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三田渡碑) *** 사 적 제101호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 12월 8일(음력) 건립된 비로서 전체의 높이 5.7m,비신의 높이 3.95m,폭 1.4m이며, 제액(題額)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광해군 때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 관계로 거슬러올라간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선에 대해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만주족)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기화로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 급속히 세력을 확장, 숙원이던 부족 통합에 성공하고 후금((後金), 뒤에 청(淸)으로 고침)을 건국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 조선정부는 명의 군사동원 요청에 따라 병력을 만주 지방으로 파견, 후금의 군대와 사루 후 전투에서 대치했다가 곧바로 투항한 적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뒤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인조 5년(1627)에는 후금의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온 일이 있었다(소위 정묘호란(丁卯胡亂)), 조선이 청과 화약(和約)을 맺은 뒤에도 양국 관계는 원만하게 진전되지 못했는데, 인조 14년(1636)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에 대해 칭신(稱臣)할 것을 강요함에 이르러 마침내 양국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 해 12월 청의 태종은 10만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왔다(소위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는 신하들과 더불어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군과 대치했는데, 이듬해 1월 하순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한 비축한 식량도 바닥이 나자 50여 일간의 농성 끝에 부득이 1월 30일 청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청의 태종은 조선정부에 대해 삼전도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장유(張維)·조희일(趙希逸) 등이 지은 글을 청에 보냈던 바 모두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인조의 특명으로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글이 받아들여져서 이를 비석에 새기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공조에서는 삼전도의 제단터에 제단을 높고 크게 증축한 다음 비석을 세웠는데, 글씨는 서예가로 이름 높던 오준(吳竣)이 썼고, 전자(篆字)로 된 '대청황제공덕비' 라는 제액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이처럼 삼전도비는 비록 조선이 청에 대해 항복하게 된 경위와 더불어 청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고 예찬한 굴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한편 비석 표면의 왼쪽에는 몽고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뒤쪽에는 한문으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고어 연구의 자료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삼전도비 전문 >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싸움에 도원수 강홍립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께서는 강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강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 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와 더불어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天降霜露 載肅載育 오직 황제가 그것을 법 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惟帝之則 竝布威德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 이었다./皇帝東征軍士十萬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殷殷轟轟 如虎如?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西番窮髮 曁夫北落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執?前驅 厥靈赫赫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皇帝孔仁 誕降恩言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十行昭回 旣發且溫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始述不知 自貽伊戚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帝有明命 如寢之覺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我后祗服 相率而歸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匪惟恒威 惟德之依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皇帝嘉之 澤洽禮優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載色載笑 爰束戈矛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가지 옷이다./何以錫之 駿馬輕?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都人士女 乃歌乃謳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哀我蕩析 勤我穡事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皇帝班師 活我赤子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哀我蕩析 勤我穡事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金?依舊 翠壇維新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枯骨再肉 寒?復春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有石嵬嵬 大江之頭 만년토록 우리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萬歲三韓 皇帝之休 작(作) 이경석. 서(書) 오준. 전(篆) 여이징.
<청나라 황제(태종)가 인조에게 보낸글 > (前略)내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강대하몽고 약자를 없신여겨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너희 변방 장수들을 거듭 타이르되, '정묘년에는 부득이하여 잠시 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화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正義로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을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적을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는 등등의 말을 했느냐. 이제 짐히 친히 너희를 치러왔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그들이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昏暗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遼, 金, 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헤어져서는 홀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설사 목숨을 연장해서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인조 5)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던 후금과 조선 사이의 전쟁.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後金:淸)이 3만 명의 대군을 파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따라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1627년 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했는데,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國)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조약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의(義)'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조했다. 조선이 청과의 싸움을 결정한 후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의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월 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 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椵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가 심각했다(→ 속환문제).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북벌론, 정묘호란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百濟初期積石塚)*** ▒ 지정번호 : 사적 제243호 ▒ 지정연월일 : 1975년 5월 27일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61-6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은 백제가 한강 하류역에 위치한 한성(漢城)에 도성을 정한 후 서기 475년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형성된 백제 전기 고분군이다. 백제의 매장 풍습과 함께 축조 당시 문화ㆍ정치ㆍ사회 등에 관한 백제사의 여러 가지 내용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표고(標高) 20m 정도의 남북 방향의 얕은 뚝 모양의 대지 위에는 1917년 당시만해도 60기 이상의 적석총이 남아 있는 등 돌이 많았기 때문에 '돌마리'라고 불리워 왔으며, 석촌동이란 지명은 서울특별시 관할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생긴 것이다. 이 고분군에는 막돌ㆍ포갠 돌 등을 섞어 쌓아 분구를 축조한 방형단축(方形段築)의 적석총(積石塚)을 비롯하여, 즙석(葺石)을 덮고 흙을 쌓아 분구를 축성한 봉토분, 지표에 장방형 토광을 파서 묘광을 만든 토광묘, 그리고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을 이룬 고분 등 구조형식과 축조시기를 달리하는 고분 8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중에서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어 보수ㆍ정비된 것은 제3ㆍ4호분이며 모두 적석총(돌무지무덤)이다. 제1ㆍ2호분 및 내원외방형분 등 3기는 파괴가 극심하여 하단부의 일부만 남아있고, 토광묘 2기는 원형을 보존하기 위하여 흙을 덮고 그 위에 모형 토광묘를 만들어 놓아 백제 전기 고분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제3ㆍ4호분은 방형단축의 분구라든가 큰 자연석을 비스듬히 세워 놓은 지탱석 등 분구의 구조형식이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基壇式積石塚)과 동일함에 따라, 이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분군의 보수·정비 공사는 1983년 3월에 착수하여 1991년 6월에 완료되었다. 1. 석촌동 제3호 돌무지무덤 3호분은 방형(또는 장방형)의 단축적석총(段築積石塚)이고, 3단까지 남아있는 각 단의 높이는 0.7∼0.8m, 폭 4∼4.2m이다. 남북 길이 43.7m, 동서 길이 55.5m, 그리고 높이가 약 4.5m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의 축조 과정은 상부 시설물을 만들기에 앞서 지반 위에 자갈을 고르게 깔아 수평을 이루게 하고 그 위에 할석(割石)을 폈다. 다시 할석 위에 한 벌 자갈을 깔고 또 할석을 펴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기단에는 넓은 장방형의 판석을 두 겹 쌓았고 그 바깥 주위에는 묘역 시설로 주구(周溝)를 팠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으로 만든 얇고 둥근 판을 가는 금줄로 꿰매어 단 금제영락형(金製瓔珞形) 장식품 1점과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자기 항아리 목 부분(지름 14.4㎝, 두께 0.6∼0.8㎝), 그리고 흑도편(黑陶片)과 백제 초기의 회청색 연질토기편 등이 있었다. 석촌동 고분의 인근 지역에는 풍납리토성ㆍ몽촌토성ㆍ삼성동토성, 그리고 한강 건너 아차산성 등을 비롯하여, 가락동과 방이동의 고분들은 백제가 이곳에 도읍하고 있던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석촌동 제3호분에서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옛 송파나루터에서 발견된 백제 초기의 실옥잔구(室屋殘構)와 함께 석촌동 고분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고분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장군총(將軍塚)보다 규모가 크고, 아울러 고구려 기단식 적석총의 외형과 축조 방법이 흡사한 사실 등을 토대로, 고구려의 유이민이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한번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주변의 백제 초기 유적을 감안할 때 이 고분의 축조 시기는 초기 백제 성곽 축성시대로 잡고서 A.D. 3세기 중엽의 초대형급 적석총으로서 근초고왕(近肖古王, 346 ∼ 374)의 능(陵)일 가능성이 크다.
< 2. 석촌동 제4호 돌무지무덤 4호분은 3호분의 남쪽 약 80m 거리에 있으며, 정방형으로 잔 자갈을 깔아 묘역을 먼저 구성하고 있다. 제일 바깥선은 한 변 약 30m이고, 그 안으로 좁혀 들어가면서 각각 한 변 24m, 17.2m, 13.2m이고, 가장 안쪽 중심부를 이루는 묘곽의 한 변은 4.8m이다. 단(段)의 높이는 교란되었고 빠진 돌이 많아 원래의 것은 정확히 알아낼 수 없지만 현재 제3단 윗 부분의 높이가 2.24m, 제2단 높이는 1.24m, 기단은 0.62m이며, 기단과 기단 사이의 폭은 거의 비슷한 1.8∼2.1m 내외이다. 이 고분은 봉토로 덮여 있었고, 정상부는 편평해서 방대형(方臺形)을 이루고 있었다. 원래 석총의 정상부에만 둥근 봉토가 덮여 있었고, 제2, 1단은 석축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분의 정상부 중앙에는 동서 4.6m, 남북 4.8m의 정방형에 가까운 묘곽과 남벽 중앙에 달린 연도(羨道)가 있는데, 연도는 남북 길이 2.3m, 동서 폭 2.1m(바깥쪽) 1.6m(곽쪽)이어서 밖을 향하여 약간 넓어지고 있다. 곽내는 일단 위까지 채워진 점토층을 다시 파서 남반과 북반에 동서방향의 두 평행 구덩이를 만들었으며, 북쪽 것은 그대로 다시 진흙을 메워 버린 것 같으나 남쪽 것은 바닥에 부정형(不定形)의 돌을 깔고 그 위에 적석하여 묘곽의 석벽면까지 올라오게 하였다. 이 적석부 북쪽의 광(壙)은 부부합장용으로 마련해 두었다가 어떤 이유로 하여 매장을 중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은 예는 고구려 적석총에서도 보고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기와편이 나왔는데, 청회색 연질토기편과 표면에 흑색을 한꺼풀 입힌 유사흑도편(類似黑陶片), 그리고 제3단에서 쓸려 내려온 청회색 연질의 백제 기와편이 다량으로 나오고 있어 묘곽내의 동쪽 끝에 부장되었던 것들이 도굴시 버려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밖에 4호분 주위에서 금으로 만든 가는 고리 형태의 귀고리 한 점이 발견되었다. 이 고분의 장법(葬法)은 돌로 쌓은 묘곽 안을 점토로 메우고 거기에 다시 토광을 파서 반듯한 돌로 석곽의 형태를 갖춘 다음 유해를 넣은 목관을 안치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위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작은 판석들을 지붕처럼 덮고 그 위에 다시 자갈과 점토를 섞어 제3단 위만을 봉분처럼 만든 모양이다. 원형의 파손으로 이 매장시설부의 세부적인 형태는 미심쩍은 점이 많으나 환인(桓仁) 고력묘자(高力墓子)의 11호분의 구조가 이와 비슷하여 전형적인 고구려 적석총에 봉토분(封土墳)의 요소가 가미되는 단계의 형식이라고 생각된다. 4호분의 현재 모습은 없어진 부분을 새로운 재료로 보충하여 복원한 것이다. 4호분은 고구려 적석총의 축조 시기 등을 감안하면 송파구 일대의 백제 고분 중에서는 확실히 고식이며, 따라서 그것은 공주로 천도한 475년 이전에 축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4호분은 3호분에 비하면 구조상 늦은 형식이며 이 지역의 석총으로서는 후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것은 4세기 또는 5세기 전반기의 고분으로 고구려 적석총에서 시작해 한강 유역에서 지역적 변화를 일으킨 백제적 적석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3. 석촌동 제1호분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 구조는 알 수 없었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이라고 보게 된다.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이 합쳐진 것인데, 합침에 있어 남ㆍ북분 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다.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20∼30㎝크기의 포갠돌로 네벽을 쌓고 바닥에 10㎝ 안팎의 포갠 돌 조각ㆍ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있었다. 그리고 평면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에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려묘자촌 제15호분·평안북도 소암리 제45호분 등이 있다. 4. 석촌동 제2호분 제2호분은 복원 정비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을 이루고 남아있었다. 봉우리 모양의 분구 바닥 주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돌담장이 돌려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0㎝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의 크기는 제1단은 길이 동서 16.40m, 남북 16.50m, 높이 90㎝, 단의 너비 2m이고, 제2단은 길이가 동서 12.50m, 남북 12.60m, 높이 90㎝, 단의 너비 2m이며, 제3단은 길이 동서 8.50m, 남북 8.60m, 높이 70㎝, 단의 너비는 정상부에 흙이 덮어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전체 높이는 3.50m이다. 그리고 제1단 바닥 서북쪽에서는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둔 목관토광묘 1기가 드러났는데 크기는 길이 250㎝, 북쪽 너비 60㎝, 중앙 너비 40㎝, 남쪽 너비 65㎝, 깊이 10∼15㎝이다. 이러한 구조형식의 적석총은 분구, 배부구조 등 고분 전체를 돌을 쌓아 축조한 고구려식의 전형적인 적석총이 변하여 백제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 석촌동 제2호 토광묘 석촌동 제2호 토광묘는 생토층을 파서 묘광을 만들었는데 평면은 장방형이고, 크기는 길이 223㎝, 너비 76㎝, 깊이 21㎝이다. 장축은 동남동에서 서북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하여 약간 경사졌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위로 동쪽에는 회백색 목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으며 묘광 바닥에서 약간 위의 흙속에서 지름 1.6 ∼ 1.7㎝ 크기의 민고리 금귀걸이 1개가 드러났다. 이러한 구조 형식의 토광묘는 제3호분과 근접한 동쪽 지점에서 10여기가 드러났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토광묘는 적석총보다 앞선 시기의 묘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원래 있던 곳에서 남쪽으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제2호 토광묘 모형을 만들어 두었다. 6. 석촌동 제3호 토광묘(石村洞 第三號 土壙墓) 제3호 토광묘는 표토밑 70㎝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 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형이며, 묘광의 크기는 길이 208㎝, 너비 58㎝, 깊이 26㎝이다.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목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 원래의 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 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7.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시기와 고분의 원형은 분명하지 않았으나 발굴 조사에 의하여 고분 기단부의 서남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냈다. 그것에 의하여 복원 정비하니 안쪽은 지름 11.4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었기 때문에, 기단부의 모양을 내원외방형이라고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는 적석 토광묘 2기와 석곽묘 3기가 들어 났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곽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한편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ㆍ원형이고 하부가 평면ㆍ방형인 상원하방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평면의 모양이 이 적석총의 기단 평면 모양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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