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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4/0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2009.11.24 05:14 | 생명의 양식(말씀) | 옹달샘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22347 주소복사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베트남의 순교 성인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에 태어났으며, 사제가 되어 열정적으로 사목하였다. 박해 시대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하노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최고의 가짜는 ‘가짜 메시아’입니다.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재림 예수다.” 겁 없이 외치는 자들입니다. 역사 안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죽은 뒤에는 가짜임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자신을 메시아라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짜가 분명한데도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인가에 현혹되어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 사람들은 종말 주장에 약해지는 것일까요? 가짜 그리스도에 속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요? 분명한 것 하나는, 추종자들도 무엇인가 느끼기에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속이는 자도 무엇인가 ‘보여 주기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신비스러운 현상’입니다. 일종의 ‘영적 능력’이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늘 ‘개인 구원’이 목적입니다. 조직에 들어온 자만이 ‘살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들이 ‘독선과 분열’의 늪에 빠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독선’으로 몰고 가지 않으십니다. 일치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평화와 화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이천 년 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현실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계십니다. 삶을 두려워하기에 ‘이상한 곳’에 관심을 가집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런 곳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 매일 미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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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헌금은 정성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헌금함 앞에 섰는지요?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바치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합니다.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바칩니다. 하루를 ‘기쁨으로’ 희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정성에 감격해하십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가운데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두 닢’의 헌금이라면 주목받을 액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인의 ‘마음’을 읽으셨기에 주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그녀의 소박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물질이 부족한 것만 가난이 아닙니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가난이고, 마음이 바쁜 것도 가난입니다. 일상에 떠밀려 허겁지겁 살고 있다면, 물질이 넘쳐도 부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바치는 시간도 주일 미사가 거의 전부입니다. 그 시간에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요? 한 주간 살아온 삶을 바쳐야 합니다.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다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봉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헌금을 보고 계십니다. 한 주간의 ‘아픔’도 헌금 속에 함께 담아야 합니다.


- 매일 미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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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의 부모는 어린 나이의 마리아를 성전에 봉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를 기념하는 축일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다. 축일의 시작은 6세기 중엽,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예루살렘에 세운 ‘마리아 봉헌 기념 성당’의 봉헌식에서 비롯되었다.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공식 선포하였다.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오늘의 묵상


‘사두가이파’는 유다교의 사제를 배출하는 제사장 그룹입니다. 그들은 늘 현실을 중시했고, 사후 세계나 영혼 불멸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경도 모세 오경만 인정했고, 율법을 통한 ‘엄격한 제재’를 강조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질문을 던집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인과 살다가 죽었다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부활의 모순점을 지적하려고 ‘이상한 예’를 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정확한 답변을 하십니다. 저세상의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설명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니고 ‘깨달음’입니다. ‘건전한 상식’ 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인연’과 ‘삶의 흔적’이 저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간단한 이 사실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가르침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르게 됩니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 조건입니다.


- 매일 미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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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합니다.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없애려 듭니다. 놀랄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역사 안에서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율법과 성전이 예수님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술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절했고, 술맛도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팔리지가 않았습니다. 그가 이웃집 노인에게 원인을 묻자, 노인이 물었습니다. “혹시 사나운 개를 키우는 것은 아닌가?” 그가 대답합니다. “무서운 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술이 잘 팔리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을까요?” 노인이 다시 답합니다. “누구나 개를 두려워하지. 술을 사러 갔는데, 가게 앞에 사나운 개가 버티고 있다면 쉽게 들어가겠나? 그 개가 원인일세.” 중국의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길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서운 판관이 되어 ‘겁을 주고’ 있습니다. 성전 역시 편안한 곳입니다. 누구나 가서 위안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무서운’ 조건들입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을 사람이 막고 있는 셈입니다. 


- 매일 미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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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며 슬픔에 잠기십니다. 성전의 파괴를 가슴 아파하십니다. 파멸의 원인은 ‘독선’ 때문입니다. 유다인만이 구원받고, 율법만 지키면 어떤 간섭도 없다는 ‘자만심’ 때문입니다. 고칠 수 있는 길은 시련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은 불탔고, 성전은 로마인들의 손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선택된 민족’일지라도 선민답게 살지 않으면 당연히 퇴색합니다. 위대한 민족이라는 무늬만 믿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기에, 이스라엘은 로마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은 옳고 남의 믿음은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만 ‘구원된다’는 생각만큼 옹졸한 생각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주님이시지, ‘어떤 특정인’의 주님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유다인들은 시련을 겪었던 것입니다.


연약하게 교육받은 어린이는 집에서는 사랑받지만, 밖에서는 사랑받기 힘듭니다. 엄하게 교육받은 어린이는 예의를 알고 ‘남을 알기에’ 밖에서도 사랑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우월감에 점점 약해지는 이스라엘에게 충격 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성전의 멸망이라는 ‘히든카드’를 꺼내신 것입니다.


- 매일 미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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