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위령성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죽은 이들이 연옥의 벌을 면하고 천당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형태를 지니지만 그 내용은 지상에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기도이다. 그들이 평소 살아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바쳤을 기도를 기억해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은 부모 형제 친척들을 기억하면서 미사를 드릴 때, 그들이 연옥 벌을 면하여 천당 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들이 살아생전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며 바친 기도를 기억한다. 때로는 그들이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다 해도 그 모짐 속에 감추어 있을 “우리를 위한 그들의 희생심”을 느끼려고 한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우리를 위한 그들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며 그렇게 우리를 그들과 하나가 되게 한다. 때로는 우리를 위한 희생심이 그들에게 전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들의 내면 너무도 깊은 곳에 감추어 있어 그들 자신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도 느끼지 못했을 그들의 마음 안에 감추어진 그 희생을, 그 기도를 느끼게 해주는 기도이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그들도 모르게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이 감추어 있었을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또 내 안에 감추어 있는 나도 느끼지 못하는 그 자비심을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죽음 안에 감추어 있는 희생과 사랑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래서 자비의 기도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기도이다. 주님, 우리도 저들처럼 남을 위하여 희생하며 살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자비롭게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위령의 날 미사의 한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듣는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나에게 오너라.” 예수님이 우리가 가야할 인생의 목표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라는 것은 그분이 지신 십자가, 그분이 죽은 십자가, 남을 위한 죽음이 우리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음을 기억한다.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런 우리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 목표에 도달한 자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내가 희생할 수 있는지 따지며 사람들 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온유할 수 없다. 겸손할 수 없다. 온유한 자만이 남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온유하고 겸손하기 이해서이다.
위령성월은 우리 인생의 목표가 온유와 겸손임을 또한 가르쳐 준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만이 인생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 |
|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trackback/1235173/22361
|
|
|
|
|
|
|
|
|

영원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이 처음과 미래로 펼쳐지는 현재의 지속이다. ‘영원’은 영원한 현재로서만 이야기 가능하다. 지나간 시간이 현재의 나에게 현재의 의미를 줄 때 우리는 지나간 시간의 ‘영원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지나간 과거가 단순히 회상의 대상이거나 그렇게 반추될 때에만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삶을 변화시키며 작용할 때 우리는 ‘영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너와 나의 관계가 과거의 추억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이 되어 현재에 생명을 줄 때 너와 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영원 속의 너’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아름다운 추억이나 애련한 추억을 넘어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영원한 사랑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추억 속의 사랑이 아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영원하시다. 그분은 항상 현재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으로서 과거의 한때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 매순간 창조하고 계신다.
그분의 창조는 회상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지금 느껴야 하는 사건이다. 영원한 창조주로부터 창조된 그분의 창조물인 세상도 나도 지금 영원히 창조되고 있는 중이다.
‘창조물’이란 ‘한 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지금 창조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한때 나를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나를 창조하고 계신다. 이 일은 내가 당신의 창조를 내 안에서 계속하도록 나에게 창조력을 주심으로써 이다.
나는 하느님의 ‘영원’한 창조물이다. 나는 영원한 창조주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나를 항상 새롭게 창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하느님의 창조물인 것이다.
영원한 하느님 안에서 나는 당신의 창조물로서 하느님의 창조를 완성시켜 나가는 영원한 존재인 것이다. 영원한 하느님은 내 안에서 당신의 영원성을 느끼게 해주신다.
내가 영원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하느님은 나에게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내가 영원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시간 속에 묶여 사는 나로 머문다면, 나는 영원한 하느님을 느낄 수도 없을 뿐더러 하느님도 시간 속에 제한된 존재로 만들게 된다.
사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부르면서 상상 속의 영원한 하느님께 상상 속에 영원한 사랑을 노래할 때가 많다.
영원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은 내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안에서는 과거의 사건도 미래의 사건도 현재의 의미를 선사한다.
-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말은 시들지 않는다>에서- |
|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trackback/1235173/22289
|
|
|
|
|
|
|
|
|

창조
대자연은 우리를 태초의 창조의 순간으로 안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다.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골로 1,15 이하)
창조된 만물은 시간이 흐르면 과거에 속한 물건이 되고 폐기할 수도 있는 그런 제조품과는 달라 결코 과거에 속한 것이 될 수 없는 현재로 항상 존재한다.
하느님의 피조물은 한번 만들어진 과거의 어떤 작품이 아니기에 한때 좋은 물건이었으나 지금은 악한 물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원한 창조물이다.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지속시켜나가는 창조의 힘을, 하느님처럼 창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만물은 - 나를 포함하여 - 과거에 한번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지금 계속 창조진행중이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사업을 계속 완성시켜 나가는 존재이다. 이처럼 나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위대한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는 차원을 넘어 도대체 내가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하고 있는 점에서 말이다.
나는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이 내 안에서 계속 일어나게 해야 한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종말로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마치 잉태된 아기가 어미 뱃속에서 창조사업을 계속하며 인간으로 탄생하는 것처럼.
인간은 창조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창조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도록 창조하셨다.
이렇게, 죽음도 창조를 계속시키는 사업이지 창조를 끝내는 사건이 아니다. 인간의 죽음은,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듯 그렇게 수명이 다 되어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나를 완성시켜나가는 사건이며 모든 생명체에 영원한 생명을 찾게 해주는 사건이다.
낙엽은 영생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안다. 알든 모르든 인간은 다시 '영원'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 |
|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trackback/1235173/22036
|
|
|
|
|
|
|
|
|

사랑 3
사랑은 '영원'을 약속하며 영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달콤한 대중가요처럼 펼쳐지지만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중가요가 노래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동경, 이별에 대한 슬픔은 사랑의 진실을 말해준다.
인간의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일 수는 없다.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사랑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인간적인 사랑은 대개 자기 방식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면서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기에 영원하지 못할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시기 질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안고 있다. 어떤 사랑하는 사람도 인간의 무한한 사랑의 욕구와 무한한 사랑의 능력을 채워줄 수 없다.
그 누구도 상대의 사랑의 욕구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다.
인간의 사랑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한 인간에게 신뢰를 허락하고, 평생을 약속하는 결혼의 모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결코 고갈될 수 없는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인간은 이런 사랑을 하고 이런 사랑을 느끼며 사는 존재이다. 인간은 '신적 사랑'으로 창조되었다.
참된 사랑은 신적이다. 사실 신적인 사랑처럼 재미없는 사랑이 또 있을까? 그런 사랑은 고차원적이어서 인간이 아닌 성인에게나 가능할 뿐, 약점도 많고 감정의 굴곡도 많은 보통의 우리 같은 인간에게는 도저히 감미로운 즐거움을 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신적일 때 진실하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에 잘 나타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격적이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아버지)과 사랑 받는 존재(아들)가 서로 다른 인격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느님 안에서는 '너'가 '내'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성부(나)는 성자(너)일 수 없고 성자는 성부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결코 아버지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나보다 더 위대하다고 증언하는 상황이 하느님의 삼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너와 나, 그리고 너와 나를 서로 맺어주는 사랑의 끈이 '하나의 사랑', 삼위일체적 사랑을 이루고 있다. 이를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로 간결하게 그러나 가슴 뭉클하게 표현한다.
모든 사랑은 신적일 때 진실하다. 신적이지 못한 데서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려 하게 되고 그런 차원에서 사랑을 하려 할 때 배신과 실망 그리고 미움이 따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실 따름이다. 느끼게 해주실 뿐이다.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내세우기 전에 하느님처럼 그저 보여주는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한마디로 사랑의 존재가 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사랑을 느끼게 해줄 때 우리는 그 자체로 사랑이 될 것이다.
-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 |
|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trackback/1235173/21953
|
|
|
|
|
|
|
|
|

사랑 2
주님은 우리를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르신다. 이는 우리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뜻도 되지만, 우리가 주님께 사랑을 선사하는 존재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누구누구", 또는 "존경하는 누구누구"와 같은 표현을 흔히 쓴다. 하지만, 그 누구누구는 기분에 따라 금새 미운 존재로도 변할 수 있다.
"사랑하는 누구누구"라는 말이 진실이기 위해서 나는 그 누구누구를 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만이 아니라 나에게 사랑을 선사하는 존재로, 사랑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존재 그 자체가 나에게 사랑을 선사하는 존재, 사랑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그저 사랑스런 자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사랑을 선사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하느님에게 사랑 자체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사랑 자체이듯이.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사랑을 느끼신다. 우리가 '사랑'이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다. 어떤 소유물이 아닌 사랑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은 엄마와 아기의 사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출산하기 전까지 불안해하던 엄마도 일단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 기쁨은 부모의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다 - 그래서 언제든 싫어할 수도 있는 - 그것은 아기가 부모에게 선사한 것이다.
그렇게 아기는 기쁨을 선사하는 존재로, 사랑을 선사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아기는 그 존재 자체로 사랑스런 존재, 기쁜 존재, 사랑, 기쁨 자체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신다.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을 선사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모두는 사랑 받기를 원하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사랑이다. 아, 하느님, 당신은 정말 이 비천한 인간을 위대하게 창조하셨군요. 언제 나는 나를 내 전 존재로 당신께 사랑의 선물을 바칠 수 있을까요?
-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 |
|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trackback/1235173/21947
|
|
|
|
|
|
|
|
오늘 |
전체 |
|
| 방문자 |
764 |
1350781 |
|
| 구독자 |
0 |
108 |
|
| 댓글 |
0 |
156 |
|
| 참조글 |
6 |
808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