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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오랜 습관에 대하여08.07.29 17:29
관리자HIT 169
천지만물과 억조창생을 지으시고 이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가진 절대적 권능과 우리의 왜소함을 생각할 때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기가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상식 수준에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을 거스르면서도 태연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룬 당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과거 수천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한번쯤은 신앙 상식 수준에서 이 주제를 다뤄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우선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하나님이 아닌 것들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니다. 많은 헌금이나 백일기도와 같은 정성을 부어넣으면 내게 필요한 복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이름도 기괴한 일천번제와 같은 행동이 대표적이다. 삼박자 축복이나 강청기도가 이와 같은 자판기 유형의 신앙을 만들어 내는 이론들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그리스도의 풍요에 참여하는 특권”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성도들이 누리는 궁극적인 복은 고사하고 이 땅위에서의 복이란 것도 자신이 노력한 바에 대해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부모의 헌금과 기도로 공부하지 않은 자식이 각종 시험을 통과하고, 상식과 법을 어기면서 얻게 된 사업의 성공을 주의 이름으로 자랑하는 간증집회를 열곤 한다.

하나님은 막대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데나 꼽아놓고 이것이 그라고 우길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이 분은 역사 속에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사랑하시고 분노하시고 후회하기도 하시는 인격체이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는 참으로 과감하게도 하나님을 무슨 막대기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이 재림한 하나님의 아들, 감람나무 혹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중 다른 일부는 하나님 보다 강대국에 의지하는 기도회를 감히 그의 이름으로 시청 앞뜰에서 개최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는 하나님께 드려야할 “첫 열매”를 담임목사에게 드려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 하나님을 자기들이 꼽아 놓은 막대기로 아는 처사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건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공동체라야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에게만 천국의 열쇠가 주어져 있다.

살아있는 인격체로서의 하나님

참으로 외람된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다. 그가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도 가능하다. 마치 어떤 장인의 품성이 그가 만든 도자기에 반영되는 것과도 같다.

모든 인격체가 그러하듯이 하나님에게도 일정한 성품과 이로 인한 습관이 있다. 가장 핵심적 성품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선언하고 계신다. 예컨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은 그가 명확하게 선언한 그의 성품이다. 그리고 이 성품은 일정한 습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므로 여기에서 그의 습관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루 이틀에 나타난 것이 아니고 수 천 년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난 습관이므로 파악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습관을 알게 되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며 기쁨이지만, 그의 습관을 알고 이를 거스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더욱 복이 있다.

어떤 인격체의 습관이 한 둘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습관도 자세히 살펴보면 한 둘이 아니다.  물론 습관이므로 반드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드시 그러하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품성에 그를 가두는 것이며 이는 무한하고 전능한 존재라는 인식과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습관을 어떤 특정한 일에서 나타낼지는 당신 자신의 마음이며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 여하튼 그러한 습관을 이해하면 많은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1 <내어버려두기>

시간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잘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은 내어버려두기다. 이것은 공의의 실현이며 인애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어버려둠을 당하는 인간 당사자에게는 비할 데 없는 저주이며 절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어버려두기를 당하는 인간 그 당사자는 보통 희희낙락하는 참으로 모순적인 모습이 연출되곤 한다.

내어버려두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유한성에 머물도록 방치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인간은 매우 유한하며 무능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반드시 파멸의 운명에 도달하게 되어있다. 유기적으로 살려고 섭취하는 음식물들이 그 자신의 몸에 불순물을 침전시켜 마침내 노화와 질병으로 삶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다. 안전과 복지를 위해 만든 공동체도 매개의 변증법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소외를 발생시키고 그 결과 스스로 붕괴하게 되어있다. 인간 스스로의 각성이나 깨달음으로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자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들어 올리려는 노력과도 같다. 그러므로 구원은 반드시 무한적 존재, 즉 신으로부터 온다. 그 신이 구원의 손길을 포기한 자에게 구원은 없다.

내어버려두기는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자들은 가끔씩 이렇게 불평하곤 한다. 왜 이 세상에서 악한 자가 더 성공합니까? 왜 선한 자가 고통을 당합니까? 이 질문에 가끔씩 몇몇 인간들이 헛된 대답을 준비한다. 예컨대 이 세상에서도 선한 자가 더 성공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몇몇 성공사례를 들어 이 입장을 강변한다.   이 답은 하나님의 답이 아니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은, 물론 이 지상에서 성공한 선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한 자가 그 자신의 모순으로 스스로 파멸로 달려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 악한 자를 처벌하려다 선한 자들까지 더 고통을 당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그 악함으로 벌을 받고, 선한 자는 그 선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만일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자라면 구원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에서의 행복이라면 유한한 시간에 얽매인 유한한 물질의 다소는 그저 쓰레기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2 <강퍅하게 만들기>

하나님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하는 자에게 스스로 더욱 강퍅하게 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물론 이러한 자도 겸손하게 될 수 있다. 마치 강대한 앗시리아의 왕이 한낱 허접한 식민지인인 요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한 것처럼…. 그러나 보통은 강한 경고를 듣고도 겸손해지지 않는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열 가지 재앙이 내려졌다. 물론 이 열 가지 재앙을 자연 재해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 재해로 해석한다고 해도 그 만큼 국력이 피폐해졌다는 점은 통치자로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고 국력을 회복할 때까지 한숨을 돌리는 기회를 갖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남은 군대를 이끌고 히브리족을 다시 노예로 삼기 위해 추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전멸하였다.  

이 강퍅한 자들은 멸망의 날이 코앞에 다가오더라도 결코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지 않는다.  도리어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자의 뺨을 치며 “하나님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고 꾸짖곤 한다. 설교 중에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의 실명을 들고 천국에 가보니 생명책에 이들의 이름이 없더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에게 역사하는 영은 거짓 영임이 분명하지만, 이들은 누가 강요해서라기보다 이 거짓 영의 역사를 즐기고 이로서 자신을 더욱 강퍅하게 만드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퍅하게 만들기는 스스로 교만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탄의 수단으로 성공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벌이다. 이 책벌의 과정은 우리 인간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은 보통 지금까지의 성공을 자신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경고하는 자를 벌하거나 멀리하고 아첨하는 자를 더욱 가까이 한다. 자신이 듣기 좋은 말은 진실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교만은 심해지고 착각도 심해진다.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이 사라지고, 개인 혹은 집단의 히스테리와 이데올로기가 그들을 사로잡는다.  

실패나 실수가 발생하면 도리어 자신들의 교만과 편집과 편견의 강도가 덜 강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극우적이거나 극좌적인 주장을 남발하다 보통선거에서 실패하면 자신이 잘못 생각해서 그렇게 되었다기보다 선거구민들이 어리석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하여 더욱 더 강한 이데올로기와 선전술로 자신을 무장하려든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의 파멸에 도달하고 만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3 <사랑하는 자를 채찍질하기>

하나님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사랑하는 자를 채찍질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아끼는 것이 모든 인격체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시되 조금 더 교훈을 첨가하여 갚으신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가 이 교훈을 매번 뼈 속에 깊이 새기고 마침내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금같이 나타나도록 만드신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다윗을 들 수 있다. 그는 많은 아내가 있었지만 또 다른 여자에게 욕정을 품었다. 자기 딴에는 은밀하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를 살해했으나 그 결과는 실로 무참하였다. 먼저 우리야의 아내에서 난 아들이 죽었다. 또 그의 큰 아들 암논이 그의 딸 다말을 범하였다가 그녀의 오빠 압살롬에게 살해당했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도저히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남의 여인 하나를 범하였으나 그의 아들 압살롬은 반란의 와중에 그의 후궁 전부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범하였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마도 다윗 다음으로 사랑하는 야곱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의 것이 되었을, 장자권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속였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배신과 속임의 연속이었다. 우선 그의 삼촌 라반이 품삯을 열 번이나 속였으며,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드라빔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의 열 아들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목숨으로 두 번 그를 속였으며, 마침내는 그 요셉에게 조차 속임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매번 그의 혈족에게서 속임을 당할 때 마다 아마도 야곱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한 일을 후회하였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이 숙명의 고리에서 그를 풀려나게 하리라 믿었고, 이것이 바로 얍복강의 사투가 발생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오랜 습관을 무시하고 싸구려 용서와 은혜를 남발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  이들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 기계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마치 더러운 때를 씻는 세탁기처럼, 그들이 원하는 때 그들의 동전 몇 푼을 넣으면 그들이 원하는 잘못만을 “양털처럼 희게” 씻어 준다고 속이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가 범한 그 죄로 인해 그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는 궁극적이고도 비교할 데가 없는 용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들일수록 더욱 강하게 훈계를 하신다. 잘못을 행하고도 하나님의 강력한 훈계를 얻지 못하는 자는 불행하다. 이미 내어버려둠을 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4 <낮은 자를 높이 들어 쓰시기>

하나님은 인간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자를 높이 들어 쓰시기를 좋아하신다. 물론 꼭 필요하시면 매우 교육을 잘 받은 자들도 쓰시곤 한다. 모세나 바울처럼 당 시대에 가장 뛰어난 교육을 받은 자들이 복음적 저술을 담당하기 위해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체로 그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불쌍한 자들을 활용하신다. 예수의 제자들이 가장 대표적이 사례이다. 어부, 세리, 무직자들, 무식자들, 그 출신도 수상한 자들이 제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인애 때문이다. 인애란 약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 중에서 가장 힘들게 사는 자녀 혹은 장애를 가진 자녀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모습과 유사하다. 물론 이미 잘 성장하여 좋은 직장을 잡아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들도 사랑하고 그들이 잘 커준 것에 대해 부모들은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은 남다르기 마련이다. 이는 마치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뒷모습과도 같다.

하나님이 낮은 자들을 높이 들어 쓰시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그래도 겸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터무니없는 교만은 역사를 통해 잘 나타나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나 진시황의 교만은 그래도 남들이 보기에 이유라도 있지만, 소소한 범인들이 약간의 지위나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교만을 떠는 광경은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이들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사회적 패자나 약자의 변명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 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지식과 지위와 재물로 교만하게 된 자들은 자갈로 가득 찬 물통과 같다. 이러한 물통으로는 저 광야를 횡단하기에 필요한 물을 채울 수 없다. 비록 작거나 볼품이 없더라도 어떻든 안이 비어있는 물통이라야 생명수를 가득 채울 수 있다. 물론 모든 낮은 자들이 다 겸손한 것은 아니다. 낮은 자들 중에서 도리어 독한 마음과 증오와 편견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더러 발견되고 있다. 그러므로 높은 자든 낮은 자든 겸손한 자 혹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대체로 낮은 곳에 처한 자들이 더욱 겸손하다.

겸손한 자의 궁극적 사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본질상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성부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이 바로 그 자신의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리고 자신을 비워 그 인간들과 만물들의 종이 되셨다. 예컨대, 고귀한 인간이 그가 사랑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대상인 바퀴벌레가 되었다! 이 이상의 겸손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따라 비록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과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채워줄 것을 아직도 많이 가지고 계시며, 사람들은 그의 그릇 안에 채워진 것들로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그야말로 하늘에서의 복뿐만 아니라 땅에서의 복도 마음껏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용 : 뉴스앤조이, 백종국/ 경상대학교 교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내가 목마르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스크랩] 예수!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요?

2007.12.08 20:16 |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6278 주소복사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복 2

 

예수를 영접하고 나면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가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막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가 아니라 그 신분이 얼마나 영화롭고 영광된 것인지를 알려 주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선 하나님과 같이 죄가 전혀 없어야 하는데 우리의 신분을 그렇게까지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언제라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 이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도 포함된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국가를 치리할 때 정해진 국법에 의해 치리하듯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公義의 법으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치리하신다.

이 하나님의 법으론 죄를 지은 자는 절대 하나님께 나올 수가 없다. 세상 육신의 몸으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기 때문이며 죽음 이후엔 하나님이 만나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빛에 나갈 수 없듯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라 하신다.

그런데 이 무서운 죄를 사하여 주시되 완전하게 하나님과 같이 죄가 하나도 없는 완전한 용서를 해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죄가 전혀 없는 나!

천사들과 마귀와 그 종자들과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 사람들이 너무도 부러워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 한상에 먹고 마시며 부모님의 침실에까지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듯이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집인 천국이 나의 집이며 하나님의 영화로움이 나의 것이고 영원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그 모든 것을 마음 것 누리며 영원을 살게 될 나!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지어졌다 하신다.

그런데 사람의 조상 아담 할아버지가 하나님과의 약속한 약속을 어기고 죄를 지으므로 그 약속에 의해 당신만이 아니라 그 후손인 모든 사람들도 그 죄의 값을 대물림하여 영혼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 아담의 후손은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죄 때문에 영혼이 죽어 하나님 앞에 나갈 수도 하나님과 함께 살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온 간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땅에서 우리의 천수를 다하고 나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 하신다.


하나님께선 오늘도 교회를 통해서 그곳은 절대 가서는 안 되는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곳이라 하신다.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그곳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뜨겁고 괴로운 곳인데 그곳에는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도 죽지도 못하고 쉼 없이 계속해서 그 고통을 받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라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담 하나로 말미암아 지옥 불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이곳에서 구원받을 한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들 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라고 전하는 그 말이다.


하나님은 죄를 사해 죽은 자도 살려 주는 권세도 가지고 계시는데 당신 마음대로가 아닌 스스로 정해 놓으신 공의의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시다. 그것은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아담 할아버지가 지은 죄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지은 죄들을 용서하기 위해선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그것은 죄 없는 사람이 대신 그 죄의 값을 지고 그 벌을 받으면 되는 길이다.


하지만 아담의 후손으로선 이미 죄의 대물림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사람으로선 죄 없는 자가 아무도 없어 하나님께서 부득불 한 방법을 택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죄 없으신 아들 하나님인 예수를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서 그 죄의 값을 대신 지워 대속시키면 되는 길인데 바로 이 일을 아들 예수에게 부탁하여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결단하신 일이 이천년 전 아들 예수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 예루살렘에서 아들 예수에게 세상 죄를 대신지고 죽게 하신 십자가 구원사건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하시므로 내가 죽어야 할 나의 죄를 대속시켜 나를 살리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나의 죄를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과 같은 상태로까지 완전하게 사하여 주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라고 전하는 그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천하보다 귀하다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들 예수를 대속 물로 주시기까지 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신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이 일을 믿기만 하면 그가 누구였든 아담이 죄 짓기 이전의 죄 없는 상태로 회복시켜 주어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이천년이 지난 오늘도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시한이 있다 경고하신다.

구원의 때가 지나면 세상심판이 있을 것과 그 때는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다 해도 예수를 믿으면 이제는 용서함 받는 길을 마련하셨는데도 그 길을 무시하고 외면했기 때문이라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의 나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은 이것을 물으신다. 네 죄의 문제는 어찌되었냐고?


하나님이 주시는 두 번째 복은 바로 나를 구원하시되 이 엄청난 사랑, 아들 예수를 주시기까지 하여 나의 죄를 완전히 사해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 자녀의 신분을 이렇게까지 회복시키셨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예수)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17.○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 16~18절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구약성경 이사야 1장 18절

배경음악 : 나운영 작곡 시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
요4:3-9
1. 두 사람의 만남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행로에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아 계시던 예수님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낮 12시쯤 되어 우물로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우물 가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목마른 여인과 피곤하신 예수님이 서로 만났습니다. 물이 필요한 여인과 물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 우물 가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몇 년 전 MBC를 통해서 부산의 박희선씨를 만났고 최근에는 KBS를 통해서 부천의 박범순씨를 만났습니다. 여기 우물 가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습니다. 여기 한 여자는 물이 필요한 여자였습니다. 갈한 몸과 영혼을 채워 줄 물이 필요한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날마다 물을 길러 왔고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고 그리고 예배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 쌀이 필요한 사람, 약이 필요한 사람, 직업이 필요한 사람, 남편이 필요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이 청송 교도소로 간 이후 두 아들을 데리고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불행한 여자도 있습니다. 아내가 집을 나간 후 두 딸을 데리고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고달픈 남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갈한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지금 우물 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행로에 피곤하여 그대로 주저 앉아 계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요4:6). 여기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또한 목이 갈해서 물을 마시고 싶어 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7).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피곤하실 필요도 없고 목이 갈할 필요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40:38절에 보면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지금 피곤해 지셨고 목이 갈하게 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이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목마른 가를 직접 느끼시고 직접 경험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피곤해 지셨고 친히 목마르시게 되셨습니다. 목마른 여인을 깊이 만나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목마르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2. 두 사람의 대화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피곤한 사람은 말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사람과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말을 시작했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사실은 그 여자가 예수님을 향해서 "물을 좀 달라"고 해야 했었는데 정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향해서 "물을 좀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목이 마르시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의 목마른 상태를 지적하여 보여 주기 위해서 "물 좀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여자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매우 퉁명스러웠습니다.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투로 대답을 했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게 생긴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다 달라고 하시네."
그러나 예수님은 친절하게 두 번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여인이 만일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여인과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당신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요. 그러면 내가 여인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요." 여기서 예수님은 3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물 물 보다도 남편 다섯 보다도 더 귀중하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1:18, 12:2-3, 55:1,-3. 둘째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암시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물은 달라고 요청해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요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생수" 라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여자는 여전히 따지는 투로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 시길래, 나에게 생수를 주실 수가 있다는 말이요? 당신이 이 우물을 판 야곱 보다 더 큰 사람이란 말이요?"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는 반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거부를 당하시면서도 계속해서 세 번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 번에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 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욕구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이 우물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마음에 이상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를 구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말의 뜻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우물 물이건 생수건 간에 그것을 구하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 여자는 이제 할 말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에 하신 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 즉 "물 좀 달라"는 말을 이 여자가 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이제 네 번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대화 라기 보다는 분부의 말씀이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여자는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에 너무나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숨겨 오던 사실을 그대로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실 직고 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숨은 것들을 그대로 다 들어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숨은 죄악을 품은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선물인 영혼의 생수를 쏟아 부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여자의 마음을 몽땅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자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런데 주님. 메시야가 곧 오신다고 했는데 메시야가 언제쯤 오시게 됩니까?" 예수님은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메시야임을 그 여자에게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할 때 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말하는 내가 바로 메시야니라." 이 여자는 이제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생명의 물을 부어 주시는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 여자의 가슴과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자기 몸과 영혼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생명의 강물이 온 몸에 출렁거림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평안과 감사가 넘쳐 흘렀습니다.
그 여자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자기에게 생수를 주신 주님을 큰 소리로 증거했습니다. "나를 좀 보시요. 나는 메시야를 만났소. 그 분은 나를 변화시켜 주셨소. 내 마음에 강물이 넘칩니다. 여러분들도 메시야를 만나 보시요." 생수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 넘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의 행복한 만남을 보았습니다. 축복된 만남을 보았습니다.
3. 오늘의 만남
이미 말씀드린대로 저는 몇 년 전 MBC를 통해서 부산의 박희선씨를 만났고 최근에는 KBS를 통해서 부천의 박범순씨를 만났습니다. 박희선씨는 남편이 청송 교도소로 간 이후 두 아들을 데리고 너무나 어렵게 살아가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격려의 편지와 격려금 얼마를 보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를 전혀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절망과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편지가 오가며 그 여자는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박희선씨는 내가 소개한 부산 개금교회에 다니면서 3년이 지난 후에는 예수를 믿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 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존경하옵는 목사님. 지금 저는 말로서 표현 못할 만큼 목사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이렇게 못난 저를 용기와 희망과 웃음을 주신 사랑하는 목사님, 진정으로 큰 소리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목사님의 인연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지난 주일 10월 19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따르지는 못하지만 항상 죄사함 속에 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길 주장합니다. 개금교회 박성호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며 김명혁 목사님을 제일 먼저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축하를 해 주셨고 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소리 없이 흘렀습니다. 목사님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마냥 즐겁고 기뻐서 자랑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주일이 기다려지며 목사님 말씀 받자올 때 진정으로 편안함을 얻는 것은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1997년 10월 20일 부산에서 박희선 올림."
저는 또 KBS를 통해서 박범순씨와 그의 두 딸을 만났습니다. 그렇게도 불행하고 가난한 환경 가운데서 그렇게도 진실하고 선하고 밝게 살아온 부녀간의 이야기에 접하고 저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박범순씨와 그의 두 딸은 교회라고는 평생에 한번도 가 본 일이 없었습니다. 박범순씨는 강변교회에 세번 참석했습니다. 지난 주일 (5월 10일)에는 박범순씨가 은영이와 혜영이와 함께 우리 강변교회에 왔습니다. 혜영이는 평생에 교회에 처음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예배 후 점심을 먹고 내가 인도하는 새 신자 성경공부에 세 부녀가 참여했습니다. 다른 11명과 함께 세 부녀는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혜영이가 대답을 잘 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마친 다음 세 부녀는 내 방에서 두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박범순씨는 많은 생각과 주저 끝에 마음을 열고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것이었습니다. "14년 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털어놓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저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만나고 서로 알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방법으로 우리가 서로 만나게 하시며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자기 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인생은 목마른 존재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고 피곤합니다. 때로는 잘못 된 길로 걸어가기도 합니다. 정욕과 죄악의 길로 빠져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 곁에 와서 기다리십니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곁에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생수를 마시게 하시려고 우리 곁에 와서 말을 건네십니다. 말도 하기 싫어하는 우리들을 참으시며 우리와 대화를 하시려고 하십니다.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는 우리들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 이제 예수님에게 어떤 자세를 취하시겠습니까? 여전히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숨은 것들을 고백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도 이 생수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만나 주시고 채워 주시는 예수님 합신1998.5.26.
요4:3-19
저는 요사이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여덟번째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설교는 아무리 많이 해도 좋고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만나 주시고 채워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1. 두 사람의 만남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행로에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아 계시던 예수님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낮 12시쯤 되어 우물로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우물 가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목마른 여인과 피곤하신 예수님이 서로 만났습니다. 물이 필요한 여인과 물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 우물 가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 우물 가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습니다. 여기 한 여자는 물이 필요한 여자였습니다. 갈한 몸과 영혼을 채워 줄 물이 필요한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날마다 물을 길러 왔고,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고, 그리고 예배에 대한 갈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갈한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지금 우물 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행로에 피곤하여 그대로 주저 앉아 계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요4:6). 여기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또한 목이 갈해서 물을 마시고 싶어 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7).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피곤하실 필요도 없고 목이 갈할 필요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사 40:38절에 보면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지금 피곤해 지셨고 목이 갈하게 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이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목이 마른 가를 직접 느끼시고 직접 경험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피곤해 지셨고 친히 목마르시게 되셨습니다. 목마른 여인을 깊이 만나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목마르셨습니다.
2. 두 사람의 대화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만남에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피곤한 사람은 말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말을 시작했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사실은 그 여자가 예수님을 향해서 "물을 좀 달라"고 해야 했었는데 정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향해서 "물을 좀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목이 마르시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의 목마른 상태를 지적하여 보여 주기 위해서 "물 좀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여자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매우 퉁명스러웠습니다.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투로 대답을 했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게 생긴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다 달라고 하시네."
그러나 예수님은 친절하게 두 번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여인이 만일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여인과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당신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요. 그러면 내가 여인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요." 여기서 예수님은 3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물 물 보다도 남편 다섯 보다도 더 귀중하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둘째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암시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물은 달라고 요청해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요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생수" 라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여자는 여전히 따지는 투로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 시길래, 나에게 생수를 주실 수가 있다는 말이요? 이 우물을 판 야곱 보다 더 큰 사람이란 말이요?"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반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심리상태입니다.
예수님은 거부를 당하시면서도 계속해서 세 번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 번에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 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욕구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이 우물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마음에 이상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를 구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말의 뜻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우물 물이건 생수건 간에 그것을 구하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 여자는 이제 할 말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에 하신 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을 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이제 네 번째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대화 라기 보다는 분부의 말씀이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여자는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에 너무나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숨겨 오던 사실을 그대로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실 직고 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숨은 것들을 그대로 다 들어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숨은 죄악을 품은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선물인 영혼의 생수를 쏟아 부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여자의 마음을 몽땅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자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런데 주님. 메시야가 곧 오신다고 했는데 메시야가 언제쯤 오시게 됩니까?" 예수님은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메시야임을 그 여자에게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할 때 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말하는 내가 바로 메시야니라." 이 여자는 이제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생명의 물을 부어 주시는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 여자의 가슴과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자기 몸과 영혼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생명의 강물이 온 몸에 출렁거림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평안과 감사가 넘쳐 흘렀습니다.
그 여자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자기에게 생수를 주신 주님을 큰 소리로 증거했습니다. "나를 좀 보시요. 나는 메시야를 만났소. 그 분은 나를 변화시켜 주셨소. 내 마음에 강물이 넘칩니다. 여러분들도 메시야를 만나 보시요." 생수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 넘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의 행복한 만남, 축복된 만남을 보았습니다.
3. 오늘의 만남
저는 몇 년 전 MBC를 통해서 부산의 박희선씨를 만났고 최근에는 KBS를 통해서 부천의 박범순씨를 만났습니다. 박희선씨는 남편이 청송 교도소로 간 이후 두 아들을 데리고 너무나 어렵게 살아가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격려의 편지와 격려금 얼마를 보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를 전혀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절망과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편지가 오가며 그 여자는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박희선씨는 내가 소개한 부산 개금교회에 다니면서 3년이 지난 후에는 예수를 믿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 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존경하옵는 목사님. 지금 저는 말로서 표현 못할 만큼 목사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이렇게 못난 저를 용기와 희망과 웃음을 주신 사랑하는 목사님, 진정으로 큰 소리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목사님의 인연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지난 주일 10월 19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따르지는 못하지만 항상 죄사함 속에 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길 주장합니다. 개금교회 박성호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며 김명혁 목사님을 제일 먼저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축하를 해 주셨고 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소리 없이 흘렀습니다. 목사님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마냥 즐겁고 기뻐서 자랑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주일이 기다려지며 목사님 말씀 받자올 때 진정으로 편안함을 얻는 것은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1997년 10월 20일 부산에서 박희선 올림."
저는 또 최근에 KBS를 통해서 박범순씨와 그의 두 딸을 만났습니다. 그렇게도 불행하고 가난한 환경 가운데서 그렇게도 진실하고 선하고 밝게 살아온 부녀간의 이야기에 접하고 저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박범순씨가 중동에서 4년간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아내는 집을 나갔고 다섯 살 난 딸과 일곱 살 난 딸만 남아 있었습니다. 박범순씨는 뚜 딸을 키우기 위해서 모든 희생과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암에 걸려서 항암 치료를 9번씩이나 받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가난과 질병과 싸우면서 재혼의 권유도 뿌리치고 두 딸을 장하게 키웠습니다. 두 딸은 극심한 가난과 아픔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진실하고 착하게 자라면서 거의 매년 반에서는 반장을 하며 모범생으로 자랐습니다. 박범순씨와 그의 두 딸은 교회라고는 평생에 한번도 가 본 일이 없었습니다. 박범순씨는 강변교회에 네번 참석했습니다. 지난5월 10일 주일에는 박범순씨가 두 딸을 데리고 강변교회에 왔습니다. 예배 후 점심을 먹고 내가 인도하는 새 신자 성경공부에 세 부녀가 참여했습니다. 세 부녀는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마친 다음 세 부녀는 내 방에서 두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박범순씨는 많은 생각과 주저 끝에 마음을 열고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것이었습니다. "14년 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털어놓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저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만나고 서로 알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방법으로 우리가 서로 만나게 하시며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자기 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24일에는 세 부녀가 함께 강변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인생은 목마른 존재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엘리야도 목이 마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고 피곤합니다. 때로는 잘못 된 길로 걸어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낙심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 곁에 와서 기다리십니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곁에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생수를 마시게 하시려고 우리 곁에 와서 말을 건네십니다. 말도 하기 싫어하는 우리들을 참으시며 우리와 대화를 하시려고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자처럼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는 우리들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처럼 죽고 싶다고 쓰러져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면 물을 먹여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제 우리들이 어떤 모습을 취하여야 하겠습니까? 주님 앞에 겸손하고 진실하게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주님, 나에게도 이 생수를 주시옵소서! 내 영혼을 생수로 채우시옵소서. 그리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목마른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생수를 나누어 주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만나 주시고 채워 주시고 그리고 생수를 공급하는 공수원들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께 효도하신 예수님"
눅2:51-52
오늘은 어머니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어머니께 효도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효도가 무엇입니까? 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까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가 효도라고 간단하게 정의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입니까? 유교의 전통은 부모님에 대한 예절을 잘 지키는 것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부모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름 석자도 함부로 부르지 못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는 묘를 잘 만들어 드려야 하고 제사를 잘 지내야 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마음 보다는 예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의 효도는 그 방식이 좀 달랐습니다. 부모에 대한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기 보다는 부모님이 잘 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부모님의 영혼이 잘되고 부모님의 몸이 잘 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많은 고통과 아픔을 드린 불효 자식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 보면 그 모든 것이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그 실례들을 찾아보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잉태의 사건을 통해서 효도
예수님은 어머니 몸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에게 많은 고민과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천사의 통고를 받는 순간 처녀 마리아는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그러나 천사의 통고를 들으면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예수님은 어머니 몸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어머니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만드는 아들이 있다면 그런 아들은 참으로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아들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효도했습니다. 전영신 권사님도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효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복된 어머니로 만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보는 순간 큰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 중에 있는 아이도 복이 있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2,45).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로 하여금 믿음의 여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2.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므로 효도
예수님이 12살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소년 예수님이 유월절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내려 오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부모는 그것도 알지 못하고 하룻 길을 내려 가다가 소년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부모는 사흘 후에야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만났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소년 예수를 만나자 마자 그를 향해서 이렇게 꾸중을 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 이 때도 소년 예수는 어머니에게 근심과 걱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때 소년 예수님은 어머니를 향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눅2:49). 어머니 마리아가 처음에는 좀 못 마땅하고 섭섭하게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소년 예수의 말의 깊은 뜻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2:51). 소년 예수는 어머니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로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효도를 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불효 막심한 자식입니다. 만 11살 때 어머니의 곁을 떠난 이후어머니로 하여금 평생토록 맏아들을 보고 싶어하며 외롭고 가슴 아프게 살게 한 것을 생각하면 저는 참으로 불효한 자식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북한에 계시는 어머니로부터 편지 한장이 날아 왔습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너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이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의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 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저는 어머니에게 불효 막심한 자식입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보고픔과 슬픔과 아픔을 심어 놓은 불효 자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아마 어머니는 나를 생각하면서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확고 부동한 믿음을 보시고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린 것이 주일을 성수하며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고 싶어서 엄마 곁을 떠났단 말인가?" "결국 미국에까지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석사 학위까지 받았는가?" 아마 어머니는 저를 생각하고 제 사진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남편은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했고, 아들은 신앙 때문에 어머니 곁을 떠난 사실을 생각하며 몸과 마음은 아프고 슬펐을지라도 어머니의 영혼은 하나님만을 그리고 천국만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어머니를 위한 효도였다고 억지로 생각을 해 봅니다.
3. 소년 시절에 순종하여 받드시므로 효도
예수님은 영적으로만 효도하신 것이 아니고 육적으로도 어머니에게 효도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소년 예수님은 고향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순종하며 부모를 받드러 섬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섬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순종하면서 섬겼다는 것입니다. 효도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잠시 뿐이었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께 순종했습니다. 어머니가 하라는 것은 무엇이나 잘 했습니다.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 일찍 일어났고 방 청소를 하라고 하면 방 청소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하라고 하지 않는 것까지 미리 알아서 하기도 했습니다. 제 여동생은 어머니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저는 아주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4 자녀들 중에서 저를 제일 좋아하시고 저를 제일 사랑하셨습니다. 효도는 순종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무엇보다 순종입니다.
4.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를 만드시므로 효도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행하신 이적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떻게 하시게 되었습니까? 어머니의 요청으로 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요2:3). 이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염려하지 마십시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머니는 다시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결국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처음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적은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나타낸 중요한 이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하나의 효도의 행위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5. 십자가 상에서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시므로 효도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3번째로 하신 말씀이 어머니를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어머니를 극진히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남은 생애를 염려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남은 생애를 주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저는 어머니를 누구에게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마다 어머니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곤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어머니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어머니의 몸을 축복하시옵소서!" 최근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땅에 계시든지 하늘 나라에 계시든지 어머니를 축복하시옵소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들에게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할 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다. 부모님께 효도하십시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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