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플린 / Chaplin 리뷰(찰리 채플린의 일생과 발자취) + 동영상과 음악모음
1992년/제작 + 감독: Richard Attenborough /주연: Robert Downey Jr.
음악: John Barry/143분.

1891년 5월20일에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키네토그래프
(Kinetograph)와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최초로 전시를 하고,
1893년과 1894년에는 긴 필름에다 이미지를 연속촬영을 하는데 성공을 한다.
그리고 1895년 3월22일에 프랑스의 뤼미에르(Lumiere)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
(Cinematograph)를 통해 최초로 시연을 하고, 1896년4월, 에디슨에 의해
최초의 상업 영화가 상영이 되므로서 대중들에게 점점 알려지기 시작한
활동사진 (A Motion Picture).
이 새롭고 놀라운 기술의 문명과 문화가 19세기 말에 창조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최초의 월드 스타’는 단연,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이었다.
1889년 4월16일, 런던의 이스트 스트리트(East Street)에서 태어나고,
1977년 12월25일, 스위스의 베베(Vevey)에서 88세에 영면을 한 ‘영화 역사의
전설‘. 그 어느 영화인도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을 남긴 채플린의 발자취를 그가
1964년에 출간한 자서전, ’My Autobiography‘에 기초를 하여 영화화하였고,
채플린의 15주기였던, 1992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개봉을 한 이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963년,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한 가공인물인 미국인 작가, 조지 헤이든(George
Haydon/Anthony Hopkins)과 나이든 채플린은 자서전의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
자주 회동을 하는데, ‘인류에게 즐거움을 준 것’이 생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는
찰리가 언제 어떻게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였는지를 먼저 찰리의 어머니를
회상함으로서 서두에 들려준다(아래 동영상).
1894년, 영국의 알더쇼트(Aldershot), 몸이 아픈데도 무대에 섰다가 야유를 받는
어머니, 가수, 한나 채플린(Hannah Chaplin/Geraldine Chaplin, 1944, 미국)를
대신하여 무대에 올라 노래를 시작한 5살의 조숙한 찰리.
그러다 결국 해고를 당한 홀어머니는 장갑 바느질로 세 식구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가난은 찰리를 죄 없이 소년원으로 가게 만들고, 아버지가 다른 외형(外兄), 시드니
(Sydney Chaplin/ Paul Ryes, 1963, 영국)마저 선원이 되어 떠나 버린다.
1901년, 찰리가 세 살도 되기 전부터 떠돌이생활을 하던 찰리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한나 마저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 이후, 10대 초의 어린 찰리는 뮤직홀과
극장가를 전전하다, 형, 시드니의 소개로 보드빌 극단의 후레드 카르노(Fred Karno
/John Thaw) 단장을 만나(1903년/14세), 처음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얻게 되는데,
후에 스크린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자빠지고 넘어지는 주정뱅이 연기로 (슬랩스틱
코미디의 시조) 런던, 해크니 엠파이어(Hackney Empire)극장 등에서 급속도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같은 단원이자 무용수였던 16세의 헤티 켈리(Hetty Kelly/Moria Kelly)를 사랑
하게 된 찰리, 시장 통의 거리 음식점에서 장미 꽃 한 송이로 청혼을 해 보지만,
승낙을 받지 못하고, 이미 계획이 잡혀있던 미국 순회공연(1910-1912)으로 그만
둘은 헤어지게 된다.
1913년 미국, 몬태나의 뷰트(Butte)에서 2차 미국순회 공연을 하던 찰리는 그렇지
않아도 활동사진에 매료되어 있던 참에 주급 150달러의 거금에 영화에 출연을
해달라는 당시 ‘무성영화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던 맥 세닛(Mack Sennette/Dan
Aykroyd)의 전보를 받고 즉시 캘리포니아의 키스톤(Keystone) 스튜디오로 달려간다.
그리고 칫솔모 같은 일자수염과 작은 더비(Derby)모자, 낡고 꽉 끼는 재킷, 늘어지고
헐렁한 배기(Baggy)바지, 낡고 큰 구두, 대나무 지팡이 등으로 (비록 모방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자신이 직접 연출한 신원불명의 ‘떠돌이 방랑자(The Tramp)’ 캐릭터의
이미지는 1914년부터 그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가 되면서 일약 성공가도로
접어들게 된다.(첫 출연 작품: ‘Making A Living’ /1914년 2월)

한 해 20편의 영화에 겹치기출연을 하면서 성공을 거듭하던 찰리는 자신을 불렀던
맥 세닛보다도 더 많은 주급 1,000달러를 받으며 감독으로도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첫 감독 작: Twenty Minutes Of Love, 1914) 외형, 시드니를 매니저로 불러오며
더욱 안정적인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주식회사(Stock Company)와 스튜디오(1918년)
까지도 차리게 된다. 그리고 1919년에는 그가 ‘평생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서술한
더그 훼어뱅스(Douglas Fairbanks/Kevin Kline),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Maria
Pitillo)등과 함께 영화사, UA(United Artists)를 설립하게 되고, 농지에서 막 개발이
시작된 할리우드(Hollywood Land/1920년 초)에 안주를 하게 된다.
제1차 대전 당시, 시드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민국직원을 걷어차는 장면
으로부터 현실 비평을 하면서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논쟁을 유발시킨 찰리는
후에 FBI 국장이 되는 J.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Kevin Dunn)를 종전기념일
파티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날부터 시작된 반감은 결국 30년이 넘어가는 증오로 이어
진다. 한편, 더그 훼어뱅스의 스튜디오 파티에서 아역배우 출신의 16세의 밀드레드
해리스(Mildred Harris/Milla Jovovici)를 만나면서, 1916년부터 약 2년간 계속되던
에드나 퍼바이언스(Edna Purviance/Penelope Ann Miller)와의 로맨스를 끝내고
1918년10월23일에 첫 결혼을 하게 된 찰리(29세)는 2년 후 그의 첫 장편인,
‘키드‘(The Kid, 1921)를 (유타로 도망을 가) 편집을 하는 소동을 겪은 후에 결국은
(첫)이혼을 하게 된다.

정신병원에 있던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와 캘리포니아 바닷가에 집을 마련해 드린
찰리는 향수에 젖어, 1921년 런던을 방문하게 되는데, 대중들로부터는 열렬한 환영을
받는 동시에(위의 사진) 술집에서는 빨갱이라는 야유를 듣게 되고, 또 그를 첫 고용한
카르노 단장에게서는 그의 진실한 첫사랑이었던 헤티 켈리가 삼년 전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젖기도 한다.
(그의 초기영화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이 헤티 켈리의 영감으로 만들어졌다고 함.)
미국에서 아주 영주를 하기로 작정한 찰리는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 1925)를
만들 무렵, 리타 그레이(Lita Grey/Deborah Moore)와 멕시코에서 두 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 생활 역시 3년을 넘기지 못하고 1927년 8월에 이혼을 한다.
그리고 같은 해, 초기 유성영화의 첫 히트작인 ‘재즈 싱어‘(The Jazz Singer,1927)가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찰리의 입지를 좁게 하는데,
그러나 무성영화의 장점(세계인구의 90%가 비영어권이라는 그의 논리)들 만을 고집
하면서, 그는 꿋꿋이 ‘서커스(The Circus, 1928)'와 ‘가로등(City Lights, 1931)'을
만들어 나간다. 1932년, 말리부 해안에서 아들들과 놀다가 만난 폴렛 고다드
(Paulette Goddard/Diane Lane)와 동거생활을 시작한 찰리는 1936년 6월에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아래 사진)

대 공항이 야기한 대량실업사태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을 폴렛과 데이트 도중에
본 찰리는 그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모던 타임즈‘(Modern Times,1936) 를 만들면서
영화음악 작곡에도 몰두를 하게 되는데, 제작에서부터 작곡까지 너무 많은 일거리는
결국 폴렛까지도 떠나가게 만든다.(1942년6월 이혼/그가 유일하게 칭찬한 전 부인.)
1938년, 한 파티석상에서 같은 해에 4일차이로 태어난 히틀러와 닮았다는 농담으로
부터 기획이 시작된 그의 첫 유성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1940)'는
유성영화 시대에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떠돌이(The Tramp/이발사)'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그의 집념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긴 했으나, 독일이 아니라 미국을 비난한다는
후버 국장의 격노를 유발하고 이후 FBI 의 전담요원이 찰리를 항상 감시를 하게 된다.
거기다 1941년에 만난 조앤 배리(Joan Barry/Nancy Travis)와의 관계가 후버의
미끼가 되면서 친자확인 소송 스캔들에 휩싸이게 되는데, 혈액검사 결과, 결백함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받게 되는 유죄 판결은 그가 몇 십년 걸려 쌓아올린 명성을
한 순간에 추락시키며 그를 좌절시킨다.
하지만, 구세주같이 나타난 유진 오닐(Eugene O' Neil)의 딸, 우나 오닐(Oona O' Neil
Chaplin/Moria Kelly)이 18세의 나이인 1943년 6월에, 36살 연상의 찰리와 결혼을
하므로서 다시 찰리에게 크나큰 삶의 위안을 준다.

매카시 청문회의 난리 속에서 온가족이 나서서 만든 ‘라임라이트’(Limelight, 1952) 의
LA에서의 첫 발표 후, 우나의 제안으로 온 식구와 함께 런던 행 여객선에 오른 찰리는
후버의 작품인 추방 소식을 듣게 되면서 1952년부터 스위스에서의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1972년, 제44회 오스카상의 특별상을 받기위해 LA에 다시 나타
난 83세의 찰리. 오스카 집행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고, 이어 찰리의 작품들
하이라이트가 스크린에 비쳐지는 동안 어둠 속에서 찰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아래 사진/영화 끝/이어 주요 인물 후기가 이어짐)
찰리가 이 시대의 예술 형태인 영화사에 남긴 업적은 실로 대단하여, 배우, 작가,
감독, 제작자, 작곡가등으로서의 그의 예술적 양심은 W. C. 필즈의 말대로
‘위대한 발레 댄서’로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유머는 생존감각을 강화하고 사람을 미치지 않게 한다.”고 찰리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 찰리는 ‘내 유일한 적은 시간’이라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은 찰리에게 있어 소중한 영원의 벗입니다. 이제 그 시간이
남긴 그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시고 향수에 젖어보시길 바랍니다.

“광대의 눈물을 본 자만이 진정 희극을 이해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존 배리(John Barry, 1933, 영국)는 채플린의 눈물(위의 사진)을 보았을까?
일반적으로 ‘웃기는 희극 인’으로만 대중들에게 각인이 된 채플린의 이미지를
음악적으로는 너무나도 슬프게 그려 내었다.(아래: 볼륨을 크게 하여 들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