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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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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날개 (jchlove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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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기독자료
개설일 : 2005/02/26
 

1.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3.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4.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6.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7.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8.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9.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10.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11.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12.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13.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14.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 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16.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17.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19.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20.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하지 아니하였던가
21.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22.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23.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24.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25.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26.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27.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28.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29.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30.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31.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32.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33.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34.상동
35.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으면
36.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37.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38.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39.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40.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 구약 성경에서 이 '베리트'는 민족들 사이의 조약과 함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숙한 계약에 사용되었다. 욥이 세운 언약은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하려는 자기 스스로의 결심을 말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자신의 모든 속마음까지도 철저히 정결하게 살기로 서원한 것을 뜻한다. 욥이 세운 언약은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하려는 자기 스스로의 결심을 말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자신의 모든 속마음까지도 철저히 정결하게 살기로 서원한 것을 뜻한다.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 '어찌'는 뒤에서도 계속되는 수사 의문의 골자로서 이에 대해서는 당현히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고 있다. '처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잘 섬기던 바알의 배우자인 '아낫 여신'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Ceresko), '성(性) 관계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처녀를 지칭한다고 봄이 더 자연스럽다. 또한 '주목하다'(* , 빈) '간절히 바라보다'(Habel), '깊이 생각하다'(KJV), '음탕하게 바라보다'(NIV)는 뜻을 가진 단어로, 본절에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서부터 성적인 욕망이 일어날 만큼 찬찬히 바라보는 것을 가리킨다.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 욥은 하나님이 초월적인 분일 뿐만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욥이 고난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선악간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현실적인 보웅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재난에 몰린 상황이 되자, 욥은 자신과 같은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행자들이 오히려 번성하는 모순된 현실에 예민한 눈을 뜨게 되었다.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 부정한 것에 탐닉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극히 부적당한 자들이 되고 말기 때문에, 여기에서 은혜를 얻지 못하거나, 이후에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불결한 영들과 결합하여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때에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분깃을, 무슨 산업을 얻겠는가? 정결치 못한 것은 결코 새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으로 들어갈 수 없다.  
3.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 '불의자'의 '아우알'(* )은 '탈선하다', '돌아서다', '부정하게 행동하다'의 뜻인 '울'에서 파생된 명사로 '당연히 지켜야 할 올바른 기준이나 옳은 행동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특히 이는 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화난'의 '에드(* )는 '멸망', '파멸', '공포', '재앙'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종말론적인 파멸'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 '행악자'는 문자적으로 '아웬(* )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아웬'은 '고통', '슬픔', '우상 숭배', '허무'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모욕을 주고,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과 슬픔을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재앙'(* , 네케르)은 맛소라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말이며, '멀어지다', '적대시하다', '미워하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듯하다(Dhorme). 여기서 욥은 불의와 행악을 용납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언급 함으로써 자신은 그러한 심판 앞에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4.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 '감찰하다'의 '라아'(* )는 '바라보다', '조사하다'의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지만, 특별한 경우엔 하나님이 주시하고 인정하시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내가 네 의로움을 보았다'(창 7:1)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욥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목하여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알았으며, 바로 그 '살피시는 눈'(7:8, 17-20; 10:14;13:27)이 자신의 결백을 인정하실 것으로 믿었다. 한편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길과 걸음을 감찰하신다는 주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시 33:13-15;119:168 ;139:1-4; 잠 5:21).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 앞 구절보다 한층 더 세심한 표현이다. 즉, 길 대신 걸음을, 보는 대신 이제 세어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욥은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계획까지도 분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지혜를 고백하면서 바로 이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시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 '허탄'의 '솨우'(* )는 '공허', '허위'를 가리키며, 물질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실재(實在)하지 않으며 무가치한 무엇을 뜻한다. 욥이 당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친구들로부터 '위선자'로 취급받는 것이었다(4:7-9;8:6, 12;11:4-6;15:30-35;18:5-21;20:5-29). 그것은 곧 욥의 과거의 선행들 마저 모두 거짓된 것으로 돌려버림을 뜻했다.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 만일 합당한 때에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인은 분명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조속하게 틀림없이 임하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이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우매한 자들은 이 죄를 비웃고 그것을 희롱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작은 과오 즉 젊은이의 장난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헛된 말들로 그들 자신을 속인다. 따라서 그들이 그것들을 매우 경솔히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영원한 하나님의 참을 수 없는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엡 5:6).
6.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공평한 저울 - '공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테크'(* )는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와 함께, 재판이나 상업 등에서 편견과 속임수 없는 정확함과 정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거짓 저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정죄되고 있으며(잠 11:1;20:10), 여기서 공평한 저울이란 눈금이 조작되어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저울과는 달리 인간의 마음을 측정함에 있어 조금의 오차도 없으신 하나님의 판결을 가리킨다(잠 24:12). 즉,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장담을 공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 '정직함'의 히브리어 '투마'(* )는 '완성되다', '끝나다'의 뜻인 '타맘'(* )에서 파생된 말로 더 이상 흠잡히거나 비난받을 것이 없는 완전함을 의미한다(아론의 흉패에 넣었던 둠밈도 같은 어근을 가짐. 레 8:8참조). 여기서 욥은 부정직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될 하나님의 심문이 자신에게는 천사와 영예를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M. Henry).
7.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 욥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알았으며, 또 그것을 먼저 깨달은 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29:25). '떠나다'의 '나타'(* )는 '돌아서다', '왜곡하다', '구부러지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용례로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사람의 마음이 돌아서는, 다시 말해서 충성의 대상을 옮기는 배교(왕상 11:2-4,9)를 가리킨다.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 갔던가 - 여기서 욥은 사람의 범죄가 행해지는 일반적인 경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욥은 눈으로 봄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속의 음란한 죄조차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에 생각이 드는 것은 기계적으로 나눌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지만 욥은 눈을 통해서 마음에 생기는 악한 의욕을 스스로의 의지로 눌렀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대한 언급을 연상시킨다(신 13:17). 그러나 단순히 손에 부정한 것이 닿는 소극적인 상황이 아니라, 악을 범하는 과정이나 결과로 인해 그 손이 부정하게 되는 것과 더 나아가서는 손으로 죄를 짓는 것을 뜻한다.(11:15;16:17). 전체적으로 욥은 자신의 신체를 범죄 가능성을 지닌 하나의 연합체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몸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Hartley).
8.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 욥은 자신의 말(7절)이 거짓이라면 자기가 땀흘려 수확한 곡물을 일하지 않은 타인이 먹는 억울함을 당해도 그것을 거짓에 대한 마땅한 형벌로 생각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리라 - 여기서 욥은 본절 전반절보다 더 강력한 비유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즉, 자기가 심은 농산물이 결실하여 거두어들여지기도 전에 멸절하여 농사를 망치는 일도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당연한 형벌로 받겠다는 뜻이다. 농사를 망치는 일은 농부가 수고하고 노동하여 추수를 기다렸으나 오히려 수확하지 못하고 빛 더미에 쌓이는 곤경을 말하나, 혹자는 단지 곡물의 피해만이 아니라, 욥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저주를 받아 망하는 (신 28:18)것을 가리킨다고 본다(Hakam).
9.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 1절에서 욥은 마음의 음욕에 대해서 철저히 자신을
지켰다고 고백했다. 이제 욥은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음행자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성적(性的) 범죄에 대해 자신은 무관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여인'(* , 이솨)은 보통 '여자' 혹은 '아내'를 지칭한다. 이는 1절의 '처녀'보다 육체적, 사회적으로 성숙한 그리고 쉽게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타인의 아내이기에 더욱 성적으로 경계해야 될 신분임을 암시하기도 한다(잠 6:26, 29;7:4-27).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 '이웃의 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성 관계로 보아도 무난하겠다. 왜냐하면 '문'은 이웃의 딸이나 아내의 순결 혹은 성기를 언급하기 때문이다(Habel). 또한 그 '문'을 탐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시도는 율법(출 20:14)과 지혜 문학(잠 6:23-25)에서 분명히 금하고 있는 간음을 가리키며, 그것은 필경 파멸로 이끌 것이다(잠 7:22-27).
10.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 다른 사람의 맷돌을 돌리는 일은 일반적으로 그의 종이 되어 종살이하는 것을 뜻한다(출 11:5). 이에 대해 혹자는 랍비 전통에 의거하여 이것이 '성적(性的)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Gordis, Habel).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 '동침하다'의 '카라'(* )는 '엎드리다', '무릎 꿇다'의 뜻이다. 이 단어는 대개 심한 노동이나 성적인 능욕으로 인한 굴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Hartley). 남편과 아내는 너무도 밀접히 연합되어 있어서 아내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곧 남편 자신에 대해 극심한 수치와 저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Hartley).
11.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이는 중죄라 - "중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짐마'(* )는 '목적하다', '고안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사악함', '책략', '계획' 등을 뜻한다. 본절에서는 사형에 해당할 만큼 추잡하고 의도적이며 극악스러운 범죄를 가리킨다(레 20:14). 간음은 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을 와해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거역한다는 점에서 중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율법에서도 간음자는 사형의 징벌을 당하도록 규정되었다(레 20:10; 신 22:22). 욥 시대에는 아직 율법이 주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경건하게 살았던 욥으로서는 자연히 간음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 - 여기서는 간음죄의 파격적인 '힘'이 불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멸망'의 '아바돈'(* )은 '음부', '무저갱'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본절에서는 간음죄가 죽음 이상의 파멸로 이끄는 죄악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 나의 소산이, 내가 심은 모든 나무가,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이것은 그 죄가 이러한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며, 흔히 이렇게 처벌 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3.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 욥은 또 다른 부분에서의 결백을 언급한다. 종들을 억압하고 혹사시키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 흔했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 또한 그의 종들에게 횡포를 부렸다고 몰아붙였다(22:5-9). 그러나 욥은 그들을 학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 말을 충분히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다른 고대 근동 지역에 비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종들도 인간으로서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다(레 25:42, 43, 55; 신 15:15).
14.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 '일어나실' 에 해당하는 '쿰'(* )은 일반적 의미에서 몸을 세우는 신체적인 행동을 뜻하지만, 거기에는 일어서는 목적도 아울러 고려될 수 있다. 특별히 법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사건을 논술하거나 판결을 선포할 때 혹은 증거를 제출할 때 법정에서 일어서는 행위를 가리킨다(Hartley). 즉, 욥 자신이 종들의 권리를 무시하여 공의를 저버렸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변호하시기 위해 일어나셔서 자신을 정죄하실 것인데 어찌 그런 죄를 범하였겠느냐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 '국문하다'의 '파카드'(* )는 '계산하다', '방문하다', '징벌하다'의 뜻으로 본절에서는 욥이 그의 가솔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하나하나 물어보시고 그 정죄 여부를 가리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자로 이해되고 있으며, 욥은 자신이 만약 종들을 공정하지 못하게 대했으면 하나님께 어떤 대답으로도 번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15.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 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 종들에 대해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는 하나님께서 '일어서시고 국문하시는'(14절) 이유이고도 하다. 그것은 곧 각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창조하신 사실에 기인한다. '만들다'의 '아사'(* )는 행위자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만듦을 의미하며, 특기할 점은 이 단어가 욥과 종에게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본절 하반절에서는 욥 자신과 종이 하나님의 법 앞에 동등함을 '우리'라는 말로 더욱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 본절에서 욥은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보호, 구제의 대상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호의적인 태도를 말하고 있다. '소원'의 '헤페츠'(* )는 '기뻐하다', '욕망을 가지다'의 '하페츠'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소원을 막는다는 것은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필요를 바라는 마음을 무시하여 기쁨을 빼앗는 무자비한 태도를 가리킨다.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 욥은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과부의 눈길을 무시하여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음으로써 저들의 생활을 계속 빈궁한 상태에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의 '소원'과 '눈'은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생필품을 구하는 울부짖음이었기에 이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이 문제로 욥을 비난하엿으며(22:6, 7), 또한 욥은 이 비난에 대해 극구 반박한 바 있다(29:12, 16).
17.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 계속해서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언급한다. 욥은 자신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고아들에게도 음식을 제공했다. 다시 말해 욥은 결코 자신의 배만 채우지 않고 자기 논밭의 풍부한 수확물을 불행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었던 것이다.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젊었을 때부터...아비처럼 - 직역하면 '나의 젊은 시절부터 나는 아버지처럼 그를 양육하였고'이다. '젊었을 때부터'는 욥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보고 배우며 자랐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하며, 그때부터 계속된 구제는 하나의 생활 습관처럼 오래도록 자연스럽게 행해져 왔음을 나타낸다. 한편 혹자는 '나의 젊은 때부터'를 '그의 젊은 때부터'로 바꿔 읽을 수 있다면, 이 구절은 고아가 어렸을 때부터 욥이 마치 그의 아버지처럼 보살펴 준 사실을 뜻하는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Hartley).
모태에서 나온 후로...인도하였었노라 - 이 구절 또한 과부에 대한 긍휼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된 진실한 구제인가를 나타낸다. 즉 이는 욥이 자신의 성품 속에 선천적으로 온화하고 동정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기억할 능력이 생긴 이후 부터 선을 행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M. Henry).
19.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 욥은 단지 음식뿐만 아니라 저들의 의복까지도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었다. 이것은 욥의 선행이 어느 방면에나 소홀함이 없이 온전하고, 저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일교차가 심했던 근공 지역에서는 헐벗음으로 인해 동사(凍死)하는 사례도 충분히 있었음직하다.
덮을 것(* , 케수트)은 - 밤과 낮의 기온 차가 큰 기후 때문에 생긴 의복 양식의 일종으로, 이 단어는 일반적 의미에서 옷을 입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밤에 추의를 막기 위해 덮고 자는 이불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겉옷을 의미한다.
20.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하지 아니하였던가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 19절의 '의복'과 '덮을 것' 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양털'은 그들의 의복에 대한 욕구를 출분히 만족시켜 줄 만큼 훌륭하고 따뜻하며 질긴 옷감이었다(M. Henry).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 직역하면 '그의 허리에서 나오는 것으로 나를 위해 복을 빌게'라는 말이다. '허리'(* , 할라차임;KJV, RSV, loins)는 제유적 표현으로 전인격을 의미한다(Hartley). 따라서 본절은, 욥의 순전한 마음에 의한 선행이 저들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함께 욥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길 기원했음을 의미한다(NIV는 loins 대신에 heart로 번역함).
21.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 '도와주는 자'(* , 에즈라티)는 문자적으로 '나의 도움'이라는 뜻이다. 또한 '성문'의 '솨아르'(* )는 재판이 행해지는 법정을 의미하는 '성문'을 가리킨다(29:7). 따라서 본절은 욥이 공회의 일원이었던 탓에 재판에 있어서 판결을 임의로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즉, 욥은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을 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 여기서 '고아'는 자기를 보호할 힘이나 법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아무런 방법도 없는 무력한 사람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다(Hartley). '손을 드는' 행위는 책망이나 징벌을 하는 공적인 행동을 언급하는 것이나(사 19:16), 여기서는 전반부와 연결시켜 볼 때 공적인 힘을 가장하여 약한 자를 늑탈하는 권력의 남용을 뜻한다. 욥은 당시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던 이런 악행을 그 자신은 결코 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22.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 공의를 집행해야 할 권력을 남용했다면 그 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징벌이 모두 팔과 관련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은 21절의 '손을 들어...쳤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매우 희화적(戱畵的)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 '부러진 팔'은, 구약성경에서 한 사람의 힘이 완전히 파멸되었다는 것과 종종 하나님이 팔의 힘을 꺾으시는 분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시 10:15;37:17;렘 48:25), 욥의 말이 거짓인 경우 그의 모든 힘이 꺾여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Hartley).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 여기서 욥은 자신이 불우한 자들을 끊임없이 돕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단지 사람들과의 관계만 생각할 뿐아니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재앙'의 '에드'(* )는 겔 35:5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시적(詩的)인 부분에서 사용되었으며, 보통 환난, 몰락, 위험을 뜻하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재앙에 대한 이 두려움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판결에 대한 순복을 내포하는 경외를 뜻한다.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 욥의 선행은 결코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어 그 경외로 인해 맏당히 자신의 행할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 자발적으로 실천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 이제 욥은 재물과 관련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 나간다. 즉, 세속적 부(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의 '키실라'(* )는 '어리석게 되다'의 '카살'(* )에서 파생된 명사로 '신뢰'와 '어리석음'을 뜻한다. 그런데 신뢰와 어리석음이라는 뜻이 같은 단어 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의미는 날카롭다. 이것은 그 대상에 따라 참다운 신뢰와 의지가 될 수도 있는 반면에(4:6), 우매자의 어리석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 금으로 자기의 소망을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하였던가 - '의뢰'의 '미브타흐'(* )는 '신뢰하다', '확신하다', '마음이 편하다'의 '바타흐'(* )에서 파생된 명사로 주로 시적 표현에서 사용되고 있다. 금과 정금에 대한 고대 사회의 인식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힘이 되었기에 그것을 통해 사회적 신분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욥은 결코 자신의 삶을 물질적 부에 의탁하거나, 그 힘을 빌어 행동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5.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자기가 결코 이 세상의 재물을 탐내어 마음을 쏟지 않았으며, 그것을 자기의 기업이라고 여기거나 행복이라 여기어 취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황금이 있었다. 그는 정금도 소유하였다. 그의 "부귀는 지극하였고," 그는 "많은 것을 얻었다." 우리의 재산은 우리가 어떻게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이로운 것이기도 하고, 해독을 끼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재물을 우리의 안식처로 삼거나, 우리의 지배자로 받든다면, 그것은 우리로 파멸케 하는 것이 될 것이요, 만약 재물을 우리의 종으로 삼아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는 도구로 삼을 때는 우리에게 그 재물은 복이 될 것이다.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재산 특히 자신
의 능력으로 축적한 재물에 대해 인생의 보람을 삼으며 축적한 재물에 대해 인생의 보람을 삼으며 자랑하지만 욥은 자기의 재물이 풍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힘과 지혜로 인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 이 점은 그가 갑작스런 재난으로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1:21)라고 고백했던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 한편으로 욥은 24절과 본절을 통하여 하나님 대신 재물에 의지한다고 말한 엘리바스의 비난(22:24, 25)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26.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언제 태양의 빛남과 - 태양, 달, 별을 섬기는 고대 근동의 이교적 제사 의식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 부분만 따로 분리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태양'의 찬란한 광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다스린다고 생각케 할 만큼 위엄이 있었을 것이다(Hartley). 그는 바알에게(바알은 태양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으며 엎드려 절하지도 않았고, 태양을 경배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눈이나 마음이나 입술로도 이 일월 숭배의 죄로부터 멀리하였다.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 그 마음이 몰래 꾀임을 받아서 일월의 빛 가운데도 신령한 영광이 있으며, 그것들의 영향력 안에는 신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해나 달에 대하여 신적 영광을 돌려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였다. 바로 여기에 우상 숭배를 하게 되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누구나가 다 "자기 스스로의 욕망에 이끌리어서 꾀임을 받을 때"는 다른 죄악과 같이 이 우상 숭배의 유혹을 당하게 된다.
27.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 욥은 태양과 달의 위용에 자기의 마음이 압도되어 은근히 그것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을 신성시함으로써 자연물 이상의 마음을 품는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손에 입맞추었던가 -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내 손을 내 입에 댔다' 혹은 '내 손이 내 입에 입을 맞추었다'(MT, EBC)이다(개역 성경은 my mouth has kissed my hand로 번역하고 있는 KJV, RSV의 변역과 일치함). '손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신성시하는 대상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는 행동으로 (Pope, 와상 19:18;호 13:2), 본절에서는 분명히 '우상 숭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숭배의 대상이 멀리 하늘에 있어서 직접 그것에 입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손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8.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 우상 숭배는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며, 그 예절을 부패하게 하고, 사회의 큰 단결력인 종교로부터 진정한 의미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시게 된다는 뜻에서 인간의 포기를 초래하는 동시에, 민족에 대한 심판까지도 불러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의 안녕을 보존해야 하는 치안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벌함으로써 우상 숭배를 억제하려고 결심한다.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 그는 그 행위를 하늘의 하나님께 대한 훨씬 큰 모독으로 간주하였고, 그의 왕권과 위엄에 모반하는 대역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리하였다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었을 것이니,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존재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주권을 부인하였었을 것이다." 우상 숭배는 실제적인 무신론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무신론자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는 위에 계신 하나님이나 그의 섭리나 그의 온전하심 중 어떤 것이라도 암암리에 부정하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다 경계해야 한다.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 자기를 가로막는 자들이나 자기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자들을 고의로 해롭게 하고자 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에게 해로운 일이 생기면 넌즈시 기뻐하고(소위) 소매를 가리고 숨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욥은 비록 선량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그를 미워하는 자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흉한 일이 오히려 그를 미워한 자들에게 밀어 닥쳤고 욥은 그의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목도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 "기운을 뽐내었던가"(* , 히테아라르)는 '분발하다', '깨우다', '자극시키다'의 뜻을 가지는 '우르'(* )의 파생어이다. 본절에서는 자기의 원수에게 재앙이 닥친 모습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쾌감과 흥분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쾌감'임에도 욥이 그것을 부인한 것은 그이 윤리 의식이 실로 높은 경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Anderson).
30.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 그는 "그 대적의 영혼에 대하여 저주를 빌지도" 않았고(모든 저주 가운데 가장 심한 저주가 영혼에 대한 저주이다), 그의 죽음을 바라지도 않았다. 욥은 만약 자기가 그런 일을 한다면 그것이 자기에게 대해 죄가 될 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혀로 범죄치 않도록 조심하였고(시 39:1), 그의 입으로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였다.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 성경에서 원수에 대한 태도는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시편의 저주 시(58, 109, 137편)는 신앙의 정도(正道)를 훼방하는 무리들에 대한 미움을 굳이 배제하지 않으며 다른 곳에서도 공공연히 자기를 해하려는 자에 대한 미움과 저주를 언급하고 있다(8:22;12:5;27:7). 또 하나의 태도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출 23:4, 5;레 19:18; 잠 24:17,18). 본절에 나타난 욥의 태도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표준(마 5:43-48;눅 6:27-36)에까지 연결되는 높은 도덕적 실천을 보여주는 것이다(Hartley).
31.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내 장막 사람의 말이
- 여기서 '장막 사람'은 어원상 '천막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외지에서 온 친족 내지는 부인, 자녀 등 가족을 포함하며, 특히 욥의 하인들을 언급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욥이 하인과 친척, 가솔들을 후히 대접하였으며, 그로 인해 욥에 대한 저들의 칭송이 자자했음을 보여준다.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 혹자는 이 부분을 '우리가 그의 몸을 먹을 때에 우리 배가 부르지 않았던가'로 읽음으로써 본절을 30절에 속하는 것으로 주장한다(Arnheim). 즉, '누구의 몸을 먹는다'는 표현은 19:22과 같은 수사적인 의미이며,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고 있음을 의미하며 욥 자신의 순결한 마음을 증명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32.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 욥의 손님 대접의 모습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 구절은 나그네를 극진히 접대한 아브라함과 롯(창 18:1-5;19:1-3)을 연상케 한다. 욥은 여행객들이 도시의 광장이나 넓은 공지에서 쉴 곳을 찾을 때,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머물도록 했다. 때문에 욥은 집 대문은 나그네들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 만약 롯이 혼자라도 접대하지 않았더라면 소돔의 거리에 유숙할뻔 하였던 천사들처럼 "나그네가 거리에서 노숙하게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욥은 바로 그 사례에서 손 대접하기를 잊지 않도록 배웠을 것이다(우리가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교훈을 받듯이) 집안에 있는 자는 집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상대방의 처지를 자기 처지와 바꾸어 생각하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대우를 제공해야 한다. 손님을 환대함은 기독인의 의무이다(벧전 4:9).
33.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 욥이 선한 일에는 꿋꿋한 결단성을 소유한 인물이며, 담대히 나타나서 신앙과 정의를 수호하려고 용감히 외치며 행동하는 동시에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고 협박이나 공갈에 넘어가 자기 의무를 팽개치는 자가 아니며, 안색이 조금도 변치 않는 침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욥은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치안관으로서나 명망가로서의 의무를 얼마나 끔찍히 생각하였는가! 그는 정직한 일을 위해 외쳐야만 하는 요청이 자기에게 올 때는 언제나 잠잠하지 않았고, 감히 침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선을 행하기 위해 밖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집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죄를 질책하고 죄악을 쳐서 증거하도록 우리가 요청을 받으면서도 침묵하며, 비실비실 물러나서 하나님의 진리와 그 길을 옹호하지 않고, 피해를 입으며 억압을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정의를 행하지 않거나, 하여튼 일반 대중에게 봉사하는 일과 우리의 신앙을 영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죄악이 된다.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 '타인처럼'은 문자적으로 '아담처럼'(* , 케아담)이다. 그런데 '아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히브리어 '아담'(* )을 보통 명사로 보아 '일반적인 사람'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Hartley, NIV).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사람들이 보통 (죄를 숨기기 위해) 하는 방법처럼'이 된다. 그리고 로린슨(Rawlinson) 같은 학자는 갈대아인들의 고대 전승에 창 3장의 아담기사와 유사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욥이 아담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따라서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처럼'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두 번째 해석은 '아담'(* )을, 자신의 죄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던(창 3:8) 아담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보는 견해이다(Anderson, Gordis, Habel, Lange, KIV).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6:7을 평행 구절로 제시하며 그것이 '이스라엘의 범죄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야기된 구속사의 발전 단계 중의 한 사실임을 의미'하는 것처럼, 욥의 이 말도 '내가 만약 아담처럼 내 죄악을 숨겼다면' 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취하든, 이 구절을 통해 욥이 의도하려는 바는 '자신의 조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숨기는' 일반적인 경향을 지적하려는 데 있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욥은 자신의 마음속에 죄를 숨기고,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위선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언제나 자신의 행동이 당당했던 것은 결국 죄에 대해 떳떳하다는 사실, 즉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5.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으면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 원문대로 직역하면 '누가 듣는 자를 나에게 주겠느냐 ?'이다(Pope). '듣는 자'의 '쇼메아'(* )는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의 뜻을 가진 '솨마'(* )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절에서는 억울한 사정을 듣고 그것을 해결해 주는 공정한 재판관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에 대해 모두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고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일이다. 그래서 욥은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그러한 판단자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본절 중에 이미 나타나듯 다름 아닌 하나님(* , 솨다이, 전능자)이시다. 욥은 하나님의 판결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내대적의 기록한 소송장 - 욥이 하나님의 판결을 단지 개인적인 말로 요구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번째 표현이다(첫 번째 표현은 '나의 서명'임). '소송장'의 '세페르'(* )는 '보내다', '쓰다'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 '사파루'의 파생 명사로서 보통 '글', '책'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고소장' 혹은 '사면장'을 뜻하는 법적인 문서를 의미하고 있는 듯하며, 양자 중에 어떤 것이냐는 욥의 '대적'에 대한 해석과 36절의 의미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문자적으로 '대적'(* , 아쉬리비)은 '법적 대상자'(adversary at law), 즉 '고소자'(NIV, accuser)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욥의 '세 친구'라는 의견을 제시하지만, 랑게(Lange)는 그것을 문맥에 반대되는 해석이라고 하며 포우프(Pope)와 마찬가지로 '적대자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하벧(Habel)은 이에 대해 좀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그의 이 고소자는 '전능자'일 수도 있으나, 일반적인 중재자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그는 고소자에 의해서 제출되는 '서류'의 성격에 더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결백에 대한 주장들이 하늘로부터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보며, 따라서 욥의 대적에 의해 제출된 서류는 바로 '사면장'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36절에서 욥이 그 소송장을 어떤 태도로 취급하고 있는가를 볼 때 보다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6.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어깨에 메기도 하고 - 어떤 것을 어깨에 걸치는 것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것을 의미한다(Pope). 왜냐하면 통치자는 자신의 어께에 권위와 다스림을 메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Hartley, 사 9:6;22:22).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 전자와 유사한 표현으로, '면류관'은 지혜 문학에서도 명예, 아름다움 및 축복을 상징한다(잠 4:9;12:4;17:6). 이처럼 욥은 자신의 무죄를 통해, 의의 옷을 입고 정의를 수행하는 지도자(29:14)로서 또한 머리에 면류관을 쓴 치리자로서의 이전 지위와 명예를 회복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37.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 '걸음의 수효'는 자신의 삶과 관련된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대유하는 표현이다. 또한 이것은 외형적인 행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생활 방식 등 내면의 모습까지도 포함하는 인생의 총체적인 내용을 의미한다. 이는 아무것도 꺼릴 것 없을만큼 자신의 행위는 결백하기 때문에 자기를 고소하는 자에게도 오히려 대담하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다는 욥의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다.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 '왕족처럼'의 주체는 욥 자신이다. 성경에서 '왕족'(* , 나기드)은 보통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며, 여호와와 왕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Hartley). 그러나 문맥상으로 '왕족'에 대한 언급은 자신의 고소자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섭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욥은 자신의 대적이 고소하는 그 앞으로 위엄있고 당당하게(마치 왕족의 태도처럼) 걸어서 다가갈 것이다. 왜냐하면 욥 자신은 결백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죄에 대한 이토록 확고한 주장은 욥의 진술에 있어서 최고 절정을 이루고 있다.
38.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 그가 소유하던 재산을 욥이 정당하게 획득하여 올바르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토지"는 마치 사기와 착취에 의해 소유물을 얻는 자들에게 하듯(합 2:9-11) 부르짖어 "그를 조소할" 수 없었고, "밭이랑은 그 일에 대해 불평할 수도 없었다"(38절). 온갖 피조물은 인간의 죄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 부당하게 취득되고 보유되는 것은 사람을 걸어 부르짖고, 그를 고소하며 정죄하여서, 자기의 피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그가 치르도록 요구한다. 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기는커녕 그 땅 자체와 그 밭이랑이 그를 쳐서 증거하며, 그를 고소하는 고소인이 될 것이다.
39.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 '값'의 '케세프'(* ) '열망하다','부끄러움을 모르다'의 뜻을 가진 '카사프'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절에서는 일꾼의 '품삯'을 의미한다. 흥미있는 것은 이 단어의 어원이 '재물'을 향한 인간의 욕심을 표현하는 뜻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먹고'의 '아칼'(* )은 '소멸하다', '게걸스럽게 먹다', '다태워버리다'를 뜻한다. 즉, 이 표현은 수확을 위해 일한 품삯도 주지 않은 채 그 소산물을 독차지하는 소유주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 그는 결코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탈취한 것같이, 땅 때문에 그 소유주를 죽이거나, 그 상속자를 죽여서 그 유산을 탈취하지 않았으며, 자기에게서 땅을 빌어 소작하는 자들을 굶어 죽게 하거나, 가혹한 거래 조건이나 혹독한 착취에 의해서 그를 죽인 적도 없었다. 그에게 딸린 어떤 소작인도 일꾼도, 종도 그에게 불평할 자는 없었다.
40.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 만약 욥이 땅을 그릇되게 사용했다면 그에 따른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찔레와 잡풀'은 선지자들이 선포한 바에 의하면, 제멋대로 행하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들이다(사 5:6;34:13;호 9:6). 경작지에서 이런 것들이 자라는 것은 곧 경제적인 기반을 잃게 됨으로 삶이 패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뜻한다.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사람이 만약 부당하게 재산을 취득하면 그 부당한 재산으로부터 얻을 위안은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빼앗기는 것이며, 그로부터 얻으리라고 저희가 바랐던 기대 또한 무너져 실망을 준다. 저들은 저희 땅에 씨는 뿌리지만 열매가 될 실체는 뿌리지 않는 자들이다. 그 씨에 형체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뿌리는 씨는 밀이지만 올라오는 것은 엉겅퀴일 것이다. 정직하게 입수한 것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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