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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李從茂,1360년 ~ 1425년)는 조선의 무신이다.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으며, 대마도를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개요
고려 공민왕 9년 1360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1397년 옹진에서 만호(萬戶)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1]
▶대마도 정벌
세종 원년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을 정복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하여 1419년 음력 6월 12일 주원방포(현 추봉도)를 기착지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원년 음력 6월 19일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하여 다시 대마도로 향하였다. [2]당시 총 227척의 규모로 출정을 하였으며, 6월 17일 출발하여 바람(마파람) 때문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6월 20일 오시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두지포에 내려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으며, 중국인이 포함된 포로를 구출하였다. [3] 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다.[4] 그러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은 끈질기게 죄를 물었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다.[5]
그러나 같은 해 11월 9일 죄를 사하기 위해 종군하려는 김훈과 노이을 추천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당한다. 김훈과 노이는 무재가 뛰어나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해 종군하려 하였고, 이종무는 이를 세종에게 간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사간원 등은 불충한 자를 종군시켰다고 하여 이종무와 김훈, 이적 등을 처단할 것을 간하였으나 세종이 거부를 하였고, 이종무는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며 탄식을 했다.[6] 그 후 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1420년 6월 5일 풀려나 서울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를 출발하여, 이듬해 1424년 2월 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1425년 음력 6월 9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세종은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6월 17일 내린 교서에서 세종은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라는 표현으로 비통함을 표시하였다.
이종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들
- 이승평(李昇平)
- 이덕평(李德平)
- 이사평(李士平)
▶이종무함
1995년 5월 18일 1200톤급의 대한민국의 다섯번째 국산 잠수함 이종무함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진수되었다. 수중 최고 속도는 22KN이며, 어뢰와 기뢰를 장착하고 2개월 이상 단독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평가
이종무는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우왕 때 벼슬을 하여, 창왕, 공양왕까지 고려조 마지막 네명의 왕을 경험하였고,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초기 4대왕을 모신 무인이었다. 66세의 일기동안 모두 8대에 걸친 왕을 경험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안정된 대일관계를 마련하였다.
▶같이 보기
▶주석 [편집]
■ 이종무장군묘 -투어가이드
위치 : 경기 용인시 동천동 고기리 산 79
이종무 장군의 묘소는 광교산 기슭 능밑에 있다. 장수이씨 양후공파 후손들의 고증에 따르면, 한 때 이장군의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문중의 기록을 근거로 가까스로 다시 찾았다고 한다. 현재 묘소는 사방 13척 정도의 장방형 호석이 둘러진 위에 봉분이 마련되었고, 정면에는 상석, 향로석과 묘표가 있다. 상석은 근래에 마련된 것이며, 묘표는 본래의 것으로 보이는데, 거의 마모되어 비문을 판독 하기 어렵다. 단지 비문 가운데[장자승 평입]이라는 글씨만 판독이 가능하다. 묘표의 크기는 폭 40cm, 높이 100cm, 두께 17cm 이다. 좌우에 문인석이 있고, 1975년에 후손들이 새로 세운 묘비가 있다. 본래 구비가 있었다고 하나 언제 소실되었는지 알수 없다. 이종무 장군의 묘역은 1975년 9월5일,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이종무(1360 ~ 1425)장군은 어려서부터 활쏘기, 말타기에 능하였다. 고려 우왕 7년(1381)에 22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그의 일생은 거의 왜구와 싸움으로 점철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태조 6년(1397) 옹진만호로 재임 중 왜구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첨절제사가 되었다. 정종 2년(1400)에는 좌명공신 4등으로 통원군에 봉해졌다. 그 후 좌군총제를 거쳐 남양, 수원등지의 조전절제사, 중군도총제등을 역임하였고, 삼군도체 찰사가 되었다. 이 장군의 공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마도 정벌이다. 세종 1년(1419)전함 227척을 동원, 군사 1만 7천명을 거느리고 마산포를 출발, 대마도로 진격, 함적선 100여척을 빼앗는등 전과를 크게 올리고 개선하였다. 그 후 찬성사에 승진하고 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 이종무 장군[1360~1425]-해양정보
튼튼한 국방력 없이 국가의 안녕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 시대의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종 시대의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였다.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30년의 격차를 두고서 이종무는 세종 전반기 , 김종서는 후반기의 국방을 도맡았다. 이종무는 1360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1381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무인으로 등용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왜구 격퇴에 앞장섰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이 후 그는 좌군절제사,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세종 즉위 다음 해인 1419년에는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해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종무가 휘하에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오른 것은 한 달 뒤인 1419년 6월 19일이었다. 이 때 동원된 병 선은 모두 227척, 군사는 1만 7천여 명이었고, 식량은 65일분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종무 부대는 이튿날 대마도에 진입하여 129척의 선박을 노획하여 쓸 만한 20여 척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으며, 가 호 약 2천 호를 소각하고, 적군의 수급 114급을 참수했다. 정벌 과정에서 좌군절제사 박실이 이끄는 부대가 복병을 만나 한 때 고전하기도 했으나 왜구측의 평화협정 제의로 그 해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했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 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대일 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종무는 대마도 정벌 후 찬성사로 승진하였다. 한 때 대간들에게 탄핵되어 유배되기도 했지만 복관되었고, 이 후 부원군에 진봉되었다가 1425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 이종무 (李從茂 ; 1360~1425)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서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시호는 양후(良厚)이다.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고 1397년(태조 6) 옹진만호(甕津萬戶) 때 왜구가 침입, 성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이듬해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 1408년 남양수원등처조전절제사(南陽水原等處助戰節制使)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등을 거쳐 이 해 장천군(長川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09년 안주도병마사(安州都兵馬使), 1411년 안주절제사(安州節制使), 1412년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고, 1417년 좌참찬을 거쳐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했다. 그 해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한 후 돌아와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나 불충한 김훈(金訓)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상원(祥原)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풀려났고, 1421년 부원군(府院君)이 되었다. 1422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동행한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직계(直啓)하지 않아 1423년 과천(果川)에 귀양간 후 이듬해 풀려나와 복관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