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
| 2. |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
| 3. |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
| 4. |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
| 5. |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
| 7. |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
| 9. |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
| 10.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
| 11. |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
| 12. |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
| 13. |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
| 14. |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
| 15. |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
| 16. |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
| 17. |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
| 18. |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
| 19. |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
| 20. |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
| 21. |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
| 22. |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
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 본장에서부터 37장까지는 욥의 마지막 변론 부분과 하나님의 현현(顯現)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는 전환부에 해당한다. '스스로'는 직역하면 '그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KJV, NIV, RSV, NASB, in his own eyes)이다. 70인역(LXX)과 수리아 역본은 '그들의 보기에'(in their eyes)로 읽는다.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 이 구절은 자기 견해에 따라 무죄를 확신하는 욥에 대해 더 이상 변론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 친구들이 그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잠시 침묵의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한다. 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 "람"(높은.높여졌다) "부스"(멸시) "바라겔"(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심) "엘리후"(그는 하나님이심) 엘리후의 이름과 함께 그 조상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 것은, 엘리후가 다른 세 친구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며, 또 아버지 바라겔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 라는 의미이다. 그 외에 '람', '부스'등 또한 구약 성경에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다(창 22:20,21;룻 4:19).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 엘리후가 욥에 대하여 분노한 이유이다. 세 친구들이 욥의 결백 주장에 더 말을 못 하고 침묵했던 것에 반해 엘리후는 욥의 태도가 하나님의 성품과 존위(尊位)를 위태롭게 하는 불경건한 교만임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변호하고자 나선 것이다. 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 그들은 욥을 위선자로 규정하였으며, 사악한 사람이라고 판결하고도 욥에 대한 그 판결에서 추호도 후퇴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욥이 외식하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였고, 그가 자기의 온전함에 대하여 제시한 증거를 뒤엎을 수 있는 반증을 들지 못하였다.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 이 구절에서 '정죄함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레시야우'(* )의 '와우'(* )를 설명형 '와우'로 보고, 엘리후가 세 친구들에게 화를 낸 것은 '그들이 욥의 범과를 증명할 만한 아무런 답변도 마련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Blommerde). 하지만 전후 문맥이나 엘리후의 변론 내용의 성격 등을 미루어 볼 때, 여기서 엘리후가 노를 발한 것은 세 친구들이 욥을 적절하게 반박하지 못한 사실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욥의 문제나 잘못을 바로 지적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무리한 언설만 늘어놓은 친구들의 단견과 편견 때문이라고 봄이 무난 하겠다(Delitzsch, Kamphausen, Lange, Rawlinson). 4.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 여기서 저자는 엘리후가 논쟁의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가 끝부분에 와서 갑자기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엘리후는 연장자가 말을 할 때 연소자는 조용히 듣고 있어야 하는 사회적 전통을 지키며 젊은이다운 겸손을 유지하였던 것이다(6,7절).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 이 구절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엘리후가 '무엇을 기다렸는가'를 문법적으로 분명히 설명해야만 한다. 한편 '말하기를'은 매우 난해한 표현의 하나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드바림'(* )은 히브리어 모음 독법에 의하면 '그들이 말하는 동안에'(ehile they were speaking)로 읽을 수도 있다(Hartley). 이렇게 볼 때, 엘리후가 계속 주목해온 대상은 다름 아닌 욥이었으며, 그들이 대화하는 중에는 '욥 개인에 대한 자신의 태도나 감정을 참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엘리후는 그들의 논쟁을 계속해서 주의 깊게 들었으며, 설령 그들의 주장에 잘못된 점들이 발견되었을 때에라도 연소자로서 연장자들의 말이 끝날때까지 감정과 반론을 억누르며 참아왔음을 알 수 있다.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 그는 욥의 친구들의 침묵도 참고 기다렸다. 이는 그가 욥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저들의 말에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보다 현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보다 연장자였으므로 그들이 먼저 발언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이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엘리후는 겸손하여서 그들의 특권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 여기서부터 엘리후의 본격적인 연설이 시작된다. 첫 번째 연설은 본절부터 33장 끝까지 진행되며, 고난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고난은 죄에 대한 형벌-이 견해는 세 친구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주장된 전통적인 고난관이다-외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에 근거를 둔 고난도 있다는 것이다. 엘리후는 고난에 의해서 정화되어야 할 욥의 죄를 '교만'이라고 지적함으로써(33:17) 욥의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는 어떤 식으로든 우선의 규칙이 지켜져야만 한다. 그러나 내적 참 명예는 진정한 지혜와 참된 가치를 따른다고는 하나,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친구들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가치있는 사람인 줄 생각하기 때문에 외적인 형식적 명예를 지정해 줄 수 있는 척도란 쉽사리 세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은 질서를 잡기 위하여 연령이나 직책의 순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 엘리후 자신이 얼마나 연장자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말하기를 조심스러워 했는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참고' 혹은 '감히'의 '자할'(* )은 (개역 성경의 번역으로는 '참고'와 '감히'가 각각 원문의 어떤 단어를 번역한 것인지 분명치 않음) '움츠러들다', '두려워하다'의 뜻으로 깜짝 놀라서 움츠러든 모습을 표현한다. 이 단어의 파생형들은 종종 '일정한 위치에서 한쪽에 비켜서거나 물러서는 것'을 의미하며(Delitzsch), 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기어가다' 혹은 '살금살금 걷다'로 표현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아람어의 관습적인 표현으로 '매우 무서워함'을 뜻한다(Habel, Lange). 한편 히브리어 본문 내의 '야레'(* )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의 뜻으로 앞 단어 '자할'의 의미를 강조하는 반복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7.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 "말하기"(* , 아마르티)은 '말하다', '혼자 말하다(생각하다)', '의도하다', '명령하다'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아마르'(* )의 1인칭형으로, 본절에서는 '이야기했다'는 뜻보다는 오히려 엘리후가 자신의 할 말을 미리 마음속에 되뇌어 보았다는 의미에서 '생각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NIV, NASB, I thought). 연륜과 경험은 사물의 판단에 있어서 큰 이점을 인간에게 제공해 준다. 나이와 경험은 인간의 사고력이 작용할 소재를 공급해 주며, 나이나 경험의 다과는 사고의 대상이 되는 재료의 다소와 비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 '가르치다'의 '요디야우'(* )는 '알다'(* , 야다)의 사역형으로(알게 하다. make known) 쓰였다. 그러나 70인역(LXX)은 이것을 일반형인 칼(Qal) 동사로 읽어 '알다', '깨닫다'는 의미로 옮기고 있다. 그 연령과 경험은 인간이 구사하는 기능을 더욱 성숙하게 하며 향상시킨다. 그러므로 노인들이 스스로 배우는 일과 남을 가르치는 일에 고심하는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그렇지 않다면 나이가 많아 얻는 것은 그들의 치욕밖에 없을 것이다), 또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의 교훈에 간청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된 제자와 더불어 유숙함"은 좋은 일이다(행 21:16; 딛 2:4). 8.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 연소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장자인 저들을 가르칠 수 있는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임한 깨달음 때문임을 주장한다. '심령'의 히브리어 '루아흐'(* )는 사람의 영혼 혹은 전인격을 의미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신적(神的)인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 '전능자의 기운'(* , 니쉬마트 솨다이)은 직역하면 '전능자(하나님)의 호흡'이다. '사람에게'는 원문상으로는 복수로 표현되어 있으나(KJV, giveth them), 총체적 복수를 의미하는 단수로 이해할 수 있다(NIV, RSV, Dhorme, gives him). 여기서 엘리후는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통찰력이 인생의 연륜에서 얻어지는 일반적인 지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함과 아울러 그 자신의 진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된 신적 권위가 있는 것임을 주장하는 표현이다(Hartley). 9.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 대인(* ,라빔)은 '많다', '많게 되다'의 뜻을 가진 '라바브'(* )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동사형에서는 종종 '위대하다'란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대장', '두목'을 뜻하는 명사 '라브'(* )가 파생되었다. 개역성경은 이런 점에서 '대인'으로 번역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제케님'(* , 개역성경은 '노인'으로 번역함)과 병행을 이룬다는 점에서 '연장자'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Hartley).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 엘리후는 나이 많은 연장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지혜자로서의 판결권을 부정하고 있다. 그 정당성은 8절에서 언급되었다. 즉, 지혜를 깨달아 공의를 판별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영감에 있기 때문에 단지 나이가 많아 인생의 경험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 "그는 연소하므로 자신의 의견을 감히 진술하지 못하였었다. 그 까닭은 자신이 실수한 것으로 판명되거나 내 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될까봐 주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건의 경과를 하나같이 모두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자기의 귀에 들리는 말에 열심히 그 마음을 기울였던 관계로 그 일에 대한 시비 판단이 저절로 그 마음 속에 형성되었다.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 '의견'에 해당하는 '데이'(* )는 통찰력과 깊은 경험에서 비롯된 앎을 뜻하는 '야다'(* ,알다)의 파생 명사로 본절에서는 '지식', '깨달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엘리후는 단순히 자신의 '말', '담화', '언설'을 진술하겠다는(Ginsberg)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영감된 자신의 통찰력을 개진함으로써 욥과 친구들에게 참다운 지혜와 공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겠다고 공언하는 것이다. 11.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 엘리후의 점잖은 자기 연장자들이 한 말에 기울인 그의 인내심은 깊은 주의에 나타난다(11, 12절). 그는 이 근엄한 선배들에 대해 품었던 선입관을 따라 그들에게서 무척 많은 것을 얻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말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저희의 논리적 전제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것은 그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서였고, 또 저희 담화의 취지가 무엇이며, 저희 논증의 강점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열심히, 그리고 조심성을 가지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보는 동안에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당신들이 할 말을 찾는 동안에'(NIV, while you were searching for words)이다. 이 친구들의 '할 말'이란 욥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잇을 만한 말(논박)을 가리킨다. 또한 이 말은 세친구들이 결코 그런 합당한 답변을 찾을 수 없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그들은 당시의 지성을 대표했던 자들로 보이며, 그들의 지혜는 오랜 연구와 조상 때로 부터 물려온 전통(5:27;8:8) 등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 그들이 생각을 정리하고 할 말을 찾아내는 데에도 무척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마는 그는 참고 경청하였다. 비록 저들이 명제의 핵심과 표현 어귀를 찾아 내려고 끙끙대며 또 중단하기도 하고 머뭇거리는 등 자기들의 과제에 대하여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으나 그는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저들의 변론에 귀를 기울였다. 12.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 "자세히 들은즉"(* , 아디켐 에트보난) 직역하면 '(내가) 당신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본즉'이라는 뜻이다. '에트보난'(* )은 '이해하다', '숙고하다', '신중히 하다', '중시하다'의 뜻을 가진 '빈'(* )의 파생형으로 '주의를 기울이다'(NIV, gave you my full attention)는 의미이다. 특히 이 단어 앞에 있는 '아드'(* ,to)는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를 강조하는 전치사로서 커레이(Carey)는 이를 종종 '힘닿는 한'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엘리후가 주의를 기울인 것이란, 친구들의 대답 속에서 욥을 적절히 논박하고 있는지의 여부라 하겠다. 이 사실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 욥을 꺾어(* , 모키아흐) '결정하다', '증명하다', '책망하다', '꾸짖다'의 뜻을 가진 '야카흐'(* )의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엘리후가 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주된 이유가 무엇이며 또 그가 친구들의 침묵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엘리후는 더 이상 친구들에게서 욥의 주장을 꺽어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을 기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Delitzsch). 13.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 이 변론을 진리의 빛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필요불가결한 상황이었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구나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또 당신들이 욥에 대한 당신들의 변론이 결정적이고도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여길까 두려워하여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기를 욥은 당신들의 이 주장 외의 어떤 변론에도 수긍하고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 '이길 자'의 '이드페누'(* )는 '쫓아 내다'의 뜻을 가진 '나다프'(* )의 파생형으로서, 이 어근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델리취(Delitzsch)는 이 단어를 바람이 하찮은 것들이나 마른 잎들을 땅으로부터 쓸어가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악인을 멸하시는 '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을 볼 때(시 1:4) 세 친구들은 욥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을 변명이라도 하듯 욥의 완고함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심판에다 떠맡기고자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엘리후는 바로 저들의 이런 속마음을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엘리후의 말에 의하면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대신에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일'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4.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 직역하면 '욥이 나(엘리후)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이다. '아니하였다'에 따르는 부정사 '로'(* )를 탄원형 '루'(* )로 읽어 이 구절을 '그가 한 말은 바로 나에 대한 것이었다'라고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Pope). 이에 대해 앤더슨(Anderson)은 과연 욥이 자신의 진술 내용 속에서 엘리후를 논쟁의 상대자로 포함시켰느냐의 여부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어떻든 간에 중요한 것은 엘리후가 자신의 논지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를 밝히고 있는 후반부의 내용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결국 우리는 어떤 단어의 대체 없이 그대로 읽으면서, 욥과 직접 논쟁을 하지 않았던 엘리후가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욥의 고난에 대해 그에게 교훈해 줄 수 있는 유리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 엘리후는 그들의 논단을 반복하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원리에 따라 행하지도 아니할 것이다. 나는 당신들과 똑 같은 방법으로는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들처럼 욥에게 대해 논리적이지 못하고 편벽되어 억지를 부리는 따위의 잘못은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만약 자기가, 이미 굳어져 버린 것에 대해 수정하거나 개선시킬 수가 없는 경우에는 그것이 이미 충분히 다루어진 논쟁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15.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 이제까지 욥의 친구들이 한 말들은 더 이상 반복 할 필요가 없는 결론이 나있고 굳어져 버린 이야기들 이었으므로 엘리후의 책망하는 말을 경창한 그들은 욥에게 설득력을 보이지 못하고 더이상의 접근과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계속 할 수가 었었다.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 엘리후의 말을 들은 후 그들은 이제 보다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하여 엘리후의 말을 기다려야 했다. 16.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 그들은 말하기를 그만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서서 엘리후의 말하면 듣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발표할 장소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기에게 주어진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피력한 변론에 대해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였다. 만약 만족했다면 그들은 그 재판석을 폐회했을 것이며, 어떤 다른 의견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가만히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 욥과 변론할 만한 가장 적절한 인물이 바로 자신임을 거듭강조하는 말이다. 이제껏 침묵을 지켜온 엘리후가 이렇듯 같은 뜻의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컬하다. 한편 본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웨호할티'(* )는 '기다리다', '소망하다'의 뜻을 가진 '야할'(* )의 파생형에 등위 접속사 '웨'(* )와 1인칭 접미사 '티'(* )가 연결된 단어이다. 이 단어의 '기다림'은 '확신에 찬 기대, 신뢰'를 의미한다. 따라서 저들이 욥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것을 엘리후가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가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해야 본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것이 된다. 17.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 "본분대로" 는 직역하면 '나의 분깃대로', '나의 몫에 따라'이다. 이것은 엘리후가 신적 진리에 의한 통찰력과(8-10절), 진행되었던 논쟁들의 세밀한 분석에 의한 판단으로서(11,12절) 욥에 대해 세 친구들보다 훌륭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들이 완료되었음을 선포하며 자신감을 공식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 당신들의 의견을 나타내 보였으니 만큼 나도 또한 내 의사를 제시하겠으며, 심사숙고하여 들어 주시고 여러분의 반응을 지켜보겠습니다. 당신들의 현명한 의견과 더불어 숙명의 판결을 받게 하겠습니다. 18.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내게 말이 가득하고 -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접속사 '키'(* )가 있어 이 구절이 엘리후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세 친구들은 할 말이 없었던 것에 반해, 엘리후는 온통 하고 싶은 말과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해야만하는 말들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말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지금까지 논란되어 온 모든 것에 대해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내게도 할 말이 가득합니다. 노인들이 신의 섭리를 논하면서 무미건조하게 얘기를 이끌어 가고, 또 그 얘기가 바닥이 날 때는 하나님께 비록 젊은이들이라 하더라도 딴 사람을 세우사 당신의 교회에 유익한 교훈이 될 재료를 그들에게 채워 주게 하신다. 왜냐하면 비록 복음을 말하는 자들은 고갈되 버릴지 모르나 복음 자체는 결코 다 하지 못할 무진장의 논제이기 때이다."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 '강박하다'의 '추크'(* )는 '강요하다', '괴롭히다', '곤경에 빠뜨리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보통 강력한 내적 동기나 엄청난 외부적인 압박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심령에 있어서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훌륭한 목회자가 침묵하고 영적으로 무감각 해져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면 그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보라. 목회자에게는 할 말이 가득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넘쳐 흘러서 타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런 것들에 관하여 꼭 말해야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19.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 엘리후는 자신이 반드시 말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번에는 비유를 들어 반복하고 있다. '보라'(* , 히네)는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강한 권고로서, 마치 엘리후 자신이 정말 터지기 일보 직전에 있는 포도주 가죽 부대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표현을 연출해 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가슴은 마치 부대 속에 가득 채워져 봉해진 포도주가 발효됨에 따라 터져 나올 것 같은,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곧잘 '마음속에 붙은 불'로도 표현된다(렘 20:9).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 예언자가 말하는 것처럼 "골수에 사무쳤던 것이다"(렘 20:9). 또 유모가 젖이 불어 젖을 물리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하더라도 엘리후가 욥의 경우에 대하여 자기 의사를 전달하고자 그토록 오랜 시간을 참느라고 애쓴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20.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 '시원하다'의 '라와흐'(* )는 '넓다', '광활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 단어는 막힘이 없는 광활한 대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함을 연상케 한다(삼상 16:23). 엘리후는 욥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멍에를 벗어 산뜻한 자유를 맛보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 그는 그것을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 안에 있는 심령이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를 내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얘기하도록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내게 만약 분출구가 없다면(내 생각이 안에서 물 끓듯이 소용돌이 치고 있으므로) 그것이 작용하는 날에는 새 가죽 부대가 터짐 같을 것이다.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 '보다'의 '나사'(* )는 '올리다', '운반하다', '가지고 가다'의 뜻으로 22절에서도 사용되었다(개역 성경은 '취하시리로다'로 번역함). 이 단어가 '얼굴'(* ,페니)이라는 단어와 연결되면 특별히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는 것과 아울러 받아들임의 표시로서 '얼굴을 대한다'(삼하 2:22)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불공평한 행동을 누구에게도 행하지 않겠다'(NIV, show partiality to no one ; RSV, show partiality to any person)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한 뜻의 표현이 바로 뒤이어 나타난다. 엘리후는 모든 가능한 자유와 성실을 총동원하여 자기가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말하겠고, 결코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말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나로 하여금 사람의 낯을 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런 일은 편파적인 재판관이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공의를 행하려고 목적 삼지 않고, 자기를 부하게 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아첨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생각되어지는 대로 말하고, 그 밖에 달리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 아첨하지(* , 아카네)는 '재미 있는 별명으로 불리다'의 '카나'(* )에서 비롯된 단어로서, 본절에서는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다', 즉 '아첨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 역시 22절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엘리후는 논쟁을 통해서 어느 쪽-친구들이든 욥이든-을 편들어서 사람의 호감을 사는 데 있지 않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말함으로써(G.L.Archer),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만 자신을 맡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해 주는 것을 바라고 좋은 말만 골라서 말하고 욥의 친구들이 번영을 누리며 명성을 떨치는 자들이라 하여서 경의를 표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욥이 불쌍하고 재난 중에 있다고 하여서, 그의 비탄이 더 심하게 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가 애당초 실제로 단정하였던 것보다 욥의 경우를 동정해서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사실을 말하고, 다만 그로 하여금 그것을 참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라 하여 듣기 좋은 말만 해 주어서는 안 되며, 신실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그로 인해 동정해서 함께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연민에 불과한 짓이다(레 19:17). 그것은 저들의 잘못을 극도로 더 악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하여" 가난한 자를 비호하지도 말며, 불리하게 하지도 말라(출 23:3). 또 함부로 깔보거나 우러러 보기 때문에 공의를 편벽되게 하지 말라. 그것이 곧 사람의 낯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 엘리후가 자신의 행동 기준을 오직 하나님께 두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취하다'는 21절과 같은 단어 '나사'(* )가 사용되었다. 본 문맥에서는 '열풍과 같이 그를 내몰다'(30:22)로 해석된다(Pope). 이런 표현은 엘리후가 자신의 연설이 하나님의 명예를 변호하기 위한 신성한 사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엘리후는 '하나님이 자신을 벌하실 것이 분명하기에 그는 결코 세 친구들처럼 욥에게 아첨하듯 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공포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변호자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편 21절과 본절은 a:b-b:a의 형식으로 구성된 교차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학적 기교는 욥기서에서 매우 빈번히 등장하며, 고대 근동 문학의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의중을 보다 분명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일종의 반복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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