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친구인 두 노인이 마주 앉았다. 갑 노인이 을 노인에게 물었다. "자네, 저승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미쳤군! 그게 뭐가 좋아?"
그러자 갑이 정색하고 맞받았다. "이봐, 여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저승에 갔지?" 을이 화난 듯이 대답했다. "그야, 수도 없이 많지." "알건 아는구만. 그런데도 그곳이 좋은 줄을 모르다니!"
갑이 딱한 듯이 을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그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를 알 수 있지 않나." 을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ㅡ 중략 ㅡ 해 저문 뒤에 찾아오는 어둠인데도, 다음 해돋이도, 새벽도 없는 것, 죽음은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김없이 어느 날 찾아올 게 불 보듯 뻔한데도, 끝내 내 몫이어야 할, 정체를 볼 수 없는 그 무엇, 죽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물어도 물어도 끝이 없다. 빠져들어도 빠져들어도 바닥이 없는, 심연 같은 물음, 죽음은 그런 물음 같은 것이던가?
"한번 가면 그만인 인생!" "저승이 멀다더니 대문 앞이 저승일세." "눈 감으면 끝인 것을!" "그렇게 가버릴 것을 공연히...." "마지막 길, 기척도 없이 가버리고!"
흔히들 말하고 듣는 말이다. 허무가 안개처럼 서려 있다. 삶의 무의미, 생의 덧없음,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 허탈하다. 맥이 있는 대로 다 삭는다. 하지만 다른 분위기의 말들도 없지 않다.
"죽자 살자..." "죽기 살기로..." "죽으면 죽었지..." "사생결단하고..."
이 말은 또 뭔가? 허무의 독백들 앞에서 난데없이 웬 악지일까? 여기 언급되는 죽음에는 생기가 지글대고 있다. 삶의 악바리가 곧 죽음이라고 우길 기세다. 이 돌변은 변덕에 지나지 않는 걸까?
죽음을 두고는 우원법迂遠法(돌려서 말하기나 피해서 말하기)이 돋보인다.
떠나가다 돌아가다 세상과 하직下直하다 별세하다 서거하다 장서長逝하다 타계他界하다
모두 돌려서 말하기인 동시에 죽음을 '가는 것'에 빗댄 은유법이기도 하다.
숨지다 눈감다 밥숟가락을 놓다 영면永眠하다
이 말들은 죽음에 수반되는 여러 생리현상 가운데 어느 한 부분으로 죽음을 대변하고 있다. 제유법을 겸한 우원법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에 의지한, 이를 테면 '종교적인 우원법'도 있다.
입적入寂하다 적멸寂滅하다 성불成佛하다 왕생하다 극락 가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적인 우원법도 흔히 쓰인다.
천당 가다 주님의 부름을 받다 안식에 들다 선종善終하다
죽음 이외에 이렇게나 많은 우원법이 쓰이는 말은 없다. 죽음은 우원법의 천국이다. 한편 죽음이란 낱말과 더불어 인간이 꿈꾸어 온 사후 세계 역시 적잖은 우원법을 갖추고 있다.
저 세상 딴 세상 영계靈界 타계 극락 서방정토 천당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우원법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바로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이다.
첫째, 이 말들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나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바람이 담겨 잇을 것이다. 최대한 죽음 자체에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것이다.
둘째, 첫째와는 상반되게 죽음을 미화하고, 더 나아가 성화聖化하거나 승화昇華하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구원, 해탈, 해방 등의 개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 한마디, 한국인이 즐겨 쓰는 관용구 한마디에는 한국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세 번째 시각이 들어 있다.
"이래서는 죽어서 눈이나 감겠나?"
한국인에게 '눈을 감는 죽음'과 '눈을 못 감는 죽음'은 서로 다른 죽음의 범주이다. 죽어서도 감지 못한 눈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눈을 못 감는 죽음'이란 말을 쓸 때 우리는 죽음을 미완의 삶을 완성시키는 계기, 삶이 못다 한 것을 마저 일구어내는 단서로 가꾸고 싶은 것이다.
노년에 들어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에 대한 이 세 번째 생각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다.
-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