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김대중 도서관 (기념관)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택시를 타려고 운전사에게 길을 물어보니 택시를 타고갈 거리가 아니고 걸어서 가도 된다는 친절한 안내에 방향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고, 길가에는 소상인들이 성시를 이루고 있어 볼 것이 많았다.
언덕을 지나 경비초소가 있다는 골목으로 들어가 초소 경찰들에게 길을 물으니 좀 의심스런 눈초리에 대충 중얼중얼 하는 듯한 대답을 듣고, 골목을 돌아다니다 시민에게 길을 다시 물으니 온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와보니 경비초소 바로 옆이 동교동 사저이고 바로 그 옆이 "김대중 기념도서관"이었다.
오륙층은 될듯한 큰 건물이었으며 지은지 불과 오륙년된 건물로 규모가 매우 크고 연세대 부설 도서관의 형식을 띈 것으로 지난번 국장 때 TV에서 본 김대중 전대통령 기념관이 이곳이었다. 친구를 만난 일로 하루 늦게 가게된 김대중 도서관의 이야기가 오늘의 주요 메뉴가 된다.

어제 방문하려 했는데 뉴욕서 같이온 축구 멤버로 부터 전화가 와서 일산에 왔으니 점심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흰옷의 친구는 지난해 봄 맨하탄의 마운트사이나이 병원에서 젊은 여인으로 부터 제공받은 간이식 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으며, 블러그 목록 아래의 "써내려간 나의 글" 그 안에 간이식 수술을 받게된 이야기가 있다.
미국에 반감을 갖고있는 한국인이 많으나 인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참고적으로 읽어봄직한 미국의 의료시스템이기에 이곳에 설명을 곁들이는 것이고, 40년만에 만난다는 그의 친구와, 30 여년만에 만났다는 그의 여동생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로 인하여 하루 늦어 오늘 동교동에 가게 된 것이었다. 
동교동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각종 재밋는 가게들이 많아서 쉬엄쉬엄 구경을 빼놓지 않고 하면서 걸었는데 산후 몸조리에 좋다는 붕어, 장어, 그리고 개소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추억의 가게가 보였다. 
길가에는 행상이랄 수 잇는 노점상들이 많이 눈에 띄고... 
지나며 눈을 돌리다가 갑자기 "헉" 가슴이 철렁거리는 생각지도 않은 광경이 보여 사진하나를 담고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버렸다. 
이정도쯤에 있을 듯한 생각이 들어 30여미터를 골목길로 들어와 경비초소에 물어보고 이곳 건물은 너무 큰 건물이고 연세대학교 건물로 착각을 하고는 다른 곳인줄 알고는 사진만 하나 만들며 지나버렸다. 
장례행렬이 떠나는 날 TV로 보고 있었으니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으며 작은 기념관일 것으로 생각하고 골목길을 계속 들어가 본 것이고 주민의 안내에 발길을 되돌려 왔다. 
규모가 대단히 큰 곳이라서 잘못 찾아온줄로 잠시 착각이 들어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념관 바로 옆 길모퉁이 집은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 개인 집으로 이층으로 "증축한" 리노베이션한 집이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세명의 안내인이 자리하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하고 오빠는 기념관이 맞냐고 물어보며 티켙을 끊고 들어가야 하는지를 물으니 무료관람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사진을 찎어도 괜찮다고 한다. 안에는 벽 한면 정도 크기로 검은 화강석 에 etching "긁어서 만드는 그림" 초상화가 있었다. 
입구를 지나니 작은 기록 영화관이 있고 안내를 맡은 분이 스위치를 누르니 김대중 대통령 기록이 10 여분 정도 다큐멘터리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 
북한의 김정일을 만났던 모습도 나오고 야당시절 박해를 받은 설명과 일본서 납치되어 현해탄에 빠져죽을뻔 하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설명 등등... 
기록영화들을 잠시 훑어보고는 기념관 1층의 모습을 살펴봤다. 
내부의 인테리어는 품격이 있었으며 사용한 바닥재 부터 질좋은 목재로 나무랄데 없이 만들어진 기념관이었고 직업이 조각가인 제임스 오빠의 안목에도 놀라움이 가득했으며 모든 실내 디자인과 기념품의 배치는 상세하고 꼼꼼하였다.
 청와대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책상은 영국제 승용차 "재규어 와 멜세데스 벤츠"의 실내를 장식하는 내장목재와 똑같은 목재를 사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책상 위의 낙서장 같은 작은 방명록에는 대체로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들의 서툰 글씨로 보이는 인사의 글이 많이 적혀있었다. 
전시물은 주로 민주화 투쟁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으며 유품들이 세분화되어 상당 수 전시되어 있었다. 
별의 별 유품이 모두 있음에 놀라웠고 이틀전 다녀왔던 경복궁 안에서 전시되던 박정희 대통령의 초라한 유품전시회 내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의 견해로는 박대통령의 유품은 세월이 많이 흘러 보존된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듯 하였다) 
각 나라로 부터 받은 화려한 훈장들이 세분화되어 전시되었고. 
노벨평화상 증서는 한편 벽에 커다랗게 걸려있었으며 모든 전시물은 강화플라스틱유리가 아닌 일반 두꺼운 유리로 되어있었다. 
사망하기 직전까지 사용했다는 양복과 구두, 지팽이 등등도 보였다. 
2층에는 정상회담 때 입었던 당사국 민속의상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주로 부인의 것으로 보였으며 선물로 받은 전통 칼도 여럿이었다. 
제임스 오빠는 이곳을 둘러보면서 많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역사적 위인들은 대체로 사망한 이후에 추모하는 기념관이 지어지는 것이 상례인데, 이곳 김대중 기념관은 그의 생존시 이미 대규모로 지어졌다는 것에 많은 생각에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부터 시작하여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임자들의 기념관이 지어졌다는 소식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고,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고향에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기사를 보고는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겸양의 미덕은 사라지고, 생전에 제자신들 스스로 기념관을 만들어 세우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게 됐었다.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숱한 박물관과 미국의 대통령 및 장군들의 기념관을 둘러보았지만 이곳처럼 각종 유품들이 깔끔하고 다양하게 정리된 곳은 아직 본적이 없었다.
나의 블러그 목록 중 텍사스에 있는 (존슨 대통령 목장) 편에 존슨 대통령의 매우 단촐하게 마련된 기념관과 (Iowa 의 황금 산더미) 내용 중에 있는 " 31 대 헐버트 클라크 후버 대통령 기념관 " 에 비교해 본다해도 이곳은 매우 화려하게 만들어진 기념관이었다.
물론 위의 두명의 미국 대통령은 사망한지 수십년이 된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다르긴 하다.
이외에도 미국에 소재하는 각 유명인사들의 기념관도 실내는 이보다 화려한 곳이 없고 다만 (에이브라함 링컨) 기념관 정도는 정책적으로 부각이 되어 대규모로 건립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두 그들의 사후에 설립된 것이 이곳과 다르다.
 기념관에는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유품중에는 일본 고이즈미 총리로 부터 받은 기념품도 있었다. 
대통령 재직시 받은 기념품들은 모두 국가의 소유로서 기념관에 전시뒴은 마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층 전시실은 2층까지 한층으로 높게 되어있으며 천장에 매달린 간결한 등불이 (산델리아 ) 역활을 하며 조화롭게 매달려 있다. 
어떻게 이 많은 것을 꼼꼼히 챙겼는지 감탄할 지경이었으며 글을 쓸 수 없어 녹음해서 기록을 적도록 했다는 녹음기도 보인다. 
금보화로 장식된 훈장들을 살펴보자. 
재직 당시 받은 훈장들은 분류를 하자면 대체로 작은 나라의 훈장이었고 스웨덴으로 부터 받은 훈장도 보존되어 잇다. 
교류국가로 부터 수여하는 대상이 한국의 국가 원수로서 받은 것이어서 매우 화려하고 정교한 예술품 적인 훈장들이다. 
전두환 국가보위상임위원장 시절에 반란수괴로 지목되어 군사재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아 투옥 생활 때 입었던 "수의"와 검정고무신이 진열되어있고, 빡빡깎은 머리를 한채 부인과 면회하던 사진도 설명과 함께 걸려 있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당시의 벽보. 
모친 장수금 (본명 장노도) 의 사진과 부친으로 기록되어 있는 김운식씨의 기록이 설명과 함께 걸려 있다.
이 사진을 볼 때 야당 당수 시절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사람에 의해 그의 가계도가 파헤쳐져 "월간조선" 등 각종 유력지에 알려져 읽었던 가계도의 생각이 났으므로, 부모님 사진과 설명을 보며 사생활이지만 역사의 한 부분으로 생각되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과거 기록을 인터넷으로 다시 찾아 보았다.
아래는 3년전 쯤 "월간조선" 에 공개된 장문의 내용들을 간추린 것이다.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 (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 공이고 어머니는 장수금 여사이며 1924년 1월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에서 태어나셨다)로 되어 있다.
아버지로 되어 있는 김운식공은 김대중 대통령이 7살 때 자신의 호적에 첩의 아들로 庶子로 올려 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고 먼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대중의 호소로 본부인과 이혼하고 4일 후 김대중의 어머니와 바로 결혼 정식, 정부인으로 올려 김대중을 "적자" 嫡子 (정실부인과 친 부친의 사이에서 출생함을 뜻함)로 만들어 주었다.
김대중의 모친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씨는 18살 때인 1911년 같은 옆 섬 마을에 사는 제갈성조(諸葛成祚) 에게 시집을 가서 딸 2명을 낳았다. (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하자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과부가 된 젊은 제수씨의 집을 방문하다가 육체관계를 가졌으며 아이를 임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기록에 있다.
인구 1천 여명 정도의 좁은 섬 마을에 젊은 과부의 배가 불러오자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제갈성복은 장노도 여인이 출생한 건너편 섬인 뻐리섬으로 이사를 보내면서 친구인 윤창언(尹昌彦) 에게 중매를 서는 것처럼 하여 동거를 하게 하였다. 윤창언은 본래 농악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과 사별한 홀아비였다.
동거를 한지 얼마 안되어 출생한 것이 사내아이 그의 이름을 윤대만(尹大萬-또는 윤성만)이라고 불렀다.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다. 윤대만이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 장도산이 산파 역할을 했다.(윤창언씨의 조카 윤일만 당시 경찰관 증언)
2년 후 장노도는 다시 사내아이를 출생했다. 그는 윤창언과 사이에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윤대의(尹大義) 라고 불렀다고 한다.
몇 년 후 윤창언도 사망하고 모친 장노도는 딸 2명 아들 2명을 거느린 청상과부가 되었으며 김대중의 생물학적 부친인 시숙 제갈성복이 뻐리섬 선창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
그 주막집에 큰 섬을 돌면서 발동선을 이용 방물장사(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자주 섬에 오던 김운식(金云植) 씨와 동거를 하다가 윤대만 (김 전 대통령 어린시절 이름)이 7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했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본 섬인 큰 섬 혹은 목포로 가야 했으며모친 장노도는 뻐리섬의 재산을 정리, 목포로 옮겨 가서 여관을 경영하며 김운식의 첩으로 호적에 올렸다.
그당시 호적에는 본부인 외에 제1첩 ?제2첩을 호적에 등재하는 것이 상례였고 첩하고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은 서자(庶子-첩이나 외부에서 외도를 하여 얻은 자식)로 올렸다.
1924년(단기 4257년) 7월 7일 윤대만은 김대중(金大仲) 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등재되었다.(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 당시 김운식에는 본부인 김순례(金順禮)가 있었으며 그사이에 아들 대봉, 딸 매월, 안례, 용례 등 1남 3녀가 있었다.
목포 北국민학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거쳐 6,25 전쟁 후 부산 피난 건국대학교 야간부 2학년을 다니다가 목포에서 195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로 되어있다. ----------------------------------------------------------------------------------- 위의 이러한 기록은 오빠의 사견이 아닌, 김대중 전대통령이 야당 당수시절 비서실장이었던 이에 의해 조사되어 언론에 공식 발표되었던 기록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올린 것이므로 혹시라도 보는 이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동교동 사저의 옛모습이 작게 만들어져 전시되어 있다. 
1층 현관 안에 자리한 김대통령의 초상화 곁에서... 
이곳 방명록은 전자식으로 되어있어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관리인께서 서명을 해달라 하여 전자펜으로 서툴게 써내려 갔다. 오빠의 본명 한국 이름은 성과 이름을 합해서 두 글자야. 그래서인지 좀 모자른 사람이지...
방명록에는 (엊그제는 동작동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를 둘러보고 오늘은 이곳...) 이런 뜻으로 쓴 것이며, 작은 카메라로 사진까지 찍혀 기록되는 현대식 시설이었다. 
일층에는 투옥당시 한달에 한번만 서신을 밖으로 보낼 수 있었던 김대통령에 의해 못으로 백지에 눌러 쓰여 전달된 즉, "옥중서신" 이 진열되어 있어 새삼스러웠다. 
이분은 김성재 기념관 관장님으로 매우 점잖고 친절하였으며 자세한 설명에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김성재씨는 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였으며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 석좌교수를 겸임) 
박정희 대통령 30주년 추모식에 참석했던 일과 내려오면서 김대중 대통령 묘소에 들렀던 이야기를 나누며 묘소가 작은듯 하다고 하니 박대통령 묘소에 비해 1/6 의 크기라고 설명을 한다. 내일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오늘 방문한 설명을 하면서 이야기는 흐르고 김성재 기념관 관장님과 기념사진을 하나 만들었다.
이제 두분 모두 세상을 떠나 역사 속에 묻힌 이들이 되었고 미국의 조지부시 전임 대통령과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의 예를 들면서 떠난 사람도 말이 없고 새로 부임한 사람도 말이 없는 것이, 미국 대통령들의 관례임을 설명하니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관리자들의 말씀이 선진 국가와의 차이점 같다는 의견이다.
(한국은 삼사 대 지나면 이런 모순들이 없어질 것이,라는 오빠의 의견이 있었고 당장 오늘부터 전임자들과 흘러간 추억 속의 인물들에 대해 서로 물고 뜯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제 역사의 판단은 훗날 후세들에 의해 쓰여질 것이고 떠난 이들에 대한 감정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오빠의 의견을 말하고 친절하신 분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며 "김대중 대통령 기념관 방문" 을 모두 마치었다. 
오빠는 지난 2002년 원드컵 당시 서해교전에서 우리의 해군용사들이 북괴와 전투를 벌이다 6명이나 전사한 사건이 있었을 때, 일본으로 결승전 경기를 보러간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으나 오늘 이후로는 그때의 일을 가급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밖으로 나와 동교동 사택의 정문을 자세히 둘러보려고 두리번 하는데 경찰관들이 경계근무를 돌고 있다. 
명패 두개가 가지런히 있음을 보게되었는데 그곳에는... 
경찰이 대문 앞에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대문 바로 근처에는 여러명의 경찰관이 경계초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으나 이곳을 방문한 나그네에 대해 불편하게 하는 것은 없었고 자유로웠다. 
저편 자택 바로 건너편에도 경비초소가 있고 이곳 오른편에도 경비초소가 있으며, 기념관 반대편 옆에도 초소가 있었으니 모퉁이마다 도합 4~5개 가량의 초소가 보였으며 부인이 생존해 있으므로 전임 대통령 보호관례에 의해 경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골목길을 한바퀴 돌아보다가 의미있는 빌딩을 보게되어 사진에 담는데 이곳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왜? 사진을 찎느냐고 궁시렁 댄다. "기념으로 하나 찎는데 뭔 잘못이라도 있냐?" 하니 그는 전래되는 속담의 내용을 떠올리는 "처마밑에 피신한 비맞은 중"처럼 궁시렁 거림이 들려온다.
동교동 사택 바로 옆 건물의 이름이 (유신빌딩)이었으니 스쳐가는 생각에 박정희 정권 당시의 "10월 유신"이 생각난 것이고 붙어있는 현판을 보니 "국정정책연구원" 이라 씌어있으니 당연히 뭔가 의미있는 빌딩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 여름 장례식을 할 때 여의도에서 TV 방송과 인터뷰를 하던 은퇴한 형사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동교동 사택을 감시하던 형사로서 사택의 양쪽 옆집과 길건너편의 집을 중앙정보부에서 매입하여 정보부 요원의 지시를 받으며 형사들이 24시간 감시했었는데, 이곳에서만 20년을 근무하다 오래전 은퇴한 형사였고 하도 오랜세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신분으로서 김대통령 내외와 친분도 있었고, 후에 그때의 이야기로 책을 발간했던 인물이 기억나서 이 건물을 유심히 보게 된 것이다.
건물 이름으로 보아 박정희 대통령 재임 때부터 파견 정보부 기관의 건물로 사용되고 (국정정책연구원)이란 간판을 걸어놓게 된 것으로 보였다. (빌딩의 이름이 유신빌딩이니 유신정권에 반대를 하던 김대중 정권 때 세워진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큰길로 나와 뒤돌아보니 15미터 거리에 연세다학교 김대중 도서관 안내판이 보인다. 한글 아래에 써있는 영어를 풀이하면 (김대중 대통령 도서관 과 박물관) 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하철을 타고 배호 오빠의 기념비가 있는 곳, 삼각지로 발길을 옮겼다. 
나의 어리고 젊은 시절엔 그렇게 듣기 싫었던 배호 오빠의 노래였다. 그런데 내 나이가 들어감에 정감이 드는 그의 노래를 생각하니 오빠가 늙어감이 분명한 듯 하다. 심수봉 언니와 배호 오빠, 외에는 별로 내의 취향에 맞는 가수와 노래가 없지만 오래전 흘러간 노래 "목포의 눈물"을 부르신 이난영 아줌마의 구슬픈 목소리는 나의 심금을 울린다.
다음에 한국에 다시오게되면 그때는 목포에 있는 이난영 아줌마의 수목장 묘와 작은 기념공원을 찾아보려 한다. 만해 한용운 님과 시인 김삿갓의 묘, 그리고 몇몇 시인들의 산소를 찾아 추억에 잠겨봐야지...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랫말이 된 이곳을 돌아가던 고가도로 인터체인지는 언제인지 없어져 버리고 주변 환경도 모두 변해서 옛시절 (돌아가는 삼각지)는 배호 오빠의 기념비로 달래던 오늘이었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느~으~은데~ 잃어버리~이인~ 그 사람을~ 아쉬워 하며어~ 비에 젖어~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아~ 서글피이~이~ 찾아 왔다아~ 울고가는 삼가아~악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메도는 이바아알 길~ 떠나버리인~ 그 사라앙을~ 그리워어 하며~ 눈무울 젖어~ 불러어 보는~ 외로운 싸나이가~ 나암몰래~ 찾아아~왔다가~ 돌아가는 삼가아악지~!
우리네 인생은 모두 돌아가는 것이다. 듣기 싫은 말일지라도 서로가 생각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자는 뜻이있고 국가와 민족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지만 읽는 이들은 오빠에게 태클을 걸어올 때가 많다. 이곳은 여행기록을 저장하는 블러그지만 써내려가다보면 어이 입맛에 맞는 것만 써지겠는가...
더러는 넋두리도 있을 것이고 공격적인 언사도 있을 수 있고 칭찬도 있을 것이며 비난도 있는 것이다. 오빠가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 이때에 교감조차 없었던 이미 떠난 이들에 대해 뭔 사적인 감정이 있을 것인가...
보기에 좀 거친듯한 글일지라도 넓은 아량으로 읽으면 좋을텐데 너무 단편적인 마음으로 읽는이가 있는 듯 해서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다. 혹시라도 나의 글에 정히나 불편하다 생각되는 글이 있다는 의견이 있어 리플을 써놓는다면 곰곰 생각해 보고 타당성 있다고 판단되면 시정을 할 수도 있지만 가급적이면 쓰는이의 글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언론의 자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이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