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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기지개는 저 깊은 뿌리에서 시작되고
[오마이뉴스 김민수 기자] 봄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뿌리에서부터 봄은 시작됩니다. 긴 겨울 지나고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잔뿌리들까지 총동원하여 열심히 물을 빨아들입니다. 가을이 한창 깊었을 때에는 몸에 있던 물기들을 빼내느라 분주했던 나무들도 겨울이 한 고비 넘어서고 저 멀리 봄이 올라치면 그동안 말랐던 목을 축이며 비썩 마른 나뭇가지의 속내를 푸르게 만들어 갑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이라 그런지 햇살만 따스해도 마음이 설레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날씨는 햇살만큼 따스하지 않아 작은 바람에도 볼이 차가워집니다. 우울한 소식들도 많아 마음도 겨울같이 차가워져서 이젠 따스한 소식, 봄소식이 그리워집니다.

▲ 중산간 동부지역에서 바라본 한라산
ⓒ2006 김민수
신의 정원 한라산, 그 곳은 아직도 백설이 가득하지만 한라산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저 바다와 그의 허리쯤 되는 중산간에는 이미 봄이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해녀들의 물질이 더욱 활발해졌고 쪽빛 바다에도 해초들의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봄은 한라산의 뿌리인 바다에서부터 중산간 허리를 돌고 돌아 저 백록담까지 올라갈 것입니다.
그 곳까지 쉼 없이 올라가려면 급하게 뛰어가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가요? 이미 오래 전부터 겨울 숲을 걸어보아도 여전히 새싹, 그 어디에는 활짝 피어난 봄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직도 기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느 겨울날 아침 어느새 돋아난 새싹을 보고 깜짝 놀라서 벌써 봄이 오는구나 했는데 봄은 그렇게 새싹을 틔운 후에는 아주 천천히 옵니다.
그렇게 천천히 오는 듯하다 바쁜 일상 속에서 봄이 오는지 어쩐지 관심을 가질 여력도 없을 때 저만치 사라지기도 하지요.
▲ 무슨 씨앗일까요?
ⓒ2006 김민수
너무 늦은 비행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과연 이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제껏 작은 씨앗들의 비상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토록 정갈한 백발의 씨앗을 보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비행이 다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비행이 온전히 끝나는 날, 백발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거든요.
간혹 살다보면 늦은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어떤 이들은 늦었으니 더 열심히 뛰어가야겠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기왕 늦은 것 마음 편하게 걸어가자고 하고, 이제 그만 포기하자고도 합니다. 물론 그 어느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이라면 더 열심히 뛰어야 할 것이고, 여행길이라면 그저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라면 그냥 포기해주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씨앗보다는 백발이 더 멋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곳까지 비행하기까지는 백발의 정갈한 머리카락이 필요했겠지요. 그러나 여행에 종지부를 찍고 흙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 백발의 머리카락은 멋있다고 붙잡고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씨앗으로 하여금 온전히 눕게 하고, 흙의 품에 안기게 해야 할 것입니다.

▲ 산수국의 헛꽃
ⓒ2006 김민수
밟으면 곧 부서질 것만 같은 산수국의 헛꽃입니다. 헛꽃의 아름다움이 가장 돋보이는 꽃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산수국의 헛꽃을 꼽을 것입니다. 산수국이 피었던 숲길, 그 숲길을 하얀 눈이 쌓인 어느 겨울날 걸어보신 분이시라면 제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지 아실 것 같습니다. 이른 겨울까지는 꼿꼿하게 마른 채로 서있지만 봄이 가까이 오기 시작하면 툭툭 꺾어져 하얀 눈밭 위에 하나 둘 도장을 찍듯 하얀 눈이 녹음과 동시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가고자 온 마음을 비웠는데 흙과 닿기 전에 새록새록 돋아난 작은 풀들이 흙과 헛꽃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주었나 봅니다. 다른 나뭇잎들은 촉촉하게 젖어 부지런히 흙으로 돌아가는데 산수국의 헛꽃은 아주 오랜만에 비썩 말라 다른 나뭇잎들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봄비가 내리기 전에 저 산수국의 헛꽃은 흙으로 돌아가 봄에 피어나는 또 다른 꽃으로 환생할 것입니다.

▲ 열매가 있어 날짐승, 들짐승 행복했습니다.
ⓒ2006 김민수
마른 낙엽들 사이 혹은 하얀 눈 위에 붉은 열매들이 떨어져 있습니다. 붉은 열매, 그들은 겨울 숲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날짐승들에게 아주 귀한 식량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숲의 날짐승들은 배가 고파 숲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날짐승들이 그들을 쪼아 먹다 떨어뜨리고, 혹은 칼바람이 그들을 떨어뜨리면 숲의 들짐승들이 그 떨어진 작은 열매들을 먹고 힘을 냅니다.
날짐승과 들짐승이 먹어줌으로 인해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는 시작이 되고, 그 이듬해 혹은 몇 년 후에는 또 작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 세복수초(눈새기꽃, 얼음새꽃)
ⓒ2006 김민수
풀꽃들은 꽃을 피우고 씨앗이 떨어지면 이듬해 꽃을 피우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복수초의 씨앗은 떨어지면 대략 5년 후에야 꽃을 피우는 온전한 개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보는 저 작은 새싹, 꽃을 품고 있는 저 작은 세복수초의 새싹은 최소한 다섯 살 이상이라는 것이죠.
봄의 전령 중에서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꽃이 있다면 바로 이 세복수초입니다. 지금 제주도 어딘 가에는 피어 있을 터인데 아직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먼저 "세복수초가 피었습니다!"하고 봄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그것도 행운이 뒤따라야 하겠지요. 아직 겨울 숲은 햇살이 따스해도 볼이 얼얼할 만큼 차갑습니다.
이제 새싹을 냈으니 봄을 향해 급하게 뛰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도 봄, 봄은 이제 멀지 않았으니까요. 이젠 대지에서는 발바닥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많은 새싹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겨울 숲에 여기저기서 봄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솟아오르는 작은 봄들,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있어 오는 것이니 볼 것 많은 '봄'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겠습니다.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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