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d as Ice, But...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양해훈, 2007)
얼어붙은 저수지의 한가운데, 카마라가 한 바퀴 돈다. 누군가의 앙상한 다리가 보인다. 소년이 가야할 방향을 두고 고민하는 건, 어디로 가야 얼음이 깨지지 않을까 해서다. 괴롭히던 녀석이 저수지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면 앞으로 놀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한번 믿어볼 참이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자기만의 주문을 건다. “타.파.피.카.” 그러나 어디선가 얼음이 균열되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앞으로 걸어가기를 포기한다. 멀리서 그 녀석과 녀석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방구석에 눌어붙어 인터넷 채팅방을 껴안고 사는 남자의 이야기다(스크린 가득 보이는 대화의 내용, 또각또각 타이핑하는 소리, 그 대화의 끝에 자리한 파국에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제휘, 별명은 치타. 밥상이 오면 그제야 방문을 여는 그의 머리는 산발이 된 지 오래다. 어느 날 그는 아파트 주변을 서성이다 우연히 장희라는 여자를 만나는데, 엉뚱한 성격의 그녀는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 노력한다. 그렇게 간신히 세상으로 나온 순간, 제휘는 나쁜 새끼, 표와 마주치고야 만다.
한국 독립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대게 지지리 궁상이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제휘는 <용서받지 못한 자>(윤종빈, 2005)의 승영,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노동석, 2006)의 종대를 이어 ‘남루함의 3년차’를 결정짓는 인물이다. 죄다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양이면서 도무지 앞날이 보이지 않는 그들을 보며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가는 게 저리 힘든가 싶다. 영화니까 어지간하면 그들에게 그 흔한 판타지 하나 안겨주었으면 좋겠지만, 팍팍한 독립영화가 그런 걸 허락할 리 만무하다. 그들 영화에서 선택이라고 내놓는 게 옴팡지기 그지없다. 힘들게 계속 살던가, 아니면 죽던가. 보는 나도 기가 찬다.
십대의 트라우마는 질기고 오래 간다. 왕따로 보낸 십대가 지긋지긋했던 제휘는 세상 알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아니, 그 정도면 징글맞은 세상을 알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짧은 경험을 끝으로 세상과 더 이상 접촉하기를 거부했던 그는 채팅하다 만난 사람에게 살인을 청부하면서 낯선 세상과 또 다시 대면한다. 이어 납치와 폭력과 죽음을 경험하는 제휘는 세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혹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여기부터 어긋난다. 영화 후반부의 포악한 설정은 끔찍한 현실을 드러내고자 나름대로 준비한 장치겠으나, 그 효과는 반대여서 사실적으로 전개되던 영화를 극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잔인하고 코믹한 분위기가 영화적으로 나쁘지 않으면서도 영화의 앞부분에서 심하게 점프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고약하게 얘기하면, 두 개의 중편을 붙여놓은 것 같다.
결국 제휘는 살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비겁하다. 죽음 직전에 그를 구하는 건, 악당 표의 전화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채, 제휘는 세상이 쉽게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자 삶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악당은 그렇게 해서 타잔의 이름으로 남고, 비굴한 자는 여전히 그의 명령을 따르는 치타로 살아간다. 제휘는 성장한 게 아니다. 아마도 그는 더 씁쓸한 삶을 살아갈 게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처럼 ‘타.파.피.카’ 주문을 외면서. 영화의 마지막, 그가 돌아서는 자리에는 얼음이 굳건한 얼굴로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 얼음이 확 깨졌으면 했다. 얼음이 갈라져 찬 공기일지언정 지상의 기운이 답답한 얼음 아래로 쑥 들어가기를 원했고, 주인공이 물 속으로 덤벙 빠져 차가운 물을 온몸으로 흠뻑 느끼기를 원했다. 그랬다면 치타는 자기 힘으로 몸을 건져 올려,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치타는 타잔이 될 수 없단 말인가. 비록 영화처럼 세상이 우울하더라도 비굴하게 살지는 말자.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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