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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연작소설 제372회 가족
내 귀는 소라 껍데기
글 최인호 . 그림 이우범
내가 ‘가는귀가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칠팔 년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종합검진을 받아본 직후부터였다. 평소에 지병인 당뇨병을 빼놓고는 혈압도 정상이고, 심장도, 위장도 튼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청력 부분에서는 ‘이상이 있다’는 소견이 적혀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차 속에서 라디오를 들을 때면 나는 아내로부터 쉴 새 없이 핀잔을 받곤 했다. 왜 그렇게 볼륨을 높이느냐는 것이 아내의 불평이었다. 나는 정상이라 생각해서 볼륨을 조정해놓으면 아내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아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이 내가 텔레비전을 볼 때면 소음 때문에 심장이 뛰고 불안하다고 집단 성토를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어느 정도 내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건강 진단에서 청력에 문제가 있다는 소견이 나오자 나는 난감한 느낌이었다. 평소에 나는 내 귀의 청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풀을 스치는 바람소리도 나는 예민하게 들을 수 있었고,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도 나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고등학교 때 청력검사라 하여 눈을 가리고 시계의 초침 소리가 왼쪽에서 나는가, 오른쪽에서 나는가, 테스트했던 것을 기억나서 일부러 손목시계를 귓가에 들이대 보았는데, 째깍째깍 거리는 초침 소리까지 정확하게 들렸다. 시계의 초침소리도 들을 수 있는 내가 청력에 이상이 있다니, 뭔가 잘못된 결과이겠거니 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청력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인지 이제 내가 텔레비전을 볼 때면 아내는 제발 소리를 좀 줄이라고 애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렇게 보면 내 청력에 이상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아내가 보던 텔레비전을 볼라치면 나는 도저히 그 웅얼거리는 말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들 녀석은 더 작게 듣는 편이어서 아들 녀석이 보던 텔레비전은 내게 있어 고장 난 전화기처럼 먹통이다.

원래 귀가 어두워지는 현상은 소음이 심한 공장 같은 곳에서 오랫동안 작업을 한 사람이나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군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곳에서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 귀가 어두운 사람은 말을 할 때에도 남보다 목소리가 크다는 속설이 있는데, 나 역시 남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편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가는귀가 먹은 것 같다. 난청難聽. 청력이 약하여 소리를 잘 들을 수 없는 상태를 난청이라고 하는데, 그런 뜻에서 보면 나는 아직 난청까지 이른 것은 아니고 아마도 가는귀가 먹은 정도로 보인다. 지난번에 매형이 왔을 때 매형은 난청이 심하여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지경이어서 항상 귀에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나도 언젠가는 귓구멍 속에 보청기를 집어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귀가 어두워져서 난청이 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된다하더라도 두려운 생각은 별로 없다. 실제로 2년여 전 내가 살던 집 옆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그 소음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 새벽이면 토목공사가 시작되고, 8톤 트럭들이 엔진을 켜서 흙을 퍼 담는 소리에 잠을 설치는 것은 물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글을 쓸 수 없는 노이로제까지 생기게 되었다. 새벽마다 뛰쳐나가 공사장 인부들과 싸움을 벌였지만 생각해보면 그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내가 어떻게 무슨 권리로 그들의 밥벌이를 중지시킬 수 있겠느냐는 자격지심이 들어 우연히 비행기에서 얻었던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고서 잠을 자고 원고를 쓰곤 하였던 것이다. 귀마개로 틀어막는다고 해도 소음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참을 만은 하였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샘터>에 썼더니, 어느 날 프랑스에 계신 화가 방혜자 선생님이 귀마개를 보내주셨다. 방혜자 선생님은 가끔 소음 때문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을 격리시킬 때도 그 귀마개를 한다고 했다. 그 뒤부터 나는 실제로 평소에도 아름다운 구름솜처럼 생긴 프랑스제 귀마개를 귀에 꽂고 일부러 침묵 속으로 잠입하곤 하였다. 귀마개를 하면 외부로부터의 소음은 차단되지만 그 순간부터 내 심장의 박동과 혈관의 파동이 내면의 소리로 한결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아아, 그렇구나. 귀가 더 나빠져서 난청이 되고, 난청이 더 악화되어 청각을 상실하여 귀머거리가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절망적이거나 두려운 것은 아니구나. 다행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귀머거리는 아니니까 평생 동안 별의별 소리란 소리는 실컷 듣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굉음은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라는 재미있는 과학 상식이 있다. 자전 소리는 원래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 엄청난 굉음을 인간이 듣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이 굉음을 듣는 순간 인간은 그 고통으로 죽을 수밖에 없기에 아주 미세한 소리는 물론 엄청난 굉음 역시 듣지 못하도록 창조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귀머거리는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청력이 떨어져 나중에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유행가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는 절망적인 비극은 아닌 것이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장님은 문장을 볼 수 없고, 귀머거리는 종과 북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낱 육신에게만 있는 것이냐. 지적인 면에서도 또한 장님과 귀머거리가 있는 것이다.” 장자의 말은 구경究竟이다. 문장을 볼 수 있다 해서 장님이 아닌 것은 아니다. 종과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서 귀머거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더 큰 장님은 바로 눈앞에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고, 보다 큰 귀머거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불구인 것이다. 악성 베토벤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난청이 시작되었다.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였던 베토벤은 고통 속에서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자살 충동과 싸우며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작곡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말년에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오직 필담을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은 자신의 최고 걸작인 제9교향곡 ‘합창교향곡’을 지휘하였을 때 베토벤은 자신에게 박수를 퍼붓는 만장의 갈채를 전혀 듣지 못하고 우두커니 지휘자석에 서 있었다. 한 여자 가수가 나가 손을 이끌어 청중 쪽으로 돌려 세웠을 때에야 비로소 베토벤은 청중들이 모자를 던지고 환호성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베토벤에 있어서 청력의 악화는 오히려 예술의 혼을 심화시킨 창조의 불이었는지도 모른다. 장 콕도의 시 중에 짧지만 촌철의 절창이 있다. “내 귀는 소라 껍데기.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 바닷소리를 듣기 위해서 나는 굳이 바다로 나갈 필요는 없다. 내 귀가 바닷소리를 그리워하는 소라 껍데기가 될 수 있다면 자연 내 귀는 바닷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내 귀가 소라 껍데기가 되려면, 내 귀가 바람소리를 듣는 나뭇잎이 되려면, 내 귀가 어린아이 속에 깃들어 있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 청진기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을 회복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청력이 나빠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나는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
--------------------------------------------------------------------- 최인호 작가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째 샘터에 <가족>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최근 비운의 왕국 '가야'의 역사를 복원해낸 다큐소설 <제4의 제국>을 펴냈습니다.
월간<샘터>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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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isamtoh1970/trackback/23/1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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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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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제국 재미있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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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아들 성민석 글 최인호 그림 이우범 로마제정시대의 철학자 에피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좋은 사위를 얻은 사람은 아들 하나를 얻은 셈이고, 나쁜 사위를 얻은 사람은 딸 하나를 잃은 셈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노예 출신 에피테토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좋은 사위를 얻었으므로 아들 하나를 얻은 셈이다. 내가 낳은 아들은 도단이 하나지만 좋은 사위를 얻어 아들 하나를 덤으로 얻은 셈이니, 내 아들은 두 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위는 백년지객이고, 며느리는 종신식구’ 라 하였는데, 그리고 보면 사위는 한평생을 두고 늘 어려운 손님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특히 서양에서는 사위와 장모와의 관계를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불편하고 까다로운 인연으로 설정하여 항상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에 서로 으르렁대는 역할로 나오기 십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처갓집과 변소는 멀수록 좋다’ 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속담은 내 사위 성민석成民錫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위를 내 아들 이상으로 사랑하고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 내 딸아이를 아내로 맞아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고맙고 대견스럽다. 처음에 딸아이가 민석이와 사귈 때 어느 날 사위가 창녕 성씨로 우계牛溪 선생의 직계 후손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우계라면 성리학자 성혼成渾 선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유학자인 율곡의 둘도 없는 벗이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우계, 즉 쇠내에 살았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우계 선생’으로 불리었던 성혼은 고려시대 이래로 관직을 역임한 조상들이 많았고, 특히 우계의 아버지 청송 선생 성수침成守琛은 지조로 이름이 높은 조광조의 제자로서, 스승이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자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던 산림거사였다.

우계는 어릴 적부터 경사에 널리 통하였으며, 행의行義로 이름났다. 아버지 청송 선생이 병으로 위독하자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약에 넣어 드림으로써 극진한 효성을 보였다. 또 우계는 과거시험 치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평생 야인으로 지냈는데도 그의 학문과 독실한 성품이 널리 알려져 선조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헌부지평과 이조참판 등의 여러 직위를 겸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병약한 몸이었으나 삭녕부사 김궤金潰가 이끄는 의군에 가담하여 유학자로서 진충위국盡忠衛國하였다. 이토록 우계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무리를 둔 유학자이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실학자적 성향도 아울러 갖고 있어 왜란 후에는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여 선조로부터 경원시 당하기도 했던 선비 중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런 우계 선생이 민석의 직계 선조이니, 그런 의미에서 민석은 양반집의 아들인 것이다. 지금은 양반이고, 상놈이고, 명문이고, 천민이고, 그러한 계급사회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시집가기 전 딸아이는 어느 날 내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오빠(다혜는 민석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가 자기 집이 사대부 집안이라는데, 그게 무슨 뜻이야.” “옛날에 평민들이 양반을 상대하여 부를 때 사대부 집안이라고 부르곤 하였지.” “그럼 우리 집은 뭐야.” “글쎄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안의 가계 족보는 잘 모른다. 원래 양반이니, 사대부니, 족보니 하는 것은 주로 남쪽 지방의 사람들이나 찾던 것이고, 평안도와 같은 이북 출신들은 일찍 개화되어서 그런지 그런 것은 잘 따지지 않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 관해서는 만물박사였던, 돌아가신 큰누이에 의하면 증조할아버지가 대동강에 외국범선이 들어왔을 때 이를 맞아 외교활동을 벌였던, 오늘날로 말하면 평양시 부시장쯤 되는 고위관직에 있었던 모양이다. 글쎄 내 눈으로 직접 보지도 않고 그 어디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 이런 사실들은 피난 온 ‘삼팔따라지’들이 모두 이북에 살 때는 집안에 금송아지가 있었다는 식의 과장된 너스레 소리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그게 무슨 대수랴. 집안 조상 중에 영의정이 있건 없건, 명문 집안이건 상놈집안이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다혜에게 이렇게 말하였었다. “민석이가 사대부 집안이라면 우리 집도 평양에서 이름 있고 뼈대 있던 명문 집안이라고 대답하려무나.” 어쨌든 나는 조선조가 낳은 최고의 성리학자 우계 선생의 적손인 사대부 집안의 아들을 사위로 맞음으로써 양반집 자제를 아들로 삼은 셈인 것이다. 사위가 고우면 처가에 와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므로 ‘사위가 고우면 요강분지를 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민석이의 행동거지는 과연 사대부집 후손답게 점잖고 품위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 나는 사위로부터 파생된 이상한 인연을 느끼게 된 것이다. 즉 서울신문에 연재 중인 <유림儒林>이란 소설은 공자와 맹자로부터 시작된 유교의 숲이 해동의 우리나라로 흘러들어와 이퇴계와 이율곡과 같은 거유들에게 이어짐으로써 오히려 유교의 숲이 우리나라에서 울창하게 우거지고 완성되었음을 드러내는 소설인데, 최근 제5권의 인물인 율곡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연 율곡의 도우지교였던 성혼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1백 매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율곡의 생애를 다루다 보면 필연적으로 우계의 얘기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43세에 들어선 율곡은 어느 날 불현듯 평생의 벗인 성혼이 보고 싶어 온 강산에 눈이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를 타고 성혼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짚방석을 깔고 너울거리는 등잔불 아래서 긴긴밤을 이야기로 지새운다. 날이 밝아 헤어지면서 율곡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 것이다. 
한 해는 저물고 눈은 온 산에 가득한데, 들길이 가느다랗게 숲 사이로 갈렸구나.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 가나. 우계가에 미인이 그리워서라네. 사립문 늦게 두드려 맑은 모습 인사하니, 작은 방에 갈포 걸치고 방석에 의지했네. 고요한 긴 밤을 잠 못 이뤄 앉았으니 벽 가운데 깜빡이는 등불만 가물가물 아아, 반평생에 이별도 많아라. 뭇 산의 험한 길을 다시금 생각한다. 이야기 끝에 뒤치락거리다 새벽 닭 울어 눈 들어 바라보니 온 창문에 서리 달만 차갑구나. 소설을 쓰면서 나는 문득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 인因이 있어 연緣이 닿으면 불이 붙어 비춘다’는 부처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내가 민석이를 사위로 얻은 것도 그리고 소설 속의 우계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부처의 말대로 그럴 만한 전생으로부터의 인이 있어 마침내 연이 닿았으므로 불이 붙어 비추듯 인연에 의한 필연적인 행위가 아닐 것인가. 일찍이 <독일인의 사랑>을 쓴 밀러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별이 하늘에 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별들은 저마다 신에 의해서 지정된 궤도에서 서로 만나고 또 헤어져야만 하는 존재이니까요.” 그렇다. 밀러의 말처럼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이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의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그 별 하나를 발견하듯 내 사위 민석이와의 만남도 전생으로부터 예정되었던 신에 의해서 계획된 지정 궤도인 것이다. 신의 궤도 속에서 나는 민석이를 만나고 또한 우계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다시 흐르는 유성처럼 우리는 은하철도999의 은하수를 건너 헤어져 자신의 존재를 다이아몬드처럼 나타내면서 ‘팅클팅클’ 빛나는 작은 별이 되어 반짝거릴 것이다. * 최인호 작가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째 샘터에 <가족>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한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는, 최근 비운의 왕국 ‘가야’의 역사를 복원해낸 다큐소설 <제4의 제국>을 펴냈습니다.
월간<샘터>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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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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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님의 폴더가 있네요?
최인호님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시간 날때마다 와서 읽어야 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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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永遠)의 눈으로 현재를 보라
글 최인호 그림 이우범
며칠 전이었다. 우연히 TV를 보다가 나는 문득 화면에 비친 다음과 같은 문장에 눈이 머문 적이 있었다.
“10년 뒤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십시오.”
그 문장을 본 순간 나는 문득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한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나는 서대문구 평동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국민학교’ 운동장이 우리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였는데, 어느 날 아이들과 밤 늦게까지 공차기를 하며 놀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담장을 이웃하고 있던 이화여자중학교에서였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꼬마들과 담장을 뛰어넘었다. 노천강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는 전국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의 무용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담 너머로 들려온 것은 어린 여자 무용수들이 자신이 선택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소리였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경연대회의 장면을 지켜보았다. 놀라운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예쁜 내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연지곤지를 찍고, 화관을 쓰고, 색동치마를 입고 음악에 맞춰 부채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그때는 6.25 전쟁이 막 끝나고 환도한 후였으므로 서울 거리는 폐허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폐허 속에서도 선녀처럼 예쁜 여자 아이들이 휘황한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인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여자아이들도 분단장 곱게 하고 내 곁에 서서 남이 추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몸에서는 이 지상의 냄새라고는 할 수 없는 자극적인 향기가 나고 있었고, 얼굴마다 꽃 화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도저히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예쁘고 아름다웠다. 나는 순간 질투를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느낀 질투는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만큼 충격적이었으며,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 질투는 그 예쁜 여자 아이들처럼 내가 예쁘게 몸단장하고 싶다는 상대적 질투가 아니라 그 여자 아이들이 누리고 있는 ‘선녀적’ 아름다움을 훔쳐보는 ‘나무꾼적’ 질투심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 질투는 그 예쁜 여자 아이들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정(欲情) 같은 것이었다. 선녀들이 목욕하는 동안 그녀들이 벗어 놓은 선의를 훔침으로써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다는 전설 속의 내용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때 나는 열 살이 갓 지날 무렵의 초등학생이었으므로 선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소유욕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성에 눈뜰 나이도 아니었으므로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욕망은 성적 충동이 아니라 마치 빅토르 위고가 쓴 <노트르담의 꼽추>의 주인공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란 아름다운 집시 무희에게 느꼈던 열등의식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콰지모도적 콤플렉스. 태어날 때부터 꼽추였던 그는 갓난아이 때부터 노트르담의 종탑에 갇혀 살게 된다. 그 예쁜 아이들의 무용 모습은 꼽추는 아니지만 열등의식의 종탑 속에 갇혀 있던 어린 나에게 있어 에스메랄다의 춤과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관객 속에서 벗어나와 홀로 담벽에 몸을 기대고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저 예쁜 여자 아이들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 선녀들의 옷을 나무꾼처럼 훔치는 일인가. 아니다. 그것은 동화 속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내가 유명해지는 것이다. 유명해져서 저 예쁜 여자 아이들과 동등한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다. 아니 저 예쁜 여자 아이들보다 더 빛나는 명예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글을 쓰는 일일 뿐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으므로 아주 유명한 작가될 수 있다면 나는 손쉽게 저 여자 아이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마음에 꼭 드는 여자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소년적 상상력이다. 인류를 구원하겠다, 인간의 고통을 직시하겠다,라는 식의 거룩한 다른 문학청년들과 달리 내가 그때 꿈꾸었던 나의 작가적 미래는 오직 그 예쁜 여자 아이들로 상징되는 노트르담 사원 바깥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먼 미래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습관이 들기 시작하였다. 중학교 때에도 공부는 하지 않고 하루에 단편소설 하나를 쓸 만큼 습작에 매달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 신분으로는 우리나라 문학사상 최초로 신춘문예에 입선되었던 것도 10년 뒤, 아니 그 보다 더 먼 미래의 눈에서 현실을 보는, 그 무용대회가 열리던 노천극장에서 터득한 내 나름의 현실관 때문이었다.
4년에 걸친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이미 작가였다. 비록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머무르고 있어도 정작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미래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현실은 이미 인생을 다 산 사람이 되돌아 지난날을 회상해보는 슬로우 비디오식의 과거일 뿐이었다.
그것은 환갑을 지난 지금의 나이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내 삶은 내가 죽은 후의 먼 미래에서 되돌아보는 스크린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글과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과 더불어 사는 내 인생도 먼 영원의 눈에서 살펴보면 낯선 행성(行星)에서의 빛이 어우러진 잔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행크 아론은 1974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당시 최다 홈런 기록이었던 베이브 루스의 714홈런기록을 경신하고, 1976년 755개의 홈런을 친 후 은퇴한 전설적인 야구 선수이다. 가난한 흑인이었던 행크 아론은 백인들의 협박과 가족들을 죽이겠다는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최다의 홈런 기록을 이룬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에게 어느 날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매번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홈런을 쳐야겠다고 의식하십니까.”
그러자 행크 아론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홈런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다만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내 자신은 외야석에 앉아서 내가 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하는 경기 모습을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을 뿐이지요.”
행크 아론이 최다 홈런 기록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타석에 집중되어 일희일비하고 있음이 아니라 외야석이라는 미래의 관중석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던가. “지금의 이 순간을 현재의 눈으로 보지마라. 먼 영원의 눈으로 현재를 보라.” 행크 아론이 홈런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먼 영원의 눈, 즉 외야석에서 볼을 때리는 자신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봄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의 오늘이 바로 영원(永遠)이다.”
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계산과 현세적인 쾌락에 의해서 노트르담 사원 종탑에 갇힌 콰지모도처럼 꼽추로 살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파비스가 서로 손을 잡고 입맞춤하도록 안내한 다음 마침내 노트르담의 성당 밖으로 걸어 나온다. 많은 군중들이 콰지모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한 꼬마 소녀가 콰지모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손을 잡고 군중 속으로 인도하자 마침내 꼽추 콰지모도는 노트르담 사원을 벗어나 빛나는 바깥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때 콰지모도는 더 이상 꼽추가 아니고 가장 못 생긴 망우제의 어릿광대의 왕이 아닌 영원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인간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대가 진정 홈런을 치고 싶다면 미래의 외야석으로 가라. 그대가 꼽추의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노트르담의 사원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영원으로 가라.
* 최인호 작가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째 샘터에 <가족>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한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는, 최근 비운의 왕국 ‘가야’의 역사를 복원해낸 다큐소설 <제4의 제국>을 펴냈습니다.
월간<샘터>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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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연작소설 제368회 은하수
글 최인호 그림 이우범
이런 고백을 해도 좋을지는 모르지만 아내와 나는 지금 별거상태(?)다. 호사가들이 들으면 귀가 번쩍 뜨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별거상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각자 다른 집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방은 따로 있어 자는 것도, 옷을 갈아입는 것도, 세수하고 이를 닦는 것도 따로이니, 완전히 한 지붕 두 가족인 것이다.
물론 결혼 초기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마흔 살 중반이던 1990년대 초까지는 한방에서 나란히 잠을 잤다. 워낙 내가 잠을 험히 자는 편이고, 이불을 둘둘 말아 양다리 사이에 끼고 자는 버릇이 있어 같은 이불 속에서는 잠을 자지 않더라도 한방에서 잠을 잤던 것은 사실이다.
함께 잠을 자면 어쩌다 가위에 눌린 경우에도 서로 잠을 깨워줄 수도 있고, 잠이 오지 않으면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평화롭게 잠든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거나 코 고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 ‘밥은 따로 먹어도 부부는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로구나 하고 느끼기도 하였다.
좀 더 심한 닭살부부들은 죽을 때까지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든다는데, 아내에게 그런 과잉친절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어쨌든 부부가 한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정답이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부부에게 생활의 리듬이 깨진 것은 딸아이가 고3에 올라가던 1990년도부터였다. 아내는 딸아이와 더불어 지독한 고3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비좁고 좁은 딸아이 침대에서 함께 자면서 시험공부를 도와주고, 한 시간만 잔 후 깨워달라면 깨워주고, 새벽 일찍 일어나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주는 등 온갖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연 우리는 각방을 쓰는 별거생활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2층에서 혼자 자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는 자리에 누우면 시베리아 벌판의 얼음집인 이글루 안에서 잠을 청하는 에스키모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울화가 치밀고, 공연히 이러한 교육제도를 만든 대통령과 문교부 장관 등을 한꺼번에 싸잡아 욕을 해대기도 했었다.
나는 딸아이가 제발 대학교에 떨어져 재수하지 않기를 고대하며 시간이 나면 성당에 들러 기도를 하였는데, 그것은 딸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고3병에 빼앗긴 아내를 다시 되찾아 오겠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딸아이는 한 번에 덜컥 대학에 붙어 나는 환호작약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아내는 한층 더 비장한 얼굴로 아직은 연금생활이 끝난 것이 아니라, 보다 본격적인 격리생활이 시작된다고 선전포고하였다.
환장한 얼굴로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도단이가 이제 고2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도단이는 아직 고3이 아니잖아.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그러나 아내는 한층 더 치열해진 대학입시 때문에 2년의 계획도 짧은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하더니, 한술 더 떠서 아래층 소파 위에 총본부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딸아이와는 같은 여자라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아들 녀석은 남자라 아예 문 앞 소파에 캠프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아내는 아들 녀석에게만 매달리고 나는 완전히 찬밥이었다. 아들 녀석은 아내의 애인이자, 정부이자, 새로운 남편이었다. 나는 쓸모없이 버림받은 전남편이었다.
한 1년간은 울분에 싸여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내곤 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는 시베리아벌판에서 혼자서 텔레비전 보고, 혼자서 책 보고, 혼자서 위스키 마시는 재미에 맛이 들려버렸다. 어쩌다 가위에 눌리기도 하였지만 몸부림 몇 번이면 자연 깨어나곤 했으므로 평화로이 잠든 아내의 얼굴이고, 정다운 코 고는 소리고 나발이고, 오히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네 활개를 치면서 잠이 드는 독신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하였다.
아들 녀석도 다행히 제때에 대학에 합격하여 3년간의 연금생활은 끝났으나 그 이후로도 우리 부부는 서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각자 따로 자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아내가 베개와 이불을 들고 2층으로 올라와 합방을 했으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아내도 나도 한방에서 서로 잠을 잔다는 게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투정을 부린 것이 있었으므로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아내 역시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하였다.
“우리도 방을 따로 씁시다. 옛날에 양반들은 각자 방을 따로 썼어. 마님은 안방을 쓰고 남편은 사랑채를 썼지. 그래서 안방마님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다 말이야 뽀뽀할 생각이 있는 밤이면 남편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
‘헷헤, 헴헴헴. 오늘 밤은 내가 그리로 가겠소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헷헤, 헴헴헴’ 하고 헛기침을 하면 그것이 바로 그런 신호인 줄 알라고.”
그래서 나는 다시 시베리아 벌판으로 나왔고 아내는 2층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러다가 딸아이가 시집을 가고 방이 비자 완전히 독립해서 별거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내와 다른 방을 쓰게 된 지가 벌써 15년 정도가 되어가는데, 3년 전 새 아파트로 이사를 온 직후에는 이 습관이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다. 한 침대에서 며칠간 시험 삼아 함께 잠을 자본 것이었다. 그러나 20년 정도 된 고물 침대라 아내가 몸을 움직이면 침대 역시 쿨렁거려 도저히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없었다. 아내도 내 눈치를 보고 나도 아내를 눈치 보다가 마침내 우리는 합의 별거에 도장을 찍었다. 즉 아내는 거실 오른쪽의 아들 녀석 방에서 잠을 자고, 나는 거실 왼쪽의 침대 방에서 잠을 자기로 완전히 합의를 본 것이었다.

요즘 나는 저녁 6시면 일체의 약속 없이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둘이서 텔레비전을 보고, 과일을 깎아 먹으며 미주알고주알 많은 얘기를 나눈다. 도대체 딸 아들 시집, 장가 다 보낸 노부부끼리 무슨 할 얘기가 있겠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지만 우리부부는 얘깃거리가 궁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9시 뉴스가 끝나면 나는 벌떡 일어나며 아내에게 말한다.
“나 이제 자러 갑니다. 안방마님.” 그러면 아내는 내게 말한다. “좋은 꿈꾸고 잘 자슈.”
나는 거실의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방문을 열고, 옷을 벗은 후 침대에 들어가 눕는다. 어쩌다가 목이 말라 거실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실 때면 반대쪽 저편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웬일이야.” “목이 말라서 물 좀 먹으려고.”
어느덧 아내의 침대 옆 책상 위에는 아내가 보는 책들과 정원이 사진, 정원이가 그린 그림 등 아내만의 고유한 짐들이 늘어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 부부는 견우와 직녀와도 같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는 하늘에 떠 있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해마다 칠월칠석이면 가까워지는 자연현상에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견우성과 직녀성은 1년에 한 번 칠월칠석에 만난다는 전설이었다. 원래 직녀는 옥황상제의 손녀로 소치는 목동인 견우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결혼한 뒤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하자 옥황상제는 그 벌로 두 사람을 떨어져 살게 하고 1년에 한 번만 만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은하수가 그들을 가로막아 만날 수 없게 되자 까마귀와 까치들이 머리를 맞대어 다리를 놓아 오작교(烏鵲橋)란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목동인 나는 옥황상제의 배려로 베를 짜는 아내와 결혼하였다. 견우와 직녀는 1년 만에 서로 만나지만 나와 아내는 매일 아침 은하수에서 서로 만난다. 아내를 만나러 은하수의 거실로 가는 길은 나를 낳은 부모님들과 모든 인연, 나라는 존재를 이루게 한 모든 사람들과 삼라만상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까마귀의 길이며, 아내가 나를 만나러 은하수의 거실로 오는 길 역시 아내를 낳은 그의 조상들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는 모든 영겁의 인연들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까치의 길인 것이다. 이 오작교의 다리를 지나 매일 아침 나는 은하수에서 아내를 만난다. 기분 좋은 날은 우리 집 거실 창밖으로 칠석우(七夕雨)까지 내린다.
언젠가는 우리 부부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견우성이 직녀를 바라보고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직녀가 견우성을 바라보듯 언젠가는 나비와 꽃송이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따뜻하고 소박한 가족의 삶이 생생히 녹아 있는 최인호의 소설 <가족>은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년째 이어져 온 국내 최장수 연작소설입니다. <가족>은 일곱 권의 단행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월간<샘터> 200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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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연작소설 | 제367회
나의 클레멘타인
글 최인호│그림 이우범
요즘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지만 젊었을 때는 참 많이도 술을 마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도 술맛을 잘 모른다. 술맛을 잘 모르면서도 그렇게 마셨던 것은 아마도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내겐 버릇이 있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다혜를 술집으로 데리고 오는 습성이었다. 그 무렵에는 집집마다 누구나 다 운전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나는 포니라는 국산차 제1호의 자가용을 갖고 있었고 이 국산차에도 예외 없이 운전기사가 딸려 있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동갑내기의 운전기사들이었다. 운전기사들은 나를 으레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오너드라이브용도 못 되는 소형차에 저마다 운전기사가 딸려서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가관일 것이다. 젊은 시절 술을 자주 마시는 사장님(?)을 술집 앞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 운전기사들은 참으로 따분하였을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집에 가서 다혜를 술집으로 데려올 것을 주문하곤 했다. 그 때 다혜의 나이가 대여섯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운전기사가 다혜를 데리고 오면 나는 눈 뜬 심봉사 심청이를 바라보듯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나는 다혜를 좌석에 앉혀 두고 밤늦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그 무렵에는 무교동에 ‘낭만’이라든가 ‘사슴’과 같은 꽤 격조 높은 술집들이 많이 있었다. 지적 수준이 높은 아가씨들이 테이블마다 서비스만 하고 손님들의 말상대만 해 줄 뿐, 앉아서 술을 따르거나 웃음을 파는 그런 술집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다혜는 술집에 오면 몇 시간이건 테이블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가씨들이 다혜가 귀엽다고 안주를 공짜로 가져다 주기도 하고 슬쩍슬쩍 과자를 집어다 주기도 하였다. 다혜는 앉아서 안주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기도 하고 과자를 야금야금 먹기도 하였다. 나는 다혜를 앉혀 두고 술 마시고 내 할 말을 다하고 때로는 술주정을 하기도 했다. 주사는 없는 편이어서 술에 취한다 해도 무슨 특별한 난폭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어떨 때는 깐죽깐죽 시비를 걸어 지리한 술좌석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다혜는 신통하게도 싫증을 내지 않았고 한 번도 집에 가자고 떼를 쓰거나 보채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이어령 선생님과 술을 자주 마셨다. 이 선생님은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체질이지만 나하고의 술자리는 꽤 좋아해서 저녁이면 으레 나를 불러 술을 사 주시곤 했다. 비유의 천재이신 이 선생님은 밤이 늦어 파장이 될 때까지 젤소미나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다혜를 마치 동냥젖을 얻어 먹이기 위해 이 집 저 집 끌고 다니는 심봉사의 딸 심청이와 같다고 놀려 대기도 했다.
어떨 때는 맥주 한 모금도 마셔 보도록 하였는데 다혜는 시키는 대로 술을 홀짝홀짝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술좌석이 파장이 되면 나는 다혜를 무동 태우고 도시의 골목길을 노래를 부르며 걷곤 했다. 그 땐 이상하게도 술만 마시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이곤 했다. 통행금지가 다 되어 서두르며 귀가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 왠지 슬픈 느낌이 들어 골목을 걸어가며 하릴없이 눈물 흘리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다혜를 불러 냈던 것은 술이 취할수록 내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혜는 술 취한 젊은 날의 내게 유일한 희망이자 용기였다. 아직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객기 많은 질풍노도의 계절, 술에 취할 때마다 비감(悲感)에 젖어 내가 가진 유일한 인생의 마스코트인 다혜를 보며 ‘살아야지’‘살아야 한다’는 용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술좌석에 불러 와 옆에 앉혔던 것처럼 보인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시인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묘지’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술이 취하면 술의 파도는 내 심장을 독수리처럼 쪼고 있고 술의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상심의 바다로 흔들리는 내가 쓴 소설의 페이지를 세찬 마파람으로 펼치고 또한 닫고 있었다. 또한 보들레르의 ‘악의 꽃’처럼 술의 두레박은 나를 “날마다 한 걸음씩 악취 풍기는 어둠을 가로질러 혐오도 없이 지옥의 우물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러할 때 다혜는 나의 바람이었고 두레박이었고 하느님이었다.
전후파 시인 박인환(朴寅煥)은 ‘어린 딸에게’란 시 속에서 노래하였던가.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중략)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비록 박인환의 시처럼 다혜는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나면서부터 죽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천형을 타고났음이니 술에 취하면 나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게 한 어린 딸 다혜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다혜를 무동 태우고 사장님을 기다리는 자가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골목길을 걸어갈 때면 나는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이 병에 가득히 넣어가지고서 랄랄랄라랄랄랄라 온다야.”
그러면 머리 위의 다혜도 함께 노래를 불렀다.
“솨솨솨 쉬쉬쉬 고기를 몰아서 어여쁜 이 병에 가득히 차면은 선생님한테로 가지고 온다나. 랄랄랄라랄랄랄라 아안녕.”
지난 2월, 나는 아내와 둘이 미국 미시간 주 엔에버에 살고 있는 딸네 집을 방문했다. 엘에이에서 열린 제1회 한미 경제 컨퍼런스에 초청연사로 참석한 것은 오직 엔에버에 살고 있는 딸네 집을 방문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 정원이를 보기 위함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또 갈아타고 디트로이트에 내리자 사위를 비롯한 딸의 가족이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겨울 내내 햇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음산한 날씨의 중북부 캠퍼스타운. 자신들이 번 돈으로 아담한 콘도를 사서 무릎까지 눈이 쌓이는 춥고 어두운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자 나는 그냥 고맙고 대견해서 콧날이 시큰해질 정도였다. 저 딸아이가 젊은 시절 내가 술좌석에 마스코트처럼 데리고 다니던 바로 그 아이였던가. 몇 시간씩이나 앉아 있어도 좀처럼 칭얼대지 않던 내 딸 클레멘타인이었던가.
“너 어렸을 때 아빠가 술집에 데리고 가던 것 기억하니?”
내가 묻자 다혜가 대답하였다.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지하 층계로 내려갈 때 천장에서 번득이던 네온의 불빛은 생각나. 아빠.”
나는 이제 또다시 내 딸 다혜를 무동 태우고 젊은 날의 그 목로주점으로 갈 수는 없다. 다혜는 시집을 가 일가를 이루었으므로 자신의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바람을 맞으며 살려고 애를 써야 할 것이다.
일주일간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기 전 날 나는 바겐세일을 하는 쇼핑몰 앞 광장을 내 딸이 낳은 딸을 무동 태우고 걸어 나오면서 노래를 부르며 생각하였다.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우리의 인생이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가는 고난의 길이든 바다로 가는 고통의 여정이든 언젠가는 병에 가득 고기를 담아서 선생님이신 하느님한테로 돌아가는 어부의 길이니 그 때까지는 “랄랄랄라랄랄랄라” 하고 춤추며 노래해야지. 그리고 언젠가 헤어질 때는 “아안녕”이라고 인사를 해야지. 어차피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니까.
따뜻하고 소박한 가족의 삶이 생생히 녹아 있는 최인호의 소설 <가족>은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년째 이어져 온 국내 최장수 연작소설입니다. <가족>은 일곱 권의 단행본으로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월간<샘터> 200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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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행성 2006.04.1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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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다혜양같은 비슷한 기억이 있네요. 아버지가 데려가신, 네온이 반짝이는 곳... 어린 시절, 그 빛의 산란들은, 저의 두뇌속에 깊이 각인되어, 지금도, 네온들을 바라볼 때면, 기분이 괜히 좋아져요. 물론 술집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그곳은 명동일대가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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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밥탱이 2006.04.18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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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술한잔을 걸죽하게 드시고 오시면 동생과 저에게 100원짜리 동전을 한닢씩 건내주셨지요.
그게 좋아 술취해 온 아버지를 닭다하는 엄마에게도 그러지 말라 말하던 기억만 생생하며, 초코렛 묻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슈퍼로 쌩하니 뛰어가던 모습만 과거속에 비춰지네요.
이제는 닳고 단 몸으로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말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습니다.
추억조차도 만들수 없는 내일이 오기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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