼포먼스를 벌이는 민간예술단의 모습. 이 날 총 60여 민간예술단이 참가해 공연을 선보여 새해 분위기를 북돋았다.




















1월 24일, 뤄양 시민들이 뤄양시 왕청공원에서 전시된 신춘맞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중국 유명 연예인들을 캐리커쳐화해 등으로 전시한 모습









난징 부자묘의 화등시장에서 중국 전통화등을 구경하는 어린이들. 춘제 기간동안 약 40만 개의 화등이 판매될 것으로 예상된다 













난징 부자묘의 야간 화등행사



출처
http://news.xinhuanet.com/photo/2009-01/28/content_10728108.htm
      http://news.xinhuanet.com/photo/2009-01/26/content_10720099_8.htm


*All about China*
http://kr.blog.yahoo.com/jhkey03



중국 만수암(萬壽庵)의 비구니










흰 피부에 용모단정한 20대 중반의 여성. 유창하게 표준어를 구사하는 이 여성이 과연 법의를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누가 그를 비구니라고 생각했을까?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법명이 전민법사(傳愍法師)임을 알게 되었다. 원래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지만 한사코 거절한다. 법명을 받게 되면 세속에서 쓰던 이름은 영원히 버리는 거란다.

 















전민법사는 어려서부터 불교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지며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속세를 떠나 한마음으로 수행에 정진해 내세를 기원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족들도 그의 뜻을 존중해 모두들 전민법사가 수행으로 온 가족의 현세와 내세에 안락과 행복을 가져다 주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그는 광둥성 토박이로, 출가 전까지 샤산에서 살았다. 1995년 고교 졸업 후 여동생과 함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아버지는 광저우 육용사의 승려이다. (중국 일본 등 외국 특정 불교 종파는 스님도 결혼생활이 가능하다고 함)

 












나중에 결혼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시원스럽게 그러나 확고한 어조로 답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은 국민의 신앙의 자유와 출가인의 결혼의 자유를 모두 허용하지만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민법사의 인품, 교육 수준, 견문 등은 우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그는 1997년 마카오 불교학원에서 6년을 수학해 석사학위를 보유한 재원이었다.












전민법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비구니들의 생활을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만수암의 비구니들은 출가 이후로 모두 독신으로 수행하며 사원 안에 기거한다. 그들의 생활에는 엄격한 규범과 규칙이 있고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한다. 처음으로 승려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가장 먼저 노여승을 자신의 규범 스승으로 모시고, 스승에게 도덕 및 품행 교육과 관리를 받는다. 그 후 유명한 생불이 머리를 깎아준다. 생불이 불경을 외고 비구니를 축원해 준 후, 머리 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깎음으로써 육근(, , , , , 마음을 가리키며, 이 여섯 가지를 죄업의 근원으로 여김)을 깨끗이 하고 모든 근심과 번뇌를 끊어버렸음을 나타낸다.





모든 출가인은 삼귀라 하여 불가에 귀의하고, 불법에 귀의하고, 승려에 귀의하게 된다. 이를 위해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고, 종교적 신념을 견지해야 하며,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불경을 공부해야 한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경내에 머무를 수 있다.











비구니가 수행하는 가장 보편적인 형식은 음식을 끊고 엄격한 금욕 속에서 고행하는 폐재(閉齋)이다. 간혹 부잣집에서 죽은 이의 천도를 위해 비구니에게 폐재를 청하기도 하는데 의식이 끝난 후에는 일정한 공양을 받는다고 한다. 폐재는 일반적으로 이틀 동안 이루어지며, 첫째 날까지는 말을 해도 괜찮고 식사는 점심만을 먹게 된다. 둘째 날부터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실 수 없으며, 말도 한마디 내뱉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비구니 홀로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수행을 해야 한다. 이 수행은 셋째 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된다.














비구니의 생활은 비록 단조롭고 물질적인 향락도 누릴 수 없지만, 그들은 불경 공부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이 속세에서의 기복 심한 삶보다 평화롭다고 말한다. 비구니들은 하루 종일 방안의 어두운 곳에 조용히 앉아 경문을 읽고 공부한다. 외출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방문객은 조용히 사절한다. 문고리에 나뭇가지를 하나 끼워두는 것은 좌선중이라는 뜻이다. 신도나 가족들이 찾아와도 나뭇가지가 보이면 조용히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좌선은 최소 한 달이 걸리고 길게는 반년이 넘게 이어지기도 한다. 비구니들이 좌선을 하는 이유는 감각과 사고 사이에서 진리를 통하고 일체의 사념을 버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출처 http://club.koubei.com/thread_146_9376_1.html




*All about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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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소띠 중국인들은 전부 빨간 팬티를 입는다는데…?

2009.01.28 11:31 | 중국의 문화와 문학 | 양꼬치

http://kr.blog.yahoo.com/jhkey03/364 주소복사






올해 소띠 중국인들은 전부 빨간 팬티를 입는다는데…?

-       중국의 본명년 풍습

 

중국의 본명년(本命年) 풍습을 아십니까? 본명년이란 자신의 띠 동물에 해당하는 해를 말합니다. 즉 올해는 기축년이기 때문에 소띠인 13, 25, 37, 49세 등이 자기 본명년을 맞은 것이지요. 중국은 12년마다 돌아오게 되는 본명년이 되면 그 해는 운수가 사납고 액운이 닥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이러한 미신은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널리 퍼졌던 속설입니다. 과거부터 지역을 막론하고 본명년이 되면 붉은 색 물건을 집안에 걸어 액운을 피하는 전통이 있었죠. 그래서 지금도 중국인은 붉은색과 본명년을 뗄 수 없는 관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명년마다 붉은 색을 찾는 풍습은 아마도 붉은색에 대한 중국인의 전통적인 숭배의식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태양, , 피의 색깔인 붉은색은 길한 색이고 액운을 막는 색이라는 관념이 원시시대부터 이미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이러한 관념은 변하지 않고 이어져 와 지금도 설에는 대문에 붉은색 대련을 붙이고, 전통 혼례식에서 신부는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붉은 색 천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어떠한 일이던 즐거운 날에는 붉은색을 사용하는 경향이 많죠.


 

한족은 예로부터 붉은색을 경사, 성공, 충용과 정의의 상징으로 여겨왔으며, 특히 붉은색이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본명년인 중국인들은 새해 하루 전날부터 빨간색 속옷을 입거나 빨간 허리띠를 두르고, 어떤 이는 자신이 쓰는 물건들도 빨간색 천으로 칭칭 감거나 둘러서 자신의 본명년을 맞습니다. 이렇게 해야 액운을 피하고 길운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죠. 이처럼 중국인이 본명년의 액운을 피하기 위해 휴대하는 붉은색 물건은 본명홍(本命紅)이라고 합니다.

 

 

 

 

 

본명년과 관련해서는 또 본명신(本命神)을 믿는 풍습도 있습니다. 자신의 본명년이 되면 사람들은 본명신에게 제사를 지내 장수를 기원합니다. 이 본명신은 도교에서 유래된 관념입니다. 도교에서 민간의 본명 관념을 흡수하고 본명성(本命星), 본명년, 본명일(本命日)과 같은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죠. 도교는 중국에서 시작된 전통 종교의 하나로서, 자연과 천간, 지지, 12간지 등 자연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관념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본명신의 풍습도 여기에서 비롯된 전통관념 중 하나입니다.


 

지역에 따라서 본명신을 본명수명성군, 본명원진, 육십갑자신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갑자년을 시작으로 60개의 햇수가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이 중에 자신이 태어난 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해당하는 신이 자신의 본명신이 됩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명장이자 영웅인 악비는 1103년 생으로 이 해는 계미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본명신은 계미년의 계미태세위인이대장군이 된다고 합니다. 도교에서는 자신의 본명신을 본명년 혹은 평년에 정성껏 섬기고 제사를 지내면 화를 면하고 복을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관습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지요.





 

본명년 관념은 한족뿐 아니라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길일과 흉일이 있는데 그 날짜는 자신의 생신(生辰)에 따라 달리 정해진다고 합니다. 티베트력으로 열두간지가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열두간지가 시작할 때를 (흉년을 뜻함)’라고 합니다. 그래서 13, 25, 37세 등 를 맞은 사람들은 액운을 피하기 위해 외출을 삼가고 대신 염불과 보시에 더욱 힘을 쏟습니다.


 

한편 거란족은 출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본명년을 지냈습니다. 요나라 때에 본명년은 재생례(再生禮) 혹은 복탄례(復誕禮)라고도 부르며 자신의 출생을 기념하고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식을 지냈다고 합니다.


 

출처 http://ks.cn.yahoo.com/question/1408011201442_4.html


*All about China*
http://kr.blog.yahoo.com/jhkey03

 

기아에 못이겨 인육을 먹은 중국의 비극적 역사

2009.01.28 01:12 | 중국의 역사 | 양꼬치

http://kr.blog.yahoo.com/jhkey03/363 주소복사



1930년부터 1936년의 시기는 중국 쓰촨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참혹했던 때이다. 이 시기 동안 해를 거르지 않고 가뭄, 홍수, 우박, 해충, 도적떼의 습격 등의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쓰촨을 덮쳤던 1934년에는 식량난이 특히 극심해 기아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이 잡풀과 나뭇잎, 나무뿌리, 흙을 먹으며 연명할 정도였다. 1936년 쓰촨의 식량난은 최고조에 달해 굶주린 민중들이 집단으로 걸식을 하고 다녔으며, 굶어 죽은 이들이 거리에 차고 넘쳤다고 한다. 더욱 세간을 경악시켰던 사건은 굶주린 쓰촨 민중들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는 공포스런 소식이 끊이지 않고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36년 쓰촨 일부 지역에서는 죽은 시체의 인육이 한 근에 500, 살아있는 사람의 인육은 1200문에 팔렸다고 한다. 퉁장 마류핑의 한 부녀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6, 9살짜리 두 딸과 함께 타지로 피난을 가던 중 길에 쓰러져 죽었는데, 배고픔이 극에 달한 두 딸이 죽은 어머니의 살을 뜯어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민중들이 죽은 자의 인육을 먹는 일은 이미 놀라운 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무서운 일은 살아있는 사람이나 어린아이를 죽여 그 인육을 먹은 일이었다. 퉁무둥의 한 빈민 부부는 기아를 견디지 못해 세 살 난 딸을 죽여 인육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진무순간> 기록에는 굶주린 민중들이 차고 넘치니, 자식을 죽여 배를 채우고 형제를 죽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창시와 랑중의 민중들은 자기 자식과 어린 아이들을 구워먹었다고 적고 있다.

 


극심한 기아로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양심도 상실된 쓰촨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먹는 비극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왕창현에 살았던 친씨 노인은 두 아들이 굶어 죽자 시체의 인육을 도려내 먹었으나 결국은 그도 굶어 죽었다고 한다. 무먼 원창궁의 멍리셩이란 자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모두 굶어 죽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어머니의 살을 도려먹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푸지 지역에 살았던 양촨싱 가족은 아내와 며느리가 굶어 죽고 어린 손녀만 남게 되었는데, 어느날 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양촨싱이 손녀를 죽여 칼로 토막 내 먹었다고 전한다. 그의 이웃은 그날 밤 어린 여자아이가 커서 땔감을 주워올 테니 제발 죽이지 마세요라며 애걸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기아로 인해 인육을 먹는 사태가 빈번히 발생했지만 관부에서도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바중현에 거주하는 50대 청씨 부부는 현지의 지주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1936년 대기근이 들면서 반년간 전혀 비가 내리지 않고 땅에 풀 한 포기 돋지 않게 되자, 온 식구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겨울이 되어 온 가족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었는데, 청씨는 우연히 구걸하다 길에서 죽은 어린아이의 시체를 발견하고, 밤에 몰래 시체를 집으로 가져와 인육을 삶아 가족들과 먹었다. 그는 며칠 후 또 다시 굶어 죽은 어린아이의 살을 가족들과 함께 먹어 생명을 부지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청씨 가족은 근 한 달여를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설 즈음 청씨는 어느 집에서 죽은 아이를 매장시키는 것을 보고 몰래 시체를 빼돌려 가족들과 먹기도 했다.



나중에 이러한 행각이 모두 발각되고, 청씨는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었다는 혐의로 관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결국 관부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죽은 자의 인육을 먹은 것을 위법이라고 여길 수 없다고 판단해 무죄방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었으나, 재난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름없는 행각을 벌인 이도 있었다. 캉싼춘이란 자는 딸이 굶어 죽은 후 시체의 살을 도려내어 먹었는데, 인육이 맛있다고 느낀 그는 도처로 죽은 자를 찾아 다니며 거리낌없이 인육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인육을 먹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그는 길목에 숨어있다 지나가는 행인을 덮쳐 죽인 후, 살을 도려내 집안에 보관하였고 뼈는 구덩이에 파묻었다.

 

아예 인육을 돈을 받고 팔기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쇠고기를 파는 것이라고 속였으나 실제로는 사람의 고기를 팔았다고 한다. 그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고기를 먹고 있던 사람을 죽여 그 살을 쇠고기와 섞어 팔기도 했다.

 


쓰촨의 끔찍했던 대기근은 1936년부터 1937년까지 계속 이어지다 몇 차례의 강우 후 겨우 진정되었다. 그러나 쓰촨 역사에서 이 끔찍했던 비극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출처 http://user.qzone.qq.com/622008594/blog/120930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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