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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isamtoh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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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8/10
 

하나. 툭 터지지 않으면 무엇 하러 채우는가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사람과 만난다. 쓸 때의 가쁜 호흡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이 있다. 이런 글을 읽으면 내 숨도 같이 가빠진다. 읽다 말고 책 앞날개에 있는 저자의 사진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가슴이 벅차서 읽던 책을 덮고 거실이나 연구실을 서성이기도 한다. 하지만 독서에서 이런 행복한 순간은 아주 가끔, 느닷없이 찾아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나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같은 책에는 여백 여기저기에 이런저런 메모들이 즐비하다. 서양 사람들이 쓴 그들의 독서법과 역사를 읽고 있자면, 그와 꼭 같거나 더 재미있는 우리 쪽 이야기들이 내 기억 속을 헤집고 나와 자기도 글로 써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여백에 쓴 메모들은 모두 책 속의 예화에 견줄 만한 우리 쪽의 생생한 예시들이다. 그래, 이런 에피소드를 모아 이렇게 정리하면 좋겠군. 질문을 바꾸니까 이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된다.


<에도시대의 여행문화>를 읽는데, 당시 일본인의 여행문화는 떠오르지 않고, 그  시기 조선의 여행문화가 자꾸 겹쳐졌다. 그래서 책을 덮자마자 조선의 여행문화에 대한 메모를 작성해서 단숨에 목차까지 마무리 지어버렸다. 그다음부터는 여행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 그때 만들어둔 목차의 어디쯤에 해당할까 하는 궁리가 하나 더 늘었다.
논문의 착상도 다른 분야의 책을 읽다가 떠올리는 수가 더 많다. 서양 학자가 회화의 도상을 설명한 책을 읽다가 우리 옛 그림의 도상 읽기를 구상한다. 방법을 빌려와도 콘텐츠가 다르니, 결과는 같을 수가 없다. 남의 책을 읽다 말고 내 책을 떠올리고, 이 생각을 하다가 저 궁리와 만나는 일이 내 독서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결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착상과 알맹이는 온전히 거기서 나왔다. 분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를수록 경이의 폭은 더 커진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만날 거기서 거기인 말 바꾸기가 갑자기 견딜 수 없어진다. 이럴 때 독서는 기성의 전복이요 일상의 해체다. 섬광처럼 번쩍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세상에 독서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이런 깨달음을 주겠는가?
책 한 권을 읽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어떤 책은 몇 장만 읽어도 글쓴이의 수준이 훤히 드러나 보여 더 이상 읽어줄 수가 없다. 잰 체하는 교만으로 가득 찬 글일수록 읽기가 역겹다. 알맹이 없는 책은 10분 만에도 다 읽어치울 수가 있다. 좋은 책, 묵직한 책은 그렇지 않다. 목차를 한참 들여다보고, 서문을 찬찬히 음미한 뒤에, 앞에서부터 읽지 않고 중간 중간 건너뛰며 읽는다. 읽다가 빨려들면 그제야 처음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와도 늦지는 않다. 밑줄이 그어지고 여백에 메모가 많은 책일수록 신뢰가 간다. 책의 어느 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묻은 손때를 나는 특별히 사랑한다. 


책만 책이 아니다. 독서는 문자를 빠져나와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위력적이다. 삶의 행간을 읽고, 드러나지 않는 질서를 읽을 때 독서는 비로소 완성의 단계에 진입한다. 남들이 같이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이 내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까지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이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독서는 사실 이 단계에 진입하기 위한 연습과정일 뿐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해서, 더 툭 터진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 평생 독서의 지침이요 목표다. 


정민
|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우리 고전의 숨은 매력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의 글에서 현실의 문제를 읽어내는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시 미학 산책> <책 읽는 소리> <미쳐야 미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등의 책을 냈습니다.


   월간샘터 8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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