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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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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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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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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 63: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에돔(붉다) 보스라(요해) 그때에 주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에돔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붉게 물든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시는 하나님을 보고, 화려한 옷을 입고 큰 능력으로 걸어오시는 분이 누구인지 묻게 될 것이다. 그분은 바로 여호와시며 의를 말하시는 분 구원하기에 능하신 분이시다. 에돔...보스라 - 전자는 근접해 있는 까닭에 유다와 끊임없는 적대감을 가졌던 국가이며 후자는 위치상으로는 모압에 가까우나 이두매, 곧 에돔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이 두 곳은 본서 저자가 세상의 모든 유다의 대적을 의미할 때 언급한 곳이다(34:6). 홍의를 입고...오는 자 - 여기 '홍의를 입고'는 '하무츠 베가딤'(* )이다. 그런데 '하무츠'(* )는 '(맛이) 신', '(색깔이) 얼룩덜룩한' 어떤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하마츠'(* )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자줏빛, 주홍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원래 자줏빛으로 염색한 혹은 피가 그 옷자락에 튀어 피색으로 물든 용사의 망토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어떤 인물은 이 사실과 뒷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에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하는 큰 용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피묻은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암시한다(계 19:11-1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을 파하신 승리의 십자가였다 (골 2:15). 화려한 의복 - 문자적인 뜻은 '그 의복에 있어 영광스러운'이다. 이것은 고위직에 있는 고대 용사들의 영예롭고 눈부신 군복을 가리킨다. 큰 능력으로 걷는 자 -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표현은 그의 대적을 완전히 섬멸한 사실을 드러내듯 승리의 정복자로서 당당한 보무로 입성하는 용사에서 따온 이미지이다. 63: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하나님은 에돔을 징계하신 후에 피로 물든 옷과,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당당히 나타나실 것이다. 본절은 메시야가 그 대적을 진멸하신 사실을 포도즙 짜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당시 포도즙을 짤 때에는 먼저 큰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밟았다. 한 시간 정도 밟으면 질이 좋지 않은 포도는 맨 위로 떠올랐으며 그후 계속해서 30분 정도를 더 밟으면 향기 좋은 포도즙이 각 송이에서 흘러 나왔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여기서 저자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하고 있는 까닭은 1절에 언급된 '보스라'라는 지역이 포도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Calvin). 이 경우 '보스라'가 포도산지인 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 실감나게 본절의 의미를 파악했을 것이다. 63: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하나님은 에돔의 심판을 통해서 자신이 홀로 악인을 심판하는 의로우신 분이며, 자기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는 분임을 나타내실 것이다. 에돔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포도주 틀을 밟듯이 그들을 짓밟으실 것이며, 이로 인해 주님의 옷은 피가 묻어 붉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대적했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에 민족들의 피가 주님의 깨끗하던 옷에 뛰어 주님의 옷은 온통 피로 더럽혀지게 되었다. 63:4 원수 갚는 날 - 하나님은 마침내 복수할 날이 왔고 구원의 때가 이르렀고 생각하셨다. 여기 '원수 갚는다'는 표현은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돔 혹은 이두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성경은 에돔 자손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까지 파괴할 정도로 악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진술하고 있다(시 137:7). 이 같은 대적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사단의 세력)이 징벌받는 이 날은 역으로 이스라엘(모든 성도)의 구원의 날이다(34:8;61:2 참조). 63: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을 도와서 함께 일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분노로 인해 하나님은 심판을 지체할 수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홀로 나서서 친히 열방을 심판하셨다. 도와 주는 자도 없고...없으므로 - 아무도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조력하지 않으며 조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메시야께서 감당하시는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은 메시야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써 극히 감당하기 힘든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63: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인해 악인들은 비틀거렸으며, 그들의 피가 온 땅에 쏟아졌다. 이러한 장면은 (계 14:19-20)에 묘사된 최후의 심판 장면과 매우 비슷하다. 하나님은 잠시 참고 인내하시지만, 이제 죄악을 낱낱이 심판하여 악인에게는 환난과 곤고와 맹열히 타는 불로 갚으실 것이다. 그들을 취케 하고 - 혹자는 본절을 3절 하반절의 반복적 유사 평행구로 보고 본문의 히브리어 '아솨크램'(* )을 '쳐부수다'는 의미의 '아솨브램'(* )으로 수정하고자 한다(탈굼역, Whybray). 그러나 굳이 원문 수정을 하지 않더라도, 본문은 메시야의 진노의 공포 아래 있는 자가 만취한 자처럼 자제력을 잃고 땅 위에 엎드러져 있는 상황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시 75:8 참조). 63: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이사야는 그때에 주의 백성들이 드리게 될 고백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 때에 주의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고백하게 될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변함 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로 인해 주님를 찬송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그 긍휼과 풍성한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풀어 주신 크신 은총을 제가 전할 것입니다. 63: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주님은 '그들은 내 백성이며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친히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원수의 손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 이것은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킨다.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 -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기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신실할 것을 기대하셨다. 아울러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실수도하고 잘못하기도 하였으나 늘 회개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총을 따라 택하신 백성이 모든 것을 벗어나서 완전이 회복되리라는 암시도 담겨 있다. 63: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주님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사자와 천사를 보내시고, 주님께서 친히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을 높여 주셨고 그들을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자기 앞의 사자 - 이 사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였던 적이 있다(출 32:34;33:2;민 20:16). 따라서 천사로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 가브리엘(눅 1:19), 미가엘(단 10:13-21)로 보는 견해가 있다(Clark, Jarchi). 그런데 이 용어는 오실 메시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서 이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 14:19;23:20, 21). 따라서 본 용어는 1차적으로는 천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예표하는 용어로 정리하면 되겠다. 드시며 - 그의 양떼를 모든 목자 혹은 그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혹은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독수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출 19:4;신 32:11, 12).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의 연단 중에서 보존하시고 결국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신 것을 가리킨다.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반역함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의 대적이 되어 그들과 싸우셨고, 그들을 연단하기 위해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쳐서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만드셨다. 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어 살면서 과거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다시 구원을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의 백성, 곧 양 떼의 목자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그 분은 이제 어디 계시십니까? 그들에게 거룩한 영을 넣어 주신 그 분은 이제 어디 계십니까? 63:12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의 영광스러운 팔로 모세를 통해 오른손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고,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하신 그 분이 이제 어디 계십니까?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만이 참신이신 것을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있었다. 애굽은 당시 세계에서 모든 과학, 문명의 중심 국가라 할 만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되어진 혹은 발생되어진 사건, 결과 등을 쉽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63: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말이 광야에서 달리듯이, 그들을 깊은 바다로 걸어가게 하신 그 분이 이제 어디 계십니까?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 여기 '광야'는 그 여러 특성 중 그 여정에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63:14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 높은 언덕 위로부터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의 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시 23:2). 이들 가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지친 광야의 방황 이후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던 땅에 들여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셨다. 본절은 과거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 중에 있는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한다. 63: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이제 주의 백성들은 출애굽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이 드릴 기도는 다음과 같다. "주여! 하늘로부터 우리를 굽어살펴 주옵소서! 주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곳에서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주여 하늘에서...보옵소서 - 본절에서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된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간곡한 자비(* , 하몬 메에이카) - '하몬'(* )은 빗소리와 같은 소리(왕상 18:41), 노랫소리(겔 26:13), 무리의 떠드는 소리(삼상 4:14;14:19)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풍요', '풍부' 정도의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리고 '메에이카'(* )는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복부' 혹은 상징적으로 '동정심'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본 구절의 뜻은 '풍부한 자비' 정도가 되겠다.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주의 백성을 구원하셨던 열성과 권능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이제 우리에게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쳤나이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아도,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옛적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속량자'였습니다. 63: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님, 어찌하여 우리를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마음을 굳어지게 하여 주님을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이 지파들을 돌아보시고 돌아와 주옵소서! 63: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주의 성소를 잠시 차지했었지만, 이제는 우리 원수들이 주의 성소를 짓밟고 있나이다. 주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다(62:12;신 7:6). 63: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는 자처럼 되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지 못하는 버림 받은 자처럼 되었나이다.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면 의미 규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같으며' 부분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인데 원문은 이렇다:'하이누 메올람 로 마솰타 밤'(* ).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당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읍니다'이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의 '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소고를 정리할 때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사실과 그의 대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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