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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4/02
 

* [옛시조]: 옛 성인들의 시조 **

2009.11.30 04:56 | [6]:韓國/문화/유산 | 우주Feel

http://kr.blog.yahoo.com/jaehwoo/15744 주소복사

  

★ 옛 성인들의 시조 ★


청산(靑山)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蒼空)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욕심(慾心)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바람같이 구름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보고 덧없다 하지않고
우주는 나를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나옹선사 (1262-1342) ; 고려 말기의 고승, 공민왕의 왕사




이고진 저늙은이 짐벗어 나를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서러라커늘 짐을조차 지실까


정 철 (1536-1593) ; 조선대 문인, 송강가사로 유명함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저근듯 빌어다가 머리 우에 불리고자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우 탁 (1262-1342) ; 고려 말기의 학자, 성리학에 뛰어남.




짚 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희야 박주산챌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한 호 (1543-1605) ; 조선대 명필 한석봉,
떡장사 어머니 이야기가 유명함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서경덕 (1489-1546) ; 조선 전기의 대학자,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학문만 함.




장검을 빠혀 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대명천지에 성진이 잠겼에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 볼까 하노라


남 이 (1441-1468)
조선초 장군, 유자광의 모함으로 죽음.




찬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조 식 (1501-1572) ; 조선 전기의 큰 학자,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함.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 하니 눈물 겨워 하노라


송 순 (14 93-1583)
조선 전기 학자, 벼슬 그만 두고 독서와 문장을 즐김



 



오리의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애
검은 가마귀 해오라비 되도록
항복무강하사 억만세를 누리소서


김 구 (1488-1543) 조선 전기 학자 , 서예와 문장에 뛰어남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 (1517-1584) ; 조선 전기 학자, 서예에 뛰어남.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하리라


이 황 (1501-1570) ;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
도산서원에서 후진 양성함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임 제 (1549-1584) ; 조선 전기의 풍 류 남 자,






샛별지자 종다리 떳다 호미메고 사립나니
긴수풀 찬 이슬에 베잠뱅이 다젖는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넘어 사래긴 밭을 언제 가려 하느냐


김천택 (?-?) ; 조선 영조때 가인,
평민출신의 가객으로 청구영언등 많은 작품을 남김.





철령 높은곳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정 철 (1536-1593) ; 조선 선조때의 문신 시인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등
가사집이 있다.





한손에 가시쥐고 또 한손에 막대들고
늙는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 길로 오더라


우 탁 (1262-1342) ; 고려 말기 학자, 성리학에 뛰어남.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 놋다


왕방연 ( ? ) ; 사육신 사건 때
단종을 귀양지 영월까지 모셨던 사람.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 다 기울어 지단 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1456) ; 사육신의 한사람 ,
사육신은 세조에 의해 죽은 충신들임.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에라


김종서 (1390-1453) ; 세종 때의 뛰어난 장군,
뒤에 수양대군에게 죽음.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옇뻐 하여라

김상헌 (1570-1650) ; 조선 인조때의 절개곧은 선비,
청나라에 항거한 삼학사(윤집 오달재와).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 (15??-?)
조선중기의 이름 난 기생, 시와 가무에 뛰어남.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나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15??-?) : 조선중기의 이름 난 학자,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가마귀 힌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지은이가 정몽주의 어머니라고 하나 ,
연산군 때 김정구라는 설이 확실함.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 재 (1353-1419)
고려 말의 학자, 고려가 망하고 고향에 숨어서 살았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 색 (1328-1395)
고려 말의 학자 , 조선 건국 후에 벼슬을 그만 둠.




내해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 아녀든 좇지 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생긴대로 하리라


변계랑 (1369-1430)
고려말 조선 초의 학자, 시와 문장에 뛰어남



 

* [답사]: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에서

2009.11.28 15:28 | [6]:韓國/문화/유산 | 우주Feel

http://kr.blog.yahoo.com/jaehwoo/15718 주소복사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에서

(2009/11/15 현재)


조선왕조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전경 입니다 















































































 

■정릉(貞陵) 

 

-종 목  사적  제208호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정능동 산87-16 

 

조선조(朝鮮朝) 태조대왕(太祖大王)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릉(陵)이다.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本貫)이 곡산(谷山)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추증(追贈)된 강윤성(康允成)의 여(女)로 탄강(誕降) 연대(年代)는 미상(未詳)이고 6월 14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친가(親家)는 고려조(高麗朝)의 권문세가(權門勢家)였다. 태조(太祖)는 여대(麗代)의 풍습(風習)에 따라 향리(鄕里)와 개경(開京)에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각각 두었는데 강씨(康氏)가 경처(京妻)였다. 향처(鄕妻)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한씨(韓氏)는 태조(太祖)가 등극(登極)하기 전인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3년(1391년) 9월 23일 이미 서거(逝去)하였으며, 강씨(康氏)는 태조(太祖)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태조(太祖) 원년(元年)(1392년) 8월 7일 현비(顯妃)로 책봉(冊封)되었다. 현비(顯妃)는 조선조(朝鮮朝) 최초(最初)의 왕비(王妃)였고 태조(太祖) 5년(1396년) 8월 13일 병환(病患)으로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 사제(私第)에서 승하(昇遐)하였으며 소생(所生)은 방번(芳蕃), 방석(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의 2남1녀이고 춘추(春秋)는 미전(未傳)이다. 이 해 9월 28일 현비(顯妃)의 존호(尊號)를 신덕왕후(神德王后)로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으로 하였다. 이듬해인 태조 6년(1397년) 1월 3일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현 서울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예장(禮葬)하였으며 태조(太祖)의 뜻에 따라 정릉(貞陵)을 풍후(豊厚)히 조영(造營)하였다 한다. 강비(康妃) 소생(所生) 방번(芳蕃)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던 방석(芳碩)은 태조(太祖) 7년(1398년) 8월 왕위계승(王位繼承) 다툼인 왕자(王子)의 난(亂)으로 죄사(罪死)되었으며, 태조(太祖)는 이 해 9월 5일 제2자(第2子) 방과(芳果) 정종(定宗)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위(上王位)에 있었고 정종(定宗) 2년(1400년) 11월 11일 정종(定宗)이 왕위(王位)를 태종(太宗)에게 양위(讓位)하였다. 태종(太宗) 5년(1405년)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왕(帝王)의 릉묘(陵墓)가 모두 도성(都城) 밖에 있는데 정릉(貞陵)만이 도성(都城) 안에 있고 릉역(陵域)이 광대(廣大)하다는 논란(論難)이 있었고 사신(使臣)이 묵는 관사(館舍)에 가까우니 도성(都城) 밖으로 천장(遷葬)하여야 한다는 상언(上言)이 잇따름에 태조(太祖) 승하(昇遐) 후인 태종(太宗) 9년(1409년) 2월 23일 도성(都城) 밖 양주(楊州) 남(南) 사을한록(沙乙閑麓) 경좌갑향(庚坐甲向)(서(西)에서 동향(東向))에 천장(遷葬)하고 구릉(舊陵)의 목재(木材)와 석재(石材) 일부는 태평관(太平館)에 쓰고 태종(太宗) 10년(1410년) 홍수(洪水)에 유실(流失)된 광통교(廣通橋) 복구(復舊)에 썼다.

정릉(貞陵)은 종묘(宗廟)에 부묘(부廟)되지 아니하여 봉번(奉蕃)이 없은지 오래되어 후릉(后陵)이 아닌 민묘(民墓)나 다름이 없는 형편(形便)이었고, 릉(陵)의 존재(存在)마저 잊혀졌으나 200여년(餘年)이 지난 선조대(宣祖代)에 이르러 왕후(王后)의 친정(親庭) 후손(後孫)이 국묘태사자(國墓泰祀者)로서 군역면제(軍役免除)를 선조(先祖) 가전(駕前)에 호소(呼訴)함에 정릉(貞陵)을 수탐(搜探)하였으나 능침(陵寢)을 찾지 못하던 중 변계량(卞季良)의 이장축문(移葬祝文)으로 찾았다고 전한다. 그후로도 한식절(寒食節)에만 봉사(奉祀)하는 등 박대(薄待)가 여전하였으나 현종대(顯宗代)에 이르러 송시열(宋時烈) 등의 상소(上疏)에 따라 현종(顯宗)10년(1669년) 9월 29일 정릉(貞陵)이 회복(回復)되고 현비(顯妃)의 태묘배향(太廟配享)이 이루어지고 의례(儀禮)에 의한 상설(象設)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정릉(貞陵)은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였다. 릉전(陵前)의 상석(床石) 1좌(座)와 그 양측(兩側)의 망주석(望柱石)이 1쌍이고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1쌍이 배치(配置)되었으며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으로서 제1계(第1階)를 이루고 있다. 제2계(第2階)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배치(配置)되었으며 중앙(中央)에 사각옥개형(四角屋蓋石)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고 제3계(第3階)는 없다. 상설(象設) 내용(內容)으로 볼 때에 상석(床石)을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과 명등석(明燈石)은 구릉(舊陵)의 것을 이설(移設)한 것이며 현종(顯宗) 10년(1669년) 정릉(貞陵) 회복시(回復時) 상설의물(像設儀物)을 설치(設置)함에 있어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호석(虎石), 양석(羊石)은 각 1쌍으로 반감(半減)하고 제3계(第3階) 무석(武石) 또한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다른 비릉(妃陵)에 비하여 빈약(貧弱)하다.

정릉(貞陵)은 조선건국(朝鮮建國) 후 최초(最初)로 설릉(設陵)되었으며, 조선왕릉(朝鮮王陵)의 능제(陵制) 상설(象設)이 고려왕릉제(高麗王陵制)를 기본(基本)으로 하고 일부(一部)를 변화(變化) 수용(受容)하였던 것이므로 구(舊) 정릉(貞陵)의 실재(實在)를 현재(現在)로서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 하겠으나 정릉(貞陵)의 사각명등석(四角明燈石)이 여말(麗末)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의 현(玄)·정릉(正陵)의 명등석(明燈石)을 충실(充實)히 따르고 있음을 보아 조선왕릉(朝鮮王陵)이 고려왕릉(高麗王陵)을 규범(規範)으로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북측(北側)에 비각(碑閣)이 있고, 비면(碑面)에는 전서(篆書)로 대한신덕고황후정릉(大韓神德高皇后貞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어필(御筆)로서 광무(光武) 4년(1900년)에 세운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있다. 재실(齋室)은 1970년대 초(初)에 노후(老朽) 멸실(滅失)되었다. 구(舊) 재실지(齋室址)의 북측(北側)에 있는 한식(韓式) 건물(建物)은 정릉관리사무실용(貞陵管理事務室用)으로 건립(建立)된 것이다.

 


♣ 노 인 백 과  ♣

 

2009 영암

 왕인 국화 축제 에서 가져 온

국화와 함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한다.
오늘날 세계 최장수국은 일본이다.
2006년도 일본의 평균 수명은남자 79.00세.
여자는 85.81세로 발표되었다

70은 인생의 꽃이다.’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젊음을 구가하고 있다.

 

 

 

 

지난 여름 일본 니이가다에 갔을 때 그곳의 여행 안내원 C 여사가
100세 이상 되는 노인이 2만8천 명을 넘었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인구비로 보더라도 30배에 달합니다.

그런데 본래 인간의 수명은 백세보다도 긴 120∼125세이다.

 

 

 

이것은 뇌의 발육 기간을 근거로 산출한 것인데,
인간의 뇌는 대개 25세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한계수명은 뇌 성장 기간의 5배이므로
25X5=125년이라는 기간이 산출된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대개 척추동물은 모두가
이 등식의 적용을 받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한계수명보다 일찍 죽는가.
분명 어딘가에 우리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대부분이
라이프 스타일에서 비롯된다고들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식생활이다.
일본인들은 소식이다.
과식이나 편식, 화학물질의 영향 등이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한다.

 


 

 

밤과 낮을 거꾸로 사는 생활도 바이오 리듬을
깨뜨려 생명을 단축시키는가 하면,
부족한 운동량이 몸을 녹슬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수의 3대 요건으로 잘 먹고, 잘 자고,
적절히 운동하는 것을 꼽는다.
뇌가 튼튼하고 어느 정도 몸에 근육만 붙어 있으면
100세 이상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뇌를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몸을 단련하고
식사를 제때 한다고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쾌감을 느끼고 젊음을 유지하며 암이란
무서운 병에서 벗어나려면 긍정적인 생각,
플러스 발상을 해야 되겠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뇌란 것은 호르몬의 덩어리로서 인간이 사물을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느끼는 것은
이 호르몬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호르몬의 종류는 백수십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뇌내 모르핀 가운데 최강의 쾌감을 가져오는
베타 엔도르핀은 지로신을 포함한 31개의
아미노산으로 되어 있다.

 

 

 

지로신이란 것은 아미노산이 두 개 모이면
자연계에 존재하는 마약의 모르핀이 된다.
뇌내 모르핀과 마약의 모르핀은 화학적 구조식이
많이 닮아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플러스 발상을 하면
체내의 제약공장에서 몸에 이로운 약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면역력을 키워나간다는 뜻이다.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면
뇌파는 반드시 알파파 상태로변한다.
이 알파파가 많이 나오면 많이 나올수록
인간에게 다양한 쾌감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만 80세, 나아가서 100세까지 살라고
하는 법도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언제나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약단지를 놓고 사는 약골이 오래 산다고.

유비무환.

언제라도 자기가 약골이란 것을 알고 늘 예방하고
거기에 대비하면 급사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장수하기 위해서는 늘 긍정적 플러스 발상과
낭만적 사고를 가져야 하리라.



 

 

 

古稀는 이나이까지 살기는 드물다 란
뜻을 갖이고 있는 옜명칭이다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 人生七十古來稀란 관용구는
한낱 잠꼬대로 들리는
좋은 세상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건강수칙 7개항◆

  금연

규칙적인 적당한 운동

절주 혹은 금주

적당한 체중 유지

규칙적인 수면(7~8시간) 

아침 식사

간식을 하지않음

 

  

 

 

 

 

 ⊙노익장의 비결

식이요법과 운동 요법을 하고

모든일에 증용을 지키며

유연성을 가지고

원만하고 조화된 생활을 유지한다면

모든 기억력이왕성 하여져

노익장을 과시하게

될것이다.

 

 

감사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가족과 연인과 함께 !

2009 영암

 왕인 국화 축제 에서...

 

* [답사]: 전곡리 선사유적지 에서 **

2009.11.21 15:52 | [6]:韓國/문화/유산 | 우주Feel

http://kr.blog.yahoo.com/jaehwoo/15633 주소복사









[답사]전곡리 선사유적지 에서

(2009/11/10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서울문화유산안내자 교육수료자에 대한 2009년 제2차

서울문화유산안내자 워크숍으로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탐방전경 입니다
 












































































































 

 

 ■  전곡리선사유적지[全谷里先史遺蹟址]


*문화재명  :  전곡리 선사유적지

* 지 정 별 : 국가사적 제268호

* 소 재 지 :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528-1번지 일원, 고능리

* 지 정 일 : 1979. 10. 2.

 

* 문화재소개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을 대표하는 이 유적지는 1978년 겨울 한탄강 유원지에 놀러 왔던 미군 병사에 의해 지표에서 석기가 발견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 병사는 채집석기를  서울대학교 고 김원룡 교수에게 가져갔고 김원룡 교수와 영남대학교 정영화 교수에 의해 아슐리안계 구석기 유물로 밝혀지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구석기 유적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전곡 시가지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 대지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된 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기반암을 형성하고 이 암반층위에 신생대 4기 철원·평강에서 약 60만년 전후와 30만년 전후에 각각 분출하여 굳은 용암이 전곡 현무암층을 이루며 그위에 적색 점토 퇴적층과 사질층이 구석기 문화층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까지 11차에 걸친 발굴을 통하여 유적지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문적 노력이 계속 되어왔고 전곡리 유적의 상대 편년에 대해서는 20만년 이전으로 보는 견해와 약 4만 5천년으로 보는 견해 등 편차가 매우 크다. 전곡리 유적의 학문적 중요성은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등 아슐리안형 석기들의 발견에 있다. 이들 석기의 발견은 1970년대 말까지도 이들 석기의 존재 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 문화를 양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을 바꾸는 증거로 세계구석기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의 구석기 문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이는 한국의 구석기 연구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구석기 연구를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전곡리 유적조사를 계기로  한탄강. 임진강 유역에 대한 제 4기 지질학 연구가 이루어졌고 아직도 지질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고고학계뿐만 아니라 지질학계에도 중요한 연구의 장을 제공하며 구석기 연구의 방법론 발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 연천군청문화관광과 : (031) 839-2774
* 선사 유적관  : (031) 832-2570
 


▶전곡리선사유적지[ 全谷里先史遺蹟址 ] -(네이트 사전)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 있는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 사적 제268호. 지정면적 778,296㎢. 1978년에 당시 동두천 주둔 미군인 보웬(Bowen, G.)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1978년에서 1983년까지 6차례, 1986년에 한 차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중부 충적세 후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은 현재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전곡읍에서 한탄강 유원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북서쪽에 제1지구, 남쪽으로 서편이 제2지구, 동편이 제3지구이다. 제4지구는 제1지구의 강 건너편 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03′, 북위 38°01′에 해당된다. 현재까지의 발굴은 모두 제2지구에서 실시되었다.

 

〔지질 및 연대〕


전곡리 일대는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경기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지질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전곡리의 동북편으로 연천과 철원 사이의 지역에는 중생대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응회암·현무암·역암 등이 형성되어 있다. 동남편으로는 대보거정화강암류가 중생대 쥐라기에 분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 연안지역에는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 한탄강·임진강을 따라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해 있다. 용암류층은 상류에서 6매, 하류인 문산에서 1매가 보이며, 유적이 있는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고 있다.

전곡리의 2매는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결과, 하부의 것은 대략 60만년 전후, 상부의 것은 30만년 전후에 분류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 현무암층들을 전곡 현무암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브루네스 정지자기기(正地磁氣期)에 해당되고 있다.

전곡 현무암 분출 전의 고기 한탄강의 퇴적은 현재의 한탄강을 따라서 현무암 아래에 미고결의 사력층으로 나타나 백의리층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의 한탄강은 원래 현무암 분출 후 넓게 형성된 하상 위를 한동안 흐르면서 하상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현무암을 침식해 결국 오늘날의 한탄강으로 안정하게 되었다.

전곡 현무암은 냉각시 수축의 차이로 인해 발달하게 된 주상절리 등의 구조로 균열이 있어서, 서리작용과 집중호우의 기후현상이 특징인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짧은 기간동안 침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대지 위에 존재하는 구석기 포함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대지 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간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빠른 속도의 현무암침식과 현무암이 30만년 전경에 분출된 것으로 본다면, 대지 위의 구석기 포함층의 형성연대는 적어도 20만년 전후 이하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곡리 유적의 적색점토가 18∼21만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국 뤄촨(洛川) 뢰스층의 적색토대와 연결될 수 있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연대관과는 별도로 퇴적층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es-cence dating method)에 의해 얻어진 약 4만 5000B.P.를 유적의 연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퇴적층〕


퇴적층은 지점에 따라 1m 미만의 깊이에서 6∼8m 내외의 깊이까지 드러나고 있다. 제2지구의 발굴에서는, 동편 언덕에서 점토층으로만 이루어진 퇴적층이 있고, 서편의 강쪽 능선에서는 두터운 굵은 모래층이 점토층 아래에 드러나고 있다. 이 모래층은 다시 미세사층을 덮고 있다.

이 회색 또는 황색의 미세사층은 제2지구 서편에 버려진 유로(流路)에 형성된 우각형호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래퇴적은 당시 이 지역의 유로가 활동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사질층에서는 유물집중층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유수에 의해 재퇴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퇴적물은 유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범람원 퇴적으로 보이는데 유물의 집중이 산발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에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인류가 출현해 사냥과 채집을 하는 구석기 유적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시에 지표수 그리고 지중에서 벌레와 식물뿌리 등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현재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파악이 가능한 생활면은 보이지 않고 있다.

 

〔유물〕


7차에 걸친 발굴에서 3,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이보다 많은 수가 지표에서 채집되었다.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과 규암을 이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이 외에 현무암·편마암·운모편암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거의 모두 당시의 하상에 존재하던 강자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m 정도 크기의 냇돌도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hand-axe)들로 양면가공된 것과 외면가공된 것이 있다. 평면이 타원형인 것과 첨두형인 것이 모두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공작과 지형적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와 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 석기가 존재하고 있다. 찍개(chopper)는 양면가공과 외면가공의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냇돌 또는 냇돌조각으로 만들었다. 다각면원구는 상당히 구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다면체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 있는데 대부분 한쪽 면에서 삼면까지 자연면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 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소량의 첨두기와 홈날석기 등이 채집되었다. 긁개는 직선날·볼록날·오목날 등의 형식이 보인다. 몸통이 두툼하고 급경사인 볼록날의 긁개가 보다 정형화한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소형 석기들은 집중가공된 것이 적어서 제작상의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석핵은 2, 3매의 박편을 떼어낸 변형된 냇돌 또는 즉시석핵(casual core)에서부터 보다 정형화한 반원추형 석핵에까지 다양하다. 즉시석핵류가 정형화한 형태의 것들보다도 훨씬 많다. 다량의 박편을 떼어낸 경우라 하더라도 일정 타격면을 반복 또는 규칙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불규칙하게 박편제작한 경우가 훨씬 많다. 박편제작이나 가공에는 직접타격법(돌망치를 사용한)이 주로 사용되었다. 주먹도끼 또는 가로날도끼 등의 대형 석기제작을 위한 대형 박편의 제작에는 대석법도 사용되었다.

박편은 대부분 천석의 자연면 평면이나 박리흔 평면을 이용해 떼어냈으며 소수의 다각모서리 타격면(facetted striking platform)이 보이나 조정타격법으로 볼 수는 없다. 많은 수의 박편이 배면(dorsal face)에 자연면이 남아 있고, 박리각이 100∼105°와 110∼115° 두 범위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한 타격면을 2차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 중 다듬은 석기는 대체로 5∼15% 내외이다. 약간의 석핵과 박편이 존재하고 대형 또는 소형의 석편과 부스러기가 많은 수(80% 내외)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량의 자연천석도 존재한다.

주먹도끼 등 양식적으로 발달한 석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기법으로는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석재의 제약성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온대환경의 적응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의의〕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들은 1970년대 말까지 이러한 석기의 존재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문화를 2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이다. 이로써 세계 구석기학계의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공작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 구석기공작 이해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부 홍적세동안 고인류의 서식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전곡리 유적조사를 계기로 한탄강·임진강 유역에 대한 4기 지질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이 제고됨으로써 구석기연구의 방법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全谷里(金元龍 外, 文化財硏究所, 1983)
≪참고문헌≫ 전곡리발굴중간보고(정영화, 1984)
≪참고문헌≫ 全谷里-1986년도발굴조사보고서(서울대학교박물관, 1989)
≪참고문헌≫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문화 예보(金元龍·鄭永和, 진단학보 46·47합병호, 1979)
≪참고문헌≫ 전곡리출토 주목도끼류의 성격에 대하여(裵基東, 古文化 22, 1983)
≪참고문헌≫ 전곡리 발굴조사(정영화, 古文化 23, 1983)
≪참고문헌≫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연구(이기길, 古文化 27, 1985)
≪참고문헌≫ 전곡리 구석기문화와 동북아시아 洪績世(裵基東, 학술원논문집 28, 1989)
≪참고문헌≫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형성과정과 문화전통이해에 있어서의 문제점(裵基東, 金正基博士華甲紀念論叢,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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