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hiter Shade of Pale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박신우, 2009) ★☆
* 사이트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스포일러들을 대거 밝히고 있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원작소설이 발간되어 있는 마당에 굳이 스포일러라 말하기도 그렇지만...
먼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원작 <백야행>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소설 <백야행>이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을 바쳐 읽을 가치는 충분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잘 각색된다면 영화와 드라마를 위한 훌륭한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오늘 본 한국영화 <백야행>은 원작을 완전히 망쳐놓았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나눠준 보도자료에는 ‘원작자인 히가시노가 시나리오를 보고 찬사를 보냈다’고 적혀 있으나,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영화 <백야행>은 원작의 오독이고, 원작에 대한 모욕이다.
적어도 내게 소설 <백야행>은 읽기 편한 작품이 아니었다. (몇 달을 미루다 결국) 이틀 만에 3권을 후딱 읽어버렸을 정도로 재미있는 건 사실이나, 1장부터 마지막 13장까지 거의 매장마다 새로운 인물이 나와서, 외우기 힘든 일본사람 이름을 일일이 기억해야 했고, 70년대부터 90년대(원작은 일본에서 1999년에 처음 발간됐다)까지 19년의 세월을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따라잡아야 하며, 무엇보다 주변인의 입장이 되어 입을 굳게 다문 두 주인공의 마음을 읽는다는 게 무척 갑갑한 일이었다.
1970년대의 오사카. 전당포의 주인이, 공사가 중단돼 버려진 건물 1층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시체를 발견한 건 건물을 드나들며 놀던 아이었다. 남자에겐 젊은 아내가 있었고, 어린 아들이 있었고, 아내는 전당포 점원과 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짐작됐다. 전당포를 드나들던 손님을 조사하던 경찰은 전당포 주인과 각별한 사이인 여자 한 명을 지목한다. 딸과 가난하게 사는 여자의 그렇고 그런 사연을 뒤쫓던 경찰은 그녀에게 또 다른 남자가 있음을 눈치 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사고로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난한 여자마저 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얼마 전 개봉했던 <용의자 X의 헌신>처럼, 소설 <백야행>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지점에서(아니, 어쩌면 도입부에서 이미) 숨겨진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낸다. 전당포집의 외아들인 료지와 가난한 여자의 외동딸인 유키호를 중심으로, 그들이 성장하는 단계마다 접했던 사람들에게 벌어진 사건들이 하나씩 펼쳐진다. 흥미로운 건, 소설이 끝나는 지점까지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사건과 관련된 직접적인 말도 두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가 읽는 건 오직 주변의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고, 의문을 품고, 비밀에 접근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신비에 싸인 두 사람에 관한 조사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유키호는 가난했던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에 과감하게 뛰어든 인물이다. 교양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내실을 다진 다음, 신분 상승을 위해 어떤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면 료지는 사회의 구석에서 범죄를 통해 자본을 마련하고, 유키호의 삶에 장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태양 아래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유키호와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춘 료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걷는 것 같지만, 관객은 안다, 두 사람이 같은 삶을 나누고 있음을. 소설에서 두 사람이 공유한 단 하나의 대사는 “태양 아래 걷고, 살고 싶다.”는 것이다. 빛에 저항하는 여자와 빛으로부터 도망친 남자는 공히 ‘하얀 밤’을 걷고 있었으며, ‘밝은 밤’은 그들만의 악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생의 관계인 악녀 유키호와 유령 료지를, 작가는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소설 <백야행>은 어릴 적 상처 때문에 사회의 악으로 꽃 핀 두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이후 벌어진 거품경제의 폐해, 그리고 일부 일본인들의 저속한 문화를 시니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나, 그것 외부상황으로 인해 두 괴물이 탄생했다고 결론짓지 않는다. 괴물은, 혹은 악마는 현실의 어긋난 지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지, 잘못된 현실이 곧 괴물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세기말의 일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렇게 씁쓸하다. 누구도 면죄부를 구하지 못한다.
이제 영화 <백야행>을 이야기하자. 방대한 이야기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원작은 영화보다 TV드라마에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 그런데 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기를 선택했다. 게다가 연출을 맡은 사람에게 첫 장편이라고 했다. 누구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의심할 판이었다. 그러던 중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박신우는 영상원의 동료들로부터 나홍진만큼 믿을 만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 글쎄, 반쯤 믿어보기로 했던 나는 오늘 드디어 영화를 보았고, 아뿔싸, 135분의 상영시간 내내 혀를 차고야 말았다.
사건이 좀 뒤섞인 것 외에 굵은 뼈대는 유사하다. 유키호와 료지, 그리고 그들을 끈질기게 뒤쫓는 형사 사사가키의 이름은 미호, 요한, 동수로 바뀌었다. 오래 전에 전당포 주인이 살해당했고, 사건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종결됐다. 요한이 미호를 은밀히 도우는 가운데, 미호는 재벌 총수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미호를 뒷조사하던 총수의 비서실장과 15년 전 사건을 다시 파헤치던 동수가 우연히 만나 사건을 공유하게 된다.
(감독이 각본을 충실히 따랐다는 가정 하에) 각색을 맡은 박신우와 박연선, 그리고 연출을 맡은 박신우는 원작의 세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먼저 들어보자. 원작이 근 20년의 시간을 두고 전개되는 것과 달리, 영화는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진다. 왜 15년일까, 라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공소시효지 따로 뭐겠는가. 영화 <백야행>은, 살인을 저지른 소년과 소녀가 “살인해도 15년만 지나면 되니까, 우리는 그때까지 만나면 안 되는 거야. 그 이후에 우리는 행복을 찾아”라고 약속한 것으로 이해했다. 바보다. 감독 눈에는 <백야행>이 어린아이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보였나 보다.
원작에서 또렷이 밝혔듯이, 두 사람 사이에 필경 약속은 없었으며, 설령 그들이 약속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치한 사랑놀음 수준의 것이 아닐 게다. 영혼이 부서진 두 인간 - 진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여자, 어두운 통기관 속을 배회하고 있는 남자 - 는 시스템과 겨루는 악마들이지, 공소시효가 끝나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거라고 꿈꾸는 순진한 인간일 수 없다. 좋다, 다 양보해서, 미호와 요한이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비운의 커플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이 벌이는 악마적인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 영화대로라면 미호와 요한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광인들이다. 감독이 원했던,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감동적인 연인은 결코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미호와 요한이 지극히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진 거다. 일부 사람들이 유키호의 우아함 아래 자리한 무시무시한 본성을 꿰뚫기는 했지만, 보통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는 즉시 매혹 당한다. 그녀는 팜므파탈이다. 범죄를 수없이 저지르면서도 신변이 노출되지 않는 료지는 뒤쫓는 자들에게 그림자처럼 신비로운 인물이다. 주변인들이 그들의 존재를 조금씩 알아감에 따라 그들의 뼈는 살과 피를 제공받는다. 안개 속에 있으나 분명한 실체, 그게 유키호와 료지다. 그러나 미호와 요한은 3류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인물 마냥 심심 그 자체다. (원작을 뒤집어) 심지어 범죄와 관련된 대사를 직접 읊으면서도 두 사람은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빈민가의 딸에서, 중산층의 조신한 소녀로, 그리고 예쁜 여대생으로, 번듯한 가문의 며느리로, 이어 거대기업의 2세의 아내로 변신하는 유키호는 실상 자신과 (료지의) 손으로 일가를 이룬다. 그녀가 부잣집 도련님에게 몸을 바쳐 얻은 돈으로 자신의 사업을 일구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다시 말하지만 유키호와 료지는 자본주의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스스로 번 돈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차츰 건설한다. 반대로, 미호는 가르치는 학생의 부모를 이용해 돈 좀 만져보려는 한심한 선생에 불과하다. 그러다 걸려든 게 재벌총수라는 설정인데, 도무지 현실성이 없거니와, 감독이 의도한 순진녀의 행동치곤 맞지 않는다.
여선생이 학생의 부모를 유혹해 계속 잠자리를 하고, 종래엔 결혼을 성취한다는 설정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아니면 내가 한국사회를 너무 모르고 있는 건가). 정계와 재계의 리스트에 없는 정체불명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순진한 재벌가의 남자가 한국에 있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나. 그리고 미호는 선생을 관둔 즉시 (재벌의 돈으로) 거대한 규모의 부티크를 열고, 가게를 열자마자 패션쇼를 개최해 어마어마한 손님을 모으는데, 한국처럼 텃세가 심한 나라에서, 내 원 참, 개가 다 웃을 일이다(돈만 알고 자란 요즘 세대는 돈 있으면 다 되는 걸로 생각하나). 사회경험 없이 상상으로 각본 쓰는 애들, 제발 각성 좀 하자. 나이가 어려 세상을 모른다면, 거리를 걸으며 세상 돌아가는 꼴을 구경이라도 하길 바란다.
요한의 한심함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 료지가 단순한 범죄자를 뛰어넘어, 산업의 현재와 미래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밑바닥 자본가인 것과 거꾸로, 요한은 그냥 스토커다. 미호의 요구에 맞춰 척척 죄를 저지르면서도 윤리 때문에 갈등하고 눈물을 짜는 찌질한 범죄자가 그의 모습이다. 그는 미호가 찾는 카페의 맞은 편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주인마님의 기둥서방으로도 행세하는데, 그의 신변이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가 하면, 새파란 경찰이 하루 만에, 그것도 대낮에 찾아와 으름장을 놓고 갈 정도다. 원작에서 료지는 말했다. “한낮에 걷고 싶어. 내 인생은 백야 속을 걷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유키호는 말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태양이 가득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계속 어두운 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 여기서 감독과 각본을 쓴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미호와 요한이 과연 저런 대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두 사람은 ‘백야행’이라는 제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이나 해봤는지?’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은 영화 <백야행>이 날렵하게 전개되는 스릴러라고 착각할 법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이렇다. 영화 <백야행>은 원작을 얼기설기 짜깁기한 것도 모자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장면을 추가하는 우 또한 범했다. 영화를 본 뒤 아는 분에게 몇몇 어처구니없는 장면에 대해 물어봤더니 기억을 못하거나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그 중 최악은, ‘형사 동수 아들의 죽음’이다(원작에는 없는 내용이다). 환풍구에 아들을 데려가 이동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던 동수는 급기야 아들을 잃고 만다. 원작에서 환풍구는 사건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으나, 영화에선 (아이들만 그곳에 온다는 대사가 언뜻 나오는 것 외에) 환풍구에다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현장에 아들을 데려가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데, 정작 관객은 환풍구 장면이 왜 나오는지도 모른다. 각색하다 잠 자셨나.
형사 아들의 죽음은, 원작을 제대로 못 살린 것도 모자라 엉뚱하게 집어넣어 영화의 완성도에 해를 끼친 경우다. 원작에서 노형사는, 선배 세대로서 악마의 출현에 책임감과 비통함을 느끼고 그 싹을 끊으려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못 감을 거라고 말하는 거다. 그러나 영화는 아들의 죽음과 요한의 늙은 어미를 장황하게 개입시키면서 자식하게 잘못 행동한 부모세대의 슬픔을 묘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슬픔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려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파인 영화 <백야행>의 엔딩은 당연히 미호와 요한과 동수와 요한 엄마의 눈물로 채워져 있다. 원작의 인물은 결단코 눈물을 흘린 적이 없으니, 건조한 이야기를 눈물 촉촉하게 만들 걸 칭찬해야 할까.
* 새롭게 추가한 장면 중 ‘드라이브 중 사고’ 장면은, 그 생경함에 언급하기조차 괴롭다. 그 장면은 평소 요한의 완전범죄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아 인물의 특성을 영화 스스로 파괴하고 있거니와, 사고 이후 장면의 연출과 연기는 어지간한 재연드라마보다 훨씬 못하다. 원작과 별개로 내세울 만한 독창성 같은 게 이 감독과 이 각본가에겐 거의 없는 것 같다.
죽은 료지를 바라보는 유키호의 마지막 대사는 “이 남자는... 누구죠?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대사는 전율을 안긴다. 시간이 흘러도 생명을 잃지 않을 것 같은 대사는 이런 거다. 그러나 어쩌다 줄줄이 신파로 물들인 영화에는 그런 쿨함이 없다. 영화 <백야행>은 사건을 쫓다 인간을 놓쳤다. 바로 어제 나는 돈 때문에 가족을 죽인 소년의 뉴스를 들었다. 지금 세상이 그렇다. 관객은 부모 죽인 자식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극장에 가는 게 아닌데, 감독은 그들의 기구한 사연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인터뷰를 보니까, 미대 출신인 감독은 캐릭터마다 컬러를 설정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정신없는 영화를 보느라 컬러 따위는 신경도 못 쓴 나로서는, <백야행>은 빛에 관한 작품이지 색깔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고, 그리고 영화의 외형에 몰두할 시간에 인간이나 좀 더 공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불쌍한 건 배우들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와서 성가신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보다 그들의 연기가 더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손예진이 개업을 앞둔 가게 앞에서 읊는 긴 대사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앞뒤 장면의 여유와 충실한 전개조건 없이 인형처럼 이런 대사를 연기하도록 하는 감독은 아주 안 좋은 사람이다. 명배우일지라도 닭살이 돋을 상황이며, 손예진의 맞은편에 선 연기자의 멍한 표정이 그것을 방증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전체적으로 좋지 않은 데는 뻣뻣한 대사 탓이 크다. 영화는 연극과 다르다. 자기 입으로 읽었을 때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한 대사를 배우에게 권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배우들은 각자 연기하기 바쁘고, 조화는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다. 근래 들어 형사 역할를 계속 연기했던 한석규는 다시 형사 역을 맡았다. 그의 성실함은 여전하지만, 전작과 차별화되지 않은 연기에 별 매력은 없다. 손예진은 즐겨 연기하던, 미소 짓는 나쁜 년 역할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고수는 입대 전에 끔찍한 영화인 <썸>에 출연한 것도 모자라, 제대 후 다시 악몽 같은 영화를 만난 꼴이다. 최악의 대사를 부여받아 대사를 읽기에 급급한 이민정은 그저 애처롭기만 하고,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차화연도 별로 얻은 건 없다. 궁상맞은 역할을 혼자 거창하게 연기한 그녀는 새로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오히려 옛 이미지만 갉아먹었다. (ibuti)
악마는 문턱에 서 있다 :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단상 허우샤오시엔은 대만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런데 근래 그가 연출한 영화들을 과연 대만영화라 부를 수 있을까? 자국의 영화산업이 몰락한 탓에 영화 제작이 힘들던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해외 제작자였으니, 그런 영화들은 엄밀히 말해 대만영화가 아니다. 아트하우스를 만드는 대부분의 감독들이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올해 칸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오른 장편영화들을 예로 들어보자. 엔트리에 오른 19편 중 자국의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는 고작 네댓 편에 불과하다. 영화 제작을 위해 여러 나라의 제작자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사정은 알랭 레네, 켄 로치, 마르코 벨로키오 같은 거장들도 마찬가지란 이야기다. 설령 대중적이지 못할지라도 의미 있는 영화 한 편을 향해 여러 나라의 제작자가 뜻을 모은다는 건 언뜻 아름답고 괜찮은 제작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며칠 전 <호우시절>의 허진호를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제작, 배급의 과정에서 유사한 경험을 해봤을 그에게 ‘외국자본의 의미’에 대해 질문했다. 대답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블록버스터와 저예산영화 사이에 위치한 영화의 제작비 전체를 한국 내에서 구하기가 어려운 이상, 바람직한 외국자본은 도움이 된다는 게 답변이었다. 저명한 감독이나 유럽의 영화감독은 해외자본이 투입된다 해도 자기 영화의 색깔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제작자가 프랑스감독의 영화에 제작비를 댄다는 핑계로 그의 개성을 무시할 확률은 낮다. 그리고 한국처럼 어느 정도 자국영화의 기반이 잡힌 나라의 감독에겐 상황이 비슷하다. 미국영화사가 <박쥐>의 제작에 참여했을지라도 박찬욱이 그간 만들어오던 영화와 전혀 딴판인 영화를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그러하다. 영화적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외국의 자본은 도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영화적 기반이 약한 나라에 출신 배경을 둔 신인감독이다. 미지의 감독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대표적인 국가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출신의 감독들에게 지속적으로 혜택을 베풀어왔다. 만약 프랑스의 지원이 없었다면, 부르키나파소 태생인 이드리사 외드라오고가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유명감독으로 행세할 수 있었을까. 올해, 필리핀의 브리얀테 멘도사가 칸영화제에 연속 진출한 끝에 (영화기자들의 야유를 받으면서) 감독상을 거머쥔 건 또 어떤가. 프랑스의 힘이 작용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을 일이다. 멘도사의 전성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나는 모른다. 다만 외드라오고의 위상이 점점 하락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멘도사의 장밋빛 미래가 의외로 짧게 끝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작가영화를 지원하는 유럽의 제작자와 영화제는 발견에 민감하다. 자신의 발견에 스스로 도취된 자들은 유효기간이 지난 작가에게 그만큼 쉬 등을 돌린다. 십년 전 영화제를 휩쓸던 감독 중 대다수는 더 이상 유명세를 누리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더 끔찍한 일은 타자의 환호에 휩쓸려 정체성을 상실했을 때 벌어진다. 몇 년 동안 반짝거리며 신났는데, 지금 곁에 아무도 없다면, 영화의 영감마저 사라졌다면, 악몽이 따로 없다. 올해 충무로영화제는 볼품없는 상차림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몇몇 묵직한 고전영화가 없지 않았으나, 프로그램을 가득 채운 ‘듣보잡’ 영화들은 빈축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래도 형편없는 작품들 사이로 신기한 이름 몇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이 캄보디아감독 리티 판이다. 모든 작품을 프랑스의 도움으로 만든 리티 판은 근래 프랑스 평단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아시아감독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된 그의 영화 <더 씨 월>은 역겨웠다. 캄보디아 역사에 관한 투철한 시각을 견지했던 그의 작품세계는 온데간데없었다. <더 씨 월>은 여러모로 장 자크 아노의 <연인>(1992)과 닮았다. 둘 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으며, 세 프랑스인과 부유한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이야기 또한 유사한 부분이 많다. 아노와 뒤라스가 만난 <연인>에서 인도차이나의 역사가 지워진 걸 무턱대고 욕하긴 힘들지만, <더 씨 월>은 사정이 다르다. 바닷물의 범람을 막을 방파제를 쌓아올리는 건 식민지의 민중인데, 어인 일인지 영화는 백인의 시선으로 그들을 호락호락 대할 따름이다. <더 씨 월>은 인도차이나에서 고생을 겪는 프랑스 여자의 영웅담이다. 리티 판이 공산화된 조국을 탈출해 안식을 구한 나라는 프랑스였으니, 은혜를 베푼 나라에 헌사를 바치느라 애쓰는 <더 씨 월>은 뿌리를 잃은 작가의 딜레마를 절감하게 만든다. 지난 주말에 트란 안 홍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보았다. 베트남전 당시 프랑스로 이주한 베트남인인 그는 리티 판 같은 감독들의 과거, 현재임과 동시에 미래형이다. 트란 안 홍은 <그린 파파야 향기>(1993)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시클로>(1995)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순식간에 작가로 부상했지만 이후 자기 작품을 복제한 <여름의 수직선상>(2000)을 내놓으며 허술한 자질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아서, 그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빌려 예술영화를 고수하겠다고 설치다 바닥에 다다른 사이비로 자멸하고 말았다. 프랑스에서 존재를 과시하고자 트란 안 홍이 선택한 노선은 지독한 탐미주의였고, 그 결과물은 <그린 파파야 향기>으며, 이어 그는 <시클로>를 통해 떠나온 조국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슬쩍 내비쳤다. 그러던 그가 어처구니없게도 서구문화의 핵심인 기독교를 아시아의 하층민 앞으로 끌어들인다. 인간의 구원을 부르짖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고통 받는 하층민에게 자각의 메시지를 들려주기는커녕 메시아의 희망을 무책임하게 주입하느라 바쁘다. 예수와 빌라도와 악마와 막달라 마리아가 몸짓에 몸짓을 거듭하지만, <몬트리올 예수>와 <지옥의 묵시록>의 짝퉁인 영화의 공허함은 스타들의 매끈한 몸매 위로 겉돈다. 아프리카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스만 셈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치와 상징이며, 우리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영화작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타인이 제공하는 떡밥을 덥석 물고 거기에 매달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풋내기 작가들이 명심할 말이다. 영혼을 망치는 악마는 언제나 달콤한 미소로 유혹한다. 그들은 우리를 방문하기보다 항상 문턱에 서서 우리가 나갈 때를 기다리는 쪽을 선택한다.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뗄 때마다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문득 김기덕이 떠오른다. (ibuti, 2009.11. 브뤼트) * 트란 안 홍이 준비하고 있는 다음 작품은 <상실의 시대>라고 한다. 안 되니까 여기저기 찔러보는 모양인데, 아직까지 그에게 스폰서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Behind Prison Wall. 예언자 Un prophète (자크 오디아르, 2009년) ★★★★☆ 자크 오디아르의 아버지는 유명 각본가인 (그리고 몇 편의 영화를 감독한) 미셸 오디아르다.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각본가로 먼저 활동했던 그는 1994년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15년이 흐를 동안 그가 만든 장편영화는 5편에 불과하지만, 오디아르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프랑스 감독으로 불린다. 두 번째 작품 <위선적 영웅>으로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오디아르는 <내 입술 위에>와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으로 연이어 명성을 떨친 바 있다. 하지만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에도 그의 이름은 유럽 영화계와 영화제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오디아르가 세계적인 감독으로 떠오른다면 그건 신작 <예언자> 덕분일 것이다. 올해 칸영화제의 심사위원대상에 빛나는 <예언자>는 오디아르의 작품 세계를 정리해놓은 작품이다. 그간 범죄스릴러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온 오디아르는 <예언자>에 이르러 자기 스타일에 한 획을 그었다. <예언자>는 6년 형을 언도받은 범죄자 말릭의 감옥연대기다. 부모를 모르는 고아에다 아랍인 2세인 말릭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 백인사회의 그늘에서 자라야 했다. 십대시절부터 소년원을 전전하다 스무 살을 앞두고 다시 범죄를 저지른 그는 진짜 범죄자들의 세계인 교도소로 들어가게 된다. 문제는, 때마침 감옥 내 살인을 획책 중이던 코르시카 마피아조직이 말릭을 집행자로 지목하면서 벌어진다. 죽음의 협박 때문에 동족 남자를 살인한 말릭은 자기 인생이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에 휩쓸렸음을 깨닫는다. 그 뒤, 마피아 중간 보스인 세자르의 졸개로 살아가면서도 말릭은 시간을 자기편으로 놓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교도소를 장악한 거대 조직 - 코르시카 마피아, 아랍계 범죄조직, 집시 마약조직 - 사이에서 자기가 다리를 뻗을 자리를 개척하면서, 철없던 소년이던 말릭은 점차 의젓한 남자로 탈바꿈한다. <내 입술 위에>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평범한 사무직 여자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교도소에서 갓 출감한 남자와 인연을 맺으면서 낯선 범죄의 기운을 맛본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는, 불순한 행위로 사업을 영위하던 부동산업자가 뒤늦게 예술에 눈을 떠 인간성을 회복하고 삶의 길을 틀게 된다. 범죄와 조우한 여자의 이야기와 어렵사리 범죄와 작별을 고한 남자의 이야기를 잇는 <예언자>는 아예 한 범죄자의 단면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범죄를 통해 독특한 휴먼 드라마를 그려온, 바꿔 말하면 장르영화를 오디아르식으로 조리해온 오디아르는 지금쯤이면 범죄자의 순수한 초상을 완성할 시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가 배경인 본격 범죄영화를 만들면서도 전통적인 스타일을 따를 생각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예언자>는 주인공을 비극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음으로써 평범한 범죄스릴러에서 탈피해 비범함을 득한다. 말릭은 가공의 인물이라기보다 실재하는 듯이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처럼 보이고, 영화는 값싼 감정에 동요하거나 비극의 요소를 함부로 개입시키지 않은 채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묵묵히 뒤따른다. 사실주의영화에 대한 열정을 간직한 오디아르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실과 닮았을 때, 그 영화는 흥미롭다”고 말한다. 전작들과 비교해도, 오디아르가 <예언자>에 기울인 정성은 유별나다. 마티외 카소비츠, 뱅상 카셀, 엠마누엘 데보, 로맹 뒤리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나 떠오르는 스타를 기용했던 전작들과 달리, <예언자>의 주인공인 타하르 라힘은 막 연기를 시작한 인물이며, 교도소 내 죄수를 연기한 사람 중 많은 수가 실제 수감자들이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인물의 배치와 촬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영화의 리얼리즘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됐다”고 오디아르는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예언자>에서 주목할 첫 번째는 ‘감독이 인물에 접근하는 자세’다. <예언자>를 두고, 영화가 한 인물을 탐구하면서 세운 금자탑이라고 치켜세우더라도 그건 과언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범죄자는 100년 영화역사에서 가장 많이 착취당한 인물에 해당한다. 영화를 보는 대다수 관객과 동떨어진 인물인 만큼, 범죄자에 대한 묘사는 종종 비현실적이기 마련이고, 사회의 기준과 윤리에 맞춰 인물은 적당히 조작되기 일쑤다. 뒷골목에서 비참하게 죽는 범죄자나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 자기파괴적인 인물을 보면서 관객은 짜릿한 감동과 함께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현실의 범죄자들이 과연 그럴까. 너무나 많은 범죄드라마는 극중 인물도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으며, 종래엔 범죄자의 존재가 무책임하게 내버려지는 결말로 이어진다. <예언자>는 다르다. 물론 여기에도 죽음은 있으나, 피 한번 보여주겠다고,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진행해 보겠다고 값 싸게 이용되는 죽음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소설 속 인물이 존재감을 획득하도록 소설가가 전력을 경주하는 것처럼, 오디아르는 혼신을 다해 말릭이라는 인물과 마주했다(오디아르는 <예언자>의 메이킹필름을 자기 아이들이 보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다. 현장에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했으면 그런 말을 하겠는가). 영화와 인물의 사실성 추구로 인해 자칫 유사다큐멘터리로 읽힐 법하지만, <예언자>는 사실적인 접근에 더해 인물의 내면으로 파고들면서 드라마의 입체성 또한 구축한다. 말릭을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밖으로 보이는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교도소 안팎의 범죄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한 남자의 행동유형과 그 여파에 관한 영화다. 말릭은 교도소 내의 폭력적인 상황에 직면해 끊임없이 존재의 입지를 강화하려 애쓴다. 그는 교육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문맹에서 벗어나는 한편, 주변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권력의 반경을 넓히는 활동을 펼친다. 언뜻 별 것 아닌 행동들이 나열되는 듯 보이지만, 말릭이 끝내 성취하는 거물의 위치는 6년 동안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모이고 모인 결과다. 거대한 물살은 조그만 물방울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만약 단 몇 가지의 사건 뒤에 영화의 결말이 제시됐다면 이만큼의 설득력을 구하지 못했을 게다. 말릭을 읽는 두 번째 방법은 어슴푸레하게나마 심리적 여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사실주의영화에서 놀랍게도, 말릭이 살해한 남자의 유령이 주저 없이 등장해 감방을 방문한다. 그렇다고 유령이 말릭의 죄의식을 물고 늘어지는 일은 없다. 조금은 귀찮고 서먹서먹한 친구라도 되는 양, 한 남자와 한 남자의 유령은 의견을 나누며, 간혹 둘의 대화는 초월적인 지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 내에서 보기 힘든 순수와 서정성을 갈망이라도 하듯, 영화의 어두운 부분에 한줄기 빛을 비추려는 듯, 카메라는 사슴과 나뭇잎의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문득문득 제시한다. 만약 이러한 장치들이 없었다면, 말릭의 형상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그는 짐승 같은 범죄자로 남았을 테고, 기껏해야 교도소 내의 정치에 능한 똑똑한 범죄자에 머물렀을 것이다. 교도소의 갑갑한 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요소들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로 말릭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확장하며, 이렇게 완성된 말릭이라는 인물은, 고유한 영화적 인물이 아닌, 일반적인 범죄자의 한 전형으로 귀결된다. 그런 점에서 말릭은, 낭만적인 범죄자의 대명사인 ‘빠삐용’과 대척점에 선다. <예언자>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붙어있던 정관사(le, the)가 지금의 부정관사(un, a)로 바뀐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말릭은 예언자 모하멧처럼 어마어마한 인물이 아니라, 간혹 예언을 행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오디아르는 “말릭은 훌륭한 인물이다. 배움에 대한 좋은 자세를 지녔고, 잘 적응하며, 용기를 갖추었다. 그는 폭력을 극복한 지혜의 승리에 다름 아니다.”고 말했다. 이렇듯 인간의 성장과 승리의 드라마로 읽어도 좋고, 영화를 빌려 권력의 구조, 계급의 형성, 인종차별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나, <예언자>의 진정한 위대함은 범죄자를 투명한 존재로 대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거야말로 누구나 머리로 이해할 수 있으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 아니던가. 범죄란,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고 남에게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다른 사람의 재산 또는 명예에 손상을 입히는 일체의 ’행위‘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범죄의 행위이지 범죄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이해 없이 단순히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말라는 설득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범죄자의 오롯한 초상인 <예언자>는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혼란에 빠지지 않은 드문 영화다. <예언자>는 범죄자를 한 인간으로서 무턱대고 옹호하기보다, 범죄의 삶을 살았던 인간을 직시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극장의 문을 나서는 관객에게 ‘인물에 대한 판단, 범죄의 사슬과 영향에 대한 고민, 올바른 삶의 추구’를 각자의 화두로 남겨둔다. (ibuti, 2009.10.30. 서울신문) * 유럽영화제에서 상영된 <예언자>의 필름에는 수입사의 이름과 한글 자막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200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더 클래스>가 수입되었으면서도 아직까지 개봉되지 않을 걸 보면, <예언자>의 이른 개봉을 낙관하진 못하겠다.
‘시네마디지털서울 2009’의 ‘한국단편경쟁’ 부문의 예선심사를 맡았다. ‘시네마디지털서울’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본선에 오를 15편의 단편영화를 선정하는 데 있어 예심위원 전원의 동의를 구한다는 사실이다. 언뜻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엔트리를 꼽을 수 있었다. 15편 모두 추천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란 뜻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더 호감을 느끼는 작품이 있다. <7×7㎡>(고석희, 김현동, 백태경, 황혜온), <시향의 브람스>(손미), <어느 게이 소년의 죽음>(강상우), <겨울이 온다>(소봉섭), <낯선 꿈들>(김지곤)이 그 이름들이다. 한 편을 꼽으라면 <낯선 꿈들>이 아닐까 싶다. 영화제 카탈로그용으로, 경쟁에 오른 15편 가운데 4편 영화와, ‘한국단편초청’ 부문에 초대된 <남매의 집>의 리뷰를 썼다. 이를 블로그에 올린다.
<7×7㎡> : 한국단편경쟁 감독: 고석희, 김현동, 백태경, 황혜온 시간: 42분 2003년. 이십대 초반의 혈기 넘치는 청년 강현구와 재기전을 준비해온 서른 중반의 아저씨 최영익이 링 위에서 만나 각각 한 번씩의 승리와 패배를 나눈다. 이제 카메라 앞에 앉은 두 사람이 5년 전의 시합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삶(과 미래의 꿈)이 어떠한지 들려준다. 보안업체에서 일하는 강현구는 경찰의 꿈을 이루려고 밤 시간을 쪼개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한다. 작은 공장의 사장으로서 운영난을 헤쳐 나가는 중인 최영익은 불치병에 걸린 아내와 성장하고 있는 세 아이에게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7×7㎡’은 링의 면적이다. 만약 <7×7㎡>가 옛 시합을 되새기는 선에서 그쳤다면 영화의 너비는 딱 그만큼일 것이다. 스크린의 사이즈가 세상과 인간을 다 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고백하는 양, <7×7㎡>는 인물의 바로 앞에서 눈과 귀만 열어둔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멋을 부리지 않는 카메라는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거나 감상적인 분위기를 부여안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7×7㎡>은 인물에게서 ‘가식 없는 목소리와 솔직한 마음’을 끌어냄으로써 다큐멘터리의 구획을 확장하고 2차원의 공간에 입체감을 더한다. 그것만으로도 <7×7㎡>의 성과는 적지 않으나, 네 감독은 두 인물이 ‘황금의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진짜 행운을 얻는다.
웃음으로 ‘선의의 승부’를 시작하고 마무리 지었던 두 남자는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도 아름다운 자세를 잃지 않는다. 겸손하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다는 강현구가 사람들 밑에서 일하겠다고 다짐할 때, 아내 육체의 허물이 사랑스럽다는 최영익이 지금 행복하다며 미소를 지을 때, 누군가는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로 삼을지도 모른다. 교육적 기능이 우선하는 다큐멘터리를 의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7×7㎡>이 썩 훌륭한 교훈극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겨울이 온다> : 한국단편경쟁 감독: 소봉섭 시간: 32분 두 소년이 아파트 복도에 앉아 있다. 한 아이가 내려간 뒤, 다른 아이는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다음 날, 학교에는 갖가지 소문이 돈다. 누군가는 죽은 아이에게 여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고, 죽은 아이 곁의 누군가를 보았다는 아파트 주민도 있단다. 친구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도망친 소년은 혼란스럽다. 죽은 친구에게 처벌을 가한 선생에게 죄를 묻기도 하고, 죽은 친구가 벌을 받도록 원인을 제공한 녀석에게 따지기도 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파트 복도에 다시 선 소년은 어두운 세상을 바라본다. 찬바람이 불고, 힘겨운 숨소리가 들린다. <겨울이 온다>의 시작은 짧은 미스터리다. 아이는 왜 죽은 것일까? <겨울이 온다>는 죄를 지우려는 아이의 가짜 탐정놀이로 이어진다. 아무도 비밀을 알아선 안 되며, 비밀을 들키기 전에 얼른 다른 사람의 죄를 추궁해야 한다. <겨울이 온다>의 마지막 장은 속죄를 완수하지 못한 자의 비록이다. 죄를 지은 자들은 협잡을 공모하고, 나약한 죄인은 악당들의 공모에 동조하며, 죽은 아이의 진실은 그렇게 묻힌다. 소년은 눈바람과 함께 겨울이 왔음을 느낀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건 알지 못한다.
하이틴무비로서 <겨울이 온다>는 각별하다. 감독은 옛 추억을 불러내거나 이야기를 재현할 마음이 없으며, 대신 십대라는 차가운 시간의 중심으로 관객을 곧장 내몬다. 그리고 관객은 미처 마음의 준비도 마치지 못한 가운데 고등학교의 사회와 정치를 목도하게 된다. 체온은 점점 싸늘해지고 시린 마음은 얼음을 머금은 듯하니, <겨울이 온다>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닌) ‘실감’의 영화라 부를 만하다. 보기 드물게 대상과 일체를 이룬 수작이다.
<김 문 정> : 한국단편경쟁 감독: 이지연 시간: 21분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김문정은 요즘 넋을 잃고 산다. 동거하는 조카나 주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가하면, 고객에게 잘못된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고객의 불만을 제대로 처리하라는 팀장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거리로 나선다. 문정은 힘든 걸음으로 고객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도리어 불친절한 말투로 맥을 놓게 만든다. 고객을 기다리느라 계단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아까 거리에서 언뜻 마주쳤던 생즙 외판원이 다가와 즙 하나를 준다. 혼자 밥 먹기가 싫었다는 그녀는 문정에게 같이 식사하기를 권하고, 문정은 그녀의 집에서 선잠을 청한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감정을 숨기고 사는 김문정은 죽은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를 둘러싼 외부세계뿐 아니라,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녀는 소중했던 사람의 상실로 세상과 벽을 쌓고 사는데, 보이지 않는 고객과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일과로 인해 벽은 더욱 두꺼워진다. 낯선 여인과의 만남은 문정의 삶의 감각을 조금씩 일깨우고, 그녀는 막혀 있던 감정을 실로 오랜만에 분출한다. 슬픔을 느끼는 데서 흘러나오는 눈물 한 방울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런 게 바로 삶의 기적이다. <김 문 정>은 무심하다. 기껏 창조해낸 인물이 저절로 생겨난 듯, 카메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인물을 사부자기 뒤따르고, 이야기엔 좀체 개입하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에겐 불친절한 영화의 태도가 역으로 인물에게 행동의 자유를 선사한다(물론 착각이겠으나, 그녀는 감독의 지시와 무관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김 문 정>은 알베르 세라의 디지털영화와 닮았다. 카메라의 오랜 기다림 끝에 인물은 기어코 소중한 의미를 드러내고, 그 때야 관객은 감독의 존재와 마음을 인지하게 된다.
<사자를 만나다> : 한국단편경쟁 감독 : 김은호 시간 : 22분 숨을 헐떡이며 쫓기던 남자가 외딴 골목에서 사자를 만난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사자와 조우하기까지 며칠 전으로 되돌아간다. 직장을 구하고자 애쓰는 남자에게 뚜렷한 목표란 없다. 학원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지만, 일반회사의 면접 기회가 있으면 별 생각 없이 응하곤 한다. 실직해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아버지 또한 그에게 별 힘이 되지 못한다. 두 남자와 달리, 주인공의 여자 친구는 동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해 부지런을 떠는 운동가다. 남자가 아버지의 카메라를 팔아 수험서를 마련할 동안, 그녀는 목숨이 위태로운 동물들을 풀어주는 모험을 감행한다. <사자를 만나다>는 이해하기 쉬운 상징들로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다. 몽상에 가까운 목표를 향해 동분서주하는 여자가 삶의 주체로, 생명의 보호자로 그려진 반면, 무기력한 모습의 남자들은 코앞의 밥벌이를 구하는 데 급급한 존재에 불과하다. 남자와 아버지가 사는 집에 뜬금없이 붙어 있는 ‘자양강장음료 광고 포스터’의 ‘정력 넘치는 남자’는 볼품없는 두 남자를 비웃듯이 바라본다.
그러니 극중 사자가 ‘퇴색한 이상과 잃어버린 정체성’을 뜻하는 건 빤한데, 감독은 ‘사자와의 만남’과 ‘쓰레기를 뒤지는 뒷골목의 맹수’ 사이에서 어디를 강조할지 망설인다. 만약 사자와의 만남에 더 의미를 두었다면, 야나기마치 미츠오의 <불의 축제>가 그랬듯이, 이상의 광경을 접한 야생의 남자가 현실에 얽매인 인간군상에게 칼을 들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자를 만났음에도 자각에 이르지 못하는 주인공을 빌린 영화는 현대인들이 초라한 행색의 사자처럼 살아가는 현실을 다독이기를 선택한다. “넌 어떻게 살 건데?”라는 여자 친구의 물음에 남자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으나, 그건 비단 그만의 잘못이 아니다. 누군들 확신에 찬 삶을 살고 있단 말인가.
<남매의 집> : 한국단편초대 감독: 조성희 시간: 44분 철수와 순이는 반 지하에 위치한 누추한 집에 산다. ‘절대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 아버지는 오랫동안 소식조차 없고, 아이들의 호졸근한 몰골은 그들이 어른의 보호 없이 방치되어 왔음을 말한다. 소년은 풀었던 문제지를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풀기를 반복하고, 절을 하고 싶다며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소녀는 하릴없이 크레용으로 벽을 칠한다. ‘별 대왕’을 그려놓은 순이는, 창밖의 사람들이 그를 대장으로 추종하는 걸 보았다고 일러준다. 그 때 벨이 울린다. 낯선 남자는 물을 달라고 했다. 5분만 머물다 나가겠다던 그는 다른 두 악당을 불러들인다. <남매의 집>은 단편영화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이질적인 장르들을 놀랍도록 응집한 뒤 폭발시킨 조성희는 제한된 시간을 충만의 양식으로 꽉 채운다. <남매의 집>은 두려움의 근원에 접근하는 공포영화이고, 현실의 폐소공포증을 미래사회의 묵시록으로 뒤바꾼 SF영화이고, 한정된 공간 속에 극단적으로 기괴한 인물들을 몰아넣은 실험극이고, 인간본성의 기저에서 윤리를 질타하는 드라마이고, 몸과 이성과 의지를 박탈당한 인간들의 코미디다.
불현 듯 미래의 기억처럼 보이는 <남매의 집>이 정말로 무시무시한 이유는, 이 영화가 어쩌면 까맣게 잊힌 과거의 상처를 저장고에서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 ‘범죄적인 것이 구원과 역사로 칭송받게 되는 그런 반란’을 언급했다. 선한 아이들을 구원할 구세주의 자리에 사기꾼, 살인마, 정신병자가 침입해 위협하는 형세는 한국 근대사회의 비극을 암시한다. ‘수퍼맨’의 상징이 박힌 티셔츠를 입었으나 동생은커녕 자신도 지키지 못한 철수는 죽었다 살아난 새를 멍하니 쳐다본다. 약 기운으로 부활한 새는 과거의 새와 동일한 생명체일까, 그리고 새장 속의 새를 과연 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매의 집>은 ‘아기 돼지 삼형제’에서 읽은 동화 같은 일들이 현실에선 벌어지지 않음을 다시금 깨우쳐 주는 잔혹한 동화다. (ibuti)
“이 영화는 이야기가 아닌, 언덕 위에 선 두 소녀의 이미지로 먼저 다가왔어요. 그리고 나는 ‘Treeless Mountain'이라는 단어를 썼죠. 그걸 왜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단지 그들은 작은 막대기를 들고 나란히 서 있었거든요. 거기서 이야기가 발전한 거예요.” _ 김소영. 미국영화지 ‘필름코멘트’와의 인터뷰 중에서. 2003년 즈음에 시작된 기획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그 사이에 김소영은 <방황하는 날들>(2006년)을 만들었다. 김소영에게 이 작업은 오랫동안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그녀는 ‘한국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지, 배우들을 어떻게 찾아낼지’ 고민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러다 영화제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를 본 김소영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오즈 야스지로의 <태어나긴 했다만>, 자크 드와이용의 <포네트>,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의 영향 아래 완성돼 이미 외국의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반응을 얻어낸 <나무없는 산>이 한국에서 곧 개봉될 예정이다. 아버지가 떠나버린 집. 6살 소녀 진과 동생 빈은 엄마와 산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엄마는 두 자매를 시골의 고모 집에 맡겨두고 떠난다. 돼지저금통이 꽉 차면 돌아오겠다는 엄마의 말은 아이들에게 주문이 된다. 메뚜기를 구워 팔고, 100원 동전을 10원짜리 동전으로 바꿔가며, 진과 빈은 빨간 저금통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고모는 두 아이를 외할아버지 댁으로 데려간다. 세상모르고 언니만 따르는 빈은 진에게 자꾸 묻는다. “엄마는 언제 와?” 시간이 흐르면서 진의 대답은 차츰 달라진다. “엄만 안 와, 바보야”, 그리고 “공부나 해”, 그리고 “엄마는 꼭 올 거야” 이렇게 예쁜 아이를 버려두는 어른이 있을까만, 세상에는 그런 일이 흔하고 흔하다(빈 역을 맡은 김성희 꼬마는 실제로 고아원에 살고 있다). 어른의 태도를 꾸짖듯 스스로 살아가는 두 아이의 모습은 큰 채찍이 되어 다시 어른에게로 향한다. 삶의 터전이 도시에서 조그만 읍내(감독의 고향인 흥해)로, 이어 시골마을로 점차 옮겨 가면서, 진은 공부할 곳에서 멀어지고, 빈의 드레스에는 때가 묻고, 또래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진다. 결국 두 아이의 곁에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할머니만 남는다. 영락없이 소녀의 수난사처럼 전개되는 <나무없는 산>은, 그러나 고맙게도 잔혹한 인생이야기가 아니다. 김소영은 과감한 클로즈업을 즐겨 사용한다. 전작 <방황하는 날들>에서 그랬고, 어린 두 비전문배우가 주연을 맡은 <나무없는 산>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무없는 산>은 두 소녀가 세상에 펼치는 표정들의 파노라마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조금씩 인식하면서, 천진난만한 두 소녀의 눈동자는 흔들림을 거듭한다. 특히, 똑똑한 언니지만 여전히 오줌싸개인 진은 투정을 부리고, 반항의 몸짓을 시도하고, 거짓을 경험하고, 눈물을 배운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세상 앞에서, 두 소녀의 영혼이 한 치도 더러워지지 않음을, 관객은 목도한다. <나무없는 산>은 아름다운 영혼이 담긴 얼굴의 기록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속의 풍경>에서 보았듯이, 나무는 아이가 기댈 곳, 즉 아버지의 메타포다. 의지할 데 없는 아이는 방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무없는 산>은 ‘나무’가 아닌 ‘산’에 방점을 찍는다. 이상하리만치 아버지의 모습을 제거한 <나무없는 산>에서 눈여겨 볼 점은 ‘여성들의 연대 혹은 연계’다. 극중 엄마와 고모는 두 아이를 버린다기보다 생명의 근원으로 인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두 아이가 머무는 할머니의 품은 산과 땅, 그러니까 생명을 살리는 공간을 의미한다. 말라죽을 뻔 했던 두 아이는 위대한 자연과 대지, 사랑의 힘으로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건강한 생명의 빛을 발한다. <나무없는 산>은 유치원에서 공부하는 진의 클로즈업으로 불쑥 시작한다. 공부 잘하는 소녀는 소리 내어 답을 외치거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선생을 바라본다. 그러던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클로즈업을 줄이고 넓은 전경을 자주 담는다. 어린 배우의 부담감을 없애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없는 산>은, 할머니와 대지의 환경에 적응한 아이들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언덕을 넘어가는 진과 빈의 모습을 담은 엔딩은 오프닝과 정반대의 정서를 전달한다. 갇힌 공간에서 벗어나 건강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이제 자연과 동화된 모습이다. 우리들의 귀여운 아이들은 바야흐로 그들의 길을 걷는다. 김소영은 ‘하늘’의 표정을 영화에 종종 삽입하곤 한다. <방황하는 날들>에선 노을 진 차가운 하늘이 긴 시간 동안 관객에게 노출되는데, 그것은 퍼렇게 멍이 든 소녀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김소영은<나무없는 산>에서 하늘을 더 많이 찾는다. 하늘의 얼굴은 매번 다르다. 구름이 낀 파란 하늘이 나오고, 해가 져붉은 하늘이 나오고,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한 하늘이 나온다. 무심한 듯 변화무쌍한 하늘 밑에서, 점점 성장하는 인간은 하늘과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김소영의 영화는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성장 이야기인 게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인간의 이야기, 김소영이 소원하는 영화는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머니의 이혼으로 김소영은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녀의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러한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방황하는 날들>과 달리, <나무없는 산>은 분명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모태로 삼았으면서도 다른 길을 간다. "<나무없는 산>의 주인공 진은 감독의 과거 모습에서 분리돼 독자적인 행보를 이룬다"고 김소영은 말한다. 유아기의 기억과 상처를 다룬 작품이 자칫 빠지기 쉬운 신파와 유치한 재현을, <나무없는 산>은 가뿐하게 넘어선다. 신화적인(결코 과장이 아니다) 두 인물을 통해 <나무없는 산>은 상처와 기억을 승화하는 경지에 오른다. 두 소녀가 ‘돼지 저금통’을 내미는 장면의 거룩함을 보라. 아무리 찬란한 보석도 <나무없는 산들>의 영롱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ibuti, 2009.8.14. 서울신문) * 의 첫 번째 한국어 제목은 <민둥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