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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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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11/20
 

찬송가 전곡 악보와 노래
http://blog.daum.net/dw7055/13830663

누가복음22:54-62                베드로의 통곡(1)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리 주님을 끝까지 따르려고 했던 베드로였지만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과의 관계를 전면 부인하고 맙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주님을 강하게 부인합니다. 부인도 모자라 저주까지 합니다. 이 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Ⅰ. 베드로의 심정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강하게 부인할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요? 자신의 정체가 폭로됨으로 입을 화를 피하고자 베드로는 임기응변 식으로 부인하였을 것입니다. 실제 속심정은 우리 주님을 부인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드러난 결과는 세 차례에 걸친 부인과 저주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부인할 당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일단 위기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따라 상황을 살펴보기 위하여 자신이 여기까지 따라왔던 것뿐이지 무엇을 어떻게 해 보자는 것은 아니었기에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지혜롭게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일은 괜찮지 않나 하였는 지도 모릅니다. 물론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모습에 마음에 어느 정도 가책을 느꼈는 지도 모릅니다. 아주 강퍅한 상태에서 베드로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부인할 때 우리는 심장이 뜁니다. 위기 앞에 몸을 사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 속이 쓰리는 고통을 느꼈는 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주님 앞에 어떤 죄악인 지를 의식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할 때 심령에 심한 죄의식으로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Ⅱ. 베드로의 통곡

  하지만 이내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나가 비통한 심정으로 통곡을 합니다(62절). 왜요? 갑자기 심한 죄책감에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던 것인가요? 아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61절). 우리 주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만났을 때 베드로는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우리 주님을 강하게 부인하며 저주함으로 베드로는 닥친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납니다. 다행이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떨린 가슴을 진정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강한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눈길이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우리 주님이 어떻게 되냐 싶어 여기까지 따라왔기에 자신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자 눈을 들어 주님을 살핍니다. 그 순간 우리 주님의 시선과 마주치며 감당할 수 없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하셨던 말씀으로 세 차례나 걸친 부인에 대한 예언입니다. 부인할 당시는 우리 주님이 하셨던 말씀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던 베드로이었는데 주님의 시선과 만나자 엄청난 충격이 심령을 때립니다. 부인할 당시는 베드로는 이 수치스러운 사실을 우리 주님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 데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하는 시점에서 심령을 찌르는 죄책감이 몰려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우리 주님이심을 베드로는 알게 됩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자신이 한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는 자리에서는 오직 회개만이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우리 주님의 시선에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합니다. 더 이상 죄를 감출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그 모습으로 주님의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급히 밖으로 나가 통곡을 합니다.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하여 회개합니다. '심히 통곡하다'(62절),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자리는 주님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우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자리는 우리 주님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때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시선을 우리가 느끼며 보는 순간 우리는 견디지 못하고 죄에 대하여 아파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통곡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시선과 만났을 때 그는 통회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주님의 눈길을 우리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도록 합니다. 주님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자리에 혹은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22:54-62             베드로의 통곡(2)

  감정을 절제하지 못할 때 눈물이 나옵니다. 마음이 자극을 받고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나오는 눈물입니다. 너무 기뻐서 울고 너무 슬퍼서 웁니다. '너무'라는 말 가운데 절제가 되지 못한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급히 밖으로 나가 통곡을 하였다(62절) 라는 행동에서 우리는 감정이 격해져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심하게 통곡을 하였는가?

Ⅰ. 베드로의 회개

  그의 비통한 마음에서 터져 나온 눈물은 분명히 회개입니다. 우리 주님과 마주 친 시선에 스스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장담하였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자가 바로 베드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우리 주님을 부인하며 저주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저 위기를 넘기고 보자 하는 식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을 지어 말하였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드로 그는 예수님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먼저 챙기는 이기심이 컸음을 보았습니다. 평소에는 이기심이 감추어져 있었지만 위기 앞에서는 두려움과 함께 극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실 때 연약한 베드로의 실패를 보며 안타까워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심정이 강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은 주님의 눈길에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 끌려 두려움 가운데 떨어진 불신앙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믿음에 서지 못하고 거꾸러진 베드로 자신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한 평소의 고백이 입술만의 흔적이었음을 알고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컸을 것입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저주하였던 모습으로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찔려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마음이 아프면 감정이 격해집니다. 나 같이 못나고 연약한 자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려고 열심을 내었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인생이 어찌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고 내세웠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북받쳐 오르는 설움과 비통함에 영혼이 떱니다. 죄에 대하여 아파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이토록 주님 앞에 부끄럽다고 느꼈던 적이 전에도 없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한 심정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마음도 울고 몸도 웁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며 충성하겠다 라는 말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고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주님이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실 때 차라리 나의 연약함을 도우소서 하며 매달리는 편이 훨씬 나았을 때 하는 후회도 듭니다. 왜 그 때 그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 지 심한 후회가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 데 결국 끝이 이렇게 비참하게 될 줄이야! 다시금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하고 악한 모습에 더욱 서럽게 웁니다. 방금 전에 지은 죄가 너무도 베드로의 심령을 고통 가운데로 밀어 넣습니다. 그렇다고 다시금 찾아가서 세 번 부인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고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용기도 없습니다.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납니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처지에서 그저 눈물만 흘립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을 이처럼 정직하게 본 적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행한 그대로를 놓고 주님 앞에서 통곡합니다. 철저한 회개의 눈물이 베드로의 몸을 그리고 영혼을 적십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이처럼 부끄러워하며 비통해 진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오랫동안 통곡하며 회개하였는 지는 모릅니다. 다만 지은 죄가 너무도 크기에 이제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소망이 없고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지 않았나 하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다시 볼 수 있는가?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주님 앞에 서리요? 주님 편에서 나를 용납하고 받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은혜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됩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참된 회개로 말미암아 은혜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던 값진 체험입니다. 즉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죄인임을 알게 되었던 순간입니다.


모든 헌금에 대하여(2)
(3) 말라기 3장에서 언급한 십일조



끝으로 말라기 3장 8-10절에 기록된 십일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교회에서(목회 현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활용되는 말씀입니다.



·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곡간이 차고 넘치도록 축복하신다.
·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메시지가 또 있겠는가? 그래서 본문을 십일조의 경전 중의 경전이라고 말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본문을 말하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라기선지가 본문을 기록할 당시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황폐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 삶의 정착하는 일에 바빴고, 자기기반(재산)을 늘리는 일에 열심 일뿐,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로 지켜야할 최소한의 의무(규례)들마저도 제대로 지키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자기들 집을 꾸미는 일에만 바빴을 뿐,(학1:4) 십일조를 내서 레위인 들로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 할 수 있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레위인 들은 백성들이 의무이행(십일조 헌납)을 하지 않음으로 자연히 자기들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 일반 백성들처럼 양이나 소를 키우며 직업 활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말 1:14) 이러한 상황이 되다 보니, 자연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 까지도 번폐스럽게(귀찮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도, 실하고 좋은 것은 뒤로 감추고, 도적질한 것, 저는 것, 병든 것들로 제물을 삼아 드리는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말 1:8, 13-14)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잘잘못을 판단(재판)하는 일도 뇌물 주는 쪽에 기울게 된 것입니다.(말 2:9)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지자는 속이 상하고 애가 탄 것입니다. 백성은 백성들대로 의무 이행을 하지 않고(십일조 의무), 제사장들은 제사장들대로 제사장의 직무 수행하는 것을 피곤해 하고 귀찮게 여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급된 말씀이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서의 십일조 언급은 율법 제정의 기본 뜻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도 여자 적으로 해석 적용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도, 백성도 속이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속인다는 뜻은 범죄 행위란 뜻이기도 합니다. 이미 중세교회 시대에도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바쳐라"하는 식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교구민들에게 세금으로 십일조는 징수한 일은 있었지만(소 십일조, 대 십일조 등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바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없어 중보자(제사장)가 필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당신은 지금도 죄인입니까?
십일조는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제사장(중보 역할자) 혹은 레위인 들이 따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것으로 헌물에 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이 들은 목사가 제사장 아닌가? 하고 무식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제사장 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죄인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야하는 헌물은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구약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헌물에 속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야하는 세금과 같은 성격의 것 이란 걸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4) 구약에서의 연보



구약에서 연보로 번역된 말씀으로는 역대하 34장 9절 또는 14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연보는 성전수리비로 쓰기 위해 연보 궤를 두어 그곳에 사람들이 돈을 넣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성전이 있을 때) 까지도 예루살렘 성전, 여인들의 뜰, 내부 벽에 연보 궤를 놓고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 궤에 연보를 넣게 했습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 이야기도 바로 연보 궤에 넣은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하신 말씀이며, 이때의 연보들도 성전 수리비로 사용키 위한 것이었습니다.(막 12:41-44) 고궁이나 유적지 등지에서 입장료를 받아서 고궁이나 유적지의 유지 보수비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제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밖에 이스라엘의 남자가 성전을 갈 때는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게 했던 것도 맥락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마 17:24-27)
* 성전 세를 로마의 관리들이 착취 수단으로 삼기도 했음.




여기서 구약의 연보제도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아니란 걸 명심 해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돈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하나님께 란,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5) 포로 이후의 고르반 (Corban)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에 필요했던 제물과 헌물(헌금)에 관한 것들의 성격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올바른 헌금 생활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헌금 생활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르반 제도가 생기게 된 것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어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이방인의 땅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본국에서처럼(율법의 규정) 하나님께 제사제물을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짐승을 잡아 드리는 대신에 헌금으로 예물을 대신한 것이 "고르반" 제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후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은 고르반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그 영향은 어쩌면 지금의 헌금 제도의 기초 문화를 제공하게 된 듯 합니다.






5. 신약 교회의 제물과 헌물들



지금까지는 구약에서의 제물과 헌물들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신약에서의 제물, 그리고 헌물에 관한 것을 검토하려고 합니다. 신약에서의 제물은 이미 앞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또 드릴 것이 없이 완전한 제사를 드려 버리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또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없어진 것이란 말씀입니다. 다시 강조를 하는 것은 그것이 헌금(돈) 일지라도 "하나님께 바친다" 혹은 "드린다" 했을 때는, 그것이 곧 제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헌물(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의 필요를 위해서 헌금, 곧 Donation을 하는 것뿐입니다.



(1) 연보에 관해서



신약성경에는 단 한번도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성격의 헌금을 요구한 기록이 없습니다. 특히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이니 바쳐라, 운운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다만 연보로 번역된 내용만 여러 곳에 있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연보를 여러 가지 단어들을 들어 연보에 대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 로기아 : 모금한다, 수금한다 의 뜻(고전 16:1)
· 하플로테스 : 기쁨으로(고후 8:2)
· 하드로테스 : 풍성한, 큰 선물, 관대함(고후 8:20)
· 율로기아 : 좋은 모금(고후 9:5)
· 코이노니아 : 교제(고후 9:13)

이와 같은 연보를 요구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심히 곤경에 처해있으므로(기근을 만나),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구제)고 해서 이방인 교회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행 11:27-30, 롬 15:25-26)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제 비 모금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연보는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한 것(고후 9:5,7 몬 14)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갖고 "억지로", "인색함으로" 이런 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다른 이들에게 흠 잡히지 않도록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하면서 모금을 한 것입니다.(고후 8:20-21) 이일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벽을 허무는 좋은 역할이 되기도 했습니다.(고후 9:12, 롬 5:27)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해야할 것은 신약시대에는 단 한번도 예물 성격의 헌금에 대한 요구가 없을 뿐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대로 연보로 번역된 말씀들은 “수금, 모금, 거둬 들인다”의 의미일 뿐이란 사실을 주목 해야 합니다.


돈에 관한 것이라 해서 무조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개념의 해석이나 적용을 하려는 것은 성경을 왜곡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5-18절까지에 기록된 말씀은 바울의 전도여행비를 보태 준 것을 두고, 바울이 감사의 표로 "주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란 표현을 쓴 것 뿐, 실지로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제비(히 13:16)나 전도비를 제물이요 제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실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란 뜻에서 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한 것에 대한 소중성(所重性)을 표현한 말인 것뿐입니다. 혹 고린도교회의 연보나 빌립보교회의 향기로운 제물(빌 4:18), 히브리서의 구제비(히 13:16)등은 헌금이란 말에 포함시킬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개념이 되어서 "예물을 드리오니 받으소서"하는 식은, 큰 오류를 만들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십일조와 관련된 언급하심에 대해서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일조와 관계해서 언급하신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엉뚱한 해석과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적용을 하려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지상에 계실 때의 교훈입니다.
그동안 헌금문제, 특히 십일조를 요구하면 안된다고 하면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혈압을 올리고, 분해하면서,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을 들어 대면서 무식한 반박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을 명확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마 23:23-24)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찌니라"(눅 11:42)






여기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찌니라"하셨기 때문에 주께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옳은 주장일까요?
성경해석이나 적용에 대해서, 배경과 성경전체에 기록된 기본 의도(意圖)와 대상과 시제(時制)등을 참고해서 포괄적, 또는 구체적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강조점이 십일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 잘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하루살이),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지키는 것(약대/더 중요한 것이란 뜻)이 더 중한 것이란 걸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 챙겨내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아! 그것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을 더 중요하게 챙겨라" 하심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본문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율법을 잘 지켜 십일조생활을 철저하게 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십일조 생활을 자랑으로 여기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란 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보다도 중요한 것을 버리고, 하루살이에 불과한 십일조 잘 낸다고 자랑삼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십일조 요구를 하신 적이 있었던가? “율법에 명시했으니 너희도(제자들) 내게 십일조를 내거라" 하셨습니까? 아니 제자들을 향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셨습니까? 예수를 믿고 따른 자들은 사도행전에서는 모두 예수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만이 제자고 오늘의 성도들은 "평신도" 입니까? 그래서 평신도는 십일조를 내야 하는 건가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의 신약백성들도 지켜야 하는 걸까요? 터무니없는 성경적용을 하려는 것은 심각한 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참고: 평신도란 말은 중세교회가 사제(司祭)그룹을 구별하면서, 일반백성(성도)들에게 부쳐준 명칭입니다, 이것 때문에 개혁자들이 만인 제사장설을 부르짖으며 종교 개혁운동을 벌린 것입니다. 개신교회에서 다시 평신도란 말을 사용 한다는 것은 개신교회도 개혁 전 교회들이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6.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는

안되는 이유



앞에서 간헐적으로나마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는 안된 다는 것을 말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 구체적인 것들을 논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는 안 된다 하니까, 처음부터 마음을 닫아버리고, 적개심을 품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란 생각도 듭니다. 오늘날과 같은 교회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성경으로 규명을 한다 할지라도 이해하거나 받아드릴 수 없는 상황이며, 또는 아무 탈 없이 오랜 세월동안 전통적 헌금문화에 익숙해져 온 탓에 일단은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늦게 라도 바른 뜻을 알게 되었다면 고쳐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성경을 기본으로 출발하고, 유지되고, 성장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전통적 유전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벌써 기독교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개서 멀 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숭배하는 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너희가 너희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막 7:6-9)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이대로는 안 된다"고했을 때는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검토하고 잘못된 것은 우리의 생사(먹고사는 일?)가 달린 일일지라도 과감히 버리고 교정하는 것이, 신앙이요, 주님 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교회 개혁을 이루는 것 아니겠는가 합니다.


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 안 되는가?



(1)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논제는 이미 앞에서 언급 해 왔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혹은 바친다고 할 때, 그것은 곧 제물의 의미(祭物意味)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 불완전한 제물이 된다는 뜻이 되어, 우리의 신앙행위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불신한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는 앞의 말씀처럼 입술로는 믿는다 하면서 행위로는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요구했던 제사는 피의 제사가 중심이 되었고(히 9:11-22) 피의 제사는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제사를 드린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여러 피의 제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비유요, 모형이요, 그림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히 8:5, 9:9-10) 그래서 어떤 것으로든 하나님께는 드린다, 바친다, 하고 예물처럼 드릴수가 없고 드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全體)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시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였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쫒아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8-14)


·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 제사장들은 매일 같은 제사를 드리지만 사람의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 그리스도로 제물되어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 11-12)고 하셨으며 자기를 단번에 제사를 드려 죄를 없게 하시고(히 9:26-28),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히 10:18)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는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입니다. 제사는 더 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주 완벽하게 완성된 것입니다.(참고 레 17:11, 막 14:24, 요 6:53-54, 롬 5:9, 엡 1:7, 2:13)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헌금을 제물처럼(예물개념) 드린다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제사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거나, 뒤엎는 것과 같은 불신앙의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드린다/바친다)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배를 드리면서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헌금을 요구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요, 하나님의 뜻과도 무관한, 오히려 십자가 사건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기망(欺罔) 하는 행위요, 성경지식에 무지한 성도들을 속이는 행위가 될 뿐이란 겁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행위를 해 온 것은 성경의 깊은 검토 없이 전통적으로 전래(傳來)되어온 유전에 따른 것 뿐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반복적으로 어둠에 처하게 된 듯 하며, 또 다시 교회가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 아닌가 합니다. 지금 목회 하는 목사님들께는 다소 황당하고 불편케 생각될지 모르나,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일 것입니다. 비록 이제라도 모순을 발견했다면 지금의 교회 구조만을 보존하려는 것보다는, 어떤 희생이 따른다 해도 주님의 뜻을 쫒아 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개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보존하려는 것은 믿음이 아니요, 용기를 갖고 버리는 것이 오히려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헌금?) 드려야 한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바치오니 이 예물을 받으 소서 "

이런 기막힌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신약에 와서는 단 한번도 "예물(헌금)을 하나님께 받쳐라 혹은 드려라" 고 말씀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교회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설명을 하고 성경으로 확인 시켜도 쉽게 이해를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이 만든 전통에 굳어있는 오늘의 교회구조 속에서는 오히려 변명의 이론(理論)을 만들어 반박을 할 찌라도 수긍하고 받아 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전적 전통 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뒤에 가면서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2) 우리가 주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헌금을 주께 드려 서는 안 되는가?"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居) 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안에, 주가 내 안에 거 하심"으로 주님과 우리는 한 몸(同體)이 된 자들입니다. 주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은 내 것이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것이 내 것이란 뜻인데, 누가 누구의 것을 갖고 누구에게 드린다는 말입니까? 만약에 헌금을 주께(하나님께) 드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주안에 거 하지 못한 사람(주 밖에 있는 자)이란 뜻이고, 자기 소유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행위(헌금 내는/ 선행?)를 갖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천박한 초등학문(율법) 혹은 종교행위(헌금행위)를 버리고 믿음으로 주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입술로는 믿는다 하면서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주안에 거(居)한다는 뜻은 우리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믿는 자) 신분(身分)이 바뀌게 되면 우리의 머무는 위치도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에 종(노예)으로 있을 때는 행낭채나 문간방 같은 곳에서 기거를 할 것입니다. 구라파 문화권에서는 하인들의 처소를 아예 집밖에 만들어 주었습니다. 본 채 에는 절대로 기거처소를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으로 있던 자를 양자로 받아 드렸으면 이젠 주인의 자녀요, 주인의 상속자 신분이 되어서(롬 8:15-17) 기거하는 처소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종으로 있을 때는 집밖에 머물러야 했지만, 자녀(양자)가 되어서는 집 안채로 옮겨진 것이고 안방에서 살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예수님과 제자(믿는 자)들의 위치는 개체(個體)관계 이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하심으로(예수의 영) 우리는 그분 안에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게 되어, 이때부터는 예수님과 우리(믿는 자)는 한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위치 변화인 것입니다. 예수를 저만치 떨어진 예배당에 모셔두고(?) 주일이나 혹은 집회 시간에 찾아가서 섬기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는 한 몸 된 삶은(요 6: 56-57) 천지개벽보다도 더 큰 사건이요 중요한 위치(거처) 변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기 때문에(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음), 이 때는 할 수 없이 제사장(중보자)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을 섬겨야 했고, 그 때문에 제물이나 헌물 곧 십일조 같은 것을 내야 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몸은 성전이 되었으며(고전 6:19) 우리는 그와 더불어 먹고 그분(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는, 하나 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받치며 사는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계 3:20)
주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삶으로, 주와 한 몸 된 자들 이라면 실제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여기서 적당치는 않지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백화점에 여자 종업원(점원)이 있다고 합시다. 점원으로 있을 때는 시간 맞춰 일을 해야 하고, 월급 받아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백화점 주인이 그를 미쁘게 보고, 그로 자기 아내를 삼았습니다. 여점원은 이제 점원이 아니라 남편과 더불어 백화점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신분이 바뀌게 된 것이고, 월급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젠 주인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월급을 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신 분이 있습니까?

헌금을 하나님께 바친다 했을 때는, 그 분은 밖에 계신 분이란 뜻이고, 아직은 예수와 한 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며, 아직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가족(권속)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헌금을 내도록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사이를 자꾸만 갈라놓는(떨어지게 하고), 일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잘 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고 독려하는 짓은, 훌륭한 종교인은 만들 수 있어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엡 3:6-7)




(3) 받는 자와 주는 자



세 번째 "왜,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되는가?"
혹자는 무엇을 그렇게 구별하고 따질 필요가 있는가, 어떻게든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쓰면 되지, 하고 생각할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思考)를 갖고 있는 분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 하는 일에는 목적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헌금을 드리면 안 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먼저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심이라"(행 17:24-25)


이 말씀은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언급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니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殿)에 계시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도 호흡도 만물도 친히 주시는 분"(행 7:48-50)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시인의 말씀도 들어 봅시다 "산림의 짐승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12)



바울의 또 다른 곳의 증언도 들어봅시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 14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고, 먹이시고, 살게 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 하셔서, 인간들이 무엇을 드려, 하나님이 존재하시거나 하나님의 일을 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오만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인간들처럼 자기의 신께 제물이나 헌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 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는 자(드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 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신 예물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라는 것을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미6:6-8, 삼상15:22-23, 마9:13,12:2 등)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한사업을 위해서 무엇을 드린다, 혹은 받친다, 하는 것은 인간들의 오만(傲慢)이거나, 우상 신을 섬기는 이방 종교인들과 다를 바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헌금생활을 해온 것은 구약교회와 로마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종교문화의 탓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립니다. 호세아선지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원하심이 아니라, 당신이 만물(萬物)의 주가 되신 분이란 사실을 알기를 원하시고, 인정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호 6: 6 /잠 3: 6)






(4) 제자(백성)들의 신분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음으로 우리는 다시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고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 가란 우리의 신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헌금문제도 바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가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되었다.
(히 10:14 / 속죄함 받은 자)
· 우리는 의인들이 되었다.(롬 4:5, 6:7, 8:32-34, 3:28)
·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벧전 2:9)
· 우리는 이제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히 10:19, 14:16)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가 되었다.(롬 8:17)
· 우리는 주님 안에 주님은 우리 안에 있어 한 몸이 되었다.

(요 6:56-57, 고전 6: 17)
·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고전 3:16, 6:19)

죄인 되었던 우리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바뀐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다시 초등학문(율법)으로 돌아가 율법에 매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죄인으로 있을 때처럼, 중간에 제사장을 두고 그에게 십일조나 바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제도 살려고 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헌금이나 몇 푼 교회당에 내면서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후사(상속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우리의 처지(신분)를 바꿔 주신 것은 천박한 초등학문(율법)으로 돌아가 율법의 종노릇이나 하라고(헌금이나 몇 푼씩 바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5) 청지기 역할을 유기(遺棄)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들이라는 것을 설명해 왔습니다. 밖에서의 삶이 아니라, 안에서의 삶으로 위치가 바뀌었다고도 말해 왔습니다. 주님의 양자가 되어 안방에서 살게 된 것이라고도 설명했습니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빈둥빈둥 놀고먹어도 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가족 된 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롬 6: 22)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또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종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한 것은 의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인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하니, 대답해 놓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둘째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하니 둘째는 싫다고 했으나 곧 뉘우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두 아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인가?" "둘째입니다."(마 21:28-31)


주께서는 당신의 가족 된 자(자녀 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포도원)를 위해 일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구원(救援)의 소명이란 것과 사역(使役)의 소명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역의 소명은 그리스도의 가족 된 자들에게만 부르시는 소명입니다. 위의 포도원 주인이 아들 된 자에게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 명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식도 있고 대답은 하고도(신앙고백) 포도원에 들어가지 않은 자식도 있습니다.



제물(헌금)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청지기란 말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태만과 방종의 삶을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관해서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청지기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무엇을 받치는 자가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 주님의 것(내 것은 내 것이 아니요 주의 것)으로 내 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분과 위치가 달라진 사람들에게 헌금을 받치게 하므로, 그리스도 밖의 삶을 살아가게 할뿐 아니라, 주께서 맡기신 재산을 자기 것으로 알고(십일조 만 내면?) 자기가 주인이 되어, 마침내 진짜 아버지의 것을 도적질하게 만들어, 도적의 죄와 오만의 죄악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교회구조라는 것 때문에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도표를 그려보았습니다.






(6) 성장의 방해(妨害)



왜, 헌금을 내면 안 되는가? 헌금생활만 잘하면 주님의 백성 된 자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를 속량(贖良)하심은 우리에게서 헌금이나 몇 푼씩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소유된 백성으로 삼는다는 뜻은 당신의 나라에서 필요로 할 때는 징집(군사로)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군사들이요, 군사는 일선전장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장성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헌금을 하게 하는 것은 초등학문에 속한(율법)신앙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장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다섯 번째 편지 참고)
동시에 헌금 생활을 한다는 뜻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양육자(유모/ 제사장 혹은 목사)를 두고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으로 거듭난 자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지만 중간에 양육자를 둠으로 해서 제사장의 신분을 양육자(목사)에게 위임시키고, 자기는 스스로 양이 됩니다. 양은 양육자에게 젖(헌금)만 공급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양육자가 중간에 있게 될 때는 보혜사성령의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참된 선생이신 보혜사 성령의 가르치심과 깨닫게(생각나게)하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요 14:26) 그러나 우리 앞에 양육자가 있을 때는, 그 양육자의 수준 아래만 머물게 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장을 할 수 없고 항상 양육자의 지도만 따라야 하는 유약한 양으로만 머물러야 되는 안타까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육자들은 무엇이든 순종을 해야 된다고 가르치게 되고, 양이 된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나 청지기의 신분을 스스로 중간자에게 위임하고 자기는 유약한 어린아이 모습으로 남은 체, 교회에서 늙게 되면 신분에 걸 맞는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한 괴물이 되어, 이번엔 양육자를 공격하는 자로 바뀌게 되거나, 유치한 처신으로 교회의 이미지를 손상시켜 사람들로 교회를 기피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교회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온전한 헌신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드리게 되면, 온전한 헌신(주의 몸으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이 주의 것일 때, 우리의 소유 전부가 주의 것이 되는 법입니다 주의 백성 된 자들 에겐 내 것이 따로 있고 주께 받칠 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소유한자는 우리 또한 우리의 모든 소유가 주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 종(노예)들은 자기 아내도 자기 자식까지도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주라는 고백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란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가 주님과 성도들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을 드리게 될 때는 나의 소유가 따로 있다는 의미가 되고, 헌금을 드리는 자 자신의 생각도 그렇게 되어, 헌금을 많이 하면 할수록 마음은 자고(自高)해 지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가 돕는 자란 착각에 빠져 마침 네 인간이 하나님을 돕는 자가 되고 하나님은 도움을 받는 자로 전락이 되는, 뒤바뀐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면 할수록 자신은 자신도 의식 하지 못한 중에 오만함에 이르고, 하나님께는 범죄자가 되어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제물)는 억만금의 돈(헌금)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원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롬 12:1-2) 사실 주께서 우리의 몸의 소유주이심을 벌써 선언한 상태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 우리를 속량 했다.(돈을 지불하고 샀다는 뜻/갈 3:13, 4:5)
· 너희를 값으로 샀다.(고전 6: 20)
·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 2:9) 등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바 된 우리는(믿는 자는) 이미 주의 것이요, 주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무슨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하는가?

무슨 제물이 어떻고, 십일조가 어떻고, 연보가 어떻고, 헌금이 어떻고, 무슨 돈을 많이 내고, 온전한 것을 내고, 집을 팔아내고, 적금 들어내고 등등... 그따위 짓 말고, 그런 것은 우상을 섬기는 종교인들이나 하는 짓이고, 너희는 너희 몸으로 산 제물이 되어(헌신)달라. 하신 것은 우리가 주의 소유된 것을 동의(同意)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소개했던 포도원 주인의 두 아들 이야기처럼, 꼭 같은 자식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포도원에 들어간 둘째처럼 되어 달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 것인가? "주여, 주여 찾는다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마 7:21), 주의 뜻대로 사는 자 라야 주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가족)이 되기 때문이며, 마지막 날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하고 내침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포도원의 첫째 아들은 유대인을 두고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먼저선택 된 자들 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장로)의 유전을 쫒아 산, 유대인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선택된 자들이라 해서 모두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롬 9:27)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 1)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고자 하는 제물(헌금)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하나님은 이런 자를 찾으신다" 하신 것입니다.(요 4:23) 여기서 "영적예배"란 말과 "신령"이란 말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예배 혹은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들(온전한 헌신 자)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게 해서는 안 된다 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점진적인 것이란 점입니다. 모 계시(母系示)의 빛은 끝 날이 될 때까지 불변하는 것이지만, 자 계시(子啓示/모 계시를 통해 받는 조명 혹은 성령의 조명)는 점진적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신약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로마시대로부터 시작된 종교시대의 헌금제도와 21세기 몸으로 산제사 곧 돈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제물이 되어 드려야 하는 방법은 전혀 달라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젖으로 살지만 장성한자가 되어서는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일은 버리는 것입니다.(고전 13:11)


여기서, 오늘의 현실 교회로서는 당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내지 않는다면 당장 교회경영(유지)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헌금을 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교회 경영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교회당 경영이 어려 울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교회당을 혼동 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이 문제는 다음 편지에서 취급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 구조를 그대로 두고 교회개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도 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새 술은 새 포대에..."하시고, "성전을 헐라"(구약교회), 마침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고 신약교회를 출발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개혁은 근본 구조부터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교회구조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입된 오늘의 교회의식(지식)에서 떠나 성경을 보면 혹 대안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당을 짓고, 무슨 선교를 하고, 무슨 제자를 키우고 그럴 때가 아니라 대안을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고민 할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뜻있는 이들은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번 편지는 마칩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 편지에서 뵙겠습니다.


- 山 -

바티칸과 평신도

제 2차 바티칸과 평신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바로 평신도를 위한 공의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공의회 이후부터 우리의 교회 내에서는 평신도 문제가 날로 부각, 고조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긍정적이든, 또는 부정적이든 어떤 문제들이 잠재되어 있음을 뜻한다 할 것이다.

그 문제점들은 무엇인가? 어떻든 제기된 문제들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공의회 교부들이 가르치는 “평신도는 누구인지?” “그들의 위치는?” 또한 “평신도의 할 일은 무엇인지?”를 “교회헌장”과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평신도란 말은 ‘라이꾸스’(Laicus)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어는 본래 희랍어 ‘라오스’(laos)에 나오는 그 어원적 뜻을 가지고 있다. 성서 상에 나타나는 ‘라오스’는 ‘백성’ 이란 뜻으로 ‘지도자’ 특히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와 사제를 구별(예레 26,11)하는 뜻으로 사용, 그리고 ‘선택된 민족’(출애 19.5-6), ‘하느님의 백성’(신명 7.6)의 의미로,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의 선민’, ‘간택된 선민’, 특히 형제(1베드 2.9-10 ; 로마 1.6-7)로 사용하고 있다.


평신도는 분명 교회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교회의 어느 한 부분의 부속물이 아닌 고유한 위치에서 교회이며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 평신도를 정의하여 성직자와 수도자와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던 시대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러한 정의는 하느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인(人)존재의 적극적 양상 안에서 말해야 하며, 그리고 이들의 품위는 매우 다르나 교회론상 비슷한 구분된 3가지 계급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중세에 흔히 행해진 구분으로서 사회학적 관점이지 신학적 관점은 아니었다. 교회헌장에 나타나는 신학적 관점으로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원하신 사회적 조직의 구분과, 인간의 응답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성소의 구분이다.(교회 30. 31) 이런 방법을 떠나서 평신도를 적극적으로 정의하기는 극히 어렵다.

칼 라너(Karl Rahner)에 의하면 “평신도란 그리스도인 존재와 책임이 세상의 생활과 구조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결정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한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백성들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끌어 가는 양떼들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그 백성의 무리를 이루는 대중교회가 곧 평신도들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교회의 존재이고 바탕이며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헌장 31항」에 우선 주목할 점은 평신도가 축성된 자로 서술되어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평신도가 순수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신도 교령과 교회헌장은 사도직은 법적 질서가 아닌 그리스도인 존재 자체에 두고 있다. (평신도 교령은 몇 가지 사도직의 권리, 의무발생에 관하여 언급) 사도직의 권리, 의무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데 있다. 이것은 곧 크리스챤 입문 성사들, 세례와 견진, 성체성사에 의하여 들어가고 보양 되는 이 몸에 고유한 생명력이고 기동성이다. 라고 비오 12세가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도 전래적 정향(使徒傳來的定向)없이 크리스챤 입문 교리 교수도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평신 30)

이와 같이 사도직의 참된 자격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머리요, 내적 생명 원리가 되는 몸에 속하는 것과 그러므로써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는데 있다. 따라서 사도직의 기본 자격은 교계에 의해서 주어진 위임이 아니다. 위임이란 말은 주교들이 어떤 기관이나 사도직 운동에 책임을 지고서 자신의 사도적 사명 수행에 결합시킬 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의회는 법적 구조보다 은총의 우위성을 복구했다. 전 교회의 사도직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데 근거하고 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헌장은 이 사명의 참여에 관해서(30, 31, 33항)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 교령도 같은 생각에서 출발하여(2항) 곧 이 사명의 내용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과 이에 의한 인간구원, 하느님 영광의 성취가 그것이다. 다음 교령은 사명이 수행되는 두 가지 방법을 2항, 5항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한 지식의 전파와 현세 질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통찰로 지적한다. 이 두 가지 점은 6항과 7항에 더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교령은 이에 앞서 이미 이 사명의 목적달성을 지향하는 신비 체의 모든 행위가 다 「사도직」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명의 수행과 사도직을 동일시하고(2항) 사도직이라는 말에다가 넓은 의미를 부여했다.




사명(mission)과 사도직(apostolate)의 어원은 다르지만 같은 뜻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자는 내용을 지적하는데 후자보다 나은 반면, 후자는 12사도와 관련, 성부에 의해 보내어지신 그리스도께서 정식으로 사도들을 보내신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직이라는 말이 누구에 의해서 보내졌다는 것의 중요성을 잊고 그 내용과 활동 목표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의회에서 선교활동을 토의할 때 몇몇 교부들도 이 사명이 일차적으로 교계에 속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를 요구했다. 교회 헌장이 강조한 것은 법적 구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품위와 존재의 우위성이고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사명이다. 이 사명이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결정적인 명령으로서 사도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태 28,18-19 ; 마르 16,14-16 ; 루까 24,44-48 ; 요한 21,19-23 ; 사도 1,8) 또한 모든 제자들, 전 교회 역시 보내졌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 5항이 사도들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그들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의 씨앗인 동시에 교계의 시작인 것이다. 따라서 교령은, 교계가 계승하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위임과 하느님의 백성 내지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본래적으로 부여받은 생명전달 책임이라는 사명의 두 가지 자격을 구별 하고 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품위를 널리 표명하려는 일반적인 욕망을 충족시켰다. 이것은 세 가지 직무 내지 역할이라는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 세 가지 직무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 작용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안에 완성된 것이다. 즉, 사제직, 예언직, 왕직이다. 성서와 교회교부들, 학자들과 전례는 이를 증명해 주고 있고, 「순수한 그리스도인」인 평신도에 이를 적용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평신도를 축성된 존재 교회의 완전한 지체로서 교회의 모든 산 활동에 참여하는 자로 보며, 또 그리스도인으로의 존재, 품위라는 면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점에서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등하다. 교회 헌장 32항은 이를 긍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역사적, 유 일회적이며 성사적으로 영원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사와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사도와 그 후계자에 의해 계속되며 이를 성사직, 사제직 또는 직위적 사제직, 그리고 평신도 안에 존재하는 사제직은 영적, 또는 공통적 사제직이라 부를 수 있다. 교회헌장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평신도의 참여는 그리스도의 영예에 의해 평신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지고 완전에의 부르심이라고 가르친다.(교회헌장 34항) 영적 예배를 행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제직 직능의 일부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적 사제직이다.




영적 예배의 근거는 평신도가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성령께 도유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견진에 의한 성령의 도유이다. 이 영혼의 축성으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게 된다. 평신도 일상의 모든 기쁨과 노고, 고통 등 세속적 일들을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행하며 또 이러한 번민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영적 희생’이 되고(1베드 2,5) 성찬전례에선 주의 몸과 함께 하느님께 가장 경건하게 봉헌되는 것이다. 영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생활자체이다. 은총 없이는 사람은 의화되지 못하고 성화 되지 못한다. 은총 없이는 사람이 영적 희생을 받칠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평신도 사제직은 그 존재, 그런 생활을 통해 하느님께 향한 희생의 봉헌이라 할 수 있다. 평신도는 사제로서 자기를, 그리고 살고 있는 세상자체를 성화해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예배이고, 영적 희생의 봉헌이고 세상의 성화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평신도를 통해서 당신의 예언직을 행하게 하신다.(35항) 이래서 평신도는 주님의 증인이 된다. 그것은 신앙의 마음(sensus fidei)과 말씀의 은총(gratia verbi)으로써(사도 2,17018 ; 묵시 19,10참조) 가정과 사회의 일상적인 생활 안에서 복음의 힘이 널리 빛나게 되어 있다.




평신도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복음 선교는 세속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특수한 성격과 특별한 효과를 거두게 된다.(35항) 여기서 “생활의 증거와 말씀으로써”란 두 가지 요소에서 주의해야 한다. 평신도가 생활로써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평신도의 본질적인 것이다. 또 동시에 말씀으로도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한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에 의하면 이 말씀에 의한 사도직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교령 16항) 평신도는 각자의 처지와 능력에 따라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며 충실히 고백한다. 성사로써 성화 되는 평신도의 결혼과 가정생활은 중요한 가치가 있음이 명백하다.




신약의 성사인 혼인성사로써 맺어진 두 사람의 남녀는 가장 세속적인 결혼으로써 가장 초세속적인 영성의 표지가 된다. 초세속적인 혼인의 영성의 표지란 구약에서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 야훼인 하느님과 그 백성의 일치를 나타냈던 것이다. 신약에서 더욱 깊은 영적 진리의 상징이 된다. 바울로의 가르침과 같이 그리스도와 사람과의 일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일치의 상징이다.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지체인 그리스도교 신자와 결합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결혼을 한 부부는 자녀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앙과 사랑의 증인이 되는 독자적 사명을 갖는 것이다.(교회헌장 11항 35항) 또한 그리스도교적 가정은 그리스도에의 신앙과 사랑과 희망의 표지가 된다.(교회헌장 11항) 따라서 평신도는 현세적 일에 종사하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이 숭고하고 특수한 복음선교 사업이야 말로 평신도의 것이고 이것이 평신도의 예언직인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헌장은 성직자가 부족, 또는 박해받는 때 등, 특수한 상황의 평신도 활동에 관해 말한다. 이때 어떤 교회적 직무에 평신도가 종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교회헌장 35항) 이러한 일의 성공을 위해 헌장은 의미 심장한 권고를 하고 있다. 즉 신앙의 이해(intelletus fidei), 계시된 진리를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예지의 은총을 하느님께 부단히 간구해야만 될 것이다. 신학적 교양을 깊이 하는 것은 모든 평신도가 효과적으로 사도직을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이야말로 평신도 예언직의 영혼이라고 할 것이다. 평신도는 진실로 이 예지의 은총, 성령의 비추심으로 인하여 이 세상 안에서 진리의 증거자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명하셨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높여 모든 것의 지배자로 삼으시고 그의 앞에 굴복 시키셨다.(필립 2,8-9 참조) 이것이 완전히 실현될 때 일체의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되고 하느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일체의 것이 되신다. 이것이 왕이신 그리스도이다.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주권은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 행해지며 종말에 피조물에게 미치신다. 주님은 권능을 사도들에게 주셨고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능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왕이신 그리스도께 자신들이 봉사하기 위한 것이고 다음에는 사람들이 왕이신 그리스도께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지배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그리스도의 것이 된 영혼 안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교적 영적 현실 자체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다. (1고린 3,23 참조) 그리스도의 영의 나라는 이와 같이 이 세상 것과는 다르면서, 그러나 이 세상 안에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평신도가 맺고 있는 세속은 지상적 현실의 실재이지만 궁극적 실재가 될 수는 없다. 궁극에 있어서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피조물의 본질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는 모두가 하느님으로 나왔다는데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의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종국의 목적이다. 평신도는 모든 세속 활동 안에서 하느님께로의 방향성, 즉 성화를 추구해야 하고 또 성스러운 생활로써 서로가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정의와 사랑과 평화 안에서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세상의 성화다. 여기에 평신도의 사명이 있다. 평신도는 본질적으로 세속과의 관계를 맺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써 자기의 활동에 의해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 자유 안에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헌장 36항) 다음으로 세상의 악을 추방하는 죄와의 싸움에서도 노력하는 것이 평신도의 의무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평신도는 문화, 인간적 생활에 원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헌장은 평신도가 교회에 속하는 자로서의 권리와 의무, 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의 구분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고찰하여 보면 첫째, 지나친 조화론으로 교회와 사회의 일원론으로 교회가 곧 사회이고 사회는 곧 교회라는 사상이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는 동일시 될 수 없다. 사회는 인간을 구성원으로 세속사에 관계하는데 비해 교회는 하느님을 기원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세속사에 관계하며 세속을 초월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지나친 구별론으로 교회와 사회의 이원론으로 교회와 사회를 완전 분리하는 사상이다. 이 입장에서 양자는 다른 별개의 세계로 완전히 독립적 존재이다. 그러나 교회의 초월적 사명을 고려해 볼 때 이 또한 인정될 수가 없다. 이 입장에 따르자면 교회는 겨우 현세적 지위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헌장은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현대에는 특히 이런 구별과 조화가 신자들 행동 태도에 아주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36항)고 말한다. 교회와 사회는 서로 구별되고 동시에 서로 중요하다. 이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 존재하고, 한 사람의 신자에게는 교회와 사회는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 사회 속에 사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영적 사랑에는 물론, 일체의 현세적 상황에도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역대 교황과 함께 ‘종교를 도외시한 사회형성을 주장하며 종교자유를 탄압, 근절하려는 부당한 학설’을 배격하는 것이다.(36항 참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은 평신도를 통해 확장되어 간다. 이것이 평신도의 그리스도 왕직에의 참여이다. 그것은 평신도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그리스도에 의해 보다 더 잘 지배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한번 평신도 사도직에 대하여 요약하면, 사도직에 대해서 공의회 문헌은 “교회 창립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 그리스도왕국의 전파, 인간 구원에 참여,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 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 부른다.”(평신도 교령 2항)고 명시하고 있다.

‘사도직’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근본목적에 부합한다. 그런데 교회 설립목적이 인류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사도직은 전 인류 구원사업을 하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직이라 할 수 있다. 동 교령은 동시에 “그리스도 신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한다. 여기서 본질적이란, 그리스도교 신자의 핵심과 생명은 곧 사도직에 참여 하는 것, 달리 말해서 사도직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는 본질을 상실한 죽은 신자라는 뜻이다. 사도직에 특별한 방법으로 불린 신자들을 성직자라 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된 모든 사람을 평신도라 한다. 그들이 해야하는 본질적 행위를 평신도 사도직이라 한다. 그러므로 평신도와 사도직은 따로 떼어서 이야기 될 수가 없다 하겠다. 평신도가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 궁극적 삶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 생명을 살리고 키워 나가는 것이 곧 사도직이다. 신비 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 한다고 규정한 내용은 신비 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도 계속되는 활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도직이다.




사도직의 목표와 내용에 대해서는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 지체들의 사도직은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전해줌으로써 수행된다.”(평신도 교형 6항)고 나타나 있다.

사도직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활화하고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 즉 인간을 살리는 길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은총으로 받은 영원한 생명을 보존하고 선포하는 일,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사도직만큼 귀한 것은 없다. 특히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앗아가려는 유혹과 장애물이 너무나 많기에 교령에서는 “현대에는 새로운 문제들이 일어나고 중대한 오류가 만연되어 종교와 원리 질서와 인간자체까지도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리려고 함으로 이 성스러운 교회 회의는 평신도들이 각기 재능과 지식에 따라 교회의 정신대로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밝혀주고 옹호하며 현대의 여러 문제 해결에 적응 시켜야 할 자신의 임무를 보다 열심히 수행하도록 권고하는 바이다.”(동 교령 6항)라고 지시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 조건은 그 어느때 보다 평신도의 역할을 필요로 하고 있다. 평신도는 세속과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 그 활동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어 넓혀지고 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으로서, 사명은 더욱 크다 하겠다. 더구나 사제와 수도자의 절대 부족을 느끼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의 평신도 활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살리고 배워야 할 것이다. 신앙을 이끌어 줄 사제 한분 없이, 신앙의 빛을 스스로 찾아 그 복음을 전파한 우리 선조들의 빛나는 평신도 활동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제 평신도의 종속적인 지위를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불림 받은 평신도임을 천명,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주님께서 불러주신 고귀한 사명을 깨우쳐 이 땅의 민족들을 향해 어둠을 밝히는 복음전파에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너무나도 귀한 우리의 사명을 깨닫고 살아있는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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