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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노자가 생존했던 시대는 중국의 춘추 시대였다. 당시 주나라 중앙 정부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한 반면 지방 제후들의 세력은 강해지고 있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였으며 흉년에는 굶어 죽는 자가 무수히 많았다. 또한, 백성들은 정치적 횡포와 가혹한 세금으로 도탄에 빠져 허덕였다. 공자는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도덕성의 회복을 자신의 시대적 사명으로 삼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다. 공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하는 마음(仁)을 지니고 모든 사람을 예(禮)로써 대하라.'는 것이다. 인(仁)은 인간이 타고난 내면적인 도덕성이요, 예(禮)는 외면적인 행위 규범을 말한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과 효도가 인을 실천하는 데 그 출발점이 되므로, 공자는 효를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반면에 노자는 당시 사회가 혼란한 원인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그룻된 인식과 가치관,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 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가르침을 구하러 노자를 찾아갔을 때 노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공자의 주장을 반박하였다고 한다.
"모기가 물어 대면 밤새도록 잠을 잘 수 없다. 지금 인의(仁義)의 도덕을 말하는 것은 인심을 어지럽혀 오히려 혼란을 더하는 것과 같다. 백조는 매일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물들이지 않아도 검다 하늘은 저절로 높고 땅은 본래부터 두터우며, 해와 달은 저절로 빛나고 별도 스스로 빛난다. 세상의 모든 산천 초목들도 다 그러하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인의(仁義)를 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마치 북을 억지로 두드려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 하는 무모한 짓과도 같다. "
장자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체계화시키고. 우화(寓話)와 비유를 써서 이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었다. 노자는 단지 도(道)가 우주에 충만해 있다고만 했는데, 장자는 이것을 더욱 상세히 설명하여, 도는 없는 곳이 없다고 하였다. 도는 개미 속에도 있고, 낟알 속에도 있으며, 기왓장에도 있고, 오줌똥 속에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장 좋은 정치는 다스리지 않는 것' 이라고 하면서, "천하를 그대로 보존하여 너그러이 놓아 둔다는 말은 들었어도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고 하였다. 장자는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따르면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장자는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하였는데. 그것은 천지의 참된 정신을 타고 원기(元氣)의 변화를 부리며 무궁한 우주에서 노니는 것이다. 그는 지인(至人), 신인(神人)들은 세상일의 잡다한 구분을 초월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와 세계, 나와 남의 구분도 초월하였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는 도는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사라져 버린 것이며, 천지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천지를 생겨나게 하며 이끌어 가는 것이다. 장자에 의하면, 현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분쟁은 모두 세상의 일면에만 집착하여 자기만이 옳고 남을 그르다고 하는 이기적인 편견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1. 내용 요약
<壯子>는 총 33편으로 內篇 7, 外篇 15, 雜篇 11로 구성되어 있는데 壯子는 본래의 사상과 장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후대 사람들의 입장이 뒤섞여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체로 내편이 장주의 思想을 비교적 온전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장자>는 체계적인 논설보다는 寓言, 그러니까 偶話로 가득하다. 때문에 <장자>는 思想書임과 동시에 그 문학적인 가치로도 이름이 높다고 한다.
이 가운데 장자가 직접 지었다는 내편이 그의 사상을 忠實하게 전하고 있고 외편과 잡편은 후학들이 내편의 뜻을 硏究. 발전시킨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내편중에서도 제 1편 ‘逍遙游’와 ‘齊物論‘은 이 도와 유가 장자의 기본 개념이자 내용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한다. 장자를 읽고 그 내용 중 ‘逍遙游’와 ‘齊物論’을 정리 요약하고 그 부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 해 보려 한다.
제 1편 소요유 (消遙遊)
우선 소요유(消遙遊)는 장자사상의 根底를 이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으로서 대붕의 飛上으로 시작되는데 소요유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한 세계를 걷는다는 의미에 걸맞게 끝없이 펼쳐진 환경 속에서 그 무엇에게도 拘束받지 않고 悠悠自適하게 자유를 즐기는 생활을 한다는 意味로도 여겨진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하여 곤 이라 하였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 이라 하였다. 붕의 등도 그 길이가 몇 천 리 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붕이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았다. 이 새는 바다에 태풍이 불면 남쪽 바다로 이동하게 된다. 남쪽 바다란 천지를 말한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아갈 때에는 물을 쳐 올리되, 그 높이가 3천리나 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올라가 유월의 거센 바람을 안고 날아간다. 아지랑이나 먼지 같은 것은 생명체가 숨을 쉬면서 서로 불어내 보낸 것이다. 하늘이 파란 것은 그 본래의 색깔이 그러한 것일까? 그 멂이란 다함이 없는 것일까? 그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역시 그러할 것이리라.
무릇 물이 깊지 않다면, 큰 배를 띄울 수 없을 것이다. 한 잔의 물을 작은 웅덩이에 부어 놓으면 땅에 닿아 버리는 것은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쌓이되 두텁지 않다면, 그 역시 큰 날개를 떠받칠 힘이 없게 된다. 따라서 9만 리 정도는 올라가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되어, 그런 뒤에 지고 거리낄 것이 없는 뒤에야 붕은 남쪽으로 날아가게 된다.
매미와 작은 새는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한다."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팔짝 뛰어 날아서야 겨우 느릅나무 위에 올라 머물 수 있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데, 무엇 때문에 9 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는 것일까?"
가까운 교외로 나가는 사람은 세 끼 밥을 먹고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부를 것이나, 백리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에 양식을 절구에 찧어 준비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동안 양식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 그 두 마리의 작은벌레가 그러한 사실을 어찌알겠는가!
작은 智慧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수명이 짧은 것들이다. 楚 나라의 남쪽에 명령이라는 거북이 살았는데, 오 백 년을 봄으로 하고 또 오 백 년을 겨울로 삼았다. 上古 時代에 대춘 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것은 팔 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이것들은 수명이 긴 것들이라. 그리고 팽조는 지금까지도 오래 산 것으로 특히 유명한데, 세상 사람들이 그와 견주려 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의 관직을 맡아볼 만하고, 행동은 한 고을 정도에 합당하며, 덕은 한 임금을 모시기에 알맞고, 능력은 한 나라의 신임을 받을 정도인 사람이 그 자신을 보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송영자 같은 인물은 그런 것에 빙그레 웃을 뿐이다. 그는 세상에 들고일어나 그를 칭찬해도 우쭐하지 않았고, 세상이 들고일어나 그를 非難해도 低語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안팎의 구분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었고, 영욕의 경계가 확연히 나뉘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세속의 일에 급급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아직은 뿌리를 내려 제대로 서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표표히 잘 돌아다니다 15일 정도가 되면 돌아오곤 했다. 그는 바람에 대해서 급급해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걸어다니는 일은 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바람이라는 것에 의지해야 했다. 만약 천지의 도를 타고, 육기의 變化를 다스림으로써, 무궁 속에서 노닐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至人은 자기 자신의 형체가 없으며, 神人은 현상 세계에 매여 있는 인위적인 행적을 남기지 않고, 聖人은 세속에 연연하는 명성을 추구함이 없는 것이다.
慧子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기에 그것을 심었더니 자라서 다섯 섬들이의 열매가 열리더군요.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혼자 들 수가 없고,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펑퍼짐하고 얕아서 쓸모가 없었습니다. 횡뎅그레 크기만 컸지 아무데도 소용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 그것을 부숴 버리고 말았습니다그려."
장자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큰 것을 쓰는 방법이 정말 서툴군요. 송나라에 손 안 트는 데 잘 듣는 약방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대로 솜을 물에 빠는 일을 家業으로 삼고 있었더랍니다. 한 나그네가 그 말을 듣고 그 처방을 백금에 사겠다고 제의하자, 그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상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우리가 대대로 솜을 빠는 일을 해 오고 있지만, 겨우 몇 푼이나 버는 데 불과했다. 이제 단번에 이 기술을 팔아 백금을 벌 수 있으니 그에게 팔도록 하자.- 나그네는 그 처방을 얻어 가지고 오왕을 설득했습니다. 마침 월나라에서 侵犯하여 왔으므로, 오왕은 그를 장수로 삼아, 겨울철에 월나라 軍事와 수전을 벌여 그들을 크게 패배시켰습니다. 오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봉지를 내리었답니다. 손을 트지 않게 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떤 이는 봉지를 받고, 어떤 이는 솜이나 빨게 된 이유는 그것을 쓰는 방법이 달랐던 데 起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대가 다섯 섬들이의 박을 갖고 있다면, 어째서 그것을 큰 술통 모양의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않고 그것이 펑퍼짐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는 게요? 역시 선생은 앞뒤가 꽉 막히신 양반이구료!"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내 있는 곳에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고 부르더군요. 그 큰 줄기는 혹투성이어서 먹줄을 칠 수도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조차 없기에,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지금 그대의 말도 크기만 했지 아무 소용되는 게 없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거요."
장자가 말했다."선생은 삵이나 너구리를 보지 못했나요? 몸을 낮게 움츠리고 엎드려 있다가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을 노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리어 죽고 말지오. 그런데 이우라는 큰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아 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쥐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대는 큰 나무가 있음에도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 듯한데, 어째서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곳, 드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하릴없이 그 곁에서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에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잠을 잔다거나 하지 않는 거요? 그 나무는 도끼에 찍혀 일찍 죽지도 않을 것이요, 어떤 사물도 그것을 해꼬지하지 않을 것이니,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 어째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인가요?
제 2 편 제물론(齊物論)
큰 智慧를 가진 사람은 너그럽고 여유 있지만, 작은 智慧를 가진 사람은 매사에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는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나, 하찮은 말은 수다스럽다. 잠이 들면 혼백이 꿈을 꾸고, 깨어나면 肉身이 活動을 시작한다. 外界의 사물과 접촉하여 교섭함으로써 마음은 날마다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마음이 바쁜 사람도 있고, 우울한 사람도 있고, 답답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작은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흠칫 놀라게 하나, 큰 두려움은 오히려 망연자실케 한다. 사람들이 시비를 가릴 때에는 마치 쇠뇌의 줄을 튕기듯 재빠르게 행동한다. 그들이 자기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할 때에는 마치 신에게 맹세하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들이 날로 약해질 때에는 가을과 겨울에 草木이 시들듯 쇠잔해진다. 그들이 늙고 퇴락하게 되는 것은 욕망에 억눌리어 앞뒤로 꽉 막히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에 가까와진 사람의 마음은 다시 소생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喜怒哀樂과 근심, 걱정, 변덕, 두려움 및 경박함, 방탕, 자만, 허세는 악기의 텅 빈 공간에서 음악이 나오고 땅 기운이 응집해 버섯이 돋아나듯, 밤낮으로 번갈아 가며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러한 감정의 變化가 싹트게 되는 까닭은 알지 못한다.
말이란 그저 소리를 내는 것만은 아니다. 말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거늘, 그 의미하는 바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는다면, 그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存在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새 울음소리와 다르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거기에는 區別이 있는 것일까, 구별이 없는 것일까?
긍정이 있으면 부정이 있고 부정이 있으면 긍정이 있게 된다. 그래서 聖人은 그건 것에 의거하지 않고, 자연의 本性을 觀照할 뿐이다. 곧 자연의 道理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석한 지혜로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신이 하나됨을 추구하려 애쓰되, 그것이 본래부터 하나임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일러 朝三暮四라 하거늘, 그렇다면 조삼모사란 무엇인가?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그 먹이로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면 어떻겠느냐?" 그 말에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그러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마."라고 말하니까,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명분이나 실제 내용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를 내게 된 것 역시 그와 같은 主觀的인 심리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聖人은 시비의 논쟁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均衡 속에 여유 있게 머무는데, 그것을 일러 양행 이라고 한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자신이 장주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엄연히 장주였다.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러 物化라고 한다.
2. 느낀점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무엇을 理想의 경지로 생각해야 하는가하는 소요유(逍遙遊)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 한 제물론(齊物論)이 장자를 읽은 내용 중
머릿속에오래 남는 것 같다.
소요유(逍遙遊)는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 가는대로 거니는 것을 뜻하며 원래의 의미는 아무것에도 拘碍받지 않는 자유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소요유(逍遙遊) 이야기는 북쪽 바다에 사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로 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붕이라는 새가 한번 날기 위해서 얼마나 큰 바람이 필요한가를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것은 바다기 있으므로 곤이 살 수 있고 하늘이 있으므로 붕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것을 생각게 한다. 큰 배가 뜨자면 큰 물이 있어야 하듯 붕이 날자면 큰 바람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큰 것을 깨우치게 하려고 한다. 즉 작은 것과 큰 것을 타일러 큰 智慧를 살펴보게 하는 것이다.
逍遙游의 주체는 마음으로 무궁한 우조 속에서 마음이 노닐며 날아다닌다는 것으로 정신적
자유의 신비한 체험으로 구애받거나 장애가 없는 침착하고 여유 있는 정신적 자유의 지극한 행복 추구에 있는 것 같다. 노장사상을 접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逍遙游는 무궁한 우주 속에서 마음의 여유와 정신적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無碍의 삶을 사는 것이 지향의 목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제 구실을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소요유의 境地인 것 같다. 서로의 존재를 자유롭게 놓아 둠으로서 依存的도 아니요 간섭도 아니하는 오로지 스스로 그렇게 있게 놔두는 그러므로서 자연 그대로의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향한 哲學이다. 자기를 내 세우지 않고 공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명예를 따르지 아니하는 삶이야말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경지임을 말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욕심을 내려 놓으면 평온함이 발치에 머물러 있음을 느낀 經驗이 있을 것이다. 慧子의 너무 큰 바가지의 쓰임과 가죽나무 그늘 이야기에서 모든 物體는 나름의 쓰임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쓰임에 적당한 이용이야 말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尊重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고 작은 지혜가 큰 지혜를 헤아리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게 한다.
결국 逍遙游를 통해 진정한 존재의 자유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져본다.
齊物論은 만물을 하나같이 보는 이론으로 만물의 差別은 무의미하고 모든 사물을 차별하지 않는 정신적 절대 자유의 경지를 朝三暮四에 비유했다. 胡蝶之夢을 이야기 하므로서 꿈과 현실의 구별도, 생사도 모두 하나라는 無差別 平等의 상태가 하늘의 중심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즉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있을때 절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인식해 본다, 삶은 삶 자체로 중요한 것이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步行도 아니요 目的이 될 수도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어느 것과 비교해서 가치의 優劣을 따지는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말인 즉은 모든 만물이 평등하다는 근저에 깔린 사상이 바탕이 되어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분별을 벗어야만 진정한 자연을 볼 수 있다는 이 이야기는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어떻게 고정 관념을 깨고 바라 볼 수가 있는가, 사물의 차별성이 사라져야 존재의 平等이 성립하는 경지에 이를 터인데 그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은 무위의 삶에 哲學的 根據를 지어 주는 모든 사물은 같다는 상대적이 저울질을 배제한 곳에 智慧로운 삶의 길이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역사나 문화는 언제나 人爲의 産物이다. 齊物論을 읽으면서 모든 事物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價値가 같다면 절대 인간이 자연의 우위에 占有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존재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면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공존해야 함에 이른다. 사물을 다스린다는 생각은 절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유롭다는 의미는 새롭게 나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장자가 말한 아무런 걸림이 없는 無碍에 뿌리를 둔 自由는 영원히 理想鄕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순간순간 자연과 함께 呼吸하면서 자연 속에 한 部分을 차지하고 사는 나를 느끼며 깨어 있음만이 스스로의 存在와 또 다른 존재가 공존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 순간이야 말로 참 자유의 경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인간이 自然人이 될 때 無心의 순간에 머무를 수 있고 그 순간 無爲의 槪念을 떠 올리게 될 것 같다. 인간도 스스로 있고 모든 사물도 스스로 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이고 그 순리를 거슬리지 않는 삶이야말로 자연을 깨우치는 일이 될 것이다.
騷擾游와 齊物論을 통해 壯子가 말하고자 했던 無爲自然으로의 歸依는 꿈속에 있는 말은 아니다. 他人과는 無關한 나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일, 나로부터 自由로워지는 일은 간단한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남은 삶은 평온하게 그리고 유유자적하는 마음으로 삶을 가꾸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밖의 날씨가 청명함도 감사하고, 베란다에 꽃 한 송이가 곱게 피어 있음도 감사하며, 아침 베란다 밖에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감사함을 피부로 느끼고 그 느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여유,, 그 작은 것에서부터 自由의 意味를 되새겨 본다.
장자를 읽고 마음이 편안해짐은 왜일까?
나는 글을 읽고 난 후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慾心의 正體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 욕심의 정체는 자연스러움을 거슬리는 일임을 깨닫기 때문인 것 같다.
자연스럽게 내 마음의 흐름까지 觀照 할 수 있는 餘裕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흠짓 놀란다, 크고 작은 變化 역시 이루어질 만 한 일이라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自體를 인정하고 바라본다. 나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다 볼 용기가 있다면 나 자신에게도 한없이 너그러워질 것 같다, 그리되고 싶은 것이 所望이기도 하다.
이렇게 책을 읽어가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自省의 시간도 갖는다, 그리고 省察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내 딛을 수 있음은 幸福한 일이다.
내 나이 50이 지나서 自然과 人間이 共存해야 하는 중요함과 인간도 자연의 한 部分일 수밖에 없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더 늦기 전에 스스로 自由로워 질 수 있는 길을 향해 지향을 끈을 놓치지 않도록 살펴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담는다.
자유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내 안에 새로운 정의를 내려보고 싶어진다,
“인간의 마지막 탈출구는 자연이다.‘라고 이야기 했던 기형도 시인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독후감을 마무리 하려 한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인터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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