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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반두비 (신동일, 2009) ★★★★☆
리뷰 1.
카림은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전 직장의 사장이 고의로 부도를 내고 잠적한 뒤, 그는 떼인 임금을 받아내려고 서울의 곳곳을 걷고 또 걷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무시와 땀방울뿐, 그에게 한국은 비정하고 무시무시한 곳이다. 한편 고등학생 민서는 심심한 여름방학을 맞는다. 친구들은 죄다 영어학원에 가버리고, 노래방을 운영하는 엄마는 애인에게 한눈을 팔고 있는데, 소녀는 어쩌다 아르바이트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만난 건 버스 안. 카림이 떨어트린 지갑을 챙긴 민서는 곧 그에게 잡히고 만다. 경찰서로 끌고 가려는 카림에게 민서가 제안한다.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알게 되고, 까만 얼굴의 외국인을 낯설게 느끼던 소녀는 그에게서 점차 황금의 마음을 발견한다.
지식의 횡단과 월경을 당연시하는 자에게 학문의 서열은 따로 없다. 반대로 우리는 문화 횡단의 기본 바탕이 되는 인간의 유목에 대해 왜곡된 이중 잣대를 지닌 채 산다. 예를 들어보자. 노동과 자본의 불균등한 배치는 인간을 끊임없이 이동하게 만드는데, 그 중 하나의 형태가 후진국 출신 이주노동자가 선진국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거다. 한국 경제의 성장에 따라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한국 내에서 활동하면서, 작금의 상황에 반응하는 다양한 시각을 접하게 된다. 어떤 한국인은 사업 파트너로 만난 백인을 지식의 전파자로 인식하는 반면, 소박한 행색의 이주노동자는 사회의 밑바닥을 채우는 존재로 여긴다. 또 다른 한국인은 한국 사회와 문화에 적응하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에 흡족해 하며, 그들을 따뜻이 대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어떤 경우에도 이주노동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가난이 인간의 서열을 매긴다는 착각, 그것이 자본주의사회의 한 비극이다.
<반두비>는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이어 신동일이 만든 세 번째 장편영화이자, 그가 의도한 ‘관계 3부작’을 완결 짓는 작품이다. ‘방문’의 메타포를 통해 한국사회의 인간관계를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신동일은 <반두비>에 이르러 영화의 주제를 ‘노마디즘’으로 확장한다. ‘유목’을 21세기의 필연적인 패러다임으로 앞세운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는 ‘불에서 예술에 이르기까지, 글자에서 야금술에 이르기까지, 농경에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신에서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유목하는 인간들이 모든 문명의 토대를 발명했다’라고 주장한다. 굳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생존 때문에 세계를 떠도는 게 현실인 이상, 우리는 그 현실 위에서 새롭고 풍성한 삶의 방식을 창조해야 한다. 유목민으로서의 이주노동자와 정착민으로서의 내국인 사이에 놓인 문제를 제기하는 <반두비>가 단순한 사회파영화를 초월한 작품으로 읽히는 건 그래서다. <반두비>는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어서 독파하도록 격려하는, 그런 영화다.
언뜻 당돌한 여고생처럼 보이는 민서는 성스러운 소녀이고 모험가다. 기껏 인터넷 안에서 세계를 유람하는 아이들과 달리, 민서는 발과 다리의 미덕을 아는 소녀다. 다리가 모험을 위한 신의 선물인 양, 소녀는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여물지 않은 머리를 단련시킨다(미숙하나 때 묻지 않았고, 성급하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감독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민서가 순대국밥을 기피하는 모슬렘에게 의아해 할 때, 카메라는 소녀의 생각에 맞춰 덩달아 흔들거린다. 마침내 영화의 결말에 도달하면, 관객은 처음으로 말없이 정지한 카메라를 본다. 그 순간, 소녀는 타자의 음식을 손으로 척척 집어 오물거린다. 그 사이의 변화와 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신동일이 관객에게 원했던 바일 게다. 인간은 그들이 발을 딛고 선 땅과 같아서, 각각 독립된 개인으로 나서기보다 연결된 개체로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고, 그러자면 인간 사이의 틈보다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 민서는 어느새 정착민과 유목민 사이에서 균형을 찾은 모습이다. 열린 마음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인간애로부터 비롯된 숭고한 실천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그런 인간이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훌륭한 곳으로 만든다.
진지한 주제의식을 갖춘 <반두비>는 의외라 할 정도로 통쾌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 통괘함은 비판받아 마땅한 현 체제와 미디어를 두고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댄 데서 기인한다. 곳곳에서 등장하는 이니셜 ‘MB’와 특정 언론사의 언급은 감독의 분노와 항변과 조롱의 표현이다. 대다수의 대중영화가 현실 정치와 사회문제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지금, <반두비>의 용감무쌍함이 돋보이는 건 당연하다. 혹자는 <반두비>의 딱딱함과 교조적인 성격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건 신동일의 화법과 진심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게다가 그가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미심쩍은 딱지가 붙는 현실이고 보면, 그가 직설적이고 확고한 자세를 취한 게 꼭 불편해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고약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일부 한국인이 <반두비>의 제작에 반대하며 제작진과 출연배우에게 협박을 가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린 민서를 보며 수치심을 느껴야 할 인간들이 참 많은 세상이다. (ibuti, 2009.7. 브뤼트)
리뷰2.
한국의 여름.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 카림은 떼인 임금을 받으려고 서울의 길을 걷고 또 걷지만, 고의로 부도를 내고 잠적한 사장은 만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에게 한국은 비정한 곳이다. 한편 고등학생 민서는 심심한 방학을 맞는다. 친구들은 죄다 학원에 가버리고, 노래방을 운영하는 엄마는 애인에게 한눈을 팔고 있으며, 소녀는 어쩌다 아르바이트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마을버스를 타다 만난다. 까만 얼굴의 외국인을 낯설게 느끼던 소녀는 그에게서 점차 황금의 마음을 발견한다.
신동일은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이어 <반두비>를 완성함으로써 ‘관계 3부작’ 시리즈를 완결하였다. ‘방문’의 메타포를 통해 한국사회의 인간관계를 치밀하게 바라보았던 그는 <반두비>에 이르러 주제를 ‘노마디즘’으로 확장한다. 우리는 지식의 횡단과 월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정작 유목하는 인간에 대해선 왜곡된 이중 잣대를 지닌 채 산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백인 파트너로부터는 지식을 전파 받으려고 하면서, 소박한 차림의 이주노동자는 사회의 밑바닥을 채우는 존재로 대하는 게다. 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고약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일부 한국인은 <반두비>의 제작을 반대한다며 제작진과 출연배우에게 협박을 가했다고 한다. 인종 간에 근본적인 서열이 존재한다고 믿는 저질 인종주의자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할 따름이다. 인간은 고립된 상태로 살 수 없으며, 인간과 민족과 국가 사이의 상호작용이 없었다면 인류는 발전하지 못했다. 인종주의자는 오로지 한 인종에 의해 인류 문화가 향상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반두비>는 갖가지 이유로 다양한 인간이 지구촌을 떠도는 현실을 향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동일은 당돌한 소녀 민서가 한 인간으로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희망을 건다. 민서는 자신의 두 다리가 모험을 원하는 걸 아는 소녀이며, 운명처럼 다가온 여름방학은 소녀에게 모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마무리될 즈음, 소녀는 한층 성숙한 인간으로 자란다. 신동일은 소녀의 변화를 단 두 장면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진실은, 순대국밥을 기피하는 모슬렘을 이해하지 못하던 소녀와 그들의 음식을 손으로 척척 먹는 소녀의 모습 사이에 놓여 있다. 존중과 인간애로부터 비롯된 숭고한 실천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든다.
대다수의 대중영화가 현실 정치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지금, <반두비>는 진정으로 용감한 영화이기도 하다. 비판받아 마땅한 체제와 미디어를 두고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대는 <반두비>는 영화의 또 다른 역할을 숙고하도록 한다. 혹자는 <반두비>가 딱딱하고 교조적이라고 평하지만, 그건 신동일의 화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게다가 그가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미심쩍은 딱지가 붙는 현실이고 보면, 그가 직설적이고 확고한 자세를 취한 게 불편해할 일은 아니지 싶다. (ibuti, 2009.6.26.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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