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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3: B와 D 사이 (창세기 4:16-26절)

2007.04.07 11:30 | 창세기 강해 | jabir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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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3: B와 D 사이 (창세기 4:16-26절)
창세기 강해 13: B와 D 사이 (창세기 4:16-26절)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인생을 B로 시작해서 D로 끝나는 것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From Birth to Death!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죽음을 향하여 질주하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은 오늘이라는 시간만큼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모습을 창세기를 통하여 확인하면서 그러면 소망이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게 됩니다. 에덴의 동쪽은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놋이라는 이름은 지명이 아니라 가인의 삶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놋이라는 말은 유랑, 방랑의 뜻입니다. 인간들은 이제 평화와 안식과는 멀어져서 끝없는 고독과 소외가 넘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 떠돌아 다니며 사는 인생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오늘 본문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며 성을 쌓고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에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을 떠나 성을 쌓았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단절시켰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성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세상을 향해 떠나 갈 때 파멸이 시작됩니다. 가인은 스스로를 보호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높은 도피성을 쌓았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쌓은 성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17절부터는 그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에녹이 아들을 낳고 이랏이라고 부릅니다. '이랏'은 '증거하다', 나타내다, 과시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자기 과시를 상징합니다. 결국 가인의 후예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과시하는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랏의 아들 '므후야엘'은 '하나님 때문에 맞았다, 깨졌다'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원망과 적대감이 표현된 이름입니다. 또한 므후야엘의 아들 '므드사엘'은 '지옥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라멕'은 '나는 강하다'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교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라멕은 일부일처제도를 어기고 일부다처제를 만든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함을 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멕의 아들들로 인하여 문명이 발달되어 나갑니다.

첫째 아들 야발은 육축을 방목하는 대신 축사를 지어 여러 종류의 육축을 전문적으로 사육함으로 축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아우인 유발은 예능 방면에 뛰어나 수금과 퉁소를 잡아 예술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어 엔지니어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세 아들의 이름은 야발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야발이란 생산하다, 만들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스스로 무엇인가 만들어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가인의 후예들은 경제, 예술, 산업, 군사 등의 다양하고 화려한 문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인간 스스로가 일으킨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며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들의 삶은 풍요롭고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여유와 재미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의 내면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23-4절입니다. 이는 인류 최초의 시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시를 지어서 부른 것입니다. 자신에게 작은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이고, 조그마한 손해를 입힌 사람을 죽이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누가 가인을 해롭게 한다면 칠 배의 벌을 받게 되지만 라멕은 자기 동생도 아닌 사람을 죽였으니 자기를 괴롭히는 자는 칠십칠 배의 벌을 받아야 된다고 한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고 남을 누르고 일어서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발전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없어지고, 내가 신이 되어 남을 죽이고 일어서야 하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과학과 문명은 결국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풍요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바로 지금 우리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가인의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로움, 발달된 문명의 혜택, 강자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지만 결국은 그들이 만든 것들로 인하여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인의 족보는 현대 물질적인 풍요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현대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25절 이하에는 또 다른 족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허락하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또 다른 씨입니다. 곧 아벨의 족보입니다. 하나님이 받은 예배들 드린 후손들이 등장합니다. 셋은 그 이름의 뜻이 주어진다 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가인은 언제나 내가 했다고 과시하고, 아벨의 후예들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두 족보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셋을 통하여 에노스가 태어납니다. 그가 태어난 후에 비로서 사람들이 하나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에노스란 연약하다, 순간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모두 강하고, 영리하고, 세상에서 살아갈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후손들은 연약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두 자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인의 후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아벨의 자손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벨, 셋, 에노스는 예수님의 족보의 조상이 됩니다. 가인의 족보에는 문명의 시작과 번창은 있으나 끝이 없이 방황하는 모습으로 끝나지만 아벨의 족보는 5장으로 이어지면서 예수님까지 연결되는 영원한 생명의 자손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자손의 족보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샤르트르의 말처럼 B에서 시작하여 D로 끝나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많은 것을 누리고 성취하고 살아도 죽습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나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무덤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철학자의 말처럼 그저 B에서 D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 인생인가?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숨이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또 다른 씨의 소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B와 D 사이에는 C가 있습니다. 이 C를 통하여 우리 인생이 흙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분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 안에 죄가 있지만 그 죄가 너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내 머리 위에 둥지를 만들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가인은 죄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죽였습니다.

우리 인생이 허무하게 한 줌 흙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 C는 CHOICE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결단이 내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생명과 죽음이 결정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 가정, 미래를 위하여 오늘도 우리는 고민하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선택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모두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소망의 첫 번째는 이처럼 선택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준 C로 우리는 또 다른 C 곧 CHRIST를 내 삶의 주인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결단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누구의 족보에 이름을 올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More - The Four Dimensions of Intimacy with God(더 넓게 더 깊게)라는 책에서 소개된 한 성도의 유언이 있습니다. 47세의 나이에 난소암으로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쉐릴 스테판(Sheryl Stephens)이라는 성도의 아름다운 인생의 고백입니다.

“내가 떠난 후 사람들이 나의 모습이 때문에 나를 기억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 때문에 나를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나의 행한 일들로 나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행하신 일들이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남에게 무언가 베푼 나의 모습보다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기만 했던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어졌으면 합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했던 나의 모습 보다는 죄인이었던 나를 먼저 사랑해주셨던 나의 '예수님‘이 먼저 기억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내 모습 대신 나에게 성부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먼저 떠올려 졌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기도했던 내 모습보다는 언제나 내 기도를 들어주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나의 ‘예수님’이 기억되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했던 내 모습보다는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나의 힘이 되어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먼저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의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을 내 친구들이 알기를 바랍니다. 나의 출생과 삶과 죽음이 사람들의 입에서 언급되기보다는 오직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만이 언급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던 내 주 예수님, 나로 하여금 다시 죽음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시려고 나대신 죽음의 계곡으로 내려가셨던 주님! 나에게 영원한 생명의 가슴 벅찬 소망 주시려고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신 생명의 주 예수님. 이 땅에서 허락된 내 삶이 마치는 그 날, 나로 인해 오직 ‘예수님’만이 기억되어지시는 것, 그것이 오늘 나의 기도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선전문구가 있었지요. 내가 누구에 속할 것인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바로 영원한 삶을 선택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허비하다가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선택으로 CHANGE 해야 합니다. 내가 변화를 추구할 때 우리 인생은 CHANCE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내 인생은 바로 나에게는 영원을 위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변하지 않으면 나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자유의지주신 것이지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변화를 추구할 때 내 삶은 바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이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선택한 사람은 그 선택에 책임을 지고 하루하루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하여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내 삶의 기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 온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순간 사람들은 그분을 선택하여 환호하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또 다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가인은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후손들은 비록 약했지만 그 약함으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인생이 B에서 D로 끝나는 것을 알았던 에노스는 바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기에 예수님의 족보에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어떠한 선택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선택한 모든 것은 여러분 자신이 동의한 결과입니다. 누구도 책임을 질 수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an)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가끔 인생의 끝자리에서 지금을 살펴보라. 우리의 삶은 대개 환희의 문을 지나 행운의 문을 거쳐 마지막에는 쓸쓸한 퇴장의 문을 반드시 거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그대는 항상 끝을 생각하고 행복하게 될 것을 그려라. 처음 들어설 때의 환호성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갈채는 누구나 받는다. 그러나 물러설 때 받는 갈채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하다. 왜냐하면 행운이라는 그림자가 물러가는 자의 문까지 따라나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등장하는 자는 후한 대접을 받으나 퇴장하는 자는 경멸 당하기 쉽다.”

퇴장이 아름다운 삶을 살라는 권면입니다. 박수를 칠만큼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하는 삶이 진정 성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족보를 놓고 여러분은 어는 족보에 속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아벨 쪽이겠지 맞다고 생각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이 B에서 DEATH, DREAM으로 끝나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이제 CHRIST를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성취한 것은 가인의 제물과 삶처럼 허망한 것들로 하나님이 받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답게 퇴장하는 사람으로, 그래서 하나님에게 아름답게 입장하는 삶을 선택하고 그렇게 변화하기를 애쓰는 인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강해 12: 예배를 받지 않는 하나님!(창세기 4:1-15절)

2007.04.07 11:29 | 창세기 강해 | jabir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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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2: 예배를 받지 않는 하나님!(창세기 4:1-15절)
창세기 강해 12: 예배를 받지 않는 하나님!(창세기 4:1-15절)




지난 주간에 한국 스트레스 학회가 ‘생애 주기별 스트레스’라는 주제로 연구한 결과가 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유년기에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 하는 시기로 부모에게서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할까 스트레스를 받고, 아동기에는 경쟁에서 뒤질까 보아, 청년기에는 부모나 어른과 말이 통할지, 원하는 직업을 얻을지 정체성확립 때문에, 성인초기에는 좋은 배우자를 못만날까봐 스트레스를 받고, 성인중기에는 자녀양육과 직장생활이 잘 될까 싶어서, 노년기에는 살아온 인생에 만족할 수 있나 싶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스트레스의 연속이라는 결론이지요. 모든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라고도 합니다. 결국 스트레스의 원인은 내 자신입니다. 내 것,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고민을 세 가지로 분류를 했습니다.
첫 번째 고민은 물질적인 고민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벌고 무엇을 지킬까? 물질에 대한 욕망, 그로부터 오는 고민이 1단계의 고민 곧 스트레스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고민입니다. 인기에 대하여, 평판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나아가서는 남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세 번째 고민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것은 아주 실존주의적인 고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렇게 고민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하이데거는 결론짓습니다. `물질적인 고민에서는 가끔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을 끊거나 어느 정도에 가서 멈춤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는 사람이 있다, 둘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게는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성경은 많은 철학자들, 수도자들, 많은 인생들이 고민하고 있는 인생문제에 대하여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것이며,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는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 행복하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항복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많은 땀을 흘려도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3장과 4장은 똑 같은 형식으로 이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범죄와 가죽옷, 살인과 표,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가 뒤따릅니다. 곧 하나님으로 인하여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아담과 하와가 이제 자손을 얻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아들이 가인입니다. 하와가 가인을 낳고 기뻐서 1절에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이 구절은 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기뻐하는 의미보다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내가 남자를 낳았다는 것이 원문입니다. 이 구절을 그대로 직역을 하면 “나는 주님과 똑 같이 남자를 창조하였다”(I have created a man equally with the Lord) 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지금 창조주와 자신을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이를 얻은 기쁨도 있었지만 하나님처럼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이처럼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처럼 된 것 같은 착각으로 가인의 출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인간은 사람처럼 사는 것 곧 하나님에게 항복하는 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가인”이란 이름도 흥미롭습니다. 이 이름은 “창, 투창”을 뜻하기도 하며, “만드는 자, 창조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아랍어에서 가인은 철을 다루는 자, 즉 “대장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22절에 철 연장의 조상의 이름이 두발가인이라고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자신의 창조력을 자랑하며 이와 동시에 첫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가인은 장자로서 하와의 “창”도 되며, “창조자”로서 미래를 개척하고 창조하는 자인 셈입니다. 하나님을 또다시 잃어버렸습니다.
하와는 이어 아들을 더 낳고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부릅니다(2절). 이 이름이 충격적입니다. 하와는 둘째 아들을 “아벨” 즉 “거품, 무가치, 없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또 다시 자신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와는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얻은 아들에게 인생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땀을 흘려도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두 아들이 장성하여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 아벨은 양을 치는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들이 각각 자신들이 땀을 흘려 얻은 것들을 제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피 흘린 제물을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Gunkel) 이것은 죄를 속함에는 피를 흘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말한다는 그런 해석입니다.
둘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믿음과 정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Calvin) 즉 제물 자체보다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정성이 포함되어 있느냐를 보시는 하나님이란 그런 해석입니다.
셋째, 제물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란 것입니다.(Von Rad)
인간은 단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받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지 못한다는 해석입니다. 가인이 얼굴을 붉힌 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을만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넷째, 제물 열납 여부 보다는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사건 후 가인의 반응에 초점을 두었다는 해석입니다.(G.E.Gowan) 즉, 가인이 분하여 흥분하면서 반응하는 바로 그 점을 말하려고 하였다는 그런 해석입니다.
다섯째, 제물보다는 드리는 사람 자신의 평소의 삶이 어떠했느냐에 달렸다는 해석입니다. 즉 하나님은 제물 자체보다 제물을 드리는 자의 평소의 행위가 얼마나 이웃과의 올바른 삶의 관계를 유지해 왔느냐를 본다는 그런 해석입니다.

예배를 인간의 감정대로 조절하려는 의도를 버려야 합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받고 안 받는 문제는 하나님 영역입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그 드리는 예배에 제물은 단순히 물질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 주장에 동의합니다.

제물과 드리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게 안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제물과 함께 죽고 사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이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예수님을 완벽한 제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를 완벽하게 연결해 줄만큼 온전한 제물이었다기 때문입니다. 내가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과 나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입니다. 내가 무엇을 드리냐에 따라 그 연결고리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제물에는 드리는 사람의 온전한 헌신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서울 장충동에 가면 경동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건물을 지을 때 독특한 예배학적인 목적을 갖고 지었습니다. 예배당 문이 교회 입구의 뒤쪽에 있습니다. 교회 마당으로 들어와 바로 예배당 정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뒤쪽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배당에 들어올 때 바로 생각 없이 들어오지 말고 걸어오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고 들어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습관적인 모든 제물은 버리고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아벨이 드린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입니다. 가인이 드린 것은 땅의 소산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벨이 드린 제물을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가인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첫 번째 것과 기름은 바로 아벨의 헌신적인 마음이 담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이란 내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인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든지 첫 번째 것은 더 소중하게 생각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가 가진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를 주장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물질, 시간, 재능, 삶 전체를 내려놓는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빠진 것들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가 됩니다.

지금 인류 최초의 살인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살인의 동기가 순수하고 경건한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살인의 동기입니다.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것은 내 마음의 정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정성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물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제물과 나는 같은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헌금, 기도, 봉사에 내 삶, 내 마음이 빠진 것들은 가짜입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는 예배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벨은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열납하신 것입니다. 열납한다는 단어의 뜻은 그저 하나님이 덥석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LOOK CLOSLY INTO 곧 자세히 보고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세히 보고 호의를 가지고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세히 보고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예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빠진 예배, 내가 빠진 의미가 없습니다. 의무와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삶이 빠진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심적으로, 신앙적으로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됩니다. 종교적인 기술자가 되어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학교 시절에 필리핀 선교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가다 라는 지역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 지역은 마닐라에서 자동차로 약 10시간 정도를 가야 되는 외진 곳이었습니다. 저희 일행이 도착을 해서 숙소에 들어가자 마자 교회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 일행을 안내하기로 약속되었던 그 교회 목사님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착한 날이 금요일 저녁이었기에 바로 시신을 교회로 옮기고 장례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동네를 나가 보았는데 교회 앞에 있는 시장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목사님 장례기간에는 온 마을이 장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죽음보다 더 큰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대답이었습니다. 배운대로 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 저희 일행이 모든 예배를 주관하여 드리게 되었는데 제가 안내와 헌금을 맡았습니다. 그 교회도 우리 교회와 마찬가지로 헌금시간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우들이 들어오면서 보자기에 싼 것들을 교회 뒤 쪽에 쌓아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까 자신들이 농사한 농작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보자기가 아주 깨끗하게 빨아서 다려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허름한 보자기를 만지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곳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삶이 함께 하지 않는 신앙은 단지 썩어 없어지는 육체와 같다는 것, 자신들의 목사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들의 생업을 접을 수 있는 신앙과 삶, 하나님에게 결코 인색하지 않은 정말 풍성한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깨끗한 헌물 보자기야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과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이 빠져버린 예배, 하나님에게 인색한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입니다. 그러한 예배를 드렸던 가인은 결국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인은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느 누구나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뒤틀려버린 인생은 이렇게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인생은 결국 파멸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인생에서 탈출하는 길은 바로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신위생에 대하여 세계적인 석학이요 전문가인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을 써서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스트레스 인생에게 필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WPLW' 라고 부릅니다. 첫째, 일을 말합니다.(work). 그 다음엔 놀이(play)를 말합니다. 셋째는 사랑, (love)를 말합니다. 넷째가 예배,(worship)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바로 그 만큼이 여러분 신앙의 크기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마음과 삶이 빠진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이 받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예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예배에 성공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예배는 바로 항복하는 자리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바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하나님에게 다 드리십시오.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인생이 성공하는 인생입니다.



창세기 강해 11: 심판은 은혜입니다 (창세기 3:14-25절)

2007.04.07 11:28 | 창세기 강해 | jabir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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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1: 심판은 은혜입니다 (창세기 3:14-25절)
창세기 강해 11: 심판은 은혜입니다 (창세기 3:14-25절)




오늘 본문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선고하는 내용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쳐버린 인간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심판을 받을 순서가 뱀, 여자, 그리고 남자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심판이 후손들에게 내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후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저주가 자손대대로 내려 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심판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에게 내려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이 자유를 자신들을 위하여 사용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사람에 대한 의존은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들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존은 우리를 자유로 이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는가 그 정도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자신들을 위하여 사용해버린 인간들에게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먼저 뱀에 대한 심판입니다.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짐승과 달리 배로 기어 다니는 것이 저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뱀은 "종신토록 흙을 먹을 것입니다." 이 구절의 문제는 뱀이 실제로 "흙을 먹지는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흙을 먹는다"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숙어로서 마치 우리가 사용하는 속어 "엿 먹는다"가 문자 그대로 엿을 먹는 것이 아닌 것처럼, "흙을 먹는 것"은 싸움에서 패배하여 철저한 수치를 당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은 "철저한 패배"를 뜻합니다[사 65:25; 미 7:17; 시 72:9, "그 원수들이 티끌(흙)을 핥을 것이다"; 사 49:25)].
또한 여자와 자손대대로 원수가 될 것이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15절을 고대교부들이 원시복음, 혹은 원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자와 뱀이 어떻게 대등한 관계로 원수가 됩니까? 뱀은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사단이 여자의 후손에 의하여 철저하게 패배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곧 사단의 계획이 결국 예수님에 의하여 완전히 실 패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이 인간의 완전한 멸망이 아니라는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둘째로 여자에 대한 판결입니다. 여자도 뱀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로서 받는 고통'과 '아내로서 받는 고통'입니다. 첫째는 해산의 고통입니다. 원래 여인의 잉태와 해산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 여인은 견디기 힘든 엄청난 해산의 고통을 느껴야만 합니다.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엄청납니까? 이는 죄의 심각성을 전하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생각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둘째는 아내로서의 고통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표준 새 번역을 보면 "네가 남편을 사모할지라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모한다"라는 히브리어는 단순한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으로 남편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려는 의도를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지배할 만큼 열정을 가지고 사모한다고 할지라도 아내는 남편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가정의 문제는 남편과 아내의 문제이기 이전에 이렇게 영적인 문제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역자요, 동반자입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지배 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주도권을 쥐려는 가정은 바로 이렇게 사단에게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은 달라야 합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 있습니다.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자손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고통이 따르지만 후손이 태어난다는 것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아담도 두 가지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동과 죽음의 심판입니다.
첫째는 노동의 고통입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3:17)고 했습니다. 인간은 밭의 채소를 먹어야 하는데(3:19), 땅이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기(3:18) 때문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식물을 얻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먹는 것이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먹을 것을 위하여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고를 해도 내가 먹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곧 평생을 일을 하다가 죽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먹는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평생 먹을 것을 위하여 살다가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도 그 먹을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잘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먹은 것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먹을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을 위하여 성실하게 노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먹을 것이 여러분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먹을 것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신자는 하루의 먹을 것, 곧 일용할 양식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곧 먹는 문제와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잘 먹고 하나님처럼 살겠다는 인간의 계획은 결국 모든 인류를 고통으로 몰아 넣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길은 세상의 길입니다.

미국은 지금 외적으로는 이슬람과 전쟁을 치르고 있고, 내적으로는 먹는 것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6명 중 한 사람이 비만이라고 합니다. 잘 먹다가 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 먹으면 하나님을 잊어 버립니다.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 에덴 동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동편이란 에덴에서 가장 먼 곳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곳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덴의 동편에서 살아갈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에덴의 동편에도 소망의 길이 있습니다. 본문은 두 가지 사실로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자의 이름이 하와로 바뀌었습니다. 하와는 그 뜻이 생명입니다. 지금 모든 환경은 최악입니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서 땀을 흘려야 하고, 결국 먼지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를 하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아담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여자에게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를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 그 답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너는 흙이나 흙으로 돌아갈지라. 아담이 잊고 있었던 자신이 흙이라는 사실이 생각난 것입니다. 나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 곧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 냅니다.

바로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지만 아담은 그녀를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 여자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희미해졌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여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바꾼 것입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최악일 때 여러분의 이름을 바꾸십시오.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십시오. 거기에만 소망이 있습니다. 아담은 지금 사망 선고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 앞에는 죽음이라는 벽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을 끝이 아니라고 믿게 하십니다. 그 죽음이라는 벽을 하나님은 문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마음입니다. 이 하나님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먹고 믿으면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우리의 환경이나 상황을 개선해서 구원하겠다는 약속이 없습니다. 이름을 바꾸십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라가 사래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구원합니다. 이들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무엇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 소망을 두십시오. 상황이 개선되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여러분의 이름을 바꾸신 그분을 붙잡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살리실 것입니다.

20절에서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바꾼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입니다. 아담의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가죽옷이라는 말씀 속에는 아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가죽으로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짐승을 잡아야 합니다. 짐승을 죽이지 않으면 가죽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희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심판이 따라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죽이는 대신 짐승을 잡은 것입니다. 용서하신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만든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으로는 가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부끄러움을 감추고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행위 이것이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는 행위 속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옷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손수 그 옷을 벗기시고 새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십니다. 이 간단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들이 만든 옷으로 하나님께 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불완전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이사야 64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 우리의 쇠패함이 잎사귀와 같도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뭇잎의 종교와 가죽옷의 종교... 나뭇잎의 종교란 자기의 소양과 도덕 그리고 의와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가고자 하는 소위 행위의 종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내 힘으로 찾아가는 종교가 나뭇잎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찾으면 찾아지는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곧 그분 스스로 나를 찾아오신 은혜의 종교가 가죽옷의 종교입니다.
나뭇잎 옷과 가죽옷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상으로 살펴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뭇잎 옷에는 피 흘림이 없고 가죽옷에는 피 흘림이 있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이르기를 <피 흘림이 없은 즉 죄 사함이 없다>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었던 <나뭇잎 옷>에는 피 흘림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 옷>에는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이 만든 종교와 하나님이 명하신 복음과의 차이입니다. 종교로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으로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가죽옷은 용서와 사랑의 옷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뿌려야 하는 피 대신 짐승의 피를 뿌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다는 하버드대학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 하버드대학 철학과 건물을 세울 때 이야기입니다. 모든 설계를 다 마치고 나서 재단관계자들과 설계사들이 총장의 인증을 받기 위하여 총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총장이 물었습니다. 계획과 설계가 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 정면에 남겨둔 공간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설계자는 대답하기를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에게 알맞은 멋진 구절을 새겨 넣을 공간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무슨 말을 넣으려고 하십니까 라고 묻자, 철학도들이 평생 기억해야 할 말로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가 어떻습니까? 그 말을 듣고 총장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아니요.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만한 생각이요. 하나님만이 만물의 척도이며, 우리 인생은 그 가운데 은혜 속에 사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절을 차라리 시편 8편4절 "사람이 무엇이 간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이 구절로 바꿉시다.

죄는 잘 먹고 하나님처럼 살고 싶은 인간의 욕심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살다가 그냥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로마서 8:23절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결국 구원되어 흙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는 이 곳을 낙원으로 만들어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으로 내 환경과 상황이 개선되리라고 약속하는 것은 사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먼 곳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내가 사는 곳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상황개선이 아니라 관계개선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뀐 것입니다. 이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환경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별과 믿음으로 내가 선택하여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 구원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심판이 멸망이 아니라 다시 회복시켜서 가죽옷을 입히시는 것임을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 될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은혜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환경과 상황이 개선될 때를 기다리지 마시고 여러분 스스로 이름을 바꾸어 하나님과 가까이 살아가십시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약속과 영원한 나라의 소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강해 10: 핑계와 심판사이:(창세기3:8-13절)

2007.04.07 11:27 | 창세기 강해 | jabir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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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0: 핑계와 심판사이:(창세기3:8-13절)
창세기 강해 10: 핑계와 심판사이:(창세기3:8-13절)




오늘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상대주의이며, 유토피아 사상입니다. 절대적인 선은 없고 내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되는 시대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인이며, 스스로 선함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원죄는 말도 안 되는 억지가 됩니다. 이들은 인간이 선하기 때문에 좋은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주고 교육을 하면 더 선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계몽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루소는 인간은 본래 순수했는데 사회구조나 문명의 억압으로 악해졌다고 주장합니다.”악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하게 지배 받은 인간에게 존재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입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공평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면 낙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오늘날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도 바로 이 유토피아적인 낙관론입니다. 모든 악과 실패를 환경 탓으로 돌리고, 나는 언제나 환경의 피해자라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저지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희생자 심리가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40년 동안 피운 후 폐암에 걸린 한 여인이 담배회사를 고소를 합니다. 정부와 회사가 흡연의 위험을 끊임없이 홍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운 것은 그녀 자신이었는데 그녀는 재판에서 승소했습니다. 샌프란스코 시 공무원이었던 한 사람이 어느 날 불만스러운 일이 생기자 시장과 자신의 상사 한 사람은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이 재판에서 유명한 트윈키 변론이 탄생합니다. 설탕이 많이 든 트윈키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긴 일시적인 광기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모든 죄에 핑계가 있고 그에 따른 정당화가 있는 것입니다.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환경, 조건이 잘못이지 나는 잘못이 없고 나는 다만 희생자라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우리가 사는 이 땅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전세계에서 1인당 변호사의 수가 가장 많고 법정소송에 대비한 보험료로 들어가는 비용이 110 million 달러에 이르다고 합니다. 결국 죄의 근본적인 해결이 없이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것이고 하나님과는 더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죄의 결과인 핑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낙원에서 죄를 범하는 우리 인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준 낙원에서 인간은 범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낙원이라는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의 역할을 올바로 담당했던 시절은 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였습니다. 교회가 지하무덤에서 나와 로마로부터 공인을 받아 믿음의 환경이 좋아진 후부터 교회와 신자는 타락했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지 환경이 아닙니다.

본문은 죄를 범한 직후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기 이전에 남자와 여자를 만나 자초지정을 듣는 장면입니다. 8절은 낙원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낙원은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걷고 있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자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기 시작합니다. 숨기 시작합니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범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같이 있었습니다. 변한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피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스스로 낙원을 벗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낙원은 어떠한 환경이라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바로 그곳이 낙원입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 후에 스스로 하나님을 피할 줄 아는 교활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9절). 아담아! 부르십니다. 아담이란 말의 뜻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사람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것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뜻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Location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삶의 자세, Attitude를 묻는 것입니다. State를 묻는 것입니다. 사람아 지금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느냐?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느냐? 삶의 방향과 목적, 의미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에 캘리포니아 해안구조대에 갑자기 긴급구조를 요청하는 S.O.S 신호가 왔습니다. 긴급 구조를 요청함, 이 신호를 받은 구조대는 바로 회신을 보냈습니다. 알았다. "곧 구하러 갈 테니 당신의 위치를 알려다오." 라고 what is your position? 보냈습니다. 대답이 왔습니다. "나는 한국의 은행장이다." What is your position이라는 말을 자신의 지위로 잘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어디 있느냐 라고 묻는 하나님의 물음에는 돌아오라는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변명을 합니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첫 번째 변명입니다. 벗어서 두려움인 생긴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무엇인가?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아담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를 지어서 숨게 된 것인데 아담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서 라고 죄를 축소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와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셔서 같이 살게 된 그 여자” 궁극적인 책임을 하나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지 않았다면 나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정당화입니다. 하와에게 하나님에게 묻자 여자도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 뱀이 나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죄는 인간을 이렇게 만듭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그리고 나의 아내, 남편까지 동원하여 자신을 정당화하게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핑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핑계는 이처럼 모든 관계를 왜곡시키고 단절시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 모든 관계가 죄로 인한 핑계로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본문은 죄를 저지르고 난 후부터 심판이 있기 직전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서 심판을 하기로 마음을 작정 하십니다. 시간을 주고 돌아오기를 기대하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핑계의 대상으로 만들고,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인간은 죄를 저질러서 악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죄의 책임과 원인을 남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까지 돌릴 줄 아는 교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환경이 원인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히 돌아설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로 이 죄에 대한 태도가 그들이 받은 심판의 원인입니다.

생물학에서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나를 꼬집었습니다. 자극이지요. 이제 그 아픔을 느낀 다음에 소리를 지릅니다. 그건 반응이지요. 그러나 그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을 느끼고 고통이 전달되고 이것을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판단의 시스템 공간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인격에도 마찬가지랍니다. 외부적 사건이라고 하는 자극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같이 꼬집어 버릴까? 아니면 허허 웃고 말아 버릴까? 아니면 발로 차 버릴까?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합니다. 비 인격자에게는 이러한 공간이 없습니다. 자극 받은 대로 그대로 행동하고, 직감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지요.

이 생물학적 이론을 인격론에 대입해서 유명하게 된 스티븐 코비 (Stephen R. Covey)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와 습관을 가리켜서 주도성, 프로엑티비티(Proactivity) 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주도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을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꾸는 자세를 말합니다. 한 사람의 근본적인 변화는 언제 일어나는고 하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일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근본적으로 변해 갈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일 때문에, 이 환경 때문이 아니고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을 선택할 것이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바로 성경에서 그 기원을 찾습니다. 자극이 오면 바로 내 욕심대로 반응하는 것을 방종 곧 죄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를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자극이 오고 내 욕망이 꿈틀거려도 하나님이 원하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 곧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갖는 능력입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행동의 최종 결재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놓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며, 믿음입니다. 회개가 아니라, 돌아서는 대신 그들은 핑계와 책임전가를 선택한 것입니다.
환경을 탓하고, 조건을 탓하고, 남을 탓하기 시작하면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돌아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제 그곳에서 돌아서라? 이 마음이 포함된 물음입니다.

한국 월드컵 팀 감독이었던 히딩크 감독이 자신의 리더쉽에 대하여 쓴 글에서 “실수와 실력은 별개라는 말을 했습니다. 곧 실력이 있는 선수도 실수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흙이라는 것을 아는 분입니다. 죄에 대항할 실력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아는 분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선택할 시간과 공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방향을 잃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하는 나침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욕하는 일이 너무도 익숙합니다. 우리는 지금 핑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선택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 선택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조건을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핑계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그 핑계를 대고 자신을 죄가 없는 것처럼 빠지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남겨져 있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초대했으나 모두 정당한 핑계가 있었습니다. 장가가서, 밭을 매야 해서, 장사를 해야 되서, 그러나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거리로 가서 모든 장애가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내 잔치를 채우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눅14:24)
핑계의 시간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제는 핑계를 할 때가 아니라 돌아서 주님에게 순종할 때입니다.

환경과 조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변하는 결단과 노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도 여전히 그들은 환경과 조건을 탓하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핑계를 대다가 망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오늘 본문의 상황과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심판이 다 끝나고 완전한 부활의 아침의 시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보된 상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인생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 스스로 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현주소에 따라 심판이 배달될 것입니다. 핑계는 죄의 결과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바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는 무조건입니다. 구원에 조건은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핑계를 대다가 썩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돌아서 그분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인가? 이제 우리가 있는 자리를 알았습니다. 이 핑계의 자리를 버리고 돌아서 하나님의 때를 살아가는 복된 인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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