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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5/04
 

일본인이 정리한 연변의 문화대혁명사

2008.09.20 10:21 | ▒ 중국조선족력사상식 | 꼬꼬

http://kr.blog.yahoo.com/gogohua/704981 주소복사

아래의 글은 일본인이 정리한 연변 간사중의 문화대혁명 부분을 번역한것이다.




연변의 문화혁명형식은 반란파(한족) 대  실권파(조선족간부). 외지에서 온 모원신(모택동 조카)의 선동작용이 매우 컸음.조선족은 “지하로동당원” “조선특무”로 몰리우고 중조관계도 악화됨. 현재 알려진데 의하면 처형된 사람이 수천명에 달하고 투옥된자도 수만명에 달하였다고 함.

연변문혁사에 관한 서적이 아직 많지 못하다.연변에서 출판한 역사책은 항일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문혁사에 대해서는 기본상 침묵하고 있다.아마 문혁의 상처가 너무 깊었기 때문일것이다.



1967년.
1월초,연변일보의 일부분 조직과 연변대학학생조직인 8.27혁명반란단은 연합으로 연변일보와 연변인민방송국 영도권을 탈취.


1월18일 .  1.18유혈사건

8.27혁명반란단과 적대적인 홍기전투연군이 연변일보사를 포위하고 항의 개시.8.27조직의 연변일보사 철수를 요구.두 조직은 돌멩이와 몽둥이를 사용하며 격렬하게 싸움.

1월19일 , 1.19일 유혈사건

8.27혁명반란단은 홍기전투연군을 지지하는 시민 100명을 연변대학에 가두고 매질 함.그중 1명 사망,30명 부상.  1월23일,중공중앙은 군대가 권력탈취투쟁에 개입할것을 지시.2월부터 군대가 연변에서 권력투쟁에 개입함.
해방군3168 연변주둔부대의 선전대가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에 진주.

1월25일, 8,27 혁명반란단이 연변문화대혁명에 대한 영도를 선포함.

1월27일,  조선중앙통신상에서 홍위병의 북조선에 대한 공격을 규탄.
,。
1월, 주은래가 재차 주덕해를 보호.구실을 대여 군대병원에서 요양하게 함.



2월23일 ,연변일보에 대해 군사관제 실시.그후 1년5개월동안 연변일보는 신화사 전문만 실음.
2월말, 연변에 4대 조직이 성립.

문혁중 연변의 4대조직

홍색조반혁명위원회
8.27를 핵심으로 모원신이 조직한것이다. “타도 주덕해,요석(한족),전인영(한족)” 주장.극좌집단.


8.27홍색반란파

타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지지하는 본지방학생과 교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극좌조직으로 주로 한족중심.

로동자혁명위원회

홍기전투련군에서 일부분 분리되여 나와 형성됨. “타도 요석,김명한,남명학”주장. 주덕해를 지지하는 조선족조직.

홍기전투련군

원혁명반란단. 조선족 중심.


3월, 연변농학원 동방홍공사는 군부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동요하기 시작함.

3월6일, 연변대학농학원 전투사는 군부의 지지하에 동방홍공사로부터 권력을 탈취함.

3월11일, 심양군구의 비준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군사관제위원회가 설치됨.군사관제위원회는 모원신의 심복皐峰(한족)과 최해룡(조선족, 모원신의 심복으로서 조선족반란파중 최고 77년 실각)

3월하순,연변농학원에 진주한 군대가 갑자기 전투사에에 대한 지지를 포기함.전투사내부가 동요하기 시작, 일부분학생들은 동방홍공사에 가입함.


4월초,연변농학원전투사 해산.

4월 ,모원신이 재차 연변대학을 방문.

4월,주덕해를 비밀리에 북경에 보내 중앙정부의 보호아래 둠.
동방홍공사가 농학원의 최대 반란파조직으로 됨


7월10일 ,연변농학원  동방홍공사는 33독립단을 결성.

7월11일, 연변농학원33독립단의 한 학생이 반란파한테 살해됨.



7월22일 ,강청(모택동 부인))공개적으로 무장투쟁을 선동 함.

7월,연변대학의 무장투쟁도 더욱 격렬해짐.연변의학원의 많은 교사와 학생들은 실험실기구를 보호하기위해 각종 보호조치를 취함.도서관은 1천여권에 달하는 일본어의학 관계서적을 자택에 숨김.(당시 연변의학원에서는 일본의학서를 가지고 강의함.때문에 의학원의 신입생은 반드시 일본어를 학습해야 함.연변도서관에도 기술서를 중심으로 하는 대량의 일본어 서적이 소장되여 있음)

7월 27일, 연변주 군사관제위원회 회의 소집. 皐峰은  “ 연길시를 피로 물들이고 두만강을 넘어 고향에 돌아가자”라고 씌여진 전단을 가지고 노동자혁명위원회를 무함하고 처리방법을 토론함.

7월28일, 연변주 군사관제위원회 회의에서 皐峰은 노동자혁명위원회의 무기가 북조선에서 가지고 온것이라고 주장함.。
7월30일, 모원신이 권력을 장악한 연변주 군사관제위원회가 주덕해를 지지하는 노동자혁명위원회를 “반혁명파”라고 단정 지음. 모원신의 영향하에 홍색조반혁며위원회는 군부의 묵인하에 연변군분구 무기고에서 기관총,권총,수류탄 등 무기를 반출함.

7월30일, 홍색조반혁명위원회와 노동자혁명위원회 사이 무장투쟁 개시. 연길시 부르하통하강을 사이두고 서로 대치한 두 파벌은 격렬한 충돌을 일으킴.。
7월30일 이후는 룡정시 개산툰에서 무장투쟁이 계속됨.

8월2일 , 룡정시 개산툰에서 홍색조반혁명위원회는 경비초소의 기관총을 탈취한후 무차별 사격을 가해 노동자혁명위원회 성원 30명을 살해 함.

8월2일  ,  8.2 유혈사건.  연길의 두 반란파가 무장대를 조직하여  대규모 충돌을 일으킴.우전국과 민가가 불태워짐. 홍색은 공안국과 우전국을 점거.。
8월4일  8.4 유혈사건. 두 반란파조직 사이 투쟁이 연길에서 계속 됨. 신 8.27혁명반란단도 이번 무장투쟁에 참가함.

8월5일부터, 모원신의 지시하에  홍색조반혁명위원회의 무장대와 해방군 8개 중대가 노동자혁명위원회의 거점 연변의학원과 연변병원을 포위함. 군사관제위원회의 중개하에 담판을 진행했지만 결렬됨.

8월8일, 8.8유혈사건. 연길공원다리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16조 결정에 관하여”발표 1주년기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대열을 지어 행진하던 8.27혁명조반단학생 3명이 총격에 의해 사망,9명부상 됨. 이는 연변대학학생중 제일 처음으로 되는 유혈사건임.

8월10일 , 사진책“8.2  8.4 반혁명사건 실록---火!火!火!血!血!血!”가 전국에 발급.조선족들이 반혁명활동을 일으키려한다고 무함 선전.
8월 12~28일 “노동자혁명위원회의 반혁명폭란사건전시회”가 연길빈관에서 열림.

8월16일 백궁관사건

홍색조반혁명위원회가 연변의학원 숙사일부를 폭파하고 내부에 진입. 3시간동안의 총격전을 거쳐 홍색은 무장투쟁의 승리를 취득. 노동자혁명위원회의 3000명성원을 붙잡음.이번 무장투쟁으로 연변의학원학생 3명이 상망, 2명 부상. 8월 2일이래 무장투쟁중 53명이 사망하고 130명이 부상함.
당시 연변의학원과 연변병원입원부는 백궁관이라고 불리워짐.

8월18일 , 개산툰 국경부근에서 무장투쟁 발생. 홍색이 노동자혁명위원회에 총사격으로  몇명은 두만강을 헤엄쳐 북조선에 피난 함.

8월~  연변빈관 및 당학교에서 소집한  “ 림민호사건 전문심사조”에서 림민호연변대학교장이 매를 맞음.

10월14일 , 중공중앙에서 “대학,고교,중하교,소학교가 교실에 돌아가 혁명할데 대한 통지”가 발포.

10월 ,해방군436부대의 10명 군선전대가 연변의학원에 옴.

11월  , 연변농학원혁명위원회설립대회 소집,1만여명이 참가 위원회주임은 김금영.



1968년 권력탈취투쟁 완료…

2월 연변의 각 학교에 “해방군모택동사상선전대”가 진주(8월까지). 연길시주둔 모탄정위 석더을 대장으로하는 선전대가 연변대학에 진입.주둔 모부 영장 소시영을 대장으로 하는 선전대가 연변농학원에 진주.。
3월 이후, 연변농학원은 혁명위원회의 지도하에 “계급대오청리”를 개시.이 과정에서 3건의 자살사건 및,자살미수사건이 발생.

4월 특무(북조선간첩)사건

주경찰국,주검찰원,주재판소에서 연합으로 “계급대렬심사학습반”를 소집. 학습반중 51명조선족을 체포하고  북조선특무로 몰고 고문을 들이댐. 뿐만아니라 175명 조선족간부,경찰관이 투옥.그중 12명사망, 82명은 불구자로 됨.

7월 연변대학은 해방군 모택동사상선전대의 지도하에 “혁명대연합” 개시 공부회복.


8월 “연변일보”발행 허가.

8월18일 ,길림성혁명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가 성립되고 군사관제를 해제 함. 정당령도소조 조장에皋峰 , 부조장에 최해룡(조선족)

8월 말 , 주혁명위원회는 “연합노동자모택동사상선전대”를 연변대학에 진주 시키고 학교간부에 대해 비판투쟁을 전개.

8월29일 연합공인모택동사상선전데가 철수 , 석현종이공장노동자조직의 공인모택동사상선전데가 연변대학에 진주하여 영도권을 장악함.

8월29일 연변의학원에 노동자선전대가 진주.


9월7일 ,화룡팔가자립업국모택동사상선전대의 90여명 연변농학원에 진주.


10월12일 ,연변일보  “언어문제인가 아니면 조국을 배반하고  수정주의노선에 투항하는 문제인가?”라는 문장에서 조선어 순결론을 지지한 실권파(주덕해)의 언어정책을 비판하고 한어차용어를 긍정한 문혁파의 언어정책을 지지 함.

10월 연변주직속기관간부 80% 돈화연 5.7간부학교에서 노동개조를 받음.

12월21일 ,모택동이  홍위병의 농촌 하방을 지시.

12월 ,연변농학원 대부분 학생은 안도현농촌에서 재교육을 받음.

12월29일 ,연변대학혁명위원회성립,연변대학에 대한 영도를 개시.혁명위원회는 15명성원 ,간부대표1명,노동자선전대대표5명,해방군선전대대표3명,학생대표3명,교원대표2명,노동자대표1명으로 구성.주임에 왕문저(한족,군대표) 부주임에 최충빈(한족 군대표)와 장계생(한족 노동자대표)。
12월30일 연변의학원 혁명위원회 성립.

1969년
1월16일 연변대학에서 전교운동대회를 소집,혁명위원회주임 왕문전이 보고를 진행.조선족  간부,교사,학생,노동자들이 잔혹하게 박해 받음.이번에 비판받은 간부,교사 ,학생,노동자는 모두 41명,문혁중 비판투쟁받은 인원수의(124명)의 33% 차지 함.

2월10일 “연변대학 두갈래 노선투쟁사”편찬소조가 “연변대학두갈래 노선투쟁 개술”을 편집인쇄하여
연변대학의 前 17년을 전면 부정하고 17년을 “자산계급지식분자가 통치한 17년””이라고 규정.유독이 깊고 넙다”고 주장.

5월  각 학교 간부해방 개시.

5월19일, 연변의학원 간부해방 개시.

5월20일 ,연변대학 전교대회 소집,간부해방명단 공포.
6월,연변농학원 최재권원장,부원장 박경한 해방.

6월 ,연변농학원은 前 17년 역사를 “자산계급지식분자의 통치천하”에 대해 전면 부정 결정.。
7월29일, 연변일보 “민족문화혈통론을 철저히 비판하자”란 사론을 발표하고 조선족문화를「四旧」로 규정하고 부정.

9월 주덕해 북경에서 호북53농장으로 이송.

10월 길림예술학원연변분원이 페지되고 군대에 점용.
11월 12일  류소기 옥사。
12월 연변 학교간부 하방 개시

12월6일 연변대학 전교대회소집 하방필요가 있는 간부 교사 159명을 공포.그중92% 조선족.

12월 하순 ,연변농학원혁명위원회에서 최재권원장,박경한 부원장 등을 포괄한 100명간부 교사 하방명단 발표.

1970年

4월27일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 핵심소조 설립.조장 류련(한족),부조장 최해룡(조선족)

4월, 왕문전이 “신연대”에 “리의일을 타도하고 신연대를 건설하자”를 발표,주자파의 활동이 연변대학에서 재차 살아나고 있다고 주장. 이 문장을 비판한 수학학부 교사 리성우는 비판투쟁을 받음.


4월5일~  주은래수상 조선방문 , 중조관계복원.

7월14일 연변대학제1부교장 림민호 장기적인 박해로 67세를 일기로 서거.가족들이 림민호부교장의 사망소식을 학교측에 연락했으나 “우리와 무관하다”란 답복만 받음. 가족은 유골을 소달구지로 공동묘지까지 운반하고 묻음.

1971년 문혁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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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8)-청산리대첩3

2007.04.10 14:04 | ▒ 중국조선족력사상식 | 꼬꼬

http://kr.blog.yahoo.com/gogohua/704749 주소복사

 

고동하강반에서 일본군 또다시 녹아나고 반일부대 “반토벌”전서 대승리 거둬
 
백성들의 일편단성
“청산리전역을 비롯한 모든 반일무장투쟁은 연변인민들의 생사존망을 위한 일이였습니다. 일제가 연변에 침입하여 <토벌>을 감행한 것은 반일무장부대만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반 조선족에 대해 탄압하고 조선족들을 저들의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한것이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은 사명감을 안고 저들의 아들들을 반일무장부대에 보냈으며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각적인 행위였습니다. 일본침략자를 반대하는 것은 또 조선족만의 리익을 위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한족들도 청산리전역때 생명을 무릅쓰고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운선생은 청산리전역시 한족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들이 반일무장부대를 위해 군자금과 식량공급을 부담했으며 정보도 제공하고 길안내도 나서주었다고 말하면서 “특히 조선족녀성들이 어랑촌전투때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총알이 귀전을 스치는 최전연진지에까지 음식을 날라다 준 사적은 무척 감동적입니다. 그녀들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음식먹을 시간여유가 없는 투사들의 입에 밥을 떠넣어주면서 격려했지요. 실로 눈물없이는 들을수 없는 사연입니다”고 하면서 격동을 금치못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형을 당시의 “독립신문”은 “녀자의 일편단성”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이 지방에 있는 부인들은 애국하는 일편의 적성(赤誠)으로써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위험을 모(冒)하고 탄우가 분분(紛紛)한 전선에 용진(勇進)하야 전투에 피로한 군인들을 공상(供償)하며 위로하였다.
어떤 군인들은 분전망식(奔戰亡食)하야 진작 응식(應食치)않은 시(時)에는 부인들이 울며 권하기를 제씨(諸氏)가 만일 차(此)를 식(食)치 않으면 우리는 사(死)로써 귀(歸)치 않게했노라 하야 기어이 취식(就食)하도록 하야 일반군인으로 하여금 큰 위안을 받게 하였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리범석도 부녀들의 이런 헌신적인 지원에 대해 자신의 회상기 “우등불”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계속되였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가지고 비발치는 총알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덩이 두덩이 동지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린이를 기르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로...그 얼마나 성스러운 사랑이며 고귀한 선물이랴! 그 사랑 갚으리, 이 목숨 다 하도록! 우리는 이 산과 저 산으로 모든 것을 잊은채 뛰고 달렸다.”
 
고동하전투
어랑촌전투를 끝낸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련합부대는 50명씩 소부대를 지어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면서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맹개골시거우전투, 천보산전투 등을 벌리면서 비록 소규모였지만 모두 승전을 올리여 수많은 일본군과 군수품을 로획했다.
 
천보산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고있던 일본수비대 한 개 중대는 북로군정서군에게 련속 2차례나 공격받았고 홍번도련합부대에게 1차례의 공격을 받아 만신창이 되기도 했다. 하여 일본군은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긴급증원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1개 대대의 병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투중에서도 공동하전투가 가장 치렬했고 규모가 큰 전투였지요. 그리고 고동하전투는 전반 청산리전역이 마지막 전투입니다. 1920년10월25일 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진행된 이 전투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 이이노추격대의 야습을 다시 반격한 반야습전인데 많은 일본군을 섬멸했습니다. 이번 전투는 토벌군의 총사령인 일본군 19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줴친 <홍범도, 김좌진 등 불령선인담을 근절>하겠다고 한 호언장담이 무너지고 토벌계획이 파탄되는 최후는 전투였습니다.”
 
고동하전투는 간고한 전투였지만 적을 통쾌히 무찌른 전투였다고 박창욱교수가 말한다.
홍범도, 김좌진 부대를 단숨에 섬멸하려했지만 처처마다에서 골탕을 먹은 일본군은 고동하방면으로 퇴각한 반일부대의 뒤를 미친 개마냥 쫓아왔다. 그러나 봉밀골안을 50시간동안이나 헤매이면서 골골마다 샅샅이 들췄지만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이에 악이난 일본군은 혈안이 되어 고동하기슭을 훑기시작했다.
 
고동하는 로령동남측에서 발원하여 화룡경내의 와룡을 거쳐 안도경내로 흘러들어가는데 송화강수계에 속한다. 고동하가 화룡경내로 흐르는 길이는 53.5킬로메터, 만족어로 물결이 사품친다는 뜻이라고 한다. 홍범도부대를 찾아 헤매던 일본군 아이노소좌가 인솔하는 추격대는 10월25일 밤 10시에 고동하곡(오동양차 남쪽, 지금의 고동하림장남쪽) 10키로메터 부근에서 우등불을 피워놓고 숙영하고있는 홍범도부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홍범도부대(북로군정서부대의 50여명을 포함) 350여명은 고동하기슭에서 일본군이 포위하여 오는줄도 모르고 고즈넉하게 숙영하고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가에 모여 휴식하고있는 반일전사들의 모습이 우등불화강으로 하여 어두운곳에서는 너무 뚜렷이 알렸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인차 부대를 전투대세로 정돈하여가지고 2개 소대를 돌격대로 홍범도부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하였다.
 
10시30분, 일본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환한 화강속에서 아무런 준비 없었던 홍범도부대는 적들의 맹공격에 엄중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전장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대원들을 재빨리 고동하기슭에 솟아있는 절벽가로 철퇴하라고 명령했다. 전사들은 비호마냥 날래게 절벽을 타고 올랐다. 반일부대가 차지한 절벽은 량쪽으로 고동하가 사품치며 흐르는 깎아찌른듯한 절벽이였다. 나무까지 빼곡이 솟아있는 절벽에서 내려다보니 금방까지 차지하였던 우등불가가 환히 바라보였다.
 
최후의 결전
일본군은 우등불가를 점령한후 대승이나 거둔 듯 주위 산을 향해 헛총질을 하면서 우줄렁거렸다. 일본군의 일거일동이 한눈에 안겨오는 절벽가에 몸을 숨긴 반일부대 장병들은 홍범도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잽싸게 총을 휘둘러 우등불가에서 우줄렁거리는 일본군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반습격을 당한 일본군은 우등불가에 나가 척척 쓰러졌다.
 
그때를 홍범도장군은 이렇게 회억했다.
처음 일본군은 마적들을 길안내로 반일부대를 찾아 우등불을 쬐이는곳을 향하여 속사포를 발사했다. 이에 불을 쬐이던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였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부대는 날새도 얼씬 못할 바위에 올라가 날 밝기를 기다리면서 우등불을 놓은곳을 내려다보니 적들이 다니는 것이 보였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우리들이 우등불가를 차지한 적들을 향해 총질하니 누렇게 쓰러졌다. 놈들이 아군이 있는곳으로 기여드는 것을 겨냥하여 총탄을 퍼부으니 쓰러지는 놈들이 수십명이 되었다. 기병이 달려올라오는 것을 또 쏘아 눕히니 한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주동을 차지했던 일본군은 삽시에 피동에 빠지면서 무리죽음을 당했다. 당황해난 적들은 공격을 멈춘후 부근의 1143고지에 올라가 있다가 날이 밝게 되어서야 이젠 살았다고 안도감으로 낯에 희열을 나타냈다. 그러나 다시 공격하려고 보니 홍범도부대는 벌써 감쪽같이 철퇴한후였다.
 
고동하전투를 마지막으로 홍범도련합부대와 김좌진북로군정서부대는 26일 낮부터 일본군 추격대의 “포위토벌”을 완전히 벗어나면서 토벌계획을 철저히 파탄시켰다. 결국 1992년10월21일 아침부터 10월26일 새벽까지 6일간 걸쳐 진행된 청산리전역은 10여차의 전투를 반복하면서 반일부대의 “반토벌”대승리로 끝났다.
 
“청산리전역의 승리는 조선족뿐만아니라 중국인민들의 반일의식을 고무시켰습니다. 중국각지의 신문들은 련속하여 청산리전역의 소식을 보도하여 민중들의 사기를 고무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범한 민중들의 반일의분을 격발시켰는데 특히 각지의 청년학생들은 집회와 시위운동을 조직하고 일제의 침략을 성토하면서 일본침략군으로 하여금 하루속히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나섰습니다. 연길, 훈춘, 화룡, 왕청, 동녕 등 연변의 5개 현 대표들은 외교관계를 통하여 일제를 중국경내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강력히 제기했으면 안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고 3번이나 외교부에 청원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일제의 만행을 저지시키지 못했고 결국 반일부대에 대한 <토벌>이 조선족민중에 대한 대참안으로 이어지는 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박창욱선생의 개탄의 목소리였다.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7)-청산리대첩2

2007.04.10 14:00 | ▒ 중국조선족력사상식 | 꼬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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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전술에 속은 침략군 저들끼리 싸우고 홍범도 김좌진 배합작전해 우세한 적 물리쳐
 
완류구전투
어랑촌부근에 집결되여있던 홍범도련합부대는 천리봉을 중심으로 각 곳에 배치되여있으면서 군사훈련, 군인모집, 량식, 복장준비 등을 다그쳤다. 당시 홍범도부대 전사들은 누른색군복을 입고 붉은 줄을 뛰운 두리모자를 썼는데 완류구골짜기에서 일본놈모형을 만들어놓고 “쏴총”구령을 부르면서 기세당당하게 사격훈련을 했다.
 
홍범도부대가 어랑촌부근에 있다는 정보를 수집한 아즈마지대는 이도구로부터 곧추 어랑촌에 추격해온후 어랑촌부근에다 본부를 설치했다.
 
“아즈마는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21일 진공을 발동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천리봉에 은페시켰습니다. 홍범도장군의 일지에 의하면 21일에는 전투가 없었습니다. 22일 아즈마는 부대를 이끌고 남완류구로 들어갔고 천보산에 있던 이이노부대는 우회하여 홍범도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량쪽으로 협공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천보산을 떠난후 길을 잃은 이이노부대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22일 새벽에야 북완류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남북 두갈래로 덮쳐드는 일본군<토벌대>를 주동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완류구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홍범도장군은 앞뒤로 포위하려는 적들의 시도를 미리 알아차리고 부대를 남완류구와 북완류구간의 량쪽 등마루에 배치하고 기다렸다. 이런줄도 모르고 일본군 아즈마지대의 예비대는 남완류구를 따라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찾아 골짜기로 올라왔다. 같은 시각 이이노부대는 남양촌숙영지를 떠나 이른 아침에 강을 건너 북완류구를 따라 들어왔다.
 
적들이 다가오자 홍범도장군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령마루 량측 산허리에 매복해있던 련합부대의 장병들은 두갈래로 덮쳐드는 적들을 향해 동시에 불벼락을 안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반격했다. 이렇게 아침 7시20분에 시작된 전투는 11시까지 4시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싸움이 한창 격렬해질 때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지휘하여 교묘하게 진지에서 살짝 빠져나와 아즈마지대 예비대의 측면에 피해서게 했다. 고지에 먼저 오른 적 예비대는 돌연히 북완류구쪽으로 올라오는 이이노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이이노부대는 예비대를 홍범도부대인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이노부대의 공격을 받은 예비대는 이이노부대를 도리여 홍범도부대인줄로 알고 맹렬히 반격을 가했다. 이리하여 적들은 저들끼리 맞붙어서 죽을둥살둥 모르고 쏘아댔다.
 
저들끼리 한창 싸우는 것을 구경하던 홍범도부대는 적 예비대의 뒤통수를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적 예비대는 홍범도부대와 이이노부대의 “협공”속에서 거의 전멸되여버리고 말았다. 홍범도부대는 적들이 미처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을 때 전투에서 물러나 봉밀구방향으로 철퇴했다.
 
“완류구전투에서 홍범도련합부대는 7명이상의 손실을 보았고 적들은 400여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최홍빈) 400여명의 적을 소멸한 홍범도부대는 천수평방향으로 퇴각하다가 김좌진부대가 싸우는곳에 이르게 된다. 한편 완류구에서 적들끼리 물로뜯고 하던 일본군은 드디여 홍범도부대를 추격하다가 12시30분에 어랑촌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어랑촌전투
백운평전투에서 승리한 김좌진장군은 북로군정서을 이끌고 밤도와 강행군하여 원 계획대로 10월22일 새벽 2시30분에 와룡구 갑산촌에 도착, 이른 아침밥을 지어먹었다. 여기에서 김좌진장군은 일본군 한 개 기병소대 40여명(리범석의 회억에는 한 개 중대 116명이라고함)이 천수평에 주둔하고있다는 정보를 당지 주민들로부터 제공받은후 인차 천수평전투를 조직했다.
 
북로군정서군 려행단(제2제대) 80여명은 갑산촌에서 떠나 산발을 타고 천수동 남산에 이른후 적의 동정을 살폈다. 때는 아침 5시경, 적들은 반일부대가 포위해 들어오는 것을 조금도 모른채 깊은 잠에 곤드라져있었다. 부대가 적을 포위하고 습격하려고 할 때 아군의 후방에서 누군가 부주의로 오발을 하였다. 총성은 적들을 깊은 잠에서 깨여나게 했다. 지체할수 없었던 려행단 전사들을 맹호마냥 마을을 습격했다.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적들은 하나, 둘 반일부대전사들의 총탄에 맞아 나뒹굴었다. 이번 습격전에서 적 4명이 본부가 있는 어랑촌으로 도망친외에 전부 소멸되였다.
 
도망쳐간 적 4명이 본부에 가 보고하면 대부대가 인차 공격해올것이라고 예측한 김좌진장군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 된다고 판단하고 일부 부대를 서남쪽 3리남짓 되는 산고지에 파견하여 우선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하고 주력부대는 야계골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행동을 개시했다.
 
아니나다를가 얼마후 적군 제27기병련대주력과 일부 보병들은 산포까지 동원해가지고 가노대좌의 지휘하에 천수동골짜기어귀에 나타났다. 반일부대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대량 섬멸했다. 그러나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미친 듯이 반일부대의 고지를 향해 진공했다.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하는 한편 본부가 있는 아계골로 퇴각하였다. 9시부터 진행된 전투는 반일부대와 일본군과의 고지쟁탈전이였다. 먼저 874고지를 차지한 반일부대는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의 공격을 한체례 또 한차례 물리쳤다.
 
몇차례의 진공에서 실패한 적들은 일부 기병대로 반일군의 진지를 우회하여 반일부대의 우측을 공격하려 시도하였으나 그것마저도 려행대의 집중사격으로 실패하고말았다. 전투는 계속되였고 점차 가렬한 백병전으로 번져나갔다. 아즈마소장은 기병 제27련대와 야포병 제25련대 제1대대의 병력까지 출동시켜 보병부대와 배합하여 작전하면서 발광했다. 전투는 점차 수량상, 장비상 절대적으로 적들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반일부대는 비전투원까지 동원되여 최후의 결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전투는 오전 11시를 이어 계속되였다.
 
12시30분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따라 추격하던 이이노부대가 이 전투를 당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전투에 투입한 일본군은 기병대 약 250명, 예비대 약 600명, 이이노부대 약 100명 합계로 1000명좌우였다.”(최홍빈) 반일부대전사들은 목숨을 내걸도 결사적으로 항격했으나 어쩔수 없이 점점 밀리우게 되었고 희생자도 늘어났다.
 
바로 이때 우측 산마루로부터 콩볶듯한 총소리가 울려왔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적들이 갑자기 쑥대넘어지듯 마구 쓰러졌다. 순식간에 적아간의 격전사태가 급변했다.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이 바라보니 홍범도장군이 거느린 련합부대 장병들이 적들을 향해 사격하고있었다. 완류구전투에서 승리하고 주동적으로 철퇴한 련합부대는 봉밀구방향으로 이동하던중 북로군정서군이 전투하는 야계골로 들어섰던 것이다. 홍범도부대는 완류구전투에서 큰 손실을 보지 않았기에 원래의 병력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었다. 홍범도부대는 야계골에 들어서자 김좌진부대가 차지한 고지 옆 그보다 좀 더 높은 산고지를 점령하고 김좌진장군을 향해 진공하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던 것이다. 북로군정서군의 장병들은 눈물겹도록 반가와 환성을 올리면서 적들을 무찔렀다.
 
홍범도부대의 참전은 김좌진부대에 대한 적들의 진공에 막대한 곤난을 주었다. 적들은 방법없이 부대를 분산하여 홍범도와 김좌진부대를 진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투는 저녁 7시 반까지 계속되였다. 전투장에 어둠이 깃들자 적들이 진공이 즘즘해졌다. 이 기회를 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의 련합군이 점령한 고지에 옮겨간후 어둠을 타 부대를 나누어 감쪽같이 퇴각했다.
 
“어랑촌전투는 청산리전역에서 가장 큰 전투입니다. 백운평전투를 서부전선의 첫 시작이라고 한다면 어랑촌전투는 대회전입니다. 보시다싶이 홍범도, 김좌진 등 반일부대의 주력과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들간의 대접전이였으니깐요. 그뒤를 이어 천보산전투, 만기구전투, 맹가골서고전투, 고동하전투 등 여러차례 전투가 있었는데 이 모든 전투는 다 아군이 철퇴중의 전투였습니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6)-청산리대첩1

2007.04.10 13:57 | ▒ 중국조선족력사상식 | 꼬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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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에 든 침략군 삼단처럼 쓰러지고 반일부대 백운평서 첫 승리 맞아
 
결전전야
화룡시 부흥향 청산리마을에서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일명 증봉산)이 커다란 베개마냥 뭇산의 두령으로 덩그렇게 누워있는 것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마을어구의 작은 산언덕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기념비는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60메터의 굉장한 화강석으로 다듬어 세웠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장쾌했다. 석비앞면에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조한문자로 새겨져있었고 밑면에는 일제와 격전을 벌리고있는 반일무장전사들의 군상이 새겨져있다.
 
청산리마을에서 해란강상류를 향해 4~5리쯤 올라가면 유명한 백운평 참안지가 나타난다. 찬찬히 살펴보면 불에 그을린 기초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지금은 황페한 쑥밭으로 되어버렸고 벌목공들이 거처하는 귀틀집이 있을뿐이지만 당년에는 몇십호가 오붓하게 모여살던 조선족마을이였다.
 
가리마처럼 뻗은 산길을 따라 산을 계속 오르노라면 청고운 개울물소리가 더욱 청쾌한 것 같다. 이렇게 6-7리 더 올라가면 발밑 낭떠리지 아래에 맑은 개울이 여울치며 흐르는 작은 소를 발견할수 있다.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흐르던 개울물이 락차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소를 이루었다고 하여 직소택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소이다. 물론 봉오동전투에서 혼쌀이 난 일제 륙군소좌 야스가와가 지휘하는 73련대 선봉부대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에 의해 전멸되다싶이 한곳이여서 더 이름을 떨친곳이기도 하다.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던 반일무장부대들은 일제의 <토벌>에 대비하여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의 반일무장부대의 이동정황을 설명해주었다. 봉오동 전투후 명월구(묘구)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홍범도가 지휘하는 반일부대는 안도현 백두산록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21일경에는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이란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있던 안무가 인솔하는 국민회군은 8월31일 안도현방면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말경에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군부는 초모정자와 탁반구를 거쳐 9월말경 왕청현 라자구에 도착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은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월12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도착하였다. 10월 2일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10월 14일 간도침략을 선언하고 16일에는 연길도윤에게 17일 0시를 기하여 간도에서 반일부대 “토벌”의 군사행동을 시작함을 통고하였다.
 
룡정, 국자가, 투도구 방면의 “토벌”을 책임진 아즈마지대는 10월 17일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가 어랑촌, 청산리부근에 주둔하고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월 18일에 부대를 나누어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와룡구 어랑촌부근에 있는 홍범도부대를 “토벌”할 목적으로 부대를 움직였다. 이렇게 되어 일본침략군과 반일부대의 청산리전역을 불가피하게 되었다.
 
“전투를 앞둔 10월19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 수뇌자들은 묘령에서 일본침략군의 <토벌>에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하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주전파와 피전파간에 론쟁이 붙었는데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이 력량을 보존하려면 절대 일본주력부대와 결전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피전책을 취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하여 북로군정서군은 왕팔어구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저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청산리쪽으로 철퇴하게 되었습니다. 부대는 이튿날 백운평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10월17일 아즈마지대장의 작전명령을 받은 야마다련대는 좌우종대로 나뉘여 좌종대는 야먀다대좌가 직접 거느리고 팔가자, 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에 청산리에 도착하였으며 우종대는 나까무라대대장이 인솔하고 이도구를 거쳐 봉밑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군의 북쪽 퇴로를 차단하고 좌우종대와 책응하여 북로군정서군을 포위하려 시도하였다.
 
백운평전투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장 리범석은 김좌진장군의 지령에 좇아 직소부근에 부대를 배치,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적을 제어하면서 본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려 했다. 하여 교성대 200여명을 직소택량면에 매복시키고 리범석은 정면에서 전반 전투를 지휘하게 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이 포치한 매복진은 좌우 량켠에 톺아오르기 힘든 산이 있고 그 사이에 끼인 골짜기는 20-30메터 되나마나하고 넓은곳이라야 40-50메터밖에 안되는, 매복전에 더없이 리상적인 장소였다.
 
때는 상강절기를 앞둔 마가을,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은 한기가 뼈속을 파고드는 추위속에서 밤을 패야 했지만 래일의 격전을 생각하면서 밤을 패야 했지만 래일의 격전을 생각하면서 긴장한 마음을 도사려야 했다. 드디여 동녘이 푸름이 밝아오기 시작하더니 금빛해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창살마냥 비끼여들었다. 몸에 락엽을 뒤집어쓰고 지루한 밤을 보낸 전사들은 긴장한 마음으로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협곡 량켠 산기슭에 반일부대 용사들이 매복해있으리라고 생각도못한 침략군은 흔들먹기리면서 좁은 산길을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월강추격대”를 거느리고 들어왔다가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야스가와소좌가 이번에도 선발부대 한 개중대 90여명을 거느리고 죽음의 포위망속으로 기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서쪽2킬로메터 지점인 공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이 밤에 숙영했던 곳과 60여개의 불무지흔적을 발견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한줄로 쭉 늘어서서 북로군정서군의 행정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땅!”
연성대장 리범석의공격을 알리는 첫 총소리가 산곡간을 찢으면서 맵짜게 울렸다. 앞뒤 산마루에 매복해있던 200여개의 총구에서 삽시에 불벼락이 터졌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돌연적인 습격에 당황해난 적들은 사면으로 날아드는 총탄을 피하느라 갈팡질팡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적들은 대응사격으로 발악도 해보았지만 반일부대의 매복지점을 판단할수 없어 헛총질만 할뿐이였다. 코앞에다 적을 둔 반일부대는 복수의 총탄을 여지없이 내뿜었다. 전투는 속결전으로 끝났는데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다.
 
전투에서 적군 90여명이 거의 소멸되다 싶이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이 제1제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동하면서 제2제대에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할 것과 다음날 새벽2시전에 봉밀구 갑산촌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좇아 제2제대는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한근원중대를 후위로 안도 로령으로 철퇴하는것처럼 하다가 급전환하여 밀림을 헤치고 북상하여 밤도와 갑산촌으로 철수했다.
 
청산리대참안
백운평전투에서 참패를 본 일본침략군 야마다련대는 반일부대가 안도현쪽으로 후퇴할 줄 알고 추격하다가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자 오후 2시에 추격을 중지하고 되돌아와서 그 분풀이로 무고한 백운평백성들에게 “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은 모든 집을 불살라버렸고 보이는 사람마다 죽이였으며 지어 어린애마저 생매장하거나 총으로 쏘아죽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 날 외지로 친척방문 갔던 두 사람이 살아남고는 다 살해 되였다고 한다.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0, 60,세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 세대당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참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족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뿐만아니라 그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
“목격한 사람의 말에 따라면 그 당시 백운평에서 사흘동안 연기가 피여올랐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적들은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해 수많은 조선족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무고한 백성을 죽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에 차 하는 말이다.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15)-“훈춘사건”

2006.12.11 11:26 | ▒ 중국조선족력사상식 | 꼬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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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병구실 만들기 위해 조각한 가짜사건 세상을 놀래운 경신년 대참안의 도화선
 
음험한 획책
“일제는 연변반일무장대오가 저들 정규군을 참패시킬만큼 력량인 줄 몰랐지요. 봉오동전투후 일제는 깜짝놀랐지요. 반일무장대오를 업신보고 제멋대로 봉오동골로 진격했다가 호된 참패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날로 장대해지는 반일무장대오를 소멸하기 위하여 일제는 대량의 정규군을 연변에 파견하여 항일무장대오를 소멸할 획책을 꾸미게 됩니다. <훈춘사건>도 그중 하나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가 조작한 “훈춘사건”을 설명하면서 “훈춘사건”은 오래전부터 꾸며온 음모였다고 말한다.
 
“3.13”운동후 조선족지구에 건립된 수많은 반일무장단체와 그들이 진행한 반일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5월 상순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 장작림과 일중공동“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과 간도일대의 조선족반일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1920년7월16일, 봉천 총령사관 아까쯔까총령사는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측 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고문 사이또가 동행하며 중국군대가 토벌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도 참가할수 있게 할것”을 결정하였다.
당시 길림성당국은 일본군의 출병은 주권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로 인정하고 단연히 거절하였으며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일제는 근본적인 토벌을 가하려면 일본군을 주체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직접출병의 계기를 마련하는 음모를 꾸미였다.
 
피로 물든 훈춘성
1920년9월12일 아침 5시경, 갑작스러운 총소리가 고요한 훈춘성의 정적을 깨뜨렸다.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지대에 둥지를 틀고 있던 진동, 만순을 두목으로 하는 훈춘현성에 쳐들어왔다. 마적두목 만순은 친일 비적 코산의 영향밑에서 활동하고있으면서 코산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는자였다. 만순은 코산의 말이라면 뭐나 다 들었다. 코산은 일본군 간첩인 야마모도 가꾸꼬를 애첩으로 데리고 살고있었다.
이날 동북쪽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경찰서를 진공했고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륙군병영과 헌병병영을 진공, 현공서를 포격했다. 소규모의 마적들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민간에 덮쳐들어 살인, 방화, 략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마적들은 가는곳마다에 불을 놓아 훈춘시가지는 삽시에 화광이 충천하고 자지러진 총소리로 아비귀환이 되고말았다. 당시 훈춘시내에는 관병 270여명이 있었으나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지라 간신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졸히 응전할뿐이였다. 길림륙군 공병영 영장 정기창령사관과 외국인상점을 보호했고 륙군 제2려 제2퇀 제2영 영장 오은성은 대오를 두갈래로 나누어 서쪽성문과 북쪽성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세 번이나 진격했지만 마적들의 맹렬한 사격으로 후퇴하고말았다.
 
전투가 2시간 남짓 진행된 다음 마침내 마적들은 대오를 거두어가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길장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일본경찰서, 령사관은 아무런 손실도 없었다. 랍치된자는 화인 80여명, 한인(韓人)6명이며 200여간의 가옥이 불타버렸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훈춘사건”이다.
 
“일제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훈춘습격이 아니였습니다. 출병구실을 만들자는것이였지요. 그런데 마적들은 일본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으니 일본놈들은 안달아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 다시 훈춘을 습격하게 하였습니다. 제1차 ‘훈춘사건’이 일어난지 20일밖에 안되는 10월2일 새벽4시경 만순을 괴수로 하는 마적무리들은 진동패거리와 합세하여 400여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훈춘을 대거 진공했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2차“훈춘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기관총 1정과 산포 1문을 가지고있는 마적들은 동서 두 갈래로 나뉘여 성문에 기관총사격을 들이대면서 성안을 마구 포격했다. 서대문으로 들어온 토비들은 시킨 듯이 곧바로 일본령사관에 달려들었다. 비록 중국경찰들이 령사관을 호위하고있었지만 마적들의 기관총과 양총의 화력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담장을 폭파한 마적들은 물밀 듯 쓸어들어 령사관에 불을 질렀다.
 
동대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관병들의 방선을 돌파하고 상부지에 돌입하여 사람만 보면 죽이고 닥치는대로 빼앗고 불을 질렀다. 4시간 남짓 발광하다가 100여명의 사람을 랍치하여가지고 호록산방향으로 퇴각했다. 이날 마적들은 일본령사관 경찰서장과 조선인 순사1명, 재향군인 1명을 죽인 외에 일본인 남녀 10여명을 살해했다.
 
“경신년대학살”의 도화선
“제1차 ‘훈춘사건’이 있은지 20여일만에 제2차 ‘훈춘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고 또 제2차‘훈춘사건’에서 아무런 ‘경제적’의의도 없는 일본령사관을 들이쳤다는 것은 그 어떤 ‘정치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음모라는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닐수 없다.”(심영숙“훈춘사건”)
일제는 이번 사건을 저지른 비적들속에 로씨야홍군, 중국군대, 불령선인들이 있었다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여러 면으로 출병구실을 조작하였다.
 
“훈춘사건”은 구실에 불과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조선 라남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19사단 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명령을 내려 온성부근에 주둔하고있는 아베대대를 경원군 훈융에 대기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베가 거느린 보병 한 개 중대와 기관총 한 개 소대가 제일 먼저 두만강을 건너 훈춘으로 출동하였다. 뒤이어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제38려단장 이소바야시가 령솔하는 이소바야시지대, 보병 제76련대장 가무라가 령솔한 가무라지대, 제37려단장 아즈마가 령솔하는 아즈마지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훈춘, 왕청, 룡정으로 진격하였다.
 
10월9일, 일본 륙군대신은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사령관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게 간도출병작전명령을 하달했다. “훈춘사건”은 마침내 “경신년대토벌”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군은 반일단체들이 북만에로의 탈출을 견제하기 위해 할빈에 주둔하고있는 관동군 제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거느리는 야스니시지대를 파견하여 해림을 중심으로 한중동철도연선에서 북을 철퇴하는 반일부대들을 막게 하였다. 일본군은 또 로씨야 씨비리에 출병하였던 제11사단의 보명 한 개 대대, 기관총대, 기병1개 소대, 공병 반개 중대의 병력으로 투문자지대를 구성하고 훈춘동부의 중로변계에서 반일무장부대가 로씨야 연해주일대로 이동하는 것을 제지할 임무를 맡기고 10월 19일 국경을 넘어 훈춘 춘화지구의 초모정자, 토문자 등지에 진격하게 하였다.
 
일본군 제13사단은 하네이리대좌의 지휘밑에 보병1개 대대, 기병1개 련대, 포병 1개 중대로 하네이리지대를 구성한후 10월 19일과 20일에 국경을 통과한후 로흑산부근으로 진격했다. 이밖에 연해주에서 철퇴하는 제14사단 제28려단 4000여명 일본군은 로씨야 포세이트에 등륙, 빈해성을 거쳐 훈춘에 침입하여 제15련대를 훈춘과 룡정에 남겨 “토벌”대를 강화하게 하고 나머지는 국자가, 룡정과 조선 회령을 거쳐 나람으로 돌아갔다. 10월 13일 제19사단 제73련대의 2개 중대가 두만간을 건너 반일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국내외 진감시킨 “경신년대토벌”이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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