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루쉰에게는 정식 아내 외에 학문적, 감정적으로 삶을 함께 했던 쉬광핑이란 여인이 있다. 부모님이 일방적으로 정해준 상대와 원치 않은 결혼을 한 루쉰은, 쉬광핑을 만난 후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
쉬광핑은 루쉰을 대학 재학시절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다. 차별에 절대 승복하지 않던 당찬 신여성인 쉬광핑은 아버지가 정해 준 혼처를 거부하고 신학문을 배운다. 쉬광핑은 루쉰과 17년이라는 나이 차이와 유부남이라는 악조건과 세상의 악평을 감내하며 과감하게 루쉰의 아내로서 동반자적 삶을 선택한다. 그 후 루쉰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림자처럼 루쉰의 집필 작업을 돕는다. 루쉰 사후에 출간된 <양지서>는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마이뉴스 <쉬광핑- 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서평 발췌)
1927
년 상하이에 정착한 루쉰은 정식으로 쉬광핑과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루쉰은 이미 주안 여사(당시 시어머니와 베이징에서 거주)와 결혼한 상태로, 법적으로 이혼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쉬광핑은 루쉰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지위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쉬광핑도 범상한 여성은 아님을 그가 루쉰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쉬광핑의 편지에는 루쉰이 처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은 어찌되든 상관없다, 그저 서로에 대한 감정이면 충분하다는 대목도 있다.
한편 쉬광핑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공표할 수 없었던 루쉰은 이 때문에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루쉰은 친구가 찾아올 때마다 쉬광핑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했으며, 혹시라도 그가 친구들과 마주치게 되면 자신을 도와주러 온 학생이라고 둘러댔다.
1928
년 여름, 루쉰과 쉬광핑은 항저우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들에겐 사실상의 신혼여행이었다. 그런데 루쉰은 항저우에서 머물 호텔에 3인실을 예약하고, 자신의 제자인 쉬친원을 기다렸다가 함께 출발하는 등 이상한 행각을 벌인다.
항저우에 다다른 후에도, 중국의 대표작가이며 항저우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는 루쉰의 주위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거의 매일 저녁 사람들이 루쉰을 만나러 호텔로 찾아왔다.
밤이 깊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하자, 쉬친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방을 나서려는 순간, 루쉰은 재빨리 그를 붙잡고 나가면 큰 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말했다. “ 친원아, 낮 동안에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서 볼 일을 봐도 좋다. 그렇지만 밤에는 반드시 여기로 와서 잠을 자야 한다. 매일매일 여기에서 말이다, 상하이로 돌아갈 때까지!” 루쉰은 쉬친원을 방 안 가운데 침대에서 자게 했다. (쉬친원, <루쉰일기 중의 나>, <루쉰회고록> 발췌)
이렇게 하여, 제자인 쉬친원은 중간의 침대에서 자고, 루쉰과 쉬광핑은 각각 양 쪽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루쉰과 쉬광핑이 여행하는 내내, 학생 한 명이 같은 방에서 자기 선생님과 선생님의 내연녀 사이에서 잠을 자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쉬친원은 이 때 루쉰의 속뜻은 불필요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루쉰이 내면적인 부담감과 죄책감을 떨구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루쉰은 어려서부터 도덕 교육을 충실히 받아왔으며, 당시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상당한 문화 인사였기 때문에, 쉬광핑과의 동거생활은 루쉰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정정당당히 밝힐 수 없었기에, 스캔들을 피하고자 제자, 내연녀와 한 방에서 자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루쉰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인 쉬광핑은 루쉰의 죽기 전 마지막 10년을 함께 했으며, 그에게 무한한 내조와 정신적인 도움을 준 인물이다. 루쉰이 사망한 후에도, 쉬광핑은 두 사람 사이의 아들 저우하이잉을 정성껏 길렀으며, 루쉰의 어머니 및 부인 주안 여사의 생활을 원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