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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6/19
 

[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
▲ 병마용 1호갱의 전경. 전체 면적 1만4260㎡ 중 1만㎡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 모종혁
1호갱 뒤에는 발굴되어 갓 복원작업을 끝낸 병마용이 늘어 서 있다. 병사들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 모종혁

 


 


 


 


일곱 명 농민들, 관개용 우물을 파다 진시황 병마용을 발견하다


 

1974년 3월 어느 날 아침 중국 내륙 산시(陝西)성 린퉁(臨潼)현의 한 작은 마을 시양(西楊)촌.


 

양페이옌(楊培彦), 양즈파(楊志發), 양취안이(楊全義) 등 일곱 명의 농민이 땅을 파 내려갔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가자 마을회의에서 관개용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남쪽 감나무 숲에서 한창 땅을 파내려 가던 중 곡괭이 끝에 사람 모양의 도용(陶俑)이 걸려 나왔다. 옛날부터 시양촌 곳곳에서는 파손된 토용 조각이 발견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사람의 몸통 모양을 완벽히 갖춘 토용(土俑)이었다. 몸통 옆에는 사람 얼굴과 똑같은 도용도 발견됐다.


 

오늘날 세계 제8대 기적으로 불리는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이 지하 속에서 세상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진시황릉과 달리 2200여 년 동안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보물의 출현이었다.


 

병마용의 발견은 중국 대륙을 흥분시켰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말기로, 홍위병의 광란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상태였다. 1971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발견되어 발굴작업이 막바지였던 마왕퇴(馬王堆)에 이은 쾌거였다.


 

중국정부는 곧바로 1년여의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끝에 막대한 유물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시공했다. 1호갱은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은 1만4260㎡에 달했다. 1호갱 주변에서는 2호갱부터 4호갱까지도 잇따라 발견됐다. 2호 갱과 3호 갱의 규모는 각각 6000㎡와 520㎡. 1호갱보다 작지만 군대 편제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병마용의 배치 구조는 중국 고대 군대 편제와 같은 좌·중·우 3군이었다.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에 해당한다. 3군을 보급·지원하는 4호갱도 있으나 완성되지 못한 채 비어있었다.


▲ 병마용박물관 표지석과 2호갱의 외경. 2호갱은 1호갱 바로 옆에 있다.
ⓒ 모종혁


 


▲ 오른쪽 1번 자리가 병마용이 처음 발견된 곳이다. 병마용은 농민들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 모종혁


 


 

강력한 제국 진,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하다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은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진의 군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재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 말기로, 일곱 제후국이 협력과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호전적이고 강대하여 나머지 여섯 나라들이 야만국이라 멸시하고 경계했다.


 

진이 부강한 이유는 강력한 법치주의와 관료제 덕분이었다. 주변국의 견제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탄탄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힘을 키워나갔던 진은 노련한 외교술과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했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이 만세(萬歲)토록 영원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진은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제국 진이 짧은 시간에 멸망한 것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형 토목사업과 화려한 궁전·왕릉 건설에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을 쥐어짰다.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거대하고 호화로운 아방궁, 세계 최대 규모 무덤인 진시황릉 등이 대표적이다.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을 짊어지고 고된 노역에 동원 당했다. 통일제국 아래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했던 민심과는 달리 진나라 조정은 수탈과 착취에 골몰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오늘날까지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대륙을 호령코자 했다. 사후에 잠들 자신의 능묘를 기원전 246년부터 208년까지, 무려 36년에 걸쳐 건설했다. 능원에는 죽은 진시황을 모시기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墓群), 평소에 타던 청동거마 등까지 묻혀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부속시설 중 하나로, 통일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였다.


▲ 뒤쪽에서 바라 본 1호갱의 앞면. 문과 벽이 있는 지하궁전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모종혁


 


 

▲ 아직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의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에 달한다. 지난 6월 24년 만에 3차 발굴이 재개됐다.
ⓒ 모종혁


 


 


 


1987년 병마용과 진시황릉, 중국 최초 세계문화유산 등재


 

오늘날 병마용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세계인이 가고 싶어하는 유적지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만리장성, 자금성, 막고굴(莫高窟)과 더불어 중국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대표 선수단의 운동복은 병마용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됐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미이라3: 황제의 무덤>에서는 미이라 대신 병마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명성과 달리 병마용의 발굴 작업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8년 5월 1호갱 전시관 완공을 앞두고 첫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중국은 문혁 기간 동안 대학이 문을 닫아 전문적인 발굴인력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몇몇 학자의 지도에 따라 60명의 고고학 연수생과 100여 명의 군인이 발굴에 동원됐다.


 

전시관 막바지 공사와 발굴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1호갱 현장은 항상 어수선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는 "1979년 건국 30주년에 병마용박물관을 개관해야 했기에 발굴과 유물 수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적으로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1985년에 이뤄진 2차 발굴까지 해서 1호갱은 기본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두 차례의 발굴로 1000여 점의 병사용, 6대의 전차용, 24대의 우마차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용을 출토됐다. 1호갱은 보병과 전차로 혼합 편성된 장방형 군진으로, 대략 6000여 점의 병사용과 40여 승의 전차용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


 

지난 6월에는 2차 발굴이 있은 지 24년 만에 1호갱에 대한 발굴이 재개됐다. 1, 2차 발굴 후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 이번 3차 작업에서는 우선 200㎡를 발굴하고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3차 발굴은 첫날부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앞뒤로 일렬이 된 4두마차 2대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 4두마차 외에 채식 병마용과 토기 파편, 칠기 목기도 출토됐다.


▲ 고대 군대 편제상 우군에 해당하는 2호갱.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발굴은 중단된 상태다.
ⓒ 모종혁


 


 

▲ 본래 병마용은 모두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2호갱에서는 채색이 완벽하게 보존된 병마용 6개가 발굴됐다.
ⓒ 모종혁


 


 


 


"현 중국 고고학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 "발굴 과정에서 도용 손상될 것"


 

성과가 있지만 1호갱의 재발굴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인 병마용을 왜 지금 다시 발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자오난펑(焦南峰) 전 산시성 고고학연구소 소장을 비롯한 시안 지역 학자들은 발굴을 적극 지지한다. 그들은 "오늘날 발굴 기술에 있어 중국 고고학의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현 기술로 출토되는 도용을 완벽히 보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에 대해 베이징(北京)대학 왕쉰(王迅), 자오화청(趙化城) 교수 등 주류 역사학계는 "지금 조급하게 발굴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며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용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고 반박한다.


 

3차 발굴을 전후해 중국 포털사이트 신랑(新浪)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네티즌 4100여 명 중 62.5%가 발굴과 보존에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기에 대규모 발굴은 피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31.1%만이 기술상 문제가 없기 때문에 1호갱을 모두 발굴해야 한다고 답했다.


 

실제 병마용은 발굴 및 수습, 복원, 전시 과정에서 적지 않게 훼손당했다. 병마용은 땅에 묻혀있을 당시 선명한 색채를 유지했지만, 발굴 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1호갱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장군용은 수습 과정에서 실수로 머리 부분이 부서졌다.


 

발굴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퇴색한 병마용을 복원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1개의 병마용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는 최소 한 달이 걸리고 퇴색한 색깔의 복원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병마용이 퇴색뿐만 아니라 세균에 의한 대규모의 부식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 해 200만 명 이상 병마용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 주범이다. 별다른 환기 대책 없이 1호갱을 개방하면서 갱 내부의 실내 공기가 전시 중인 병마용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우톄(周鐵) 병마용박물관 연구원은 "갱 내부에서 48종의 곰팡이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차오쥔지(曹軍驥) 중국 지구환경과학원 대기환경소장은 "병마용을 이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 병마용은 심각하게 부식해 탄광처럼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병마용은 얼굴 모습과 표정이 생생하다. 말은 지금이라도 당장 달릴 듯한 활력이 느껴진다.
ⓒ 모종혁


 


▲ 전장에서의 전투 전 긴 창을 끼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의 병사용.
ⓒ 모종혁


 


 

병사들 자세 단 한 개도 같지 않아, 얼굴 표정도 인간 심리 섬세히 묘사


 

병마용의 발굴이 사회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가치가 황금보다 높기 때문이다. 병마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구워 조합해 완성했다. 병사용은 키 175~195㎝의 늠름한 체격인데 실제 사람과 흡사하다.


 

놀라운 점은 병사들의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얼굴 표정도 각양각색으로 인간의 심리를 섬세히 묘사했다. 진시황을 호위하여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병마용은 곧 이집트 피라미드, 바빌론 공중정원 등 고대 7대 기적에 더해져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게 됐다.


 

이런 천문학적 가치와 중요성 때문에 중국정부도 병마용 발굴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발굴이 종료된 3호갱 외에 2호갱에 대해서는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한 뒤 본격적인 발굴은 미루고 있다. 일반 중국인들도 현 시점에서의 발굴보다 후세에게 그대로 물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병마용박물관 경내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포츠센터를 연상케 한다. 박물관 표지석 앞에 1호갱, 그 옆에는 2호갱, 오른쪽으로는 청동거마(靑銅車馬)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공개된 세 갱 중 가장 큰 1호갱 내부는 선봉, 주력, 후위, 익위 등 4부분의 군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갱의 가장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보병용이 서 있다. 모두 3열로 매 열마다 68점, 총 204점이 있다. 머리는 속발을 하고 다리에는 행전을 맸으며 손에 궁을 들어 용감하고 활을 잘 쏘는 선봉부대임을 알 수 있다.


 

경보병용 뒤는 11개 동·서 방향 통로가 갈라져 있는데, 38대의 전차와 보병이 서로 엇갈려서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갑옷을 입고 손에 긴 창, 칼, 활 등 병장기를 든 중보병이다. 전차와는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력으로 기세가 날카롭다.


 

1호갱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병사용이 1열로 서 있는데, 군진의 좌·우익에 해당한다. 적군의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 주 임무다. 갱 내 뒤에 서있는 병사용은 군진의 후위이다. 부대 진군시 적이 배후에서 기습하는 것을 방어하여 후방의 근심을 제거한다.


▲ 1~3호갱 중 유일하게 발굴이 모두 완료된 3호갱. 3호갱은 군대 지휘부에 해당한다.
ⓒ 모종혁


 


▲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거마. 진시황이 생전 타던 마차를 1/2로 축소하여 제작한 것이다.
ⓒ 모종혁


 


 

지휘부인 3호갱, 병사부대인 1, 2호갱 뒤에 위치


 

2호갱은 1호갱에서 동북쪽으로 약 20m 떨어져 있다. 길이 124m, 넓이 98m에 달한다. 기초 조사로 2호갱에는 전차에 메인 마용 350점, 기병용 마용 116점, 각종 병사용 900여 점 등 1400여 점의 병마용과 89대의 목제 전차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병·기병·전차가 혼합 편성한 군진인 셈이다.


 

2호갱은 4개의 작은 진을 'ㅁ'자형으로 배치했다. 첫째 진은 곡형진의 선봉으로 330여 점의 궁수(弓手)로 구성됐다. 중앙의 160점은 중장비한 갑옷을 입은 병사용으로 8열 종대로 자리 잡았다. 둘레는 170여 점의 경무장한 입사(立射)용이 진을 에워쌓다.


 

둘째 진은 곡형진 우측에 64대의 전차로 구성됐다. 전차마다 3명의 병사가 타고 있는데, 전차 앞뒤로 수행하는 보병이 없어 순수한 전차편대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곡형진 중앙으로 전차, 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진이다.


 

넷째 진은 곡형진 좌측에 위치한 기병대다. 108점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가 보조한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다. 한 손에는 활,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쥐어 날렵해 보인다.


 

2호갱 내에서 발굴된 병사용과 마용, 병기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지휘부인 3호갱은 1, 2호갱 뒤편에 있다. 병사용 66점, 전차를 끄는 마마 4필, 목제 전차 1대가 출토됐다. 병사용은 손에 의장용 병기인 동수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 채로 정렬하여 지휘관을 호위하는 모습이다. 3호갱이 '군막'(軍幕), 즉 사령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2호갱 앞에 있는 청동거마전시관에는 1978년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채색 동거마(銅車馬)와 병마용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거마는 모두 2대로, 진시황릉 서쪽의 한 부장갱에서 출토됐다. 발굴시 길이 7m, 넓이 2.3m의 대형 나무관 속에 놓여 있었다.


 

청동거마 크기는 진짜 말과 수레의 1/2에 해당한다. 두 대의 청동거마는 모두 네 필의 구리 말에 매여 있지만 모습과 구조는 다르다. 차형이 크고 장식이 화려하며 모방도 정교해 중국 내에 발굴된 청동거마 중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 흡사 산과 같이 거대한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지금까지 도굴되지 않은 채 역사의 비밀은 간직하고 있다.
ⓒ 모종혁


 


▲ 진시황이 전국시대 제후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과정을 담은 부조도.
ⓒ 모종혁


 


 

병마용에서 1.5㎞ 떨어진 진시황릉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도굴꾼의 로망이었다. 진시황릉 발굴은 37년 동안 무려 70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완공 당시 전체 부지는 50㎢, 봉분 높이는 120m에 달했다.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황제 능원이다.


 

진시황릉 지하궁전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금은보화와 부장품이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진시황릉의 보물을 노렸다. 하지만 지하궁전으로 이르는 길은 미로와 같고,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부비트랩이 있어 약탈을 피했다.


 

지하궁전은 진시황이 생전 살았던 아방궁을 모방해 지어졌다. 지하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 세계를 축소해서 만들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지하궁전이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묘사했다.


 

진시황의 바람과 달리 통일제국 진은 기원전 206년 멸망했다. 그러나 진은 '중국'(China)이라는 이름과 병마용, 진시황릉을 남겼다. 진시황이 남긴 성과는 오늘날까지 불로장생하고 있는 셈이다.


 

# 여행Tip


 

병마용박물관은 시안시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져 있다. 병마용에 가려면 시안 기차역에서 병마용과 진시황릉으로 가는 전용 관광버스 306번을 타면 된다. 버스비는 7위안(한화 약 1200원)이고, 30분마다 출발한다. 좌석은 넓고 냉방도 잘되어 승차감이 좋다. 시안역에서 병마용까지는 약 50분이 소요된다.


 

병마용의 개방시간은 여름철 8:30~17:30, 겨울철 08:30~17:00이다. 입장료는 90위안(약 1만5300원)이다. 최근에는 병마용을 찾는 한국인이 늘고 있어 한국어가 가능한 가이드가 경내에 있다. 가이드비는 90위안이다.


 

진시황릉은 병마용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 내리면 된다. 병마용의 개방시간은 매일 8:30~17:30이다. 입장료는 50위안(약 8500원)이다. 여기는 한국어 가이드가 따로 없다.





 

일본인도 모르는 ‘진짜’ 일본 고대사

2009.11.11 18:09 | 역사에 관한 글 | 고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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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년 부여족이 왜(倭) 정벌, 신도(神道)는 한국 무속신앙에서 유래

왜가 4세기 가야를 정벌했다? 일본의 지배자 혈통은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적 없이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배우는, 어이없을 정도로 왜곡된 고대사다.
4~7세기 고대 일본을 장악한 것이 한국계 혈통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직후, 존 카터 코벨이 한·중·일 고대 역사서 연구를 통해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미공개 논문을 최초로 소개한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갑옷으로 무장한 고구려 무사.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
일본인들의 9할은 제 나라의 진짜 역사를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일본 교육부는 국가적 자신감을 얻기 위해 고대 이래 현대까지 역사적 사실을 위조하고, 가미카제식의 맹목적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역사를 들춰보면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외국 역사가들에겐 잘 알려진 반면 일본인에게는 대부분 은폐되어왔다. 이 글은 왜곡된 일본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그간 연구해온 것이 바탕이 되었다.

근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지배자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교사는 한국 학생들에게도 이런 내용을 주입했다.

‘진무왕은 서기전 660년 신의 계보에서 나온 1대조이고 일본 열도 전체를 통일한 개국자’라고 이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화는 보편적인 것이 되고, 1930년대 군부는 이를 더욱 강조하면서 이를 믿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다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전세계 37개국에서 일본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 공모가 있었다. 필자도 젊은 시절 이에 응모해 ‘일본의 미(美), 시부미’라는 글로 상을 받았다. 이후 내가 일본의 미학이 사실은 한국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혈통이 한 줄로 이어져 왔다는 기록이 712년과 720년에 각각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두 역사서에 나와 있다. 두 책에는 ‘천황가문은 서기전 660년 건국한 1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온 혈통’이라고 씌어 있다. 이는 8세기 당대의 일왕을 합법화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역사 편찬 당시의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정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도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앞서 7세기에 역사서가 편찬됐으나 왕권 다툼의 전란 속에 불타버렸다.


망명 사관들이 날조한 ‘일본서기’

일본 천황은 백제에서 망명한 학자들에게 ‘일본서기’ 편찬을 맡겼다.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원한을 품은 이들은 새로 섬기는 일본 임금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손에서 만들어진 일본 역사서는 엄청난 모순과 날조로 가득 차게 됐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길게 역사를 늘리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도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그 전에는 오랜 가계를 노래처럼 외우던 가다리베(語部)들이 역사서 구실을 했다. 가다리베는 일본말로 가계를 외워 불렀다. 그에 비해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문으로 씌어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음을 따서 쓰고 어떤 것은 뜻을 차용해 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생 왕가의 역사를 오래된 것으로 탈바꿈시켜야 했고, 신라에 대한 증오에 불타면서 일본어로 들은 것을 한자로 옮겨야 했던 역사학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린다면, ‘일본서기’에 수없이 나타나는 모순이나 오류는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중 대표적인 실수는 없애야 할 사실 하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는 것이다. 즉 일본 최초의 왕조는 4세기경 일본에 온 일부 학자들이 ‘기마족’이라고 일컫는 부족으로, 바다 건너 북쪽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 휩쓴 부여족으로 3세기에 북쪽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닌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倭)를 점령하러 온 것이 369년 무렵. 이들은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일본땅 남서부에 많은 한국인이 수백년 동안 정착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부여족은 야심만만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최초의 실제 왕조를 건국하고 척박한 그곳에 중앙집권화된 정부체제와 기마병술을 전수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임무는 이런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천황네 조상들이 만든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였으므로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서기전 660년의 일본은 구석기 혹은 신석기시대였으며 금속문명은 그때까지 도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최초의 거주민은 아니다. 10만년 전 일본땅에도 인간이 거주해 돌도끼, 돌칼 같은 물건을 남겼다고 한다.


조몬(繩文)인과 야요이인 유적


① ‘일본서기’ 영문판 표지 그림. 동굴 밖으로 나오는 천조대신이 한국 무당의 차림을 하고 있다.
② 가야 말머리 갑옷.
그들이 누구인지, 원시도구를 만들어 쓴 호모 사피엔스가 그대로 멸족했는지, 아니면 그 다음 신석기시대 조몬(繩文)인과 연결됐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구석기시대 인류와 일본의 신석기 조몬시대 인류는 모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해 한반도와 알래스카까지 뻗어나간 북방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조몬 토기는 서기전 1만년에서 서기전 3000년대와 그보다 조금 늦게까지 분포한다.

일본 홋카이도 섬 최북단에 일부 남아 있는 아이누족은 오랫동안 조몬인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일본 정부가 종족외혼을 장려한 결과 순수 아이누는 지금 100여 명밖에 없지만 이들은 현재 일본인들보다 몸에 털이 많고 얇은 입술과 잘 발달된 턱을 지녔으며 몽골형 눈꺼풀이 없다. 백인인 코카서스 인종이 분명한 이들의 먼 조상은 아시아 북서부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조몬인은 수천년 동안 사냥으로 먹고 산 종족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서기전 3세기경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으로 오가는 관문인 규슈 북부에서부터 나타났다. 논농사법과 금속지식을 지닌 완전히 다른 혈통의 야요이(彌生)종족이 나타나 조몬인을 밀어내고 규슈에 정착했다. 이들의 신기술은 일본땅 절반을 넘어 동부까지 퍼져갔다. 규슈에서 발굴된 야요이인의 두개골은 한반도 남부 사람의 것과 유사하다.


야요이인은 조몬인과도 결혼해 논농사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농토를 빼앗기 위해 원주민을 토벌하기도 했다. 몇몇 고분에서는 조몬과 야요이 유물이 섞여 나오기도 하는데, 이때 토기의 생산이라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서기 57년 씌어진 중국역사서는 이 당시 왜에 100여 개가 넘는 부족집단이 청동기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보다 700년 전 신인(神人) 진무천황이 나타나 통일국가를 건국했다”는 주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온 야요이인은 대부분 농부였다. 한국인들이 엄청난 학식과 신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온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고분시대 이후의 일이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집단 정착지를 이루고 군림했으며 조몬인은 피지배계층이 됐다.

위의 상황으로 미뤄보건대, 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일본약사(日本略史)’에서 “일본에 논농사와 금속문화가 들어온 것이 서기전 9세기”라고 한 것은 실제보다 500여 년이나 앞당겨 쓴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또 “야마토 정부는 서기전 5세기경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여전히 구석기 조몬시대라 철로 된 창칼도 없었고 논농사도 짓지 않았고 대단위 정부조직도 없었다. 고고학은 일본 외무성의 이런 역사기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고고학은 구석기 인간인 조몬과 아이누족이 정벌당했거나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과 섞여버렸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에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은 일본 열도 여러 군데에서 한국문화를 발달시켰는데 그중 세 군데가 발달의 본산이 됐다. 규슈지방, 북쪽 해안의 이즈모 지방, 그리고 야마토로 알려진 오사카 나라평원이 그곳이다.

3세기에 중국 한나라가 망하자 난징과 산둥 부근에서 ‘진인(秦人)’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을 거쳐야만 일본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한국땅에서 몇 대를 살다가 한국인이 됐다.

‘일본서기’ 이전 후한의 공식 사서인 ‘한서(漢書)’나 ‘위지(魏志)’ 등 3세기 의 중국책에 따르면 왜에서 부족간 권력투쟁에 의한 내전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왜구’ ‘난쟁이 족속’이라 일컫고 있었다. 몇 구절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왜인들은 새해도 모르고 사계절도 모른다. 그저 봄에 밭을 갈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으로 한 해를 가늠한다. 한 족장이 다른 부족장들보다 강력해 보인다. 규슈에 그 족장의 부(副)족장이 있다. 여자들은 몸에 분홍과 붉은 물감을 칠하고 맨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길은 날짐승의 통로나 다름없고 좋은 논이 없다.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아 나무그릇에 담아서 맨손으로 집어먹는다. 독한 술을 많이 마신다.’



적어도 중국인 기록자의 판단에 따르면 3세기 후반 일본문명은 거의 원시시대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상류층은 조그만 봉분형 무덤을 만들고 청동거울이나 동검, 동탁을 부장했다. 청동방울을 쓰는 한국인의 도래로 청동과 더불어 철기를 사용하며 지석(支石)을 세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처럼 연달아 일본땅에 들어온 이주자는 뒤떨어진 왜국에 와서 쉽사리 지배층이 되어 더 낳은 삶을 구가하려는 한국인들이었다. 이 시대에는 민족주의란 개념도 없고 한국과 왜국에 대한 충성심이 대립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는 주요 수송통로이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한반도의 같은 지역에서 떠나온 한국인들은 왜국에 와서도 같은 지역에 모여 살았다.


첫 번째 신라인 개척자, 스사노오노

신라인은 그중에서도 활동적인 이주집단이었다. 북쪽 해안의 이즈모(현재 시마네현 마쓰에)가 그들의 주된 거주지였다. 오늘날에도 이즈모에는 신도(神道)에 나오는 천조대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오빠로 알려진 맹렬한 남성 스사노오노 미코도(素?鳴尊 또는 須佐之男)를 받드는 신사가 있다.

스사노오노는 실존인물로 신라에서 온 첫 번째 개척자인 듯하다. 그의 아들은 신라에서 옷감을 취급하는 상인이라는 암시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이즈모 신사는 천조대신을 받드는 이세 신사보다 오래된 곳이며 한때는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었다. 지금도 ‘이즈모 신사에서 결혼하면 복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성스러운 백마 모형을 안치한 마구간 건물도 있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신라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을 이끈 스사노오노 같은 무속적인 지도자는, 그보다 늦은 시기 경주 천마총을 만든 사람들과 같은 일파임을 알 수 있다. 스사노오노를 상징하는 신칼은 그가 머리를 베어 죽인 용의 꼬리에서 뽑아낸 것이라 한다. 이 칼은 ‘오로시노 가라스키’, 다시 말해 ‘한국의 용검(龍劍)’이라고 불린다. 이 칼은 일본 왕권을 상징하는 삼종신기(三種神器)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한반도에 삼국이 있던 것처럼 일본에도 세 곳의 새로운 한인 정착지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이즈모에, 고구려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은 규슈 북쪽에 자리잡았다. 부산-가야-백제 지역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동쪽 깊숙이 야마토 또는 나라라고 불리는 땅으로 모였다.

기운 찬 한국인들이 일본땅으로 건너가면서 시베리아 지방에 성행한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무속신앙도 옮겨갔다. 따라서 이들은 신의 경지에 들어가 영혼세계와 소통하면서 무리를 재난에서 막아줄 사람을 지도자로 받들었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이 당시 모든 한국인은 무속신앙을 갖고 있었고, 일본의 무속은 한국에서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세계 여러 나라가 샤머니즘 형태의 신앙을 받들었다.


이즈모·규슈·야마토가 한인 정착지

북방 전역에서 태양은 소중한 존재였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태양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다. 뱃사람의 삶에 중요한 바람도 숭상되긴 마찬가지였다. 또한 지방마다 특수한 신을 모셨다.

논농사에는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대가족이 필요하다. 풍년을 기원하는 온갖 행사가 치러졌다. 다산과 풍년은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어 오늘날에도 신도 신앙에는 풍년과 다산의 성적 상징이 가득하다.

애초에 존재하던 수천 개의 조그만 마을은 야요이 시대에 와서 점차 통합되고, 가미신도 넓은 지역을 부여받으면서 줄어들었다. 지도자가 나타나 지배영역을 확보하면서 조상신 가미도 더욱 숭상됐다. 이에 따라 지도자인 왕의 조상신은 훨씬 우월한 것이 됐다.

일찍이 신라에서 건너와 이즈모에 모여 사는 집단과 그보다 늦게 건너와 천조대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수호신으로 받드는 집단 사이에는 모호하게나마 권력분배가 이뤄진 듯하다. 당시 중국의 기록에는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3세기 말 실제로 일본의 일부 지방을 다스린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대 일본사에는 이런 여걸이 많이 등장한다.

일본 천황 혈통이 천조대신과 태풍의 남신(男神) 스사노오노 미코도의 결합으로 비롯됐다는 설정은 그때 일종의 타협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신이 아마데라스 여신의 목걸이인 곡옥 500개를 씹어먹은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즈모의 신라인 집단은 시간적으로 먼저 일본에 건너왔다. 그런데 뒤늦게 김해에서 떠나온 부여 기마족 또는 가야 백제인 집단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규슈에서 오사카 나라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한국인인 두 집단은 평화협정을 맺어 이즈모 그룹이 해의 여신에게 첫째 자리를 내주며 항복했다(이것이 일본역사에서 말하는 ‘국양(國讓)’이다). 이리하여 천조대신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대로 초대 일왕의 거룩한 조상이 됐다.




이즈모에 모인 집단은 아마도 뱃사람과 어부들이었기에 바람신을 숭상하다가 논밭을 지닌 아마데라스 여신 그룹에게 제압당했을 것이다. 이즈모 주변 땅은 벼농사에 적당하지 않았다.

같은 한국인인 두 개척자 집단은 결국 경쟁보다는 타협 쪽으로 뜻을 모았는데, 그 방법은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아마데라스의 자손인 1~3대 천황은 모두 스사노오노 쪽의 여자들과 결혼한 것이다. 스사노오노, 즉 이즈모 바람신의 후손인 이 여자들은 조상으로부터 신통력과 점성술을 이어받은 무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초기 천황들의 이름과 가계를 살펴보면 이즈모에 정착한 신라인의 자취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역사를 암기하던 7~8세기 직업 사관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가야를 정복했다고?

4세기 후반 왜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변화는 아주 급격한 것이었다. 3세기의 중국사서에는 ‘일본에 말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말의 존재가 입증된 것이다. 이 말들은 배에 실려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고구려 이웃 북방지역의 부여족이 길들여 사용하던 작달막한 몽고말인데, 부여족이 한반도 서부지역(백제로 알려진 곳)을 점령하고 부산 근처 가야지역으로 퍼지던 때에도 부여족이 대동하고 다녔다. 한국 고대사에 ‘동부여가 바다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사는 이를 회피한다.

백제지역을 정복한 부여족은 그대로 남아 살기도 하고 일부는 나아가 가야족을 정벌, 그곳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진 뒤 더 용감한 일부는 369년 바다 건너 일본땅으로 갔다. 대담하게도 말이 동승할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간 이들은 4세기의 가장 큰 선단부대였으며 작전은 성공했다.

일본의 어용 사학자들은 물론 이를 ‘부여족의 일본 정벌’로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진무 및 여러 왕대의 기록에는 이 사실이 수없이 반영돼 있다.

8세기 당대 지배자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역사 쓰기에서 사실은 왜곡되고 180도 뒤집어져 ‘일본이 가야(미마나)를 정벌했다’고 기록됐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가야가 일본을 정벌한 것인데 말이다!

서기전 18년 백제 건국에서 6갑자, 즉 360년 이후를 보면 당시 부여 기마족의 이런 움직임과 대략 부합한다. 중국 한나라 멸망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서 역사 개편의 소요가 지속되던 때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진나라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부여족은 남하하면서 멸망한 낙랑족과 합류하며 세를 불렸을지 모른다.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바 ‘역사’에 따를 것 같으면 중애천황은 362년 죽었다. 그의 통치 이후 신공왕후(오키나지 다라시 공주)의 섭정이 이어졌다. 신공은 한국에서 출생한 왕녀다. 신공과 그녀의 아들 오진왕(호무다 와게 또는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 왕자로도 불린다)의 출연은 일본의 역사서에서 그 연대가 정확히 두 갑자인 120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왜곡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다. 그들에 따르면 신공이 가야(미마나)를 정복하고 이곳을 ‘일본(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369년에 가야에 기반을 둔 부여족이 바다 건너 규슈로 건너가 왜를 정벌했다.

부여족 선단의 항해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사실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역사서는 ‘신공왕후가 대구까지 올라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했으며 신라왕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는 모두 날조다. 왜는 한반도에 침입해 대구까지 올라갔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남하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일이 없다.


진무천황 = 이와레 왕자 = 오진천황

8세기 일본 사가들은 ‘구다라기(백제기)’를 참고했을 것이다. 부여족은 대구를 정복하고 계속 남하했다. 그들은 만주의 본거지를 떠난 이래 계속 몽고말을 타고 이동했다. 부여는 남쪽에 퍼져 있던 마한 원주민을 제압하고 백제 지역에서 전리품을 얻어낸 뒤 낙동강 유역의 근거지나 부산으로 떠났다.

이러한 부여족의 정복활동 전체가 일본사서에는 ‘이와레 왕자의 야마토 동정(東征)’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레 왕자는 후일 진무(神武)천황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이와레의 ‘이와’는 지금도 바위(岩)를 뜻하며 ‘레(余, 餘)’는 족속이란 의미의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무천황이란 이름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인 800년경에 와서야 처음 등장한다. 이와레, 즉 부여 바위왕자가 지나간 길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규슈에서 출발해 일본 내해를 따라 동쪽으로 400km 넘게 떨어진 나라의 야마토 평원으로 항해한 것이다. 지름길인 시고쿠섬의 남쪽 태평양 바다로 들어올 수 있지만 당시 배의 성능상 내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이와레 왕자의 동정 속도는 느렸다. 곳곳에서 원주민의 저항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와레 왕자의 동정은 4년, ‘고사기’에 따르면 16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의 부대는 오사카와 요도강에 상륙했지만 여기서 오랜 원주민(아마 야요이족일 것이다)의 저항을 받아 패했다.

이에 그들이 받드는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진군해온 것을 노여워해 패했다고 생각하고 이즈(紀伊)반도로 배를 돌려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부터 상륙했다. 후쿠오카현 동굴 고분벽화에 아마도 진무와 야다노 가라스(八咫烏)의 전설을 묘사한,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진무의 배를 인도하는 그림이 있다. 이때 이와레 왕자의 두 형제가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시련이 많아지만 마침내 그릇에 제물을 담아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와레 왕자도 토기를 직접 빚었다. 또다시 치른 전투가 패색이 짙어졌을 때 금빛 깃털이 달린 연(매를 말한다)이 이와레 왕자의 활에 내려앉아 적들을 눈부시게 만든 덕분에 이겼다. 오늘날 일본군부의 최고 휘장은 금빛 연 훈장이다.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磐餘(余)彦) 왕자, 즉 진무천황은 오진천황을 말한다.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오진천황의 활동을 진무라는 가상 인물에 갖다붙여 기록한 것이다.

이와레 왕자(오진천황)는 우네비산에 안장됐다. 지금도 매년 4월 초사흗날 왕실의 제관이 나와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제관들은 그 제사가 현재의 일본 천황가문이 큰 덕을 입은 외국인 정복자에게 올리는 것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첫 역사책에 그의 동정(東征)에 관한 기록은 대단히 세밀하게 기록된 반면,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아들 닌도쿠(仁德)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돼 있다. 닌도쿠왕은 가장 큰 능묘를 축조했다. 이 능묘는 경주고분의 것보다 크다. 일본에는 규모가 다른 2000여 기의 고분이 있는데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 북부의 후기 야요이 시대 무덤은 자그마하다. 그러나 5세기가 되면서 고분은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이 대형 고분틀이 모두 오사카 나라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닌도쿠 왕릉 발굴이 금지된 이유

또한 이들 고분에는 수많은 부장품이 매장돼 있다. 3세기 중국의 책 ‘위지’는 “왜에는 말이 없다”고 했으나 대형 고분에는 한국식 마구와 무기류가 부장돼 있었다. 부여족이 전투에 쓰던 말과 마구, 당시의 최신무기인 철제무기들로 보인다.

옛 천황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군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발굴이 금지된 상태다. 그런데 1872년 폭풍으로 닌도쿠 왕릉이 무너져 이를 복원할 때 내부를 본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쿠(須田龍作) 일본사 교수는 부장된 유물이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이었다”고 했다. 일본 당국이 부여 기마족의 야마토 정벌을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닌도쿠 왕릉을 발굴해야 한다.

부여족 혈통의 두 번째 왕이 되는 닌도쿠 천황(‘일본서기’에는 16대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은 능의 규모로 보아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듯하다. 그의 통치형식은 봉건제이지만 장관이나 봉건영주와 같은 4개의 우지(氏)가 있어 왕명은 모두 그들을 통해 전달됐다. 4명의 우지 중 3인은 부여 기마족 건국자 오진왕을 보좌하는 무장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옛 야요이족 출신으로 무속의례를 주관하는 모노노베(物部) 가문이었다.

후일 모노노베 가문은 임금이 되는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무속과 대치될 불교가 왜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카도미 가문도 오래전 왜에 자리잡은 집안으로 여러 신에게 종교의례를 집전하며 사슴뿔을 갖고 점술을 행하였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일본 전역에서는 무속을 믿었지만 군사권력이나 종교권력은 모두 세습되고 있어서 혈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역사가들이 당대 주요 가문의 역사를 모두 신의 시대라는 고대와 연관시키고 조상을 모두 신으로 설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삼종신기가 가리키는 것은 한국

일본 왕권의 상징으로, 이를 소유한 사람이 왕이 된다는 삼종신기(三種神器)는 4세기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러한 전통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에 따른 것이다.

그중 하나인 동경(銅鏡)은 처음엔 중국에서 제작됐는데 이것은 신통력을 지닌 것이라 하여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채 사후세계를 위해 부장되었다. 동경의 번쩍이는 기능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일반화한 태양숭배와 통했다. 6세기 초 신라금관에 달려 있는 조그맣고 둥근 금판도 태양을 뜻한다.

삼종신기의 둘째 물건인 칼은 왕권의 상징으로 일찍이 신라에서 이즈모로 이주한 한국인의 권세를 말해준다. 이 특별한 칼은 맹렬남 바람신 스사노오노가 머리 8개 달린 용을 쳐부수고 얻어냈다.

① 왕권의 상징, 곡옥이 장식된 신라 미추왕릉 출토 금제장식.
②5세기경 일본의 하니와 토용 무사(프랑스 기메 박물관 소장).
셋째 신기는 곡옥 또는 곡옥목걸이다. 곡옥은 일본에서 나지 않고 한반도 북부에서 나는 연옥이나 경옥을 깎아 만들었다. 고대에는 다른 신기보다 이 곡옥(일본에서 마가타마라고 부른다)이 진정한 왕권의 상징이었다. 경주 고분에는 이런 곡옥이 수십 개씩 장식된 금관이 많이 부장됐다.

곡옥은 태아나 올챙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물고기는 아시아 전체에서 부의 상징이다. 그 위에 한국 무속에서 호랑이는 산신의 전령으로 중요한 존재이며 벽사(?邪·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침)용으로 지니는 호랑이 발톱은 곡옥과 생김새가 같다. 그러나 곡옥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그중에는 곰의 발톱도 있다. 단군은 웅녀(곰 토템 부족의 여인)의 아들이며 아이누족은 곰을 신으로 받든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은 지금도 곰 축제를 연다. 곡옥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발굴된다. 이 물건의 이동경로는 북에서 남으로 향한 것이지 절대 그 반대방향으로 역류해온 것이 아니다.

‘고사기’, 특히 ‘일본서기’에선 왕가의 분열상을 감추려는 끊임없는 조작이 행해졌지만, 14대 중애대(代)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 중애 이전 13명의 왕들은 모두 야마토에 거주했다는데, 중애왕만은 규슈에서 살았던 것이다. 중애왕은 10척 장신이라는 식의 특징적인 묘사가 많다. 그는 마지막 야요이 종족인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중애왕비 신공왕후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의 왕녀 신공왕후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은 신라에서 온 것이 분명한 한국 왕자 아마노 히코코의 딸이지만 가야에서 왔을 확률이 더 높다. 중애왕은 신공과 결혼했다. 그는 이미 두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새롭게 왕비가 된 신공은 매우 명석하고 영리했으며 얼굴은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워 아버지가 그를 매우 특별히 여겼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신공은 야심이 대단하고 수완도 비범한 한국 왕녀였던 듯하다. 그녀가 한국을 원정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정반대의 것일 수 있다. 그녀의 전설적인 행적은 369년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외국인 왕족 신공의 개인적 거사(擧事)인 이 원정이 일본사에는 이와레 왕자의 무공에 가려 기록되지 않았다. 일본사가들은 부여족의 일본 원정 중 일부를 따서 이 두 인물의 전설적인 무공으로 돌려놓은 듯하다.

한반도가 이들에게 점령당해 왜땅으로 편입되고 신라왕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남녀가 신무기를 들고 바다를 건너와 왜를 정복한 것이다. 또다시 ‘바위’가 저변에 드러난다. 신공은 중애왕의 아이인 태아(이와레 왕자, 즉 오진왕을 말한다)를 한국이 아닌 왜땅에서 낳으려고 자궁에 돌을 끼워 막아 출산을 지연시켰다. 부여족의 일본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왜땅에서 태어난 자주적 왕가라는 해석이 가능하게끔 한바탕 작전이 연출된 것이다. 이로부터 350년 뒤 일본사를 처음 편찬할 때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덮어버리기 위해 역사기록의 전후좌우를 뒤바꾼 것이다.


신성시되나 실권 없는 日王

5세기는 신라와 야마토 두 나라 모두 무당이자 제관인 지배자의 힘이 정점에 달했다. 527년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무속의 색채는 많이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계속 무속이 힘을 발휘했다. 이 원시 민중종교, 신도는 9세기에 불교와 대치되는 종교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신도는 점차 일왕 숭배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 반면, 한국 무속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처음에는 불교가, 나중에는 유교가 작용했지만 그것은 신비한 주술적 힘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군사권이 무속과 결부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또는 ‘신성한 천황’을 위해 싸우는 일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정책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고다이고(後醍歸) 천황조와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에 이러한 풍조는 극에 달했다.

일본 역사 초기의 무속신앙은 한국에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인 산신(山神)은 일본 무속신앙에 전적으로 흡수됐다. 즉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손자 니니기는 규슈에 하강하여 산신의 딸을 만나 사랑하면서 그녀가 그날 밤 잉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단군설화와도 비슷하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최태영이 쓴 ‘인간 단군을 찾아서’의 가야 지명연구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산신으로 소개된 고황산령신(高皇産靈尊)이 고령가야의 한국인이었다는 연구가 가야지명 연구자인 다카모도(高本政俊)와 최태영의 연구로 나와 있다).




성군이 나오면 받들지만 패륜 군주가 나오면 제거한다는 것이 중국의 천명 개념이다. 중국에서는 천명을 내세워 왕조를 바꾸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코 일본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그 대신 권력가문이 내세운 총리나 장군이 권력을 행사했으며 천황은 신성시되긴 했지만 실권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한적(漢籍)을 옆에 두고 이를 표절한 것이 분명하다. 한 예가 닌도쿠 천황은 거대한 묘 규모로 보아 일단의 강제노역을 동원한 왕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민가에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여 3년간 세금을 면제해준 매우 인자한 군주로 기술했다. 중국 사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닌도쿠왕대(代)에 부여 기마족이 들여온 오락거리, 매사냥이 유행했다.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쓰기도 했다. 경주 석빙고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를 통해 비단과 무명을 비롯해 금, 은, 철, 한문책 등이 들어오고 교역량이 늘었다. 이때도 불교는 유입되지 않았다.


흔들리는 부여왕통

8세기 역사기술의 방편 중 하나는 유명 가문 우지(氏)의 조상을 일본 건국자 이와레 왕자의 원정에 동참한 신(神)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대표 우지는 가문 전체에 군림했다. 왕의 명령은 대표 우지나 장관을 통해 하부로 전달되고 농민과 장인이 여러 우지에 종속되어 노역을 하면서 살았다.

우지는 외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진나라에서 비단옷 재봉, 직조 같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온 장인들이 형성한 것으로, 외래 예술과 기술을 망라한 이런 전문 우지가 700여 개나 됐다. 노예도 있었다. 남부 규슈가 전쟁에 패하며 생겨난 구마소족 같은 전쟁포로나 동부 혼슈에 굴종한 에미시족이 그러했다.

우지들의 존재로 왕권은 일정 부분 제한됐지만 천황이 군부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면서 누가 천황이 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황은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나 짓고 꽃밭이나 산책하고 제사나 지내고 빈둥거리면 그만이었다. 대신 국가의 정무는 민간 출신의 권력자가 집행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거나 천황가와 혼사를 맺는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한국 출신 가문이 번성하여 부여 지배계급과 혼사를 맺었다. 이 가문에서는 몇 대에 걸쳐 딸을 왕위 상속할 만한 자들에게 비로 들여보내고는 뒤에서 조종 하여 사위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후일 후지와라(藤原) 가문 같은 총리대신급 집안에서도 딸과 손녀를 줄줄이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일본의 왕권을 자기 뜻대로 조종했다.

5세기를 통틀어 왜국의 왕위는 부여 기마족의 후손이 차지했다. 닌도쿠왕의 비 바위 공주, 즉 이와노히메(磐之媛)는 가야 출신 가쓰라기 우지의 선조인 가쓰라기노 소츠의 딸이었고 그의 손녀딸 하에는 부여왕족 혈통의 두 임금 겐조(顯宗)와 닌켄(仁賢)의 어머니다. 겐조 왕대에는 경주 포석정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잔치를 벌인 것처럼 그도 닷새씩이나 연회를 계속하며 곡수연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 부여왕통은 차츰 유약해지고 혈통과 파벌 간에 왕권 다툼이 생겼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26대 왕인 게이타이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변방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527년 북규슈에서 일어난 이와이(岩井)의 난은 왕권교체에 반발하는 부여 기마족 후손들의 저항으로 보인다. 이즈음에 백제가 가야땅을 조금씩 먹어들어가고 있었으므로 부여 기마족의 한반도 내 지지기반도 전과 같지 않았다. 얼마 뒤 532년에는 신라가 가야의 북부를, 이어서 562년 남부 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끝났다.

6세기 말에는 불교 도입을 놓고 가야출신 신진세력과 화족 사이에 큰 대립이 생겼다.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에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소가(蘇我)와 오래된 무속을 그대로 받들자는 모노노베 두 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여기에선 친불교파가 승리했다. 이후 50여 년간 한국인 후손 소가 가문이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어 딸들을 계속 왕비로 만들었던 만큼 일본 왕의 혈통에는 한국인 소가파의 피가 많이 스며들어 있다.


비단 직조술 전파한 하타 가문

점차 한국의 상류층이 전문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한 예로 300년경 백제에서는 가께쯔(眞毛津)라는 이름의 옷 만드는 여성을 보냈다. 그 후손들은 기누누이(衣縫· 비단 직조 공인)로 자리잡았다.

덧붙여 기록에는 265년 중국 진시황(또는 사마염)의 방계손 하나가 일본에 왔다고 한다. 그 궁월군이 처음에는 한국에 정착하여 120가구를 거느리고 살았다. 시국이 복잡해지자 그는 후손을 모두 거느리고 왜로 이주했다(‘일본서기’에는 처음 백제인 궁월군으로 기록됐다가 9세기에 나온 책 신찬성씨록에는 ‘진시황제 3세손 효무왕’으로 그 표현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뛰어난 비단 직조기술을 가지고 온 하타 우지는 부여 기마족의 통치 아래 번성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를 하사받았다. 175년이 지난 후 하타 가문은 1만8670명으로 불어났다. 한국말을 하면서 살던 하타 사람들은 별도의 지역에 모여 살았으며 불교가 들어왔을 때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600년경 이 집안의 우두머리는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라는 사람이었다. 왜국과 한국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던 성덕태자가 죽었을 때 하타 가와가쓰는 이를 진정으로 슬퍼한 주요 인물이다. 그리고 100년쯤 지나 하타의 후손은 이번에는 간무(桓武) 천황의 통치를 도왔다. 그는 하타 집안 소유의 땅 중에서 지금 교토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대지를 간무 천황에게 내주어 795년 여기에 새 수도 교토를 건설하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교토는 비단 직조로 유명하다. 하타 우지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히데요시는 직조인들을 교토의 서북쪽 니시진(西陣)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의 혈통은 근본적으로 일본계가 아니지만 지금 그 일을 들춰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여 기마족 시절 일본과 중국 사이의 광활한 바다를 건너는 직항로를 개척하기는 불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소통은 한정적이었고 그나마 한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부여 기마족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해상수송업도 성장했다. 이를 입증하는 사실 하나는 가라노(枯野)라는 배가 26년이 되어 더 쓸 수 없게 되자 태워버리면서 소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배에 불이 났을 때 신라 사신들이 신라에서 배 만드는 장인을 불러다 수리해주었다. 이것이 저명부(猪名部)의 시초다.

또한 가라노베에서 나온 나뭇조각으로 고토라는 악기를 만들었다. 고토의 원조격인 가야금은 1세기에 가야에서 처음 만들어 썼으며 신공왕후가 일본에 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오진왕이 가라노베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기마족이 온 뒤로 일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일본의 관념론자들은 부여족의 원정에서 힌트를 얻어 이를 진무천황의 동정(東征)으로, 신공왕후 이야기로 꾸미고 이즈모 사람들이 진무에게 항복했다는 기이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8세기의 일본 사관들은 부여족의 정복을 은폐하고 만세일계의 일왕가를 만들어 정복 사실을 반대로 뒤집고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잠자던 씨가 후일 ‘현인신 천황’을 핵심으로 한 군국주의로 발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일파가 일본을 세계강국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그들은 불교나 기독교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종교임을 알았다. 고대 신도 신앙은 초군국적, 초애국적 이념을 고취하는 데 이용하기 꼭 좋은 비조직적 신앙이었다.


한국인의 도움으로 탄생한 불상

한국에서는 불교 유입 이후, 왕이 신과 소통하는 제관을 겸하던 무속적 개념이 좀더 현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불교로 완전한 몰입이 이루어졌다. 맹렬한 불심을 가진 쇼무(聖務)왕은 딸(효겸(孝謙) 천황)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출가해 중이 되었다. 일본 불교는 도경(道鏡) 선사(효겸의 사랑을 받아 권력을 전횡한 승려)처럼 파행적인 경우도 있지만 기적과 천황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안보를 주도한 무속 가문 나가토미(中臣)와 모노노베 우지에 의해 보존돼 왔다.

한국에서 불교가 들어오고 200년이 채 안 되어 불교는 이 섬나라를 완전 점령했다. 불심이 깊은 쇼무는 지방마다 절을 짓고 7층탑을 세웠다. 더 나아가 온 나라의 자원을 긁어모아 구리 100만근을 녹여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불상 제조가 여섯 번이나 실패로 돌아가자, 나중에는 그 일을 한국인 후손인 불교예술가에게 일임했다. 마침내 한국인의 손에 의해 불상이 만들어졌고, 그는 궁중의 4급관인 벼슬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일본은 한국인의 도움 없이는 잘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끝)


동아 닷컴에서

DJ , 오마이뉴스 출간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추천사 통해 못한 추도사 쏟아내

2009.07.09 04:26 | 역사에 관한 글 | 고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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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말라
당신은 저승, 나는 이승에서 국민 지키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때 하지 못한 추도사를 신간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를 통해 뒤늦게 국민들에게 공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마음 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하려다 못한 추도사를 꺼내놨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동교동 자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동저자로 등장하는 신간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대한 추천사를 구술하는 형식으로 영결식 때 하지 못한 추도사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직후 "내 몸의 반쪽이 무너져 내린 것 같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 않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며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애초 지난 5월 29일 영결식장에서 추도사를 해줄 것을 봉하마을로부터 부탁받았다가 정부 측의 반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하지 못한 추도사를 시작하면서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며 강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7월 3일 출간된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가 퇴임 직전의 노무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나 3일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지은이가 '노무현(인터뷰)/오연호(글)'이다. 이 책 수익금의 일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을 기리는 추모사업에 쓰여진다.


다음은 김 전 대통령의 추도사 전문이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출처 : "노무현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말라
당신은 저승, 나는 이승에서 국민 지키자" - 오마이뉴스

[인물연구 노무현]을 마치며: 단행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2009.07.09 04:23 | 역사에 관한 글 | 고은네

http://kr.blog.yahoo.com/han1592/985086 주소복사



노무현 공부법,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됩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부터 49재를 앞둔 지금까지 '당신의 뜻을 잊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발길이 봉하마을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정토원에 내걸려 있는 노란색 리본.
ⓒ 정토원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봄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정치하지 마라"는 제목의 글을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썼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정치, 하지 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봉하마을의 전직 대통령은 그 글에서 정치하는 일이 고생에 비해 보람이 없다고 했다.

"열심히 싸우고, 허물고, 쌓아 올리면서 긴 세월을 달려왔지만, 그 흔적은 희미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실패의 기록뿐,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는 그냥 저 멀리 있을 뿐입니다."


그는 정치를 하게 되면 이런저런 수렁에 빠지기 쉽고, 그것을 회피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했다.


"문제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그리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어린 아들에게 정치인이 되어보라 했습니다"



▲ 지난 5월 24일 시민들이 폭우를 맞으며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그는 정말 정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아무도 정치를 안 하면 그럼 누가 그 일을 해야 할까? 그런데 그 글을 꼼꼼히 읽어보니 결론은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정치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치하지 마라"는 역설적으로 제대로 정치하자는 것이었다.


"저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인을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정치가 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정치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먼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인의 처지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이 알아주지 않는 머슴들은 결코 훌륭한 일꾼이 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2009년 봄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쨌든 그렇게 "정치하지 마라"는 글을 남겼지만, "바보 노무현, 그의 죽음 때문에 처음으로 정치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만난 한 연구단체의 지식인은 "조용히 연구만 하려고 했는데 지방자치단체장이든 국회의원이든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지식인은 "처음으로 꼭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심지어 나마저도 정치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무엇에 복수하고 싶다는 것일까? 전직 대통령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한국사회, 그것을 제대로 바꿔보고 싶다는 것일 게다.

누리꾼 이지윤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나의 어린 아들에게 정치인이 되어보라고" 권했다고 했다. 그는 '인물연구 노무현' 시리즈를 읽고 나서 이렇게 적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노무현 대통령의 가짜 팬이었나 봅니다. 그분의 심중을 어찌 제대로 아는 것이 이리도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시고 난 다음에야 이렇게 하나씩 알게 되는 그분의 모습이 너무 아리도록 안타깝기만 합니다. … 민주주의 … 과연 무엇인지…. 나의 어린 아들에게 정치인이 되어보라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닮은 정의로운, 사람다운 정치인이 되기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 누리꾼뿐만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부터 49재를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 그동안 내가 만나 온 많은 사람들은, 꼭 정치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노무현 때문에…"라는 말을 많이 했다.


"노무현 때문에 다시 정치를 공부하게 됐다."

"노무현 때문에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작심했다."

"그동안 바보처럼 살았는데, 바보 노무현 때문에 더 이상 바보처럼 못 살겠다."

이런 흐름이 간단치 않은 것은 그 다짐들이 모아져 여기저기서 '노무현 공부'를, 노무현이 공부한 '진보의 미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학습을 다시 시작하며"


그럼 어떻게 노무현을 공부해야 할까? 나는 2년 전 했던 그와의 인터뷰 녹취록을 다시 읽고 또 읽어보았다. 최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쓴 글들을 모두 읽어보았다. 주로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올린 글인데, A4용지로 123페이지에 달했다. 그것들을 뒤지다 보니 '이거다' 싶은 것이 있었다.


2008년 3월 11일 '확신범'이라는 필명을 쓴 누리꾼이 '노무현 학습을 다시 시작하며'라는 글을 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글을 추천하면서 "저보다 더 노무현을 잘 이해하고 있는 글"이라고 했다. '확신범'이 쓴 그 글을 요약해본다.


"노무현은 액면 그대로이다. 소통이 정말 쉽다.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저 말 뒤에 다른 저의가 있을 거야 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사람이라고 느끼는 점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살 수 있지? 라고 느낄 때이다. 노무현은 말도 쉽지만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을 삶으로 보여준다. 노무현은 행동으로 이해하면 무지무지 쉬워진다. (그러나 행동을 따라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무현은 의미한다. 행동하자 그리고 목표는 저기다, 라고 손가락질한다.

노무현이 정답을,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어보라, 그러면 대답할 것이다.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도 저리로 가야 해요. 이게 문제다. 결정적인 순간에 노무현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 시간이, 역사가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다. 단순히 팬으로 환호만 했으면 편하겠는데... 노무현 학습을 통해서 행동까지 해야 한다. 정답과 방법까지 함께 고민해주어야 한다. 그와 소통하는 것은 쉽다. 다만 그처럼 행동하는 것이 많이 어렵다는 거다. 노무현 학습을 다시 시작하면서... 고생길이 뻔한 나와 우리들의 삶에 위로와 축복을 ~~~그래 안다, 이 길이 희망이고 행복임을 ~~~"


노무현 공부를 하다 보면 노무현과 마주칠 수도

그러니까 노무현 공부는 쉽지 않다. 단순히 팬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행동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확신범'은 그래도 그 길이 희망이고 행복이라고 했다. 이 글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이런 답글을 달았다.


"노무현입니다. 저보다 저를 잘 그린 글입니다. 나중에 회고록에 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이런 말은 해두고 싶군요. 저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납득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속았다고 생각하기가 쉽지요. 그리고 실망하고, 다음에는 세상을 불신하게 되지요.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답이 있었다. 노무현 공부를 하다 보면 부족한 사람 노무현과 마주칠 수도 있겠다. 노무현 이어달리기를 하다 보면,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부족한 면들을 발견하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한목소리로 "민주주의 위기"를 외친 사람들도 바보 노무현이 가르쳐준 대로,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면 좋겠다.


"단행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로 이어갑니다"

[맺는말] 연재 <인물연구 노무현>을 일단락하며

ⓒ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를 통한 '인물연구 노무현' 연재는 여기에서 일단 쉬겠습니다. 대신 단행본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연재된 것을 보완·재구성하고 '조중동과의 싸움 1,2', '이라크 파병', '한미FTA', '예비정치인에게', '작은비석 특강', '진보의 미래' 등 새로운 꼭지들을 대폭 추가해서 단행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만들었습니다.

이 책의 지은이(저작권자)는 노무현(인터뷰)/오연호(글)입니다. 이 책의 수익금 중 일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사업과 관련한 뜻있는 사업에 쓰일 예정입니다. 아마도 6일(월)부터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연재된 글을 바탕으로 한 권의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내놓기로 결심한 것은 '인물연구 노무현'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한 기사를 107만 명이 읽었는가 하면, "눈물로 잘 읽었다, 너무 의미 있는 글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만나게 됐다"는 댓글이 숱하게 달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꼭 책으로 내달라", "노무현 공부의 교과서로 삼겠다"는 바람을 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의 재발견, 노무현 이어달리기는 한순간의 눈물로 이뤄질 수 없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에 눈물 뿌렸던 이들이 노무현 이어달리기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이 책이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에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출처 : 노무현 공부법,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됩시다" - 오마이뉴스

[오연호 리포트 : 인물연구 노무현 14] 북핵해법 : 어려운 문제, 일관된 원칙

2009.07.09 04:17 | 역사에 관한 글 | 고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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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오바마에게 무슨 말 할까?
노무현이 5년간 미국에 준 '확실한 정보'




오늘은 6·15선언 9주년이 되는 날이다.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 평화통일 의지를 밝힌 날이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는 전쟁의 기운이 드리우고 있다.

오늘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북한 핵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 간 공조원칙이 이 정상회담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인물연구 노무현 14'는 노무현 대통령이 인터뷰에서 밝힌 참여정부 5년 간의 북한해법 원칙을 담고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 나는 '인물연구 노무현'을 쓰면서 두 전직 대통령이 닮은 점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언젠가 그에 대해 글로 한번 정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그것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을 통해 들을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특히 선배 대통령이 후배 대통령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추모하면서 그 닮은 점을 이야기할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닮은 점 8가지


지난 6월 11일 저녁,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6·15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천여 명의 참석자가 모인 이 자리에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연설을 '노무현 대통령 생각'으로 시작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이 나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6·15와 10·4 선언, 이것을 생각할 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과 저만이 북한을 가서 정상회담을 한 그 사건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자신이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제가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노 대통령은 부산상고, 나는 목포상고를 나왔습니다(청중 웃음). 노무현 대통령은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가고 나도 돈이 없어 대학 못 갔습니다(청중 웃음). 노 대통령은 대학 못 간 뒤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고, 나는 열심히 사업해서 돈 좀 벌었습니다(청중 웃음). 그 후로 나는 이승만 정권, 노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독재에 분개해 본업을 버리고 정치 들어간 것입니다. 정치 들어가서 다시 또 반독재투쟁 같이 했는데, 이렇게 해서 노 대통령과 저는 참으로 연분 많습니다. 당도 같았고, 그리고 국회의원도 같이 했고, 그리고 북한도 교대로 다녀왔고, 가만히 보니까 전생에 노 대통령과 나하고 무슨 형제간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형님은 내가 되고요(청중 웃음). 해서 제가 노 대통령 서거를 듣고 내 몸이 반쪽으로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간 과거만 봐도 여간한 인연이 아닙니다."


그렇게 닮은 점 여덟 가지를 이야기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네 번 웃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나는 그 웃음들 속에 눈물이 젖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노무현과 김대중, 두 사람은 연설솜씨도 닮았다. 눈물 젖은 웃음을 자아낸다. 논리가 있고, 시대정신이 있고, 청중을 웃기면서 울린다.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이 먼저 돌아가시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에 대한 추도사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도 아마 눈물 젖은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책, 9·19성명에 다 있다


이날 참석자들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은 "우리는 최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하고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는 데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저해하는 일체의 행동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다고 했다. 그 대목을 읽어보자.


"북한 핵문제는 이미 그 해결책이 나와 있다. 북한도 참여한 2005년 9·19 6자회담 공동성명을 준수하면 된다. 9·19성명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6자는 한반도 평화체제수립에 협력하며, 북한에 경제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행동 대 행동' 원칙으로 이행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6자 모두 찬성한 합의다. 이것을 실천하면 북한 핵 문제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여 반드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합의된 대로 동북아 평화체제를 이룩해야 한다."


9·19성명이 뭐지? 그것이 뭐기에 이미 해결책이 거기 다 나와 있다고 할까? 그것을 잊어버린, 주목하지 못한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9·19성명은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중반기인 2005년에 나온 6자회담 성과물이다. 북한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당사국들의 합의를 다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성명이었다.

6·15선언 9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말미에서 이명박 정부에 이렇게 당부했다. 한마디로 6·15선언과 10·4선언을 실천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북한과 관계개선 노력을 통해 북한 핵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수용과 실천이 필수불가결하다. 1300년 동안 통일을 유지해온 조상의 업적을 받들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민족통일과 평화협력의 시대를 열도록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숭고한 정신과 합의사항을 확인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민족이 평화와 번영과 통일로 나아가는 길이다."


6·15선언은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의 결과물이고 10·4선언은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후 발표된 것이다. 6·15선언은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이고, 10·4선언은 두 번째 정상회담의 산물이다.


6·15선언과 10·4선언이 뭐기에

이참에 공부 좀 해보자. 2000년에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 공동으로 발표한 6·15선언에는 어떤 내용이 남겨 있었나. 자주적 방법에 의한 통일 의지가 천명됐으며, 남북 경제협력·이산가족 방문 등이 합의되었다. 무엇보다 통일방안에 대한 공통인식을 2항에 담았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5년 뒤에 이뤄진, 김대중 대신 노무현이 바통을 이어받아 김정일과 합의한 10·4선언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6·15에서 무엇이 진전되었나?

10·4선언은 6·15정신의 계승을 분명히 하였고 경제-문화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 사업에서 더욱 속도를 내고, 해주 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는 등 경제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10·4선언의 핵심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종전선언을 추진하기로 한 점이었다. 평화정착을 위해 우선 남북의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 휴전선언을 종전선언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이 점이야말로 10·4선언이 6·15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성과였다.


한반도에 전쟁 기운이 돌고 있는 2009년 여름, 불과 2년 전에 만들어진 이 선언은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노무현, 10·4정상회담보다 9·19성명에 더 애착


▲ 2007년 10월 2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2007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향하며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남북정상회담

이 선언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던 2007년 가을을 생각한다. '인물연구 노무현'을 위한 세 번째 인터뷰는 10.4 정상회담 직후인 10월 20일이었다.

- 성과 있게 정상회담이 끝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지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250분 정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는데 그 시간에 여러 의제를 합의했으니까 역사상 그렇게 효율적인 회담도 아마 없었을 것 같아요. 서해 평화협력지대에서 출발을 해가지고 해주공단하고 쭈욱… 사전에 의제를 충분히 조율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 다 성격이 조금 화끈한 점도 있고, 우리가 의제를 대부분 준비한 것이다 보니까. 우리는 치밀하게 준비를 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화끈하게 받아버린 것 같아요."

정상회담 직후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전보다 10% 정도 올라가 있어서인지 노무현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 평양 가는 길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는데요, 군사분계선 앞에 딱 섰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벙벙했지 뭐…. 걸어가는 것은 우리 청와대 의전 비서관이 청와대 비서관실에 제안을 해서 그리 됐는데…. 나는 그게 그거지 뭐 하고 예사로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대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막상 걸어가는 그 순간에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거기에서 내가 좀 긴장을 한 상태여서 실제로 내가 느낀 감동을 보는 사람도 같이 못 느꼈던 것 같아요. 근데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게 '정말 역사적인 사건이구나' 실감이 나요. 상징성이."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노 대통령은 "나는 오늘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습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올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점 지워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임기 중에 주변의 권유는 많았지만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북핵 문제가 가닥을 잡기 전에는 정상회담이 안 된다는 것을 항상 나는 기본 전제로 깔고, 그렇게 계속 얘기해왔습니다. 국내에서 나한테 자꾸 정상회담 빨리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서둘러서 하면 북쪽입장만 계속 강화시켜주는 것이고, 나한테 자꾸 정치적 부담만 자꾸 주는 것이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이렇게 말해왔지요."


그래서 남북정상회담 자체를 공로로 내세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내가 그 얘기를 왜 자꾸 하냐고 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사리가 있고, 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정상회담을 했다는 것 자체를 무슨 대통령의 공로로 내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10·4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알맹이가 있었으니까 생색은 낼 수 있지만요. 오히려 내 임기 중에 6자 회담에 집중하고 일정한 진전을 이뤄낸 것이 내 공로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남북정상회담보다는 6자회담의 결실이었던 9·19성명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것을 더 크게 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2005년 그 선언이 이뤄진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북핵문제의 최고전문가들이 "해결책은 9·19성명에 다 있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다시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북미갈등·남북갈등이 고조된 상황이기 때문에 당시의 선언이 빛바랜 점도 있지만, 그런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되새김하는 것은 이후 북핵문제 해결에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노무현이 5년간 미국에 준 확실한 정보

2007년 가을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어봤다.

- 지도자로서 북한문제·북핵문제는 어떤 원칙을 가지고 다뤄야 한다고 그동안 생각해왔습니까?

노 대통령은 이 질문에 "그건 참 어려운 문제죠"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북한문제·북핵문제처럼 어려운 사안은 문제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상황이 아주 변화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본질적 구조는 변함없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본질적 문제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일관되게 그 원칙에 따라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나갈 때는 나가고 기다려야 될 때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9·19성명이 나올 만큼 큰 진전이 있을 줄 몰랐다면서 "운도 따랐다"고 했다.


"저는 제 임기 동안에 북핵문제가 풀리는 상황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측했던 것보다 좀 더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지요. 그것은 역설적입니다만, 이라크 사태가 장기적으로 풀리지 않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 그 다음에 이제 미국에서 정치적 구도가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의회에서 민주당이 득세해버린 것이지요. 그것이 이제 우리가 예측하지 않았던 사태지요. 말하자면 이라크 사태도 조금 일찍 끝날 줄 알았고 공화당의 우세는 조금 계속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그것이 역전됨으로써 이 문제가 풀릴 수 있는 계기가 잡힌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그런 운도 있었지만 참여정부가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한 것이 주효했다고 했다.


"다만 그렇게 외부환경이 변화했다 하더라도 우리 한국이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또 틀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5년 동안 한반도에서 미국이 얻은 확실한 정보는 이것이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일방적으로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이라든지, 그 이상의 강한 압력의 행사라든지, 또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제재를 순순히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 평화를 깨는 어떤 모험도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경험을 거쳐서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이 마지막에 이 결단(9·19성명 합의)을 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풀려간 한 서너 가지의 요인 중에서 한국정부의 일관성도 분명히 그 사태해결에 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당근과 채찍? 우리 카드를 상대방이 읽게 해줘야"


노 대통령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좀 내 자랑 같네요"하면서 웃었다. 그러나 힘주어 강조했다.

"평화적으로 그리고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그런 일관적 원칙을 한 번도 바꾼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앞으로도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계속해서 예고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당근과 채찍이론을 거론했다.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때, 특히 남북관계에서 적용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협상할 때 항상 쓰는 우리의 전략이론이 당근과 채찍이론이거든요. 그러나 채찍이론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것은 결국 대화론이 아니고 정도를 넘어가게 되기 때문에 결국 판이 깨지는 강경론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 수준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적어도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선에서 채찍론이 적절하게 구사되어야지, 평화를 깨버릴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채찍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런 위험한 채찍을 쓰지 않겠다는 원칙을 강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이 문제 해결에 다가가게 된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에서는, 특히 전쟁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는 협상의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보통 협상할 때, 내 카드를 보여주지 않는 것. 상대방이 내가 무엇을 할지를 모르게 하는 것이 하나의 협상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그것은 서로 이익을 가지고 나눌 때 하는 것이지요. 북핵문제처럼 아주 중요하고 큰 문제, 말하자면 사태의 향방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아주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 포지션이 정확할 때 상대방이 산수로써, 전략적 산수로써 계산하고 그다음에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 예측하기가 좋은 것이거든요."


대통령의 조건으로 유독 '역사적 안목'을 강조했던 정치인 노무현. 그는 남북문제를 풀 때는 더욱 그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천 년의 역사 속에서 봐야 해결의 원칙이 생긴다"고 했다.

"나는 한건주의, 성과주의로는 절대로 남북관계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대결구도의 일부일 뿐입니다. 멀리 보면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대륙과 해양의 세력 사이의 대결 관계입니다. 근대화 이후에는 그 대결관계의 각축이 더 확실히 있었던 장이 한반도거든요. 이 세계 지도의 구조 속에서 분단이라는 것이 나온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이 전체의 구조를 가지고, 동북아 질서 전체를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병행하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작업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단발성 이벤트를 가지고는 역사적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죠."

"정권이 바뀌더라도 거역하지 못할 것"

- 그런데 임기를 5개월 정도 남겨두고 남북정상회담을 했는데, 너무 늦지 않았나요?

"나는 이것을 (내 국정의) 중요한 마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북정책의 한 단계 마무리라고 생각한 거지요. 또 남북정상회담이 6자회담의 중대한 합의였던 9·19성명을 실행하는 과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동력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노 대통령은 정권이 바뀌어도 대북정책의 기조는 이어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남북정상회담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다음에 시간적으로 지금 이것을 어느 정도 매듭을 지어서 그 지도를 그려놓지 않으면, 설계도 또는 지도를 그려놓지 않으면, 의지가 다른 정권이 들어섰을 때 진행과정이 아주 달라질 수가 있거든요. 이것을 지도를 다시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모아놓으면, 다음 정권이 누구이든 간에 영 다른 길로 가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지도를 좀 구체적인 지도를 그려보자. 그렇게 놓고 국민적 합의를 모아서 정착시켜 놓은 것이죠. 참여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정책으로 매듭을 지어놔야 되는 것이죠."

-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한나라당 후보가 되더라도 큰 틀을 벗어나기 힘들까요?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선거 때이니까, 자기들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시비를 걸지만, 정권 잡으면 여기서의 최대한의 성과를 남기길 바라죠.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북방외교를 했고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고, 남북문제에 있어서 중대한 진전이 있지 않았습니까? 거역하지 못하죠."


거역하지 못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예상했지만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고 2년째를 맞이한 지금, 한반도는 전쟁 기운에 휩싸여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예언대로 평화정착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

"문상객 5백만 중에 50만이라도..."


위 질문에 대한 답의 결정권은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그를 뽑아준 국민들에 달렸을 것이다. 그들이 6·15선언과 그 정신을 이어 만들어진 10·4선언을 되새기고, 공부하고,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그 염원을 거스르기 힘들 것이다. 6·15선언 9주년 기념식에 모인 사람들은 2시간여의 행사 동안 이 구호를 수차례 합창했다.

"6·15로 돌아가자."

이 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국민들에게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행동하면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 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그러면서 노 대통령을 죽인 것은 행동하지 않은 양심, 우리 모두라고 했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 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프겠습니까."

김 전 대통령의 말을 듣고 나를 포함해, 뒤늦은 후회를 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이런 후회 하지 않으려면.

6·15선언? 10·4선언? 9·19성명?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이야? 전쟁하지 말자고 합의했단 말이야? 전쟁으로 목숨 잃은 사람들 위해 눈물 흘리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 10분의 1이라도 전쟁반대를 더 강하게 외쳤더라면.





출처 : 이명박, 오바마에게 무슨 말 할까?
노무현이 5년간 미국에 준 '확실한 정보'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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