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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
| 3. |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
| 4. |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
| 5. |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
| 6. |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
| 7. |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
| 8. |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
| 9. |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
| 10. |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
| 12. |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
| 13. |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 보지 아니 하심이라 |
| 14. |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너랴 |
| 15. |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
| 16. |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 "합리하게"(* , 레미쉬파트)는 문자적으로는 '의롭게', '올바르게'라는 뜻이다. 욥이 자기의 순전함을 그토록 강조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푼 처사의 혹독함에 대하여 계속 주장하였을 때는 그가 실제로는 "내 의로움이 하나님이 내게 내리시는 심판이 더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의롭지 못하다고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그런 불의를 돌릴 수는 없다.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 "당신은 사실상 '내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움보다 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나는 하나님이 여태껏 내게 행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노라. 그래서 손익을 회계해 보면 그가 내게 채무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마치 자기의 봉사에 대한 지불이 실제보다 더 박하게 보상되었고, 자기 죄악은 실제로 받아야 마땅한 징벌보다 더 심하게 벌 받은 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누구든 품어서는 안 될 아주 부당하고도 악한 생각이었으며, 특히 이런 말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더욱 더 그러하였다. 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 욥이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종교가 주는 특전과 유리한 점을 부인한 데 대해서. "내가 내 죄에서 깨끗하다고 한들 내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시편 기자는 시편 73편 13절에서 자기의 고통과 악인의 융성함을 비교해 보고는 시험을 받아 "내가 내 심령을 정하게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 "내가 내 손을 아무리 정하게 한들 나의 가까이 나아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당신께서 나를 도랑에 처넣으셨나이다." 또 10장 15절에는 "내가 악하다고 할진대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 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매일반이니이다"라고 하였다. 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 문자적으로는 욥과 함께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엘리후가 34장에서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논쟁에 끌어들인 반면, 여기서는 아마도 '욥의 입장에 대해 동정과 찬성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Pope). 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 하나님은 인간이 바로 서 있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Caelumque tueri jussit-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명하셨다. 우상 숭배자들은 위를 쳐다보고 하늘의 천군들과 해나 달 따위의 일월 성신에 경배 드렸으나,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기는 하되 만군의 여호와께만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일월성신이 우리 위에 높이 떠 있으나, 하나님은 그들보다 무한히 높이 계신다.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 "높은 궁창"(* , 쉐하킴 가브후)는 '구름'(신 33:26;사 45:8), '궁창'(37:18) 등을 뜻하는 '솨하크'(* )와 '높아지다', '고양되다'라는 뜻인 '가바흐'(* )의 파생형으로 구성된 말이다. 특히 여기서 '가바흐'(* )는 땅 위에 있는 인간의 낮음과 대조되는 높은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위엄과 초월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엘리후가 신성 모독적인 욥의 말에 대해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초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상을 예로 들어 깨닫도록 하는 '교육적인 훈계'라 하겠다(Habel).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 '영향'의 '티페알'(* )은 '행하다', '저지르다'는 뜻의 '파알'(* )의 파생형이다. 그런데 '파알'(* )이 사람의 행위를 묘사할 때는 그 사람의 도덕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으며, 긍정적인 의미보다(시 15:2;습 2:3) 보통 부정적인 뜻을 나타낸다(34:32, '불법';잠 30:20, '사악함';사 44:15, '우상 숭배'). 따라서 본절은 '네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행할 수나 있겠느냐?'는 말로서,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고 위대한 분이시기에 인간의 그 어떤 악행으로도 그분에게 조그만 충격이나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 죄인이 죄 가운데 죽는 다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죄인의 악한 뜻도 무능한 악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그의 존재나 온전하심을 파괴할 수도 없고, 그의 권세와 주권의 보좌에서 그를 끌어 내리지도 못하며, 그의 재산이나 소유가 되는 것들을 줄이지도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나 안식을 어지럽힐 수도 없으며, 그의 의도나 계획을 패배시키지도 못하고, 그의 본질직인 영광을 훼손시킬 수도 없다.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 인간의 선과 행실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참된 선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그것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악은 하나님의 능력을 막을 수 없다. 그러니만큼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무익한 종이라고 할 것 뿐이고(눅 17:10), 악을 행한 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마땅하다.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무관심하시거나 인간의 죄악에 대해 방관하신다는 이신론(deism)적인 사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도 하는 이 사상에 의하면 신은 일단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스스로 진행되도록 법칙(자연 법칙)을 두시고 당신은 일체 피조 세계의 사건이나 역사에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신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 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욥의 인간적인 시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의로움을 '신적 초월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받거나 낙망하시거나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연약하여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많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외모나 보이지 않는 권력이나 지식이나 학벌 가문등 세상적인 것들로 인하여 늘 비교하고 자신을 평가하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인격적 모독이나 위협이나 칼등으로 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롬8:35)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6:5).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였음이니이다 (사64:6~7) 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 학대(* , 아슈킴)는 '압박을 가하다', '사기를 치다', '폭력을 행하다'라는 뜻의 '아솨크'(* )의 명사형이다. 이 단어는 권세나 권력의 남용 혹은 국가적인 지배의 폭압성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 복수로 사용된 것은 그 만큼 폭압의 강도가 큰 것을 의미한다(Hartley). 본절 전체 내용은 억울하게 압박받는 백성들의 고통과 그들을 짓누르는 세력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 "많은 억압으로 인하여, 오만불손한 독재자들이 가난한 자에게 내리는 많은 신고와, 폭군들이 저들에게 주는 야만적인 대우가 학대받는 자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나, 그 울부짖음이 전혀 헛되도다. 그들은 소리쳐 부르짖으며 자기들 위에 무겁게 누르고 있는 세력있는 자의 팔로 인하여 울부짖기를 계속하고 있도다." "성 중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여 상한 자의 혼이 압제자들에 대하여 부르짖되,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어리석음을 놓지 않으시며" 그 일로 인하여 그들과 셈하지 않으시도다. 10.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 '노래하게'의 '제미로트'(* )는 문자적으로 '노래들'을 뜻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 단어의 원형 '자마르'(* , 노래하다, 찬양하다)의 명사형 '자마르'(* )가 '폭력', '용기', '능력'을 뜻하는 아람어 '다마르'(*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Pope). 그리고 하틀리(Hartley)의 경우는 이 주장을 수용하면서 노래하는 것, 특히 밤에 노래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감성적인 힘'을 복돋아 주는 것이라고 본다. 즉, 본절에서 노래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용기라는 것이다. 어쨌든 본절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이 사무치는 밤 중에 노래를 주심으로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되어 주시는 분으로 설명되고 있다.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 직역하면 '그는 우리를 땅의 짐승들 이상으로 가르치신다'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동물보다 더 존귀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존재로 대우하셨다는 의미이다(Lange). 반면에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동물을 통하여 사람을 가르치신다'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Delitzsch). 이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짐승들이 자기들의 고통과 욕구를 부르짖는 것을 통해 인간들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 짐승이나 새는 먹이나 약을 찾아내는 일과, 피난처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놀랄 만한 본능과 지혜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내 조성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며 물을 수 있는 짐승이나 새는 하나도 없다. 논리학과 철학, 정치학 따위와 비슷한 것들이 야성의 피조물들 사이에서 관찰돼 오고 있으나, 신성이나 종교에 대한 것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 '교만'의 '게온'(* )은 '일어서다', '자라다', '승리를 몹시 기뻐하다'란 뜻인 '가아'(* )의 파생형이다. 본절에서는 백성들을 폭압하는 자들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만'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기서(* , 솽) - 장소적인 의미로는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자리', '그 현장'을 뜻하나(70인역, 제롬 역본), 오히려 시간적인 의미의 '그 때에', 즉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Delitzsch). 한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13절에서 밝히고 있다. 13.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 보지 아니 하심이라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 "헛된 부르짖음"(* , 솨우) 문자적으로는 '공허', '허무', '허위'라는 뜻이다. 십계명 중 제 3계명의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의 '망령되이'가 바로 이 단어의 부사구로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는(12절) 이유가 이처럼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공의에 의혹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엘리후가 욥의 부르짖음 일체를 단순히 헛된 것으로 단정했다면 그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입술로써만 중언 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다는 지적은 명확한 것이다(Delitzsch).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 직역하면 '관심을 두지 않다'이며(NIV, pays no attention to it), '그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난하다(Lange). 본절에서 엘리후의 논점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압박받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오직 자기들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도리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당연히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고 아예 관심조차 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엘리후는 하나님의 판단을 호소하며 기다리는 욥의 태도가 무익한 것임을 공박하는 것이다(Habel). 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너랴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 '일의 시비'(* , 딘)는 '심판하다', '동의하다', '호소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딘'(* )의 명사형이다. 욥이 하나님 앞에 당당히 자기의 송사 문제를 제출해 놓고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자신의 무죄와 결백이 선언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태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엘리후는 바로 이러한 욥의 당당함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위선적인 호소'를 발견하였다. 엘리후의 눈에는 욥의 이런 태도가 '헛된 부르짖음'의 극치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15.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 하나님께서는 그의 노여움 가운데에서 당신을 찾으셨고, 당신이 마음 속에서 그를 신뢰하기를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토록 완악한 의구심을 품은 데 대해 불쾌하게 여기셨습니다." 만일 우리의 고난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올바로 처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쟁하며 초조해 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신의 섭리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욥의 경우가 바로 이러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며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16.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 엘리후는 욥이 그처럼 지독한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야만 마땅한데도 이 점을 알고 있지 못하고,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이 헛되이 자기 입을 열었다"고 결론짓는다.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 그는 그의 불평을 호소하며, 그것들에 대한 교정을 부르짖고, 자신의 의로움을 정당화하여 그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며, 기다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올바른 존경심을 품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그가 "말은 많이 하였으며" 아주 많은 지식을 늘어 놓았지만, 그러나 모두가 전혀 실천적이지 못하고 지식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를 겸비하지 않으며, 그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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