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물질적 만족보다 정신적 평화를 원하는 분들이 지나다 들려 목 축일 샘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즐겨찾기 추가
옹달샘 (hamikal0929)
프로필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19182)
인생은 나그네길
더불어 함께 살기
제사지내는 성당?
쉬며 목 축일 샘
비나이다 비나이다
생명의 양식(말씀) 새 글이 있습니다.
바보가 바보들에게 새 글이 있습니다.
묵상(명상)의 글
속뜰인 감성 물주기
詩로 읽는 복음서
삶의 끝자락에서
엄마의 쪽지 편지
아름다운 노년의 삶
거시기 뭐래유?
속 편혀야 튼튼
나눔의 샘
어디로 가셔유?
깊은 묵상 옹달샘
거룩한 걸레의 삶
하느님의 우물
마음의 길잡이
곰삭힌 맛(詩) 새 글이 있습니다.
이 풍진 세상
생각과 생각의 뜰
명심보감
살아 숨 쉬니 감사
절에서 왜 절해유?
사랑은 고운 정
길동무 얘기들
지혜로운 삶?
살 맛 만들기
고통은 축복의 길
신앙인의 삶
성찰-허물 고치기
은총받는 길
목자의 가르침
영성의 샘물
하느님의 말씀(성경)
법구경과 논어
부여관광
아름다운 꽃
부여.궁남지 연꽃
등산 사진
여러 그림들
천주교 성지. 성화
울릉도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노인봉(소금강)
계룡산
대둔산
인생 낱말 사전
개설일 : 2004/04/04
 

산은 구름과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2009.11.22 18:28 | 길동무 얘기들 | 옹달샘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22341 주소복사



산은 구름과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라.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느 것 하나라도 마다 하지 않고
긍정하는 대장부가 되어라.

무엇을 구한다, 버린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
모든 걸 받아들이는 대장부가 되어라.

일체의 경계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대장부가 되어라.

놓아 버린 자는 살고, 붙든 자는 죽는다
놓으면 자유요, 집착함은 노예다.

왜 노예로 살려는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설상가상인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흔들린다면 끝내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데
무엇에 집착할 것인가?
짐을 내려놓고 쉬어라.

쉼이 곧 수행이요.
대장부다운 살림살이다.

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수고로움을 면할 수 없다.
먼 길을 가기도 어렵고 홀가분하게 나아가기도 어렵다.
자유를 맛 볼 수도 없다.

쉼은 곧 삶의 활력소다.
쉼을 통해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쉼이 없는 삶이란
불가능할 뿐더러 비정상적이다.

비정상적인 것은 지속될 수 없다.
아무리 붙잡고 애를 써도
쉬지 않고서 등짐을 진채로는 살 수 없다.

거문고 줄을 늘 팽팽한 상태로 조여 놓으면
마침내는 늘어져서 제 소리를 잃게 되듯이..

쉼을 거부한 삶도
마침내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삶의 정지가 아니라 삶의 훌륭한 일부분이다.

쉼이 없는 삶을 가정해 보라.
그것은 삶이 아니라 고역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율이라도
거기서 쉼표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쉼은 그 자체가
멜로디의 한 부분이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저 그릇을 보라.

그릇은 가운데 빈 공간이 있음으로써
그릇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단지 덩어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지친 몸을 쉬는 방도
빈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지
벽을 이용하는게 아니다.

고로 텅 빈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유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삶의 빈 공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쉼은 더욱 소중하다.

붙잡고 있으면 짐 진 자요.
내려놓으면 해방된 사람이다.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유와 해방을 쫓아내는 사람이요.
스스로 노예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하필이면 노예로 살 건 뭔가?

이런 말이 있다.
"산은 나를 보고 산같이 살라하고,
물은 날보고 물처럼 살라하네"

산은 거기 우뚝 서 있으면서도 쉰다.
물은 부지런히 흐르고 있으면서도 쉰다.
뚜벅뚜벅 걸어가면서도 마음으로 놓고
가는 이는 쉬는 사람이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살찌게 한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
풍요와 자유를 함께 누린다.

쉼이란 놓음이다.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되받는
관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몸이 벗어나는 게 아니고, 몸이 쉬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지어 놓고,
그 지어놓은 것에 얽매여 옴치고
뛰지 못하는 마음의 쇠고랑을 끊는 것,
마음으로 벗어나고, 마음이 쉬는 것이다.

그러므로 쉼에는 어떤 대상이 없다.
고정된 생각이 없고, 고정된 모양이 없다.

다만 흐름이 있을 뿐이다.
대상과 하나되는 흐름,
저 물 같은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쉼은 대긍정이다.
오는 인연을 막지 않는 긍정이요
가는 인연을 잡지 않는 긍정이다.

산이 구름을 탓하지 않고,
물이 굴곡을 탓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 곧 긍정이다.

시비가 끊어진 자리.
마음으로 탓할 게 없고 마음으로 낯을 가릴 게 없는
그런 자리의 쉼이다.

자유와 해방,
누구나 내 것이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
그 길은 쉼에 있다, 물들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쉼에 있다.

작성자의 카페글 더보기
† ★ JACOBUS의 ROSARY 香氣 입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 사용비영리 사용변경금지변경금지
  추천(0) 스크랩 (0) 인쇄

기독교, 불교의 탄원기도 어떻게 보아야 하나

2009.11.16 22:41 | 길동무 얘기들 | 옹달샘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22292 주소복사



   우리의 기도 
         기독교, 불교의 탄원기도 어떻게 보아야 하나

기도란?

“나는 기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어느 종교철학자의 재치 있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종교사적으로 볼 때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 말보다 더 진실된 말일 수 있다. 기도는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가장 보편적인 종교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형태로든 기도가 없는 종교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우선 비는 것부터 머리에 떠올린다. 말하자면 ‘탄원기도(petitionary prayer)’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에는 이렇게 ‘해 주십시오.’하는 탄원기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사의 기도, 찬양의 기도, 참회의 기도, 용서를 구하는 기도, 중보기도, 식사기도. 관조적 기도 등등도 있을 수 있다.

기도하는 형식도 말로 하는 기도 뿐 아니라 북미 인디언들처럼 춤으로 하는 기도, 이슬람교인들처럼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하는 기도, 이슬람 수피파처럼 빙글빙글 도는 것을 기도로 여기며 하는 기도, 정통 유대교인들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하는 기도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종을 울리면서 하는 기도도 있고, 향을 피우거나 촛불을 켜놓고 하는 기도, 손을 움직이면서 하는 기도, 메카나 황궁 등 일정한 방향을 향해서 하는 기도나 단식을 하면서 하는 기도 등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탄원기도라 해서 틀릴 것이 없을 것이다. 물론 탄원기도라고 해서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큰 힘을 향해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하게 깨닫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은 그대로 의연히 받아들이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는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고 설치는 교만이나 오만을 없애고 나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하는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탄원기도가 자칫 잘못 이해될 때 크게 위험할 수 있다. 나의 온갖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기도하고, 그런 것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나의 기도가 효험 있구나,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지 기도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질 수도 있고, 혹시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나의 믿음이 모자라는 것 아닌가 의심거나 불만을 품게 된다. 이렇게 모든 것이 기도하기에 달렸다고 믿는 믿음으로 살아 갈 경우, 잘 못 사는 이웃을 보면 그것이 믿음이 없는 까닭이라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기도하지 않는 당사자의 업보쯤이라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특히 빌어도 우리 모두가 다 잘 살기 위해서 비는 일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되게 해달라는 식으로 비는 것은 개인주의적 이기심을 극대화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잘 믿고 그 댓가로 기도만 잘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신앙은 신앙을 장사꾼의 거래쯤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이런 것은 이른바 빌기 일변도의 ‘기복신앙’이 가져올 수 있는 몇 가지 피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 일부에서는 이런 빌기 기도를 권장하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 말로도 번역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는 “원하건대 주께서는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역대상4:10)하는 기도를 하고, 그렇게 되기를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가르친다. 기복적, 이기적 탄원기도의 전형적 예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경우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3천 년 전 알지도 못하는 어느 유대인 젊은이가 한 기도 한 자락을 그리스도인이 올려야 할 기도라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 종교 심리학자 올포트 교수도 이처럼 이기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도를 강조하는 종교는 ‘미성숙한 종교’라 했다. 기독교에서도 물론 ‘관조적 기도(meditation 혹은 contemplative prayer)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의 기도

초기 불교에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탄원 기도 같은 것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부처님도 동시대인이었던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와 마찬가지로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들이 우리의 소원을 아뢸 대상이거나 우리의 해방을 도와 줄 수 있는 힘 을 가진 존재일 수는 없다고 보았다. 물론 기독교의 신과 같은 절대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를 향해 기도하라는 말도 없었다. 결국 그의 마지막 유언처럼 부처님이 가신 후에는 부처님이 주신 가르침’을 스승으로 삼고 각자 자신의 해탈을 위해 스스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종교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전 역사를 통해 무엇을 비는 기도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대승불교로 들어오고 보살사상과 함께 ‘회향(回向, ari??mana)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우주적 보살들이 수많은 겁을 통해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여 쌓은 공덕이 넘쳐나는데, 이를 불쌍한 중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살들에게 그들이 가진 공덕을 나누어줄 것을 부탁하는 형식의 기도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여러 불보살에게 하는 기도의 시초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로서 대표적인 것은 염불과 참선이라 생각한다. 염불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한 군데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른바 ‘염불선’으로서의 역할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 희랍정교 전통에서도 염불과 같은 기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예수의 기도(Jesus Prayer)’라고 하는 것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말을 하루에 만2천 번 이상 외우는 것이다. 어느 러시아 젊은이가 긴 순례 길을 걸으며 예수의 기도를 실천하고 거기서 얻은 기쁨과 영적 체험을 그의 고백적 수기 에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 오강남 엮어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3 참조.)

참선도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종의 기도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직후 광야에 가서 40일간 금식하며 지냈다고 했는데, 금식하며 잠만 자거나 하느님께 뭘 해주십사하고 비는 것으로 40일을 보낸 것은 아닐 것이다. 분 명 깊은 선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더구나 복음서 기록에 보면 예수님이 자주 밤 새워 기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뭣을 부탁하는 청원 기도만이었다면 부탁할 것이 아무리 많아도 길어봐야 기껏 몇 분이면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밤이 새도록 기도했다는 것은 청원 기도 이상의 기도였음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선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모본을 보이신 기도 형태가 아닌가 보고 싶다.

한국 불자들의 기복신앙

한국 사찰에 가 보면 부처님 상 앞에서 108배 3천배를 하며 기도하는 불자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각자 기도하는 이유나 목적이 다르겠지만,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자녀들의 시험 합격을 비는 기도 같은 기복적 기도가 주종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이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 기도의 주종을 이루는 탄원 기도와 실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기독교나 불교가 한국에 와서 이렇게 탄원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복 종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재앙을 물리치고 복 받는 것을 종교적 삶의 최고 가치로 받드는 무속적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이런 탄원 기도가 정말로 효험이 있는 것일까? 정말로 예수님이나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가? 어떤 영국인은 하느님이 정말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라면, 영국의 온 국민들이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신이여 자비로운 우리 왕을 구하소서/존귀한 왕으로 오래 살게 하소서/신이여 왕을 구하소서.(God save our gracious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 God save the Queen!)”하는 국가를 부르는데, 이 기도도 응답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실제로 영국 왕가의 평균 수명이나 건강상태를 조사해 본 결과 일반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더라는 보고를 한 적도 있다. 기독교의 경우 목사가 병이 나서 온 교인들이 돌아가며 24시간 끊임없이 기도했지만 낫지 않을 경우도 허다하다.

하버드 대학 교수였던 허버트 벤슨 교수는 1802명의 심장 수술 환자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첫째 그룹은 기도를 해준다고 말해주고 기도해 주었고, 둘째 그룹은 기도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기도해주었고, 셋째 그룹은 기도해 준다는 말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해주지 않았다. 얼마를 지나서 결과를 조사해본 결과 둘째 그룹과 셋째 그룹은 차이가 없었다.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 준다는 사실을 안 첫째 그룹은 다른 그룹과 차이가 있었는데, 다른 그룹보다 현저하게 더 많은 합병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전혀 효과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전통적으로 기도에는 겸허한 자세를 길러주는 교육적 효과, 철학적 사색을 통해 초월적인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게 해주는 지적 훈련의 효과,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신비적 효과 등이 있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한 가지 비근한 예를 들면,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기도를 ‘끊임 없이’하는 경우, 나쁜 마음을 가질 틈이 없고, 그렇게 될 때 마음도 평안해지고 표정도 밝아지고, 건강해지고, 장사할 때 친절해지고 더 열심히 할 수 있고... 건강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인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이런 ‘축복’은 초자연적인 어떤 존재의 간섭을 가정하지 않고도 가능한 결과들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면서 아들의 합격을 비는 어머니의 기도가 효험을 얻을 수도 있다. 초조해 하는 어머니가 집에서 아들을 닦달하면서 아들을 불안하게 하면 아들도 입시준비에 방해를 받을 수 있지만, 어머니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게 되면 아들도 안정된 분위기에서 공부할 수 있고, 절에 가서 절하느라 스트레스도 풀고 건강해진 어머니는 그만큼 집에 와서도 더 밝은 표정을 보일 것이고... 등등의 효과를 쉽게 상정할 수 있다.

나가면서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불교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기도 형태는 염불과 참선이라 생각한다. 염불과 참선을 통해 의식의 변화(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은 진정한 의미로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라 건데, 한국 불자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웃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의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기도가 더욱 널리 실천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불교가 한국 종교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해 본다.

오강남 /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비교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 사용비영리 사용변경금지변경금지
  추천(0) 스크랩 (0) 인쇄



선택의 기준

우리는 자신의 직업이나 직책을 택할 때
일시적 수입이나 지위보다는
그 일을 통해서 참으로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한 결정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사회에의 공헌과
자기능력의 발휘를 기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긴 안목으로 보면
그러한 선택은 결국
경제적 수입과 지위의 향상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 김대중 잠언집 <배움>에서 -

저작자 표시비영리 사용비영리 사용변경금지변경금지
  추천(0) 스크랩 (0) 인쇄

우리가 물에서 어떤 가르침을 배워야 하는가?

2009.11.12 18:21 | 길동무 얘기들 | 옹달샘

http://kr.blog.yahoo.com/hamikal0929/22246 주소복사



          우리가 물에서 어떤 가르침을 배워야 하는가?

1. 정진(征進)--물은 항상 자기가 나아갈 길을 찾아 멈추는 일이 없다.
물은 그 앞에 바위가 놓여 있든 언덕이 가로막혀 있든 가다가 흐름을 멈추는 일이 없다. 앞에 물길을 막고 있는 것들의 틈새를 반드시 찾아내어 그 사이를 흐르거나 둘레를 돌아서 강으로, 바다로 쉼 없이 흘러간다.

2. 생명(生命)--물은 스스로 움직여서 다른 것을 또 움직인다.
생명체로 살아 있고 움직여 흘러가면서 살아 있는 것들을 키우고, 그 곁에 온갖 풀과 꽃과 나무와 생명체들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3. 극복(克復)--물은 장애를 만나면 그 세력을 몇 배로 한다. 그래서 물의 힘을 인위적으로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물줄기를 막아놓은 둑이나 저수지는 물을 다스리기 위한 지혜이지만 넘치도록 막으면 터져 흐른다.

4. 정화(淨化)--물은 스스로 맑아지려 하고 다른 것의 더러움을 씻어 준다. 또 맑고 더러움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이 물의 마음만큼만 될 수 있다면 득도(得道)의 경지에 들었다 할 것이다.

5. 덕인(德人)--물은 바다를 채우고, 때론 비가 되고 구름이 되고, 얼음이 되기도 하지만 그 고유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손에 돈을 쥐거나 권력을 누리거나 인기를 얻으면 쉽게 성품이 달라져 버린다. 어디에 가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이 곧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중국의 사상가 왕양명 -

저작자 표시비영리 사용비영리 사용변경금지변경금지
  추천(0) 스크랩 (0) 인쇄



                     < 간디와 히틀러 >

마더 데레사는 말하기를 "내 안에 간디와 히틀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간디와 히틀러는 동시대를 살다 간 거물이지요. 두 사람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참으로 컸습니다. 영향력의 크기로만 본다면 막상막하라 하겠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하늘땅만큼이나 다릅니다.

한 사람은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인도를 해방시킨 성자요, 다른 한 사람은 폭력으로 나치즘을 선양하려다가 조국과 자신을 파멸로 이끈 전범이지요. 한 사람은 적들한테서조차 존경을 받아냈고, 다른 한 사람은 측근들한테서조차 불신을 당했습니다.

1940년대 지구를 누군가 한눈으로 내려다보았다면, "하늘은 어찌하여 간디와 히틀러를 함께 냈는가!" 하고 탄식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모택동식으로 말해서, 하나는 정면正面교사로 다른 하나는 그에 짝할 반면反面교사로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을까요?

누가 뭐래도,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의 길을 걸었습니다. 굳이 분별하여 말하자면, 간디는 선善의 극단으로 걸어간 사람이었고, 히틀러는 악惡의 꼭지에 선 사람이었지요. 간디한테서는 선의 강물이 흘러나와 땅을 적셨고, 히틀러한테서는 악의 화염이 솟아올라 하늘을 태웠습니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그렇게도 다른 길을 가게 만들었을까요? 사물을 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틀러는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이것을 잡고 저것을 버리는 쪽으로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인류 발전을 위하여" 게르만 종족을 잡고 셈족을 버렸습니다. 반대로 간디는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의 다름에 얽매이지 않고 인류 전체를 형제로 여겨 우애를 나누는 일에 생애를 바친 사람이었지요.

히틀러에게는 죽여 없앨 사람과 살아남을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되었지만 간디에게는 그런 구별이 불가능했습니다. 그에게는 영국군 장성들이 적이면서 친구였는데,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잠시 '적'의 위치에 서 있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친구'였어요.

그의 목표는 적을 전쟁 마당에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상대하여 싸운 적이 있다면 폭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쓰는 폭력이었지요. 그러기에 억누르는 자의 폭력과 함께 억눌리는 자의 폭력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와 남, 빛과 어둠, 선과 악을 '다른 뿌리를 가진 둘'로 보는 관점에서 히틀러의 악惡이 나왔다면 나와 남, 빛과 어둠, 선과 악을 '다른 얼굴을 가진 하나'로 보는 관점에서 간디의 선善이 나왔다고 하겠습니다.

간디의 관점으로 보면 간디와 히틀러는 두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요, 히틀러의 관점으로 보면 간디와 히틀러는 근본이 다른 두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간디와 히틀러가 내 안에 함께 있다"고 말한 마더 데레사 수녀는 히틀러의 제자가 아니라 간디의 제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마더 데레사만 그런 것일까요? 데레사 수녀 속에만 간디와 히틀러가 함께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속에 간디와 히틀러를 함께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간디 속에도 히틀러가 있었다는 얘기올시다. 간디는 간디답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간디 속에 히틀러가 있었다면 히틀러 속엔들 간디가 없었겠습니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히틀러답게 그 사실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지요.

자, 문제는 결국 나 자신입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이 두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데레사 수녀는 자기 속에 있는 히틀러와 손잡기를 거부하고 간디를 향하여 살아간 분입니다. 그분이 전쟁반대운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면서, 누가 평화찬성운동을 한다면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 있었으리라.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내 안에 있는 히틀러를 상대하여 싸우느라고 내 안에 있는 간디를 오히려 못 본 척하는 너무나도 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내 안에 히틀러를 키우고 간디를 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지 않았던가?

이 무식한 과오에 대하여 크게 뉘우치고 돌아서는 마음으로, 이제부터는 그 누구와도 어떤 명분으로도 싸우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새롭게 다져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속의 간디를 키우고 히틀러를 약하게 하려면, 히틀러와 손잡기를 거부하고 간디와 손잡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 이현주의 생각 나눔 <오늘 하루>에서 -

저작자 표시비영리 사용비영리 사용변경금지변경금지
  추천(0) 스크랩 (0) 인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다음 페이지 다음 10번째 페이지
 
오늘 전체
방문자 892 1342817
구독자 0 108
댓글 0 155
참조글 5 743
최근 글
정신의 힘
내 그림자에게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오늘의 실상과 인간관계..
마지막 기도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joekr54
- UCC조아
- anfangman
- 블로그관리자
- 백만돌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