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전체 글보기(5017)
아침의 기도
처음 방문하신 분에게 드리는 선물
가정,결혼,자녀교육
간증
값 없이 사라
건강하게 사는 세상
각종 검사 이해하기
공짜 정보 안내
과학 세계
창조 과학
기본폴더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대 요리 문답
로마서 연구
마태복음 묵상
말씀/ 찬양/ 기도
물 좀 알고 마시자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
미용/아름다워지기/패션
보람되고 값진 것
산,강 그리고 바다/폭포
삶의 지혜
생명의 빛
선교/전도/증인
성경/주석과 번역판들
성경속의 건강
세계의 종교 제대로 알자
스마일(웃음)
시사/소식/정세
신앙 자료,신학,성경공부
심리/성격
알고 싶은 세상
암과 그 대책
약에 관한 모든 것
어떻게 살아갈까
여행 떠나세요
역사 의 진실
영상과 영화 음악 모음
예병일의 경제노트
옛시조 모음
오페라 여행
우리가곡 감상
운동 이렇게 해 보세요
음식/먹거리/요리/맛
인체의 신비
일본어 배우기
좋은 생각,글,그림
중국/여행정보/선교
찬송가/CCM
창세기 강해
책 소개(가장 유익한)
철학 /사색의 광장
취미,관심거리,볼거리
컴 자료/태그/블로그
클래식 산책
한방/동양의학
호기심이 선악과 ?
흘러간 노래 (가요/팝송)
설문
백만가지 주제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개설일 : 2006/11/20
 

사영리-에니메이션
http://www.jesusinside.pe.kr/law4.htm
을 클릭 하십시요

<서서생활 수정2 >




[복음]예수그리스도 구원의 은혜





기독교 기본교리


2007/05/03 13:08



http://blog.naver.com/jjkkhh2232/50017014757














어느 복음적인 글을 퍼와서 재수정하여 올립니다.


 


오늘의 이 글은 너무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원으로 인하여 많은 이단사상들과 사이비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글은 일반 정통교회의 구원사상과 구원파의 구원사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떻게 복음적으로 완성되는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 구원의 은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 설교는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고 동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거쳐야 할 단계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죄인의 회개와 성도의 회개의 차이, 영혼의 구원과 생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하여 잘 설명해 줍니다.




--------------------------------------------------------------------------------




1. 신앙 생활의 단계








신앙 생활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동행하기 위해서는 몇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되기 때문입니다.






편의상 번호로 구분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므로 그것을


①번 단계로 정할 수 있습니다.(①번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발견함.)


 


 


 즉, 하나님과 상관 없이 죄를 짓고 살던 사람이 ꡐ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구나!ꡑ 하는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신앙 생활의 첫 단계라는 것입니다.


병자가 병을 깨닫지 못하면 의사와 아무 상관이 없듯이, 죄인이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발견함.




② 죄를 깨닫고 긍휼을 바라며 회개함.




③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④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함.




⑤ 의인이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돌이킴.


그 다음 ②번 단계는,




ꡒ하나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ꡓ



하고 회개하는 단계입니다. (②번 죄를 깨닫고 긍휼을 바라며 회개함.)


 


즉,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통회하며 자복하는 단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계만으로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오산(誤算)입니다.


 만일 이 단계에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③번 단계가 필요합니다.




③번 단계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지를 깨달아, 자신의 모든 죄를 흰눈같이


깨끗하게 씻는 단계입니다.   (③번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즉, 죄인에서 의인으로, 심판에서 영생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지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ꡐ죄 사함ꡑ과 ꡐ구원ꡑ과 ꡐ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죄인(일반 불신영혼)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①번 단계에서 시작하여 ②번 단계를 거쳐 ③번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됩니다.


 만일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진다면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몰라 행위의 법에 매인 세리나 창기와 똑같은 죄인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함으로 회개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죄인으로 있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①번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대제사장에게 은 30냥을 돌려 주었지만,


스스로 정죄하고 자살했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그 죄를 씻지는


 않았습니다.


그역시 복음과 주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여  ①번 단계까지밖에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




사도행전 18장에 등장하는 아볼로는 회개의 단계까지만 알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기 때문에 성경에 능한 자였지만,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당에서 설교하던 그를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③번 단계로 인도했습니다. (③번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그때부터 아볼로는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는데, ③번 단계에 이르게 되면 누구라도 하나님과


귀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즉, ③번 단계는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입는 믿음의 시작 단계입니다.









2. 거듭난 후에 죄를 범하면








그러나 ③번 단계에(③번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 이르러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음받은 의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때부터 죄를 짓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만 육신이 변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ꡒ구원을 받아 죄가 없는 의인이 되었다.ꡓ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미이지,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③번 단계에 이르러 의인이 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범죄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빛 가운데서 살아야만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복음을 깨달아 의인으로 거듭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지었으니까 다시 죄인으로 되돌아 갑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③번 단계에 있던 의인이 죄를 지어 어두움 가운데 거하면 그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것이지,


①번 단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그때가 바로 ④번 단계입니다.


(④번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함.)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과는 절대로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아 의인이 된 사람이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죄를짓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정상적인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다면, 당연히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의인이 다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이 바로 의인이 자신을 어두움으로 이끈 죄를 자백하는 과정으로 ⑤번 단계라는 것입니다. 즉,


⑤번 단계 역시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돌이키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⑤번 의인이 죄를 자백하고 뉘우쳐 돌이킴.)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행하는 ②번 단계의 회개와 의인이 행하는 ⑤번 단계의 회개를


잘 분별하지 못해 혼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죄인의 상태인 ①번 단계와 의인이 어두움에 빠진 ④번 단계 사이에도 명백한 차이가 있지만,


이것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므로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3. 죄인의 회개와 성도의 회개






먼저 ①번 단계와 ④번 단계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①번 단계는 본래 죄인의


상태이므로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 계시지만, ④번 단계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의인이 죄에 빠진


것이므로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로 계십니다.




재판관과 죄인의 관계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전혀 다릅니다.


재판관은 범한 죄에 상당한 형벌을 죄인에게 내리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에 대해 징계만 내릴


뿐입니다.


재판관은 벌을 주기 위해 심판하는 것이고, 아버지는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인이 죄를 지으면 재판관은 법대로 가차없이 벌을 내리지만, 아들이 죄를 지으면


아버지는 아들과의 사귐을 회복하기 위해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①번 단계의 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입장에서 대하시므로 지옥에 보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태에서 죄에 빠진 ④번 단계의 사람은, 하나님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대하시므로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즉, ①번 단계의 사람은 근본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④번 단계의 사람은 잠시 하나님과


멀어진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①번 단계의 죄인이 죄를 뉘우치는 목적과 ④번 단계의 의인이 죄를 뉘우치는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①번 단계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고, ④번 단계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①번 단계의 죄인을 ③번 단계인 의인의 상태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4. 하나님과의 사귐







요한 1서를 통해 이 부분을 좀더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ꡒ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ꡓ(요일 1:2)




여기서 ꡐ영원한 생명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전했는데, 그들이 한 일은 ①번 단계의 죄인을 ③번 단계의


 의인으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에 대해서 요한 1서는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ꡒ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ꡓ(요일 1:3)




즉,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임을 증거했는데, 원수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푸른 초장을 거니는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①번 단계에서 ③번 단계로 옮겨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귐의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ꡒ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ꡓ(요일 1:5)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ꡐ거룩ꡑ이란 단어는


어두움과 구별된다는 의미이므로, 하나님은 당신과 같이 거룩한 사람과만 함께하시며 사귐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ꡒ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ꡓ(레 11:45)




그런데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는


길뿐입니다.




ꡒ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ꡓ


(히 10:10)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문제는 하나님은 어두움에 빠질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지만, 인간은 거룩함을 얻어 거룩한 자가 되었어도 연약한 육신 때문에 다시 어두움에 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위로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해진 사람이 어두움에 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실 수 없고, 그는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 처합니다.


 


 이것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하나님과 등져 있는 상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거룩함을 입은 의인은 어두움에 빠져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졌을지라도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시 사귐이 회복되지만,


①번 단계인 죄인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②번 단계를 거쳐 ③번 단계인 복음을 받아들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5. 영혼의 구원과 생활 속에서의 구원








그런데 요한 1서 1장은 ①번 단계에 있는 죄인이 ③번 단계까지 와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것이


아닌, ④번 단계에 있는 의인이 ⑤번 단계로 옮겨와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하는 부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②번 단계에서의 회개와 ⑤번 단계의 회개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차원이 서로


다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ꡒ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ꡓ


(마 1:21)



여기에 등장하는 ꡐ구원ꡑ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죄에서 건짐을 받아 ③번 단계의 의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ꡒ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ꡓ(빌 2:12)



여기서의 ꡐ구원ꡑ은 ③번 단계의 의인이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 곧 성화(聖化)된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태 복음 1장에 등장하는 ꡐ구원ꡑ은 죄에서 건짐을 받는것을 의미하며,


빌립보서 2장에 등장하는 ꡐ구원ꡑ은 죄악된 생활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생활의 구원은 다릅니다.


 


영혼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되어지고,


생활의 구원은 죄에 대한 자백으로 되어집니다.


 이처럼 ②번 단계의 회개와 ⑤번 단계의 회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ꡒ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ꡓ(막 1:15)



갈릴리에서 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이 ꡐ회개ꡑ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해야


 되는 ②번 단계의 회개를 말합니다.




ꡒ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ꡓ(계 2:5)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진 편지에 나오는 이 ꡐ회개ꡑ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기


위해서 행해야 되는 ⑤번 단계의 회개입니다.


 


이 ⑤번 단계의 회개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설명한 말씀이 바로 요한 1서 1장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ꡒ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ꡐ죄 없다.ꡑ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ꡐ범죄하지 아니하였다.


ꡑ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ꡓ


(요일 1:7~10)










6. 다윗의 자백







하나님과의 사귐과 죄에 대한 자백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 하 11장에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던 다윗이 간음이라는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은 그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는 죄까지 범합니다.


그러나 그는 ①번 단계의 죄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모셨기 때문에 ③번 단계에서 ④번 단계로 추락한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ꡐ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이 어떻게 그런 무서운 죄를 범할 수 있는가?ꡑ


하고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시편 51편의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이러한 자들도 어느순간에 사단의(육신의) 이끌림을 받아 가장 더럽고 악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앞에 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항상 주님을 의지한 자였습니다.


ꡒ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ꡓ(시 51:10~12)




그는 자기 속에 있던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말기를 하나님께 구했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주의 성신을 이미 모신 자였고, 구원의 즐거움을 이미 맛보았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②번 단계의 회개가 아닌, ⑤번 단계의 회개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십시오.




ꡒ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ꡓ(시 51:5)




그는 자신이 근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입고 있음을 고백했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즉, 그는 ⑤번 단계의 회개를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다시 사귐을 가질 수


 있었는데, 회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어두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을 때는 어두움에 거하는 때이고,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입니다.




그는 얼마 후 밧세바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알려 오자, 또 다른 어두움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우리아를 불러 들여, 집으로 보내 그 아내 밧세바와 동침케 함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궤계를 꾸민 것 자체가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를?받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실한 군사였던 우리아가 자기 혼자서는 집에서 쉴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기에 다윗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더욱 무서운 궤계를 꾸며, 마침내 우리아가 적의 손에 죽게 했습니다.


그때 다른 군사들도 함께 죽었는데,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는 일을 성공한 것에 대해 만족해 하며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어두움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냥 내어버려 두셨다면 그는 더욱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죄를 적발해 내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을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윗과의 사귐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예리한 책망을 받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크게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다시 가질 수 있었습니다.










7. 자백을 통한 교제의 회복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이었으면서도 간음을 행했던 다윗처럼, 성령을 마음에 영접하여 거룩하게 된 사람일지라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데, 어쨌든 죄를 범하면 어두움에 거하게


되므로 하나님과는 사귐이 끊어집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죄를 죄로 여기며 자백하는 ⑤번 단계입니다.




ꡒ만일 우리가 ꡐ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ꡑ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ꡓ(요일 1:6)



즉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이, 만일 ꡐ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ꡑ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임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ꡒ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요ꡓ(요일 1:7)



다윗이 빛 가운데 행할 때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었는데, 어두움에 거함으로 그 사귐이 끊어졌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다시 사귐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애쓸 때 그는 계속 어두움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죄를 들추어 내고 책망하자 마침내 다윗이 죄를 자백했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ꡒ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니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ꡓ(엡 5:13)



범죄한 사람은 책망을 받고 그 죄가 빛으로 나타나야만, 회개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과 사귐을 다시


가질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고, 죄를 범한 의인이라도 책망을 받아 죄가 드러남으로 회개하는 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회개한 의인을 그 모든 악한 행실에서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①번 단계의 죄인을 ③번 단계의 의인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③번 단계의


 의인을 거룩한 삶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는 구원을 받고, 그 고기로는 양식을 삼아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힘을 얻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은 의인으로, 의인은 성화된 삶으로 이끄는


능력이시라는 것입니다.









8. 목욕한 자의 발씻음







어쨌든 신앙 생활은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①번 죄인의 단계, ②번 회개의 단계, ③번 복음을 깨달아


 의인이 되는 단계, ④번 의인이 죄를 범한 단계, ⑤번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는 단계


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순서를 거치지 않고 ①번 죄인의 단계에서 바로 ⑤번 회개의


단계로 넘어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놓은 후 바로 지붕을 얹으려는 태도로, 신앙의 단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오류라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요한 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목욕한 자가 발 씻는


비유를 들어 이 오류를 변호하는데, 그것은 더욱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3장에서, 자신의 발을 씻기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ꡒ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ꡓ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ꡐ이미 목욕한 자ꡑ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사함받고 거룩해진 의인을 말하는 것으로, 의인은 죄를 짓더라도 발만 더러워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귐만 끊어질 뿐이지, 다시 온 몸이 더러운 죄인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범한 의인은, 발을 씻듯 사귐을 갖기 위한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발을 씻는 것과 같은 회개는 이미 목욕한 자, 곧 의인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③번 단계의 의인이 아닌, 목욕을 하지 않아 온 몸이 더러운 ①번 단계의


죄인이면서도 발을 씻는 ⑤번 단계의 회개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①번 단계의


죄인은 ⑤번 단계의 회개를 아무리 해도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②번 단계의 회개를


거쳐 ③번 단계에 이른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9.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요일1:8-9)


여기서 ꡐ우리가ꡑ라는 단어의 뜻은  그때당시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 곧 ③번 단계에 이른 의인들을 두고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역시 만일 ④번 단계에 있는 죄사함받고 구원받은 의인이 자신의 입으로 ꡒ죄 없다.ꡓ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4번단계의 의인이었습니다. (④번 거듭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어두움에 거함.)


그러나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를 죽이는 삶속에서의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그가 죄없다라고 하면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상관이없는 사람이 되고 말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요한일서 에서 ꡒ죄 없다.ꡓ는 말은 ....잘못된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 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상태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래 복음에서 선포하는 죄없다라는 이말씀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③번 단계의 의인이 되어 ꡒ이제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의인이 되었다. 나는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죄가 없다.ꡓ라고 복음적인 십자가의 구원 차원으로서의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8절의  죄없다라는 이말씀은 ①번 단계의 죄인이 ③번 단계의 의인이 되어 ꡒ이제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의인이 되었다. 나는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죄가 없다.ꡓ라고 복음적인 십자가의 구원 차원으로서의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1서에  등장하는 ꡐ우리ꡑ는 그때당시 모두 구원받은 성도들, 곧 ③번 단계에 이른 의인들을 두고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요일1:8절 본문의 ꡒ죄 없다.ꡓ는 말은 ꡐ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한 의인이 되어 죄가 없다.ꡑ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구원받아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삶속에서 연약한 육신을 통해 나타나는 허물을 계속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의 구원받은 성도들중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하고 의로운자가 되어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잘못된 믿음관을 경계하기 위해서 요일1:8절에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라는 말씀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의 은혜로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아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인치심을 받았지만 


세상육신에 의해서 우리가 태어났고, 세상아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우리 육신은 항상 세상에 길들여져 반응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믿어 거듭난 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매일매일의 삶속에 한번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죄악된 삶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새언약의 은혜의 법으로


너 의롭다 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약속을 잘못 받아들여 믿음이 행위로 둔갑시켜버리는 잘못된 신앙사상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믿어서 의롭게 되었는데 의로운 믿음의 성도답게 살아야 된다는 다시금 율법적 행위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로운 일을 해야하며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향한 권면이니까 성도들이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나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적 삶을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거듭난 자라도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이상 그렇게 살수 없기 때문에 신앙을 갖고서도 죄가 또다시 드러나고 이 죄를 용서받을려면 다시금 회개해야 한다는 그 주장이 행위주의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죄값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히6:5-6


- 하나님의 선한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여기에서는 다시금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달라는 회개의 기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미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한 자들은(구원받은자) 다시금 회개하여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자백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 사실은 바로 히6:1-6에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라


 


이 말씀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다시금 죄와 허물로 인해 처음부터 되돌아가는것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을 마음으로가 아닌 지식으로 받아들이는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기쁨과 누림입니다.


한번 복음을 통해서 들은 이 생명의 말씀은 영원히 우리삶속에 신앙과 믿음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자들은 이것을 마음으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끊임없이 계속 이론과 지식으로 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회개,부활,안수,세례,심판등등은...) 우리가 배우고 알아서 되어지는게 아니라 우리가 죄악중에 신음하여 고통으로 울부짖을때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미 주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나도 주님과 함께 장사지냈다라는 은혜의 경험을 하였다면 두번다시 이런 부분에 자꾸 매여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특히 회개부분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고 거듭나서도 매일 삶속에서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다시금 원래 자연인처럼 또다시 회개해 버리는 어리섞음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이미 사해놓으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의 단회성을 가지고 기독교인중 잘못 오해하여 우리주님이 죄와 사망을 영원히 깨뜨리셨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후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다 해결하셨으니라고 하여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영지주의적인 한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우리중에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를 믿어 죄를 전혀 짓지 않으며 죄의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틀림없이 진리가 없는 사람, 곧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경 요일1:8절은 이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구원을 확실히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안에서 새언약의 믿음의 은혜의 법으로 ꡒ죄 없는 의인이 되었다.ꡓ고 말은 하지만, 결코 ꡒ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되었다.ꡓ고는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서 오해를 가장 많이 하는데, 그것은 ꡐ의인ꡑ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ꡐ의인ꡑ이라는 말이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ꡐ의인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죄는 범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 사함을 받은 ꡐ의인ꡑ입니다.




전자(前者)의 의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지만,


후자(後者)의 의인(믿음으로 죄사함받은 의인)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전자(前者)와 같은 예수님과 같은 의인(죄도 모르고 죄를 아예 짓지않는 의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1서 1장 8절에 등장하는 ꡒ죄 없다.ꡓ는 말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는 의인으로서 죄 없다.(범죄행위를 말함)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


세상불신 사람들이 어느날 주의 복음으로 긍휼하심을 입고 ꡐ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사함받아 의인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서 죄 없다.ꡑ고 믿는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이 이 부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ꡒ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ꡐ범죄하지 아니하였다.ꡑ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ꡓ(요일 1:9,10)




여기에 말씀하는 ꡒ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ꡓ는 말은 믿고 거듭난 사람이 나는 죄짓지 않았다라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성도의 빛된 삶








요한이 요한 1서 1장 말씀을 기록한 이유를 통해서도 이 부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ꡒ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ꡓ(요일 2:1)



ꡐ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ꡑ 즉, 요한 1서 1장 말씀이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죄를 범하면 어두움에 거하게 되고, 어두움에 거하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되어집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범함으로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빛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우편에서 모든 성도들의 변호를 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죄 가운데 빠지더라도 마땅히 그분의 이름을


의지하여 죄를 자백함으로 말미암아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복된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글쓴이 : 공깃돌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오직 한번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그리고 어디로 갑니까?
1.생명의 말씀 2.성경은 사실이다. 3.성경과 과학 4.인생이란 무엇인가?
[출처] http://www.nlctv.net
(바로가기 태그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래에 내용이 있으니 마우스로 스크롤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
1. 생명의 말씀


이 땅에서의 짧은 삶에서 어떻게 하면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를 탁월한 통찰력으로 파헤칩니다

1. 구영석목사 전도집회 동영상
[1일차]    하나님은 정말 계신가 그리고 인생의 허무
[2일차]    돌아오라, 영혼과 육체에 대하여, 노아의 방주
[3일차]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이 세상 끝에 일어 날 일
[4일차]    죄인과 의인, 당신은 거듭난 증거가 있습니까?
[5일차]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福音)
2. 장현호목사 전도집회 동영상
[1일차]    성경은 행복의 근원을 알려주는 책이다
[2일차]    화석은 성경을 사실로 증명하는 증거물
[3일차]    성경을 알면 세계사가 보인다.
[4일차]    무엇이 죄인가?
[5일차]    유월절 양인 예수님
[6일차]    은혜로 사는 삶
3. 구영석목사 전도집회 동영상
[1일차]    인생이란 무엇인가?
[2일차]    죽음이란 무엇인가?
[3일차]    죄란 무엇인가?
[4일차]    죄사함이란 무엇인가?
[5일차]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에 대하여



성경
2. 성경은 사실인가?


성경은 과연 사실일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 들은 실존했으며,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건이었을까?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을까?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을까? 여기 분명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십시오.

 1. 성경은 누가 기록했나?

 2. 창조는 사실인가?

 3. 세포의 놀라운 신비

 4. 노아의 방주는 실제 있었나?

5. 노아의 홍수 동영상

 6. 공룡은 실존했나?

 7. 소돔과 고모라는 실존했나?

 8. 성경기록의 목적

 9.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10. 에덴동산은 존재했나?

11. 노아 홍수는 실존했나?

12. 이스라엘의 역사는?

[Top]



3. 성경과 과학


1. 창조의 섭리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동식물을 손수 만드셨으며 그들이 살아 갈 수 있도록 질서를 만드셨다. 아주 작은 생물까지도 생존하고 번식하기에 적합한 방법과 조건을 주셔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단지 희미하고 먼 과거의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당신을 위하여 위대한 창조의 기적을 행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2. 꿀벌의 도시
꿀벌의 생태를 관찰해 보면 불가사의 한 지혜와 그 완벽한 사회구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꿀벌에 관하여 저술된 책이 수만권에 이를 정도로 꿀벌의 세계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해 준다. 자유의지를 갖는 지성과 과학을 자랑하는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들은 오직 하나님과의 사귐에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설명해 주는 내용. 50년 전통의 무디 과학원에서 수많은 과학자, 오랜 연구, 해박한 성경연구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청소년 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들에게 특히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창조 진리를 일깨워 줄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3. 감추인 보화
우주공간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또 얼마나 큰가? 상상을 초월하게 광대한 우주공간이 있는가 하면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세계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것들에게만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에도 똑같이 관심을 갖고 섬세하게 관여 하신다.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인간이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심을 이 프로그램은 일깨워 준다.
4. 수중의 소리
얼마전까지만 해도 깊은 바다속은 아무 소리도 없는 침묵의 세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음기가 발명된 후 바다속은 소란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매우 시끄러운 세상임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영적세계라는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를 알기 위해선 깊은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며 거듭난 생활을 통해서만이 그 새로운 영적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놀랍고 신비스러운 바닷속 생물들의 생활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느끼게 된다.
5. 물(H2O)의 신비
우리는 우리 주위에 항상 있는 것들에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 간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물이다. 대자연계와 우리 인간의 생활에 깊은 관계가 있는 물, 그러나 물을 여러 각도에서 조사해 보면 너무나도 오묘한 하나님의 진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정 사랑을 베풀지만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생명의 고향인 물은 글스도 예수님이시다. 이 동영상에서는 경이로운 자연현상,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6. 적혈구의 신비
생명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심장속인가? 붉은 피톨인가? 수십년 동안 한번도 쉬지 않는 강력한 펌프인 인간의 강한 심장과 초현대 과학으로도 만들 수 없는 생명의 원동력인 피의 역활과 놀라운 기능, 컴퓨터보다도 정밀하게 계산된 이상적인 설계와 형태, 적혈구의 기능등 흥미로운 관찰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음을 알게 된다.
7. 시각/청각/ 미각/후각/촉각
감각의 세계를 연구하다 보면 그 신비함에 놀랄 것이다. 우리에게는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5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마음의 창문이라고 한다. 감각은 개별적으로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연관하여 작용한다. 믿었던 감각기관은 너무도 정확히 판단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커다란 착각에 빠지게 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예를 이 동영상은 낱낱이 소개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어디서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정신적 법칙을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동영상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8. 실험실의 비밀
60사이클의 100만 볼트 전기가 인체를 통과하면 즉사하고 만다. 그러나 같은 100만 볼트라도 6500사이클 전기라면 인체에 충격을 주지 않는다. 어떤 이유일까? 성경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듯이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로 하면 모든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실험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9. Time and Eternity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고속 촬영하여 자세히 그 현상을 분석할 수 있고 반대로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현상을 시간 압축기를 이용하여 단시간에 보여줌으로써 그 변화되는 시간의 과정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동등하다고 볼 수 없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일 수 있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제약도 안받으시므로 지나가 버린 과거가 결코 지워져 버린 것이 아니다. 이 동영상에서는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생각해 보게 한다.
10. 이미 먼저 있었다
현대인들이 자랑하는 온갖 과학적인 발명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자연계에서 존재했던 것일 뿐이다. 과학자들이 수많은 시간과 막대한 비용과 노력으로 발명한 재주들은 벌써 작고 미천한 생물체에서 존재했던 것에 불과하다. 식충식물의 올가미, 물총고기의 미사일, 수중거미의 잠수복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창조의 섭리를 설명하고 그가 주관자이심을 인정하게 된다.
11. 저절로 일까요?
정교한 인체의 구조, 초음파를 발생하여 비행하는 박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철새들의 귀소본능,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들이 단순한 우연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경이로운 일들이 우연한 것이 아니며 더욱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창조의 섭리인 것이다. 전문가들에 의해 오랜 기간과 많은 노력으로 제작된 이 동영상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12. 비행사의 착각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계기없이 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행사의 경험과 감각에만 의존하여 비행한다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최신 비행기의 파일럿들은 과학자들이 만든 계기를 믿으며 그 계기를 의지하고 운항하듯이 우리의 삶의 항로에도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 계기가 바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안전하고 평안한지를 알게 해 준다.


인생
4. 인생이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참회록’에는 짤막하면서도 인생의 예지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메마르고 위험한 광야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목이 마른데, 느닷없이 사자가 나타나서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급한 김에 곁에 있는 작은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우물에는 물이 바짝 말라 있었는데, 안에 있는 돌담을 타고 내려가다 보니 그 밑바닥에는 커다란 뱀이 입을 쩍 벌린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고 다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위경에 처한 나그네는 우물 안의 돌담 사이에서 자라난 조그만 관목을 발견하고, 그 가지에 매달리면 잠시는 버틸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갖습니다. 다행히 그 관목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나뭇가지 위를 보니까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그 나뭇가지를 갉아먹고 있어서 머지않아 연약한 가지는 부러지고 말 지경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나그네는 옆에 있는 나뭇잎에 몇 방울의 꿀이 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그 꿀을 보고 기뻐하여 꿀맛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떨어져서 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이 한 토막의 이야기는 인생의 단면을 의미 있고 예리하게 비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산다는 것은 꼭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요?


곤고한 나그네 인생길

  메마르고 위험한 광야를 지나가는 나그네는 잠시 이 세상에 와서 온갖 풍상을 겪다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모든 인생은 이 지구라는 행성에 왔다가, 잠시잠깐 머물면서 삶의 온갖 애환 속에서 웃고 울며 쫓기다가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가는 나그네지요. 어느 날 그 나그네에게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덤벼들었습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도서 9:12)

  인생의 노정 속에서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재앙이 찾아오고 풍파가 몰아닥칩니다. 정든 사람이 죽는 일이 생깁니다. 진한 슬픔과 삶의 덧없음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별리의 아픔을 만납니다. 쉬 잊혀지지 않아 가슴을 앓습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살아야 하는 고통이 시작됩니다. 말할 수 없는 부담과 갈등 속에 빠집니다.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나 뜻밖의 재난이 찾아옵니다. 좌절과 비관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입시나 사업에 실패합니다. 인생이 다 무너지고 앞길이 꼬이는 것 같습니다.  방탕한 삶과 더러운 죄 속에 빠집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은 대로 걱정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기계처럼 일하며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삶이 피곤합니다. 삶의 권태와 고독이 저며듭니다. 왠지 우울해집니다. 이 책 저 책을 읽어보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보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들어봐도 그저 그렇습니다. 사는 목적이 없고, 사는 게 무의미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갈등, 문제, 어두움이 있습니다.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 1:8)

  죽음의 공포가 그림자처럼 덮여오지만 철학도, 종교도 내게는 시원하고 만족스런 답이 안 됩니다.  사람은 많은데도 외롭습니다. 인파(人波)는 거리마다 쏟아지는데, 언제나 혼자입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정답고 반갑기보다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고, 사람 때문에 피곤하며, 사람이 제일 무서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거리의 인파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 지쳐 있습니다. 영혼이 피곤해 있습니다.
‘내가 이렇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며 이상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인생에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와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님을 떠나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인생들의 발길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을 등진 인생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동 장치인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도서 3장 14절)

나그네는 사자를 피해 급히 물 없는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는 안전할 것이라 믿고, 그 안에서는 잠시나마 쉬면서 마른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서.  급한 김에 우물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엔 삶의 갈증을 풀어줄 생수가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무시무시하고 징그러운 뱀이 또아리를 튼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쫓기듯 우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밑바닥에, 그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살펴보지 않은 채 말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언 27:1)

  물질이라는 우물 속에 참된 만족이 있는 줄 알고, 학문이라는 우물 속에 참된 진리가 있는 줄 알고, 도덕이라는 우물 속에 참된 보람이 있는 줄 알고, 명성이나 권세라는 우물 속에 참된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종교라는 우물 속에 참된 구원이 있는 줄 알고 일단 뛰어들어갑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들어간 그 우물 밑바닥에는 또 다른 절망, 또 다른 괴로움, 또 다른 두려움, 또 다른 목마름이 우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관목에 매달려 있는 나그네!  그 모습이 소망없고 피곤한 인생이요, 죽음의 세계로 떨어져야 할 인생임을 알면서도 바둥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아닌지요?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 2:22-23)

  나그네가 잠시 위를 바라보니 두 마리의 쥐가 쉴새없이 관목 가지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밤과 낮이 뒤바뀌면서, 무정한 세월이 우리의 인생을 부지런히 재촉하고 있듯이 비정한 시간이 유수처럼 흐르고 ‘늙어가는구나. 죽음이 오는구나. 끝이 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그늘져 옵니다.  정신없이 쫓겨온 인생. 언젠가 부러질 관목 가지 하나를 붙들고 있는 인생.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미리 뛰어내릴 수도 없습니다. 나뭇가지를 놓을 수도 달리 잡을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길이 없어 사방을 두리번거려 봅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도서 1:13)

  그 때 옆에 있는 나뭇잎에 몇 방울의 꿀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 꿀이다. 꿀이 있다.’ 나그네는 기뻐하며 꿀맛에 빠져듭니다. 자신이 처한 위태로운 형편을 잊어버린 채 꿀을 핥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오고 있는데도 돈맛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제 잘난 생각에 빠지고, 부질없고 허망한 욕망에 빠져 있습니다.  살겠다고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은 차라리 안쓰럽고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삶의 근원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꿀을 빨고 있는 나그네의 모습이 혹시 욕망에 젖어 사는 당신의 초상화는 아닐까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언 14:12-13)

  결국 나그네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고, 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당신도 언젠가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길고 긴 인생인 것 같지만 잠깐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하는 대중 가요처럼 열흘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울어집니다. 인생도 아침 나절에 잠시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미인도 늙어가고, 건장하고 힘 있던 장사도 늙어가고 죽습니다. 귀하고 똑똑한 사람은 안 죽습니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보고, 찼다가 기우는 달은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모습인 줄은 모릅니다.
  하루살이가 오전 11시에 죽는 것과 오후 6시에 죽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어떤 하루살이는 행복하고, 어떤 하루살이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씨앗 하나가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말라 죽는 것과, 당신이 나서 살고 늙어 죽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이사야40:6)

대체 산다는 게 뭘까요? 답이 없는 것일까요? 길이 있을까요?  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왜 사는가?’를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삶의 목적, 삶의 이유, 삶의 가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삶의 귀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북망산을 향해 가는 세월 속에 당신의 인생을 떠내려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 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시편 49:10-12)

사람들은 소유를 늘리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즐겨보고 으시대 보지만 진정으로 행복스럽지가 않습니다. 지식과 문명은 급속도로 발달해도 세상은 더욱 어지럽고, GNP는 증가했지만 행복의 양이 증가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즐거움과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늘어났지만, 심령은 여전히 피곤하고 불안하며 허무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온갖 건강 식품과 불로장생의 보약을 먹지만 늙어가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즐겁게, 부유하게, 안락하게 살았던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 결과 그런 사람은 태평성대의 왕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왕들 중에서도 부귀영화와 권세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살았던 왕이 있는데, 그는 솔로몬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도서 2:25)

그의 시대에는 금을 돌같이 흔하게 썼으며, 또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내가 자그마치 1,000명이나 있었을 정도로 부귀영화가 극에 달했었습니다. 그는 물질과 육체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렸습니다. 전도서 2장을 읽어보시면 그의 삶이 얼마나 호사스러웠는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산 뒤에 그 심령에 깊이 남는 것은 “모든 것은 헛되도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느끼고 깨달은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였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서 12:13)

몽고의 징기스칸은 말라리아에 걸려 객사하였습니다. 천하를 주름잡던 왕도 모기 한 마리로 인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일찍이 “한 줄기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인간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했습니다.
  서른두 살의 짧은 생애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전성을 구가하던 시절, 측근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을 때, 손을 땅 밖으로 내놓고 묻으라. 그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손에 쥐었던 이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 손으로 갔다는 것을 교훈으로 알려주기 위함이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 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에서 나는 것이로다 (전도서 2:22-24)

세계의 3대 영웅으로 불리워지는 알렉산더, 시이저, 나폴레옹의 최후를 생각해 보면 <성주풀이>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 모양이 될 터이니…”
똑똑한 사람이나 힘있는 사람이나 귀한 사람이나 절세미인이나 다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갔습니다. 모두 죽음을 향해 갔습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전도서 5:15-16)

신기루와 같은 욕망의 종이되어 살다가 덧없는 생을 마감한 저 많은 인생들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또 그 길로 달려갑니다. 그 길의 끝을 주목해 보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그리스도인의 색다른 간증이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디 엘 무디는 1837년 2월 5일에 태어나 1855년 4월 21일에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40여 년 간 복음을 위해 살다가 영원히 밤이 없는 나라로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소에 야망의 사람이었다. 무엇에나 만족함이 없었고, 항상 보다 큰 것을 향해서 나의 야심을 불태웠던 사람이다. 지난 40여 년 간 나는 내 모든 야심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따라서 나의 가족을 위해서는 물려줄 재산이 없구나. 다만 물려줄 것이 있으니,내가 하던 하나님의 사업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계속 지원하실 것이다. … 오늘은 내가 전도 사업을 마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 여보, 이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오. 잠시 동안 당신과 헤어지지만,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도 슬픔이나 고통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는 이런 소망, 이런 확신이 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시편 107:10-12)

철학과 종교에도 해답은 없었다.

어떤 분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인생은 없이 사는 것이 많은데, 10대에는 철없이, 20대에는 겁 없이 살다가, 30~40대에는 정신없이, 50~60대에는 빈틈없이 살고, 70대에는 아무 낙 없이 살며, 80대가 되면 형편없이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황천객이 된다고요.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만큼 죽음 앞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죽음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이지요.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느냐고요? 저는 사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활동은 죽음이 오기까지 그 죽음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망 선고를 받고 태어납니다.
  어느 날 ‘죽음’ 이라는 불청객은 예고없이 당신을 찾아올 것입니다. 죽음은 예방 주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뜻과 상관없이 여러분을 찾아올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여러분의 인생에 끼어들기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불쑥 당신의 인생에 끼어들 때 당신의 영혼이 가야할 곳을 미리, 분명히 모르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삶의 미로에서 헤매며 불안과 혼돈 속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을 지으신전능자를 만나 영혼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듣기 전까지는, 당신은 결코 삶의 근본적인 의문들을 풀지 못할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예레미야 38:16)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금화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것을 잃을까봐 잉크병 속에 감추어 두는가 하면, 지폐는 침대 밑에다 두었습니다. 편지를 받았을 때는 행여 무슨 불행을 알리는 사연이 있지나 않나 해서 뜯기를 주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밤에는 실탄을 장전한 권총과 단도를 가까이 두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60년에 사망한 그는 가사 상태로 매장될까봐 두려워하여 소정의 시간 이상으로 오랫동안 관을 열어 두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세계의 모든 것들은 ‘살려고 하는 의지’에서 나타나는데, 이 ‘살려고 하는 의지’는 사악한 것이고 모든 고뇌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여, 이 고뇌로부터 해방되려면 금욕적인 생활과 불교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어느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노 철학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 채 한없이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공원지기가 문을 닫기 위해 들어와서 경내를 둘러보았습니다. 웬 노인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석상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해가 저물었습니다.”
“……”
“아, 할아버지 가셔야 할 시간이 되었어요. 일어나십시오.”
“……”
“아니, 이 영감님이 귀를 잡수셨나? 영감님, 어디서 오셨어요?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공원지기는 쇼펜하우어의 귓가에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제서야 쇼펜하우어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멀거니 눈을 떴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소? 내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요. 돌아가야 한다고 했소? 인생은 저물고 있는데,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구려. 내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쇼펜하우어는 깊이 탄식하며 공원을 나섰답니다.
하나님을 떠난 철학,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상은 결코 우리의 빈 마음을 채우거나, 풀어줄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는데, 인생이 어떻게 자신을 정확히 알겠습니까? 자신을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 있어야 자신을 보고 알 수 있겠지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은 바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바르게 알려면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볼 때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는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성인 싸르뜨르가 폐수종 때문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는 임종 한 달 전부터 소리를 지르고, 문병 온 사람들을 향해 고통스런 절규를 토했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처럼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순간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감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울부짖었습니다. 그의 아내를 비롯하여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어떤 사람도 죽음의 문 앞으로 가는 그를 위로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자 프랑스의 신문들은 “싸르뜨르는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그렇게도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던 그가 왜 그렇게 불안해 하며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가?”하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문에 투고를 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싸르뜨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뜨르에겐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쇼펜하우어도 싸르뜨르도 영혼이 돌아가 쉴 수 있는 고향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영원한 실향민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계로라는 공자의 제자 한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감히 죽음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敢問死)”
 “未知生이니 焉知死리요?” (삶도 모르겠거늘 죽음을 어찌 알리요?)
 공자도 삶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는 또
“朝聞道 夕死可矣.”(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노라.)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논어>의 술이편에서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是吾憂也 ”라고 탄식했습니다. 즉, 덕이 닦아지지 않는 것과, 학문이 익혀지지 않는 것과, 의(義)에 대해 들어도 자신의 마음과 삶을 능히 옮기지 못하는 것과 선하지 않음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도(道), 즉 진리를 찾아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을 닦았던 철인의 한계요,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학문이나 철학도 당신의 이정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그 안에 당신의 이정표가 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인생의 황혼이 오기 전에 분명한 삶의 이정표를 발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당신에게 다음처럼 권고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성경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와서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당신도 틀림없이 이 말씀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흙으로, 모든 영혼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20)

  이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부터 계속해서 당신의 마음 안에서 메아리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당신의 마음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청운의 뜻을 품고, 해가 바뀌면 새로운 한 해를 꿈꾸며,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려고 애써 보지만, 뜻은 무너지고 꿈은 깨어져 늘 아쉬움과 후회가 남습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일생 동안 자기 뜻대로 태어나,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 뜻대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생에 길이 있고, 소망이 있고, 만족스러운 해답이 있을까요? 예, 길과 소망이 있고,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어디에 있느냐고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고, 당신의 빈 심령을 채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혼에 참된 소망과 안식, 영원한 생명과 능력을 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다지 관심없이 살아왔을지 모릅니다. 코웃음을 치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식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타락한 종교인들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혀 있거나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참된 하나님의 세계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고 올바로 소개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든 이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인생살이가 힘들고 피곤하며 허무한 것은 배우지 못해서나 가지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건강이나 성격이나 환경이 나빠서도 결코 아닙니다. 또한 당신의 노력이나 각오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인생에게 곤고함과 어두움과 수고로움이 온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나 인간의 노력이나 부귀 영화에 의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먼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욥기 22:21-23)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분께 귀의하여 당신의 모든 불의, 곧 죄를 사함받게 되면 당신은 영적인 눈이 떠지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바른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아직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참된 행복은 물질이나 권세나 명예나 지식이나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로워진 사람, 하나님께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 맛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로마서 4:7-8)

  이런 사건, 이런 역사(役事), 이런 은혜가 당신의 마음에 임할 때 당신은 가난해도, 무식해도, 질병이나 절망 속에 있어도, 연약해도, 더럽고 추한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달라지고 새로워지고 복될 것입니다.
[Top]

 

[ 1 | 2 ] 다음 페이지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godstori
- eun6222
- JAEHO
- 지니
- 최윤현
오늘 전체
방문자 67 316146
구독자 0 72
댓글 0 931
참조글 1 161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jabiryang (jabiryang)
프로필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최근 글
식혜 만드는 법(정통요..
글로뮈
글로뮈
하이든-천지창조..
하이든-천지창조..
최근 댓글 전체
잘못된 내용이 눈에 띄..
유명한 목사님들은 다 ..
정말 좋은 글들이 많습..
유익한 정보 연구에 ..
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최근 참조글 전체
천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