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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 of A Murder.
마더 (봉준호, 2009) ★★★★☆
쉿, 아가야, 울지 마렴.
엄마는 네 악몽을 현실로 만들어줄 거야.
엄마는 모든 악몽을 네게 주입할 거야.
엄마는 날개 아래로 널 지켜줄 거야.
나는 건 허락하지 않겠지만, 노래하게 만들 거야.
엄마는 아기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줄 거야.
오, 아가야. 오, 아가야.
물론, 엄마는 네가 벽을 치도록 도울 거야.
_ 핑크 플로이드의 <마더> 중에서.
* 도처에 스포일러가 깔려 있는 글이다.
3백만 관객을 향한 <마더>의 발걸음이 힘겹다. 어떻게 된 일일까. <마더>의 관객 수는, 봉준호의 이름이 브랜드가 되기 전에 개봉한 <살인의 추억>의 그것의 반이 되지 못하고, 그를 국민감독으로 등극시킨 <괴물>의 관객 수의 20퍼센트를 조금 상회하는 정도다. 이것은 아마도 요즘 한국영화판의 한 경향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작가주의 영화가 조금씩 퇴보한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소박한 모양새의 대중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들에 비해 <마더>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무겁고, 주제 또한 심각해서 대중들의 눈 밖에 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더>의 흥행 부진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마더>를 관객의 벽에 부딪히게 만든 첫 번째 요인은 ‘주인공의 성격과 결말’이 아닐까 한다. 대중은 도덕적으로 명확하게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을 원하고, 대개의 경우 인물이 맞닥뜨린 상황이 깨끗하게 종료되기를 바란다. 김혜자가 분한 인물은, TV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아오던 여배우에게 관객이 기대했던 무엇과 분명 달랐다. 그녀는 어머니로 받아들이기에 부적합해 보였으며, 내 어머니와 비교하기에 두려운 인물이었다. 글쎄, 당신이 누군가의 어머니라면 또 모르겠다. 그럴 수 있을지도, 그래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마더>는 살인 혐의로 체포된 아들을 둔 엄마의 이야기다. 봉준호의 비범했던 전작을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리는 아들과 지나칠 정도로 아들에게 집착하는 엄마의 사연이 안일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리라고 예상했을 게다. <마더>의 주인공은 전통적인 엄마상이 오롯이 깃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스 비극에서 튀어나온 듯 극단적이고 열정적이며 야만적인 속성이 숨쉬는, 그런 인물이다. 그러므로 엄마의 순박한 자식사랑을 다룬 착한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마음을 바꿔 먹어야 한다. 문제는 관객이 그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불편하다고 말한다.
봉준호의 (중단편을 포함한) 모든 영화에는 ‘무언가를 뒤쫓는 인간의 뜀박질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뒤쫓는데도 그들의 얼굴은 편하지 못하다. 그들의 마음에 응어리를 조성하는 건 그 ‘무언가’이다. 무언가의 정체를 알지 못할 때(<플란다스의 개>), 무언가의 기미도 눈에 잡히지 않을 때(<살인의 추억>), 상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목격했을 때(<괴물>), 인간은 불안에 휩싸이고, 결국 그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쫓고 쫓는다. 그것은 단순한 추격을 넘어 ‘불안의 징후’를 의미하며, 언제나 내달리는 인물들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쉬기보다 뛰기에 더 전념해온 우리들의 모습을 은유한다.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미치도록 달렸던 것일까.
<마더>의 주인공,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쫓는 ‘진실’의 정체를 반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녀는 영화 내내 ‘내 아들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진실’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그 진실의 본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믿고 따르던 신념의 끝에서 끔찍한 진실을 목격한다면, 당신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이겠는가? 그 지점에서부터 ‘진실 - 살인자가 누구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세상의 형상’을 똑바로 포착하는 것,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에서 주인공은 끔찍한 지옥도를 통과한다. 린치가 평온한 세계로 되돌아온 주인공에 주었던 마지막 대사는 “세상은 참 이상한 곳이야”였다. <마더>에도 똑같은 대사가 나온다. 극중 진태(진구)는 친구의 엄마에게 건방진 태도로 “이 마을이 좀 이상해”라고 말하고, 이어 카메라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마을로 눈길을 돌린다. 그 순간 봉준호의 세계는 ‘세상은 이상한 곳’이라고 내내 주장하는 데이비드 린치의 그것과 맞닿는다. ‘이상한 마을’은 봉준호가 한국 사회에 내린 진단이다. 마을은 세계의 축소판일 터, 불안을 탐구하는 자에게 ‘이상한 마을, 한국’은 질문의 시발점이다.
다른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세상의 기괴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보이는 것들을 당연시하는 사람의 눈에 세상은 질서 있게 움직이는 곳이다. 영화의 사례 1. 먹고 살기 힘든 여고생이 몸을 팔고 쌀 몇 톨을 받는다. 남성의 성적 폭력에 길들여진 자에게 그 정도쯤은 별 거 아니다. 영화의 사례 2. 누군가는 생계를 걱정하는 판에, 교수와 친구들은 대낮에 골프를 치러 간다. 내 돈 내고 내가 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우긴다면 할 말 없다. 영화의 사례 3. 엄마는 아들의 누명을 벗겨보겠다고 애쓰는데, 변호사와 검사, 병원장은 룸살롱에서 뒷거래를 한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고 푸념해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마더>의 작은 세상은 정말 이상한 곳이며, 나는 한국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봉준호의 영화가 가까운 현대를 다루면서 공간적 재현은 1960, 70년대 전후 한국의 풍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 한국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지 못한 곳처럼 보인다. 화사하고 밝은 배경을 기피하는 듯, 봉준호의 영화는 대개 우중충한 마을 가운데 머물며, 그의 인물들은 1970, 80년대의 시대적 연장 상황 아래에서 숨을 쉰다. 지배집단이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곳, 전근대의 봉건성이 숨겨진 곳, 군사문화의 폭력성이 여전한 곳, 제국주의가 뻔뻔하게 활개 치는 곳, 인간의 영혼과 자유가 억압받는 곳, 봉준호의 영화는 그 불순한 냄새를 떨치지 못한다. 거기에 과거의 향수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다.
암흑은 심연이 아닌 바로 우리 곁, 땅 위에 존재한다. 봉준호의 영화는 ‘이상한 세계’의 핵심인 그 ‘암흑의 심연’을 우리가 단지 외면해 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기억해보자.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지하실, <살인의 추억>의 배수관과 터널, <괴물>의 한강다리 밑’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섬뜩한 그 공간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풀 수 없는 근대 한국의 비극을 상징한다. 근대화의 언저리에 해당하는 바로 그 공간 속에, 우리가 소모한 뒤 버린 찌꺼기를 먹고 사는 괴물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눈과 귀를 닫아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마더>에서 폐가 가운데로 난 ‘암흑 같은 골목’을 마주한다. 모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 모든 추악함을 삼켜버린 곳. 엄마는 그 곳에서 비극의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마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와 그녀의 아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밀을 숨긴 채 슬픔 속에 살아야 할지언정 그들은 살아남은 자들이다. <마더>에서 내 눈물을 가져간 이는 죽은 소녀와 그 소녀를 사랑했던 바보소년이다. 소녀는 자기가 통과했던 참혹상을 핸드폰에 하나씩 저장했다. 잊고 싶었을 텐데 소녀는 왜 그걸 핸드폰에 담아두었을까. 그건 누군가 자신의 슬픔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건 누군가 이 처참한 고통을 보고 분노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는, 자신을 변호할 능력조차 없는 바보소년 밖에 없으며, 그 외에는 아무도 진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비극은 그렇게 재생산되는 것이다.
말을 돌려, 나는 TV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보다 ‘신애리’라는 인물에 주목했다. 악녀로 불린 그녀는 순수한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비극이 투영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 근대화의 과정을 시작한 조선처럼) 성장과정에서 비극을 겪었던 그녀는 (근대화의 명목 아래 군부와 재벌과 지배층이 야합했던 것처럼) 새로운 출발을 선택하는 대신 끝없이 죄를 범한다. 그녀가 열거하기 힘든 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앞으로 계속 걸어가는 데는 ‘망각’의 힘이 작용한다. 그녀에게 진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현실상황에서 이기고 착취하고 싶을 뿐인 그녀는 어떤 도덕적 질문도 던지지 않으며, 거짓으로 이전의 죄를 지워 나간다.
<마더>의 엄마는 마음속에 상처를 묻어둔 자를 만날 때면 치유의 침을 들이댄다. 아들의 머릿속에서 몹쓸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꿈틀대자, 그녀는 자기만 아는 침자리가 있다며 침을 놓아주려 한다(그러나 아들은 거부하고, 그녀는 침을 놓지 못한다). 고물상 할아버지가 혼자만 알고 있는 기분 나쁜 사건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같은 행동을 취한다(그러나 침을 놓을 새도 없이 그는 죽임을 당한다). 그녀는 진실을 접할 때면 그것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내가 살아야 한다.’는 명목 하에 진실은 그렇게 묻힌다. 그렇듯 우리가 ‘현실의 삶’을 들먹일 때마다, 동일한 일이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다, 이 땅에서.
<플란다스의 개>에서 고윤주(이성재)가 박현남(배두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기억나?”였다. 진실을 얼핏 본 듯한 현남은 이내 다른 말로 얼버무리며 끝내고, 윤주는 대학에서 자리를 잡고, 현남은 관리사무실에서 해고당한다. 결국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살인 현장을 방문한다. 그러나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힘든 그는 미완의 사건을 파헤칠 여력이 없다. 그렇게 폭력의 역사는 반복된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은 더 이상하다. 온 나라를 뒤흔든 사고가 일어난 다음, 매점에 앉아 있는 박강두(송강호)와 꼬마의 표정에선 나른함이 묻어난다. 언제 괴물을 보았냐는 듯이. 강두의 동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모든 걸 잊고 바쁜 생활인이 되었을까.
<살인의 추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건 내 머릿속에 각인된 80년대의 풍경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며, 살인을 낭만적인 추억의 대상으로 삼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화를 냈다(그 해 전주영화제에서 만난 ‘90년대 학번 영화기자에게 “그건 80년대의 모습이 아냐”라고 잘난 척하고 말았다). <마더>를 보고서야 나는 봉준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는, 하루하루 버티느라 진실을 조금씩 잊어버리며 사는 사람들이 최소한 그 진실을 ’추억‘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더>에서 엄마는 두 번 춤을 춘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한 번, 영화의 종결부에서 한 번. 첫 번째 춤은 잊으려고 애쓰는 자의 춤이다. 당시 그녀가 잊고 싶은 건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떨치려고 애를 써봐도 기억은 남고,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그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두 번째 춤은 망각과 도취에 빠진 자의 춤이다. 이제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궁극의 악행이 ‘살인’이 아닌 ‘진실의 은폐’에 있음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들의 순진한 눈길 앞에서 ‘망각’만이 해결책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에 드디어 침을 놓고, 모든 걸 기억 밖으로 지운다. 그녀의 침은 비극이 잉태한 불안을 결코 치유하지 못하는 게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머릿속에선 고다르의 영화 제목 -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만이 빙빙 맴돌았다.
영화는 시대의 목소리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비극과 재회할 때면, 의도했든 안했든 비극이 반영된 영화의 목소리가 울렸다. 1960년대 이후 20년의 사이클로 군사, 보수정권이 반복될 동안, 비극의 정서, 어둠의 정서를 사무치게 아로새긴 세 편의 영화가 등장했다(세 영화가 모두 누아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4월항쟁 이후 군사정권이 나와 독재의 터전을 닦을 무렵, 이만희의 <검은 머리>(1964)는 밑바닥인생의 고통과 설움을 절절이 담았다. 제 2의 파쇼체제가 군사정권을 연장하려던 1980년, 이두용의 <최후의 증인>이 암울한 1980년대를 놀랍게도 정확히 예언했다. 그리고 지금, <마더>는 어느 때보다 영악한 보수정권이 억압의 칼날을 휘두르는 시간인 2009년을 기억하고자 한다. ‘망자가 왜 죽었는지 기억하라’
2009년 초여름, 봉준호가 엄마와 아들의 사적인 영역으로 돌아가 찍고 싶었다는 <마더>가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거울이 된 건 운명 같은 일이다. 작가주의영화와 대중영화의 양 영역에서 기반을 쌓아온 봉준호의 신작 <마더>는 자기 영화의 한 챕터를 마감하는 진경임은 물론, 한국형 누아르의 완성이며, 이제 십년을 넘어선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 정점이라 평가할 만하다. 작가의 야심이 스토리텔링과 양식미 등 곳곳에서 빛나고, 주제 면에서도 여러 차례 곱씹기에 부족함이 없다. 끝으로, 영화와 함께 찬란하게 빛나는 김혜자의 연기를 언급해야겠다. 그녀의 절정 연기에는 어떤 예찬도 부족하다. (ibuti, 2009.5.23. 서울신문에 기고한 글을 대폭 수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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