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전체 글보기(5017)
아침의 기도
처음 방문하신 분에게 드리는 선물
가정,결혼,자녀교육
간증
값 없이 사라
건강하게 사는 세상
각종 검사 이해하기
공짜 정보 안내
과학 세계
창조 과학
기본폴더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대 요리 문답
로마서 연구
마태복음 묵상
말씀/ 찬양/ 기도
물 좀 알고 마시자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
미용/아름다워지기/패션
보람되고 값진 것
산,강 그리고 바다/폭포
삶의 지혜
생명의 빛
선교/전도/증인
성경/주석과 번역판들
성경속의 건강
세계의 종교 제대로 알자
스마일(웃음)
시사/소식/정세
신앙 자료,신학,성경공부
심리/성격
알고 싶은 세상
암과 그 대책
약에 관한 모든 것
어떻게 살아갈까
여행 떠나세요
역사 의 진실
영상과 영화 음악 모음
예병일의 경제노트
옛시조 모음
오페라 여행
우리가곡 감상
운동 이렇게 해 보세요
음식/먹거리/요리/맛
인체의 신비
일본어 배우기
좋은 생각,글,그림
중국/여행정보/선교
찬송가/CCM
창세기 강해
책 소개(가장 유익한)
철학 /사색의 광장
취미,관심거리,볼거리
컴 자료/태그/블로그
클래식 산책
한방/동양의학
호기심이 선악과 ?
흘러간 노래 (가요/팝송)
설문
백만가지 주제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개설일 : 2006/11/20
 

사영리-에니메이션
http://www.jesusinside.pe.kr/law4.htm
을 클릭 하십시요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미국은 20세기 마지막 10년동안 십자가 없는 복음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 신학교수의 지적입니다.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자들의 영혼에 십자가와 부활의 참 복음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J.B. Phillip은 로마서 12:2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Don’t let the world around you squeeze you into its own mould, but let God remake you so that your whole attitude of mind is changed.” 세상이 여러분을 그 틀에 밀어넣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자들은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복음, 나를 위한 구원에 너무도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취향에 맞는 복음을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유랑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세련되고 편한 복음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느끼고 감동과 감격의 복음이 주를 이루는 말씀들, 공적과 정성을 드리면 복으로 돌아온다는 가짜 복음들. A. W. 토져는 이런 지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노래하는 찬송가를 멀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노래하는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찬양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나를 중심으로 변질된 신앙의 한 형태를 찬양을 예를 들어 지적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사 복음들에 환호하는 배후에는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인간적인 마음들이 깔려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내 식성과 기호에 맞게 잘 차려진 식탁에서 누군가의 시중을 받으면서 식사를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이러한 세련되고 편안한 복음에 익숙한 시대와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올바른 선포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시대가 영적인 위기의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놀라운 은혜를 갖고 계십니다 라는 반쪽 복음, 싸구려 복음과 은혜에 환호하는 이 세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복음의 회복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의 복음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로마서를 다시 붙잡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34강(8장), 하나님의 설복(Ⅹ)

2007.04.11 10:59 | 로마서 연구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4514 주소복사

로마서 134강(8장), 하나님의 설복(Ⅹ) / 남포교회 박영선목사




(서언) 로마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전체 16장 중에서 8장까지만 하면 중요한 부분은 끝난 것이 되므로 8장까지만 말씀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번 로마서 공부를 통하여 여러분이 ‘기독교는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깊구나’라는 깨달음만이라도 갖게 되었다면 저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당황했던 문제는 ‘기독교가 이처럼 가난한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죽으면 천당가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배워왔습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죽으면 천당간다’는 말로 대신하고 지나갑니다. 마치 부모님들이 말이 막히면 ‘어디다 대고 눈을 부릅뜨고 이러니? 누가 어른에게 말대답을 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너 죽어서 지옥갈래?’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즉 삶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인 해석을 해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경의 깊이를 깨닫고 나서 기독교가 얼마나 풍성하게 전 삶의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읽고 또 읽어서 ‘이제 다 왔겠거니’하고 나서보면 거기가 또 하나의 코너입니다. 그곳을 돌아서서 보면 다시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이번 로마서 강의는 그 풍성함의 일부분입니다. 로마서를 온전히 설명하고 가르칠 사람은 사도 바울 한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로마서를 가르치는 각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설명의 어느 한 부분을 각기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28절을 분기점으로 1~27절과 31~39절로 나뉘어집니다. 28~30절은 우리가 예정론이라고 부르는 대목입니다. 28~30절은 우리가 예정론이라고 부르는 대목입니다. 28~30절에 나타난 예정론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 앞부분과 뒷부분은 같은 내용을 마치 손바닥과 손등으로 이야기 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1장에서 5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믿음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진술하였으며 6장과 7장에서는 은혜가 무엇인가, 율법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진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8장의 서두를 “그러므로”로 시작함으로써 앞에서 진술하였던 모든 내용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경우에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 8장 후반부터 예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예정론

우리는 예정론에 대하여 ‘미리 정해 놓았다’는 논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했다고 할 때, 즉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는 이미 계획되어 있는 것이므로 택함받은 자는 구원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택함받지 못한 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구원얻지 못하는 고정된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의 활동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인가라는 어려움에도 빠지게 됩니다.




또한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되는 부분의 문제로 제기되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다 하신다면 우리는 할 일이 없을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예정이 어느 부분인가에서는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정론만큼 우리들에게 어려운 대목은 없으며 또한 예정론만큼 오해되어 있는 부분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정에 대하여 얘기할 때 우리의 운명과 전생애의 코스가 고정되어 있다는 뜻에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성을 가지셨다는 그 뜻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출생부터 사망 그 이후까지 전생애를 하나의 도표로 그려놓고 하나님이 작성한 그 도표 안에서만 활동하며 살아가도록 인간의 모든 발걸음도 미리 작성해 놓고 우리를 출생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태엽을 감아서 레일 위에 올려놓은 장난감 기차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정론을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생코스를 설정해 놓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하나님을 극히 평가절하하고 인간의 수준을 무시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을 가진 사람은 그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 계획과 목표를 설정하고 일을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그와 같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실 때 그 일에 대한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출생시킬 때에 그를 어느 지점, 어느 수준까지 도달시키겠다는 목표를 정한 계획 아래에서 출발시키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각자의 생애의 곳곳에서 ‘예’ 또는 ‘아니요’라고도 할 수 있으며 ‘보류하겠습니다’라고도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운명은 결정적이나 그 인생과정은 그때 그때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도착시키고자 하는 그 지점은 장소적인 곳이 아니라 수준에 초점을 맞춘 목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멩이를 옮겨 놓듯이 갖다 올려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수준」을 목표한 지점에까지 올려 놓으려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수준에 가야 할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수준에 도달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까지 도달시키기 위해서는 말로 할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고 그 외에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자세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30대 맞고, 또 어떤 사람은 300대 맞고 그 지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되는데 자유의지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목표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면 ‘예’, ‘아니오’라고 하는 우리의 결정은 무가치한 것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것을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자유의지란 결정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의 존재가치, 즉 인간의 인간됨을 논할 때 지, 정, 의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지, 정, 의, 세 요소 중에서 인간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어느 곳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의지」에 나의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지와 정은 아직도 생각에 불과합니다. 생각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의지란 내가 나의 두 발을 내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현주소가 「의지」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동쪽으로도 가고 싶고 서쪽으로도 가고 싶을 때 동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 자체가 의지가 아니고 결국 두 다리를 그곳으로 옮겨놓는 것이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로 갈 때는 처음에는 말로 합니다만 결국 우리 앞에 가시덤불을 놓거나 불을 놓아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길로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 길로 내가 나의 다리로 걸어간다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길로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일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지 마십시요. 단지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선택하는 길은 옳은 길이 아닙니다. 편한 길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후 믿지 않은 자들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막힌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막혀서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선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입니다.




운명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는 자유의지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권위에 대한 문제로 하나님과 내가 동등한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교만한 자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늘 이러한 권위에 관한 도전입니다.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에서도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권위를 동등하게 해놓고 이해하려고 하나 이것은 큰 오류입니다. 예정론을 얘기할 때마다 나오는 이 자유의지에 대하여 혼동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리 아신다”는 말을 예지, “미리 정했다”는 말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계획하시고 자신이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다 아시며 다 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내가 이런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시면 그러한 사람을 만들어 내시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정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성경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순서로써 택한 자를 부르시고, 칭의하시고, 성화시키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우리가 가야하는 완성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의 자리에 이르도록 그렇게 계획해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인간이 만들어지는 코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은 죄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타락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회복시키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이 예정론의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나 하나님은 어떤 댓가를 치루고라도 그 목적지까지 인간을 도달시키고야 만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집」이 이보다 더 잘 나타난 대목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정이 뜻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셨습니까? 타락은 인간이 결정한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을 결정할 수 있었으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이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이 갖는 자유의지가 타락할 수 있었으나 그것으로 끝장나게 하지 않으려 했던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 완성되었음이 예정론에서 보여지는 놀라운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제2타락, 제3타락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도달시키고자 했던 「운명」의 지점에까지 반드시 도달케 하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매맞는 일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에 대하여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 앞에 있으니까 우리는 놀아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도달시키려고 계획하고 계시며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가를 잘 살펴서 매를 대시기 전에 말로 할 때에 알아듣는 자가 복있는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정을 이루시는 과정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이 말씀은 구원의 과정으로써 우리 신자들이 가야하는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예정은 우리 인생길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진행된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의 생애동안 그와 더불어 씨름한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진흙을 손으로 빚어서 만든 후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외형적 작품이라면 내면적 완성 부분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내면적 완성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수준과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바 그 가장 높은 경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참으로 깊은 뜻을 지니는 말입니다. 사랑의 깊은 의미로 파악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권위적인 차원에서는 동등할 수 없으나 교제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동등하게 대접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동등한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증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14세 미만일 때 나오는 대답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40세 때까지 나오는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가장 큰 반대말은 동정이라고 봅니다. 동정은 무관심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남녀에게 있어서 상대방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데, 이쪽에서는 ‘저렇게까지 쫓아오는데 안 봐줄 수도 없구’라는 동정으로 대한다면 그 사랑은 곧 증오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동정으로 답하는 것만큼 화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하여 최대의 모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도 이 사랑의 개념이 적용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제로 눌러서 무릎을 꿇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서 하나님께 항복하게 되는 그러한 사랑을 받아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봅시다. A라는 여자와 B라는 남자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C라는 남자가 나타나 삼각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C라는 연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참으로 약한 자입니다. 혼자 뛰어서 일등하는 마라톤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자존심에 관한 싸움입니다. ‘얼마든지 올테면 오라’는 자세로 동등한 입장에서 여자의 선택을 받아내야 값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깊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멸망할 자리까지는 도달하지 않도록 간섭하여 강제로 막으시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죄를 좇는 것과 하나님을 좇는 것을 동등하게 놓고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가 불신자보다 죄를 덜 짓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의 결과를 볼 수 있어서 그 죄를 돌이킬 기한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동일한 죄를 범해도 돌이킬 기회가 없어 죽은 후에야 그 결과를 알게 됨으로 지옥에 갑니다. 죽어보고야 알게 됨으로 돌이킬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은 죄의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신자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짓는 부분에서 신자들을 딱 차단하시지 않고 우리의 자발적인 항복, 즉 하나님께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지을 기회가 없어서 안짓기보다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므로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해서 죄를 멀리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사랑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시지 않으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차원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이유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속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지 전이나 죽은 다음이 아니라 현존하는 현실의 순간 속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결단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내시고 나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나를 출생시키시고 출생 후 사망하기까지 인생이라는 시간을 두셔서 이 동안에 우리에게 이루실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칭의하시고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선느 우리의 귀에 대고 말씀하시고 수없이 그의 종들을 보내시고 말씀을 듣고 보게 하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8)”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지금 이 자리에 한 형제로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을 일일이 부르시고 의롭게 만드시고 성화시키시고 영화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간섭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목표를 설정하셨기에 각각의 인생들을 일일이 인도하셔서 도달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은 섬세한 사랑과 크신 열심으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우리 인생들을 배후에서 붙잡고 인도하시는 것이 예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3. 신자의 적용 문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니라(8:12~14)”




이 말씀에서 「죽는다」, 「산다」는 얘기는 「멸망받는다」, 「구원얻는다」는 내용이 이미 아닙니다. 1절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말씀처럼 이미 구원얻은 자들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이 「육신」이나 「세상」이라고 말할 때는 죄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죽는다」는 의미는 여기서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 뜻에 어긋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죄의 원리대로 살지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들로 너희의 방향을 잡고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이렇게 살아야 신분이 결정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구원얻은 자의 고귀한 신분을 이미 가졌기 때문에 그 신분에 맞는 수준이 되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말하는 8장의 후반부로 넘어가서 살펴봅시다.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왜 나오겠습니까? 신자들이 송사당할 일을 많이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저래’의 경우를 당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범죄를 보고 비난하거나 당황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또한 내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도 자학하거나 좌절해서도 안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가 죽을 자리에 떨어져 있었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의 댓가로 치루고라도 목적지에 도달시키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그것보다 더 큰 댓가를 치루게 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나오는 얘기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4~39)”




외부에서 오는 환난이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갈등으로도 나와 하나님의 사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므로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 이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교만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론으로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이 말씀은 우리들의 삶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사항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어떠한 자비하심과 열심으로 자녀로 삼으시고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는가를 기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제물이란, 그 제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생애를 살라는 것이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고통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온 인류가 기쁨과 생명을 얻는 것과 같이 신자는 자신이 제물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도록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자를 “왕같은 제사장(벧전2:9)”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권위와 권세와 신분을 소유하였으나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임무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 기독교의 기독교됨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까요? 그들은 논리성이나 진리의 진리됨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생활 영역에서 살면서도 자신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보고 복음이 갖는 엄청난 비밀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며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그들에게 ‘자기 욕심을 위해 살지 않는다’, ‘희생하면서 산다’, ‘지면서 산다’, ‘당하면서 산다’라는 생활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생활은 경우나 법이나 상식을 갖다 놓고 따지면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식과 법의 기준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의 요구에 응하여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곧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지구상에서 가장 처절하고 경멸스러운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가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봐라”로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답변하신 예수님의 자세를 우리의 삶의 목표로 갖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느냐’는 것은 훨씬 힘든 문제이나 그럴지라도 그렇게 살도록 요청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는 복받기 위해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복은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줄 것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증거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고 계십니까?




혹시 예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자기들끼리 위로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자는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선언하는 자이고,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가르치고 명하는 대로 다 실행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늘 마음 속에 머리에 넣어가지고 다니십시요.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목표지점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못 살지만, 알고서 못 살면 죄스러움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모르고 못 살면 떳떳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처사에서 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로마서의 주된 내용을 배웠습니다. 배운 결론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알았다’가 결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살겠다’하는 심각한 도전이 무겁게 그리고 무섭게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 결론을 마음에 넣으셔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고 감격하며 또한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전 생애가 주의 손에 있다는 사실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기쁨과 더불어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깨닫고 놀라기도 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회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는 원하시는 바대로 살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만 노력해 보지도 않고 주저앉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열 번, 스무 번은 못 해도 한 번쯤은 해볼 수 있는 은헤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렇게 사는 맛을 조금씩 조금씩 맛보아 습관화하게 해주시며, 그것이 생각보다 놀라운 축복이고,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간증이 넘쳐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를 한 형제되게 하셨으니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사랑한다는 고백이 생활 속에서 넘쳐나는 기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133강(롬 6장), 하나님의 설복(Ⅷ. 새 사람)

2007.04.11 10:57 | 로마서 연구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4513 주소복사

로마서 133강(롬 6장), 하나님의 설복(Ⅷ. 새 사람)






(서언) 로마서 6장과 7장은 사도 바울이 기술(記述)하는 호흡이나 흐름으로 볼 때에 하나의 괄호 속에 들어가 있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3장부터 연결해서 4장, 5장에 이르기까지, 구원이 우리에게 확실한 문제로서 어떻게 우리에게 시작이 되었고 어떻게 결과까지 갈 수 밖에 없는 문제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내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장에 가서 5장과 같은 주제로 연이어서 다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구원의 확실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5장과 8장 사이에다 6장과 7장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확실하며 어떤 경우에서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6장에서는 새 사람으로 변화된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율법 아래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인간의 절망상태를 묘사함으로 상대적으로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확실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죄 가운데 거하리요-그럴 수 없느니라!

5장의 내용을 연결해서 6장 1절을 읽게 되면, ‘은혜가 왕노릇 하는 구원을 얻고 그 완성의 자리에 들어가 자는 그러면 아무것도 안해도 좋으냐’라는 엉뚱한 질문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아담의 자손에 불과했을 때는 나의 마음에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늘 죄가 나를 명령하여서 죄의 자리에 가서 있게 했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는 내가 선한 일을 하지 않고 한 눈을 파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쪽으로 잡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도 역시 사실일 수 밖에 없으며 오히려 후자는 참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은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것인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밀고 갈테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 쪽을 한눈 팔면 그리고 죄의 자리로 도망을 가도 결국은 은혜가 나를 끌고 간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나는 저쪽에 가서 조금 놀고 있을 테니까요 나를 끌고 가십시요’라는 식으로 혼동을 합니다.




그래서 6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역사 이래 무수히 많아서 성경에도 그러한 질문의 대표적인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답변합니다. 이 대목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은혜」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착각을 하곤 합니다. 즉,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있었을 때 우리가 요청도, 동의도, 협조도 구하지 않았는데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자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일 없이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은혜가 동원되었는데, 그 바꾸어 놓은 방법, 과정에 대한 나의 인식, 나의 동의, 나의 협조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바뀌어진 것을 잊어버리고는, 늘 ‘돌아가자, 돌아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민망해서 ‘돌아가셔도 되겠네, 돌아가면 또 꺼내 줄 테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마치 깡패집단에 빠져있는 자식을 둔 부모가 자식이 하는 행위를 보면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돈을 주고 꺼내 놓았더니 내가 돈을 주고 나온 것이 아니니까 다시 돌아가면 나중에 또 꺼내 주겠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자손 속에 있던 우리를 죽여서 꺼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속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또 한 번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인 것입니다. 이 오해를 사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진 것이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의인의 신분으로 넘어 왔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죄인」이 아닌 「의인」이라는 얘기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의인의 자리로 들어와서 살다가 자신에게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죄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다시 아담의 족보로 돌이켜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최대의 「질병」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돌아가셔도 안될 문제이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족보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의 변화와 수준의 변화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신분이 변했다는 것과 수준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천지 차이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준이 완성되지 않은 것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거나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2. 신자의 신자됨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6:3~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의 신분에서 꺼내신 것은 이제는 새 샘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성품이 살아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구습이 남아 있어서 계속 그 습성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름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옛 생활태도를 뜯어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랍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에까지 자라가라”는 것이 성경이 늘 우리에게 하는 권면입니다.

로마서 6장 7~10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 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합니다. 특히 10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 번에 죽으심이요”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분적인 차원에서 죄에 대하여 서서히 죽어오고 의에 대하여 서서히 살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은 선한 일을 하고 악한 행실을 죽임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는 그 순간에 단번에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죄인의 「동네」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지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식임을 압니다. 이 제 6장 11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길지어다」라는 말은 아니면서 그렇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남자아이가 있는데 그의 성품이나 행실이 온순하고 여자 같아서 밖에서 놀 때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늘 맞고 친구라고는 여자친구 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너 좀 남자답게 굴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에 아버지는 딸만 낳고 아들 못 낳은 것이 부끄러워서 여자아이를 남장 시켜놓고 ‘남자답게 굴어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에게 ‘남자답게 굴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이 우리에게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그렇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최고의 행동강령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입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가지 운동 중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것이 테니스입니다. 테니스를 처음 치러가면 하루종일 쳐서 공이 상대방의 코트로 3개가 넘어가면 잘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쳐도 3개 밖에 안 넘어가서 ‘목 매달아 죽었다’는 예는 없습니다. 교사는 그 사람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계속 연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밖에 못 넘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3개나 넘어 오지 않았습니까? 3개나! 이것이 테니스를 처음 가르칠 때에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9700개 쯤은 안 넘어갔고, 3개만이 넘어갔어’라고 낙담합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테니스로 비유한다면, 하루 종일 쳐서 10개 정도 넘기시는 수준입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잘 하시는 것입니다. 매우 훌륭합니다. 한 개도 못 넘기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자들에 대한 위로이며 당연한 「박수」입니다. 우리는 완성의 자리를 지금의 수준과 잘못 비교하는 습성이 있어서 ‘나는 너무 엉망이다.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다워라’는 얘기는 ‘희망을 갖고 계속 진행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도달한다,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로마서 5장, 6장의 골자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품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배우고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저희가 보잘것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시작하였으나 이 일은 완성될 수 밖에 없고 그 끝은 창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족함을 인하여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나의 좌절감으로 인하여 하나님도 좌절하실 수 있다는 자리로 몰고 가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희망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성공하는 날까지 신자답게 허리를 동여매고 두발로 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132강(롬 6장), 하나님의 설복(Ⅷ. 새 사람)

2007.04.11 10:54 | 로마서 연구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4512 주소복사

로마서 132강(롬 6장), 하나님의 설복(Ⅷ. 새 사람)






(서언) 로마서 6장과 7장은 사도 바울이 기술(記述)하는 호흡이나 흐름으로 볼 때에 하나의 괄호 속에 들어가 있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3장부터 연결해서 4장, 5장에 이르기까지, 구원이 우리에게 확실한 문제로서 어떻게 우리에게 시작이 되었고 어떻게 결과까지 갈 수 밖에 없는 문제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내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장에 가서 5장과 같은 주제로 연이어서 다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구원의 확실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5장과 8장 사이에다 6장과 7장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확실하며 어떤 경우에서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6장에서는 새 사람으로 변화된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율법 아래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절한 인간의 절망상태를 묘사함으로 상대적으로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확실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죄 가운데 거하리요-그럴 수 없느니라!

5장의 내용을 연결해서 6장 1절을 읽게 되면, ‘은혜가 왕노릇 하는 구원을 얻고 그 완성의 자리에 들어가 자는 그러면 아무것도 안해도 좋으냐’라는 엉뚱한 질문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아담의 자손에 불과했을 때는 나의 마음에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늘 죄가 나를 명령하여서 죄의 자리에 가서 있게 했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는 내가 선한 일을 하지 않고 한 눈을 파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쪽으로 잡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도 역시 사실일 수 밖에 없으며 오히려 후자는 참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은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것인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밀고 갈테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 쪽을 한눈 팔면 그리고 죄의 자리로 도망을 가도 결국은 은혜가 나를 끌고 간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나는 저쪽에 가서 조금 놀고 있을 테니까요 나를 끌고 가십시요’라는 식으로 혼동을 합니다.




그래서 6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역사 이래 무수히 많아서 성경에도 그러한 질문의 대표적인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답변합니다. 이 대목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은혜」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착각을 하곤 합니다. 즉,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있었을 때 우리가 요청도, 동의도, 협조도 구하지 않았는데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자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일 없이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은혜가 동원되었는데, 그 바꾸어 놓은 방법, 과정에 대한 나의 인식, 나의 동의, 나의 협조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바뀌어진 것을 잊어버리고는, 늘 ‘돌아가자, 돌아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민망해서 ‘돌아가셔도 되겠네, 돌아가면 또 꺼내 줄 테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마치 깡패집단에 빠져있는 자식을 둔 부모가 자식이 하는 행위를 보면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돈을 주고 꺼내 놓았더니 내가 돈을 주고 나온 것이 아니니까 다시 돌아가면 나중에 또 꺼내 주겠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자손 속에 있던 우리를 죽여서 꺼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속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또 한 번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인 것입니다. 이 오해를 사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진 것이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의인의 신분으로 넘어 왔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죄인」이 아닌 「의인」이라는 얘기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의인의 자리로 들어와서 살다가 자신에게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죄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다시 아담의 족보로 돌이켜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최대의 「질병」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돌아가셔도 안될 문제이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족보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의 변화와 수준의 변화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신분이 변했다는 것과 수준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천지 차이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준이 완성되지 않은 것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거나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2. 신자의 신자됨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6:3~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의 신분에서 꺼내신 것은 이제는 새 샘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성품이 살아 남아있는 자들입니다. 구습이 남아 있어서 계속 그 습성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름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옛 생활태도를 뜯어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랍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에까지 자라가라”는 것이 성경이 늘 우리에게 하는 권면입니다.

로마서 6장 7~10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 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합니다. 특히 10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 번에 죽으심이요”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분적인 차원에서 죄에 대하여 서서히 죽어오고 의에 대하여 서서히 살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은 선한 일을 하고 악한 행실을 죽임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는 그 순간에 단번에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죄인의 「동네」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지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식임을 압니다. 이 제 6장 11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길지어다」라는 말은 아니면서 그렇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남자아이가 있는데 그의 성품이나 행실이 온순하고 여자 같아서 밖에서 놀 때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늘 맞고 친구라고는 여자친구 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너 좀 남자답게 굴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에 아버지는 딸만 낳고 아들 못 낳은 것이 부끄러워서 여자아이를 남장 시켜놓고 ‘남자답게 굴어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에게 ‘남자답게 굴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이 우리에게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그렇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최고의 행동강령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입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가지 운동 중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것이 테니스입니다. 테니스를 처음 치러가면 하루종일 쳐서 공이 상대방의 코트로 3개가 넘어가면 잘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쳐도 3개 밖에 안 넘어가서 ‘목 매달아 죽었다’는 예는 없습니다. 교사는 그 사람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계속 연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밖에 못 넘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3개나 넘어 오지 않았습니까? 3개나! 이것이 테니스를 처음 가르칠 때에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9700개 쯤은 안 넘어갔고, 3개만이 넘어갔어’라고 낙담합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테니스로 비유한다면, 하루 종일 쳐서 10개 정도 넘기시는 수준입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잘 하시는 것입니다. 매우 훌륭합니다. 한 개도 못 넘기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자들에 대한 위로이며 당연한 「박수」입니다. 우리는 완성의 자리를 지금의 수준과 잘못 비교하는 습성이 있어서 ‘나는 너무 엉망이다.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다워라’는 얘기는 ‘희망을 갖고 계속 진행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도달한다,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로마서 5장, 6장의 골자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품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배우고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저희가 보잘것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시작하였으나 이 일은 완성될 수 밖에 없고 그 끝은 창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족함을 인하여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나의 좌절감으로 인하여 하나님도 좌절하실 수 있다는 자리로 몰고 가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희망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성공하는 날까지 신자답게 허리를 동여매고 두발로 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다음 페이지 다음 10번째 페이지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지니
- JAEHO
- 최윤현
- hurryjung912000
- 갱필이
오늘 전체
방문자 40 315982
구독자 0 72
댓글 0 931
참조글 0 160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jabiryang (jabiryang)
프로필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최근 글
식혜 만드는 법(정통요..
글로뮈
글로뮈
하이든-천지창조..
하이든-천지창조..
최근 댓글 전체
잘못된 내용이 눈에 띄..
유명한 목사님들은 다 ..
정말 좋은 글들이 많습..
유익한 정보 연구에 ..
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최근 참조글 전체
천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