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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
| 2. |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
| 3. |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 4. |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
| 5. |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 6. |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 7. |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
| 8. |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
| 9. |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
| 11.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 12. |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 13. |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 18.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
| 19. |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 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 21.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 22.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 23.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 25.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 26. |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
| 27. |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 28.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 29. |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
| 30. |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 31. |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 지금까지 할례의 효력과 표면적인 유대인에 대해 추궁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바울은 이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비록 불법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지 못한 유대인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축복은 일단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유대인의 우선 순위 내지 우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즉 바울 자신이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적으로 본절과 2절에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나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페릿손'( )은 '넘치는', '남아도는', '두드러진', '필요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가 정관사 '토'( )와 함께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고(고후 9:1), 부사적 용법으로서 '과도하게 풍부하다'는 의미로도(고후 10:8) 쓰였다. 본절에서는 의문대명사 '티'( )와 함께 사용되어 유대인이 가진 '탁월성' 또는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한다.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범사에 많으니 - '많다'( , 폴뤼)라는 말은 1절의 '토 페릿손'( )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많았다는 의미는 바울이 밝힌 바와 같이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9:4)이 주어졌다는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와 규례 아래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2:25). 바울이 이와 같이 유익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31절). 첫째는 - 순서상 앞 선다는 의미로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Robertson), 그 중요도나 비중에 있어서 첫째라는 의미로서 유대인에게 가장 첫째되는 유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 9:4, 5에서 바울은 보다 자세하게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즉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그것이다.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음으로써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아는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점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맡았음이니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전승시키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등, '말씀'과 관련된 사역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어떤 자들이 -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있으므로 바울은 '유대인'이라 총칭하지 않고 부분적인 의미의 부정 대명사를 사용했다. 어찌하리요( , 티 가르에이). 빌 1:18에 기록된 '그러면 무엇이뇨'( , 티 가르)와 같은 감탄조의 어투이기도 하지만 본장에서는 이어지는 두 가지의 질문 형식과(5, 8절) 같이 부정의 대답을 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특권 속에서 무한한 것을 기대하며 착각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믿지 아니하였으며 - 본 구절은 해석상 여러 견해가 있다. 본절에 사용된 동사 '에피스테산'( )과 명사 '에피스티아'( )가 개역성경처럼 '불신앙'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함이나 믿음의 부족'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백성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의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불성실하거나 불신앙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取消)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은있다(신 8:18-20;삿 2:19-21).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것들 특히 메시야 예언 등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게노이토'( )는 히브리어 '할릴라'( )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70인역(LXX)도 '할릴라'를 '메게노이토'로 번역하고 있다(창 44:7;신 24:16;왕상 21:3). 이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 '모든 사람이 거짓되다'는 것은 시 116:11의 인용구로서 인간의 불의함, 신실치 못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내용과도 부합된다.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 3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미쁘심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참'( , 알레데스)되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알레데스'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 로기아), '미쁘심'( , 피스티스), '의'( , 디카이오스)와 함께 연결되어 서로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진 불신앙과 거짓과 불의는 참되신 하나님을 자기의 소욕에 따라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죄악된 생각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참'( , 알레데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약속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J. Murray).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 본 구절은 시 51:4(LXX 시 50:6)의 인용으로, 천상(天上)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시편 저자 자신의 죄와 무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는 죄에 대한 고백을 반복적으로 하는데(LXX 시 50:4, 5, 7, 11), 이러한 표현은 시편에 그리 흔하지 않은 독특한 용법이다. 아마 유대적 관점에서 무법(lawlessness)과 불신앙(faithlessness)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 같다(Dunn). 판단받으실 때에 - '판단받으실 때'에 해당하는 시 51:4의 히브리 본문이 개역성경에는 능동형인 '판단하실 때'로 번역되어 있으나 70인역(LXX)에는 바울의 인용대로 수동태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판단받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동형이든 능동형이든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판단받는다는 의미로 다윗이 고백하거나 바울이 인용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즉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의도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으나 그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결코 왜곡되지 않고 의롭기 때문에 '이기려 하심이라'는 표현이나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란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기려 하심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세이스'( )를 제외한 본절 전체가 70인역의 번역과 똑같다. '이기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 A, D)에서는 미래형 '니케세이스'( )로 되어 있고 70인역(시 50:6)과 몇몇 사본들(B, G, L, )에서는 단순과거 가정법 동사인 '니케세스'( )로 되어 있다. 바울이 자신의 의도대로 시편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종말의 심판과 사람의 죄를 연관지어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미래형으로 쓴 것 같다.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 인간의 불의는 결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빛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불의를 의로우신 판단으로 징계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더 드러나게 된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언약들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은 아니다(3 절). 문제는 유대인의 불신앙과 불의며, 하나님은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고 그에 대해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셨을 따름이다.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므로 이러한 '절대 의'로 인하여 발생하는 진노는 정당성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심판자의 개념을 사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審理)함으로써 공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공직자로서 법정 안에서만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가정의 재판관이 었으며(창 21장),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삼하 15:2, 3). 때로 제사장들도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므로 성소가 재판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출 33:8;신 17:12). 그 외에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관의 임무를 감당했으나(삿 8:6;룻 4;2)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심판자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었다(창 18:25;사 33:22;약 4:12).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판단하시는 분'(시 94:2),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이다(사 2:4). 그러나 죄인은 언제나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려고 하였다(시 7:8;50:4, 5;히 10:30). 신약에서는 '심판'이 '크리노'( ), '크리마'( ), '크리시스'( )등의 단어로 나타나는데, '조사한 후 판결하다' 또는 '분별'이나 '결정' 등의 의미로 쓰였다.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 이 말은 '나의 거짓과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은 죄인 취급되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의미를 지닌 궤변(詭辯)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8절 후반부에서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한편 본벌만을 따로 떼어내어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반문을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우리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 나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죄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결과는 본절과 같이 보다 적극적인 궤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부모님에 대한 공양(供養)의 책임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바 있다(막 7:11). 바울도 예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선을 이루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 악을 행한 적이 있다(행 8:3;9:4). 비록 바울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태도가 변하여, 오히려 유대인이 바울의 과거에 범했던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바울은 간파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시각에는 바울의 주장이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소행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의 종된 자들은 그들의 울타리 속에서 믿음을 판단하려 하지만, 거짓 판단으로 선을 이루려는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 이 판단의 근거는 7절과 8절의 반문식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벧리알이 도무지 조화될 수 없음에도(고후 6:14, 15)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합리화하려는 자들이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바울은 본 구절로써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실 바울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바울의 교훈을 곡해(曲解)하여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논술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줄 수 있었다.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우리는 나으뇨 -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8절에서 사용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부터 18절까지는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므로 그리스도인도 그 죄의 보편성에서 제외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란 바울 자신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또는 더 넓게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결코 아니라 -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영적 윤리적 상태에 있어서는 별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본 구절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판토스'는 보다 강한 부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부정어 '우'( )의 위치를 바꾸어서 '판토스 우크'( , 고전 16:12)를 취해야 한다(Murray).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아니다', '터럭 만큼도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이다.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기록한 바 -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oral traditions)이라고 한정짓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언급하는 '기록한 바'는 선교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여진다.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 시 53:2에 대한 70인역(LXX)의 번역에 의하면 '깨닫는'( , 쉬니온)의 목적어로 '하나님'( , 톤 데온)을 최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시과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닫음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1:28 a).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다 치우쳐 - 히브리어 본문(MT)에서는 본 구절이 시 14:3에서는 '사르'( )로, 시 53:4에서는 '사그'( )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역(LXX)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여세클리난'( )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여세클리난'은 '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1:21)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도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한편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 )은 '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 )와 부정 접두어 '아'( )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 , '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 , '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여진 부사 '하마'( )는 '모든', '다'( , 판타)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등의 의미도 갖는다(행 24:26). 즉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 '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 )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선'을 의미하는 '아가도스'( )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1:31)라고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 팔레스틴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으며 그 입구는 돌로 막게 되어 있다(요 11:38, 41). 따라서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려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은 그 목구멍이 어떠한 것도 삼킬 만큼 넓다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 외식(外飾)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4)고 비유적으로 책망하신 적이 있다. 인간은 입을 통해서 온갖 더러운 것을 토해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불이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듯이 인간의 혀도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조차 죽일 수 있는 지옥 불과 같다(약 3:5, 6). 그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 시 5:9의 인용으로 히브리어 사본에서는 '혀로 아첨했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70인역(LXX)은 이를 '혀를 유창하게 만든다'고 의역하였고, 본문의 원어도 이와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Lenski). '속임을 베풀며'의 헬라어 '에돌리우산'( )은 '속이다', '사기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돌리오오'( )의 미완료형 '에돌리운'( )에서 '뉘'(- )대신에 '오산'(- )이 붙어 반복적인 의미의 미완료형이 되었다. 즉 계속해서 속이고 사람을 죽이는 혀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타인을 살리는 말이 나올 수 없고 오히려 죽이는 독이 가득할 뿐이다(약 3:8). 이것은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함과 같고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약 3:12).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본절은 시 10:7의 의미를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시 109:17-19)깨달아야 한다. 몇몇 주석가들은 저주와 악독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저주하는 주체인 가해자와 악독을 당하는 피해자로 구분한다(Hendriksen).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을 대표적으로 '저주와 악독'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 구절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뒷바침해주는 시구이고(Harrison), 문맥상 강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그 발은 - 본문은 잠 1:16의 앞 부분과 동일하지만 다음 구절(16, 17절)이 사 59:7, 8의 인용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 59:7 상반절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선포한 후에 13절과 14절에서는 '말'에서 비롯되는 악행을 설명했으며, 본절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한 악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입의 말과 악행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타락하여 부패해진 자연인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선'도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 있다(벧전 3:21).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피를 흘린다는 것은 악행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피'( , 하이마)는 성경에서 '생명의 원천'(요 1:13) 또는 '생명의 좌소'(고전 15:50;히 2:14)를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쏟아버리다', '피를 쏟아내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에크케오'( )의 단순 과거 부정사 '에크케아이'( )와 함께 쓰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의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빠른지라'로 번역된 분사 '와세이스'( )는 신약성경에서 '날카로운', '예리한'(계 1:16;2:12;19:15)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본절에서만 '빠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빠르다'를 뜻하는 헬라어 '타키노스'( )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단어 '와세이스'를 쓴 것 같다.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파멸과 고생 - 직접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혹자는 이 표현을 인간의 지독한 잔인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Calvin), 이미 2:9에서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환난과 곤고'와 '파멸과 고생'은 모두 영혼이 지옥의 형벌 가운데 있을 때 나타날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그 길에 있어 -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라는 뜻이 된다. 본절은 앞절의 결론으로서 피흘리는데 빠른 발을 가진 '그들의 길에'( , 엔 타이스 호도이스 아우톤) 파멸과 고생이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간 데 마다 남겨진 흔적'으로 파멸과 고생을 이해하였으나 그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미래에 주어질 형벌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인류의 잔혹한 피흘림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결국 그 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런 파멸(破滅)을 초래하게 된다.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혹자는 '평강의 길'을 현실적인 평화 내지 이웃과의 화목으로 해석한다(Matthew Henry).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평강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사 9:6, 7) 인간들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는 약속(학 2:9)이 성취되었다(5:1). 이 평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은 결코 이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또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얻을 수도 없다.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시 14:1a)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11절에서 17절까지의 인용 구절들에 언급된 부패상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칼빈(Calvin)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사악함을 견제하는 굴레이므로 그 경외심이 사라질 때 온갖 종류의 방탕한 생활에 거침없이 탐닉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신 10:12;수 4:24;24:14;사 50:10), 그러한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시 31:19;103:13;147:11;잠 1:7).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말하는 바 - 10절에서 18절까지 인용 구절들의 출처는 시편과 이사야서였다. 이 책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서'에 포함되지 않으나 통상적으로 바울은 구약 성경 전체를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 -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 영역하에 있는 모든 사람, 곧 온 세상을 지칭한다. 모든 입을 막고 - '히나'( , '곳')가 이끄는 본 구절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결과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한다. 이 절속에서 반복된 '모든'( , 판)이라는 단어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특히 20절에 기록된 '모든 육체'(개역성경은 '모든'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았음)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한다. '막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게'( )는 '잠잠케 하다', '멈추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랏소'( )의 제 2단순 과거 가정법 수동태형으로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 앞에서 최소한의 변호마저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의 상태를 묘사한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 - 율법의 기능은 심판대 앞에 있는 피고들을 변호하거나 또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되게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심판대 앞에 기소하는 일을 감당한다. 그 대상에는 예외가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동일한 심판대 앞에 서게 한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 모든 사람이 율법의 세력권 아래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또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전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이 단어를 사용했다. 율법의 행위로 -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이를 할례와 같은 의식에 관한 율법을 수행하며 복종하는 것으로 한정짓는다(Jerome, Pelagius).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연적(혹은 본성적)인 양심에 따라 수행되어지는 행위라고 한다. 이외에 혹자는 순전한 양심에 의한 율법의 행위, 고도로 개선된 자연적인 율법 행위, 의식 율법의 행위, 도덕 율법의 행위 이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하여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포했던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시 143:2의 '인생'을 의도적으로 '육체'( , 사르크스)란 용어로 바꾸어 인용했다. '사르크스'는 단순히 인간의 몸을 의미하는 헬라어 '소마'( )와는 달리 죄와 대항하기에는 무능력하고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의미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율법은 인간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두려워 탄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옷입어야 한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 - 한글 개역성경에는 없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접속사 '데'( )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본절 전체가 지금까지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M. Lloyd-Jones)는 '그러나 이제는'( , 뉘니 데)이란 용어를 '대전환점'(The great turning point)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그는 본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논리의 시작이라는 점과 아울러 본 서신 전체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이제는'이란 단어가 시간상의 대조, 즉 '율법 아래 있을 때'와 '율법에서 자유로울 때'를 대조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Sanday, Headlam). 그러나 이 단어는 로이드 존스(Lloyd-Jones)의 견해와 같이 인간 상태의 전환(轉換)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율법에 의존된 관계'와 '율법에서 벗어난 관계'간의 대조를 나타낸다. 율법 외에 - 이 표현속에는 율법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나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그 의를 옷입을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고 율법의 의 이외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한 의 -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의가 '중생의 은혜이며,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자 값없이 주신 은혜이고, 율법의 행위를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칼빈(Calvin)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하면서 좀더 부가적으로 시 32:1의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적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선행이나 심지어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선행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의'는 이미 구약성경의 율법에 나타났던 '절대적(絶對的)이고 객관적인 의'로서 이제는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칼빈(Calvin)은 본 구절을 '복음이 값없이 의를 주는 점에 있어서 율법과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가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혹자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과 본 구절의 '율법'과의 의미상 차이를 설명하면서 전자는 '칭의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며, 후자는 '칭의를 전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Murray).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의 의미와는 달리 '선지자들'이라는 단어와 함께 단순히 구약성경 전체를 나타내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단순히 '성경' 이라고만 말씀하시기도 했으며(마 21:42;요 5:39), 또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마 5:17;7:12;11:13;22:40;눅 16:16) 혹은 '모세와 선지자들'(눅 16:29, 31)등으로 언급하셨다. 본 구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구약성경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 그는 이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정시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시작한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영접하는 주관적인 고백에 의하여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선언하는 법정적 판결은 '믿음을 통하여'( ,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며,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는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새로운 삶의 운동력이 되며 또한 새로운 삶을 주관하는 원리(原理)가 된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친다'라고 진술하지 않고 '믿는 자'( , 투스 피스튜온타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갈 2:16에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표현하였다 (1:17).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인류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만한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비로소 믿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본절에서 시사하고 자 하는 바울의 의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며 그 주시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더할 수 없다. 특히 '믿는 자'를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적인 믿음의 구체적인 것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믿음은 과거의 것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며 미래의 예정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계속 믿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차별이 없느니라 - 율법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고 죄있다고 기소(起訴)하는데 차별을 두지 않듯이, 새로 나타난 한 의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마음의 손'이다(Harrison, Godet). 따라서 그 손을 내미는 모든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24절).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고 그 의로 옷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20절)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다시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한 것. 헨드릭슨(Hendriksen)이 이견해를 지지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된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 근거 구절로는 고전 11:7;고후 3:18;8:23 등이 있다. 본절은 '죄'와 매우 밀접한 구절이므로,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여해 주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다.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표현을 바울이 엡 1장에서 주로 사용한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엡 1장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며,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실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나 '값 없이'란 말을 내용상 차이점이 없다. 다만 '값 없이'란 말이 부가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드러나며, 또한 '구속'이란 말이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과 관계되어 있기에 강조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행위임이 부각된다. 따라서 '값 없이'란 말은 엡 2:8에 언급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와도 일맥 상통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 헬라어 '디카이우메노이'( )는 현재 분사 수동태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의롭게 되는 것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값 없이'( , 도레안)라는 단어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 있는 바,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분사적 의미는 22절에 기록된 현재 분사 '투스 피스튜온타스'( , '믿는 자들을')와 연결되어 있다. 후자는 '믿는 자'라는 능동적 의미를 시사한 반면 전자는 '이롭다 함을 받은 자'라는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바울은 수동형과 능동형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 의지를 대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엡 1:7) 구원의 영광을 부각시키고 있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의 피 - '피'는 '생명'을 상징한다(레 17:11).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심은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바쳐 희생시키셨음을 의미한다. 화목 제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힐라스테리온'( )인데, 이 단어의 번역에 따라 견해 차이가 생긴다. 속죄 제물(expiation)을 의미한다는 견해. '힐라스테리온'( )이 히 9:5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혹은 '시은좌'(mercy seat)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행해지는 '온 백성을 위한 속죄' 행위를 강조한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5절;1:18;2:5)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속죄뿐 아니라 백성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우셨으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티데미'( )는 '계획을 도모하다', '제출하다', '앞에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절에서는 '의도하다'란 의미가 적절하다(1:13;엡 1:9). 길이 참으시는 중에...간과하심으로 -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것'( , 아노케)은 결코 하나님의 불의하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알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신 것'(행 17:30)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간과'(看過)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인내로 말미암아 죄의 가리움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시 32:1).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곧 이 때에 - '카이로'( )는 정해진 때를 의미하는데 이 때는 종말론적인 시기,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실현하시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던 시기와 대조를 이루는 때로서 지금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인 칭의를 제공하는 때를 의미한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오해되어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를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로 삼으사 그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진노와 저주를 담당케 하신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처사는 여전히 공의로우시며 그의 공의로운 처사를 따르는 자들도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 - 본절에서 '의'를 뜻하는 '디카이오스'( )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 )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 )는 앞에 있는 두 의로움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으므로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되는 사건 곧 의롭다고 간주하는 신분의 변화가 현재적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자랑할 데가 어디뇨 - 인간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 자신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바울은 '믿음의 법'을 행위와 대조시킴으로써, 믿음이 결코 인간 편에서 취한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선물에 불과하다(엡 2:8).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므로 - 어떤 사본에는 접속사 '가르'( )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같이 본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면 27절에 종속되어 부가적인 설명이 된다. '믿음의 법'에 대한 변호를 위해서 본절은 독립적으로 해석되기보다 종속적으로 해석되는 편이 타당하다. 우리가 인정하노라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를(26절) 의미하며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인정하노라'에 해당하는 헤라어 '로기조메다'( )는 '생각하다'(롬 4:3;갈 3:6;약 2:23) '추론하다' 또는 '결론을 맺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로기조마이'( )의 현재 중간태로서 '그러므로'가 지시하는 두 가지의 요소를 확고 부동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성도들과 더불어 확실하게 결론을 맺은 두 가지는 (1)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누구든지'라는 사상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킨 종족 수호신의 개념을 공격하면서 범우주적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근동 지방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나라로서(출 19:6) 열국의 구속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무시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율법의 준행과 할례 제도의 시행이 그러한 자신들의 신앙이 옳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확신했다.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의 잘 못된 신앙관을 비판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믿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 조차도 감히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 모독과 같이 무거운 범죄에 해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의 교만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되심을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을 '고임'(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동자들과 같은 '집단' 또는 '무리'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혈연 관계의 결속(結束)보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여졌다. 족장 시대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없으나(창 12:2;18:18) 시내산 계약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별 의식과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는 민족 의식에 의하여 배타 의식은 강화 되었다. 특히 헬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어서 '이방인'( , 에드노스)이라는 말 자체가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서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사 11:10) 참 이스라엘의 영광을 높이는 자로서(사 60:5, 6) 묘사되었으며, 그들의 구원은 메시야가 오셔서 참된 빛이 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사 42:6;49:6)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말 1:11). 예수께서도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방인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셨으며(눅 17:18) 또한 제자들을 이방 가운데 파송하시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하셨다(마 28:19, 20).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동참한 이방인(갈 3;14)은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또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된 것이다.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이신 칭의를 얻는 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유대인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함을 바울이 그동안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적절하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이신 칭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란 의미로 이해된다. 29절의 내용에서도 역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바울이 주장했던 점을 참고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20절)고 주장했으며, 또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21절) 주장하면서 믿음의 법(27절)을 율법과 배치되는 원리로 설명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직접 주신 그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현재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간의 단절이 생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절의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은 신약과 율법이 서로 배치(背馳)되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대에 마르시온(Marcion)뿐 아니라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저급한 신(Ialdaboath)으로 취급하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이 말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지킨다'란 의미이다. 어떻게 해서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있는가 ? 이에 대한 대담은 이신 칭의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은 그 의를 받게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증거된 율법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율법의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며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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