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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4/04
 



                          하느님의 선물

“귀여운 아기들 모두 모여라! 베들레헴 성 밖에 외양간으로. 주 하느님 우리게 보내주신 귀한 선물을 받으러 오너라!” (가톨릭 성가 109)

바빴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기쁜 예수님의 성탄대축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탄 시기는 선물을 주고받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 간에 나누는 선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불우한 이웃까지도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물의 대축일’입니다. 어떤 선물도 예수님의 성탄이라는 선물보다 더 크고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성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기에, 예수님의 성탄은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헤아릴 수없이 많은 은총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동정이신 성모마리아를 통하여 잉태되시고 태어나심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이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외양간에서 탄생하시고 나자렛에서 자라시면서 인간과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인생길에서 겪는 뭇사람들과 모든 일들이 모두 의미 있는 선물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 선물에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목동들은 물론, 초라한 외양간의 누추함도, 인생의 고달픔도 전부 포함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많은 찬사와 오해, 질투도 포함됩니다. 특히 당신의 수난과 죽음까지도 선물이라는 것은 참으로 깨닫기 힘든 사실입니다. 온갖 번뇌와 고통, 모욕과 수치, 마침내는 죽음까지도 선물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며,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마저 수난과 죽음에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고통 중에 예수님의 고통을 닮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로와 힘이 되고 있습니다.

수난 전날 저녁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당신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되새기고, 그 사랑으로 이웃의 발을 씻어주며, 남을 위하여 희생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성탄을 계기로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 같은 행동을 실천한다면, 서로에게 진정한 성탄의 선물을 주고받는,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통과 죽음이 일시적이고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구원과 저주가 판가름 나고,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영생의 복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외로움과 두려움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위로해 주시고 희망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쁨과 희망에 넘쳤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용기와 자신감에 넘쳐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대부분은 순교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이십니다. 우리도 어서 빨리 베들레헴 성 밖 외양간으로 가서 ‘하느님의 선물’이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 이한택 주교님 의정부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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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옥

우리 교회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 중 하나는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희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축일 미사를 비롯한 모든 미사의 성찬기도에서 산 이들 뿐 아니라 죽은 이들도 기억합니다. 또한 묵주기도를 바칠 때에 매 단 마다 연옥의 영혼, 특히 가장 외로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장례 때나 기일에 연도를 바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알고 있지요! 그리고 위령성월에는 앞서 가신 모든 영혼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희생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연옥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연옥이란 이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해 용서는 받았으나 그 죄에 대한 보상을 다하지 못한 영혼이 주님 곁으로 가기 위하여 남은 보상을 다하는 곳을 말합니다. 일반 사회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감옥생활을 하거나 일정한 벌금 또는 봉사활동을 해야 정상적인 시민생활을 하게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연옥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연옥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 삶을 마감할 때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저주 밖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나는 반드시 천국행”이라고 장담할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리고 천국에 갈 자신이 없다고 해서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연옥은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을 보장하는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정화된 다음에 주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연옥과 지옥은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고통스럽다는 것인데, 이는 특별히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失苦)입니다. 반대로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지옥이 영원한 벌을 받아야하는 곳인 반면 연옥은 한시적으로 정화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에게는 희망 없이 절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연옥에 있는 영혼은 아무리 큰 고통 중에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공심판 후에는 연옥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연옥에 있는 영혼이 구원받을 것은 확실하지만 연옥의 상태에서 스스로 자기의 잠벌을 감면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복역 생활을 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 영혼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공로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위한 매우 뜻깊은 선행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연옥 도리를 거부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특히 개신교인)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연옥이란 말 자체는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도 연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읽어보면 이미 구약시대에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풍습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연옥에 관한 언질을 주신 대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 제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나옵니다.(2마카 12,43-45 참조)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라고 말씀하심으로 연옥을 암시하셨습니다. 위의 두 구절은 구원받을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기 전에 머무는 곳이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들입니다.

우리는 연옥 도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깊이 묵상하고 하느님께 끝없는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며,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구원송)

- 이한택 주교 의정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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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주기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즐겨 바치는 기도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미사성제와 묵주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사는 집전 사제가 있어야 되지만 묵주기도는 사제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여럿이나 혼자서 바칠 수 있습니다.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니만큼 묵주기도에 대해서 더욱 깊은 애정과 인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 바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묵주기도는 로사리오기도라고도 합니다. 로사리오는 라틴어의 Rosarium에서 나온 말인데, 그 어원은 장미꽃을 뜻하는 Rosa입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하느님과 성모님께 드리는 장미 꽃다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에게 뜻 깊은 일이 생기면 아름다운 꽃다발을 보내곤 합니다. 졸업할 때, 세례를 받을 때, 결혼할 때, 심지어는 장례 때에도 꽃을 선물합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아름다운 장미를 한 송이씩 성모님, 예수님,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교회 초기에 시편 150편을 매일 외우기 위하여 묵주알 150개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시편 대신에 주님의 기도를 150번 바치면서 묵주를 사용하게 하였고, 중세기를 지내면서 성모께 대한 신심이 커져 주님의 기도 대신 성모송을 바치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두 번째 것은 유럽에 11세기부터 알비파라는 이단이 생겨 교회와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켰는데, 성모님께서 성 도미니꼬에게 나타나 묵주를 주시면서 알비파와 싸우는 무기로 사용하라고 일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실제로 알비파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묵주기도는 세 가지 신비 즉 기쁨, 고통, 영광의 신비(현의)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10번, 영광송을 외우는 지극히 단순한 형식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묵상들을 통하여 성모님께서 어떻게 예수님의 인생에 동참하셨는지를 볼 수 있고, 성모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기쁨의 신비에서는 예수님의 잉태에서부터 숨은 생활을, 고통의 신비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영광의 신비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성모님의 승천과 천상 영광에의 동참을 묵상합니다.

또한 고(故)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2년에 빛의 신비를 선포하고, 특히 목요일에 이 신비를 묵상할 것을 권장하셨습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하여 세례 받으시는 신비로 시작하여 수난 전날 만찬 때 성체 성사를 세우시는 신비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한 자리에서 네 신비를 다 묵상해도 좋지만, 반드시 한 번에 전부를 바쳐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한 가지 신비를 묵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1단만 바쳐도 그 자체로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일부분이라 해도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삶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일들을 추억할 때도 단편적인 장면만이 떠오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묵주기도는 매우 단순한 형식의 기도이지만, 미사성제 다음으로 우리의 영성생활을 돕는 가장 ‘풍요로운’ 기도입니다.

루르드나 파티마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 그분께서는 예외 없이 세계 평화와 민족의 화목을 위해 묵주기도 바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또한 역대 교황님들께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묵주기도를 권장하셨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우리 모두가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그리고 성모님과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택 주교님 의정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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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선열을 기리며...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이미 시성된 103위 성인들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교선열을 기리는 달입니다. 20일(또는 17일 주일)에 우리 나라 모든 본당에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미사를 장엄하게 드립니다. 우리는 순교자 성월과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200여 년 전에 순교선열들이 걸어가신 신앙의 길을 회상하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께서 사시던 시절에는 천주교 자체가 낯선 종교였을 뿐 아니라 누군가가 천주학(천주교)과 관련된 사실이 알려진다면 명예나 재산, 가족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순교선열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재산, 명예, 권력을 위하여 신앙을 등한시하고 때로는 쉽게 포기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우리 선열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신 반면,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개인적 안위를 위하여 쉽게 신앙을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순교선열들은 편안하게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순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순교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닥쳐올 것을 알면서도 믿음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처럼 정덕을 지키는 부부생활을 4년이나 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평상시에서부터 순교의 삶을 사신 선열들의 모습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순교선열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서로 도와주고 서로 아껴주는 일로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감동을 주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깊은 산골로 들어가 옹기마을을 이뤄 가난의 삶을 살면서도 신자 중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눔의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한 사람이 관헌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할지라도 동료들의 이름이나 거처를 말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고 보호하였습니다. 신자들끼리 서로 나누고 아끼며 사랑하는 모습 역시 우리가 소중히 이어가야 할 신앙의 유산입니다.

우리 순교선열들은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수십 리를 도보로 오갔고, 미사가 자유롭지 않았던 관계로 잠을 설치며 새벽까지 깨어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선조들은 성사, 미사, 성직자를 매우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미사참례도 쉽고 신부님들도 많아서인지 몰라도 미사와 영성체, 성사생활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쇄신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이겠습니다.

끝으로 우리 순교자들의 공통점 하나는 어른과 아이 모두 교리를 잘 알 뿐 아니라 관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당당하고 정확한 답변들을 했다는 점입니다. 신부님을 자주 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읽을 책이 많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분들은 관원들 앞에서 정확한 교리를 당당하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 선열들은 그토록 열심히 가르치고 열성적으로 배웠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옥중에 갇힌 중에도 기도하며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과 교회에 대하여, 사랑과 봉사에 대하여 얼마나 배우고 연구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교회서적과 잡지, 신문도 많이 발행되고 있는 만큼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와 사랑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면서 자랑스러운 순교선열들을 본받고 우리도 열정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을 할 것을 다짐합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진리의 증거자, 사랑의 순교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 이한택 주교 의정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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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와 성 이냐시오 로욜라

2009.09.23 12:56 | 목자의 가르침 | 옹달샘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21747 주소복사



                 성 베네딕도와 성 이냐시오 로욜라

7월에는 유명한 두 수도자의 축일이 있습니다. 11일은 성 베네딕도, 31일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축일입니다. 이 두 수도자를 통하여 수도생활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분들의 수도생활을 이해하다보면,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흔히 수도생활을 완덕의 삶이라고 합니다. 완덕의 삶이란 수도자들이 지금 이곳에서 완덕에 다다른, 완성의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도자들의 삶은 복음적 권고의 삶 즉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될 바를 이 세상에서 미리 보여 주는 예표로서의 삶입니다.

모든 수도자들은 세 가지 복음적 권고 즉 가난, 정결, 순명을 서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네 번째 서원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도자는 가난 서원을 함으로써 소유욕에서 자유로워지고, 정결 서원을 통하여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지며, 순명 서원을 통하여 자신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지난 시대에도 그랬지만 우리 시대에는 수도생활이나 영성생활이 더욱 어려운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영성생활이 더욱 힘겹게 생각되는 이유 중 하나는 생활 여건이 더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짐으로써 하느님을 예전처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 베네딕도와 성 이냐시오는 모두 가문이 뛰어나고 윤택한 집안의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성인께서는 수도자가 되기 전의 환경, 그리고 수도자가 된 동기와 목적은 비슷했지만, 그분들이 추구하신 수도생활의 양식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완덕에 이르기 위하여 오로지 하느님을 추구하는 일에만 몰두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성인께서도 처음에는 은수생활을 하시다가 주변에 제자들이 모여들어 수도원 공동체를 형성하여 베네딕도 수도원을 시작하셨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서방 교회 수도생활의 스승으로 추앙 받으시며 베네딕도회는 모든 수도원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베네딕도회는 아빠스(원장)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공동생활을 통하여 찬미의 기도와 육체적 노동으로 일과가 짜여진 생활을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성규의 핵심은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외에는 마음을 주지 않기 위하여 베네딕도회 회원은 네 번째 서원으로 정주(定住)서원을 합니다. 더 중요한 일이 많고 더 좋은 일, 더 급한 일이 많아서 하느님을 생각할 여유를 찾지 못 하거나 하느님을 외면하는 현대인은 베네딕도 성인의 영성을 잘 음미해 볼 가치가 있겠습니다.

한편, 성 이냐시오는 베네딕도 성인보다 약 1,000년 후대의 성인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자기 수덕을 강조하였다면, 이냐시오 성인은 타인의 구원과 자기 완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 이냐시오의 수도생활은 사도적이고 포교적이라 할 수 있고, 그러기에 생활양식도 자연스럽게 활동적입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기도도 관상과 활동을 동시에 하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공동으로 하는 기도도 소중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는 더 중요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늦었다고, 또는 너무 시끄럽다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은 “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고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눈앞에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해서 번민에 빠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쁜 생활 중에 무엇 때문에 바쁜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방황에 빠지곤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과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우리의 마음과 지향을 오로지 하느님께 둘 것을 당신들의 삶과 가르침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 분들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의 영성생활을 되돌아보도록 초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한택 주교 의정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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