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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11/20
 

주의! 이 글은 꽤나 잔혹한 형벌, 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니 노약자, 임산부는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성의 말살, 그 가장 끝에 위치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고문입니다. 고문은 고문하는 대상을 인간으로 보지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문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알려지기로는) 바로 중세시대입니다. 신 아래 인간, 그러기에 신의 이름으로 온갖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으니까요. 물론 다른 시대에도 포악한 지배자가 나타난 시기에 온갖 잔인한 고문들이 있어왔지만 상대적으로 짧았던 반면 종교는 쉽게 꺼지지 않는 불처럼 시대를 태웠으니까 말입니다.

횡성수설, 헛소리를 그만하고 어쨌든 지금까지 만들어진(중세시대를 포함해서) 고문기구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철의 여인(Iron Maiden)



중세시대 고문기구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사람 몸에 딱맞는 크기로 제작된 관에 그 내부는 철침으로 가득 박혀 있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으며 뭄이 닫히는 순간 온몸에 침이 박히며, 출혈과다로 서서히 죽게 됩니다. 처음에는 저렇게 관에 여인의 형상이 붙은게 아닌 단순 캐비넷의 형태였습니다. 그러다 후일 의인화되면서 마리아(예수의 어머니) 형상을 따 'iron maiden'이름이 붙게 되었다.


아이언 매이든의 특징이라면 구속과 함께 고통을 가한다는 것.



Heretic's Fork



아이언 매이든은 상당히 익숙한 것이였다면 이것은 처음 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더구나 어떤 용도인지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럼 실제 어떻게 사용되는지 볼까요?


보는 바와 같이 목을 채운 상태에서 턱아래와 가슴쪽에 괴어 고정시킵니다. 저 상태에서는 고개를 절대 숙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의 목을 최대 한계로 든 상태에서 고정하기 때문에 날카로운 쪽에 계속 찔려있는 상태가 됩니다.




Judas Chair


중세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고문 도구입니다. 이름 그대로 보자면 '유다 의자'입니다. 가롯 유다를 뜻합니다. 기독교에서 유다는 배덕자를 뜻합니다.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긴 인물로 묘사됩니다. 대충 어떤 느낌으로 지어진 이름인지 아시겠지요?

용도는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만 좀 더 설명을 드리자면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 뾰족한 부분에 대상자의 항문, 혹은 질이 위치하도록 앉힙니다. 대상자의 몸을 묶은 상태에서 줄을 서서히 풀면 그 무게에 의해 서서히 파고들게 되는 꽤나 잔혹한 형벌입니다.


형벌을 가하는 모습이 그림으로도 남아 있을 정도로 꽤 유명한 고문기구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Impale, 그러니까 꼬챙이에 꿰어 죽였다고 전해지는 드라큘라 백작도 사실 이와같은 고문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Judas Chair가 없었다 뿐이지 가하는 고통의 형태는 비슷한 편입니다.




Intestinal crank


그림으로 보기만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intestinal 즉 내부장기를 crank 끌어올리는 기구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채로 배를 가르고 장기를 묶은 상태에서 회전시키면 장기라 끌려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고문이라기 보다는 고통스럽게 죽이는 도구라고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Rack


런던 탑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 rack 고문기구입니다. 사지를 결박한 상태에서 끈을 잡아당겨 늘어뜨리는 것으로 가혹하게는 사지가 뜯겨나가게 되는 고문기구입니다. 팔다리를?엄청난 힘으로 잡아당긴다고 생각해 보시길...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고문기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Pear of Anguish(Choke Pear)


고통의 배, 절명의 배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기괴한 모양의 고문기구는 어떻게 쓰이는 것일까요? 그냥 단순히 모양만 봐서는 그 용도를 쉽게 짐작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Vaginal Pear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 고문도구는 원래 입에 넣어 구속하는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항문 혹은 질에 꽂은 다음 손잡이를 돌리면 들어간 부분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가학적이며, 성적인 매우 악독한 기구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모든 고문기구가 다 그렇지만).

인간의 잔혼학 상상력에 치가 떨리는 물건입니다. 실제 변태적인 지배자들이 즐겨 썼을 법한 물건입니다.



Breaking Wheel


역시 중세 시대를 대표하는 고문기구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어떤 기계적 메카니즘에 의한 것이 아닌, 마차 바퀴같은 것에 사람의 사지를 결박하고 휠 사이로 쇠로된 막대기나 망치로 내리쳐 뼈를 부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기구 자체의 특성보다는 이 휠이 갖는 공포적인 상징성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문은 정말 비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이 가져야할 존엄성을 깡그리 말살시키는 행위, 인류에게 없어져야할 절대악이나 마찬가지이겠지요.


reference
http://en.wikipedia.org/wiki/Pear_of_Anguish
http://www.visualstatistics.net/East-West/Witch%20Trials/Witch%20Trials.htm
http://www.borndigital.com/wheeling.htm

사영리-에니메이션
http://www.jesusinside.pe.kr/law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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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百濟, B.C 18~A.D660 , 678년간, 총31대)

2007.08.24 02:37 | 역사 의 진실 | jabiryang

http://kr.blog.yahoo.com/jabiryang/5944 주소복사

백제시대(百濟, B.C 18~A.D660 , 678년간, 총31대)
이연표는 현재는 없어진 블로그 http://blog.naver.com/jinbok215.do 에서 복사 한것입니다.

단순한 대왕 연표이며 데이타는 추후 보강할것입니다.
본 연표에 의하여 앞으로 자세한 백제사를 규명할가 합니다.
관심있는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백제사는 고려사와 함께 역사적 사실을 빩혀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변국과의 국제적 역사성이 날로 중요시 되고 있음을 비추어볼때 백제사야 말로 대외적 부분에 국한한다면 삼한역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감히 사견을 붙입니다.

특히 한반도의 남서부 현재의 호남지역 또는 서부경남 지역의 백제사를 이야기 하고 십습니다.
왜 와의 관계나 해상관련 역사성으로 볼때 이지역의 자료를 발굴할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재미있는 야사에서 부터 이야기 꺼리를 포함하는 것들을 국한하지 않고 다룰것입니다.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온조왕(溫祚, ?~28)
B.C 18~A.D 29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 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2
다루왕(多婁, ?~77)
28~77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 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3
기루왕(己婁, ?~128)
77~128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왕(蓋婁, ?~166)
128~166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5
초고왕(肖古, ?~214)
166~214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6
구수왕(仇首, ?~234)
214~234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 수왕.

7
사반왕(沙泮)
234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8
고이왕(古爾, ?~286)
234~286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9
책계왕(責稽, ?~298)
286~298
고이왕 아들.

10
분서왕(汾西, ?)
298~304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11
비류왕(比流, ?~344)
304~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12
설왕( ,?~346)
344~346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 ?~375)
346~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14
근구수왕(近仇首, ?~384)
375~384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많음.

15
침류왕(枕流, ?~385)
384~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16
진사왕(辰斯, ?~392)
385~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 다가 병사함.

17
아신왕(阿莘, ?~405)
392~405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18
전지왕(琠支, ?~420)
405~420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 ?~427)
420~427
전지왕의 맏아들

20
비유왕(毘有, ?)
427~454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21
개로왕(蓋鹵, ?~475)
455~475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
문주왕(文周, ?~477)
475~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23
삼근왕(三斤, ?)
477~479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 여금 토평하게함.

24
동성왕(東城, ?~501)
479~501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
무령왕(武寧, ?~523)
501~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26
성왕(聖, ?~554)
523~554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 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27
위덕왕(威德, ?~598)
554~598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28
혜왕(惠, ?~599)
598~599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29
법왕(法, ?)
599~600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 을 착수함.

30
무왕(武, ?~641)
600~641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 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31
의자왕(義慈, ?~660)
641~660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그때그시절 사진모음

  

            1944년 서울 삼호 사진관 세발 자전거와 아이
 
    
            1946년 부산 교외 초등학생 모습

    
            1948년 광주 모습

    
            1951년 서울 마포종점 주변 모습
    
            1959년 서울 뚝섬 한강 나루터 모습
 
    
            1960년 대구 열차촌 주택가 모습
 
    
            1965년 부산 영도 주택가 모습
 
    
            1965년 서울 거리 모습
    
            1966년 서울 북한산 아래 초가집 모습
    
            1967년 서울 창신동 기와집 주택가 모습
    
            1968년 서울 양평동 나루터 시민들과 학생들이 줄서 있다
    
            1969년 서울 시민 자전거 배달원들 모습
    
            1969년 서울 원남동 손수레 할머니와 아저씨 모습 도로 한가운데 전차 철로도 보인다

 

지나간 사진들은 Neil Mishalov
한국의 주둔했던 미군에 의해 촬영된 것들입니다.
우리가 1950-60년대 옛 사진을 대개 흑백사진을 통해 보게 되는데
흑백 사진과는 달리 생생한 컬러로 촬영되어 있어서
그 시절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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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기에 여념이 없는 농부들(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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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족의 단란한 한 때(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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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어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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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주 가무를 즐기던 할머니들, 손만 뻗으면 바로 춤이다.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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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골목 풍경` 이 시절만 해도 애를 없고 다니던 사람이 많았다.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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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피서, 옷을 `훌러덩 벗겨 놔도 창피함이 없었던시절
    그냥 시원하게 놀면 장땡이다.(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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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초가집 풍경(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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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시장 길 노점 요즘처럼 포장 노점이 아니라 
    초라한 인력거 위에서 빵을 굽고 있다.(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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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의 가을 추수, 벼를 탈곡하고 볏집을 묶는 아낙(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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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울역, 1960년대는 새마을운동으로 일환으로 마을 길

    정비 울역이 있었다.(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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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게에 풀을 지고 가는 농부, 소에게 풀을 주거나 퇴비 용도로 쓰임(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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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후반의 서울 명동거리-서울의 신사 숙녀만 다녔던 거리
   사람들의 옷 차림에 잔뜩 무게감이 실려 있다.(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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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우시장, 시장이라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갓쓴 노인,

    핫바지 저고리 의상을 갖춘 모습
    말뚝에 소를 매어놓고 흥정하는 모습이 그 시대를 잠작케 한다.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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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든게 초토화된 시절 오직 운반수 단은

   소가 끄는 구루마였다.(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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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대의 여름 개울가-아주머니는 빨래하고
   아이들은 민물고기가 잡는 모습이 인상적이다.(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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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낙들의 한양땅 나들이, 한복 복장에
   머리를 딴 여인들의 모습이 요즘과 다른 모습(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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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님의 행차
   여렸을 적에 할아버지의 긴 담뱃대 긴 수염 봉초가 생각난다.(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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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의 큰절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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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의 행차(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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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마를 끌고가는 촌부(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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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에 오물 뿌리러 가는 촌부(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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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인(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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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언덕길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동네 어르신들, 대개
   모자나 갓을 쓴 모습이 이채롭다.(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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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도시 외곽 지역 골목안 풍경(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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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남자아이들-대개 까까머리거나
   코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녀석들이 많았다. (1969년)

-= IMAGE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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鷄林은 인도에 있었다.

송에서 고려를 다녀간 사신들은 고려에 관한 관찰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러나 온전한 형태로 남이 있는 것은 서긍의 [고려도경]이 유일하다. 손목의 [계림유사]는 "고려방언"은 남아 있는데 그 외의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외는 무명씨의 [계림지]가 있다. 이 마지막 [계림지]에는 모두 10 칙의 내용이 남아 있다.그 중에서 3 개의 항목은 불교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 첫번 째 것의 내용은 불교 성지와 관련되어 있다.
"구산(龜山)에 불감(佛龕)이 있다. 숲과 나무가 무성한 곳익다. 전하는 말로는 나한삼장(羅漢三藏)이 표교를 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양치질을 하고 땅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었더니 나무에서 맑은 물이 여기에 도착했다. 그래서 청천국(淸泉國) 사람들이 이곳을 불법이 처음 흥하게 된 곳이라 하여 가장 존중하고 받드는 곳이다." 물론 반도에 이런 곳은 없다. 따라서 [계림지]를 쓴 사신이 다녀간 고려는 반도의 고려가 아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계림은 석탈해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서나벌이란 국명을 계림으로 고치고 이후 박씨, 석씨, 김씨 삼성이 번갈아 가며 왕위를 이어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기록는 이 석(昔)씨가 신라왕이 되었다는 기사는 없다. 대개는 "김성이 서로 이어 오기를 30 여 대에 이른다"고 한다. 수당 전후의 얘기다.

당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아리야발마(Aryyavarman, 聖胄)전"에는 신라인인 아리야발마가 정관년중에 장안을 떠나 광협으로 갔는데 왕성이 있는 곳이라 한다. 그는 바른 가르침을 찾아 친히 부처의 발자취를 드듬은 후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베끼고 거기서 죽었다. "계귀(鷄貴)의 동쪽에서 와서 용천(龍泉)의 서쪽에서 죽었다." 이 부분의 원주(原注)에는 계귀는 범어로 "쿠쿠타의설라(Kukutesvara)"며 "고려국"이라 한다. 범어로 "구구타"는 "계(鷄)"를 뜻하며, "의설라"는 "귀(貴)"를 뜻한다. "계귀"가 "고려"라 했으니 "계림"과 같은 것이다. 계귀는 "계족산," "존족산(尊足山)," "계령(鷄嶺)"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의정의 책에 왕방유는 이 부분에서 주석하기를 당 이전에 조선은 이미 계림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럴다면 그 조선은 인도에 있는 "계림"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주몽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이밀묘지명]에 의하면 주몽이 "동하(東夏-즉 동중국)에서 떠나 돌아 와서는 서역의 현자의 말을 했다(言遵西路)"고 했다. "준로"는 지혜로운 말씀이란 뜻이다. 따라서 주몽은 홀본에 개국하기 전에 몇년 동안 서역 원정길에 오르는데 그 때 부처가 탄생한 마가다(Magadha, 摩伽陀)국을 다녀 온 것이다.

당태종 정관 20년(646)에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와서 그해 7월 13일부로 당태종에게 올린 [진경론등표]가 고사본으로 남아 있다.(나진옥. [나설당선생전집]) 그 내용중에 "이로서 녹야(鹿野)의 담소가 성기(聖期)에 응하였으며, 중역(重譯)으로 계림지사(鷄林之士)가 신화를 숭앙하여 함께 왔으니," 중주(중국)에 살게 된 것이란 내용이 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계림"의 인사를 데리고 왔으니 계림은 분명 인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계림"이란 지명과 "녹야"라는 지명이 같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고대 티벳어로는 무그리그(Mug-lig)라 한다는 것은 "무쿠리"란 고구려 국명과 관련하여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청나라 때에는 티벳어로 조선 또는 고려를 "Glingga, Galingga)"라 했다.([오체청문감]) 이것과 비슷한 말이 인도어에 남아 있다. 원래 Kling이라 쓰고 읽기는 Kalinga 또는 Kaling으로 읽는 것이 그것이다. 그 위치는 벵갈만의 테레구(Telegu)연안인 북 시르칼스(Circars)지방에 대한 고대 명칭인데 키스트나(Kistna)에서 마하나디(Mahanadi) 지방에 이르는 지역이다.([Henry Yule. [Hobson-Jobson]) 이 지방은 마게타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Mug-lig 와 Glingga 는 단지 시대에 따라 명칭이 달라 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신라전에는 신라의 지형과 관련하여 "그 나라는 산이 연하여 수십리가 되는데 협곡이 있으니 견고하기가 철함(鐵闔)과 같다. 호칭하여 철문(鐵門)이라 한다. 신라는 활 쏘는 사람 수천명을 항상 이곳에 주둔시켜 지키게 한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이 표현을 그대로 소개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전해 들은 떠도는 얘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마디로 부인하고 있다. 물론 반도에는 그런 곳이 있을 리 없다. 김부식은 아예 우리 역사를 반도에 한정시키기로 작정을 하고 모든 역사적 현실을 거기에 맞춘 것이다.

중국이 서역과 통하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그 북도는 [석가방지]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장안에서 부하라(縛渴羅)에 이르기 위해 인도로 가다가 파밀고원(蔥嶺)의 북쪽을 지나면 산길이 험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도달하는데 동남으로 산길 300여리를 가면 철문관(鐵門關)이 나온다. 철문관을 지나면 도화라(覩貨羅)국에 이른다. 이 철문관은 인도 북부의 중천축에 위치한 셈이다. 이 철문은 [자은전]에 의하면 "돌궐의 관색(關塞)"이라 하며, 당나라 초기에는 당의 영토 밖이 었으나 중기에는 당의 중앙세력의 공제(控制)하에 있었다.([왕방유. [대당서역구법고승전교주]) 신라의 흥기는 백제를 따라 고구려를 치다가 반도의 무리를 모아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면서 일어 났다.([한원]신라전) 즉 이것이 바로 돌궐이다. 돌궐은 신라였던 것이다. [유양잡조]에는 "신라가 구유를 바쳤기로 이것을 궁정의 두 방에 깔았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의 "구유"는 서양 카펫을 말하며 그 발음이 "구유, 구수"인 것은 [우공]에 나오는 서역지명에서 음을 빌린 것이다. 그 위치는 총령산의 서에 있은 것으로 비정된다.

오대시 한(漢)의 홍명대사의 비명에는 "녹원(鹿苑) 계림(鷄林)"은 불교가 시작한 것으로 대사가 몸소 성지를 순례했다는 표현이 있다.([남한금석지]) 녹원은 "녹야원(鹿野苑)," "선원(仙苑)"등으로도 불린다. [설인귀향묘비]에 의하면 "고려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설인귀를 계림도 총관으로 출정시킨다." 660년 전후의 일이다. 다시 함형 원년(670)에 설인귀는 계림도 총관이 된다. 호빙지의 발문은 [당회요]를 인용하면서 "정관 3년 이후로는 행군은 총관이라 부르고 본도는 도독이라 불렀다." 따라서 계림도 총관이란 "계림도 행군 총관"이란 뜻으로 정벌군 사령관이다. 계림이 지금의 경주라면 설인귀가 정복군 사령관으로 반도의 서남 까지 왔을 리가 없다.(호빙지. [산우석각총편])

"왕사성"의 서북에 "아욕달산(阿縟達山)"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시조 단군과 관련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이란 지명이 보인다. 혹시 두 산이 같은 산이 아닌지 고려 해 볼 만 하다. 흔히 일연이 스님이었으니까 우리 역사를 불교 설화식으로 기술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설혹 앞의 두 산이 같은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조선이 원래 서방에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고구려말로 "막리지"는 "마하하라지"였다.([한원]고려전) "마하(Maha)"는 범어로 "대(大)"란 뜻이고, "라지(Raj)"는 역시 범어로 "왕(王)"이란 뜻이다. 연개소문은 "대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리지 연개소문은 이품(二品)이 었다. 일품은 "토졸"이란 명칭만 있지 한번도 사람이 거론된 바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그는 대왕보다 높은 신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황제급"이어야 한다. [위서] 유연전에서는 유연의 수장 칭호는 카칸(可汗)인데 "중국의 황제와 같은 것이다"라 했다. 유연은 고구려의 또 다른 국명인 "무쿠리"국이다. 을지문덕은 실은 카칸이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의 "토졸"이었다. 그의 본성은 "을지(乙支)"가 아니라 "위지(尉遲)씨"였다.([자치통감고이]) "위지"씨는 중앙 아시아의 코탄(Khotan)국의 왕성(王姓)이다.

코롬부스가 지리상의 대 발견을 할 때 가지고 간 책이 세 권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카타란 지도], 그리고 [만데빌 유기]란 책이다. 이 마지막 책에는 중국에서 인도를 향해 가면 "카딜헤(Cadhilhe)"라는 왕국을 가게 된다고 한다.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이 카딜헤는 "고려"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 졌다.(C.W.R.D. Mosley(tr.). [The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아마도 "쿠다라(Kudara)"의 음이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쿠다라"는 일본어로 백제를 뜻한다.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시대에 백제는 금치국, 점성(占城), 자바(瓜蛙)등과 함께 서남이(西南夷)의 한 나라였다.(E. Blochet (transc.). Rashid ed-Din. [Tarikhi Moubarrek-i Ghazni] Tome II, p. 451, note a. Blochet는 중국 문헌을 인용한 것이다.) 이 백제는 분명 인도로 가는 해상로의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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