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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안식일은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에도
안식일은 존재하고 있었고(보, 창 1:31~2:3), 세상의 모든 역사가 끝나고 난 후에도 안식일은
계속된다(보, 사 66:22,23)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사역을 모두 마치시고 쉬시고 창조를 통해 영광 받으신 날이 그 첫 번째
안식일이다. 무슨 의미와 중요성이 포함되어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에게는 ,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쉬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육일간 일한 후에 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날이 안식일이 된다. 천국에서는 영원히 쉬는데(보,계14:13), 그상황을 이 땅에서 실습하는 날이 우리에게는 안식일이다.
그래서 이 땅에 있을 동안의 우리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영광, 구원을 찬양하며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가서도 안식일은 계속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의 쉼을 주셨기 때문에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것이다(마 12:8).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증표(하나님을 향한)로 주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를 찾아갈 때, 왕복은 벗어던지고 평민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그 술람미 여자의 본심을 알고 그녀의 참사랑과 본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안식일을 대하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향한 자원하는 마음의 예배와 우러나오는 것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증표로 주신것이다.
하나님 나라이 임하시면 누리게 될 참 안식이 이미 우리에게 보증으로(계약금과 중도금처럼) 와 있다. 유대교와 1~2 세기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차이점이 있었음을 알아야 안식일의 의미 또한 더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5,6 절에서 특별한 날에 얽매이지 않고도 안식일을 의미있게 지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일(월,화,수, . . .)요일에도 안식일 처럼 살게 되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지키게 될 그 안식일을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일요일 준수까지도 율법적인
(문자적인) 내용에 얽매어서 구약당시의 유대인의 안식일 처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오히려 신 율법주의자가 되어 안식일의 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수도 있다.
나의 모든것(재물, 시간, 자녀, 나의 육신 . . .)이 주님의 것이므로, 수입의 십일조를 바쳤다고 나머지 9/10는 내것이므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안일하고 위험한 신앙태도 인것 같이,
시간에 대한 관념 또한 일 주일 중 제 칠일을 바쳐 그날을 철저히 잘 지켜냈다고 계명을 지키는 의미를 필요 충족시킨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의 어떤 것 보다도, 우리의 마음 한가닥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다.(보,사 1:2,3) 우리의 마음으로 자원하는 심령이 되어 산 제물이 되는 그 증표를 하나님께 드리자. 날에 매이지 않다가 보면 어느 사이인가, 우리는 안식을 그냥 지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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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는 누구인가?(이여호수아)
평신도의 사역
1. 들어가며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대변적인 직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선교하는 백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사무엘, 평신도를 부른다, 성광문화사, 1999.1., p.84. 먼저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으로서의 사역이었습니다. 따라서 평신도는 제사적 직능(priestly function), 예언자적 직능(prophetic function), 왕권적 직능(kingly function)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교회내에서의 평신도 사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밖에서의 평신도 사역은 세상에서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선교하는 백성으로서의 평신도 개념과 관련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에서는 교회내에서의 평신도 사역(역할)과 교회밖에서의 평신도 사역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2.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사역(역할)
1) 제사적 직능 제사장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하워드 쉬나이더(Howard Snyder)는 평신도 신학의 두 기둥은 만인제사장론과 은사론이라고 주장했는데, 제사적 직능은 만인제사장론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인제사장론의 의미를 4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 제사를 드리는 자임을 나타냅니다. 셋째로, 제사장의 주요 역할이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것으로 베드로전서2:9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전케 하려 함이 성도로 부름의 목적임을 묘사합니다. 넷째로, 제사장적 사역은 중보하는 기능으로, 자신의 복락을 위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기도와 도고로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사역자들입니다. 김성욱, 하나님의 백성과 선교,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8.9., p.34. 이러한 제사장적 직능을 가진 평신도가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갖는 중요한 행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제사적 직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사무엘, op. cit. p. 87-89.
첫째는, 각자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 전원이 참여하여 드리는 것으로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같은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으며, 평신도들은 각자의 악기로, 아름다운 소리와 화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지휘하는 목회자와 함께, 각자의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평신도들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이 예배를 통하여 예배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연주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장식, 평신도는 누구인가? 대한기독교 출판사, 1980, p.40.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삶 속에 우리가 참여하는, 응답적 차원의 것입니다. 레티 러셀은 이 ‘참여’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①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는 일, ② 소유한 것을 함께 나누어 쓰는 교제에 참여하는 일, ③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의 연장으로서 이웃과 함께 떡을 떼는 일, ④ 그리스도의 임재를 감격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Letty M. Russell, Christian Education in Mission(Philadelphia : Westminster Press, 1967), p.116, 은준관, 기독교교육 현장론, 대한기독교출판사, p.258에서 재인용. 이러한 참여가 아름답게 이루어지려면, 일체의 계급의식이나 지위의식 및 서열의식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참여의 기본은 섬김을 받고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섬기고, 주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된 봉사자가 되고, 선한 청지기가 되어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평신도 각자가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십분 발휘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드릴 영적 예배는 몸의 모든 지체와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롬12:1,2). 둘째는, 선교적인 결단과 행위입니다. 평신도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기쁨을 경험할 뿐 아니라,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여 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선교적 행위를 해야 합니다. Letty M. Russell, op. cit., p.117. 즉 복음전파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구원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감당하고, 편지로 지원하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대로 본인이 직접 선교사로 나아가 선교사역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중보기도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섬기는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가운데 서서,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생명구원사역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명입니다.
2) 예언적 직능 평신도가 예언적 직능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설교와 교육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목회자가 수행해야 할 특수한, 그리고 전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설교와 교육과는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제도교회 내에서 예언적 직능에 참여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Ibid. 그러나 모든 평신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받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또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 모양으로 말씀의 전령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고려하면 모든 사람이 다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신도는 누구나 말씀의 증거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Hans Küng, The Church in History(Grand Rapids, Michigan : Eerdmans Publishing Co., 1955), p.481.
오늘날 한국의 지역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실제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여러 가지 교육 즉 유년부 주일학교와 중․ 고등부, 대학부, 그리고 청년부 등의 교육부문입니다. 교회의 교육은 각 교회의 성장과 선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교회 교육은 성경에 대한 지식과 얼마간의 신학적 지식뿐 아니라 세상의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평신도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전도하고, 1대1로 성경을 가르치며, 중생을 경험한 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평신도들은 교회 교육부문에서의 사역뿐 아니라 더욱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함으로 영성을 계발하고, 필요한 신학적 지식도 습득하여 때로는 주일 설교까지도 맡을 수 있는 정도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예언적 역할을 확대해 나갈 수 있도록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서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왕권적 직능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곧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기관과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행정적 사무와 교회정치가 따릅니다. 이러한 일에 관해서 평신도들은 넓은 사회적 지식과 경험을 교회 안에서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행정사무를 목회자가 모두 감당하거나 아니면 사랑과 은혜의 불문율의 법칙에 맡길 때,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고 행정이 비능률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예산의 책정과 집행, 그리고 여러 가지 행정사무가 조직화되고 평신도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러한 행정사무나 재정의 관리 등을 평신도들이 맡음으로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교회를 섬기는 보람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전임 목회자들은 더욱 목양의 일에 전념함으로써 교회가 은혜 가운데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보다 신앙과 영성을 앞세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의 유지와 살림살이는 평신도의 사역에 속합니다. Ibid., p.52.
또한 교회정치는 교회나 노회 혹은 총회의 사업, 즉 교회의 사역과 선교의 성공적인 수행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정치의 윤리는 권모술수의 세상적인 정치윤리나 혈연․ 지연 등의 인간적인 관계성을 중심하여 행해지는 인본적인 윤리가 아니라, 반드시 ‘사랑과 공의, 은혜와 진리’라는 하나님의 윤리라야 합니다. 따라서 평신도는 목회자의 동역자로서 잘못된 것은 조언하고 기도해 주는 동시에, 잘된 것은 온 마음을 합하여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동역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정치에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들이 개입됨으로써, 싸움과 분열이라는 고통과 수치를 드러낸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심(私心)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 가운데 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평신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윤리에 기초하여 교회정치를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호워드 그라임스는 다음과 같은 평신도의 왕권적 직능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Howard Grimes, The Rebirth of the Laity(Abingdon Press, 1958), pp.75-80. ① 교회의 생활과 방향을 결정하고 또 그 조직을 운영해 가는 교회행정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교회행정의 참여는 계급주의나 특권적인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섬김과 봉사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많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어찌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는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② 목회자의 동역자로서 다른 신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평신도의 목회적 심방, 병자 방문, 새 신자 방문, 가정예배와 주일예배를 준비하는 일,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일, 음식을 준비하는 일 등은 목회자의 사역을 보완하며, 공동체의 성장을 위한 소중한 직능입니다. 그 외에도 평신도들은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일시 귀국하였을 때, 적절하게 섬기고 돌보는 일 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교회밖에서의 평신도의 사역(역할)
평신도는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교회밖에서의 평신도의 사역은 바로 선교입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많은 정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교란 영혼구원이나 육체의 구원, 인간구원이나 사회구원으로 양분하여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구원과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다양한 봉사를 통하여 전인구원에 이르고, 더 나아가 세상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 곧 통전적 선교로 보고자 합니다. 이사무엘, op. cit., p.84. 비슷한 입장으로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넓은 의미의 선교의 개념을 세상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행동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인의 봉사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회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우리의 막대한 힘과 그리스도의 명령의 철저한 요구에 맞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J.R.W.Stott, 현대의 기독교 선교, 서정운역(대학기독교서회, 1992), p.47.) 교회내에서 평신도 사역은 예배, 연구, 봉사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 사역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계에 선포합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고, 복음의 세계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그의 다스림이 온 땅에 확장됩니다. 이 흩어짐은 첫째로, 평신도가 선교의 주역이 됨을 의미합니다. 평신도의 흩어짐은 세계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 되시고, 선교의 활동장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세상이 되며, 평신도는 하나님의 복음의 증거자 곧 선교의 주역들로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호켄다이크는 “평신도의 흩어짐은 하나님의 선교신학에 의하여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서술합니다. J. C. 호켄다이크, 흩어지는 교회, 이계준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4, pp.30-31.
둘째로, 흩어짐의 신학적 의미는 크레머가 말하는 네 가지 직종의 네 번째 사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말합니다. 평신도의 흩어짐은 ‘세상 속에서의 고난받는 종’ H. Kraemer, 평신도 신학과 교회 갱신, 유동식 역, 평신도 신학연구소, 1994., p.150. 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종’은 사회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전인(全人)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1) 복음의 전파 오늘날 교회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부분 선교지향적이라기보다는 기존체제 유지에 머물러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또한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되는 데 반해 교회는 이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므로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갱신되고 변형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장되는 것이 선교와 제자양육과 봉사를 목적으로 한 작은 공동체들의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J. Moltmann, The Invitation to an open Messianic Life-style Church (London : SCM, 1977), p.125. 루터, 모리비안, 웨슬리, 몰트만은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했고, 크레머는 “순수한 기독교적 세포조직”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형제됨”이라고 불렀습니다. UBF에는 ‘요회’ 혹은 ‘지파’ 등으로 부르는 작은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은준관 박사는 평신도의 선교구조를 “가족형 구조”라고 부릅니다. 은준관, 기독교 교육 현장론, 대한기독교출판사, p.264. 이것은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집단화되고 비인격화되는 사회적 소외 속에서 신앙적 연계와 삶의 공동체적 그룹을 만든다는 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족형 공동체는 평신도의 영적 성장과 신앙적 훈련을 제공하는 선교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윌리암스 콜린은 “평신도의 복음전파는 ‘영속적 봉사 선교구조’를 통하여 구현된다”고 합니다. Colin W. Williams, The Church(Philadelphia : Westminster, 1968), pp.154-155. 그는 교회가 세상을 향한 선교를 위하여 ‘영속적 봉사구조’를 체계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구조를 통해 평신도는 복음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선교는 교회가 갖는 본질적 속성입니다. 찰스 밴 엔겐은 그의 주저인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에서 교회의 선교적 속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선택이 아닌 필수요, 선교는 교회의 본질에서 분리된 것이거나 첨가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핵심적 본질이며, 그렇지 않는 교회는 실제로 교회가 아니다” Charles Van Engen, God's Missionary People, Grand Rapids ; Baker, 1991, p.30. 라고 설명했습니다.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깊이 인식하게 된 세계대회는 1966년 베를린 세계복음화대회부터 시작합니다. 빌리 그레엄은 개회 연설에서 “복음전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교회의 평신도로 하여금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Billy Graham, Why the Berlin Congress?, Minneapolis ; World Wide Pub, 1967, p.31. 그리고 제1,2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1973, 1989년)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중에 제2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 참석한 피트 하몬드는 평신도 사역을 위한 몇가지 제언을 하였습니다. 첫째로 오늘의 교회가 너무 유급 직원들에 의존한 데서 평신들의 역할이 부진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선교가 목회자나 전도자만의 전유물이 됨으로써 평신도가 그러한 사역에서 빠지게 된 문제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날의 교회구조가 평신도에게는 그들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이 단지 기도하는 것이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요, 순종하는 역할뿐임을 확신시키는데 성공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셋째로 교회의 99퍼센트나 차지하는 평신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사역에 불참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 세계복음화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은 비성경적이요 한쪽으로 치우친 차별적인 형태임을 주장하였습니다. J.D.Douglas, Proclaim Until He Comes(Minneapolis; World Wide Pub. Co., 1990), p.81. 제2차 로잔대회에서는 “우리는 평신도 사역을 격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낙담케 하는 일에 참여했던 것에 대해 깊이 회개한다”며 회개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세기 평신도 신학의 등장과 함께 평신도의 각성이 다양하게 일어났는데, 그중에 남미 복음주의 교회에서 로버트 스트라찬(Robert K. Strachan)을 중심으로 일어난 “심층전도”(Evangelism-in-Depth), 북미의 제임스 케네디(James Kennedy)의 전도폭발운동(Evangelism Explosion) 그리고 최근의 선교전략으로 “자비량 선교 또는 전문인선교” 등이 대표적인 복음주의 평신도 복음전파의 예일 것입니다. 심층전도는 1960년대 복음주의 평신도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구체적으로 남미 교회와 선교지를 중심으로 펼친 평신도 선교운동인데, 그 핵심내용은 전세계 복음화는 ‘오직 모든 평신도를 선교에 동원함에 있었습니다. 전도폭발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모든 평신도에게 적절한 전도훈련을 실시하여 실제로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는 평신도의 전도훈련프로그램입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이에서 생략하겠습니다.
2) 직업을 통한 사회봉사 평신도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계 속에 봉사자로서 나아갑니다. 특히 평신도는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가질 수 없는 평신도만이 위임받은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은준관, op. cit., p.268. 루터는 “직업이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계시하고 전달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에는 부모 됨, 법률가, 의사, 교사, 사회 사업가, 기술자, 사업가 등 모두를 포함합니다. 어떤 직업을 받았든지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자리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인 작가’, ‘기독인 예술가’, ‘기독인 의사’라는 말은 글을 통하여, 예술을 통하여, 의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이웃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직업을 통한 사회봉사는 평신도의 사도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직업의 전문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웃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직장은 평신도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말과 삶으로 증거할 수 있는 좋은 목장입니다. 그러므로 직업을 통해 섬기는 일들이, 기독교의 이상과 윤리와 가치관에 부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도전하는 세속주의․ 물질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직장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도록 하며, 부정․ 부패․ 불의가 행해지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장식, op. cit., p.66.
아울러 평신도는 “과제수행구조”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과제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Letty M. Russell, op. cit., p.66. 과제수행이란 ‘수재’, ‘화재’ ‘불의의 사고’ 등과 같이 수시로 일어나는 사회문제와 사건들을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앙과 봉사로 헌신하는 증거그룹과, 전문적인 자료와 방법을 제시하는 전문가그룹이 필요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제수행그룹은 계속적인 영성 및 전문성 훈련과, 문제에 대응할만한 준비를 수시로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사회구원의 참여 직업을 통한 세계 속의 참여는 개인구원에서 시작하여 반드시 사회구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 동안 교회와 신학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전혀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 양자택일의 논법으로 나아갔던 현실에서, 위의 전제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회구조를 크게 정치세계와 경제세계로 나누어서 이 구조의 구원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의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평신도가 어떻게 정치세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정치적 영역에 평신도의 참여를 인정하는 신학적 근거로는 국가와 모든 사회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Paul Abrecht, The Churches and Rapid Social Change(Garden City, New York : Doubleday & Company, 1961), p.90. 알덴 켈리는 정치참여의 정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Alden D. Kelley, Christianity and Political Responsibility(Philadelphia : Westminster, 1961), p.90. ① 소극적으로는 “교육과정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대중의 여론조성을 통해 권력자를 설득하는 일”입니다. ② 예언자적인 안목을 갖고 위정자들의 하는 일에 시시비비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③ 보다 적극적으로는 “비판적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비판적 개입이란 정치참여를 허용하되, 그 어떤 정치활동도 절대화될 수 없다는 비판정신 속에서 정치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평신도들의 정당참여가 허용되면서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어느 한 정당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Paul Abrecht, op. cit., p.91.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실현되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경제세계 속에 평신도가 참여하는 것은 정치참여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와 과정을 갖게 됩니다.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하면 ① 경제구조에서 보다 좋은 경영과 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갖도록 돕는 일과, ② 경제정책 결정시 사회적 차원도 고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익을 중요시하지만 동시에 분배의 측면도 중요시하며, 경제에 있어서도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치와 경제의 문제는 인간 개인의 문제와 함께 구조적인 문제도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사회구원의 참여에 있어서, 이상과 같은 개인의 참여뿐 아니라, 구조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들의 변화와 구조악의 해결,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의 변화와 구조악의 해결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평신도들은 사회 각 분야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변화되도록 도우며, 동시에 구조악이 제거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적 삶을 통해서, 복음의 증거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봉사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마치며
21세기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평신도의 사역을 필요로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세계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사역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99%를 차지하는 평신도를 일깨워 그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사역을 인식케 하여 온전히 이루도록 격려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또한 평신도들이 사회 다방면에서 그 역할을 다하게 함으로 복음전파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받을 때, 평신도는 지역교회의 성장을 위한 주요한 열쇠일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를 위한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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