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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헤롯의 치세 헤롯 이 왕위에 올랐을 때 최초의 과제는 하스몬가의 영향력을 어떻게 제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 안티고누스와 그의 잔당은 이미 소탕되어 있었지만 , 히르카누스 II 세는 바벨론으로 망명해 있었고 , Alejandra 와 그 아들 아리스토볼리스 III세가 아직 남아 있었다 . 히르카누스 II 세는 이미 70세를 넘은 노인이어서 유대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 헤롯은 왕위를 서로 나눈다고 약속을 하고 히르카누스 에게 귀국을 권하고 , 사실 그가 귀국한 다음부터는 그를 자기의 아버지라고 불러 경의를 표하고 공식 석상에서는 항상 히르카누스에게 한 단 높은 좌석을 만들었다 . 헤롯에게 있어서 노 ( 老 ) 히르카누스 는 벌써 정치적으로는 무해하였고 , 오히려 표면적으로 그를 존경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신임을 얻는다는 이용 가치가 있다고 간주했을 것이다 . 한편 아리스불로스 III 세의 문제는 더 미묘한 관계가 있었다 . 아리스불로스 는 아직 십대의 젊은이로서 하스몬가의 직계 임으로 당연히 대제사장이 될 위치에 있었고 , 어머니 살로메 와 더불어 유대인의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 바꾸어 말해 그는 헤롯 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였다 . 그래서 먼저 아리스불로스 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다른 제사장 가계 출신의 아나넬 ( Ananel) 이라는 인물을 대제사장으로 임용하였다 . 살로메 는 이에 대해 매우 노하여 클레오파트라 Ⅶ세 (Cleopatra Ⅶ : 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 제국이 4 대 지역으로 나누어 졌고 그 중 에굽과 북 아프리카 지역을 계승한 왕족 )에게 호소하여 그녀의 간섭에 의해 아나넬을 면직시키고 아리스불로스 를 대제사장으로 하는데 성공했다 . 헤롯 은 이 때 이미 이 모녀를 같이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 헤로디움의 유적 아리스토불리스 는 16세의 나이로 초막 절에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최초의 제사를 드렸다 . 헤롯은 그를 살로메 와 같이 여리고로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지만 , 그 때 정원의 풀에서 아리스토불리스 가 익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 헤롯 은 크게 슬퍼하는 척하여 크게 장사를 지냈다 . 그러나 살로메 는 이것이 헤롯 의 음모에 의한 계획적인 익사라고 확신하고 , 재차 클레오파트라 에게 호소했다 . BC 35 년 클레오파트라 의 요청에 따라 안토니우스 는 헤롯 을 환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라오디게아로 헤롯 을 소환했다 . 헤롯 은 각오하고 아내인 마리암메를 숙부인 요셉에게 맡기고 , 만일 자기가 안토니우스에게 처형될 경우에는 마리암메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아직 헤롯의 이용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 이 사건으로 그를 문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므로 헤롯을 소환했지만 숙청의 내정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여 결국 심판을 회피하였다 . 헤롯 은 간신히 위급을 피하여 유대로 돌아왔으나 , 그의 부재 중에 마리암메와 숙부 요셉이 불의의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것을 알고 요셉을 처형해 버렸다 . 그는 마리암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 이 사건을 통하여 그녀를 의심하게 되고 , 나중에는 결국 질투심과 의심 때문에 마리암메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 또 이 사건 후에도 클레오파트라는 헤롯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기회 있는 대로 헤롯에게 불리하게 꾀하였다 . 헤롯이 먼저 이드매와 가사 총독으로 임명한 코스토바루 ( Costobarus)라는 인물을 사주하여 이 지방을 헤롯의 지배에서 독립시키려 꾀한 적도 있다 . 이 때에도 안토니우스가 결국 헤롯을 지지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 가사와 욥바의 성읍은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로부터의 선물로서 손에 넣었다고 한다 . 그런데 이와 같은 클레오파트라와의 불화는 결과적으로 헤롯에게 유리한 구실로 되었다 .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불화하게 되어 개전 (開戰 )하였을 때 , 헤롯 도 여기에 참가하려 하였으나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종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 그 결과 안토니우스는 BC 31년 악티움 ( Actium)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어 황제 아구스도라고 칭했을 때 , 헤롯 은 클레오파트라의 적의를 강조함으로써 새 지배자의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 악티움 싸움 기간 중 헤롯 은 나밧 사람과의 전쟁에 정신이 없었으며 , 전술한 바와 같이 참전할 수 없었는데도 클레오파트라는 배후에서 헤롯 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 옥타비아누스가 헤롯 을 로마로 소환하였을 때 , 헤롯 은 먼저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던 것을 숨김없이 말하고 ,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와의 적대 관계를 강조했다 .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헤롯 을 용서해 주고 유대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했다 . 또 앞서 헤롯 이 클레오파트라에게 할양 (割讓 )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해양 지방의 성읍과 기타 영토도 그에게 주었다 . 헤롯 은 이처럼 옥타비아누스의 충실한 지지자로 되어 지위를 확보하고 유대로 돌아오자 , 아내 마리암메와 살로메 를 처형했던 것이다 (BC 29). 이 사건에 대해서는 같은 요세푸스의 기술에 차질이 있다 . 요세푸스는 한 번은 (War I. xxii. 3, 4) 마리암메의 처형을 헤롯이 안토니우스에게 환문되었다가 돌아온 후 (BC 35-34)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 또 한 번은 ( Antiq. xv. vii. 1) BC 29년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이 두 기술은 매우 비슷한데 , 아마 `유대 고대사 ' 편이 옳은 것 같다 . 헤롯 은 마리암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부득이 처형한 후 그는 남은 생애 내내 이 상처로부터 회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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