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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나라 고지도 모음

2009.11.26 14:11 | 생생 역사 | 고은네

http://kr.blog.yahoo.com/han1592/985305 주소복사

원본 원본 : Krblog in Yahoo

신동아에 따르면, 18세기 집안,간도지역이 조선의 세력권이었음을 보여주는 서양 고지도 69점이 발굴되었으며,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서양지도가 이처럼 대량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평안도(PINGAN)가 압록강 이북의 집안지역까지, 함경도(HIENKING)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당빌리는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동해를 "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1740년 예수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제작한‘La CHINE avec la KOREE et les Parties de la TARTARIE’





1771년, 본이 제작한‘CARTE DE LA TARTARIE CHINOISE’





1778년 잔비어(Janvier, j. & Santini, F) 등이 제작한 ‘L、ASIE divisee en ses principaux Etats’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형성된 것으로 나온다. 한국을 녹색 테로 둘러‘COREE’라고 표기했으며 동해는‘MER DE COREE’로 표기했다.






1794년 윌킨슨(R. Wilkinson)이 제작한‘CHINA, Drawn from the Latest & Best AUTHORITIES’






1920년 로마교황청이 작성한 교구도.  한반도를 서울,대구,원산의 3개 교구로 나눴는데, 간도 지역이 원산(Wonsan)교구에  포함되어 있다






1909년 일본 조선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 잔무정리소가 제작한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 답사도"  
백두산(검정색 원) 정계비는“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토문강으로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지도는 토문강(갈색 원)과 두만강(청색 원)은 다른 강이며,두만강 이북에 토문강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1785년 일본의 지리학자인 하야시 시혜이(林子平)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로 빨간선 안에 울릉도와 독도(우산국)가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려져 있다.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정병준 교수는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영국정부의 자료를 발굴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해 연합국과 패전국일본이 1951,9,8에 조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준비과정에서 유일하게 작성된 지도이자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백히 규정한 자료다






 
1951,9월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직전인 그해 4월 7일 제작한 연합국 일원인 영국정부의 일본 영토지도에 다케시마로 표기된 독도는 한국 영토에 포함돼 있다. 사진에서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다케시마로 표기된 독도이다.

그동안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약에 일본영토를 확실히 하는 지도가 첨부되지 않았다는 빌미로 독도를 포함해 러시아와 북방 4개 섬, 중국과의 조어도 영유권 분쟁을 야기해 왔다. 또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1785년 일본의 대표적 지리학자인 하야시 시혜이가 제작한 '조선팔도지도'를 발견했다며 27일 원본을 공개했다. 한반도 전체를 노란색으로 채색한 이 지도에는 북위 39도에 울릉도와 독도(우산국)가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려져 있고, 울릉도 우측 바다가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돼 있다.



 
조선팔도지도 18세기 말, 서울대 규장각 소장



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 큰 획을 그었던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수정본 계열에 속하는 전조(全圖)이다. 각 도의 군현을 원으로 나타내고 바탕색을 구별함으로써 팔도의 경계를 구분하였다.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은 사각형으로, 진보(鎭堡), 역(驛)은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다. 우측 주기(註記:지리정보)에는 서울에서 각지에 이르는 거리를 수록하였다. 다른 전도와 달리 도로망을 그리지 않아 미완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18 ~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전도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


 
 
아국총도 18세기 말, 서울대 규장각 소장



정조대에 제작된 지도첩인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된 전국지도.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따르고 있다. 이 지도는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데, 산줄기를 녹색으로 하천을 청색, 그리고 팔도의 군현을 색채를 다르게 하여 구분하였다. 또한 해안의 섬들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도서 지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던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지금의 독도가 울릉도 동쪽 동해에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마도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국토의 좌향(坐向), 동서와 남북의 길이, 사방(四方)의 끝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그리고 각 도의 군현 수가 기재되어 있다.


 
 
동국대지도 18세기 후반, 개인소장


 조선 후기 지도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정상기(鄭尙驥, 1678 ~ 1752)의 <동국지도>이다.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는 대전도와 팔도분도가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팔도분도이고 대전도는 매우 드물다. 이 지도는 제척(梯尺)의 형태인 백리척을 사용하여 그린 대전도로서, 당시로서는 대축척지도인 약 1 : 42만 지도이다. 한반도 북부지방의 왜곡된 윤곽이 정상기의 지도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지도는 대전도를 후대에 전사한 것으로 초기의 지도에 비해 정교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전도 정상기, 1757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지도는 1757년(영조 33)에 영조의 명으로 정상기의 <동국대전도>를 모사하여 홍문관과 비변사에 보관하도록 한 모사지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과 강, 섬 등 자연 지명과 군현 이름, 창고, 진보(진보), 찰방, 산성 등 인문 지명 및 중국과 일본 등 모두 2,580여 개의 주기(주기)를 담고 있다. 산맥의 표현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을 크게 강조하고, 여기서 뻗어나간 주요 산맥들을 강조함으로써 국토를 인체(人體)로 인식하는 전통적 지리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병영, 수영, 읍성, 진보, 찰방, 봉수 등을 기호화하고, 산성, 고갯길, 관문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진일보한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19세기 김정호에 의해 한 층 더 발전했다. 한편 지도에 육로, 해로, 고갯길을 나타내어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 필요를 모두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해좌전도 1850년대, 개인소장



 19세기 중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목판본 조선전도. 지도의 윤곽과 내용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유사하며 산계(山系)와 수계(水系), 자세한 교통로 등이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동의 여백에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10여 개의 명산의 위치와 산수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섬 정계비, 초량왜관(草梁倭館) 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조선(古朝鮮), 한사군(漢四郡), 신라구주(新羅九州), 고려팔도(高麗八道)의 고을 수를 좌측상부의 여백에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현재와 과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로서, 목판 인쇄술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조선방역지도 1557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국보 제 248호로 지정된 조선전기의 전도. 이 지도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을 관할하던 제용감(濟用監)에서 제작한 지도로 대마도(對馬島) 종가(宗家)에 보관해 오던 것을 1930년대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종가문서를 인수하면서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조선 전반 세종대의 과학적인 지도제작 사업은 세조 때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에서 결실을 맺었는데, 이 지도는 <동국지도>의 사본으로 추정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면 하계망이 비교적 정확하다. 산줄기는 풍수적 지리인식에 기초한 연맥으로 표현하였다.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17세기 후기, 고려대 도서관 소장


 이 지도는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도 색감을 중시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지도이다. 많은 산봉우리에 봉화가 촛불처럼 그려져 있는데, 특히 압록강, 두만강의 국경 지대에 밀집되어 있다. 주현읍치(州縣邑治)·도로, 산천과 대소 산맥·준령(峻嶺)·성곽·역참(驛站)·봉수대 등을 그려 넣어 봉수의 직간선(直間線)을 한 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서해쪽의 네모 안에는 목멱산(木覓山:서울의 남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강원도래양주아차산봉수(咸鏡江原道來楊州峨嵯山烽燧)·경상도래광주천림산봉수(慶尙道來廣州天臨山烽燧) ·평안도육로래모악동봉봉수(平安道陸路來母岳東峯烽燧)·평안황해도수로래모악서봉봉수(平安黃海道水路來母岳西峯烽燧)·충청전라도래양천개화산봉수(忠淸全羅道來陽川開花山烽燧) 등 5대 봉수로와 동서 및 남북의 길이,서울에서 동서남북 주요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표기되어 있다.


채색필사본, 19세기 전기, 영남대 박물관 소장
hmapkorea5.jpg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 유형의 조선 전도이다. 조선전도는 팔도를 모아 전국을 한눈에조망하고  휴대하기 간편하게 만든 것이다. 전도인 이 지도에 정상기의 발문과 축척인 백리척이포함되어 있어 지도상에서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군현의 이름을 오방색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경기는 순황색, 충청은 홍백생, 호남은 순홍색, 영남은 청홍색, 강원은 순청색, 해서는순백색, 관서는 백흑색, 관북은 순흑색으로 표현하였다.  지고에 산, 천, 지, 나루, 봉수, 창, 진, 산성, 창고, 절 등이 표시되어 있으나 도로망은 그려져 있지 않다.

 
 
 
hmapkorea2.jpg
 
조선의 건국 후 수도를 옮김에 따라 전국 지도, 세계지도, 각 도별 지도 등이 제작되었다.
특히 세종, 세도 시기의 과학기술의 발달과 지도제작에 대한 큰 관심은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정척과 양성지가 <동국지도>를 완성 제작함으로써 큰 결실을 맺은 바 있다. 한 때 조선 초기에는 대체로 국가가 주관하여 지도를 편찬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지도로서는 많은 국가의 고관들이 참가하여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가 있다. 이 지도는 <천하도>로서 상상적 세계관을 나타 낸 원형 세계지도로서 조선조의 특징적인 지도로 중요하다.


 
목판본, 18세기 후반, 영남대 소장
hmapkorea3.jpg
 
 팔도 전도와 도별지도를 포함한 동람도 형식의 지도책 속에 실린 세계지도. 천하도는 조선에서 특히 유행하였던 원형의 지도이다. 지도의 중앙에는 중국, 조선이 포함된 중심대륙이 자리잡고 있다. 그 대륙을 바다가 둘러 싸고, 그 둘레에 다시 고리 모양의 대륙이 있으며, 그 바깥에는 대양이 둘러 싸고  있다. 천하도에는 실제 존재하는 지명 보다 대인국, 소인국, 여인국, 등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의 지명이 많이 나타 난다. 이 지도는 서양에서 도입된 정사도법의 경위선을 추가하여 서양식 지도 기법을 가미하고 있다.


 
hmapkorea4.jpg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책 <동람도>제 1면에 수록된 우리나라 지도 전도.
동람도에는 우리나라 전도인 팔도총도와 도별지도 8매가 포함되어 있으며 판심에 '동람도'라 적혀 있다. 현존하는 동람도는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에 비하여 이지도는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사료상의 가치가 매우 높다. '팔도 총도'는 지도의 길이가 동서가 남북의 길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넓어 한반도 전체와 특히 북부지방이 남북으로 압축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전체를 대산으로 하여 그린 조선저도는 우리 국토를 상징하는 지도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지도이다. 조선전도에는 선조들의 국토인식과 자연관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지도의 완성을 가능하게 했던 과학지식의 수준, 지도제작의 기술, 예술적 표현능력 등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전도는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 사업으로 제작되었는데,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국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에 새로 개척된 북방지역에 대한 인식이 고양될 수 있었다. 그 결과 15세기 중엽에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東國地圖)>가 탄생되었으나, 실물이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보 248호)가 남아 그 흔적을 전해준다. 또한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東覽圖)>는 간략한 지도이나 민간에서 널리 애용한 점에 의의가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 민간의 뛰어난 지도학자들이 지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18세기 중엽 정상기(鄭尙驥)는 한반도의 윤곽을 거의 실제와 가깝게 그려내, 조선전도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정교하고 사실적인 지도와는 달리 <동람도>와 같은 소략한 형태의 지도가 민간에서 제작 유포되었는데, 역사부도 및 여행용 지도로서 폭넓게 이용되었다.

 1861년에는 당시까지 축적된 지도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탄생되었다. <대동여지도>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조선저도의 완성편으로, 독창적인 지도학적 기법과 표현방식, 목판 인쇄를 통한 지도의 대중화, 예술적 감각과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의 지도의 전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독도, 일본(日本)땅 아니다" 1946년 대장성 법령 발견

2009.11.23 11:37 | 생생 역사 | 고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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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9년 11월 16일(월) 오전 03:03 가 가| 이메일| 프린트


일본 이 대한민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 스스로 '독도(獨島)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인정한 사실을 담은 법령 자료가 발견됐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실이 익명의 일본 고위관료를 통해 15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1946년 8월 15일 일본 대장성 (大藏省)이 발표한 고시(告示) 654호에서 독도(竹島로 표기)는 조선, 대만 ,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과 함께 외국(外國)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박 의원실에 따르면 "일본은 패전 직후인 1946년에 일본 기업들이 부담할 배상 및 노무자들에 대한 미지급 임금 채무 등의 해결을 위해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을 제정해 회사가 실행 중인 사업 및 전후 산업 회복에 필요한 동산, 부동산, 기타 재산 등을 정했다"며 "이 법의 칙령에서 '재외(在外) 자산'의 범위를 규정하고, 대장성 고시에선 패전 전 점령했던 영토 중 외국으로 분류한 지역을 규정했는데
여기에 독도가 포함돼 있다"고 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독도학회장)는 "1946년 1월 일본 도쿄에 설치된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제677호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되는 곳으로 명시했다"며 "이번에 발견된 1946년 대장성 고시는 당시 군정하에 있었던 일본이 연합국 방침을 추인하고 실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광복 이후에 독도를 자국(自國) 영토가 아니란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법령 자료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지난해 12월 청와대에 보고한 ▲1951년 6월 6일 공포된 ‘총리 부령(府令) 24호’와 ▲1951년 2월 13일 공포된 ‘대장성령(大藏省令) 4호’ 등 두 개의 일본 법령이었지만, 이번 자료는 이보다도 5년 앞선 것이다.
‘총리 부령 24호’는 일본이 옛 조선총독부의 소유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장성령 4호’는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는 자를 위한 부속 도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 등을 일본의 섬에서 제외했다.

박선영 의원은 “이 자료는 일본 정부가 패전 직후에 영토의 서쪽 경계로 독도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법령 자료”라며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런 법령·역사적 자료를 발굴하고 활용해서 일본과 독도 영유권 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독도 전문가인 귀화 일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이 패전 이후 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제외시킨 최초의 법령 자료로 보인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은 연합국과의 종전 협정을 통해 자치권을 회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 이후부터는 태평양 전쟁 패배에 따라 반환해야 할 영토목록에서 독도를 삭제했는데, 그 시점 이후에도 독도를 자국영토에서 제외한 일본 정부 법령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했다.

"독도, 일본(日本)땅 아니다" 1946년 대장성 법령 발견

2009.11.21 07:06 | 생생 역사 | 고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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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1.16 03:03 / 수정 : 2009.11.16 08:41

박선영 의원
독도(일본명 죽도·竹島)를 조선, 대만 등과 함께 외국으로 규정한 1946년 8월 일본 대장성 고시 654호.
문건 입수
일본이 대한민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 스스로 '독도(獨島)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인정한 사실을 담은 법령 자료가 발견됐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실이 익명의 일본 고위관료를 통해 15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1946년 8월 15일 일본 대장성(大藏省)이 발표한 고시(告示) 654호에서 독도(竹島로 표기)는 조선, 대만,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과 함께 외국(外國)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박 의원실에 따르면 "일본은 패전 직후인 1946년에 일본 기업들이 부담할 배상 및 노무자들에 대한 미지급 임금 채무 등의 해결을 위해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을 제정해 회사가 실행 중인 사업 및 전후 산업 회복에 필요한 동산, 부동산, 기타 재산 등을 정했다"며 "이 법의 칙령에서 '재외(在外) 자산'의 범위를 규정하고, 대장성 고시에선 패전 전 점령했던 영토 중 외국으로 분류한 지역을 규정했는데 여기에 독도가 포함돼 있다"고 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독도학회장)는 "1946년 1월 일본 도쿄에 설치된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제677호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되는 곳으로 명시했다"며 "이번에 발견된 1946년 대장성 고시는 당시 군정하에 있었던 일본이 연합국 방침을 추인하고 실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광복 이후에 독도를 자국(自國) 영토가 아니란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법령 자료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지난해 12월 청와대에 보고한 ▲1951년 6월 6일 공포된 ‘총리 부령(府令) 24호’와 ▲1951년 2월 13일 공포된 ‘대장성령(大藏省令) 4호’ 등 두 개의 일본 법령이었지만, 이번 자료는 이보다도 5년 앞선 것이다. ‘총리 부령 24호’는 일본이 옛 조선총독부의 소유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장성령 4호’는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는 자를 위한 부속 도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 등을 일본의 섬에서 제외했다.

박선영 의원은 “이 자료는 일본 정부가 패전 직후에 영토의 서쪽 경계로 독도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법령 자료”라며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런 법령·역사적 자료를 발굴하고 활용해서 일본과 독도 영유권 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독도 전문가인 귀화 일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이 패전 이후 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제외시킨 최초의 법령 자료로 보인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은 연합국과의 종전 협정을 통해 자치권을 회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 이후부터는 태평양 전쟁 패배에 따라 반환해야 할 영토목록에서 독도를 삭제했는데, 그 시점 이후에도 독도를 자국영토에서 제외한 일본 정부 법령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했다.

[사람과 이야기] "1년 더 삶이 허락된다면 평생 연구 끝낼텐데…

2009.11.21 06:49 | 생생 역사 | 고은네

http://kr.blog.yahoo.com/han1592/985296 주소복사




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발견한
在佛 박병선 박사 암투병 중
直指·외규장각도서 297권… 佛도서관 취직해 발굴해내
"호랑이잡으러 호랑이굴 갔죠"
병인양요 연구 수십년째
"왜 이걸 찾아 문제 만드나
정부, 처음엔 냉담한 반응
반환운동 일자 태도 바꿔"



▲ 지난해 9월 충북 청주시에서 열린‘직지축제’에 참가했던 박병선 박사. 세번이나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는“아픈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며 끝내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김선옥씨 제공


"오늘도 안 됩니까?(Aujourd'hui, on ne peut pas?)"

1980년 봄, 프랑스 파리 리슐리외가(街) 프랑스국립도서관. 소년처럼 머리칼을 짧게 친 52세의 한국 여성이 또박또박 물었다. 도서관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여성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그는 몇달 전까지 이 도서관에 근무하던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81)씨였다. 박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1955년 홀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13년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3000만종이 넘는 장서를 뒤져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주불 한국대사관에 알렸다.

프랑스 상사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박씨는 뜻을 꺾는 대신 사표를 냈다. 이후 매일 도서관에 찾아가 '개인' 자격으로 외규장각 도서 열람을 신청했다. 옛 동료들의 냉대를 견디며 매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오늘도 안 됩니까?" 한 달 만에 간신히 열람 허가가 떨어졌다.

지난달 30일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서 만난 박씨는 "이후 10년 넘게 매일 도서관에 가서 외규장각 도서의 목차를 베끼고 내용을 요약했다"며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고 할까 봐 밥도 안 먹었다"고 했다.

1980년대 주불 한국문화원장을 지낸 인사는 "파리의 한인들 사이에 박씨가 밥도 안 먹고 외규장각 도서를 베끼고 있다는 소식이 파다했다"며 "도서관 바깥으로 그를 불러내 억지로 도시락을 먹이며 '이걸 다 먹어야 도로 들여보내주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성빈센트병원에서 만난 박씨는 암 투병 중이었다. 병인양요에 대한 한국 사료를 모으러 지난 9월 서울에 날아왔다가 격렬한 복통으로 병원에 갔다. 의료진이 직장암 4기를 선고했다. 그는 무너지거나 흐트러지는 대신 또렷하게 말했다. "내 연구를 정리하려면 아직 1년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 1년만 주어진다면 하느님께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그는 인터뷰를 세 번 거절했다. "아픈 걸 보여주는 게 싫다"고 했다. 간병인이 그런 뜻을 전하며 병실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흰 시트에 놓인 노인의 야윈 발이 보였다. 네 번째 찾아갔을 때 그는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그는 "내가 평생 병인양요 연구에 골몰한 것은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이치"라고 했다.

그는 5남매 중 셋째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사범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민간인 여성 가운데 최초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은 사람이었다.

"나는 6·25전쟁 직후에 프랑스에 건너갔어요. 한국사람이면 당연히 병인양요에 관심을 가지지 않겠어요? 애초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취직한 것도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프랑스 함대가 가져간 책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는 풍문을 들었거든요.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죠."

도서관에 근무하던 시절, 박씨는 틈만 나면 서고를 뒤졌다. 서고를 나설 때면 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했다. 동료들은 일에 미친 박씨를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을 그만둔 뒤에는 연금으로 생계를 꾸리며 누구도 보상하지 않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10권 넘는 학술서를 썼다.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것이 평생 내 일이었어요.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내가 너무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라 그랬나 봐요.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가 될 자신이 없었던 거지요."

학자로서 그는 남들이 평생 한 번 이루기 힘든 업적을 여러 번 이뤘다. 그는 단순히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낸 사람이 아니라, 이 책이 1455년에 나온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빠른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부터 이건 우리 불경이고, 나아가 금속활자본이 맞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감(感)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파리의 인쇄소와 신문사에서 금속활자 주형을 얻어다 집에서 직접 찍어봤다. 납활자를 만들어 찍어보느라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불교의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적은 오래된 종이 위에서 미세한 금속 부스러기를 찾아냈다.

그러나 '개인 박병선'의 일상은 고독했다. 그는 "프랑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 건 이해한다"고 했다. "내가 놀란 건 한국 정부의 반응이었어요. 처음에는 '뭐하러 이런 걸 찾아내서 귀찮게 하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거든요.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요. 나중에 전 국민적인 반환운동이 일어나자 정부가 태도를 바꿨어요."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한 사료를 찾아내는 작업도 했다. 그는 "임정(臨政)이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임정과 관련된 사료가 굉장히 많다"며 "우리 세대가 죽고 그 모든 사료가 흩어지기 전에 모든 걸 찾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관련 자료를 모아 총 다섯 권짜리 책을 낼 계획이었지만, 1권이 나온 뒤 우리 정부의 지원이 끊겨 중단했다.

인터뷰를 거절했을 때나, 수락하고 마주 앉았을 때나 그는 변함없이 꼬장꼬장했다. 은발은 정갈하고 얼굴은 맑았다. 의료진은 "통증이 극심할 텐데 내색을 안 한다"고 했다. 간병인은 "내게 뭘 부탁하거나 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암 환자를 오래 돌봤지만 이런 분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공무원 신분으로 한국 문화재를 찾아냈다. 이후 프랑스 공무원 연금으로 생계를 꾸리며 우리 역사를 연구했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줬다. 지인들은 "평생 프랑스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돈이 안 되는 연구를 계속한 분이라 재산이 없다"고 발을 굴렀다.

청주성모병원의 이현로 원장신부는 "간병인 비용은 우리 병원에서 대고 있지만, 입원비와 치료비가 대책이 없다"며 "한평생 자기 재산을 털어 우리나라를 위한 일을 한 분이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뜻있는 지인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했다.

이런 말이 귀에 들어가면, 그는 크게 화를 냈다. 인터뷰를 여러 번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병'보다는 '국가의 일'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집필 중인 역사서 얘기가 나오면 병상에서도 신이 나서 몸을 들썩거렸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정치적 배경을 밝힌 책이에요. 당시의 일기·편지 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낸 것도,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한 것도 다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한 일이에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걸 연구해서 제대로 알리는 일이 얼마나 짜릿한지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그는 옛날 얘기, 학문 얘기를 하다 재미난 대목이 나오면 한국식으로 "어머!" 하는 대신 프랑스 여자처럼 "올랄라!" 했다.

27살에 한국을 떠난 박씨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로 "기운을 차리고 파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프랑스 음식을 먹는 것, 병인양요에 대한 책을 마치는 것"을 꼽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놓고 있는 박씨를 보고 '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la femme cachee derrie relelivrebleu)'라고 했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다.






[사람과 이야기] "박병선 기금·학술상 만들자"… 온정 쏟아져


[정정내용 있음]변희원 기자 nastyb82@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 100자평(0) 입력 : 2009.11.10 03:29 / 수정 : 2009.11.10 11:53





기업들·청주시 모금 운동 직장암 투병 박병선 박사 "빨리 일어나겠다" 강한 의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낸 재불(在佛) 학자 박병선(81) 박사가 사료 수집차 한국을 찾았다가 암으로 쓰러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각계에서 뜨거운 성원이 쏟아지고 있다.

박씨가 한평생 문화재 연구에 전념하느라 재산이 없어 지인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는 사연이 보도된 뒤, 기업과 일반인 사이에서 "박씨의 치료비를 마련하고 연구를 지원하자"는 움직임이 속속 가시화되고 있다.

웅진코웨이(사장 홍준기)는 회사 차원에서 '박병선 기금'을 마련해 박씨의 치료비를 대고, 앞으로 박씨의 연구를 잇는 데 기여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웅진코웨이 관계자는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내고 해석하는 데 평생을 바친 박씨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박병선 학술상'(가칭)을 제정해 후학들에게 수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삼성화재, 신한은행, 한독약품 등은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고 '문화재 지킴이'로 활동해온 8개 기업도 자체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박씨의 투병과 연구를 돕기 위해서다. '문화재 지킴이'는 문화재청 주선으로 기업 특정 문화재를 정해 각종 보호사업을 후원하게 하는 제도다. 문화재청 직원들도 협약 기업들과 발맞춰 자체적으로 모금에 들어갔다.


▲ 9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지인 이 선물한 규장각 관련 도서를 읽고 있다. 박씨는 암 투병 중에도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변희원 기자



청주시도 박씨를 돕기 위해 공식 모금 운동에 나섰다. 청주시는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된 흥덕사가 있는 곳으로, 2006년부터 매년 '청주직지축제'를 열고 있다. 청주시는 충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정계좌(농협 301-0034-9322-11)를 개설하고, 공무원과 민간인의 자발적인 성금을 받고 있다. 청주시는 지난 7월부터 위기 가정을 돕기 위해 매월 일정액을 적립해온 '천사(1004) 나눔운동' 기금에서도 치료비를 지원할 방침이다.

본지에도 학생, 가정주부, 회사원 등 일반인 50여명이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성금을 전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한 대기업 계열사 임원은 "지금까지 돈이나 명예에 급급해 살아왔는데, 옳다고 생각한 일에 한평생을 던진 박씨의 삶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박씨를 돕는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다른 사람과 사회에 관심을 갖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박민재(6)군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가 빨리 나아서 역사책을 많이 많이 쓰길 기도하고 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박씨가 입원 중인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는 지인들의 문병이 이어졌다. 해외 유력 언론에서 활동하는 원로 언론인 피터 현(72)씨는 "프랑스 음식이 먹고 싶다"는 박씨를 위해 치즈와 바게뜨 등을 가져왔다. 2003~2007년 주불(駐佛) 한국대사를 지낸 외교관 주철기(63)씨도 부인과 함께 박씨의 병실을 찾았다. 주씨는 한평생 연구실도 없이 집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외롭게 외규장각 도서 해석 작업을 해온 박씨를 위해 한국대사관의 사무실 한 칸을 내줬던 사람이다. 재불 화가 이성자(1918~2009) 화백의 아들 신용극(64) 유로통상 회장, 유인촌(58)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도 쾌유를 비는 꽃을 보냈다.

박씨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격려해 주실 줄 몰랐다"며 "빨리 일어나서 병인양요 연구를 마무리하고, 독립운동사 연구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박씨는 1967~1980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3000만 종 이상의 장서를 뒤져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문화재 반환 운동에 불씨를 댕겼다. 지난 9월 초 병인양요 관련 사료를 수집하기 위해 방한한 박씨는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직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 바로잡습니다
▲10일자 A11면 '"박병선 기금·학술상 만들자" 온정 쏟아져' 기사에서 '신용석(68) 유로통상 회장'을 '신용극(64) 유로통상 회장'으로 바로잡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유로통상 관계자들께 사과드립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을 찾은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81) 박사가 외롭게 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본지 3일자 보도) 박씨를 돕고 싶다는 네티즌들의 성원이 이어지고 있다.

1955년 프랑스로 유학간 박병선 박사는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67년부터 13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서고를 뒤져 소문으로만 돌던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한국 측에 그 존재를 알렸다. 이후 임시정부와 병인양요 관련 사료 수집을 계속해온 박 박사는 지난 9월 한국에 왔다가 심한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직장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아 성빈센트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

네티즌들은 박병선 박사의 쾌유를 빌면서 금전적으로 돕고 싶다는 의사도 밝히고 있다. 조모씨는 “박사님 치료비라도 보탤 수 있도록 계좌번호를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며 “정말 고귀한 인생이다. 부디 쾌차하십시오”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모씨는 “박 박사가 완치될 수 있도록 다 함께 정성을 모으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박 박사는 평생 독신으로 프랑스 정부의 연금으로 살아와 현재 입원비와 치료비도 부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관계자는 “암 선고 때에도 ‘내 연구를 정리하는데 1년이 더 필요하다’고 의연한 모습이었다‘”며 "뜻있는 지인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전했다.

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편지

2009.11.10 19:23 | 생생 역사 | 고은네

http://kr.blog.yahoo.com/han1592/985281 주소복사





정 선생님

저는 고 장준하 선생님의 삼남으로서 현재 미국 커네티컷에서 유학생들과 함께하는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는 장호준 목사입니다.

최근 박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금지 신청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첨부한 내용과 같은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졸필이나마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 선생님께 편지를 전합니다.

정 선생님의 귀한 글에 늘 감사를 드리며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올림





지난 토요일 낯모르는 이에게서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이메일을 열어보니 발신지는 미국이었구요,
보낸 이는 놀랍게도 장준하 선생의 3남 장호준씨였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 커네티켓에서 작은 교회의 목사로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장 목사는 “최근 박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금지 신청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첨부한 내용과 같은 서신을 작성했다“고 밝히고는
“졸필이나마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 선생님께 편지를 전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편지를 첨부해 보내왔습니다.


숙명의 두 사람' 장준하(왼쪽)와 박정희. 사진속의 장준하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 육군 중위 시절이며,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졸업 후 만주군 육군 소위 임관 직전의 모습임.


젊은 세대들에겐 다소 낯선 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준하(張俊河, 1918~1975) 선생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제말기인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땅에 체류 중이던 선생은,
김준엽 등 동지들과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수 천리 길을 걸어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물고 있던 중경으로 가 광복군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제하 전력과는 극적 대비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아시다시피 박 전 대통령은 문경서 교사로 있다가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 장교가 되었죠.

해방 후 귀국한 선생은 전쟁 와중인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해 정론을 펴나갔으며,
1967년 정계에 입문, 제7대 국회의원(신민당)으로 당선됐으나, 4년 뒤엔 탈당하였습니다.
그 무렵 선생은 박 정권에 대해 누구도 하기 어려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1974년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 정권을 통렬히 비판했고,
나아가 야권과 범민주 세력의 통합에 진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이루진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셨는데요,
저는 선생을 우리 현대사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기록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선생의 3남 장호준 목사가 제게 보내온 편지 제목이 예사롭지 않군요.
이는 1974년 장 선생이 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연상시킵니다.
편지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전문을 통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장 목사께서 이 편지를 보낼 당시는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이었으나,
그 다음날 법원이 박씨가 낸 '게재금지 가처분'에 대해 기각 결정이 내려졌음을 밝혀둡니다.
그래서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포함이 됐구요.
편지 가운데 '가처분' 관련 대목은 시점이 지나 무의미한 얘기가 돼버렸습니다만,
나머지 내용은 박씨가 새겨들을만한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 모습. 가운데가 박근혜씨이며, 오른쪽 끝이 박지만씨.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박지만씨,

지만씨의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님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낮에는 가게 점원으로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시절, 동창들의 입을 통해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만씨의 이름이 들려지면서 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그리도 잔인했던 1980년 5월을 훈련소에서 보내고 전방에서 사병생활을 하던 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는 지만씨의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고, 한동안 듣지 못했었던 지만씨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되었던 것은 싱가폴에서 마약중독자 상담원으로 일을 하던 당시 지만씨가 마약중독으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만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최근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박지만씨,

지만씨와 나는 너무도 다른 삶의 공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지만씨와는 스쳐 지나갈 기회조차도 없었고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서야 지만씨에게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같은 역사 속을 헤치며 살아야만 했었던 한 사람으로서 역사를 향해 다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고백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지만씨,

나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일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일본군이었고 내 아버지는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군이었다거나, 지만씨의 아버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고 내 아버지는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 바친 민족주의자였다는, 또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부정한 재산을 남겨 주었지만 내 아버지는 깨끗한 동전 한 닢 남겨준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는 역사가 스스로 평가하도록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있었던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혹자는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인류 역사는 사필귀정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 뿐 아니라 부정한 권력에 의해 조작되었던 인혁당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만씨가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또는 불리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역사를 지우고자 한다면 역사는 지만씨의 이와 같은 행동을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박지만씨,

내 아버님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시기 불과 수 개월 전에 지만씨의 아버지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갔습니다. 그 중에 ‘가장’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되겠는가’하는 걱정을 안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지만씨나 나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민족의 역사는 기록되어 남겨져야 하며 또한 전해져야하는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입니다. 역사가 평가하도록 남겨두어야 할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를 지우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다시 당부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수용소 소장으로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몬 게트(Amon Goeth)의 딸은 ‘내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위해 무언가는 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면서 생존자 중 한 사람을 만나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아버지의 과거를 듣고 용서를 빌게 됩니다.

박지만씨,

이제 우리는 살아서 오십대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삶속에서 또한 우리는 지나온 역사가 결코 우리의 손에 의해 바뀌어 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는 지만씨에게 내 아버님께서 평생 가슴에 품었었고 이제는 내 가슴속에 품겨져 있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전해 드립니다. 자식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취소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역사와 후손들 앞에서 지만씨의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 통일을 위해 지만씨의 삶이 쓰여 지기를 빌어봅니다.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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