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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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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날개 (jchlove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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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2/26
 

[개역한글]
제14장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형제가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라]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희락이라
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 톤 데 아스데눈타테 피스테이) -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8:26). 그런데 본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한율법 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Harrison).
너희가 받되(* , 프로슬람바네스데) - 이 단어는 '받아 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 )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 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즉,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을 받아 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Kasemann). 그런 의미에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27과 28: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welcome;RSV, LB).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는 '디아크리세이스'(* )는 '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 )은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는 '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고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Cranfield). 즉,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Sanday and Headlam).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음식물에 관한 금기(禁忌)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다. 유대적 전통(레 11:1-47)도 있었고 생명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 , 피스튜에이)이란 말의 의미는 그 반대말 '연약한 자'(* , 아스데논)란 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연약한 자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Meyer, Godet). 바울 역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딤전 4:3, 4). 한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를 먹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 )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즉,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다(창 9:3;잠 15:17;Godet).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의도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레 11장),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2:3).

=====14:3

업신여기지 말고 - 바울은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 메 여수데네이토)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이 용어는 '여수데네오'(* )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 '업신여김', '멸시함'(contempt, NEB) '경멸함', '얕봄'(despise, KJV)의 의미로 쓰여졌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소심한 태도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 것이다(Godet).
판단하지 말라 -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 , 메 크리네토)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정죄'(* , 카타크리시스)라는 표현보다 '판단'(* , 크리네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주로 강한 자들의 행위를 비판함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Lenski). 음식을 채소로만 제한하는 연약한 자들은 모든 음식을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 말씀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양쪽 다 언급한 것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좀더 강조점을 둔 것이다(Godet).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결코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치 않고 양쪽 모두 자신과의 교제 관계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容納)하셨던 것이다(Robertson).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에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 모두를 용납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Calvin).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바울은 위와 같은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하인과 주인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반문의 형식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즉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를 엄히 질책(質責)하고 있는 것이다. 집 주인을 제쳐두고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하는 하인이 있다면 그 같은 행동은 주인의 영역을 월권(越權)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주인 앞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Harrison). 하인들의 행위는 오직 주인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인들의 행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둘로스'(* , '노예')가 아니라 '오이케텐'(* , '가사를 돌보는 머슴')이다(Bruce).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종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그를 세운 주인에게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 , 퀴리오스)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집 주인이다(Godet). 그는 그의 집 하인들을 다스릴 '권능'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테이'(* )는 바울의 서신서에서만 발견되는 동사(고후 9:8;13:3)로 하인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의 왕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Dunn). 이 처럼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에게 있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그를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판단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서로를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 본절에서는 날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루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일반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종교적 의무와 관련하여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혹은...혹은...'(* ... ..., 호스멘...호스 데...)은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지시 대명사이다(Robertson). 본 구절은 사람들이 날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향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날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같게'(alike)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역본들(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KJV, RSV, NASB, NIV, NEB)에서는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감안하여 의미상 '같게'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는 것은 모든 날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Bruce). 이에 바울의 가르침대로 따른 자도 있었지만, 종교적 양심으로 인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날'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이는 다른 사람이나 종교적인 규례로부터 영향을 받지 말고 주체적인 신앙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모든 날이 주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들은 이러한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거나(갈 5:13), 또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해 걸림돌이 되었고(고전 8:9), 어떤 이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은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결단할 것을 중요하게 여겨 무엇보다도 그 관계가 우선되어야지 다른 사람과의 결단이 그보다 우선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 흠정역(KJV)에는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중히 여기지 않으며'(and he that regardeth not the day, to the Lord he doth not regard it)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문맥에 어울리도록 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바울이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추정해 보면, (1) 문맥상 생략해도 뜻이 통하는 것으로 여기고 구차하게 언급하지 않았거나, (2) 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논지는 앞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생략했거나, (3) 독자들이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상태를 지적하여 날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주를 위해서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여기서 '주를 위하여'(* , 퀴리오;'주에게')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 유카리스 테이 토 데오)라는 문구가 반복되는데, 이는 사람들의 눈에 '약한 자'가 됐든지, '강한 자'가 됐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Harrison). 사도 바울은 먹는 것에 대해 자유로울 것을 가르치면서(딤전 4:3ff.), 이러한 문제로 교회가 나누어지거나, 헛된 논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지금까지 언급하였던 음식과 날에 대한 로마 성도들의 태도를 일단 정리한다.

=====14:7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바울은 앞에서 음식 문제와 종교적으로 날짜를 지키는 문제 등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두 가지 생활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언급하였다(1-6절). 바울은 교회 생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취해야 할 생활 원리들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구분해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첫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몬 헤아우토 제'(* )로 여기서 '헤아우토'(* ,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울의 신앙 고백이며(갈 2:20)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 바울의 일관된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욕심으로 점철(點綴)된 역사였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값으로 사신 바(고전 6:19, 20)되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Calvin). 바울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0, 21)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의 원리들을 권면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주를 위한 일관된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는 확신에 근거하여 다른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서도 성도의 삶의 원리를 근본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선언한 것이다.

=====14:8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본절에서 좀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내적인 삶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Tholuck).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생(生)과 사(死)에 있어서 궁극적인 표준이 되신다(Hendriksen). 이 말씀은 앞절 '자기를 위하여 사는'(* , 헤아우토 제)과 대조되어 '투 퀴리우'(* , '주의 것')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전 6:19, 20)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왜, 음식과 절기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생사(生死)의 문제까지 끌어올려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Lenski).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상의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께 대한 믿음과 청지기적 사명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여야 한다(고전 10:31).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 이 말씀은 앞절에 대한 확증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다시 살으심은 산 자의 주가 되기 위해서임을 말하는 것이다(Bruce). 서두에 '이를 위하여'(* , 에이스 투토)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준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主)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은(고전 15:3, 4;고후 5:15), 우주적인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Kasemann)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생의 주권자가 되심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Calvin). 한편 '다시 살으셨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 에제센'(* )은 '그가 소생하셨다'란 뜻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神性)과 구세주(救世主)로서의 예수님과 만물에 대한 그의 주권을 입증하는 것이다(Harrison). 또한 그것은 새로운 삶이 주를 위해서 예비되었으며 그의 성도에 대한 주권과 능력이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업신여기느뇨 - 바울은 앞서 3절에서의 책망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첫번째는 연약한 형제에 대한 언급이다. 즉, 채소만 먹는 자들이 고기를 먹는 자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판단하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리네이스'(* )로 의문문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책망에 대한 좀더 강한 어조이다. 연약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 믿음이 강한 자를 판단한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권리와 근거로 그들을 일방적으로 판단하는가 ?'하며 연약한 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도록 질문 형식으로 그들의 행위를 깨우치고 있다. 두번째는 믿음이 강한 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즉,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는 자들이 채소만 먹는 자들을 업신여겼다. '업신여기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수데네이스'(* )로 강자가 약자를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책망하고 있다. 양자간에 이러한 태도는 결코 어느 쪽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모두 온당치 못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모두가 서로간에 판단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장래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여기서 '심판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마티'(* )는 운동 경기에서 심판이 서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소에 있는 심판은 경기 도중에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보면 즉시로 그들의 자격을 박탈하여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도록 하며 승리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고전 9:24-27). 따라서 각자는 그 날에 자기가 행한 대로 직고하며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니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행위를 삼가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11, 12절).

=====14:11

기록되었으되(* , 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과 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울은 기억에 의존하여 두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혼합 인용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용했을 것이다(Dunn). 아무튼 어느 방법이든 간에 구약성경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기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인용문 역시 앞절(10절)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 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민 14:28;사 49:18;렘 22:24, 46;겔 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 사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 , '자백하리라')와 '파사 글롯사'(* , '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사 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한 분이신 지고(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사 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 , 여소몰로게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마 11:25;눅 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즉,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12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앞에 나온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끌어낸 권고적인 결론으로서 이것은 10절의 사상을 되풀이 한 것이다. 여기서는 각 단어가 매우 강조적인 것으로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Denney, Cranfield). '각인'(* , 헤카스토스)은 어느 쪽도 배제(排除)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즉 판단하는 자나 판단받는 자 양쪽 모두를 가리킨다. '자기 일을'(* , 페리 헤아우투)은 자기가 판단하는 형제의 일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서 직고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 , 토 데오)는 자기 파당이나 혹은 자기와 친밀한 동료에게가 아님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다 아시되 사람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직고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히 4:12, 13). '직고하리라'(* , 로곤 도세이)는 장부에 적힌 대로 세밀히 '보고하다', '회계하다', '계산하다'는 뜻으로 심판의 철저성을 나타낸다(요 3:17). 신약성경의 용례를 보면 마 12:36;눅 16:12;행 19:40;히 13:17;벧전 4:5 등에서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최후 계산(셈)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2:6-16;고전 3:12-15;고후 5:10)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예외없이 각각 자기가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할 뿐만 아니라 계산해야 한다는 진리를 각 단어마다('각인',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강조하여 선언한 것이다.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 이것은 앞 단락의 권면을 간결히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면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양 집단 모두에게 주어진 교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Godet, Dunn, Althaus, Gaugler, Cranfield). 마 7:1과 그 병행구에 나타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이 본문이 의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Dunn).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Murray, Cranfield, Godet). 사람의 행동이 형제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Cranfield, Godet, Murray). 예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믿음이 강한 형제라고 직접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놓치 말라는 이 훈계에서 믿음이 강한 형제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앞에서도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게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고 경계한 바 있다(3, 10절). 이제 본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연약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딪힐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콤마'(* )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stumbling block;KJV, RSV). 그리고 '거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 )은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덫(obstacle;NIV)을 뜻한다(Meyer, Murray). 즉 이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때 '스칸달론'을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마 16:23). 그리고 이 두 용어는(프로스콤마, 스칸달론)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한 형제를 '연약한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 이는 강조적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기 확신을 말한 것이다. '확신하다'(* , 페이도)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갈 5;10;빌 2:24;살후 3:4에서 강조 완료 능동태 1인칭으로 '주 안에서'(* , 엔 퀴리오)라는 어구와 그 뒤에 '호티'(* , that)절과 함께 쓰여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페이도'(* )의 완료 수동 1인칭 단수인 '페페이스마이'(* )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이다 카이'(* , '내가 알다')가 앞에 놓임으로써 '페페이스마이'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또 본절에서는 * ('엔 퀴리오', '주 안에서') 다음에 '예수'(* )라는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는 '호티'(* , that)절의 내용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다 '확신한다'는 말을 수동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뜻한다. (2)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상의 예수의 어떤 특정 가르침, 즉 마 15:10, 11, 15-20;막 7:15-23 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3) 아울러 자기의 확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위의 세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여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합니다'고 강력하게 자기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Godet, Meyer, J. Murray, Cranfield).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이 말은 바울이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진리로서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의 헬라어 '디 헤아우투'(* )는 '그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말한다(Godet, Cranfield, Sanday).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의 행위, 태도, 욕구, 사고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피조(被造) 세계의 자원,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것 그것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없으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헬라어 '우덴'(* )은 본절에서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이논'(* , '속된 것')이란 단어 역시 그 자체는 불결하고 순결치 못한 것 특히 율법의 의식에서 깨끗치 못한 것을 의미하나(막 7:2, 5;행 10:14;히 10:29;계 21:27) 여기서는 어떤 음식물도 그 자체는 속(俗)된 것, 즉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 뿐만 아니라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구약의 의식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이상, 그리고 구약의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영원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신 이상, 이제는 더이상 구약의 율법 의식에서 말하는 불결한 것과 정결한 것의 진정한 의미를 문자적으로 의식적으로가 아닌 영적으로 확실하게 정리하고 이해 해야한다. 누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레 11장 참조) 그에게 있어서 그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分量)과 함께 신앙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개인의 확신에서 행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판단할 성격이 아님을 양쪽 모두에게 절묘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Murray, Meyer). 이런 뜻에서 바울은 전반절에서 약한 자에게 강한 자의 믿음의 수준을 이해시키면서 음식물의 본질에 대한 진리를 설명한 반면 후반절에서는 강한 자에게 약한 자의 믿음 분량을 깨우쳐 준 것이다.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는 바로 앞절(14절)과 연결된 접속사가 아니라 13절 하반절과의 연결 접속사이다. 14절은 삽입절이다(Meyer, Liddon, Hendriksen). 즉 '연약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 것을 결심하라(13절) 왜냐하면(* , 가르)는 만일 그것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15절).'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강한 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수락한다는 점을 명백히하고 동시에 그러한 태도에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게 되면'의 헬라어 '뤼페이타이'(* )는 '뤼페오'(* )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수동형으로서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서 양심의 괴로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또는 '어떤 일로 인하여 신앙의 압박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고민에 쌓인 것'을 뜻한다. 요컨대 상처받은 양심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마 14:9;17:23;막 10:22;요 16:20;Meyer, Godet, Hendriksen). 즉 믿음이 약한 자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 때문에 아직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의 신앙의 순결성과 성장에 손상을 입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바울은 자유의 구가(謳歌)가 보다 중요한 형제 사랑에 의해 절제되어야 할 것을 호소하면서 성도의 생활과 행동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벧전 4:8;요일 3:16;4:8).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의식적인 율법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강요함으로써 아직 깨달음과 행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형제를 근심케하고 영적으로 파멸(破滅)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임을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염두에 둔 것이다. (1) 한 형제의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한 형제임을 생각할 때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도 남는 것을 교훈한다. (2)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자유의 구가보다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희생(犧牲)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와 희생이 거절되어 자기의 판단대로만 행하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근심케 되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짓밟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모울(Moule)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주께서는 너의 상처받는 형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의 행동은 너의 강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상처받은 형제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본절은 강한 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에게 여러 손상(13, 15절)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교회내에 불협 화음을 일으킬 수 있기에 특별히 그러한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생길 때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한편 '평강'(* ,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그리고 '희락' 또는 '기쁨'(* ,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14:18

이로써(* , 엔 투토) -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곤란한 구절로서 여러 견해가 있으니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령 안에서를 의미한다(Hodge, Origen). (2)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리킨다(Meyer, Murray, Sanday and Headlam, Cranfield). (3) '이로써'를 가리키는 헬라어 본문 '엔 투토'는 '따라서', '이렇게 하여'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17절에서 표현한 진리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Barrett, Robertson). (4) '이 방법들로써'를 의미한다(Michel). (5) 바울은 오직 교회 안에 평화를 진작(振作)시키고저 하는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엔 투토'라는 단수를 사용했다(Gaugler). 여기서 (4)은 매우 약하고 (5)은 무리이며 (1)과 (3)은 문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2)보다 덜 자연스럽고 덜 만족스럽다. 따라서 우리는 (2)가 가장 개연성있고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문맥에 의해서 볼 때도 그러하고 또 다른 사본(the variant reading)에 '이로써'가 단수가 아닌 복수(* , 엔 투토이스, '이것들로써')로 쓰여졌다는 데서 더욱 확인된다. 이 복수는 분명히 필사자가 17절 하반절에서 말한 3가자 열매,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 디카이오쉬네 카이 에이레네 카이 카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복수로 쓴 듯하다(Cranfield).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경우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세 열매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았기 때문이다(Sanday and Headlam, Murray). 이는 갈 5:22, 23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도 '열매'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단수인 '카르포스'(* )가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별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가 성령안에서 맺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기쁜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Hendriksen).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맺어지는 어떠한 섬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서로 비방하는 자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한편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도키모스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는 말은 16절의 '비방을 받다'(* , 블라스페메이스도)와 대조적인 의미로 보아야 옳다(Cranfield). 즉,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람에게도 비방을 받지 않고 그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칭찬을 받는다'는 헬라어 '도키모스'는 사람에게 인정, 혹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유없이 미움을 받았고,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그러했으며, 바울 역시 그의 서신 딤후 3: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Calvin).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현상과 그 결과를 말한 것이다.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라 운'(* , '그러면', '그런즉')으로서 앞의 17, 18절을 받고 있는 접속사이다. 앞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본질을 명쾌히 제시하여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을 원리적 측면에서 선포한 바울은 이제 그 원리가 실제적인 교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힘쓰나니'의 헬라어 '디오코멘'(* )은 '급히 가다', '빨리 달려가다', '추구하다', '갈망하다'는 '디오코'(* )의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로서 현재 문제가 있는 교회 생활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애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 것이다. 바울이 힘쓸 것을 촉구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화평의 일은 힘쓰라. '화평의 일'(* , 타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교회의 화합(和合)을 도모하는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로서 초대 교회 설교의 관용구이다(딤후 2:22;히 12:14;벧전 3:11). 이는 시 34:14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Dunn). 사도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간의 조화를 위한 직접적인 적용으로 화평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촉구하는 '에이레네'(* , '화평')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덕(德)을 세우다'의 헬라어 '오이코도메스'(* )는 '집을 짓다', '건설하다', '굳게하다'라는 뜻인 '오이코도메오'(* )에서 나온 말로서 주로 '건축'에 관련해서 사용된 단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우다'라는 은유법은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예레미야가 이를 자주 사용하였다(렘 12:16;31:4;33:7;42:10;45:4). 그런데 이 비유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1) 그 자신의 사역에 대해 설명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고전 3:9, 10;고후 10:8;12:19;13:10). (2)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벽돌처럼 연결되어 함께 성전을 지어 올라가는,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권할 때 사용하였다(엡 2:19, 20;벧전 2:5). (3) 이 비유법의 가장 빈번한 용례는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에게 준 충고에서 나타난다. 즉,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덕을 세우라는 권고로 나타난다(Dunn). 예컨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바울이 사용한 핵심적인 단어 역시 '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고전 14:5, 12, 26, Harrison). 이를 종합하여 본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 덕을 세우라는 이 권고는 상호 대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결정지어 주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15:2;고전 8:1;10:23). 그리고 서로간에 상이(相異)한 은사들의 상대적 가치를 분별하고 인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전 14:3-5). 따라서 본 구절의 개념은 어떤 경건한 의식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모든 문제 속에서 실제로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세움을 입어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는 원리에 준하여 교회 안에서 화평, 즉 덕을 도모하라는 촉구이다(고전 9:19-22, Calvin). 왜냐하면 로마 교회에서의 긴장은 신앙의 견해 차이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에 있었기 때문이다.

=====14: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 '무너뜨리다'(* , 카탈뤼에)는 말은 바울이 앞절에서 사용한 '오이코도메오'(* , '집을 짓다', '덕을 세우다', '건설하다')의 반대말이다(마 5:17;24:2;26:61;27:40;고후 5:1;갈 2:18). 즉 바울은 비본질적인 음식물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사업(일)을 파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업'(* , 토 에르곤 투 데우)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1) 혹자는 하나님이 세우고 계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Sanday, Barrett, Kasemann). (2) 구원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Michel). (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연약한 형제, 즉 하나님이 갓 창조하기 시작한 사람 속에서 일으키는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Robertson, Murray). 여기서 (1)의 견해도 무난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에 비추어 볼 때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강한 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연약한 자가 근심케 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망케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며(15절) 나아가 하나님이 불러 구원하신 한 영혼이 장성(長成)하여 굳세게 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주된 목표이기 때문이다(Carnfield, Barmby).
만물이 다 정하되(* , 판타 멘 카다라) - 14절을 반복한 교훈으로 강한 사람들의 슬로건처럼 보이는 이 말을(막 7:19;행 10:15;고전 8:4-8) 바울은 머저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14절의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는 말처럼 한정적 의미의 뜻이다. 즉, 인간의 생각, 욕구, 행위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을 가리킨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바울은 만물이 다 깨끗함을 인정하였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음식물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지만 만일 음식물을 먹는 습관이나 마음의 자세가 어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라도 나쁘다는 것이다(Bruce).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으로 먹는'(* , 프로스콤마토스 에스디온티)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 (1) 약한 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압력을 받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Kasemann). (2) 형제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강한 자들의 무절제한 신앙 행위를 가리킨다(Calvin, Hodge). 우리는 여기서 원어의 의미상으로나 전후 문맥으로 보나 (1)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Chrysostom).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이 구절은 권위있는 선언으로서 역시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강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를 극히 선하고 훌륭한 것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여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악한 행위와 극히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름다우니라'는 구절이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맨 뒤에 있으므로 강조가 약화되었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맨 초두에서 '칼론 토'(* ..., '...하는 것이 아름다우니라')라는 구문을 취하여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를 생각하는 행위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전 7:1, 8, 26;히 13:9). '아름다우니라'의 헬라어 '칼론'(* )은 '선한', '보다 나은', '아주 고상한', '훌륭한', '뛰어난' 등의 뜻인 '칼로스'(* )의 목적격이다.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신앙의 내적 확신을 갖고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은 채소만을 먹는 약한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행동 반경을 넓게 할 수 있다. 즉 강한 그리스도인은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먹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약한 믿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형제를 위해 연약한 자가 거리끼는 고기를 먹는 일을 삼간다는 것을 확실히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약한 형제가 강한 형제의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고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강한 자들로부터 받는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결국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함을 말한 것이다. 즉 강한 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약한 자들을 마침내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이탈되게 하여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말한다(Calvin). 이것은 13절과 15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바울은 본절에서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 있을 때 자기가 가진 신앙의 확신과 내적 자유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동료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방해나 또는 파멸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면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확고한 내적 확인과 자유를 가지지 못한 자가 강한 자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신앙 인격의 순수성 및 고결성이 상처를 받고 그 영혼의 상태가 상심케 되며 혼돈케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런 내적 확신과 내적 자유의 외적인 표현은 기꺼이 절제(節制)하고 단념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를 안하는 것이 소극적인 자세라면 이에서 더 나아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맺어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17, 19절) 힘쓰는 것은 적극적 자세이다(Cranfield).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이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Robertson, Cranfield) 십중팔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Murray, Harrison, Calvin).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15, 20, 21절). 여기서 '네게 있는 믿음을'(* , 쉬 피스틴 헨 에케이스)이란 구절은 단순한 질술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 '는 질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Godet, Meyer, Calvin) 또는 '피스틴'(* , '믿음')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 '헨'(* , which)을 살려서 '너는 네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믿음'(* , 피스티스)이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된 '쉬'(* , '너', '당신', 여기서는 강한 자를 말함)가 가진 믿음으로서 구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Calvin, Murray, Cranfield).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카타 세아우톤 에케 에노피온)는 말은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에게 간직하고 있으라'는 말로서 '에코'(* , '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의 현재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隱密)한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한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Harrison). 즉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그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자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복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Cranfield). 이 선언은 앞 내용과 계속되는 것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Murray). 즉, 강한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계속 언급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여(15, 20, 21절)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내적 자유의 외적 표현을 삼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17절)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행위가(19절)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이 있도다'(* , 마카리오스)는 미래의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특히 평화로운 양심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Calvin, Murray, Godet).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의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분열이 없으며, 더욱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을 책(責)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의 조건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 )로 자신을 '시험하다', '검토하다', '분석하다'(* , 도키마조)의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고 '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 역 시 '정죄하다', '심판하다'(* , 크리노)의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呵責)이 없다면, 즉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Calvin, Godet).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이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교훈으로서 앞절(22절)에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Murray).강한 형제가 가진 그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定罪)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 )는 '주저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 )의 복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진리의 말씀에 의한 확신이 없어 갈팡 질팡하면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Calvin). 그리고 '정죄 되었나니'(* , 카타케크리타이)라는 말은 '심판하다', '정죄하다'의 뜻을 가진 '카타크리노'(* )의 완료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었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나님의 미래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자로서 이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Harrison).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이 구절은 앞의 내용이 왜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갈 2:11-14).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때 항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 , 피스티스)의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Godet). (2) 선한 양심같은 그 무엇을 뜻한다(Sanday and Headlam). (3)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도록 그와 관련된 내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확신, 즉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Cavlin, Murray). 위의 견해 중 세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1, 2, 22, 23절)과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3)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과 (2)의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Robertson). 그리고 '죄니라'(* , 하마르티아 에스틴)는 말에서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 )는 통상적인 용법과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마르티아'(* )가 본래적 의미로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을 뜻했다기보다는 개개의 죄악된 행위들을 염두에 둔 말로서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일, 즉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내적 확신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일일지라도 죄가됨을 의미한다(Cranfield). 이렇게 하여 바울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의 차원을 넘어 성도의 모든 생활의 근본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본장의 권면을 마친다.

[개역한글]
제13장
 
 
[그리스도인과 세상 권세]
1.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주님 오실 날이 가깝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1

각 사람 위에 있는 권세들 -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체로는 국가의 정치적 권세, 인간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의 권력(權力)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벧리우스(Dibelius)에 의해 제기되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장된 다른 견해도 있다. 쿨만에 의하면 본문의 '권세들'(* , 여수시아이)은 인간의 권세와 천사적 권세 모두를 가리킨다고 한다.
굴복하라 - 굴복(subjection)이라는 말은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보다 더 범위가 넓고 엄격한 관계를 표현해준다. 머레이(John Murray)는 이 굴복의 의미가 정부 관리들의 재판권과의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즉 독자들은 그들 각자가 정부 관리들의 재판권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그들의 권위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루스(Bruce)는 본문으로 부터 쿨만(Cullmann)의 견해 즉 '권세들'(* , 여수시아이)이 천사적 세력(특히 악한 천사)을 가리킨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브루스의 주장의 요지는 바울이 천사적인 세력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천사적 세력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창조주이자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골 1:16;2:10, 15).
권세는...모든 권세는 - 전자는 대표 단수형이고 후자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전자는 세상에 인간적 질서를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일반 원칙임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권력에 대해 굴복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한다. 모든 국가의 권력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적 배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라는 애굽의 왕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를 왕좌에 오르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이고 또한 바울이 취한 신앙이었다(9:17).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라는 안목으로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 그 자체의 정당성 보다는 모든 권력 위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하나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유대교 또는 유대주의와의 관계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싫어했고 그들로부터 자기들의 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을 소원했으며 더 나아가 반(反) 로마적인 행동도 불사했다(마 22:16, 17;막 12:14;눅 20:21, 22;요 8:33;행 5:36, 37). 이런 사정을 로마 권력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로마의 권력자들이 기독교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권력에 복종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불필요한 경계와 오해를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3:2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심판을 자취하리라 - 어떠한 권력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세의 목적과(3, 4) 범위 내에서만 복종을 요구할 수 있고 기독교인 역시 그러한 범위 안에서만 복종의 의무를 질 뿐, 정도를 벗어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충성마저도 권력이 요구할 때는 저항할 수 있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Bruce). 어떠한 개인이나 국가가 정권이나 권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하는 바와 상관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세를 오용(誤用)하거나 남용할 수도 있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판'은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료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가령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받게 될 궁극적인 심판을 뜻하는지 아니면 지상의 권력에 의한 형벌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런데 3, 4절에 나타난 관원에 대한 언급과 '두려움의 동기'는 후자의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일단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간에 사람이 지상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면 그에 상응하는 법적 제재 및 보복적인 조치가 뒤따르는 것이 상례이다. 실제 성도들 가운데는 바르지 않은 권력에 저항하여 목숨까지 잃은 경우도 많은데, 목숨을 잃은 것은 말하자면 권력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인간의 심판을 받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구약의 선지자적 정신의 구현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4:19;5:29)는 사도들의 신앙정신과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다가 당하는 숭고한 믿음의 결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를 거스려 '심판'을 자취하는 자는 정당한 신앙적 이유를 떠나서 권세자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이 세원 권위에 반항하여 불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3:3

관원들은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복수형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통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통치자들'로 표현되는 대상은 권력의 상충부 즉 최고 통지권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로마의 관리들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서 바울은 아마 자기가 겪었던 로마의 관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행 19:35-41;21:31-40;22:24-30;24:10).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 공동번역은 '악한 일', '선한 일'을 '악을 행하는 자',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본문의 '악한일...선한일'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편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1, 2절에 나오는 권세의 개념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권세는 선을 보장하고 악을 규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만약 어떤 권세가 이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선을 담보하거나 악을 제어하는 기능에서 이탈하여 애초의 전제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권세가 행사될 때 그 권세는 권세의 수여자(授與者)인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2절).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아마 이것은 바울의 경험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로마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에 의한 질서 유지가 여러차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네가...아니하려느냐 - 공동번역은 본문을 의문문으로 보지 않고 서술문으로 보아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의문문으로 표현한 개역성경의 번역이 바울이 강조한 바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 보여준다고 본다. 바울은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너'라는 2인칭 대표단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복수를 써서 표현하는 것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는 표현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수사적 표현이다. 사실 권력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대상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막강한 힘으로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타격을 주거나 제한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서의 '악'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악, 즉 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통치자들의 권한이, 궁극적인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허락된 권력과 그 권력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 즉 실정법(實定法)을 위반하는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선을 행하라...칭찬을 받으리라 - 본문에서 '그에게'는 물론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칭찬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여기에는 보상의 개념이 없으며 단지 인정을 받는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선을 행해야 하는 동기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상당히 현실적인 동기이다.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선을 이루는 자'라는 표현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심부름꾼'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권세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현상적 고찰에서부터 얻어진 결론일 뿐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 위에 모든 제도, 특히 통치 권력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천지 창조에서도 나타나듯 질서와 조직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 (2) 또한 그 질서와 조직을 통하여서만이 교회와 성도가 이 땅 위에서 보호받으며 원래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딤전 2:1, 2). 실로 모든 권위와 통치의 모체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러한 뜻을 이 땅위에서 실제로 구현시키기 위하여 파생적으로 그 권력의 일부를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자는 그 통치권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범위(category)내에 있을 때 그 권세의 신적인 기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을 월권할 때는 이미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단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의 악한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원(源) 권력이자 모법(母法)인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 마음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선지자적 경고를 부단히 해야 한다. 이러한 통치자와 성도간의 관계성은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엡 6:1)는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메시지와 일맥 상통한다.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 여기서는 '두려움'의 동기가 강조되고 있다. 본문에서 '공연히'는 '근거없이', '목적없이'의 뜻이다. 그리고 '칼'은 헬라어 '마카이라'(* )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로마의 단검을 가리키는 말로 시민을 사형시킬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칼'이 구체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힘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극형에 이르기까지 그 형벌을 부과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총체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합법적인 권세이며, 목적없이 임의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노하심 - 여기서의 '진노'는 헬라어 '오르게'(* )의 번역인데 이 말이 신적 진노 곧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세속적 진노 곧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진노'(* , 오르게)라는 말이 본서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1:18;4:15) 전자, 즉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Lenski, Morrison). 그러나 다른 학자는 3-5절의 문맥상 후자, 즉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본다(Kasemann).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지상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능, 즉 선을 도모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에 충실하다고 할 때 이 권세에 의한 진노는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통치자가 선을 금하는 법을 만들고 악을 도모한다고 할 때 그 법에 저항하다가 당하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문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자 그것의 대행자인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代行)하는 자로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 본연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계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칼'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3:5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 국가의 권세에 굴복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권세'가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권세자가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선을 장려하며 악을 징계한다는 대의 명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성도는 그 권한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노를 인하여만...양심을 인하여 - 본문의 '노를 인하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to avoid God's Wrath)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RSV). 권세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고, 국가 권력은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행 23:1;24:16;고후 1:12;4:2;딤전 1:5) 이 양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악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해서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양심을 따라 정당한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 결국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당위성(當爲性)을 갖는 것이라고 할진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도 권세에 굴복해야 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과 충성을 위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13:6

공세를 바치는 것 - 바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 즉 복종의 구체적인 예로 납세(納稅)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이미 로마 국가가 부과한 세금을 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납세를 거부하거나 납세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혹 로마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교도의 국가인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징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세금을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비록 이교 국가라 하더라도 로마 정부가 가진 권위를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세속적인 권력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바울의 납세관이 복음서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는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본다(Lenski).
하나님의 일군 - 본문의 '일군'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고이'(* )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본래 제정 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왕적 제사장직에서 온 말로 70인역에서는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코이네(Koine) 헬라어 개념에서는 일반적인 국가의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또한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문헌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고귀한 봉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15:16, 27;눅 1:23;행 13:2;고후 9:12 등). 대개의 학자들은 이 말이 4절의 '사자'(* , 디아코노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말이라고 본다(Murray, Bruce).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 여기서 '이 일'이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볼 경우 이는 관원들의 직무를 부분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원들이 오직 세금을 징수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직무를 가리킨다고 보는데(Lenski) 이렇게 보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관원들이 세금 징수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자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즉 통치자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임해준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며 그들의 직무가 갖는 이러한 성격을 잘 인식하고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한편 '항상 힘쓰느니라'는 말은 적어도 통치자들이 공공의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13:7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 '공세'(* , 포론)는 피정복민이 지배 국가에 바치는 '조공'(朝貢)을 의미하며 '국세'(* , 텔로스)는 국가에 내는 세금을 가리킨다. 6절에서는 독자들이 세금을 바쳐야 하는 근거와 세금을 부과하는 정당서을 묘사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마땅히 납세를 해야 할 것임을 언급한다. 만약 당시의 모든 성도들이 다 세금내는 일을 잘 준수하였다면 바울이 본절을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에 세금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들이 세상의 일상적인 질서, 현세의 정치 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Kasemann).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그들에게 현세의 질서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질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여기서 두려움과 존경은 실제적으로 권력 또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내면적인 태도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권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秩序)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정당한 두려움과 존경을 품어야 한다.

=====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이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다 이루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켄'(* )은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사랑하는 순간 율법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마 5:7).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 바울은 율법의 예로 십계명을 들고 있다(6, 7, 8, 10계명).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인 십계명의 조항을 들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를 말해 주려고 한다. 인용에 있어서 부모 공경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조항은 생략했는데, 이는 바울이 자신의 논리 전개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Calvin). 즉 바울은 사랑과 관련하여 이웃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항목들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항에 해당되는 율법 조항을 들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는 '...을 하지 말라'하는 금령(禁令)이 '사랑'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규범으로 대치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바울은 레 19:18을 예증 문구로 인용하면서 사랑의 결정적인 가치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핵심이고 완성임을 명백히 보여준다(막 12:31;갈 5:14;약 2:8).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본문은 사랑의 소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도 강조되어야 한다. 사랑은 능동적인 것이고 따라서 모종의 행동을 필연적으로 유발시키지만 그것이 결코 이웃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완성'(* , 플레로마)은 '충만'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8절의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와의 조화를 생각할 때 전자의 번역이 더 분명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본다. 그러나 사랑으로 율법이 충만해진다고 하는 것도 의미있는 것이다.

=====13:11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 , 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시간'(* , 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 , '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마 24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이 - 본문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으로부터의 탈피 또는 점진적인 구원의 과정에 참여함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주의 강림 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의 정점(定點)이 더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믿을 때보다 - 믿기 시작했을 때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으나 혹자는 이것을 세례와 관련시켜 세례받은 때로 보기도한다(Kasemann).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믿음을 갖는 것과 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처음 믿을 때'를 세례받을 때로 보아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가까왔음이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귀테론'(* )은 비교급으로 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역사가 종말과 우주적인 구원을 목표로 하고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루어진다.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 '깊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콰센'(* )은 '진전되었다', '많이 지났다'의 의미를 갖는 '프로코프토'(* )의 부정 과거 시제로서 '밤이 많이 지났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이미 밤이 지났다'는 의미가 더욱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낮이 '가까왔으니'(* , 엥기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선포를 한 시점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 , 엥기켄)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밤'이 현세상이라면 '낮'은 구원이 있는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신천 신지(新天新地)가 가까왔음을 말해주는데 이 종말의 가까움에 관한 바울의 표현에 대해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날'이 임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1)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를 인간들이 계산하는 연대기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언적 전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2)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감옷을 입자"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현재적 경건의 삶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참빛이 왔기 때문에 낮의 세력이 성도들에게 임하였으나 실제로는 밤이다. 즉 성도들은 여전히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눅 16:8). 따라서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죄의 세력에 대한 전투적인 삶이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 - 바울은 낮과 밤에 다른 옷을 입는 것에 착안하여 지금 벗어버려야 할 것과 새로 입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어두움으로 상징되는 죄악 곧 사단의 일과 빛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일의 대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두움을 악한 세력으로, 빛을 선한 세력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당시에 일반화된 관행이었으므로 독자들은 이것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쿰란 문서에 의하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인다. 한 부류는 어두움의 사자에 의해 지배를 받고 다른 한 부류는 빛의 왕자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그러다가 말세에는 이들 두 세력이 큰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빛의 아들들과 어두움의 아들들의 전쟁'이라고 한다(Vermes). 바울은 전쟁용사의 무장(武裝)에 대해서 엡 6:13-17에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본 구절의 '갑옷'도 성도의 전투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성도들은 비록 어두움의 세상과 접하며 살지만, 성도의 실체는 낮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싸움이 수반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하지만 성도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것이므로 주의 강림으로 드러날 영광과 변화될 삶을 기대하며 살아간다(고후 3:18;4:14).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시기하지 말며 - '낮에와 같이'라는 표현은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성도들이 실제로 낮에 살고 있다고 여기고 생활하라는 것이다.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가 나열되고 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단정히 행하는 것과 상반된다. 이러한 무절제한 성적인 방탕과 시기로 인한 싸움은 죄된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러한 속성을 이겨내지 못하면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한편 바울이 본서를 쓰고 있던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분위기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Harrison).

=====13: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 본 구절은 신자의 전신 갑주(엡 6:13-17)를 요약적으로 명제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칼빈(Calvin)은 본문을 가리켜 '영의 권능으로 강하여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모든 성결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옷 입는다는 말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한 바 됨을 의미한다(6:1-10).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요"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육신의 일 자체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추구하기 위해 몸을 내어두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육신에 관한한 모든 것이 악하다고 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 다만 그것이 정욕을 충족시키려는 것으로 움직여질 때 죄악이 되는 것이다.

[개역한글]
제12장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새로운 생활]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사랑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
14.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1

그러므로 - 이는 본장에서부터 전장들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 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권면으로 이끌기 위해 자연스럽게 꺼내어진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유기(遺棄)와 장래의 구원에 관한 기록인 9-11장을 받는 것이 확실하지만, 넓게는 자비하신 하나님에 관계된 진술 전체 즉 1-11장에 이르는 교리적 내용을 이어받는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Godet, Cranfield, Murray, Harrison).
형제들아 - 이는 수신자(受信者)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 어린 표현이다. 이 단어를 수신자에게 적용시킬 때마다 사도는 깊이 감동되어 있음을 주목하라(1:13;7:1;8:12;10:1).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 이는 바울의 권고의 근거가 되는 문구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얼마나 덧입고 사는 가를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없다. '모든 자비하심'에 해당되는 헬라어 '오이크티르몬'(* )은 '자비'(고후 1:3;빌 2:1;골 3:12) 혹은 '불쌍히 여김'(히 10:28)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복수형태이다. 이는 '큰 자비'나 '동정'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라하밈'(* , 삼하 24:14;대상 21:13;시 25:6)이라는 복수 형태를 따른 것이다. 이는 복수를 취하여 강조하는 '강의(强意)의 복수'이다. 따라서 '모든 자비하심'으로 번역되었다.
권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 )는 쓰임이 다양하나 여기에서는 명령과 간청의 양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간절히 원하다', '청하다'(beseech,RV) 또는 '애원하다'(implore, NEB)로 번역한 것은 사도 바울이 사도적 권위로 권했다는 것을 배제한 일방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단어는 본절의 성격을 지시하면서 나머지 다섯 장(12-16장)의 성격도 권면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너희 몸을 - 이 문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6:11-13의 문맥에 비추어서 단어 자체가 가진 단순한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고전 6:20;고후 5:10). 혹자는 '몸'에 대해 말하길,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존재라 했고(Kasemann), 또한 혹자는 삶의 구체적인 실재(realities) 속에 있는 개인적 제사의 체현(體現, physical embodiment)이라 하였다(Seiden Sticker). 또한 2절의 '마음'(* , 노오스)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Olshausen, Maier, Moule). 그러나 여기서의 몸은 몸과 마음, 즉 온 인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바람직하다(Calvin, Beza, Shedd).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 자신'(yourselves)을 뜻하며, 우리의 인격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삶의 양태까지 포함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우리의 몸을,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이란 말은 흠이 없이 순전(純全)하다는 의미이다(엡 1:4;빌 2:15;골 1:22). 그러므로 거룩한 제사란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6:16, 17;엡 2:1, 5)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그가 주신 새 생명으로 그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6:4-7, 13, 14, 22;갈 2:20). '산 제사'의 '산'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산'(* )은 현재 분사로 '지금 살아있는'이란 뜻을 포함한다. 이 말은 구약적인 제사, 즉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써 드리는 제사와 대조된다. 또한 당시에 이교 사회(異敎社會)에서 성행했던, 몸을 부정(不淨)한 일에 악용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산 제사'는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처럼 다른 존재로써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며 또한 지역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제사로서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자체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다(약 2:22).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이 부분은 앞에 나온 권면을 설명하고 확증(確證)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영적 예배'의 '영적'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형용사 '로기켄'(* )인데 '로기코스'(* )에서 유래되어 '합당한'(reasonable, KJV), '합리적인'(rational)의 뜻을 가졌다. '영적'(spirtual, NIV)인 것을 확실히 표현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켄'(* )을 사용하지 않고 '로기켄'을 사용한 것은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동들을 염두에 두었거나(Calvin), 하나님이 요청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 즉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를 강하게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이를 '합당한'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따라서 이를 이스라엘 성전 예배의 외형적 의식과 대조하여 '영적' 예배라고 번역하는 것도 좋은 번역이다(Hendriksen, Bruce, ARV, RSV, NIV). '예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트레이아'(* )는 구약의 제사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본절에서는 단순히 제사 행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삶으로서의 예배를 의미한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주께 두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이를 '섬김'(service)으로 번역한 번역본도 있다(KJV).

=====12:2

이 세대 - '세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온'(* )은 '세계', '세상'을 의미하는 '코스모스'(* )와 비슷한 의미를 가졌는데, 일반적으로 '코스모스'가 공간적이고 현상적인 세상을 의미하는데 반해 '아이온'은 시간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 세대'(* , 아이온 후토스)란 용어는 바울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용했다(고전 1:20;2:6, 8;3:18, 19;5:10;7:31;고후 4:4;갈 1:4). 유대교 종말론에서는 시간을 '현 세대'(present age)와 '올 세대'(age to come)로 구분하는데 바울도 이와 같이 종말을 기점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사용하였고 바울이 사용한 '이 세대'라는 말 속에는 대부분 이러한 유대교적 종말론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세대'가 시대 구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 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악한 세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적대 세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 가치 기준 등 시대 정신도 포괄한다.
본받지 말고 - '본받다'의 헬라어 '쉬스케마티조'(* )는 '스케마'(* , '품행', '행동', '외형', '모양')에서 파생된 것으로 고전 7:31에 나오는 '이 세상의 형적'의 형적(形跡)에 해당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표면적이고 흘러가는 이 세상 풍습을 받아들이거나 순응하지 말라(Sanday, Headlam)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이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가 새롭게 계속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아나카이노세이 투 노오스'(* )는 '마음의 새로움으로써'라고 번역할 수 있다(표준 신약 전서) 여기서 '마음'이란 도덕적 활동과 관련된 이해력이나 사고력 등을 말한다(Barmby). '변화를 받아'의 헬라어 '메타모르푸스데'(* )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이다. 곧 이 말은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에 의해서 변화하며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꼭 그렇게 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즉 우리의 인격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세력인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계속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
선하시고 - 헬라어 '아가도스'(* )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특별하게 주신 말씀을 기준으로 규정되는 '선'이라기 보다는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2:10;7:12, 13, 18, 19). 그러므로, 이 '선'의 개념을 교회 안에서(9절), 사회 속에서(21절) 그리고 국가에 대한 관계 속에서(13:3ff.) 사용하였다. 다만 본절에서 바울은 '선'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
기뻐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이 이뤄지거나, 그의 뜻과 일치될 때 기뻐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뜻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뜻에 합당하게 생을 영위하거나, 피조 세계가 원래 목적대로 진행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온전하신 - 인간의 뜻은 타락한 욕심이 작용하기에 그 어떤 뜻도 온전할 수 없다. 하지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뛰어난 특성은 그 자체가 온전한 것이다. 신앙과 행위의 충분한 규범으로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이다(딤후 3:16, 17). 이는 그 뜻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 온전한 분이기 때문이다(마 5:48).
분별하도록 하라 - '분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도키마조'(* )는 '입증하다', '시험하다', '인정하다'라는 뜻을 가졌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말은 판단하거나 시험한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한다는 것이다(Murray).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야한다(엡 5:8-10;빌 2:12).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데이세스'(* )는 수동태 과거 분사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이미 받았음을 의미한다. '은혜'는 바울의 사도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지는데(Stuart, Meyer, Barmby, Godet, Lenski, Bruce), 더 나아가서 사도 직분 외에 그가 받은 모든 은혜와 은사를 포함한다고도 한다(Hodge). 사도직을 은혜와 관련시키는 이유는 자신의 만용이 아닌 소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1:5;고전 15:9, 10;갈 1:1). '내게 주신 은혜'라는 말은 바울이 자주 사용하곤 했는데(15:15, 고전 3:10, 갈 2:9 등) 위임받은 은혜의 역동성을 표현한다(Dunn).
너희 중 각 사람에게 - 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표현은 '판티 토 온티 엔 휘민'(* )인데 이는 '너희 모든'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헬라어 표현 '파신 휘민'(* )에 비해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이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로마교인들뿐 아니라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나 직분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Liddon, Meyer).
말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고'(* )는 1절에 나오는 '내가 권하노니'라는 표현보다 더욱 권위적이다. 이는 명령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로써 권위를 상기시켜 경고하는 말투이다(마 3:9;눅 3:8;13:3, 5;갈 1:9;5:2).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 본절 중 이부분 이하에서 사용된 헬라어 기본 동사는 '프로네오'(* , '생각하다')인데 문장 중에서 '휘페르프로네인'-'프로네인'-'프로네인'-'소프로네인'(* - - - )의 구조로 사용되었다. 이는 헬라 문학에서 종종 나타나는 문학적 기교이다. '생각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네인'은 '의견을 가지고 생각하다'의 뜻으로 어떤 사실에 대한 평가나 견해를 말할 때 쓰인다(LST. BGD). 신약성경에서는 거의 바울 서신에만 나타나며(16절;8:5;11:20;14:6). 특히 '높은 마음을 품다'의 헬라어 '휴셀라 프로네인'(* )이 쓰인 문장에서 나온다(16절;11:20). '마땅히 생각할 바를 생각한다'함은 '자기 자신의 처지나 조건에 맞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 이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파라'(* )는 필요한 것 '이상'을 나타내며 '휘페르프로네인'과 같이 쓰여 '휘페르'(* , '위에')를 강조한다(BGD).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휘페르프로네오'(* )는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다', '부풀은 생각을 하다',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다'(BGD)라는 뜻을 가졌다. 칼빈(Calvin)은 '휘페르프로네오'를 '지혜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휘페르프로네인 파라'(* )는 그 뜻을 밝혀 번역하자면 '그 이상의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품지 말고 생각의 한계를 가지라'는 것이 된다. 여기서 분에 넘치는 생각이란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설명하는 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을 뛰어넘는 생각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자신의 능력과 소명(召命)으로 감당(堪當)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 )는 '...을 하지 말고, 오직...을 하라'는 표현에 나오는 강조어로서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과 '지혜롭게 생각함'을 대조한 것이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카스토 호스 호 데오스 에메리센'(* )은 '각 사람에게'를 나타내는 '헤카스토'가 앞에 나와서 도치된 강조 형태이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것은 모든 산자들에게 빠짐없이 주신 것을 말하며 각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는 뜻이다.
믿음의 분량 - 이 표현은 믿음이 물질처럼 측정되는 양적인 것이라기보다 교회안에는 다양한 기능들이 있어 각자 주어진 직분과 은사의 한계와 특성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고전 12:4-31). 그리고 '믿음'이란 그 안에서 훈련되어진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Murray).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것으로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이다. 혹자는 본문에 나온 '믿음'을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말하기도 한다(Stuart, Meyer, Godet, Shedd). 그러나 머레이(Murray)나 해리슨(Harrison)등이 주장한 바 본문의 '믿음'은 구원의 수단인 진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닌,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의 성격을 알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브루스(Bruce)는 이를 '영적 능력'이라고 했다.
지혜롭게 생각하라 - '지혜롭게'의 헬라어 '소프로네인'(* )은 '건전하며 겸손하게'의 뜻이다. 혹자는 '지혜'를 '자신을 바르게 보는 것'으로 이해했는데(Dodd) 헬라 철학에서 지혜를 나타내는 단어인 '소프로쉬네'(* )는 '겸손'(謙遜)과 '자제'(自制)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분에 넘치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건전하고 겸손한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와 관계되어 사용된 말로서 지혜롭게 생각할 그 기준으로서 '믿음의 분량'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었다는 것은 각자의 직분과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며 동시에 자신이 받지 아니한 직분의 영역은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제한을 의식하고 그가 교회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에 관한 그의 열망을 규제해야 한다(Godet).

=====12:4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 저자는 이제 믿음의 분량에 따른 각 신자의 직분의 한계에 관해 신자들의 소명과 관련시켜 말하려고 한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나 고대에서 인체의 비유는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서 바울 서신에 종종 나온다(고전 12:12;엡 1:22;4:16). 모든 지체는 곧 많은 지체이다. '같은 직분'의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랖시스'(* )는 '행함', '활동', '기능' 등의 뜻을 나타낸다(BGD). 이 단어는 마 16:27에서는 '행함'으로 나온다. '직분을 갖다'라는 말은 6절에 나오는 '은사를 받다'라는 표현과 같다. 모든 지체는 특별한 기능들과 다양한 능력들을 지녔다. 곧 3절에 나오는 바, 각 사람들의 받은 바 '분량'들이 모두 다른것이다(엡 4:7). 이는 자신에게 할당된 기능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며 한 몸에 있는 많은 지체들의 독특성을 인정하게 하는 문구이다.

=====12:5

이와 같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이리하여', '이런 식으로'를 의미하는데 4절에 나오는 '카다페르'(* )와 함께 '이와 같이'의 뜻을 나타낸다. 앞절에서 예를 든 것처럼 인간의 유기적 조직(有機的 組織)을 통해 신자 각 사람에게 할당된 기능의 필요성과 한계를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 '한 몸'이라는 표현은 통일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룬다(고전 12:27ff.).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헬라어 '호이 폴로이'(* )는 셈어투(Semitism)의 형태로 3절에 나오는 '너희 중 각 사람'과 같은 의미이다. '한 몸'이란 인간의 혈통으로나 사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연합의 기반을 이루시고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그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2:21).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된 그의 몸된 유기체는 오직 교회이다(Godet).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데 칼 헤이스 알렐론 멜레'(* )에서 '칼헤이스'(주격)는 부사로 사용되어 '개인적으로', '하나씩', '각각'으로 해석된다(BDF, BGD). 이런 표현은 막 14:19;요 8:9;고전 14:31;엡 5:33에 나오는 것으로서 각각의 성도가 교회 전체와 서로 관계를 가지므로 각 지체는 다른 모든 지체들에게 속한다는 뜻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특히 교회론(ecclesiology)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본문으로 보기도 한다(Dunn). 즉,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없는 연합을 생각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Shedd).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 이제 앞서 말했던 것을(3-5절)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봉사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적용시킨다(6-8절). 즉 각 지체의 기능에 관해 말한다. 본 구절은 은사의 근거가 되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의 받은 바 은사에 대해 자만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은혜대로'(* , 카타 텐카린)를 문자대로 번역하면 '은혜에 따라'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시는 원리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에 따라 은사들이 주어지는 것은 각각 다른 기능과 직분을 유기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이다(고전 12:7). 은사에 따른 직임과 기능에 관해서는 고전 12장 주제 강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비교'를 참조하라.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테스'(* )는 '가지고 있는', '소유하고 있는'이라는 뜻으로 은혜로 받은 것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은사'는 그 은혜가 구체적으로 몸의 지체들에게 반영되어 실제 행함으로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난다. '각각 다르니' 즉 '은사가 다르다'는 것은 5절에 나오는 '서로 지체'라는 말을 더 자연스럽게 이끈다. 신자들이 각각의 은사들을 받은 것은 이 은사들이 개별적으로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되기 위해서 이다. 교회에서의 특별한 직분(職分)이나 기능들은 서열(序列)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은사의 다양함과 그에 따른 능력들을 나타낸다.
혹 예언이면 - 예언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로페테이안'(* )의 동사 '프로페튜오'(* )는 '예언하다', '미리 말하다'의 뜻을 가졌다. '예언'은 주로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기관이었고 계시의 내용은 여호와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출 4:12;7:1, 2;렘 23:16, 18, 22, 28). 한편 성경의 기록이 끝난 시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에게서 완성되었으며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완성된 이후에는 새로운 계시를 위한 예언자도 필요없게 되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예언은 경고와 권면, 교훈과 판단, 그 마음의 비밀을 나타내며(고전 14:3, 24, 25), 영감을 받아 하는 것으로 나온다(벧후 1:21). 이 기능을 가진자 중에는 여자도 있다(행 21:9). 예언을 시험하거나 고려해 봐야 할 때에는(고전 14:29)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와 그 척도를 두어야하며 이에서 벗어나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 계시 이상의 예언은 없다. 즉 여기서의 예언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설교나 말씀 선포등과 연관되는 직분으로 본다. 이 예언하는 직분이 다른 곳에서도 사도직에 이어 곧바로 나오는 이유는 (고전 12:29ff. 엡 4:11) 이런 중요성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나 선지자들이 교회에서 우선권을 갖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외의 은사들은 그 중요도에 있어서 특별하게 우선권을 갖지는 않았다(Ladd).
믿음의 분수대로 - '분수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 텐 아날로기안'(* )인데 '아날로기아'(* )는 수학 용어로 '바른 관계' 혹은 '조화, 비례'(proportion)라는 뜻을 가졌다. 따라서 '칼 아날로기안'은 '적당하게', '...에 비례하여'라는 의미가 있다(Dunn).

=====12:7

혹 섬기는 일이면 - '섬기는 일'은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한 가지로 정하기는 어렵다. 이의 헬라어 '디아코니아'(* )는 종종 비신자에게 말씀을 전하는 직분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행 6:4). 그러나 본 구절의 '섬기는 일'은 그 행사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필요한 '집사의 직분'(엡 4:12 이외에는 '디아코니아'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의미 심장함)에 제한된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은사(섬기는 일)가 예언과 가르침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섬기는 일'이란 신자의 물질적 요구를 관장하는 보다 좁은 의미의 봉사를 뜻하는 것 같다. 영역 성경 NEB와 JB는 그 낱말을 '관리'(administration)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궁핍한 자를 돕는 일이 감독, 특히 집사의 직분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Gidet, Meyer, Hendriksen, Cranfield). 물론 다른 사람들도 성도의 곤경을 도와 줄 수 있는 여러 직분에 종사할 수 있었다(고전 16:15).
섬기는 일로 - 이는 '믿음의 분수대로'의 원리에 적용하여 실제적으로 섬김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마음을 다하여 그 직분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다(벧전 4:11). 혹은 바른 섬김을 하며 전적으로 그것에 종사하거나(Gifford) 실제로 섬김을 실행하는 것(Cranfield)을 가리킨다.
가르치는 자 - 이에 예언하는 것과 구별되며 섬기는 것과도 다르다. 예언은 계시와 관계되어 있는 반면에 가르침은 말씀을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이해 시키는 과정을 의미하며 지혜와 지식의 말씀으로써(고전 12:8;14:6) 하나님의 계획을 세밀하게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를 형성케 하고 훈계를 통해(15:4;딤전 4:13;딤후 3:16) 신자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가르침이다. 본서의 구조 자체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즉 진리의 해석인 교리 교육을 기초로 하여(1-11장)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을(12-16장)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상당히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초대 교회 교사들이 '가르치는 일'을 함에 있어서 구약성경에 크게 의존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Harrison).
가르치는 일로 -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섬길 것을 의미하여 아울러 6절에서 제시한대로 자기 '믿음의 분수(분량)대로'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원리를 다시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사사로이 풀거나 억지로 해석하지 말며 성령의 도움을 받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벧후 1:20, 21;3:16).

=====12:8

권위(權慰)하는 자 - '권위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오'(* )는 '권면하다'(고전 4:16;16:12;고후 10:1;12:18), '요청하다', '위로하다'(고후 1:4;7:6, 7;살전 3:7)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과 명백하게 다른 말로서 문맥을 살펴볼 때 형제를 위로하고 권면한다는 뜻이 지배적이다(행 15:31;딤전 4:13). '가르치는 자'는 복음 진리를 선포하는 반면 '권위하는 자'는 진리를 들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 속에서 복음에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마음과 의지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Godet).
권위하는 일로 - 권위하는 자는 권위 받을 일을 당한 자의 상황을 지혜롭게 파악하고 권위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해야 한다(엡 6:6)
구제하는 자 - 구제에 대해서는 (1) 자신의 소유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재물을 공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라고도 하며(Lenski, Calvin), 공적인 재산이 아닌 개인의 재산을 나눠주는 것이라고도 한다(Murray, Shedd, Godet).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형식을 취해 구제를 하느냐를 따지지 않고 다만 구제의 원리를 따라, 즉 성실함으로 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개인적 구제(눅 3:11;엡 4:28)와 공적인 구제를(행 6:2) 다같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실함으로 - '성실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티'(* )는 '단순함', '순전함', '섞이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Dunn). 따라서 '성실함'은 감추어진 목적이나 뜻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말하며(행 5:2) 동시에 관대한 마음으로 후히 주는 것을 일컫는다(고후 8:2;9:11, 13). 새번역, 공동번역, 표준신약전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후하게'로 번역했다. 또한 영역 성경 흠정역은 '순수함으로', RSV, NASB는 '관대하게', NEB는 '마음을 다해'로 번역했다.
다스리는 자 - '다스리는'의 헬라어 '프로이스테미'(* )는 '선두에 서다', '통치하다', '지도하다'의 뜻이 있다. 이는 성경에서 주로 교회에서 다스리는 것과(살전 5:12;딤전 5:17) 가정에서 다스리는 것을 나타낼 때(딤전 3:4, 5, 12) 사용된 어휘이다. 그래서 혹자는 '다스리는 자'를 '감독과 장로'로 보기도 하며(Calvin, Gifford, Murray, Lenski) 혹자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로 보기도 한다(Godet, Barmby). 여기서는 문맥을 볼 때 교회에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통솔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에 대한 표현이다(Harrison).
부지런함으로 -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헬라어 '스푸데'(* )는 '부지런함'(12:11), '간절함'(고후 7:11, 12;8:7, 8, 16) '급히', '빨리'(마 6:25;눅 1:39)등으로 번역되었고, 대체로 '종교적인 열심'을 뜻한다(BGD). '다스리는 자'는 맡겨진 일에 열의를 가지고 세월을 아끼며 충성해야 한다(고전 4:2;엡 5:15-17). 바울은 부지런함을 잘 실행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주신 직분을 확신하여 열심을 품고 복음을 전파했으며 충성을 다했다. 사도가 여기서 '다스리는 자'의 은사를 받은 자에게 '부지런함으로'라는 단서를 첨가한 것은 다스리는 직무를 봉사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내세우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근면에게 직무 수행에 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행 29:17-24;딤전 1:12).
긍휼을 베푸는 자 - '긍휼을 베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오'(* )가 인간이 베푼 자비를 나타낸 경우는 바울 서신 중 본문에만 유일하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킨다(9:15, 16, 18;11:30-32;고전 7:25;고후 4:1;빌 2:27;딤전 1:13, 16). 본절의 '긍휼'은 일반적 의미의 '긍휼'이다. 즉 병든 자와 환난 중에 있는 자, 무력한 자,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 단락이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그 은사의 바른 사용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는 일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으로 - 고통받는 곳에 도움을 주며 즐거워 하라는 것이다. 어두운 곳에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그들은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궂은 일이란 마지 못하여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세로 직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으로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한 몸인 것을 강하게 부각시킨 말이다.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남을 섬길 때 취해야 할 마음 자세와 그 태도를 말한 것이다.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 이를 표현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뉘포크리토스'(* )는 명사 문장으로 동사 '에이미'(* , 'be')가 있는 것처럼 번역해야 한다. '사랑'의 헬라어 표현인 '아가페'(* )는 본서를 제외한 바울 서신 전체에서는 주로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데(Ridderbos) 사용된 반면 본서에서는 주로 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5:5, 8;8:35, 39;15:30;단 8:28은 예외;Cranfield, Dunn). 그러므로 '아가페'는 10절에 나오는 '형제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필라델피아'(* )보다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인 것이 확실하다. '거짓이 없나니'를 표현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스'(* )는 '위선없이'를 나타내며 '진실한', '성실한'의 뜻을 가졌다(고후 6:6;벧전 1:22). 사랑은 꾸밈 없이 진실해야 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영역 성경 흠정역과 NASB에 각각 '숨김없이'(without dissimulatin), '위선없이'(without hypocricy)로 번역한 것은 헬라어 원어에 가까운 표현이며 RSV나 NIV에서 각각 '진심에서 우러난'(genuine) '성실한'(sincere)으로 번역한 것은 문맥의 뜻을 밝혀 의역한 것이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미워하다'의 헬라어 '아포스튀게오'(* )는 '몹시 미워하다', '혐오하다'의 뜻이 있다. '악'(* , 포네로스)은 '나쁜'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코스'(* )보다 더 강한 의미로 '악한', '사악한'의 뜻이 있다. '속하다'의 헬라어 '콜라오'(* )는 '함께 하다', '연합하다'의 뜻을 가졌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에 연합하라는 가벼운 명령 혹은 권고이다. 이는 결정이 요구되는 삶의 길목길목에서 확실하게 선을 택하는 생활 원리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 속하기 위해 악은 그 모양이라도 미워하고 버리는 태도가 필요하다(살전 5:22).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 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테 필라델피아...필로스토르고이'(* ... )의 '필-'(* -)로 시작되는 두 단어는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쓰인다. 즉 '형제를 사랑하여'를 가리키는 '필라델피아'는 형제 자매간의 사랑을 나타내며 '우애하고'를 가리키는 '필로스톨고이'는 혈육(血肉)간에 주고 받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Dunn).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아델포스'(* , '형제')는 교회 생활에서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단어이다. '필로스톨고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지만 본서가 기록 될 당시의 헬라 문헌에 자주 나오며 특히 가족간의 '지극한 애정'을 나타낼 때 사용됐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로 이뤄진 가족으로 그 공동체 안에서 가족간에 느끼는 지극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마 12:46-50;갈 4:5;엡 3:17). 사도 바울은 사랑이 단순한 이념으로 간주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이제 사랑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지침)을 언급한 것이다. 즉, 사랑은 이론으로만 베풀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도는 그 사랑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성도들간의 관계에서 표현되기를 요구한 것이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이는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높이 평가해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도들이 서로 먼저 존경할 수 있는 이유는 상대방의 개인적 인격이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크신 구속의 은혜를 입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데 있다. 그리하여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아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생각할 때 그 형제의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진실하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러러 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고후 5:17)되게 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 베풂에 근거를 둔 권면인 것이다(빌 2:13).

=====12:11

부지런하여 -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근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 생활의 나태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보통 성도들은 처음 믿을 때에는 매우 열심이다가도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게 되면 주를 향한 처음 사랑을 잃고 영적인 타성에 빠져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계 2:4;3:15). 자세한 주석은 8절을 참조하라.
게으르지 말고 - '게으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크네로이'(* )인데 이는 근심이나 걱정 또는 부끄러움으로 늑장부리는 것을 의미한다(잠 6:6, 9:21:25;마 25:26). 진정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삶은 게으르거나 나태할 여유가 없다.
열심을 품고 - 이 구문의 헬라어 표현은 '토프뉴마티 제온테스'(* )이다. 개역 성경에는 '영'(* , 토 프뉴마티)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프뉴마'를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할 것인지(Calvin, Deodoret, Dunn, Hendriksen) 아니면 '인간의 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로(Meyer, Murray, Philipi, Kasemann) 나뉘어진다. 이 말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문의 의미는 '성령과 함께 하는 열심을 품고' 혹은 '열심을 품고 성령으로 인하여'가 될 것이며 '인간의 영'으로 한다면 '열심을 품은 마음으로'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전자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토 프뉴마티'(* )가 '열심을 품고'와 연결되어 있는 바 주를 섬기기 위한 열심은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를 섬기라 - 주를 표현하는 헬라어는 '퀴리오'(* )인데 이는 * , A, B, P46 사본 등을 따른 것이다. 보다 덜 중요한 사본으로 간주되는 D*, G 사본 등에는 '시간에'를 나타내는 헬라어 '카이로'(*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기록 당시의 상황의 급박성을 나타내어서 '시간을 아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본의 우위성과 문맥상, 전자가 많은 지지를 얻는다. 한편 '주를 섬기라'는 헬라어 표현은 '토 퀴리오'(* )로 3격으로 표현되어 '주께' 섬김을 다하라의 의미가 된다. '섬기다'의 헬라어 표현은 '둘류온테스'(* )로 '종노릇하다', '섬기며 충성하다', '종되다'의 뜻을 나타낸다. 신자들은 주인의 종으로서 충성을 다해 주인을 섬겨야 함을 의미한다.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 '소망'의 헬라어 표현 '엘피스'(* )는 일시적으로 더 좋은 것을 바라는 헬라적인 개념보다는 '확실한 소망'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개념이다. 이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것이 분명하다. '소망 중에'는 '종말론적 보류'(eschatological reserve)를, '즐거워하며'는 '종말론적 설레임'(eschatological excitement)을 나타낸다(Dunn). 죄의 형벌 아래에서 인간은 참된 소망도 즐거움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망만이 참된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근거이며 근본이 되시므로 영원한 즐거움을 주시는 자이시다.
환난 중에 - 환난은 모든 인간이 당하지만 특히 신자에게는 복음으로 인한 환난이 있다.
참으며 - 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휘포메노'(* )는 초기 기독교 문헌에는 '참다', '끝까지 견디다', '굽히지 않다'의 뜻으로 나타난다(고전 13:7;딤후 2:10;히 10:32;약 1:12). 이는 단순한 인내를 의미하기 보다는 소망을 바라보고 참는다는 의미로서 종말에 취할 것에 대한 선취(先取)를 근거로 참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소망과 그 선취로 인한 확신으로 성도는 끝까지 견디는 힘을 공급받는다(히 7:19).
기도에 항상 힘쓰며 - '항상 힘쓰며'의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룬테스'(* )는 '전심 전력하다', '헌신하다', '견디다'의 뜻이 있다(Dunn). 이 단어는 기도를 언급할 때 주로 쓰인다(행 1:14;2:42;골 4:2).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하나님과 기도로 그 긴장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본 구절에서 현재 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기도에 힘쓰는 것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 성도들은 로마에 있거나 예루살렘에 있거나(15:25)를 막론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자들을 일컫는다. '쓸 것'에 해당되는 헬라어 '크레이아이스'(* )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사본, 비잔틴(Byzantine) 사본 등을 따른 본문이며 어떤 사본들은(D, F, G) '크레이아이스' 대신 '기억', '기념'의 뜻을 가진 '므네이아이스'(* )로 나오는데, 고대 라틴 사본들이 이를 지지한다.
공급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이노네오'(* )의 현재 분사형인 '코이노눈테스'(* )이다. '코이노네오'는 물질적이며 재정적인 도움의 의미를 띤 '주다', '몫을 기부하다'(15:27;빌 4:15), 또는 '참예하다'(빌 4:14;벧전 4:13), '함께 하다'(갈 6:6)의 뜻을 가진다. 성도들에게 서로 어려운 성도의 필요와 궁핍을 도와줄 뿐 아니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라는 권면이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등 많은 재정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래서 일부 귀족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성도들은 신앙에 대한 박해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성도간의 곤경(困境)을 도우며 동참하는 것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위안과 격려가 되는 것이다.
손 대접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롸세니안'(* )은 '필'(* )과 '크세노스'(* )의 합성어이다. '필'은 '사랑하는', '좋아하는'의 뜻이며 '크세노스'는 '손님', '이방인', '객'을 뜻한다. 따라서 '필롸세니아'는 '손님이나 이방인, 즉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손님을 환대함을 일컫는다. 애굽에서 '객'으로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서 '손 대접'하기를 강조하곤 했다. 또한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심했으므로 이곳 저곳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행하는 자들(바울과 그의 동료들)과 핍박으로 도망하는 자들, 돈 때문에 심부름 다니는 자들은 곳곳에서 신자들에게 대접을 잘받았다. 신자들은 한 가족이면서(10절) 모두 나그네이므로(히 11:13), 서로를 손님으로 여기고합심하여 서로를 돌본 것이다.
힘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형은 '디오코'(* )인데 '추구하다', '좋다', '노력하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현재분사형 '디오콘테스'(* )가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권면이다. 이는 14절에 나오는 '핍박하는 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디오콘타스'(* )와 같은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 바울이 의도적으로 문맥상 상반되는 곳에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 '힘쓰라'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강조되었다.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어떤 사본에는(P46) 두 번째에 나오는 '축복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이테'(* )가 빠져 있다. 또한 '너희를'의 헬라어 '휘마스'(* )가 빠진 사본도 있다(P46, B). '율로게이테'의 원형 '율로게오'(* )는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의 뜻이다. 이 말을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쓸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며(눅 1:64;2:28;약 3:9),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사용하면 복주신다는 뜻이며(마 25:34;행 3:26;갈 3:9;엡 1:3),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하면 축복하는 것이 된다(눅 2:34;고전 10:16;히 11:20)(Murray).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 것이다(마 5:44;눅 6:28). 핍박하는 자, 즉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에는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내용도 포함된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 자체로는 이것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하기 위해서는 나의 본성의 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따라 행해야 한다(갈 5:16).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 14절과 본절은 자신을 잊어버려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며 우리가 즐거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슬퍼하라는 권면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 즉 감정과 처지와 조건을 같이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가능하며(눅 10:27), 성령으로 인도받아야(갈 5:16) 한 마음이 될 수 있다(빌 2:2). 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신자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고전 12:26;빌 2:17, 18), 14절과 관련하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필요하다(Dunn, Cranfield). 그리스도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다(요 11:33-35).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과 선한 것을 함께 즐거워하며(빌 2:18) 곤경과 불행으로 우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같은 슬픔을 갖는다(마 5:4;눅 6:21).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 '마음을 같이한다'는 표현은 15:5;고후 13:11;빌 2:2;4:2에 나오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아우토 프로네인'(* )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나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한다. '서로'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이스 알렐루스'(* , 'toward one       another')에서 '알렐루스'(one another)는 대개 전치사 '엔'(* , '안에')과 함께 사용된다. 이 차이는 '엔 알렐루스'가 '너희 중에', '너희 가운데'라는 범위의 의미가 강하다면 '에이스 알렐루스'는 '서로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외부로 나타나는 행동에 강조점이 있다. 또한 14절이나 17-20절로 비추어 보아 저자가 특히 신자들의 행동이 외부에 나타남으로써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빛된 선행으로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될 것이다(마 5:16).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 '높은 데'의 헬라어 '타 휴셀라'(* )는 중성 명사이면서 목적격으로 '높은 것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수준을 망각하고 분에 넘치는 기이한 일에 뜻을 품는 것이다(시 131:1). '낮은 데'의 헬라어 '타페이노이스'(* )는 '비천한'(눅 1:52;약 1:9), '겸손한'(마 11:29;고후 10:1)의 뜻이다. 따라서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자신을 생각함에 있어서 겸비(謙卑)하라는 것이며, 3절의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하며 처신하라'는 권유를 반복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자들 즉 지혜없는 자들의 생각이다(잠 3:7). 이를 히브리어식으로 표현하면 '높은 것에 대해 심사 숙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길 원하고 우월 의식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진중(珍重)하게 대하고 온순함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준다(Calvin). 그렇지 않고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오만함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12:17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 이는 인간이 가진 본성을 제한시키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악행하는 자에게 보다 큰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이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 욕구를 제재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 25)는 공식적인 형벌을 말한 것이며 이런 규정을 세운 것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들을 금하기 위한 것이다(잠 20:22;24:29). 바울은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1:21)을 잘 알았으므로 인간에게 이런 교훈이 필요함을 느낀 것이다. 또한 본문과 살전 5:15;벧전 3:9은 서로 유사한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마 5:38ff.)을 따라 일정한 교리가 형성되어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본절 전반부의 소극적인 권면에서 발전하여 이제 적극적인 권면으로 나아간다. '모든 사람'은 '아무에게도'에 대칭되는 말로 신자나 불신자 모두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 앞에서'는 또한 '주님 앞에서'(고후 8:21)와 버금가는 권위를 갖는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사람들과의 현상적인 관계와 별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절에서는 '선한'이라는 말을 7:12에 나오는 헬라어 '아가도스'(* ) 대신에 '칼로스'(* )를 사용했다. 이는 일반적인 아름다움, 즉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선한 일'을 나타낸다(Dunn). '도모하다'의 헬라어 '프로노에오'(* )가 본문에서는 분사형 '프로노우메노이'(* )로 쓰여 명령을 나타낸다. '프로노에오'는 '미리 생각하다', '간구하다', '몰두하다'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어떤 일에 반응하여 선을 행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고, 미리 솔선 수범하여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는 '선한 일'에 너희 자신을 몰두하라는 뜻이 된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 이는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신자들이 가능한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할 수 있거든'이란 표현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화합(和合)을 향한 욕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한다(Harrison).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애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눅 2:14),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화목케 하시려고(골 1:20, 2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이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를 이루어야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신자들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골 3:15). 그러므로 신자들은 화평케하는 자들이다(마 5:9).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 이에 대해 1절을 보라(1:7;16:5, 9, 12;고전 4:14, 17;고후 7:1;엡 5:1). 이는 1절의 '형제들아'와 비슷한 애정이 담긴 호칭이며, 이런 호칭들이 여러 곳에 나온다(고전 10:14;고후 7:1;빌 2:12).
진노하심에 맡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테 토폰 테 오르게'(* )를 직역하면 '진노의 자리를 주라'이다. 신약성경에서 '진노'가 수식어 없이 나올 때는 대개 '하나님의 진노'로 본다. 본문에서도 수식어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임이 분명하다(3:5;5:9;9:22;13:5;엡 2:3;살전 5:9).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치나치게 냉혹하지 않다. 또한 심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주권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따라서 사람이 원수를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공정성(公正性)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 바울이 자주 그러했듯이 본 구절에서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4:7;8:36;9:33;10 :19;11:26). 구약성경의 본문 신 32:35에는 "보수는 내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로 되어 있다. 신명기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능욕하며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수는 자신의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거짓 신에게까지도 미친다(Harrison). 이처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마 12:18, 요 5:30;9:39;살후 1:5;히 9:27). 예수께서는 이 권한과 권위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많은 수욕(受辱)과 고난(苦難)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복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벧전 2:23). 우리에게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로 인해 거뒤가심(8:1)을 생각하며 우리의 억울함에 대한 보복은 포기되어야하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절대적 권위와 확실성을 언급한 것이다.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본절은 70인역(LXX) 잠 25:21, 22을 거의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이는 17절의 진술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서술하는 것이다.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이다. 실제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며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요 6:35).
숯불 - 해석이 다양한데, '숯불'은 '회개의 표'(Klassen), '마음의 불'(Liddon),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 듯한 고통'(Cranfiedl, Hendriksen, Harrison), '은혜', 즉 궁극적으로 은혜를 가져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에서 오는 고통'(Godet)등으로 해석한다. 대체로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복수 방법이다. 은혜를 베풀므로써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 이는 17절에서부터 계속 진행되어 온 내용의 요약이며 결론이다.'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

[개역한글]
제11장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7.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방인의 구원]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23.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스라엘의 구원]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11:1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 9장과 10장에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리스도를 거부한 모습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수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그가 본서신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3:4, 6, 31;6:2, 15;7:7, 13;9:14) 단호한 부정적 표현인 '그럴 수 없느니라'(By no means, NIV)는 말로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이...버리셨느뇨'로 번역된 헬라어 '메 아포사토 호 데오스'(* )에서 '메'(* )는 부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 형태이다. 또한 '자기 백성'(* , 톤 라온 아우투)에서 인칭 대명사 '자기'(* , 아우투)라는 용어 속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Godet).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들어 이스라엘이 결코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답하고 있다. 예전에 그가 복음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갈 1:13, 14;딤점 1:13-15)은 이스라엘이 가진 불신앙(10:21)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11:2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 자기 개인의 경우를 예로 들었던 바울은 이제 왕상 19:1-18에 기록된 엘리야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은 특별히 왕상 19:10, 14, 18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가 극도로 부패한 나머지 여호와를 바로 섬기는 자가 엘리야 한 사람뿐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당시에도 하나님이 남겨두신 참 성도 7천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미리 아신 자기 백성 -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배척(排斥)했다. 이러한 민족적 불신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의 메시야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마침내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계신 것이다.
엘리야를 가리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엘리아'(* )는 문자적으로 '엘리야 안에' 또는 '엘리야로'(수단의 여격)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인용구이다(막 12:26;눅 20:37). 래빈스(Rabbins)에 의하면, '엔 엘리야'는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History of Elias)를 뜻한다고 한다.
저가...송사하되 - '엔튕카네이'(* )는 '청구하다'(행 25:24), '간구하다'(롬 8:27, 34)는 의미로 본절에서 전치사 '카타'(* ; against)를 동반하여 '...거스려 송사하다'의 뜻을 갖는다. 여기서 '송사한다'는 표현은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왕상 19:10, 14)을 목도한 엘리야는 자신의 민족을 하나님 앞에 송사하며 그들이 자신의 고집대로 고생하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11:3

저희가...헐어 버렸고 - 본절에서 바울은 왕상 19:10, 14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선지자들을 죽인 것을 먼저 말한 후 제단 훼파를 서술함으로써 그 순서를 바꿔놓았다. 거기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단들을 - '뒤시아스테리아'(* )는 '뒤시아스테리온'(* , '제단')의 복수형이다. 율법에 따르면 합법적인 제단은 예루사렘 한곳 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율법은 그외 다른 곳에도 합법적인 제단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현현(顯現)하신 '벧엘' 같은 곳에 쌓은 제단은 제단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었다. 더욱이 그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사드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믿음이 신설한 자들은 과감히 예루살렘 외에 다른 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Godet).
나만 남았는데 - 혹자는 '나만'(I...alone)이라는 말은 '모든 선지자들 중에 홀로'(alone of all the prophets)라는 뜻으로 해석했다(Meyer). 이러한 해석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대답과 모순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묘하신 역사를 사람의 지혜로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11:4

대답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마티스모스'(* )는 하나님의 신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대답의 계시적인 특성과 권위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바알에게 - 헬라어 '테 바알'(* )의 '테'(* )는 여성정관사이다. 그 당시 페니키아인들에게 '바알'은 태양을 상징하는 남신(男神)으로, 아스다롯(Astarte)은 달(月)을 상징하는 여신(女神)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바알에게 여성 정관사를 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70인역에는 바알이란 이름에 남성과 여성을 병용해서 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70인역에는 바알이란 이름에 남성과 여성을 병용해서 쓰고 있다. 그러므로 바알이 양성체(兩性體)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칠천 - 이 숫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도 그러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마 13:21;막 6:44). '7'은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이므로(출 25:37) 7천이란 숫자는 영원전부터 구원을 얻기로 선택된 엘리야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보호 받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11:5

남은 자 - 바울은 엘리야 시대의 상황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시키면서 그때에 남은 자 칠천명이 있었던 것같이 자신의 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하는 결론을 도출(導出)하고 있다. 바울 주장의 요지는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불신과 배교가 만연했다하더라도 '남은 자'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사랑하셔서 택했다고 하는 것이다. '남은 자'사상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먼저 창세기에 살펴보면, 노아의 때에 소수의 택함 받은 자만이 구원을 받았다(창 6:1-8;눅 17:26, 27;벧전 3:20). 롯의 때에도 그러했다(창 19:29;눅 17:28, 29). 이사야 시대에는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이 있었다(사 6:13;10:32). 이 외에도 구원은 선택된 남은 자들의 것이라는 사상이 구약 여러 구절에서 발견된다(사 1:9;11:11, 16;렘 23:3;31:7;욜 2:32;암 5:15;미 2:12;4:5-7;7:18;습 3:13). 특별히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은 그 이름 자체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을 대변해 준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 '은혜로 택하심'(the election of grace, KJV)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이것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결정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선행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1:6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 '남은 자'(remnant)로서의 특전을 누리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지 자신들의 행위로써 된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남은 자 사상을 오해하여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갈 1:6-9;3:1-5). 율법은 죄를 깨달을 뿐이고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 사실상 율법적 행위를 근거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반(反) 복음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되지 못하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 기네타이'(* )는 '더 이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율법적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unconditional)이다. 이 무조건적인 은혜를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그 은혜에 응답할 때 택하심을 받을 수 있었으며 바로 그러한 자들이 본장 5절에서 나오는 남은 자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민족적으로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1절). 그후 이스라엘 가운데 소수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질문을 부정(否定)으로 답했다(2-4절). 그리고 교회의 핵(核)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소수의 '남은 자'가 있음을 언급했다.

=====11:7


그런즉 어떠하뇨 -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의 핵심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린게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가 있다는 데에 있다. 이제는 그 남은 자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된 소수, 즉 '남은 자'에 관하여 말한 후(1-6절), 이제 대상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완악한 다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행위가 수단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쌓은 공력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져 버렸다. 그들의 행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했다.
구(求)하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제테이'(* )는 현재 시제로 기본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상태나 동작을 의미하므로 이스라엘의 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독특한 용법이 사용되었다. 같은 문장 속에 나오는 또 다른 동사들('얻었다'와 '완악하여졌다')이 시점상 나중임에도 불구하고 과거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구하는'의 헬라어 '에피제테이'(* )는 역사적 현재(Historical Present) 용법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생생하게 구사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일반적으로 '행위를 통한 칭의'를 매우 열정적이고 반복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그 남은 자들은 완악(玩惡)하여졌느니라 - 본문의 '완악하여졌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로데산'(* )은 '포로오'(* , '두꺼운 가죽으로 가리다')의 단순과거 수동태로 어감이 강하다. 이에는 인간 본래의 감성(感性)이나 도덕성의 근원을 상실했다는 뜻이 포함된다. 결국 그들은 오성(悟性)이나,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간하는 양심의 기능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노력해왔어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본절을 통해 바울은 보여주고 있다. 택하심을 받지 못한 '남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인데 그 결과로 그들은 완악하게 되었다.

=====11:8

기록된 바...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강퍅했던 것과같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도 그 백성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기록된 바'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은 신 29:4과 사 29:10에 해당하며 좀더 정확하게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인용한 것(행 28:26, 27.)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Calvin). 또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사용되었다(마 13:14, 15;막 4:12;눅 8:10;요 12:40).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내는 본 구절의 특성으로 봐서 유대인의 상태는 도무지 구원 섭리와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대하게 하고(13절 이하),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오늘날까지(* , 헤오스 테스 세메론 헤메라스) - 이 말은 신 29:3(MT)에 '아드 하욤 하제'(* )라고 되어있는데, 70인역은 이를 '헤오스 테스 헤메라 타우테스'(* )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모두 '이날까지'라는 의미인데, 바울은 '이날'(* , 헤메라 타우테스)을 '오늘날'(* , 세메론 헤메라스)로 변형시켜 인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표현을 변형시킨 이유는 말하고자 하는 것의 주안점이 과거 구약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 당시에 있기 때문이다.
혼미한 심령 - '혼미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뉴세오스'(* )는 '찌르다'(행 2:37)라는 의미를 가진 '카타뉴소'(* )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너무 많은 자극으로 말미암아 감각이 무디어진 마비 상태를 말하고(Robertson),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처럼 어리둥절해진 것을 의미한다(Lenski).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깊이 있게 깨닫지는 못하고 형식적인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보지 못할 눈 - '눈'이란 육체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분별력을 의미한다(사 6:9, 10;마 13:14, 15). 눈은 우리 몸의 감각 기관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외부 세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지(認知)한다. 그러므로 눈이 멀었다는 말은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능력이 결정적으로 상실됐다는 말이다.
듣지 못할 귀 - 바울은 믿음이란 들음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10:17). 그러므로 들음이란 믿음에 이르는 통로이며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수단이다.
하나님이...주셨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 호 데오스'(* )는 유대인들의 심령이 혼미해지고 눈과 귀가 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 것이다(1:21-31).

=====11:9

또 다윗이 가로되 - 본절은 시 69:22의 인용이다. 사도 바울은 어순이나 표현에는 약간의 변형을 취했으나 그 의미는 변질시키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목전에'(* , 에토피온 아우톤)라는 구절은 빼고 '덫으로'(* , 카이 에이스 데란)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올무'(* , 에이스 파기다)라는 말 뒤에 놓음으로써 '올무'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시키고 있다.
밥상 - 밥(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밥상' 위에 있는 음식을 먹음으로 연명(延命)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밥상'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밥상'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밥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그들의 밥상'(* , 헤 트라페자 아우톤)이다. 즉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진 '밥상'이다. 따라서 이 '밥상'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의 밥상' 곧 구원을 상징한다(창 17:7;출 6:3, 4, 7).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밥상'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요 6:35, 58;고전 10:16)으로서 유대인의 땅 나사렛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이 '밥상'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인 '밥상'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거치는 것'이 되었다(9:33).
올무와 덫과 - '올무'의 헬라어 '에이스 파기다'(* )는 새나 짐승을 잡는 올가미를 나타내는 고대 단어이다. '덫'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데란'(* )은 야생 짐승의 사냥을 나타내는 고대 단어였으나 후에는 덫을 뜻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70인역(시 68:23)과 비교하면 '에이스 데란'(덫과)이 첨가되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비슷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열거함으로써 그 누구도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 '거치는 것'의 헬라어 '에이스 스칸달론'(* )은 덫 혹은 올무의 의미를 갖는다. 본 구절 역시 70인역과 비교해 보면 아래의 도표와 같이 도치되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동의어에 해당하는 말을 재차 언급해줌으로써 더욱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단어는 앞 구절의 두 단어와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를 설명하는 말로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모든 유혹과 멸망의 방법을 의미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의 파멸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한편 '보응'은 70인역에는 없는 말이지만 중요한 맥락은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셨다는 뜻과 유대인들의 어리석고 강퍅해진 그대로 하나님께서 버려 두셨으므로 버려둔 그 자체가 보응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되게 하옵소서'(* , 게네데토)는 헬라어 문법에 있어서 명령형이지만, 하나님께 간구하는 투이다. 이 간구는 '보응' 뿐만 아니라 앞에 서술된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에도 연결된다. 바울이 이 글을 인용한 것은 8절의 내용 즉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한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는 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11: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 '저희 눈은'이란 말은 8절의 '보지 못할 눈'을 연상케 하는데, 8절에서와는 달리 귀와 심령이 빠지고 '눈'만이 언급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시 69:23(LXX 68:24)을 그대로 인용했다. 8절에서 '눈'과 '귀'를 열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눈'만을 이야기한 것은 눈이 몸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며 눈이 나쁘면 온 뭄이 어두울 것이라고 눈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마 6:22, 23). '흐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티스데 토산'(* )은 '스코티조'(* , '어둡게 하다')의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법으로 심각하게 저주하는 표현이다(Robertson). 여기에서의 눈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시편 기자의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현재적 심판에 적용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오히려 자연양심(natural good sense)을 가진 이방인 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더 이해하지 못했다(Godet).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깨달을 수 없게 되었으니(마 13:14, 15), 그것은 곧 최대의 불행이었다.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 등이 굽는 것은 노예들이 상전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될 때 취하게 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져서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排斥)하는 한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의 종들이었으며 율법 선생 곧 랍비들에게 얽매어 있는 노예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이 없이 두려움에 거하는 존재들이었다. 이와 같은 징벌은 그들이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받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11:11

내가 말하노니 - 혹자는 이를 '내가 질문하노니'(I ask, RSV)라고 번역하고자하는데(Meyer), 이는 다음 문장이 질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 '레고'(* , '내가 말한다')는 '에로타오'(* , '내가 묻는다')와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 본문은 본절 뿐만 아니라 24절까지 이어지는 전체 논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 이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문형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완악해지기는 했으나 절망적으로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타이산'(* )은 '미끄러지다'의 뜻으로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완전히 엎드러진 것을 말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완악(頑惡)하게 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의 실수가 크다는 것에 집중하여 언급한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넘어짐 즉, 복음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하는 계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 당시에 실제로 이런 일은 얼마든지 목격될 수 있었다(행 13:44-48).
그럴 수 없느니라 - 여기서 보여 주는 단호한 거부의 대답은 비록 이스라엘이 실족했더라도(7-10절) 그것이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완전한 패망의 넘어짐은 아니라는 것이다(Murray). 즉 이들이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고 강퍅해졌으나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울이 계속해서 확언하는 이스라엘의 장래 구원을 암시해 준다(Harrison).
저희의 넘어짐으로 이방인 - 유대인을 제외한 세계 모든 민족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로 약속에 대해 외인이요 구원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었다(엡 2:12). 바로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다(Bruce).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구원이 더 이상 민족의 개념으로 제한되지 않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 '시기나게 한다'(* , 파라젤로사이)는 것은 회개와 믿음을 일으키는 데에 가치있는 자극을 말한다(Murray). 이것은 이방인의 구원을 통해 유대인의 질투심을 유발시켜 회심할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Kasemann). 이러한 시기(猜忌)로 인해 비록 괴로움이 있기는 해도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된다.

=====11:12

세상의 부요함 -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여 구원 경륜에서 벗어났지만, 이스라엘의 복음 거부는 오히려 세상 전체가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흔히 사용한 '부요함'이란 말은 현재의 부한 상태나 종말론적 풍요를 의미한다(9:23;빌 4:19). 여기서의 '부요함'은 이방인의 구원을 통하여 천국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이방인의 은혜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Godet).
저희의 실패 - '혀테마'(* )는 군사적 표현으로 '전투시에 넘어짐'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김으로 당한 커다란 실패(defeat)를 말한다(Murray). 바울은 '넘어짐'과 '실패'를 '충만함'과 대조시켜 이스라엘의 회심이 더욱 큰 은혜를 베풀 것임을 보여준다(Harrison).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 충만함은 회심과 관련된 말로 남은 자와 대비되는 커다란 전체를 의미한다(Harrison). 또한 충만함이란 앞 부분의 실패와 연결해 볼 때, 숫자적으로 빈자리를 채운다는 개념(Godet)과 구원을 완성하는 개념(Murray)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회복되어, 그 구원받은 수가 충만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충만해진다는 것은 범죄와 대조를 이루어 불신앙과 범죄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이스라엘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를 얻어 하나님 나라에 복귀하는 민족이 될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이 부요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이 충만하게 회복되면 전 인류의 부요함은 더욱 풍성해 질 것을 의미한다.

=====11:13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 '만큼'으로 번역된 '에프 호손'(* )은 일시적 제한의 의미가 아니라 자격(資格)을 말한다. 즉 자신의 신분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에고'(* , '나는')라는 대명사 앞에 '에이미'(* , '...이다')를 두어 자신의 자격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 인식을 명확히 가지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임무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충만케 할 뿐만 아니라(25절)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며(14절) 충만케 하려는(12-15절)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자기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그의 이방인에 대한 사역이 성공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의 구원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겨 이방인 구원에 최선을 다한 것을 말한다(Godet).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힘써 감당함으로써 이방인들의 구원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하여 몇몇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14절). 이렇게 자기의 직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짐을 생각할 때에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Barmby).

=====11:14

내 골육 - 바울의 이 표현에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Harrison). 이러한 표현은 대개 혈통적인 형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창 29:14;삿 9:2;삼하 5:1), 본절에서는 완악해진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남은 자'를 의미한다(Dunn). 바울은 비록 현재 상태로는 완악해 있으나, 장차 몇몇 이스라엘인이 구원에 동참할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시기케 하여 - '시기'가 흠정역(KJV)에는 '경쟁'(emulation)으로 번역되어 있고, 그 대상은 '온 백성'(10:19)으로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함을 보고 질투심과 어울러 경쟁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희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 '얼마'라는 말속에서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실족했으나, 바울은 그들 중에 얼마라도 구원받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11:15

저희를 버리는 것 - '버림'에 대해 혹자는 12절의 실패와 연결해서 해석하며(Godet), 혹자는 하나님께서 추방한 것으로 이해하는데(Meyer, Murray, Shedd), 후자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버리는'은 '받아들이는'(* , 프로슬렘프시스)과 대조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호의와 축복으로부터 거절당함과 그의 나라에서 박탈된 것을 말한다.
세상의 화목 -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을 의미한다(Kasemann). 혹자는 세상의 화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Lenski). 어쨌든 화목은 원수된 처지에서 예수의 공로로 친선의 교통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엡 2:13). 과거에는 하나님의 거절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이다(Murray).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 - 본 구절은 어떤 뜻인지 확언하기가 다소 어려우나 유대인이 장차 회심하게 될 것을 생명을 얻는 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스라엘로 인해 이방인들의 구원에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11:16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 헤 아파르케 하기아, 카이 토 퓌라마'(* , )가 70인역(민 15:20-21)에서는 '아파르켄 퓌라마토스'(* ,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떡덩이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처음 익은 곡식'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이해한다(Harrison).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성을 가진 족장이나 조상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Murray). 반면에 '떡덩이'는 회심한 이스라엘 민족을 뜻한다. 이러한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표성을 의미한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르케'(* )는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로 제사에 있어서 전체 큰 덩이에서 일부를 떼어 내어서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이것은 민 15:17-21에 나오는 거제의 규례에서 온 것으로 떼어낸 부분이 원덩이를 대표한다는 개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곡식인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 (2) 거룩성을 나타낸다. 첫열매가 전체 떡덩이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다(Barmby). 결국 이스라엘과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조상들이 거룩했으니 남은 그의 자손들도 거룩하다는 의미이다.

=====11:17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 돌감람나무는 야생 감람나무로서 (1) 원래부터 돌감람나무 종류가 있고, (2) 원래는 좋은 감람나무였으나 주인의 손질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있다. 통상적으로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은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이를 거꾸로 비유한다. 이처럼 참감람나무의 가지 일부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이 원가지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아마도 바울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뿌리에 연결되어 좋은 진액을 받아 품질이 낫게 변화되는 것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Murray). 이러한 접붙임으로 원가지와는 전혀 무관하던 돌감람나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 이방 그리스도인도 이스라엘 족장이 누렸던 구속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요한 것은 진액이라기 보다는 그 뿌리이다. 즉 이스라엘과 무관했던 이방인이 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12족장과 맺은 구원의 언약과 연관된다(Hendriksen, Lenski). '참감람나무'는 16절의 '처음 익은 곡식'과 통하는 것으로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모든 혜택의 근원(根源)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 유대인들의 일부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들을 향해 우월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다고 충고한다. 여기서의 '가지'는 꺾여진 가지로 원가지에서 벗어난 유대인을 말한다(Murray, 19, 20, 22, 24절). 이방 그리스도인은 이들에 대해 자긍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긍(* , 카타카우코)이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이며 자랑한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 교회의 구성원 중 일부가 영적 자만심을 가지고 동료 유대인 신자들을 업신여기는 일이 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원가지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긍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자만심에 빠져 유대인이 원가지에서 꺾여졌다고 주장해도 자신들이 뿌리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가지들을 지탱시켜 주고 가지들에게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뿌리와도 같기 때문이다(Calvin). 여기서 강조된 '너'(* , 쉬)가 단수형으로 쓰여 개인을 대상으로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복음 거부로 인해 이방인 교회가 탁월한 위치에 있게 된다(Harrison).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인해 교만과 자만심을 갖게 하지 않도록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기원을 생각하도록 한다.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는 '꺾이운 가지'와 '접붙임을 받은 나'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Murray, Dunn).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예증은 이방인들을 교만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다(Calvin).

=====11:20

옳도다 - 이에 해당하는 '칼로스'(* )는 '바로 그렇다', '맞다'의 뜻으로 앞절의 내용을 시인하는 것이다. 구속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보장되었던 것이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유동적으로 적용됨으로 인한 구원의 오묘한 섭리를 설명하려는 것이다(Dunn).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 유대인이 버림을 받은 것은 불신 때문이고, 이방인이 접붙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므로'(* , 테 아피스티아)와 '믿으므로'(* , 테 피스테이)가 모두 여격으로 쓰여져 이유, 수단, 원인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인해 두 가지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났을 뿐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은 불신으로(9:30-32;10:3, 16)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방인은 서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으므로'가 강조된 것은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믿음인 것을 보여준다.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가 있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자긍하지 말아야 할 두번째 이유를 제시한다. '원 가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신 클라돈'(* )은 본래 자연적으로 생성된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이어야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고, 원뿌리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 흠정역(KJV)에는 '너도 남기지 아니하실까 유의하라'로 되어 있다. '유의하라'(take heed)는 표현은 공인 본문(TR)에 의거해서 번역했다. 공인본문에 의하면 이 구절 앞에 '메 포스'(* , '...하지 않을까')가 있다. 흠정역(KJV)은 이를 따라 20절의 '두려워 하라'와 연결시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 가지도 믿음을 떠났을 때 꺾어 버렸는데 접붙여진 가지가 믿음을 버렸을 때 남겨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1:22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 이는 하나님의 품성 안에 오묘하게 조화(調和)를 이루는 것이다. 실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위를 경험하고 있지만,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얻은 이방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있다(Harrison). '인자'의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한다(2:4). 한편 이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엄위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한 것이다(Murray).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 '넘어지는'의 헬라어 '페손타스'(* )는 부정과거로 쓰여 완전히 넘어져 믿음에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14:4;고전 10:12;히 4:11).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심판을 행할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약속의 백성마저도 제하여 버리는 엄위의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 헬라어 본문에서는 접속사 '데'(* , '그러나')가 있어서 앞 문장과 연관되어 있다. 앞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말하나 이제는 인자에 거할 것을 권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불신앙으로 인해 계속되며,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반응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 본절에서 24절까지 이스라엘이 회복될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다. 전에 그들이 원 나무에서 잘리운 이유는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회복은 오직 믿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접붙임 입는 조건이다.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는 그 대상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변덕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Harrison).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본 구절에서는 일반적인 원예 상식을 벗어난 특수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바로 꺾여진 가지를 다시 접붙인다는 것이다. 일단 꺾여진 가지는 재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불가능한 예화를 사용하여 유대인의 회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문자 구조상으로도 잘 나타나는데, '능력'에 해당하는 '뒤나토스'(* )가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구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깁보르'(* )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세운 언약에 신실하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느 9:32;사 10:21;렘 32:18).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이방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 이방인이 구원얻게 된 사실을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요약 정리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능한 일임을 논증하고 있다. '원 돌감람나무'의 '원'과 '본성'의 헬라어 '퓌신'(* , '자연적인')은 전치사 '카타'(* , '...따라', '...로 부터')와 '파라'(* , '...거스려')와 함께 쓰여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접붙이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게 아니라, 다른 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성공적으로 접붙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Dunn). 따라서 이러한 재접목은 이스라엘 대신 이방인만을 은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유대인도 이방인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 유대인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일종의 예정된 조화(pre-established harmony)라고 하는 본질적인 유사성(類似性)이 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유대인들의 회복이 성취될 터인데 이는 이방인의 동참보다 쉬워질 것이다(Godet). '얼마나 더'의 헬라어 '포소말론'(* )은 문맥상 '얼마나 더 쉽겠는가'(How much more easily)라는 의미임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상관없이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자를 자녀로 삼아주신다(요 6:40).

=====11:25

형제들아 - 이에 대하여는 1:13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에테 파르 헤아우토이스 프로니모이'(* , '너희 스스로를 너희가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도록 하려고') 가운데 전치사 '파라'(* , '...곁에', '...함께', '...로 말미암아')가 어떤 사본에는 '엔'(* , '...안에', '...로')으로 되어 있다(A, B). 그런데 비교적 오래된 사본에서는 전치사 '파라'로 되어 있으며(N,C,D). 바울은 12:16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는데, 거기서도 '파라'로 되어 있어서 '파라'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한편 본 구절의 '히나 메 에테'가 현재 가정법으로서 목적절이 되므로 바울이 이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은 이방인들이 자만해 있는 것을 막고 유대인들에 대해 스스로 높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Calvin, Robertson). 이는 그들이 그들 안에서부터 스스로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 바울 당시에는 밀교(密敎, Mystery religion)가 있었는데, 그들은 입교자 외에는 알려주지 않는 비밀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단계가 지나지 않으면 이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Davidson, Martin). 그러나 신약에서 사용되는 '비밀'(* , 뮈스테리온)이란 이처럼 종교적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거나 특별한 사람이나 풀 수 있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그의 백성에게 알려지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활동을 의미한다(Harrison). 이 말은 계시에 대해(고전 2:7;엡 3:3, 4, 9;딤전 3:16),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골 1:26-28),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고전 2:6, 7, 엡 3:3-6)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는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비밀이지만, 이제는 그 비밀이 알려졌다(16:25, 26;고전 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비밀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사람이 완악하여졌거나 마음이 어두워져서 개별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이스라엘의 충만함(12절)이나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것(15절)과 연관되어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확대되었음을 시사한다. '충만한 수'에 대해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한다거나(공동번역), 구원얻을 자기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논리를 여기에 도입시켜버리는 것은 바울의 정신을 오해하고 본 구절이 다루고자 하는 핵심을 흐려지게 할 뿐이다(泉田昭). 이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는 종말 현상에 대한 예수의 말씀(마 24:14, 막 13:10)에 근거한 것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며(Godet) 선택된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말하는 것이다(Meyer).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적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계속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끝이 되면 이러한 완악함도 끝날 것이다.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 '완악해졌다'는 표현은 7절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17절의 비유에서는 '가지 얼마가 꺾여졌다'고 암시되었다. 본절에서는 '더러는'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이 '더러'(* , 메루스)라는 낱말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1) 칼빈(Calvin)은 이것이 단순히 시간이나 숫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정도'(measure)의 으미로서 듣기좋게 수식하려 했을 뿐이라고 한다. (2) 혹자는 이것을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시간적으로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는 기간동안만 제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라 한다(Godet, Harrison). 그러나 본 구절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언제 완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 계획이므로 알 수 없다. 결국 칼빈의 견해대로 바울은 본 구절에서 숫자나 시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것은 이방인이 구원얻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고, 결국 이스라엘도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1:2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온 이스라엘'이 역사의 끝에서 지구상에 살고 있을 모든 유대인 집단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Barmby). 그러나 이 견해는 구원의 대상이 사람의 혈통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과가 되므로 성경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2) 혹자는 갈 6:16에 근거하여 '온 이스라엘'이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Augustine, Theodoret, Luther, Calvin). 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구원받은 이스라엘이라는 견해는 타당하지만,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즉 상반절에서 묘사된 '온 이스라엘'과 '남은 자'의 대조를 파악할 수가 없다(Harrison). (3) 어떤 학자들은 선택된 유대인 전체로 본다(Robertson, Lenski, Murray). 이 견해대로 하면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라는 구절이나 26-29절에 이어지는 문맥과 잘 연결된다. 즉 본절의 '온 이스라엘'은 장차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을 말한다.
바울의 관점을 살펴본다면 본문에서 전치사를 '에크'(* )로 바꾼 이유는 이스라엘의 회심으로 인해 메시야가 강림할 때에 천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오실 것(갈 4:26;히 12:22)으로 간주했기 때문인것 같다(Harrison). 한편 '구원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뤼오메노스'(* )는 히브리어 '고엘'(* )의 번역이며 이는 종이된 다른 사람을 종된 상태로부터 구해주거나 채무를 대신 짊어지는 사람을 가리킨다(룻 3:12;욥 19:25). 특히 이 말은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내는 '구속자', 즉 '메시야'를 의미한다(泉田昭). 본절에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 가운데 불경건한 것들이 척결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 본 구절은 70인역의 사 59:20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구약에서 '야곱'(* , 야코브)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집합적이고 대표성을 가진 용어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전반적으로 범죄하여 경건치 않게 되었는데 이렇듯 불경건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맛소라 본문에 의하면 그 죄에서 떠나는 자에게 구속주가 왔다고 한 반면, 70인역에서는 구속주가 와서 백성으로 하여금 불경건함에서 돌이키게 할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바울이 70인역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 것은 70인역이 구속주가 반드시 와야 죄가 해결될 것을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11: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얻게 되는 복스러운 은혜를 말하고 있다. 본 구절은 사 27:9의 인용이다. 바울은 이 구절을 자유롭게 고쳐서 인용했으며 여기에는 렘 31:31-34과 미 5:2 등에서 볼 수 있는 사상도 깃들어 있다(Harrison). 본 구절 역시 70인역의 번역을 따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지 못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심이 어려운 이유는 그 백성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70인역은 새로운 언약을 통해 저희 죄를 값없이 처리해 주겠다고 선언한 데 강조점을 두었다.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 27:9의 예언을 보면, 여러 우상이 진멸될 때 비로소 야곱의 불의와 죄가 속함을 받을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약속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70인역의 번역을 따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성된 구원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 , '죄들')는 70인역에는 단수(* , 하마르티안)로 되어있으나 복수로 고쳐 인용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개개인이 범한 모든 죄악을 총칭하고 공동체 전체가 범한 죄 모두를 강하게 시사하는 표현이다.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이러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새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새언약은 렘 31:31에서 제시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옛언약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행되어 하나님의 법이 백성들 속에서 작용하고 마음에 기록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완악하여 지긴 했어도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될 것임을 제시한다. 결국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한 언약의 개념이 보다 구체화되어 계속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Dunn).

=====11: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 본절에는 대조와 병행을 이루는 용어들이 부각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수'와 '사랑을 입은 자', 그리고 '복음'과 '택하심'이다. 한편 4:25에서도 이와 같은 수사법을 사용하였는데(Kasemann), 본절에서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유대인의 불순종과 패역은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천대받아도 된다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실제로는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지만, 이로인해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해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Bruce) 그 효과는 충분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던 유대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어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전혀 무관했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가 형성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된 것처럼 보여도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가진 것과 다른 특권을 고유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 비록 복음의 경륜 안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위해 원수된 자로 간주되었지만 그들의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어왔다는 것이다(Harrison). 그러나 '조상들을 인하여'(* , 디아 투스 파테라스)라는 구절은 조상들의 공적(* , 제쿠트 아보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Bruce). 즉 조상들이 보여준 의로운 행위가 축적되어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사랑을 입은 것은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는 것이고(Kasemann, Dunn),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신실하게 언약을 성취해 가시므로 그 후손들에게도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 '은사와 부르심'(* , 타 카리스마타 카이 헤 클레시스)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부르시는 분이며 이러한 부르심의 은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유일한 위치로 부르셨다는 점을 증거해 준다(Harrison).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메타멜레타'(* )가 헬라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첫머리에 와서 강조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후회라고 하는 것을 결코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한 표현이 몇 군데 나타나는데(창 6:6;민 23:19;삼상 15:11, 29), 하나님의 '후회하심'(* , 나함)이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여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심히 유감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 정하신 뜻을 돌이키거나 변심하지 않으며, 실수하시는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신적 불변성(immutability)을 갖고 계신다.

=====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 '너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메이스'(* )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 어떠했다라고 독자들의 과거 상태를 지적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이키는 실수를 범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불순종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게 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톤'(* , '이들의')은 소유격으로서 '순종치 아니함'(* , 테 아페이데이아)이라는 여격 분사의 의미상 주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는 '이들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불순종한 것을 이용해서', '이들의 불순종을 통하여'(표준신약전서),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로서'(as a resul of their disobedience, NIV),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because of their disobedience;공동번역, RSV) 등으로 번역된다.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 본절과 다음 절에 나오는 '이제'(* , 뉜)는 역사적인 현재를 나타낸다(泉田昭). '긍휼'(* , 엘레오스)은 사람의 이성으로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지혜요 경륜이다. 이 긍휼을 베푸심의 근거는 '순종치 아니함'이며 이는 32절까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긍휼함을 얻는 대상 역시 28절의 도표(구원의 대상의 순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대인->이방인->모든 사람'이라는 논리적 순서를 따른다.

=====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 앞 문장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바울은 다시 한번 이방인들에게 은혜 안에 있는 그들의 현 위치에 관해 우쭐대지 않도록 하려고 이방인들이든지 유대인들이든지 어떤 특권이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비록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악화되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계속 베푸신다(Harrison).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 본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로 시작되어 30, 31절의 결론이 되고 있으며, 5:12-21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내용을 매우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심이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본서의 전체적인 주제를 상기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버려두신 것은 그들의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이 각성되어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태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궁극적 목적을 위해 이방인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도구로,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이방인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는 결국 구원의 전체성, 즉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만인 구원을 인정하는 구절은 아니다(25, 26절). 본절의 '모든 사람'은 그 범위가 제한된다. 즉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 '긍휼을 얻을 모든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루투 카이 소피아스 카이 그노세오스'(* )를 직역하면 '부요와 지혜와 지식'(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이라 할 수 있다(공동번역, RSV).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오히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the riches of the wisdom and knowledge)이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KJV. NIV. NASB). 왜냐하면 '부요함'과는 달리 지식과 지혜는 명확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Lenski). 즉 '지혜'(* , 소피아스)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종합적 통찰이며, '지식'(* , 그노세오스)은 단편적, 감각적 사물에 대한 인식이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앞 구절에서 언급한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다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판단'(* , 크리마타)이란 '정죄'나 '심판'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결정'을 의미한다(Lenski, Hendriksen). 또한 '길'(* , 호도이)은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나 행하심, 다스리심'과 연관되는데,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이 인생들에게는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혹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판단과 길은 깊은 우물과 같아서 아무리 그물을 퍼올려도 다 이해할 수는 없다(泉田昭).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 본절부터는 세 가지 질문 형태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본절은 70인역의 사 40:13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는 앞 구절과 연결시켜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를 첨가하였다. 또한 앞구절(33절)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로 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는 의문형을 취하였다.하나님은 스스로 뛰어난 모사이시기 때문에 어떤 모사가 필요없고, 오히려 그의 백성들에게 모사가 되어주시는 전지 전능의 존재이시다(욥 36:22, 23). 어떠한 유한자도 무한자를 파악하지 못한다(Finitum non cap ax infiniti est, '유한은 무한을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주께서 보여 주시는 부분만을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서(Condescensio Dei, '하나님의 낮아지심') 계시하신 사실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 본 구절은 세번째 질문으로 욥 41:11의 인용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들에게 모든 가치와 역할과 원리들을 나누어 주셨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 대가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유의 근원이 되시며 만상의 조성자(造成者)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운행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시므로 받으실 필요가 없다.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 바울은 만물의 시작과 과정과 끝,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물의 근원이시며 집행자이시며 목적이신 하나님에게로 귀속시키고 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는 결국 모든 지혜의 근본을 깨달은 자와 다름없다(잠 1:7). 세 가지 질문 형태의 찬양에 이어서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그 생성 발전의 주관자이시며, 그 종국적 목적(目的)이심을 선언적으로 고백한다(고후 5:18;엡 1:23;골 1:16;히 2:10). 이 문장은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문이었는데, 여기에는 삼위 일체론적인 송영이 감추어져 있다(Davidson, Martin).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세세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는 '그 영원함까지'라는 의미이며, 16:27에서도 이 같은 송영으로 로마서를 끝마치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본절이 1-11장의 교리 부분의 대단원이 됨을 보여준다.

[개역한글]
제10장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믿음과 들음과 그리스도의 말씀]
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이다. 여기 쓰인 '멘'(* , '한편')은 주로 '데'(*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 )의 '에메스'('나의')는 '무'(* ,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 )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 )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 )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 )는 공적(公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 )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 )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시 69:9).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갈 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행 26:5) 이스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는 '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 )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막 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하나님의 의'(* ,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의'(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 아그노운테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 )는 '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 )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타낸다.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 ,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 )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마 19:17;눅 10:28;갈 3:12).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겔 20:11, 13, 21;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연관지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 )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그 분께서 이루신 일들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손으로 만진 바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온전한데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 아뷩손)는 6절의 '하늘'(* ,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스'(* )는 히브리어 '테홈'(* )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 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 )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 )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 )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 )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 )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 )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믿음의 결국은 구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 )와 '호몰로게이타이'(* )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 , 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 바울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 , 퀴리 오스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시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톤'(* )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학 2:8;엡 3:8;계 5:12)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9:23;요 10:10;고후 8:9;엡 2:7).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Jehova)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 )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그는 믿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 )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 )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 , '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함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 )로 '케륏소'(* , '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미한다(Lenski). 헬라어 '케륏소'(* )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LXX)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사 61:1;막 1:4, 7, 14, 38, 39;눅 4:18, 19;행 20:25;28:31)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지에서 사용하였다(갈 2:2;골 1:23).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 )은 '아포스텔로'(* , '보내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사도'(* , 아포스톨로스)란 단어가 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Robertson).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면에서 예언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7:16).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도자로서 전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벧론 포로 생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벧론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벧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다(고전 1:23).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받은 자, 즉 선택 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 , 아라;so then, KJV)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 )로 '듣는 행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Hendriksen).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곧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 , 레카토스 크리스투)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메 우크 에쿠산)는 '그들이 듣지 못했는가 ?'(새번역, 공동번역; Did they not hear ?, NIV)라는 의미가 좀더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메'와 '우크'는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즉 전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복음이 전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5:22-24;요 12:19;행 2:41, 47;4:4;17:6;빌 1:12, 13;골 1:6).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변사 '메'(* )를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 , 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 , 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수 없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 )로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의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 )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명히 앞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 )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고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 )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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