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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으로 투병하던 서양화가 김점선씨가 22일 별세했다. 향년 63세.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이화여대와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학원 입학 첫해이던 72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로 선정되면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간결한 선과 색으로 말과 오리, 맨드라미, 들풀 등 자연을 그린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83년 첫 전시회 이후 60여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오십견으로 붓을 놓은 뒤에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만큼 열정을 잃지 않았다. 회화뿐 아니라 문학, 방송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종합예술인’이었다.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난소암이 발병,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창작활동을 계속해왔다. 작가 최인호씨와 박완서씨의 책에 그림을 그리고 손자를 위한 그림책도 펴냈다. 최근 발간된 자서전 성격의 저서 <점선뎐>에서는 “암덩어리들이 내 몸속에 생겼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나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며 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책 말미에는 “죽음도 삶의 마지막 부분일 뿐 삶과 동떨어진 괴물이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지난 7일 경향신문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퇴원 후) 그림책 원고를 마무리하고 꽃구경과 온천여행을 가고 싶다”는 희망을 보였으나 끝내 병원문을 걸어나오지 못했다. 투병 말기에는 그로 하여금 그림책을 쓰게 했던 생후 6개월된 손자를 보며 약기운을 잊었다. “둔하면서도 튼튼해 보이는 오리가 좋다”는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오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말




















오리











사슴

꽃


















천사



개


[그림은 내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 / 김점선]
나는 말 위에서 죽었다. 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죽어가는 나를 태운 채 말은 달리고 있었다. 그때 말과 나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말이 내 자신인지 내가 말인지……
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다. 화가가 되었다. 말을 그린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죽음 밖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는,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는 잡념과 잡지식 만이 썩은 지푸라기처럼 쑤셔 박혀 있는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었다.
학교 다니는 일 외에는, 아무 준비가 안된 미숙아인 채로 졸업을 당했다. 나는 그런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외쳐댔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등록금을 줬다. 그렇게 큰소리 치고 들어간 대학원에서 한 학기만에 제적당했다. 맘에 안 드는 과목을 수강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나를 가르치던 미국인 선생님이 나의 제적을 안타까와하면서 동료와 일할 기회를 주었다. 통역 일을 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받았지만 모으지 않았다. 다시 죽음과 마주섰다. 나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림! 그림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림 그리는 일뿐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행복했다.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기쁨을 느꼈다. 다시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내 나이는 27살이고 지금부터 31년 전 일이다. 아버지는 나를 금치산자 취급을 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나는 헝클어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럴 때 엄마가 나섰다. 무조건 나를 지원했다. 열심히 그림 그리고 학교 다니는데 그것만으로는 예술가가 안 된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의 쓴맛을 이겨내고 나서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고 했다. 맞는 소리 같아서 결혼했다. 집 나온 청년과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은 채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의 행동에 경악했다. 아이도 생겼다. 매우 가난했다.
우리가 굶는다고 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굶는 줄 알았다. 재미나 멋으로. 그럴 때 사는 길은 극도로 아끼는 것이다. 어쩌다 5만원 주고 그림 한 점을 팔면 정부미만 사고 반찬 사는 데는 돈을 한푼도 안 썼다.
동네에서 얻은 된장에 산에서 캐온 풀을 넣고 끓여서 먹었다. 그림 그릴 캔버스도 돈을 아끼려고 광목을 사다가 합판에 붙여서 그렸다. 그런 그림을 모아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이 꽤 팔렸다. 일년 먹을 쌀을 사고 물감과 광목을 살만할 돈이 생겼다.
작업실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좁은 셋방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 그린 그림은 제일 큰 게 30호를 넘지 않는다. 100호 짜리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게 꿈이었다. 비만 오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인 물을 버리느라고 밤을 새야 했다, 그럴 때 멍히 물을 바라보느니 그림 그리면서 밤을 샜다.
내가 살던 마을의 산과 들에 대해서 환하다. 어디에 무슨 나물이 있는지 언제 어떤 먹을 만한 풀이 나는지를. 그 마을에서 산을 식량창고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림 그리다가도 하루에 한시간 쯤 은 산을 헤메면서 반찬감을 구해야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꼭 일년을 버틸 만큼씩의 돈을 벌었다. 내 행동은 변함이 없는데 차츰 그림이 더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100호 캔버스를 100개나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해마다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내가 먹고살 돈을 버는 길이면서 또한 그림을 보여주는 기회이다. 그림은 경건한 예배다. 자신의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다. 내 영혼은 하늘이 내게 내린 숙제다. 평생 풀어나가야 할 대상이다. 내 영혼 속에는 가깝게는 나와 나의 부모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멀리는 구석기시대의 내 조상의 경험까지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 영혼의 시각화에 몰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다.
출처:감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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