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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7/28
 

88골프장 민영화계획에 국가유공자들 강한 반발

-국가유공자 사기 떨어뜨리는 정부-

88골프장은 년간 120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알짜

-국가유공자들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88골프장은 공기업 민영화와 근본이 달라-

대한민국상이군경회 회원 등 “국가유공자예우및지원에관한법률”이 정한 국가유공자들이 국가보훈처가 보훈기금 증식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도에 조성 완공하여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보훈기금증식에 기여하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 소재 88골프장을 민간에게 매각하려는 정부의 방침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건설한 88골프장은 조성당시 상이군경 및 전몰군경유족의 정지된 보상금으로 조성된 보훈기금으로 보훈기금증식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건설당시 상이군경 등 부상을 입은 유공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재활을 위한 체육시설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보훈기금은 1962년도부터 시행된 군사원호보상법, 군사원호보상급여금법, 군사원호대상자취업보호법 및 군사원호대상자임용법 등에 근거하여 당시 원호처(현 국가보훈처)가 민간기업이나 국영기업체 또는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등에 취업을 시켜주는 대신 취업기간 동안 보상금(연금)을 정지하여 원호기금(현 보훈기금)을 조성하여 그 기금을 증시시켜 취업이 곤란한 상이군인이나 전몰군경유가족들에 대하여 생업자금이나 주택지원 대부를 실시하는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1970년대 및 전두환 정부 때 까지 원호기금(보훈기금)의 주요 재원은 국가유공자들의 정지된 연금(정지연금)과 민간 혹은 국영기업 및 국민들이 기탁한 원호성금(현 보훈성금) 이었다. 1984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수도권 골프장 허가를 전면 중지시켰음에도 소위 내인가라는 편법을 쓰면서 까지 국가유공자의 재활체육과 원호기금(보훈기금) 증식을 위하여 특별히 고려하여 허가한 것으로 이러한 88골프장 조성과 관련한 역사성과 명분 때문에 국가유공자들은 88골프장 민간 매각에 대하여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상이군경 등 국가유공자들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 정책은 정부가 공기업을 창설하면서 막대한 정부 예산이 투자되었고 민영화함으로써 효율성을 배가시킬 수 있을 때 하는 것으로 연간 120억 원이라는 기금 증식효과를 보고 있는 알짜 88골프장을 민간에게 매각하는 것은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과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더울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88골프장은 부지 약 80만평에 36홀 규모로 연습장과 드라이브 레인지 등 국제경기도 충분히 소화 할 수 있는 규격을 갖추고 있으며 경기도 용인시 구성리에 위치하고 있는 명문골프장 중에 하나로 회원권 시세는 약 3억원 정도 하고 있으며 회원 수는 2,000여명으로 조성당시 법정 회원수 보다 200여명 적게 모집하여 민영화 할 경우 추가로 회원을 모집하면 약 600여억 원의 특혜를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89년 회원 모집시 당시 전두환 정부의 수도권의 골프장 건설 규제로 골프회원권 가격의 과열 현상 때문에 회원권 당 평균 6,000만원 이상의 보훈성금을 웃돈을 얹어 모집하였기 때문에 민간에게 매각할 경우 매각 대금 책정과 회원들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해 줄 것인지도 관심거리이다.

만약 88골프장이 매각될 경우 88골프장을 이용하던 국가유공자들은 골프를 칠려면 물심 양면으로 상당한 불편을 겪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점도 88골프장 매각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국가유공자 들은 국방부 산하에는 있는 골프장은 민영화 하지 않으면서 신명을 바쳐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들의 신체적 재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골프장을 매각하는데 대해 국가가 국가유공자들을 홀대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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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

바보는 자신이 바보인지를 모른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바보 탓 인줄 알면 그는 천재이다.

그 천재는 자신만이

항상 천재인지 알고 남을 바보로 안다.

그 바보천재는 그 천재를 보고 그저 내가 바보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나보다 바보라고 한다.

가짜 바보는 자신이 항상 남이 자신보다 바보라고 생각한다.


진짜바보... ,

그는 자신이 바보인지를 모른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바보의 탓인줄 알면 그것은 천재이다.


그 천재는 자신이 천재인지 알고 남을 바보로 안다.


그 바보는 그 천재를 보고 그저 내가 바보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나보다 바보라고 한다.


바보는 자신이 항상

남이 자신보다 바보라고 생각한다.

바보 정신

노무현 바보...바보.....

바보 노무현

노루현 바보...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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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후기

탓은 후회

생각은 희망

바보 는 죽음

자신은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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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사무총장 반기문

어디에도 없는 사람

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한국사람 인가/// 포린 폴리시 (잡지)


Nowhere Man
Why Ban Ki-moon is the world's most dangerous Korean.

BY JACOB HEILBRUNN | JUNE 22, 2009

Ban Ki-moon, a general nonentity as secretary-general
For such a seemingly crucial position, the secretary-generalship of the United Nations has historically had a rather low bar for success. Kurt Waldheim? In his memoir, A Dangerous Place, Daniel Patrick Moynihan recounted that Waldheim functioned as "a post office, a somewhat antique but reasonably efficient public service run along Austro-Hungarian lines. As one    sat down with him, he would be mentally sorting the mail while making small conversation." Boutros Boutros-Ghali? His arrogance and fecklessness as the Serbs laid waste to Bosnia prompted the Clinton administration to veto a second term. Kofi Annan? Brought low by his son Kojo's financial peculation in the Iraq oil-for-food scan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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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Even in this unimpressive company, though, Ban Ki-moon appears to have set the standard for failure. It's not that Ban has committed any particularly egregious mistakes in his 2½ years on the job. But at a time when global leadership is urgently needed, when climate change and international terrorism and the biggest financial crisis in 60 years might seem to require some—any!—response, the former South Korean foreign minister has instead been trotting the globe collecting honorary degrees, issuing utterly forgettable statements, and generally frittering away any influence he might command. He has become a kind of accidental tourist, a dilettante on the international stage.

Not for him bold speeches or attempts to mobilize public opinion behind what could be an organization that helps tackle nuclear proliferation or reconstruct Afghanistan. Not for him championing human rights, or even rallying in defense of beleaguered civilians. Visiting Malta in April for yet another honorary degree, he was evasive when asked about the island's penchant for sending illegal African immigrants packing off to Italy, saying, "I am not in a position to intervene." As tens of thousands of Tamil refugees lingered under fire on a narrow strip of beach in Sri Lanka, Ban and his advisors did little more than huddle in New York and wring their hands, onl   y making a trip to the war zone after hostilities ended. Under his stewardship, the United Nations isn't merely an unhelpful place—it's a largely irrelevant one   .

Ban's flaws were obvious dating back to his decades toiling in the South Korean foreign ministry, where he earned a telling nickname, "The Bureaucrat." Luckily for Ban, if not for the rest of the world, The Bureaucrat was exactly what the Bush administration was looking for after years of tussling with the assertively anti-American Annan. When it became Asia's turn to nominate a secretary-general, Bush's secretary of state, Condoleezza Rice, made Ban's election her pet project. But Ban failed to charm outside observers. In his book The Best Intentions, James Traub recounts a speech at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during Ban's campaign to become secretary: "[B]etween his anodyne oratory, and his unsteady grasp of English, I found that I had been lulled to sleep."

As secretary-general, Ban's soporific effect has never left him. One    U.N. watcher told me that Ban is like the proverbial tree falling in the forest with no one    around to witness its crash—if you don't hear him, does he really exist? Aside from his role as a subsidiary of South Korea, Inc.—lining his office walls with Samsung televisions and hiring his South Korean buddies as senior advisors—his imprint has been negligible. Even Ban seems aware of what a nonentity he is: Last August, speaking to senior U.N. officials in Turin, he described his management style as elevating teamwork over intellectual attainment. But he went on to bemoan his difficulty overcoming bureaucratic inertia, ending with a gnomic admission of general defeat: "I tried to lead by example. Nobody followed."

At their best, U.N. secretaries-general can serve as a goad to the world's conscience and a genuine catalyst for change. Dag Hammarskjold, for example, sought to expand the United Nations' mandate by undertaking high-profile and frequently risky missions, from meeting with Chinese leaders under Mao to securing freedom for 15 American pilots captured during the Korean War to traveling several times to the Congo in hopes of averting warfare during decolonization. During the 1980s, the urbane Javier Pérez de Cuéllar earned high marks for conducting talks between Argentina and Britain after the Falklands War and for bringing about Namibian independence from South Africa.

So far, Ban has no such successes to his credit. It's not as if there aren't enough crises around the globe for him to make his mark, whether in Sri Lanka or Sudan or the Middle East. But Ban hasn't given any indication that he's going to have an impact in any of these places—or even that he wants to.


문제가 된 뉴스위크 기사는 미국의 외교 전문잡지 포린 폴리시 7~8월호에 미국 싱크탱크 닉슨센터가 발행하는 잡지인 ‘내셔널 인터레스트’의 시니어 에디터인 제이콥 하일브룬이 실은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편집자주:

반기문총장이 산적한 국제적 문제를 제켜놓고 북한 핵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결의 의지를 나타내어도 그에 대한 비판은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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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 문제 없다 ?

2009.06.01 22:00 | 내가쓴글 | ecophalt21

http://kr.blog.yahoo.com/hjk5607/1297 주소복사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 없다 ?
http://kr.blog.yahoo.com/hjk5607/1296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 없다 ?


우리나라 상고사의 뿌리가 시간과 공간을 두고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자료를 모으다가

중국이 왜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데 이르렀다.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다가 우리한반도의 조선시대

건국초기 북방의 상황에 대하여 관심을 두게 되었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등 상고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를 지나 이성계의 조선시대까지
역사적 시간이라는 큰 간격를 두고

같은 장소 지역인 한반도와 주변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에서는

어떤 왕조와 민족이 명멸하고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찾아나서게 되었다.

왜 오늘의 21세기 중국이 엄청난 땅을 차지하게 되었은가에 대한 배경이다.

그것은
오늘날 2008년 올림픽을 전후로 중국이 세계최고의 달라보유국 ,핵무기보유, 우주선자체발사등
경제적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입김이 강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국가사회과학원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세웠다.

필자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학술적으로 논란이 있울 수 있지만

현재 티벳트, 서장, 동북지역등 소수민족의 분쟁과 자주 독립, 국경문제해결을 뿐만 아니라
중국내부의 특히 상해 광동지역 경제적 만족도가 올라감에 따라 자체 분열을 예방하는
사전 포석이라고 본다.


동북공정은

그것의 일환으로 그들 중심의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이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는 중국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주변 경제상황 및 정세 변화에 예의 주시하면서 통치 안정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전략중의 하나가 동북공정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우리가 북방영토에 우리 선대민족의 역사문화유적이 엄청나게 많다고 해서

그것이 현재 와서 우리땅의 역사이라고 분란을 일으켜 중국지도부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도 중국지도부도 유익한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역사에서 그 당시의 땅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적문제를 현중국의 내치문제 해결방안으로 끌여들이는 것이다.

이는 도리어 적당시기가 되면 이것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역사공정이 도마위에 오를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사와 연계해서 현재 영토문제 관할 문제가 동시에 발생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중국 한족의 중심의 나라는 지금의 양자강 이남 하남성을 경계로 이루어져 왔다.

역사소설 삼국지에서 그러하듯 모두 그 지역을 찾기위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중국 대륙을 도도히 흐르는 양자강을 장강이라 일컬으며

이를 경계로 하남과 하북을 구분하고 하북의 나라들을 북방 오랑캐라고 불러왔다.

송나라까지 그 흐름을 유지 하였다가

중국전역 분만 아니라 중아아시아 인도 동유럽 까지 몽골의 징기스칸에 의해 점령당한다.

징키스칸은 수도를 송의 수도인 개봉에서, 북경으로 중심으로 통치를 해왔다.

그들이 물러나자 남방의 한족 출신인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다시 남방인 남경을 도읍이라 정하였다.

원이 망하는 시기는 고려말이며,당시 북방은 원의 통치권이 약화되어 있어
북방의 발해, 고구려 고조선의 고토 영역을 되찾자는 시대적 갈망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고토수복을 위해 절호의 시기적 기회였다.

고려정권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었다.

그 고토회복 책임장군이 이성계였다.

그는 이를 배반하고 도리어 고려 왕권을 쥐게된다(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진 뒤 정치적 수순을 밟아 세워진 근세 조선은

사대주의의 근본인 유교인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넓은 초원을 무대로 세계를 호령하던 흉노족의 호연지기와 기마민족
고유의 진취성을 거세해갔고,

이에 따라 '작은 나라, 작은 역사'의 답답한 굴레가 한반도안에서
500여 년 동안 우리를 짓눌러왔던 것이다.

사대주의의 시작이었다.


명나라가 1368년에 건국되었고 조선이 1392년에 건국되었으므로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부친인 이성계와 황동을 하던 동시대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러다 얼마않되어 명의 정권이 안정되자 주원장의 손자가 왕으로 책봉되자
주원장과 함께 건국을 도모한 삼촌이 왕위를 찬탈하고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었다.

그리고 명이 200년도 않되어 내분에 의해 망하면서 청나라가 들어 선다.

명나라의 국토는 과거 한족이 나라를 이끌던
중원이라고 불리우는 남경을 기반으로 하였다

중국 한족은 양자강을 넘어가면 왕조가 망한다는 징크스가 항상 있어왔다.

그 징크스가 재차 실현되었다.

그들이 항상 염려하던 바로 북방민족 오랑캐의 침입이다.

오늘의 중국의 큰 대륙을 가지게 한 민족은 청나라 여진족이다. 즉 만주족이다.

그 여진족은
우리가 잘아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구성하는 민족중 하나인 훙노족 숙신족 돌궐족 부여족 몽골족 거란족 선비족 말갈족 여진족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우리와 뿌리를 같이한다, 상고사 시절의 형제민족이다.

고구려가 망한후 뿔뿔히 헤어져 각자의 지역에서 북방에서 유목생활을 하여 왔다.

발해라는 나라도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이 세워 번성하였다.

우리가 아는 고조선 ,고구려,발해를 구성하는 백성은 여러부족이 섞인 다민족국가이다.

그 장소에서 역사의 언덕을 넘어 최초로 중국 전체를 통일한 최대의 국가를 건설한다..

그 것이 청이다.

초기엔 그들의 나라이름을 "후금"이라고 하다 "청"으로 개칭한다.

첫도읍지는 지금의 요령성 심양이다.

여진족은 조선초 건국초기에 이성계를 도와준 건국공신 민족이다.
그를 도운 여진족은 이지란(李之蘭)이다 그의 본명은 쿠란투란티무르'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공을 세웠다. 이성계와 형제의 의를 맺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필자주 : 이성계도 여진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논외)

건국후 얼마 않되어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들을 무식하고 야만스럽다고 내쫒게 된다.

그 못난 여진이 조선중기에 강성하여 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중원을 차지 하게 된다.

고구려 멸망이후 우리 선조 민족은 한번도 중국왕조를 상대로 싸워 이겨 본 적이 없다.

중국 중원을 차지 해본적도 없다.

조선중기 여진은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강성한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 수장이 누루하치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같은 뿌리의 후손들이니 서로 화합하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유교로 무장한 지식인들이나 관료들이 무식한 오랑캐라고 멸시를 하였다.
그들이 보낸 사신을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곳은 외교상 커다란 결례이다.

그 결과가 조선 정복이었다. 즉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 즉 청나라에 의해 조선은 임진왜란 후 얼마 안되어
또 전국이 전란에 휩싸여 처절하게 당하게 된다.

조선임금이 엄동설한 대한추위의 겨울에 먹을 것이 없이 쫄졸 굶다가 남한 산성에서 내려와

바람부는 한강변 삼전 나루터 모래밭에서
왕과 왕비, 후궁 왕세자 뿐만아니라 영의정이하 모든 신하들이 추위에
오금을 벌벌떨면서 몇시간에 걸쳐
여진족의 청나라 청태종과 그들의 장수에게 업드려 항복을 하고 신하의 예를 올렸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하는 무식한 놈들에게 처절하게 당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그 치욕은 말로 형언 할수 없었다고 한다.( 정비석의 소설 "통곡" 참조)

임금과 신하가 절을 하는 사이에 왕의 후궁과 공주, 고급관료들의 정경부인들이 발가벗기어 임금과 신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능욕을 당하는 묘사가 나온다.

남편들이 보는 앞에서 부인과 딸이 오랑캐들에게 능욕 당하는 지켜보는 것은

명성황후가 일본 야쿠사에게 당하는 것보다 더한 분노를 떨게 한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 치욕을 기록하는 비가 바로 잠실의 롯데호텔 옆에 있는 삼전도 비이다.

잠시 그 여진족과 청에 대해서 정리 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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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자료:

여진족(女眞族 중국어 간체: 女真, 정체: 女眞, 병음: nǚzhēn)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거주했던 에벤키 계통 민족으로, 17세기에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금나라를 1115년과 1122년 사이에 세웠으며( 고려 중엽 ) 이 왕조는 1234년까지 건재하였다. 그 후 1586년 누르하치(조선중기)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제국이 된다.


금나라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북만주의 여진 부족들은 원래 거란의 신하들이였다. (요나라사 참고)

1115년 완안 아골타가 그들을 통일하여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 김생 소설 영웅문 참조)
1126년 요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양쯔 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년을 지내게 되자 자신의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여진족은 점차 한족화 되어갔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따르게 되었다.

1189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1215년 몽골 군대의 압력 하에 이들은 수도를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1234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원 오코타이 징기스칸의 3남)

(편집자 주:중국은 징기스칸의 원나라로 명명된다. 한반도의 고려도 점령을 당하게 된다. 이때도 몽골은 형제국이라 하여 조공국으로 정하고 고려 국명은 그냥 두었다)


문화, 언어 그리고 사회

여진족은 일반적으로 초기 조상들의 유목 전통을 따랐다. 거란과 몽골족들처럼 이들은 힘과 말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궁술과 사냥을 즐겼다. 그들은 샤먼 의식을 행하였으며 하늘 신 (abka-i enduri 또는 abka-i han)을 섬겼다.

초기 여진 문자는 1120년 완안 아골타 (完顏 阿骨打)의 명에 따른 Wanyan Xiyin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이것은 거란 문자에 기반하였는데 한편 거란 문자는 한자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중국어는 고립어이며 여진 및 거란의 언어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 방식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진 문자는 금나라가 멸망하자 급속히 사라졌으나 여진어는 부분적으로 살아남았다. 16세기 말까지 여진족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혼합한 언어를 이용하다가 이후 만주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진 사회의 문화는 몽골족의 큰 영향을 받았다. 몽골족과 여진족 둘 다 정치적 지도자에게 "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황제이든 부족장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되었다. 아주 강력한 부족장은 "beile" (왕자, 귀족)이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몽골의 "beki"와 터키 민족의 "beg" 또는 "bey"에 해당한다. 또한 몽골족과 터키 민족처럼 여진족은 맏아들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능력이 있는 아들 또는 사촌은 누구든지 지도자로 선택받을 수 있었다.

명나라 시대 동안 여진족은 고대적인 씨족(hala)의 소규모 씨족(mukun, 또는 hala mukun)적인 사회 단위에서 생활했다. 여진족 씨족의 일원들은 동일 조상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으며 단일한 장(mukunda)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모든 클랜들이 혈연으로 얽혀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자주 분쟁과 합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여진 가정 (boo)은 하나의 가족 (booigon)처럼 살았으며 일반적으로 혈연으로 맺은 다섯개에서 일곱개의 가족원들과 노예들이 살았다. 가정들은 소대 (tatan)을 형성하여 사냥을 하며 음식을 구하였다. 전쟁 등의 대규모 활동을 위하여는 기업 (niru)를 조직하였다.


명대의 여진족
명왕조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만주 최북방의 야인 여진(野人女眞)과 현대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해서 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지린 성의 건주 여진(建洲女眞)이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돌골과 훌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이리하여 여진족의 중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영락제는 북원과 대항하기 위해 여진 부족 중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영락제는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성을 하사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주기적으로 조공을 해 오기를 바랐다. 요동의 북변에서는 무역을 위한 말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여진족 중국화의 결과로[출처 필요] 여진족이 조직화된 정치구조를 갖추게 되고 영향력을 외부로 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뒤에 이일과 젊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여진족을 조선의 강역으로부터 몰아내게 된다.

30년이 지난 후인 1586년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명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의 기반이 된다.


여진족

야인여진의 4부족
파아손 (巴兒孫)
착화(著和)
홀라온 (忽剌溫) :1436년 (함경도)
호(胡),오랑캐 (瓦爾哈/兀良哈三卫(泰宁、朵颜、福余)) =올랑합 ;이인(夷人);돌궐;이족(夷族);동이(東夷傳);蠻夷;戎狄;夷狄;서융(西戎);이제(夷齊); 남만(南蠻): 매독(每毒)
1436년 함경도
1460년 (세조)함경도 :북적(北狄) = 북쪽/북방 오랑캐 :낭패아한/낭발아한 (浪悖兒罕/浪孛兒罕); 동속로첩목아 (童速魯帖木兒)
ca. 1583-7년 : 이탕개/니탕개(尼湯介)& 번호(藩胡), 울지내(鬱只乃)

해서여진의 4부족
우라 (烏拉 > 1613년)
후이파 (輝發 > 1607년)
예허 (葉赫 > 1619년) :
星根達爾漢 (신게다루한);
席爾克明噶圖 (시르게민가도);
齊爾噶尼 (치르가니);
褚孔格 (추꾼게);
Cinggiyanu (淸佳砮;†1584년 )
Yangginu (楊吉砮;†1584년 );
金台石 (긴따이시);
德爾格勒(데르게르) ;
布寨 (부자이);
布揚古(부양구);
布爾杭古 (부르항구)
하다 (哈達 > 1601년) :
Wang Tai (萬汗/王台: 1548-1582년 )

건주여진의 5부족
오도리/알도리 (지금 회령지방) = 斡都里; 斡朵里;吾都里;斡朵怜 :

Möngke Temur (孟特穆 / 猛哥帖木耳;1405-1433),
Cungšan (充善; (b.1419) 1433-1467년 ),
펀차(Fanca ,† 1458년 );
교창가 (覺昌安,† 1583년 )
호리개로 (胡里改路) :
아하추( 阿哈出 ,Ahacu † 1409-1410년 ),
이만주 (李滿住;† 1467년 )
도은 (桃温/桃溫)
발고강(荸苦江)
탈알령(脱斡怜)
우디거/우디캐/우디하/ 올적합(兀狄哈:Wudige): (영고탑 지방)

왕고 (王杲;†1575년 );
Atai (阿台;† 1583년 );
Nikan Wailan (尼堪外兰;† 1586년 )

여진족은 한민족이라는 주장
몇몇 중국 사서에서는 여진족이 한민족이라는 주장이 있다. 아래는 그 예이다.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사(金史) : 금나라의 역사서-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出 신라왕의 김씨성이 나라 이름 금이 나온 먼 갈래이다. -흠정만주원류고 제7권 (청나라 시대에 저술한 만주족의 역사서)

두 번째 근거와 관련하여, 금나라 황족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와 신라의 연관성을 찾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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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태종인 홍타이치를 선조의 아들 광해군은 북방의 정세변화 판세 대해서 잘 알고있었다.

그의 실리외교는 아주 현실적이고 주변 정세를 잘 읽고 있었으나,

광해군의 대청우호선린의 그 주장은
명이 내분에 의해 망하고 있고 , 청은 군사력이 강력하여 이미 산해관(중국동쪽 경계출입관문)을 넘어 북경 가까이 진격을 하고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7년 전쟁의 임진왜란 당시 명의 큰 도움으로 나라를 구한 조선의 입장과 배치되어, 명을 손들어 주는 것이 의리이고 도리이다라는 명분론에서 밀리었다.

이는 시간을 뒤로 돌려 한국이 대만을 버리고 중국과 1992년 수교할때

장개석주석이 상해임정당시 한국독립을 위해
을 물심양면으로 헌신적 도움의 은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중국이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명분만 내세운 인조정부와
명분과 현실과 국가적 실익을 모두 고려한 김영삼정부의 판단이 서로 틀린것이다.

현 중국과 국교를 정상후 오늘까지 상호국익과 동북아 세력안정에
얼마나 큰 이익을 만든 발판이 된 것에 대해서
현 국민들은 높히 평가 해야 한다.

그 이후 다시 선린을 할수 있는 기회를 찾아 우정을 되살리는 것이 국가 및 인간관계이다.

국제외교에는 명분과 실리를 다 필요하지만 국제사회의 냉엄한 변화를 모르면
치욕의 역사가 반복된다

계속...

우리는 어제 한 사람을 역사속으로 보내는 의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는 이제 침묵으로 우리를 소리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퇴임후 님의 침묵은 무심한 세월과 답답함을 깨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님은


나는

그 전 나의 자리에 있었던 분하고는 ,,, 하고 할말을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님의 침묵은

더 이상 침묵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200년 역사로 일천한 미국이

오늘날 전세계를 이끌어 갈수 있게 만든 것은

남북전쟁 당시의 링컨이었습니다.

북측의 신기술, 신자본과 남측의 전통적 노동적 농업으로 갈라진 남북의 이해가

정치적으로 분열될때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뉘어

미국은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큰 전쟁이 일어 났습니다.

돈으로 갈라진 기득권 이해와

흑인 인권으로 유린된 미국을 포용한 지도자였습니다.

그 역사의 이음이 오늘날 오바바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할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님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더러운 지식인과

완장찬 비굴한 법률인,

돈먹은 정치인들에게


무지 몽매한 국민은



역사와 국민들앞에

노무현 처럼 죽을 수 있나고

물을 것입니다.


이제는

노무현은

남한이 두려워 오지도 못하는 김정일하고는 게임이 않되고

전두환보다 낫다고 말을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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