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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6/17
 

『四十二章經ꡕ의 歷史的 考察

2009.12.24 15:44 | 문서자료 | 천지

http://kr.blog.yahoo.com/hyhy11kr/1291 주소복사

 

<四十二章經>의 歷史的 考察


혜봉

1.『四十二章經?의 槪要


  A.D. 67년경 인도의 迦葉摩騰과 竺法蘭이 당시 後漢의 황제인 孝明帝(58~75재위)의 보호 속에서 번역한 중국 최초의 漢譯慶典이다. 일상의 수행에서 중요한 42가지 덕목을 여러 경전에서 간추려 놓은 경으로, ?大正新脩大藏經?에 수록된 이 경의 첫머리에 보면, ‘효명제가 꿈에 金人이 나타나 그의 궁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군신에게 물으니 通人 傅毅가 부처라 하기에 명제가 크게 깨닫고 신하(張騫, 秦景, 왕존 등) 12명의 사신을 大月支國에 보내 佛經을 구해 오도록 하였는데, 이때 베껴온 것이 바로 『四十二章經』이라고 한며, 그 경전을 열네번째 석실에 보관하고 탑과 절을 높이 세웠다. 그래서 불법이 유포되고 곳곳에 수행하는 절을 세웠다’1) 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경전을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함의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으며, 잡아함이나 『法句經』과도 같은 경집의 성격을 띠고 있다. 때문에 이 경의 모체는 아함과『法句經』등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러나 苦. 無常. 無我.愛欲의 斷切 등의 小乘的 가르침뿐만 아니라, 慈悲와 忍辱의 實踐, 布施의 勸?과 懺悔의 强調 등 大乘的인 요소들도 모두 갖추고 있는 매우 교훈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이 경은 매우 쉽고 간결한 불교의 중요한 덕목들을 담은 입문서로서 널리 애독되어 왔다. 그에 따라 異本도 10여 종에 이르고 있는데, 이러한 이본들은 본문 자체에서 增長. 발전된 흔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이 경전을 중국에서 만들어진 僞經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본은 크게 古型本, 明藏本, 寶林傳本 등으로 분류된다.



2. 佛經이 中國에 들어온 時期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연대에 관해서는 이설이 매우 많다. 그 중에서 본 本考와 연관이 있는 佛經의 전래가 언급된 것으로는 ?三國志·魏志·東夷傳?에서 裵松之가 ?魏略·西戎傳?을 인용한 주를 들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2)


   옛날 한 애제 원수 원년에, 박사제자 경려는 대월지왕의 사절인 이존이 구두로

   전해준 ?浮屠經?을 전수 받았다.3)


고 하였다. 哀帝 元壽 元年은 기원전 2년이다. 비록 전해 받은 사람이『魏書?「釋老志」에는秦景憲,『通典』에는 秦景, ?魏略·西戎傳?에는 景廬,「世說新語」에는 景盧,『通志?에는 景匿 등으로 문헌에 따라 다르고 전달받은 자리 또한 秦景은 대월지국에 사신으로 가서 경을 가져온 것이고,「世說新語?에 의하면 景廬는 중국에 사신으로 온 伊存에게 불경을 전수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전해 받은 사람은 漢族의 박사제자이며 전해준 사람은 대월지국 사람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문헌상에 나타났듯이 이 시기에는 문자로 된 佛經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暗誦된 佛經을구두로 전달하였다는 사실이다.4)


  또 하나의 불경 전래설이 本考의 論点인 ?四十二章經?의 전래이다. 사십이장경은 최초의 한역불전으로 알려져 있으나 10여종의 異本들이 본문 자체에서 增長. 發展된 흔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학자들로부터 이 경전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僞經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하기로 한다.


  만약 ?四十二章經?이 최초의 漢譯佛經이 아니라면 역사적 史料에 의한 정확한 근거로서의 최초의 한역불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漢의 桓帝(132∼167)초기, 148년경에 중국에 들어온 안세고(安息國의 王子)에 의해 번역된『安槃守意經?5)이다. 이『安槃守意經?은 35부 41경중 9부 20권이 현재 남아있다.  



3. 四十二章經의 傳來 時期와 發展


  四十二章經이 중국에 전역된 것은 후한시대인 1세기경으로서 낙양의 백마사에서 迦葉摩騰과 竺法蘭에 의해서 공역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한편으로 이 경전의 서문에 의하면, 後漢의 孝明帝(58∼75년 在位)가 어느날 꿈을 꾸었더니 몸에 금옷을 입은 金人(부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宮庭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는 金人降庭說을 펴기도 하는데, 이 때에 왕이 사자를 대월지국에 보내어서 부처님의 경전을 베껴 오도록 한 것이 이 경전이 중국에 전래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마도 이 사십이장경이 중국불교 전래상 최초의 전래경전이 되는 셈이며, 또한 곧 번역된 것으로 보아서 최초의 漢譯經典으로도 여겨지는 것이다.

  양 나라 때에 僧祐가 쓴 出三藏記集과 수나라의 費長房이 지은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등에 의하면, 축법란과 가섭마등이 함께 공역했다는 說 외에도 축법란 혼자서 단독으로 번역했다는 기록 외에 가섭마등 역시 혼자서 번역했다는 내용 등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어떠한 형태로든지 이들이 이 경전의 번역에 참여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그 시기는 정확하게 어느 때인가 하면, 古今譯經圖記와 廣弘明集 등의 기록을 보면 영평 10년(67)과 그 18년(75)에 각각 백마사에서 번역되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가섭마등이 후한에 온 후로 곧 죽었다는 기록 등에 의할 것 같으면, 아마도 이 ?사십이장경?은 영평 10년(67)에 중국에서 최초로 번역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경전이 가섭마등과 축법란 등에 의하여 번역되자 효명제를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은 앞을 다투어 위의 내용에 관한 연구와 함께 독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황제는 이를 황실의 서고인 蘭台石室에 보관케 했는가 하면, 양해라는 사신이 후한의 桓帝에게 상표문을 올린 일이 있었는데, 그 상표문에서 이 경전의 내용들을 여러 군데에서 인용하여 문안을 작성했을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급속도로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송 나라의 眞宗帝는 이 경전을 각별히 좋아해서 항상 숭거스님을 내전에 모셔다가 독송케 하는 한편으로 직접 자신도 이 경전에 관하여 주석서를 지었다는 것이다. 또한 智圓(976∼1022)이라는 스님이 이 사십이장경에 관한 주석서 1권과 定義 1권을 각각 지은 일이 있으며, 仁岳도 通源記 2권과 科 1권을 지었다고 의천스님이 전하고 있다. 더욱이나 송나라의 중기에 조동종을 중창한 守遂은 佛祖三經의 하나로 이 경전을 늘 독송하는 한편 그가 지은 佛說四十二章經註 1권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송 및 원나라 때에는 그 유포가 일반인들에게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6)


  따라서 그 유행만큼이나 異本도 많아서 10여 종류에 달하는데, 그 중에서도 본문 자체의 증광과 개작의 흔적에 준해서 이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고려대장경과 송, 원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 내용과 형태로 보아서 迦葉摩騰과 竺法蘭이 번역한 원형과 가장 가까운 古型本이 있다.


  ② 명 나라의 대장경에 수록된 것으로 明藏本이 있다. 명장본은 권두와 권말에 서분과 유통분이 있고, 본문 자체도 고려대장경 계통에 비하여 증광과 개작의 흔적이 뚜렷하다. 특히 송의 진종제가 지은 註四十二章經은 이를 저본으로 해서 서술되었다고 한다.


  ③ 다음은 寶林傳本으로, 송 나라 이후 禪家에서 유행된 것으로 서분이 있는 明藏本과 비슷하나 권말의 유통분이 없고, 본문의 문구도 앞의 두 계통에 비하여 현격하게 다르므로 아마도 최후로 그 내용이 補訂된 것으로 고형본보다 증장. 발전된 흔적이 엿보인다. 보림전본은 송대 이후 선가에서 유행된 것으로, 선가에서 일상적인 경전으로 간주했다고 하여 佛祖三經의 하나가 되었다.



4. 四十二章經의 근거 자료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연대에 대해서는 중국문헌에 몇 가지 설이 기록되어있으나,  그 중에서 四十二章經의 流入根據가 되는 것이 後漢 明帝의 感夢求法說이다.


  명제의 구법설을 언급한 자료에는 ?後漢紀?, ?後漢書?, ?釋老志?, ?吳書?, ?出三藏記集?, ?牟子理惑論?, ?四十二章經序?, ?老子化胡經?, ?明佛論?, ?冥祥記?, ?出三藏記集?, ?高僧傳?, ?洛陽伽藍記?, ?魏書? 등이 있다. 그 중 불교 전래에 대해 역사가들이 주목하는 자료는 ?魏略?의 기록이다.7)

  또한 최초의 漢譯經典을 증거 하는 자료는 아니지만, 대체로 초기에 ?四十二章經?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로서 166년 양해가 桓帝에게 올린 상소문이 있다. 그 내용 중 “부도는 한 뽕나무 아래에서 세 밤을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四十二章經?의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 하며, 나무 아래에서 하룻밤만 머무른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천신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자 부도는 “이것은 단지 피를 담고 있는 가죽주머니일 뿐이다”라고 하며 돌아보지 않았습니다’라는 인용문도 어떻게든 양해가 상소를 올렸던 166년에는 이미 어떠한 형태로든 ?四十二章經?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8)


5. 感夢求法說에서의 문제점


  明帝感夢求法說에서 明帝가 대월지국에 파견한 使臣인 張騫에 대한 자료가 다르다는데 있다. ?모자이혹론?을 기준으로 보면 宋, 元, 明, 宮內廳本 등 여러본은 “使者張騫等十二人”으로 되어 있지만, 高麗本에는 “中郞蔡?等十八人”으로 되어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여러 본들과 고려본이 차이가 있는 것은 불확정적인 요소가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채음은 ?명상기?에 이르러 장건 대신 등장한 사람인데, 고려본의 ?이혹론?은 이 ?명상기?의 채음을 채용하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모자이혹론?과 같은 계통에 속하는 ?사십이장경서?에 기록된 明帝求法說의 요점은 거의 ?모자이혹론?과 동일하지만, 파견된 사람의 이름을 여러 본들은 장건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元藏에서만은 채음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張騫이 원형이었지만,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蔡?으로 바뀌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張騫은 前漢 무제 때 대월지국에 파견한 사신으로서 後漢 명제 이전의 160, 70년전 사람이다. 도교측에서 이 일을 지적하였거나, 불교측 스스로 역사적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여 그것을 의식한 사람이 장건의 이름 대신에 채음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北朝때의 甄鸞이 지은 ?笑道論? 卷中에 “張騫取經十四”라는 제목으로 도교측과 토론을 벌인 부분이 있는데, ?老子化胡經?의 한절을 인용하여 도교측의 주장을 논박한 것인데, 이 ?老子化胡經? 가운데는 명제구법설이 실려 있다. 그 구절 가운데


   “명제(영평 7년)는 즉시 장건 등을 파견하여 황하의 지류 끝까지 찾아보도록 하였다.

    36국을 지나 사위국에 이르렀으나 부처는 이미 열반에 들어버린 후였다.”


  라는 문구가 있다. 견란은 이 문구를 인용하여 도교측을 비판 하였던 것이다. 곧 장건이 전한 무제 때 서역을 정벌한 사람인데 후한 명제 때 다시 서역을 정벌하였다면 장건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란 말인가, 라고 비평을 하고 있다.

  견란이 이와 같이 도교의 ?老子化胡經?의 기사가 허위라고 비판하였지만 실제로 장건이 경전을 가져 왔다는 기사는 불교측에서도 이미 ?牟子理惑論?을 비롯한 명제구법전설에 나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老子化胡經?의 기사가 허위라고 규정하면 불교측의 명제구법전설화 또한 위작된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불교측에서 장건의 이름을 없애고 채음으로 바꾸었던 것이 아닐까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이것에 의하면 파견자들 가운데 채음의 이름이 등장하는 문헌은 비교적 後代의 자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通人 傅毅는 章帝(76~88)때 처음으로 조정에 불려간 사람이므로 그는 建初(76~84)중에 蘭臺의 令史가 되었으며, 郞中을 모시고 班固 등과 함께 校書를 담당 하였다. 그러므로 명제가 통인 부의에게 질문 하였다는 것은 연대적으로 무리가 있다.

   넷째,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중국에 왔다고 하는 ?고승전? 등의 기사를 ?사십이장경서?, ?모자이혹론?, ?후한기? 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고승전?에 이르러 처음으로 부가 하였다는 蓋然性이 있다. 그런데 축법란의 이름은 가섭마등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명상기?에서 조차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러 가지 근거로 인해 축법란은 축담무란의 혼동이거나 가공의 인물로 비쳐지기도 한다.9)


  이상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후한 명제 감몽구법설은 비교적 초기 문서인 ?사십이장경서?와 ?모자이혹론? 등의 내용을 비롯하여 후기에 점차로 부가된 ?고승전? 등에 있어서도 그 기록의 모순이나 문제점이 있으며, 또한 종래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서 입증되었듯이,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明帝減夢求法說이 허구라면 그 求法의 핵심에 있는 경전인 ?사십이장경?은 역사적으로 중국 최초의 漢譯經典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하며 이 경은 역사 속에서 표류할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 최초의 한역경전이라는 역사적 중요성에서 멀어진 ?사십이장경?은 중국인에 의해 찬술된 경전일 가능성이 점쳐진다.



6. 다른 ?四十二章經?의 抄錄 推定年代


  ?사십이장경?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東陳初에 초록되었으리라 주정된다. 그 이유를 들면, 첫째, 이 경전은 동진 成帝 때의 ?支敏度錄?에 처음 나타나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 기록 이전에 나왔을 것이다.

  둘째, 惠帝 때 도교와 불교간의 논쟁이 생기면서 王浮가 ?老子化胡經?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는 불교는 모든 경전을 위작하였다고 말하면서도 ?四十二章經?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당시에는 이 경전이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으며, 만일 존재 했다면 왕부가 최초의 불경을 보고서 공격을 가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경전이 초록된 연대는 빨라야 ?老子化胡經?보다 소급할 수 없고, 가장 늦다 하더라도 ?지민도록?보다 늦게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혜제 말년은 306년이고 성제 말년은 342년이므로 대체로 이 30여 년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10)


7. 나가는 말


  이 외에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앞으로 더 연구를 하도록 하고, 지금까지 보아온 바대로 ?四十二章經?은 역사적 사실이 미약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蓋然性이 떨어져 중국에서 撰述된 僞經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처럼 보이는 것도 진실이 아닐 수 있고, 전설에 가까운 설화들도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억지로 주장하면, 張騫 등이 역사 속에 동명이인이 아니란 법이 없다. 또 엄밀히 말하면 ?사십이장경? 자체가 경전의 핵심을 모은 것이기에 그 내용이 佛典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은 바에야 찬술이니 위경이니 하는 말 자체가 ?사십이장경?의 원래 의미를 무시한 비판인 것이다.

  불교는 문화적 충돌로 인해 그 지역의 문화에 지장을 준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에 의해 그 시대 문화를 最上値로 격상 시켰다. 유교의 경우 宋學이나 陽明學을 완성 시켰고, 道敎는 도교의례와 도교교리를 발전시키는데 불교가 크게 공헌 했으며, 美術工藝, 天文歷數, 음악과 의학 등 사회 경제 정치 모든 면에 공헌을 하였다.

  비록 ?사십이장경?이 역사적 근거가 미약하여 최초의 漢譯經典이라는 位相은 손상 되었지만 그 내용은 중국의 사상계를 흔드는 시초라 의심하지 않으며, 그 중국 불교의 정립으로 인해서 한국불교와 일본불교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불교로 발전하고 있는 그 핵심에는 ?사십이장경?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카마타 시게오, 章輝玉 譯, 「중국 불교사」(1), 도서출판 장승. 1997. 4. 20.

손창무 著. 「중국불교문화」. 중문출판사. 2001, 12, 18.

케네스 첸. 박해당 著. 중국불교. 민족사. 1991, 8, 20.

呂?(뤼청) 著. 覺昭 譯. 중국불교학 강의. 민족사. 1992, 6, 25.

鎌田茂雄 著. 鄭舜日 譯. 중국불교사. 경서원. 199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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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摩羅什과 慧遠의 問答에서 본 當時의 佛敎思想

2009.12.24 15:42 | 문서자료 |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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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摩羅什과 慧遠의 問答에서 본 當時의 佛敎思想




09MGB03 혜봉

목차 

1. 鳩摩羅什이 中國에 오기 以前의 中國佛敎 

2. 鳩摩羅什이 中國에 影響을 준 佛敎思想 

3. 問答 당시의 慧遠의 佛敎思想 

4. 大乘과 小乘의 思想的 差異點 

5. 鳩摩羅什과 慧遠의 問答  

 






1. 鳩摩羅什이 中國에 오기 이전의 般若思想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구마라집(344~413)에 의해 많은 경전이 번역되기까지의 중국 불교는 줄곧 중국 전통사상(禮敎, 老莊)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格義의 방법으로 불교를 중국에 이해시키려 노력하였고, 그 방법은 所定의 목적을 이루었으나 불교의 핵심에 근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 되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鳩摩羅什이 중국에 오기 전까지 般若經은 무려 다섯 차례나 漢譯이 이루어졌으며, 六家七宗이라는 형태로 반야사상이 꽃피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경전해석이란 중국고유의 철학개념으로 불교경전중의 유사한 개념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格義’이다. 그러나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가 처음만나 융화되던 시기에 사용된 격의의 방법은초기의 거리감을 좁히는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불교의 원래의미를 심도 깊게 논의하는 데는 오히려 장애요소로 작용하였다.


  格義佛敎가 비판되어지기 시작한 것은 道安(312-385)에 이르러서 이며, 道安은 격의의 방법으로 불교의 이치를 이해하려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그는 以經解經의 방식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곧 경전들 간의 비교대조 및 상세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서 불교 경전의 진의를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을 보면 本體界와 現象界를 ‘寂有’ 또는 ‘本末’이라는 용어를 통해 두 세계를 분명히 구분 지었다. 여기서 寂과 本은 寂靜한 열반의 경지를 말함이고 有와 末은 현상계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道安은 有와 末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寂과 本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末年에 이르러 道安은 “道를 붙잡고 有를 制御하니 낮고 높음의 차이가 있는 것은 有爲의 영역일 뿐이다.”(執道御有 卑高有差 此有爲之域耳.)라고 하였는데, 이는 본체와 현상을 구분 짓는 것은 三界의 영역에 해당 되는 것으로서, 寂有와 本末의 차별을 뛰어넘어야만 涅槃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의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도안의 般若思想은 어디까지나 安世高의 禪數學을 기초로 세워진 것으로서, 그가 비록 본체계와 현상계 양자간의 차별을 해소 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法體가 三世에 恒有한다는 전제하에 전개된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본체를 현상계의 범위로 확장하여 현상계가 운행 되는 원리원칙으로 삼은 다음, 이러한 本無 혹은 性空 槪念의 배후에는 여전히 항존하는 법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상을 통해볼 때, 구마라집이 장안에 도착할 당시 중국인들은 적어도 반야가 본체와 현상의 구분을 초월한 어떤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1)



2. 鳩摩羅什이 中國에 影響을 준 佛敎思想


  다양한 불교 사상 가운데 魏晋時代의 중국 지식인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불교사상은 ‘空’사상, 소위 般若思想이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하면 ‘空’이 一見 당시 유행한 道家의 ‘無’에 극히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無’에 의해서 ‘空’을 풀이하는 格義佛敎는 이러한 배경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格義佛敎도 마침내 道安에 의해 비판되고 중국 불교 사상은 새로운 발전단계를 맞이하려 하였다. 鳩摩羅什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런 시기였다.


  중국불교계 내지 思想界에 미친 구마라집의 공헌은 매우 크지만 학자들의 주장을 요약 정리하면 교판불교의 등장과 불교의 토착화를 완성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구마라집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요약해 보면,


  ① 譯經事業 -?대품반야경?27卷 ?소품반야경?10卷 ?금강반야경?1卷 ?유마경?3卷 ?법화경?7卷 ?중론?4卷 ?백론?2卷 ?십이문론?1卷 ?대지도론?100卷 ?십송율?1卷 ?좌선삼매경?2卷 ?선법요해?2卷 ?성실론?16卷 ?십주비바사론?17卷 ?십주경?4卷 ?아미타경?1卷 ?미륵하생경?1卷 ?미륵성불경? 등 74部384卷(一說로는 35部297卷)과 같은 그의 번역은 삼론종, 천태종 등의 종파불교가 형성될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며, 대승선법과 남종선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② 大乘과 小乘의 구별 속에서 대승의 優位를 인식하게 했다는 점,

  ③ 다양한 경전 각각의 역할을 인정했다는 점,

  ④ ?반야경??법화경?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說時의 전후(次第)라는 시각을       도입했다는 점,

  ⑤ 法身의 不生不滅을 주장했다는 점 등이다.


3. 慧遠의 佛敎思想


  401년에 鳩摩羅什(344~413)이 장안에 들어와 새로운 인도의 龍樹佛敎를 중국에 전했을 때 강남의 聖地인 廬山에서는 慧遠(334-416)이 계율을 지키고 禪定을 닦는 출세간적인 山林佛敎의 육성을 위해 온 정력을 바치고 있었다. 혜원은 스승 道安(312~385)에 의해 확립된 반야학과 禪觀의 실습을 다시금 계승하고 발전시키려 하였다.

  혜원의 思想史的 과제는 도안의 사상의 발전과 계승이었다. 그것은 三世應報의 神不滅의 사상 이었다. 그러나 라집이 전래한 空觀佛敎와의 대결을 통하여 혜원은 영원불멸의 法性, 法身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神不滅의 神은 본래 不生不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혜원은 중국불교의 과제인 사회적으로는 禮敎와 佛法의 대립문제, 사상적으로는 격의불교로 부터의 이탈문제, 교리적으로는 神不滅과 般若·空과의 止揚問題 등 많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생애를 교단의 육성과 발전에 바쳤다. 또한 만년에 이르러 라집 번역의 ?법화경?에 의해 一乘과 三乘, 菩提乘과 聲聞乘의 비교·검토가 라집과의 문답서신을 통해 이루어 졌다.

  혜원은 구마라집과의 문답서신을 통해 空觀佛敎와 大乘佛敎가 이해되기 전까지는 대승과 소승에 대하여 모호(模糊)한 상태로 유지되어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혜원의 思想發展을 三期로 나누어 보면,

 

  제1기는 출가 이전의 고전문학 학습기로서 특히 道家의 사상을 배운 것이 후에 불교사상 수용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제2기는 道安 문하에서 오로지 도안의 반야학과 禪觀, 儀規를 배운 시기이며 廬山에 들어갈 때 까지의 25년 동안에 해당되며, 부견에 의해 도안이 장안으로 불려갈 때(379년)까지 혜원은 13년간(32세~45세) 양양에서 도안(54세~67세)을 師事하였다. 이 기간동안 도안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반야경?의 수학과, 도안이 받들고 있던 안세고 번역의 ?安般守意經?과 ?陰持入經?등에 근거한 소승의 禪觀을 배운 것이다. 이것은 대승의 ?반야경?과 소승의 禪觀 모두가 석가의 가르침으로 차별없이 수용한 도안의 영향으로 敎理는 대승경전을 근거로 하고, 실천은 소승경전에 의하고 있었다.

 

  제3기는 여산에서의 30년간 이다. 혜원은 이 기간에 여산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라집불교를 수용하고 새롭게 전래된 毘曇學과 禪學을 흡수하였다. 또한 사문은 왕에게 예배하지 않는 사상적 근거를 밝히고, 三世應報와 神不滅의 가르침을 士大夫에 설하였다.

  또한 혜원은 지루가참이 번역한 ?般舟三昧經?의 念佛章에 의거하여 念佛三昧를 수행하였는데,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觀佛三昧에 들어 見佛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을 계기로 白蓮社가 결성이 되고 중국 淨土敎의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 진다.


  혜원의 저서에는 ?法性論? ?釋三報論? ?大智度論抄? ?沙門不敬王者論? 등의 論·序

·銘·讚·詩·書를 모아서 10권, 50여 편이나 되었다. ?沙門不敬王者論?은 사문은 王者에게 禮를 다 할 필요가 없다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혜원의 특별한 사상으로, 이것은 世間法과 出世間法의 차이를 두고 나온 사상이다. 이러한 禮敬問題의 배경에는 그의 神不滅論이 존재하였다. 이 신불멸론은 부처의 절대성을 설한 法身常住의 설로, 禮敬문제를 촉발시킨 혜원의 사상적 기반이었음과 동시에 동진말 사상계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던 神滅·神不滅論爭에 대한 하나의 해답도 되었던 것이다.


 


4. 大乘과 小乘의 思想的 差異點


  慧遠의 스승인 道安의 반야사상을 되짚어보면 그의 전후기 사상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전기의 도안은 本體界와 現象界가 구분 되어있다고 주장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면 둘 사이의 차별이 소멸되어 本末이 함께 어우러지는 경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혜원은 양양에서 도안과 헤어져 廬山에 정착 하였는데, 도안의 후기 사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혜원은 도안의 초기사상을 충실히 계승하여 이후에 비담학설을 흡수할 기반을 다졌다.

  이후 僧伽提婆등의 소승학자들이 잇따라 남하하면서 廬山은 남방지역의 중요한 역경장소가 되었고, 덕분에 혜원은 비담학설에 대하여 심도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비담학에 충실했던 혜원의 입장에서 보면 대승경전에서 설하는 상당수의내용들이 들어맞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大乘大義章?에 나타난 혜원의 구마라집을 향해 제기한 질문 내용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소승에서 말하는 ‘法身’은 번뇌가 소멸하여 집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후에 비로소 드러나는 경지를 가리킨다. 반면에 대승의 법신은 32상(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강설하고 설법할 수 있다.


  소승의 ‘阿羅漢’은 수행 끝에 번뇌가 제거되면 자연스럽게 입적하며, 홀로 현묘한 경지에 머무른다. 그러나 대승의 ‘菩薩’은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을 서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法性生身을 얻고도 부단히 수행정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소승의 ‘因緣有와 實法有’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실법유는 고정불변 하는 것으로서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法體인 반면, 현상계에서 變化不息 하는 것이 바로 인연유이며, 인연유로서의 사물은 결코 실법유가 아니다. 실법유 또한 인연유로 변화 할 수 없다. 그러나 大乘法에서는 항구불변 하는 것은 어느 것도 없으며, 실법유와 인연유 모두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소승의 견해를 견지하는 혜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일일이 구마라집에게 문제제기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불교학자들이 中觀思想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쉽게 받아들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담학은 남방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북방의 중관사상과 줄곧 대립적인 균형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남방의 비담학파는 그들 나름의 般若思想을 구축하여 구마라집과는 다른 반야 해석 전통을 이어나갔다.



5. 鳩摩羅什과 慧遠의 問答


  장안의 라집과 여산의 혜원이 서신을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은 혜원의 제자 曇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符堅의 衛將軍이었던 만큼 강건한 체력으로 장장 10여년을 라집과 혜원간의 편지 심부름을 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라집과 혜원 간의 서간을 왕래한 것은 담옹의 功으로 돌릴 만하다.

  ?고승전?의 ?혜원전?에,

“佛은 至極이며 지극은 곧 무변이니, 무변의 이치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법성론?을 저술하여 “至極은 不變으로서 性을 삼고, 性을 얻음은 體極으로서 宗을

  삼는다”고 말하였다. 라집은 이 논을 보고 감탄하여 “邊國 사람에게 아직 經이 없는데, 어

  둠이 곧 이치와 합하니 어찌 묘하지 않으리오.”라고 말하였다.2) 


  고 하여 중국에 泥洹常住의 說이 전해지지 않던 시기에 혜원은 佛이 常住不變임을 주장하기 위해 ?法性論?을 저술했으며, 궁극의 道는 상주불변임을 밝혔다. ?법성론?을 읽은 라집은 혜원의 주장이 경전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치에 들어맞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렇게 둘은 서로를 존경하여 서신으로 친교를 맺었고, 라집이 401년 장안에 온 이후 혜원이 라집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때 혜원의 나이는 68세여서 직접 만날 수 없었기에 담옹을 시켜 ‘書를 보내 친분을 통하기’위한 편지를 보낸 것이다.

  406,7년경 라집이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혜원은 그가 귀국하면 大乘佛敎敎理의 진수와 龍樹의 空觀佛敎敎理를 직접 질문할 수 없게 되므로, 혜원은 수십 가지 질문을 정리하여 라집에게 그 대답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후일에 ?大乘大義章? 가운데 수록된 문답이 된 것이다.

현존하는 ?大乘大義章?의 내용은 3卷 18章이다. 그 18項目을 열거하면,

1. 初問答眞法身

2. 次重問法身幷答

3. 次問眞法身像類幷答

4. 次問眞法身壽量幷答

5. 次問修三十二相幷答

6. 次問受決法幷答

7. 問法身感應幷答

8. 次問法身佛盡本習幷答

9. 次問答造色法

10. 次問羅漢受決幷答

11. 次問念佛三昧幷答

12. 次問四相幷答

13. 次問如法性眞際幷答

14. 問實法有幷答

15. 次問分破空幷答

16. 次問後識追憶前識幷答

17. 次問遍學幷答

18. 次問任壽義幷答


  ?大乘大義章?의 문답은 구체적으로 문답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혜원의 그때 그때의 질문에 대해 라집이 친절히 답변한 것이다. 혜원은 인도불교를 명확히 의식하지 못했으므로 大乘과 小乘에 대하여 혼란을 빚는 질문도 한 경우도 있으나, 그 질문은 종래의 중국불교 교학에서 최고의 수준으로 이해된 것이다.

혜원에 의해 제기된 18가지 문제의 내용으로 보건대, 당시 중국인들은 구마라집의 새로운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원의 질의 태도로 보아 인도불교의 영향아래 반야사상과는 또 다른 사상경향이 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구마라집의 계승자 승조와 승예에 의해 나타난다.


  승조의 사상은 분명히 구마라집의 사상을 계승한 측면이 있으나, 그 속에는 라집의 사상을 발전시킨 측면 또한 존재한다. 승조는 반야사상과 자비사상을 하나로 융합하여 만물에 곧바로 임하는(卽萬物) 태도를 반야사상의 내용에 추가하였다. 그는 즉만물의 원칙아래 動과 靜의 이치를 해석하고,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닌 만물의 실상을 분석한 뒤, 번뇌가 곧 열반이라는 도리를 설명하였다. 구마라집에게 세간은 구도되고 변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머문다. 반면에 승조의 사상 속에서 혼탁한 현세와 불국정토는 동일한 진리의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된다. 이는 구마라집의 사상적 기초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라집의 반야사상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반야사상에 대한 인식적 전환은 구마라집의 제자 중 하나인 승예로부터 일어났다. 이전까지 승예는 줄곧 반야를 불교의 최고 이상인 공적의 지혜(空寂之智)로 여겨왔다. 그러나 弘始10년(408)년에 이르러 반야가 名相의 희론을 불식시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사상적 일대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417년에 승예는 법현(法顯)이 가지고 온 ?大般泥洹經?을 접하게 되는데, 이후 그는 반야경전은 단지 오염과 번뇌를 버리고 허망을 제거할 뿐이며, 진정으로 대승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은 ?니원경? 뿐이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반야는 더 이상 궁극적이상의 경지가 아니며 허망을 버리게끔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法華經?과 ?泥洹經?을 최종적인 궁극의 경지로 간주했다.

  ?니원경?이 주목을 받게 된 이후 중토에는 불성사상이 날로 성행하게 되었다. 동시대의 걸출한 인물인 道生의 中道佛性思想을 접할 때에 그 안에서 반야사상의 강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볼 때 반야사상은 점차 각기 다른 여러 가지모습으로 중국 불교 안에 내재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혜원의 질문에서 그를 가장 혼란스럽게 한 것은 보살의 法性生身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성생신은 더 이상 남은 번뇌가 없음에도 四大五根의 몸을 지니고 열반에 들지 않는다. 보살이 법성생신을 취하는 이유는 중생과의 통로를 열어놓고 부단히 교화하기 위함이다. 이는 깨달음 이후에 세간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阿羅漢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논점은 앞 단락에서 前述한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을 감지하지 못하는 혜원으로서는 대승의 論旨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일일이 구마라집에게 문제 제기를 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혜원은 소승적 관점을 갖고 있기도 하였지만, 중국인으로서의 혜원 이었기에 法身이라든가 四大六根과 같은 육체를 갖춘 존재자를 상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은 佛身이라든가 法身이라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생각 하였던 것이다.


  반면, 空觀佛敎의 관점에 선 라집은 不生不滅의 法性을 法身으로 생각하였다. 法性이나 諸法實相·法身이라는 개념이 이해된 것은 ?大乘大義章?에 나타난 라집의 법신 이해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이렇듯 라집의 중국불교학에 미친 영향이 지대 하지만 라집의 명확한 해석을 이끌어 낸 것은 혜원의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점에 덧붙여 ?大乘大義章?에 나타난 혜원의 질문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첫째, 전술한 法身의 개념이다. 아비담의 영향이 큰 혜원에게 대승의 法身觀이 이해       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아비담학과 ?반야경?의 교설을 어떻게 통일적으로 이해하는가라는 점이다. 즉  존재 요소의 이론과 空의 이론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와 어떻게 존재하는  것들을 분석하여 空에 이를 수 있는가의 문제, 찰라멸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기억이 가능한가 하는 것들을 묻는다.

셋째, 대승경전의 가르침이 제각기 다르므로 그 공통적인 이해를 어디에서 구할 것       인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반야경?과 ?유마경?에는 聲聞은 성불할 수 없다 고 하였는데, 라집이 번역한 ?법화경?에는 성문도 受記를 받고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해 졌으므로 이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大乘大義章?의 문답은 인도불교 교학의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는 라집과 道安의 般若學을 계승하고 새로이 전래된 대승경전과 아비담학을 섭취한 혜원간의 시각을 좁히는 媒介가 되었다. 특히 혜원의 의문은 중국불교인이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宗敎的 實存을 문제 삼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라집과 혜원의 문답은 중국불교와 인도불교의 시각 차이를 좁히는 것이고, 불교를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한 중국인들의 의문을 좁히는 계기가 된 일대 사건이었다.


  혜원은 白蓮社라는 念佛結社를 결성(402)하여 觀佛三昧를 수행하고, 淨土敎의 開祖내지 初祖로 崇仰받고 있다. 그는 戒律과 禪定을 기반으로 불교인의 윤리 확립에 힘쓰고, 실천적 불교를 몸소 실행한 철저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의 스승 道安이 ‘중국불교의 미래가 혜원에게 있다’고 한 것처럼, 당시 사상적 次第와 역사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중국 불교학을 바탕으로 큰 의심을 일구어 내어 옛날 부파불교의 의심을 대승이 해결한 것처럼, 霧中을 헤메이는 중국불교에 강력한 횟불을 제공한 선지식 혜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참고문헌>

카마타 시게오, 章輝玉 譯, 「중국 불교사」(1), 도서출판 장승. 1997. 4. 20.

손창무 著. 「중국불교문화」. 중문출판사. 2001, 12, 18.

케네스 첸. 박해당 著. 중국불교. 민족사. 1991, 8, 20.

呂?(뤼청) 著. 覺昭 譯. 중국불교학 강의. 민족사. 1992, 6, 25.

鎌田茂雄 著. 鄭舜日 譯. 중국불교사. 경서원. 1992, 8, 20.

하유진(서강대학교철학과강사) 書評. ‘?艶秋, 鳩摩羅什般若思想在中國 (臺北:里仁書局,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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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끌어 당기는 방법


행운은 행복을 끌고 다니고, 불운은 불행을 끌고 다닌다.
행운과 불운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 뒷면처럼 함께 있는 것이다.

1.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좋은 날" 하고 큰 소리로 외쳐라.
좋은 아침이 좋은 하루를 만든다.

2. 거울을 보며 활짝 웃어라.
거울 속의 사람도 나를 보고 웃는다.

3. 가슴을 펴고 당당히 걸어라.
비실비실 걷지 말라.

4. 사촌이 땅을 사면 기뻐하라.
사촌이 잘 되어야 나도 잘되게 마련이다.

5. 마음 밭에 사랑을 심어라.
그것이 자라나서 행운의 꽃이 핀다.

6. 세상을 향해 축복하라.
세상도 나를 향해 축복해 준다.

7. 밝은 얼굴을 하라.
얼굴 밝은 사람에게 밝은 운이 따라 온다.

8. 힘들다고 고민하지 말라.
정상이 가까울수록 힘이 들게 마련이다.

9.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라.

10. 그림자는 빛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어둠을 타박말고 몸을 돌려 태양을 보라.

11. 사람을 존중하라.

12. 끊임없이 베풀어라.
샘물은 퍼낼수록 맑아지게 마련이다.

13. 안될 이유가 있으면 될 이유도 있다.

14. 가정을 위해 기도 하라.
가정은 희망의 발원지요, 행복의 중심지다.

15. 장난으로도 남을 심판하지 말라.
내가 오히려 심판 받는다.

16. 어떤 일이 있어도 기죽지 말라.
기가 살아야 운도 산다.

17. 목에 힘주면 목이 굳는다.

18. 교만하지 말라.
애써 얻은 행운 한 순간에 날아간다.

19. 밝고 힘찬 노래를 불러라.
그것이 성공 행진곡이다.

20.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

21. 푸른 꿈을 잃지 말라.
푸른 꿈은 행운을 만드는 청사진이다.

22. 미운 놈 떡 하나 더 줘라.

23. 말로 상처를 입히지 말라.
칼로 입은 상처는 회복되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24.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 할 수 있다.

25.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

26. 어두운 생각이 어둠을 만든다.

27. 마음을 활짝 열라.
대문을 열면 도둑이 들어오고, 마음을 열면 행운이 들어온다.

28. 집안청소만 말고 마음도 매일 청소하라.
마음이 깨끗하면 어둠이 깃 들지 못한다.

29. 원망 대신 모든 일에 감사하라.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겨난다.

30. 욕을 먹어도 화내지 말라.
그가 한 욕은 그에게로 돌아간다.

31. 잠을 잘 때 좋은 기억만 떠올려라.
밤사이에 행운으로 바뀌어진다.

-사십이장경 제11장-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범상한 사람 백을 공양하는 것이
착한 사람 하나를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착한 사람 천을 공양하는 것이
오계를 지키는 사람 하나를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오계를 지키는 사람 만명을 공양하는 것이
수다원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수다원 백만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사다함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사다함 천만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아나함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아나함 일억만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아라한 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아라한 십억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벽지불 한 분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벽지불 백억 분을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 한 분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부처님 천억 분을 공양하는 것이
생사 고락의 모든 차별법을 초월하여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자성을 깨침만 같지 못하나니라."

-

-

-
불법에 차별이 없읍니다.
다만 근기에 따를 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공의 장애가 되는 습관들

2009.12.24 14:58 | 자료실 | 천지

http://kr.blog.yahoo.com/hyhy11kr/1286 주소복사

*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공(내적 혹은 외적)의 장애가 되는 습관들 *

 

1. 최대의 강적 ---- 게으름
2. 나는 괜찮고 남은 안된다는 ---- 안일함
3.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 무책임함
4. 작심삼분 ---- 무기력

5. 남의 단점만 부각시키고 나의 단점은 보지도 않는 ---- 거만함

6.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무조건 벌려보는 ----- 미련함

7. 뻔뻔하게 하는 ---- 거짓말

8.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하는 쓸데없는 ---- 질투심 

9. 구질구질한 ---- 핑계.변명

10. 남에게 의존하려는 ---- 어리석음

11. 조금만 힘들어도 도중에 포기하는 ---- 냄비근성

12. 내꺼는 소중히 하면서도 남의 것은 아낄줄 모르는 ---- 거지근성

13. 우유부단한 성격을 착한 성격으로 착각하는 ----- 무분별력 

14. 세속적이고 계산적이고 잔머리 굴리려는 ----- 얍삽함

15. 충고나 듣기 싫은소리는 귀기울이지 않고  좋은소리 걸러듣는 ---- 얄팍함

16. 약한자는 무시하면서 강한자에게 아부하는 ---- 비굴함

17. 화가나면 이성을 상실하는 ----
무통제력

18. 남을 나에게만 맞추려는 고집불통 그리고 겉으로만 판단하는 ---- 편견

 

 

출처 :http://blog.paran.com/oms6gchl/21369753 ;글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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