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 나온 식당을 보면 '야~ 진짜 맛있겠다. 꼭 가봐야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대부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저도 예전에는 자주 그러다 다녀보고 나서는 방송과 현실의 엄청난 차이에 눈물 좀 쏟고 일행에게 욕도 좀 먹고 그러며 사리판단력이 생겨나게 되었죠. 이제는 나름 고르는 재주가 생겼다 생각하며 지내고 있는데 아직은 기고만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난 여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영방송이라는 곳에서 도토리로 만드는 묵밥집들 여럿을 소개하여 지켜보다보니 얼음 잔뜩 낀 이가 시리도록 시원한 냉묵밥을 만드는 광경에 무더위에 지친 저는 넋이 나가버리고 홀린 듯 일어나 바로 찾아가게 되었죠. 일요일 점심 무렵..
가 보니 마이너리그 냉면계에서 엄청 유명한 [깃대봉 냉면] 바로 앞집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저렇게 매스컴 출연 사실을 요란하게 붙여 둔 집들 치고 성공적인 경우가 흔치 않아놔서 '아차;;;'싶더군요 -..-;;;;
시계 보면 아시겠지만 손님 별로 없습니다. 앞의 깃대봉이 미어 터지는 것과는 달리.. 점점 더 우울해져 오는;;;
묵밥에 첨가할 재료들.
유기그릇에 조밥이 나와 다소 안심이 되는군요.
묵밥만 먹고 가기 뭐해서 메뉴판을 둘러 보니 장떡(고추장이나 된장을 넣은 반죽을 지진 것)이 있군요. 제일 저렴키도 해서 주문했습니다. 찍어 먹을 장.
바로 지져내서 바삭하니 먹을만 합니다.
사진을 찍자니 주인분이 오셔서 관심을 표하더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집 냉면이 고급재료로 육수를 내고 도토리를 넣어 직접 면을 뽑아 훨씬 맛있는데 깃대봉 냉면이 더 유명한 것은 정말 억울하다'라고 강하게 주장하셔서 예정에도 없이 냉면도 주문케 되었습니다. 정말 전혀 예정에 없는.. 제가 식도락이란 것을 시작하고 나서는 마이너리그 냉면들은 제 돈 내고는 거의 사먹지 않게 되었거든요. 면발은 그냥저냥 참아줄 수 있어도 조미료로 떡을 쳐 놓은 시큼들큰한 국물들이 영 뭐시기해놔서..
옳은 선택이었기를 슬그머니 기원했습니다..^^;;
묵밥 나왔습니다.
아.. 저 통깨의 압박;;;;;;;;
방송에서는 국물이 거의 얼음으로 구성된 엄청난 시원함이 압권이었는데 실제로는 몇 덩어리만 들고 온도도 높은 편. 역시나 방송을 믿은 제가 멍청했던 거겠죠? ㅠ..ㅠ;;
각종 다양한 야채며 과일로 낸 고급스러운 육수라고 방송에 소개되었고 그 제조과정 또한 보여주었는데.. 제 입에는 미원스러움이 한 가득 밀려 들어와놔서 다양한 재료의 즐거움을 누려 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업소측 이야기로는 깃대봉냉면 보다 더 오래되었고 지역주민들은 더 높이 친다고, 깃대봉은 방송/신문덕에 뜬 것이지 자기네가 더 맛나다고 주장하시는데 제 생각에도 맞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서비스/음식의 질에서 깃대봉 보다 낫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두 집만을 서로 비교했을 떄의 이야기일뿐.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신문과 방송이 결코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저 자신 평소 잘 알고 지냅니다만 가끔은 뭐에 홀리기도 합니다. 제 입맛에 그렇다는 이야기지 이 집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다던가 맛이 형편없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류의 냉면/묵밥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겠죠.
하여튼.. 입안 가득, 혀 뿌리 까지 미원스러운 텁텁함을 가득 담고 (물로도 헹궈지지 않더군요;;) 일행의 잔소리를 뒤집어 쓰며 이 식당을 나섰는데 바로 앞의 깃대봉냉면은 여전히 수 많은 사람들이 들락이며 그 전성기를 한껏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휴일 오후를 쓸쓸히 보내는 것만 같은 아쉬움과 '아니, 저 많은 사람들이 맛 있다고 찾아가는 깃대봉을 나는 왜 별로라 여기는 것인가? 내 입맛이 너무 심하게 마이너리티스러운 것은 아닌가? 보편타당성에 대해 심각히 생각해 봐야만 하는게 아닌가?'하는 질문이 샘솟아서는 21세기 들어서 처음으로 깃대봉냉면집에 들어가서 냉면맛을 보기로 결심하고 바로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묵밥집 방문에 대한 보상심리 작용이 더 컸겠습니다만;;;
글 솜씨가 탁월하시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전 마이너리티라기 보단 Majority 에 속하거든요 ^^
생각없이 먹을땐 맛을 미원으로 낸건지 잘 구분도 못한다는 -.-
요즘 님께서 쓰신 글 보고는 어지간 하면 화학조미료, 양념 적게 쓴 음식 찾아먹으려고 합니다 .
지난 번 '평안도 만두집'을 방문했었는데 먹을 땐 좀 심심했었는데 먹고 난 후의 느낌이
참 좋더군요..
입맛이 그동안 화학조미료와 강한 양념맛에 길들여진것 같네요.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