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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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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제별 말씀요약 100선

2007.06.17 11:04 | 마태복음 묵상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5542 주소복사

원본 원본 :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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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태복음 5:10-12)

    2007.04.07 11:32 | 마태복음 묵상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4240 주소복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태복음 5:10-12)




    우리는 7가지의 복을 통하여 천국 백성 곧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성화되어 가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심령의 가난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서 내 심령 속에 거룩한 성품이 없음을 아파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내적 성품이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에 의해 훈련된 성품들인 온유함, 긍휼함, 그리고 청결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런 복된 자들이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곧 화평을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이제 마지막 8번째 복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런 7가지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믿는 사람들을 세상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화평을 주는 존재들인 반면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 대한 세상의 태도는 적대와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들의 의(義)와 세상이 갖고 있는 의가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세상의 것과 같다면 배타적이거나 핍박이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9 “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딤후 3:12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올바로 믿는다면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의(義)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곧 인본주의(人本主義)인 것입니다. 내가 신이고 우주의 중심이며, 내가 곧 삶의 목적이 되는 삶입니다. 언제나 세상의 의는 상대적(相對的)이지 절대적(絶對的)이 아닙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 세상의 평가와 기준에 나를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이 곧 의인 것입니다. 좋은 예가 바로 다수결(多數決)의 원칙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다수(多數)에 의해서 착취되고 오염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다수(多數)는 옳거나 현명한적이 거의 없습니다. 역사는 소수(小數)에 의해서 움직여 왔고 그들의 의로 인해서 지탱되어 왔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소수(小數)인 의인 열명이 없어서 된 것이잖아요.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53%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을 갖고 살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고달픈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다수로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복된 소수로 살아 갈 것인가? 그 기준을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독일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게 된 자들은 모두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그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나에게 속했다고 사람들이 너희를 온갖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모욕을 하고 핍박을 할 때 너희들 스스로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풍성한 보답이 되시기 때문이다. 옛 선지자들도 여러분들에 앞서 꼭 그와 같은 박해를 받았다."
    의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며. 핍박은 바로 내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풍성한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란 의를 추적하다, 열심히 뒤를 쫓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곧 그리스도께 끝까지 충성한 자, 끝까지 신실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는 사람하면 늘 엔도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이 책은 1587년이래 일본의 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도꾸가와 장군시대로 이어지면서 자행되었던 카토릭 사제와 신도들의 박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로드리꼬라는 신부인데 그는 박해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뇌와 신앙적 회의에서 갈등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다음과 같습니다.
    카톨릭 신도들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도록 강요 받았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그리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로드리꼬 신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깊이 고뇌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도들이 바닷물 속으로 무참히 가라 앉아가지만,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묵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침묵이 깨어지는 결정적인 장면이 바로 그 후미에 곧 성화 앞에 선 순간입니다.
    신부는 발을 치켜든다. 묵직하고 모진 아픔이 느껴진다. 이건 그저 형식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온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가의 이상과 꿈이 담긴 대상을 밟는 것이다.
    그때 그 동판에 새겨진 그리스도가 로드리꼬 신부에게 말한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네 발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졌다.
    신부는 후미메에 발을 올려 놓았다. 동이 텄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엔도는 만주에서 점령군 일본인으로, 기독교 인구가 1%도 안된 일본에서 기독교인으로, 또한 유럽에서 동양인으로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승리의 종교, 화려한 유럽의 대성당들 속에서 예수를 찾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핍박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것을 꿈꾸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은 세상적인 영광과 권력의 자리가 아닌 핍박의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의 결과가 바로 ‘침묵’ ‘ 예수의 생애’와 같은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예수 믿는 자가 받는 복은 세상이 인정하고, 주려는 복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받는 복이란 하나님이 전혀 인정하지도 계시지도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을 거쳐서 맛보게 되는 믿음의 투사들이 경험하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이 있다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형통함, 건강함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이란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표시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나의 당하는 어려움이나 핍박이 나의 성격이나 성품 혹은 잘못된 열심 때문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약속한 핍박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
    원문에 의하면 핍박을 받는 자란 ‘괴롭힘을 당하여 오늘에 이른 자’란 뜻이 있습니다. 곧 모든 핍박 중에서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인내함입니다. 인내는 그냥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꾸준함입니다. 신실함입니다. 우리가 아직 미숙하고 모자라고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더라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핍박의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이러한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으로 만들어 놓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완성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성한다고 즉각적인 상급을 주시거나 우리의 편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깜깜한 어둠과도 같은 어려움 속에 있거나 어느 누구도 나의 편이 아닌 것 같은 짙은 외로움 속에서도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분,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 하시는 분. 그래서 우리의 충성심은 약해지고 믿음도 연약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성하는 것은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심도 아니고 나를 인정해 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외에는 정당하고 올바른 이유에서 충성할 존재가 없어서 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약 40년간을 하나님과 사귀어보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도 그분에게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정당하고 올바르고 충성할만한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바로 이런 충성 된 사람들의 핍박과 순교의 피를 먹고 성숙해 왔습니다. 이 복된 핍박이 작금에 와서는 구제나 봉사로 탈바꿈해 버렸습니다. 곧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는 일이 교회의 일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곧 의가 무엇이며 핍박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스웨덴의 소설가 라게르크비스트(Par Fabian Lagerkvist)가 쓴 소설 중에 195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라바(Barabbas)"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바라바"란 소설은 제목 그대로 성경에 나오는 바라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바라바는 예수님 덕분에 살게 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라고 나와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바라바는 예수님께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을 멀리서 봅니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저 친구가 아니었으면 내가 저기서 저렇게 십자가에 죽을 뻔했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이 예수에 대한 생각이 문득문득 날 때마다 마음이 이상해지며, 괜히 예수란 친구에게 빚진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바라바가 오랜 후에 로마로 갔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가 그래도 잘 살아보겠다고 로마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에서도 예수에 대한 소문이 있는 겁니다. 예수에 대한 생각이 로마로 가면 없어지리라 여겼는데, 로마에서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빚진 마음이 또 그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로마에 큰불이 났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바라바는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빚을 갚을 때가 되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바라바는 아직도 불이 타고 있는 로마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불이 붙지 않은 곳에다가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열심히 불을 지릅니다. 그것이 예수에 대한 빚을 갚는 것으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후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이 소식을 듣고 바라바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바라바의 행동은 예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깨우쳐 준다는 것으로 소설을 끝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칙과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감에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핍박이란 세상과 하나님이 다름을 증거하며 살아갈 때 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를 증거하고 교회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성경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됨의 증거는 성공, 건강함, 명예, 종교적인 열심이 있음도 아닙니다. 바로 심령의 가난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핍박 받는 자리까지 기꺼이 내려가는 것이 참 복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8복의 마지막이 의에 대한 핍박받음이라 말씀하신 것은 우연한 나열이나 설명이 아닙니다. 바로 이자리 핍박의 자리가 8복의 완성이며 신자의 삶의 완성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첫번째와 마지막 복의 내용이 똑같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은 심령의 가난함이 전제되지 않는 복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복의 완성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곧 의를 위하여, 이 절대적인 진리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박해 받는 곳을 찾아 나서라는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어지럽히거나 흐리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 다름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삶의 모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미국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레스커상의 수상자이자, 영국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서구인으로는 유일하게 마하트마 간디제단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선발된 사람. 우리에게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선물’이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진 Paul Brand 박사. 그는 한센병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그들과 함께 일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한센병은 문등병으로 알려진 병으로 일단 감염이 되면 고통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서 결국 불구가 되는 병입니다. 브랜드 박사는 자신의 뛰어난 의학적인 기술과 명성을 치료될 것 같지 않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하여 주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손해보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적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인 인정하듯이 고통은 신체에 닥쳐온 위협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통이 없다면 심장발작이나 뇌졸증 따위의 질병들이 아무 예고 없이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의사를 찾아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한센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그보다 더 훌륭한 선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해준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브랜드 박사는 자신의 신앙의 두 기둥을 감사와 믿음이라고 고백합니다.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는 감사를 했고, 그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칭찬과 인기대신 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의 복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핍박이라는 것을 거창하게 무슨 순교자가 되고, 고난을 자초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하루 내가 하고싶은 일을 손해 보는 것, 헌신하고 봉사하다가 싫은 소리를 들어도 씩 웃을 수 있는 것,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것. 울컥 치미는 순간에
    한 호흡 더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8복을 배웠습니다. 이 8복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복음의 핵심이요, 삶의 원칙과 목적입니다. 천국이란 이처럼 영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이땅에서 맛보고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8복은 내가 곧 죄인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 세상으로 확장되어 갈 때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믿음의 완성인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회개와 구원 받음을 확인하는 믿음에 머물러 있겠는가? 이는 마치 좋은 학교에 합격했음의 감격만을 되씹는 것과 같습니다. 합격했음은 반드시 그 학교 학생다운 노력과 삶을 사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심령의 가난의 복이 의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유치원 졸업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8복의 삶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여지고 나타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다루는 8번째 복이 있기는 하지만 7번째 복인 화평함을 전제로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뿌리가 있듯이 이 팔복 역시도 곧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이 모든 관계를 형성하고 지탱해 가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첫 번째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그 나머지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복, 사람들과의 관계 속의 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적대와 증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온유함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훈련된 삶입니다. 관대한 판단과 동정을 묘사하는 긍휼. 이런 복이 오늘의 복인 화평함으로 완성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음해나 피해 받음을 긍휼과 사랑으로 갚아야 함은 물론 적극적으로 인류와 세상 속의 모든 다툼 속에서 아니 나와 관계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세상의 이해나 상식을 초월하는 기준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화평함입니다.
    평화를 위한 공식

    “사람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살려고 애쓰는 것을 그만두면 잘 살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잘 살려고 기를 쓰면 잘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 모두 더 잘 살게 될 것이다. 누구도 부자가 되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려고 하면 누구도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우리가 되려고 노력하면, 모든 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기록에 사용된 히브리어로 평화를 '샬롬(shâlôm)'이라 하고, 신약성경의 언어인 그리스어로는 평화가 '에이레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평화, 화평, 평안, 평강으로 번역된 용어들은 모두 같은 단어인 히브리어 샬롬 혹은 그리스어 에이레네를 다르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 있는 평화, 화평, 평안, 평강이란 단어는 본질적으로 다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은 현상적인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편안하고 아무 염려가 없는 상태로 이해를 합니다.
    내가 웃을 수 없으면 다른 사람도 웃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화평함이란 분쟁이나 환경의 무마가 아니라 나의 영혼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말입니다. 먼저 평화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또한 이 화평함은 타협이나 적당한 무마로 말썽을 덮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서는 유태인을 향한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왕이 예수라는 것을 전하고 있으면서 그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꾸짖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성전 안과 밖이 다르고,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을 닮아 가지 않는 신앙인들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peace- lover가 아니라 peace – maker들입니다. 그리스어로 에이레내 포이오스 곧 평화-에이레네, 만들다- 포이세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가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평화라는 말을 라틴말로 팍스라고 합니다. 로마의 평화를 '팍스 로마나'라고 외칩니다. 팍스로마나는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점령당한 주변국들은 종으로 삼고 팔레스틴도 종으로 삼고 저항도 없어야 되고 불평도 없어야 되고 일사분란하게 평화의 질서 속에 로마제국주의의 질서 속에 평안한 것이 로마의 평화입니다. 로마의 강력한 힘으로 정복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평화라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평화는 결국 싸움과 불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복으로서의 화평이란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이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모든 불화와 싸움의 원인은 우월감에서 출발합니다. 곧 교만함입니다. 내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낫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할 때 그곳에는 반드시 싸움과 불화가 있어왔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 감사하나이다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자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8:9)

    화평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이처럼 잘못된 우월감이나 교만함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이 이런 우월감으로 드러날 때 화평은 깨어지고 맙니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보아도 너무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이 지배 했던 나라 인도. 그 나라는 지금도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유일하게 개신교가 국교인 나라 네델란드가 지배 했던 인도네시아 역시도 국민의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국 네델란드 그리고 유럽과 북미 소위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던 나라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예수를 데리고 선교자에 가서 소개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없었던 나라에 자신들이 예수를 데리고 갔다는 우월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 선교지에 계셨다는 사실을 망각했기에 그들은 그렇게 오만 방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알고 믿었다는 것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인격과 성품이 선행되지 않을 때 우리들의 전도나 선교는 무의미한 숫자 싸움이 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우리 모두는 한치도 다를 바가 없는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이는 우리는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그저 고요함이나 시끄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좋다라는 말과 화평케 한다는 말은 다른 것입니다.
    평화를 가리키는 샬롬이라는 히브리말의 뜻은 완전함(completeness),전체성,통전성(wholeness), 건강함(healthiness)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란 건강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기 중심, 자신의 이익을 초월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화평케 하는 사람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 곧 청결한 마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평화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믿음의 동기, 예배를 드리는 동기, 기도 하는 동기가 순수하지 않으면 평화는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에 6가지 복이 전제 되지 않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절에 있는 화장실을 매일 청소하는 한 선사가 있었다. 그는 당대에 제일가는 선사였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다른 사람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수십 년을 한결같이 남몰래 화장실을 청소했다. 사실 그 절 안에는 화장실 청소를 맡아 하는 스님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스님이 불쾌한 마음으로 청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먼저 깨끗하게 청소를 해두었던 것이다. 이 일은 선사가 입멸한 후에야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보통 나쁜 일은 쉬쉬하며 숨기려 하고, 좋은 일을 하면 스스로 자랑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열심히 도우면 도울수록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남모르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진정한 선이야말로 도달하기 어려운 최고의 경지라 하는 것이다.
    선사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열심히 화장실 청소를 한 것은, 자신의 이익이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묵묵히 일하는 정신을 일컬어 ‘여우여로如愚如魯’라고 한다. 설령 행동이 바보같이 보인다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실천이라는 말이다.
    ‘여우여로如愚如魯
    이 말은 당나라 때 동산 선사의 「보경삼매」 맨 마지막에 나오는데, 그것은 어떤 일을 할 때 이름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조용히 행할 뿐임을 가리킨다. 부귀영화를 얻고자 혹은 남의 칭송을 듣고자 구도의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닌데, 소란을 피워 남의 시선을 끌 이유가 어디 있는가? 바보인 듯 미련한 듯 묵묵히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고 따라간다고 하면서 왜 불화가 있는가? 바로 내 자존심,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려는 곳에는 언제나 불화가 있고 불평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화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
    사도 바울은 이 화해라는 말을 카탈라게이시아라는 말로 썼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과 세계와 화해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카탈라게는 화해했다는 말인데 완전히 하나님이 위치를 바꿨다는 뜻입니다. 위상을 바꿨습니다. 가장 높은 하나님이 가장 낮은 범죄자가 됐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육에 몸을 입고 땅에 사람이 됐습니다. 죽는 사람이 됐습니다. 위상이 완전히 뒤바꼈습니다. 가치도 바꿨습니다. 하늘이 땅이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용서 받은 우리 죄인들이 사죄함 받고 하나님 우편으로 상달이 됩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면 위치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게 카탈라게요 그게 화해의 역사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로 카탈라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나 자신과 자리를 바꾸었듯이 부모와 자식간에 카탈라게 하십시오. 위치를 완전히 바꿔보십시오.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 보십시오. 서로의 위상을 한번 바꿔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들을 받아서 우리심정이 됐더니 하나님이 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을 바꿔놓았습니다. 화해는 평화는 위치 바꿈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화해와 평화는 십자가처럼 사랑의 극치의 표현을 통해서만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찬송가 465장의 작사자 Cornell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땅 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다고 노래합니다. 왜 서로 자신의 자리와 위치가 최고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위치가 바뀌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상대방의 위치와 기꺼이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comfort zone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평을 만들어가는 삶입니다. 성경은 평화를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곧 위치를 바꾸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의 통로가 되는 삶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불러 주는 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되는 것입니다. 기꺼이 내 자리를 내어주고 상대방의 자리에 내려가는 사람은 곧 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이 ‘하’씨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내리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가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편 91:14-15절)
    하나님이 자녀로 불러주는 사람에게 내리는 복입니다. 세상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워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인정되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인정 받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성경이 가르치려는 화평함은 그저 심적인 평화나 마음의 위로함의 차원이 아닙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는 삶인가? 아닌가?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동기요 목적이어야 합니다. 나를 숨기고 우월감이나 교만함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라도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 지고 세상과 이웃과 화해와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복된 삶이라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 위치를 바꾸는 삶입니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사장과 직원, 위치를 바꾸는 삶이 곧 화평을 이루는 삶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는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평화란 존재치 않습니다. 누군가 간섭하셔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되지 않지만 주님이 해주시는 길이 우리에게 열렸기에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성 프랜시스가 우리한테 좋은 기도를 전해 주었습니다. “평화의 기도.” 우리가 찬송으로도 부르고 기도로도 드립니다. 그런데 이 분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하나 준 것 같습니다. 생활에서 나온, 작지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지혜입니다. 하루는 자기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데,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물통에 나무 막대기 하나를 집어넣습니다. 그걸 왜 넣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 하인 하는 말이, “물통을 끌어올리면, 물이 꽉 찼든 덜 찼든, 줄에 매달린 물통은 반드시 흔들리게 되고, 그러면 물통의 물이 많이 흘러 버립니다. 그런데 막대기 하나를 넣어두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깨친 바 있어서 성 프란시스가 자기 명상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의 물통! 어떤 물통은 두려움 때문에 흔들리고, 어떤 물통은 고통 때문에 흔들리고, 어떤 물통은 죄책감에 흔들리고, 어떤 물통은 가난하여 흔들리고, 절망 때문에 부수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물통 속에 나무 하나 담아야 됩니다. 그 나무 이름이 뭡니까? 이름하여 십자가라는 나무! 그 나무를 담그면 물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의 것들로 잠시 편안함을 누리고 살아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로마가 힘으로 평화를 만들려고 했듯이 내가 가진 물질로, 지식과 재능으로, 일시적인 편안함을 만들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 삶은 마치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처럼 고난, 좌절, 절망, 욕망과 욕심으로 흔들립니다. 우리의 삶에 나를 뽑아내고 십자가가 가운데 박히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화평한 삶입니다. 이 화평을 누리는 자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삶이 복 있는 삶입니다. 위치를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기꺼이 나의 자리를 바꾸어 주는 삶입니다. 복을 받는 사람에 머물지 마시고 복의 전달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진정 복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

    2007.03.11 11:01 | 마태복음 묵상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1506 주소복사

    우리는 7가지의 복을 통하여 천국 백성 곧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성화되어 가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심령의 가난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서 내 심령 속에 거룩한 성품이 없음을 아파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내적 성품이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에 의해 훈련된 성품들인 온유함, 긍휼함, 그리고 청결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런 복된 자들이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곧 화평을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이제 마지막 8번째 복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런 7가지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믿는 사람들을 세상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화평을 주는 존재들인 반면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 대한 세상의 태도는 적대와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들의 의(義)와 세상이 갖고 있는 의가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세상의 것과 같다면 배타적이거나 핍박이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9 “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딤후 3:12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올바로 믿는다면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의(義)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곧 인본주의(人本主義)인 것입니다. 내가 신이고 우주의 중심이며, 내가 곧 삶의 목적이 되는 삶입니다. 언제나 세상의 의는 상대적(相對的)이지 절대적(絶對的)이 아닙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 세상의 평가와 기준에 나를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이 곧 의인 것입니다. 좋은 예가 바로 다수결(多數決)의 원칙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다수(多數)에 의해서 착취되고 오염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다수(多數)는 옳거나 현명한적이 거의 없습니다. 역사는 소수(小數)에 의해서 움직여 왔고 그들의 의로 인해서 지탱되어 왔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소수(小數)인 의인 열명이 없어서 된 것이잖아요.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53%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을 갖고 살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고달픈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다수로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복된 소수로 살아 갈 것인가? 그 기준을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독일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게 된 자들은 모두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그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나에게 속했다고 사람들이 너희를 온갖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모욕을 하고 핍박을 할 때 너희들 스스로 기뻐하여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풍성한 보답이 되시기 때문이다. 옛 선지자들도 여러분들에 앞서 꼭 그와 같은 박해를 받았다."
    의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며. 핍박은 바로 내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풍성한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란 의를 추적하다, 열심히 뒤를 쫓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곧 그리스도께 끝까지 충성한 자, 끝까지 신실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는 사람하면 늘 엔도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이 책은 1587년이래 일본의 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도꾸가와 장군시대로 이어지면서 자행되었던 카토릭 사제와 신도들의 박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로드리꼬라는 신부인데 그는 박해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뇌와 신앙적 회의에서 갈등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다음과 같습니다.
    카톨릭 신도들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도록 강요 받았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그리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로드리꼬 신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깊이 고뇌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도들이 바닷물 속으로 무참히 가라 앉아가지만,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묵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침묵이 깨어지는 결정적인 장면이 바로 그 후미에 곧 성화 앞에 선 순간입니다.
    신부는 발을 치켜든다. 묵직하고 모진 아픔이 느껴진다. 이건 그저 형식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온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가의 이상과 꿈이 담긴 대상을 밟는 것이다.
    그때 그 동판에 새겨진 그리스도가 로드리꼬 신부에게 말한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네 발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졌다.
    신부는 후미메에 발을 올려 놓았다. 동이 텄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엔도는 만주에서 점령군 일본인으로, 기독교 인구가 1%도 안된 일본에서 기독교인으로, 또한 유럽에서 동양인으로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승리의 종교, 화려한 유럽의 대성당들 속에서 예수를 찾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핍박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것을 꿈꾸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은 세상적인 영광과 권력의 자리가 아닌 핍박의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의 결과가 바로 ‘침묵’ ‘ 예수의 생애’와 같은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예수 믿는 자가 받는 복은 세상이 인정하고, 주려는 복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받는 복이란 하나님이 전혀 인정하지도 계시지도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을 거쳐서 맛보게 되는 믿음의 투사들이 경험하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이 있다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형통함, 건강함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이란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표시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나의 당하는 어려움이나 핍박이 나의 성격이나 성품 혹은 잘못된 열심 때문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약속한 핍박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
    원문에 의하면 핍박을 받는 자란 ‘괴롭힘을 당하여 오늘에 이른 자’란 뜻이 있습니다. 곧 모든 핍박 중에서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인내함입니다. 인내는 그냥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꾸준함입니다. 신실함입니다. 우리가 아직 미숙하고 모자라고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더라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핍박의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이러한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으로 만들어 놓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완성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성한다고 즉각적인 상급을 주시거나 우리의 편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깜깜한 어둠과도 같은 어려움 속에 있거나 어느 누구도 나의 편이 아닌 것 같은 짙은 외로움 속에서도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분,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 하시는 분. 그래서 우리의 충성심은 약해지고 믿음도 연약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성하는 것은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심도 아니고 나를 인정해 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외에는 정당하고 올바른 이유에서 충성할 존재가 없어서 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약 40년간을 하나님과 사귀어보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도 그분에게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정당하고 올바르고 충성할만한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바로 이런 충성 된 사람들의 핍박과 순교의 피를 먹고 성숙해 왔습니다. 이 복된 핍박이 작금에 와서는 구제나 봉사로 탈바꿈해 버렸습니다. 곧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는 일이 교회의 일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곧 의가 무엇이며 핍박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스웨덴의 소설가 라게르크비스트(Par Fabian Lagerkvist)가 쓴 소설 중에 195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라바(Barabbas)"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바라바"란 소설은 제목 그대로 성경에 나오는 바라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바라바는 예수님 덕분에 살게 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라고 나와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바라바는 예수님께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을 멀리서 봅니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저 친구가 아니었으면 내가 저기서 저렇게 십자가에 죽을 뻔했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이 예수에 대한 생각이 문득문득 날 때마다 마음이 이상해지며, 괜히 예수란 친구에게 빚진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바라바가 오랜 후에 로마로 갔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가 그래도 잘 살아보겠다고 로마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에서도 예수에 대한 소문이 있는 겁니다. 예수에 대한 생각이 로마로 가면 없어지리라 여겼는데, 로마에서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빚진 마음이 또 그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로마에 큰불이 났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바라바는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빚을 갚을 때가 되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바라바는 아직도 불이 타고 있는 로마 시내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불이 붙지 않은 곳에다가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열심히 불을 지릅니다. 그것이 예수에 대한 빚을 갚는 것으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후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이 소식을 듣고 바라바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바라바의 행동은 예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깨우쳐 준다는 것으로 소설을 끝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칙과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감에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핍박이란 세상과 하나님이 다름을 증거하며 살아갈 때 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를 증거하고 교회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성경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됨의 증거는 성공, 건강함, 명예, 종교적인 열심이 있음도 아닙니다. 바로 심령의 가난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핍박 받는 자리까지 기꺼이 내려가는 것이 참 복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8복의 마지막이 의에 대한 핍박받음이라 말씀하신 것은 우연한 나열이나 설명이 아닙니다. 바로 이자리 핍박의 자리가 8복의 완성이며 신자의 삶의 완성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첫번째와 마지막 복의 내용이 똑같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은 심령의 가난함이 전제되지 않는 복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복의 완성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곧 의를 위하여, 이 절대적인 진리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박해 받는 곳을 찾아 나서라는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어지럽히거나 흐리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 다름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삶의 모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미국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레스커상의 수상자이자, 영국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서구인으로는 유일하게 마하트마 간디제단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선발된 사람. 우리에게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선물’이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진 Paul Brand 박사. 그는 한센병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그들과 함께 일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한센병은 문등병으로 알려진 병으로 일단 감염이 되면 고통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서 결국 불구가 되는 병입니다. 브랜드 박사는 자신의 뛰어난 의학적인 기술과 명성을 치료될 것 같지 않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하여 주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손해보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적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인 인정하듯이 고통은 신체에 닥쳐온 위협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통이 없다면 심장발작이나 뇌졸증 따위의 질병들이 아무 예고 없이 닥쳐오게 될 것입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의사를 찾아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한센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그보다 더 훌륭한 선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해준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브랜드 박사는 자신의 신앙의 두 기둥을 감사와 믿음이라고 고백합니다. 눈으로 보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는 감사를 했고, 그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칭찬과 인기대신 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의 복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핍박이라는 것을 거창하게 무슨 순교자가 되고, 고난을 자초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하루 내가 하고싶은 일을 손해 보는 것, 헌신하고 봉사하다가 싫은 소리를 들어도 씩 웃을 수 있는 것,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것. 울컥 치미는 순간에
    한 호흡 더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8복을 배웠습니다. 이 8복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복음의 핵심이요, 삶의 원칙과 목적입니다. 천국이란 이처럼 영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이땅에서 맛보고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8복은 내가 곧 죄인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 세상으로 확장되어 갈 때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믿음의 완성인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회개와 구원 받음을 확인하는 믿음에 머물러 있겠는가? 이는 마치 좋은 학교에 합격했음의 감격만을 되씹는 것과 같습니다. 합격했음은 반드시 그 학교 학생다운 노력과 삶을 사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심령의 가난의 복이 의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유치원 졸업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8복의 삶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여지고 나타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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