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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사과하세요, 늦지 않았습니다

김학순 선임기자 hskim@kyunghyang.com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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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솔루션…아론 라자르 | 지안출판사

19세기 미국 시인 랠프 에머슨이 분별력 있는 사람은 결코 사과하는 법이 없다고 했을 만큼 진정한 사과는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도 좀처럼 사과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체면을 중시하는 체제의 특성상 잘못을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다. 그런 북한이 지난 14일 남북 임진강 수해방지 실무회담에서 황강댐 방류로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유감과 조의를 표명한 것은 드문 일에 속한다. 남측이 이를 사과로 받아들임으로써 남북관계 개선의 기대감이 부풀고 있다.

이렇듯 사과는 관계 회복의 열쇠이자 갈등과 위기를 풀어나가는 상생의 소통법 가운데 하나다. 정신의학자인 아론 라자르 매사추세츠 의대 학장은 사과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갈등조정수단이라고 규정한다. 라자르는 <사과 솔루션>(원제 On Apology)에서 사과는 더 이상 약자나 패자의 변명이 아니라 ‘리더의 언어’로 바뀌었다며 패러다임 변화를 선언했다. 사과가 단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 이상의 가치를 지녔음을 3000여 건의 역사적, 정치적, 개인적 사례 연구와 임상경험들을 통해 보여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다종교에 대한 관용과 인정을 표명한 교서 ‘노스트라 아에타테’ 1965년

‘사과의 기술’이 개인은 물론 정부, 기업, 사회 조직 등에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영역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사과가 급증하는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우선 1990년대 이후 새로운 밀레니엄을 ‘백지상태’로 출발하기 위해 자기 성찰과 도덕적 청산에 할애했다. 둘째, 급속한 세계화가 사과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상시 접촉이 불가피한 이웃 나라 사이에서는 분쟁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과를 활용하고 있다. 셋째, 지난 세기에 벌어진 대규모 인명 살상과 핵무기 확산이 사과를 증가시켰다. 넷째, 집단과 국가 간 세력 균형의 변화도 사과 빈도수를 늘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 기업, 학계, 종교계 등에서 여성의 권력과 영향력이 커진 요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사과를 더 자주, 더 세련되게 할 줄 안다.

사과가 늘어날수록 진정성이 떨어지는 게 문제점으로 떠오른다. 정치가, 기업인 등의 ‘가짜 사과’나 ‘유사 사과’가 대표적이다. 가해자가 예를 갖추지 않은 사과를 반복하거나 거짓으로 사과하는 것은 차라리 사과를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사과의 핵심인 진정성에는 정직, 관용, 겸손, 헌신, 용기, 희생이 요구된다.

링컨 대통령의 재선 취임연설에서의 ‘노예제도’에 대한 사과

지은이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사과가 실패하는 유형으로 여덟 가지를 든다. “제가 어떤 잘못을 했건 사과드립니다.”(애매한 인정), “본의 아니게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수동적 표현), “만약 제 실수가 있었음이 드러난다면…”(조건부 설정), “피해를 입으셨다니까…”(피해 자체의 의심), “크게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잘못의 축소), “피해를 줬다니 유감입니다”(교만한 태도), 잘못된 대상에게 사과하는 꼼수, 작고 엉뚱한 잘못만 인정하는 물타기 등이다.

독일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2차 대전 때 독일의 만행을 사죄한 종전 40주년 기념 하원연설. 1985년

저자는 공적 사과의 모범 사례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 노예제도 사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대인 학살 침묵과 반유대주의 사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의 2차 세계대전 만행 사죄를 꼽는다. 특히 노예제도 사과는 잘못의 진솔한 인정, 진정한 후회, 잘못의 자세한 배경 해명, 피해 보상의 네 가지 프로세스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사과의 전범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실패한 사과를 비롯한 타산지석의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인들의 사과 문화다. 일본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 밖에 있어 애당초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고 한다. 서구에서 ‘전쟁범죄’라고 일컫는 행위마저 일본이 사과를 주저하는 까닭도 조상이나 히로히토 일왕을 탓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는 보수적인 풍토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해 행위를 한 뒤 즉각 사과하는 것만이 관계회복의 첩경도 아니지만 사과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이 마지막 경종을 울린다. 윤창현 옮김. 1만4000원


<김학순 선임기자 hs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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