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처음으로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마치고 일본에 들려 스승 게페르트 신부로부터 추기경으로 선출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후 29년 만에 은퇴를 하고 다시 찾은 나이아가라를 쳐다 보시는 마음은 어떻실까?

친척 손주 딸과 손자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들고 계시다.

버팔로에서 한 시간 좀 더 드라이브해 가면 The Abbey of Genesee가 있다.
Trappist Monk들이 있는 수도원이다.
Abbot(원장 신부)로 있던 Father John Eudes. 그는 정신과 의사 출신으로 지금은 은퇴해서 필린핀에 은거하고 있다.

조용히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추기경님.

미리 준비한 집필묵으로 붓 글씨를 쓰고 계시다.

나이아가라 근교에 있는 파티마 성당에 세워전 김 대건 성인 동상.
밑에 음각으로 새겨진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추기경님이 직접 쓰신 것이다.
오늘 아침 새벽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추기경님께서 선종을 하셨다는 것이다.
일년 4개월 전에 한국에 들려서 찾아 뵈었을 때 너무 쇠잔하신 것 같아서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망치로 뒤퉁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http://kr.blog.yahoo.com/thomasjorhee/1261745.html?p=4&pm=l&tc=237&tt=1234891278 참조)
내가 추기경님을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살던 버팔로 근교에 김대건 동상을 세우려는 기획을 하고 있던 1993년 경이 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수원 카톨릭 대학 학장이셨던 배 문환 신부님을 통해서 서신과 전화로 몇번 인사를 나눈일이 있었고 추기경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기특히 여기셔서 평화신문에 우리의 계획을 소개해 주시기도 했었던 것이다.
나는 신문에서 추기경님이 은퇴하신 후에 미국을 방문하신다는 기사를 읽고 바로 전화로 우리집에서 며칠 계실 수 있는가고 여쭈어 보았고 추기경님은 선선히 나의 제의를 허락하시었다. 1998년 8월 미국에 도착하셔서 처음 머무시는 곳으로 우리 집을
택해주셨다. 우리는 추기경님을 모신 6박 7일 동안 아버님을 모시는 심정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추기경님이 그렇게 높으신(?)것도 모르고 공항에서 처음 뵙는 분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고(나중에 안일이지만 추기경님은 외국 나들이를 할 때는 국빈 대우를 받고 신자는 악수 대신에 추기경 반지에 친구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추기경님께서도 우리를 스스름없이 대해 주셨다.
집에 머무시는 동안 아침 식사는 몇시에 하는가고 물으시고는 꼭 그시간에 이층에서 내려 오셨다.
아침에 일어나셔서 내려오실 때까지는 조용히 혼자서 기도하시는 시간이었다.
집사람이 마련한 들깨죽을 좋아하셔서 조금 더 달라시기까지 하셨다.
제네시오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찾았다.
그곳에 Abbot로 있는 John Eudes 신부를 만났다. 두분은 초면이 아니었다. Eudes 수도원장은 일찍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분의 안내로 우리는 수도원 내부를 두루 구경할 수 있었고 수사들이 손수 만든 점심 대접까지 받았다.
Eudes 신부님은 정신과 의사 출신으로 내게도 구면이어서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계시는 동안 우리는 몇 차례 노래도 같이 불렀다. 추기경님이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완창하시던 "향수"를 비디오로 녹음을 해둔것은 우리의 가보로 남게 되었다.
내가 이 주일 동안 테이프를 차에 두고 가사를 외우려다 포기했던 정지용의 시 "향수"를 끝까지 외워서 부르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 그렇게 다 가사를 외울 수 있었는가고 여쭈어 보았더니 치매를 예방할 목적으로 열심히 노력을 하셨다는 것이다. 인순이 노래도 좋아하시고 즐겨 부르시었다.
나는 미리 집필묵을 준비해 두었다. 추기경님의 글씨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무인년 여름 김수환" 사랑과 화해는 추기경님의 삶 자체였다.
그 후에도 우리는 한국을 방문 할 때마다 찾아뵈었다 .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써서 보내주셨는데 금년에는 오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2007년 10월에 강남 성모병원에서 뵈온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추기경님을 모시고 김대건 성인 동상을 모신 파티마 성당을 찾았다.
성당 관할 신부님이신 휼리오 신부님께 김 추기경님을 소개 시켜드렸더니 당장에 무릎을 꿇고 반지에 친구를 하지 않는가!
나는 그제서야 추기경님을 맞는 예절을 배웠던 것이다.
동상 앞에 본인이 직접 쓰셔서 음각으로 새겨진 "성 안드레아 김 대건 신부"를 보시고 흡족해 하셨다.(http://kr.blog.yahoo.com/thomasjorhee/1254876.html?p=1&pm=l&tc=37&tt=1234891015 참조)
버팔로 한인 성당의 주임신부님이신 정광호 신부께서 버팔로 멘젤 주교님께 큰 성당을 빌려주실것을 부탁드렸더니 무슨 일인가고 물으셨다고 한다.
김 추기경님이 오셔서 미사집전을 부탁드릴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추기경님이 오시면 본인이 직접 만나뵙고 인사를 드려야 된다고 해서 결국은 클리블란드. 디트로이트 그리고 토론토 한인 신부님들과 미국 버팔로 교구 신부님 모두 16분의 신부님이 집전하는 버팔로에서는 제일 큰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모시고 갔다.
아이들이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보시고 추기경님께서도 아이스크림을 자시고 싶다고 하셨다. 카나다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다고 농을 건네자 손수 지갑에서 돈을 꺼내시었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드시고 천진한 미소를 지으시던 추기경님이 눈에 선하다.
추기경님께서 처음 나이아가라를 찾은 것은 1969년이었다고 한다. 그해는 추기경님께는 아주 특별한 해였다. 관광을 마치고 일본에 있던 스승 게페르트 신부를 만나자 '자네가 추기경이 되었다'고 하시더란다. 자신이 추기경이 되신 것도 모르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동생 추기경 신부를 위해서 늘 그늘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던 형님 김동환 신부님을 잊을 수가 없다.
어렸을 때의 제일 큰 소원은 열심히 일해서 조그만 가게라도 하나 차리고 장가를 들어서 어머님을 모시고 효도를 하고 어릴 때 어머님과 약속을 했던 인삼을 구해 드리는 것이었다고 한다.(추기경님이 30세가 되시자 어머님께서 그 약속한 인삼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오셨다고 한다. 추기경님이 어머님께 인삼을 구해드린 것이 마지막 효도 였다고 한다. )
기차를 타고 시골 마을을 지나면서 저 멀리 농가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굴뚝의 연기가 그렇게 평화스럽게 보였노라 말씀하셨다.
나도 커서 저렇게 아늑하고 조촐한 가정을 가져야지하는 생각에 잠기곤 하셨다.
한 번은 니체를 물어오는 여느 여인의 구애를 거절해야 하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었다고 미소를 지우셨다. 마음 아픈 순간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밤마다 사람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제일 힘들었던 때는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대좌해서 팽팽하게 맞섰던 때라고 한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편에 서 계시던 분, 가슴이 넓어 사랑과 이해로 한 생을 보내신분,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종교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몸소 실천으로 살아갈 길을 가르쳐 주시던 큰 분을 우리는 잃었다.
이제 주님 곁에서 편안히 쉬시도록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