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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상점거리 N 의자에 바퀴를 단것에 윤서를 앉히고 밀면서 달리는 광헌. 그 뒤를 황가와 두 영감이 따라간다. 그때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바퀴가 부서져 나간다. 윤서를 들쳐 업으려던 광헌. 순간 동작이 정지하는데, 어디선가 풍기는 살기... 광헌이 갑자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숨을 죽이는 일행들. 어디선가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검은 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들이 샛골목에서 몸을 드러낸다. 황가/ 뭐야, 이놈들은? 광대패거린가? 네 명의 검은 옷들이 공터로 나와 일행을 에워싼다. 맨 마지막으로 조내시가 천천히 나타난다. 조내시/ (우울한 얼굴로) 내 진작에 니가 이상하더라니. 등잔밑이 어둡다고, 의금부놈이 그렸을 줄이야. 광헌/ 내시부... 감찰대... 황가/ 내시부면... 불알없는 놈들? 이노므 시키들... 뒷물이나 하고 일찍 자지, 왜 남의 뒤를 따라다녀! 조내시/ 사헌부 의금부 밥께나 자신 양반들이... 그렇게 눈치가 없나? 함정인거지. 당신, 도망가게 만든거야, 저 사람들이... 무슨 얘긴지 알겠지? 막가겠다는 거야. 살길이 없어졌어.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항상 여기서 나오는 령을 들으라니까... 윤서/ 그거야 자네는 밑에서 올라오는 령이 없으니까 그렇지. 조내시/ (우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함정까지 판걸 보면서도 걱정이 안되는가... 어떤게 기다릴지 걱정도 안되나? 광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잡혀가지 않을거니까. 광헌이 그말과 함께 윤서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다. 조내시/ 이봐, 의금부친구, 자네도 한가락하겠지만 이 친구들한텐 안되는 거, 알잖아? 광헌/ 해봐야지. (윤서를 돌아보고는) 잡혀가면 끝이잖아. 황가/ 잠깐! 일단 우리한테 맡겨보슈. 오랜만에 이거 뽑게 하네, 나. 이것들이. 모사장이/ 나부터 나갈께요. 황가와 두 영감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낫을 뽑아든다. 그러자 그림자처럼 다가와 툭툭 후려치는 검은 옷. 낫을 떨어뜨린 세사람이 손목을 움켜쥐고 끙끙거린다. 그리고는 광헌과 검은 옷들의 격투가 벌어진다. 등뒤에서 짧은 환도들을 뽑아드는 검은 옷들. 맨손의 광헌, 낫을 주워들고 한동안 싸움을 이어가지만 얼굴을 비롯한 여러곳을 베이고 쓰러진다. 분을 못 이긴 검은 옷들이 몸통을 발로 밟고 서서 칼을 허공에 들어 올려 내리 찍으려는데, 조내시/ 그만! 그만들 해. 뭐할려고 살생을 해, 한명만 데리고 가면 되는데...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데리고 가라. 그말에 의혹에 차서 조내시를 바라보는 감찰대. 윤서가 황가와 영감들에게 눈짓을 한다. 잠시 망설이던 황가가 윤서에게 걱정말라는 표정을 보내고는 광헌을 업고 영감들과 사라진다. 긴장이 풀려 축늘어지는 윤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말하는 조내시. 조내시/ 당신한테 줄 마지막 선물이 있는데... 윤서/ 난 조내관이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조내시/ 싫어하긴! 부러워 한거지, 마찬가진가? 갑자기 조내시가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윤서를 찔러 간다. 순간 뒤에 있던 검은 옷의 칼이 허공을 가르고 칼을 쥔 조내시의 팔이 땅에 떨어진다. 자신의 팔을 보던 조내시가 남은 손으로 다시 칼을 주으려 하는데 검은 옷의 칼이 목을 겨눈다. 조내시/ 눈치채고 있었구나... 검은 옷/ 분명 입을 막으려 할테니... 주의하라고.... 조내시/ (미소가 떠오른다) 역시... 그런가...? 날 믿는줄 알았는데... 검은 옷/ (복면을 벗으며, 목이 멘 소리로) 그러게 왜... 노상 머리에서 나오는 령을 따르라더니... 조내시/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서 나오는 령도 있더라구... 그냥 찌르지... 뭐하러 얼굴을 보여주냐... 검은 옷/ 어떻게 그럽니까... 다음 생에는... 말을 잇지 못하는 검은 옷. 천천히 칼을 목에 밀어 넣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조의를 대신하는 검은 옷들. 조내시를 바라보는 윤서. 윤서를 보며 희미하게 웃는 조내시. 조내시/ ...믿어도 되는거지? 윤서,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조내시가 채 죽기도 전에 윤서를 업은 검은 옷들이 골목으로 사라진다. 87. 내시관 N
작은방이다. 벽면엔 선반이 층층이 채워져 있고 작은 항아리들이 놓여 있다. 방한가운데에는 나무 침상이 있고 그 위에 윤서가 앉아 방안을 둘러보고 있다. 잠시후 장지문이 옆으로 열린다. 문 너머에는 두 배쯤 되는 크기의 방이 있고 커다란 나무 욕조안에 물을 채워넣고 왕이 앉아 있다. 왕 옆 의자엔 정빈이 앉아 윤서를 바라보고 있다. 욕조 뒤쪽으로는 내시들이 둥그렇게 서 있다. 왕을 보자 부복하려고 몸을 움직이는 윤서, 그러나 다리가 부러진터라 신음소리만 흘러 나온다. 왕/ 그냥 있거라. 윤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 여기가 어딘 것 같으냐. 윤서/ ...... 왕/ 알수가 없겠지. 정빈도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이니... 여기는 내시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곳이다. 말하자면 내시의 고향같은 곳이지. 피곤하거나 병이 들면 와서 쉬기도 하고 치료도 받고... 비밀스러운 얘기를 모여서 하기도 하고, 가끔은 모여서들 내 흉도 보겠지. 그런가? 왕이 웃으며 뒤를 돌아보자 내시들은 똑같은 크기의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인다. 왕/ (윤서를 지긋이 노려보다가) 나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지. 이렇게 목욕도 하고... 내관들과 놀이도 하고... 나한테도 역시 고향같은 곳이다. 그말 끝에 또 뒤를 돌아보는 왕. 역시 같은 속도로 허리를 숙이는 내시들. 왕/ 내 그런 곳으로 널 은밀히 데려온 것은 내 스스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널 살려보고 싶어서야. 윤서/ ...? 왕/ 어째서 그리 당당한거지? 윤서/ 그리 보이셨다면 죄인된 몸으로 황공하옵니다. 왕/ 죄인처럼 굴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는 것은 어째서 정빈을 흘깃흘깃 보는 네놈의 눈빛이 그리 당당하냐는 거다. 윤서/ ... 왕/ 말해보거라, 어째서 그리 당당한 것이냐? (정빈을 보며) 흡사... 흡사... 여러번 잠자리라도 한 사이들 같지 않느냐? 정빈/ 망극하옵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소서. 왕/ 아니야, 이건 왕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자로서 하는 이야기다. 남자끼리는 말안해도 알수가 있는 것 아니더냐. 한두번 하고 나면 묘하게 당당해 지는 것... 숫컷의 어리석음이라 불러도 좋다. 하나, 그게 또 사실 아니더냐? 정빈/ 전하, 고정하소서... 왕/ 내 묻겠다. 진작에, 진작에 내가 직접 물을 것을... 너, 이 여자랑 했느냐? 정빈/ 전하! 윤서/ ...천부당 만부당하옵니다. 무심하게 윤서를 바라보는 왕. 왕/ 만약 아니라고 대답하면 넌 벌을 받게 될 것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면 아무일 없이 살려주겠다. 관직도 복직 시켜주마. 내 국왕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다시 묻겠다. 이 여자랑 했느냐? 윤서/ ...... 왕/ 하면서... 저 여자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느냐? 구강으로 음부를 탐하고, 정빈/ (하소연 하듯이) 전하... 왕/ 여자가 개처럼 엎드리게 하고는 뒤에서 하고... 여자가 남자를 올라타고 하고... 그런 것들을 니가 가르친 것이지? 더 듣다 못한 정빈이 일어서자 뒤에 있던 내시가 어깨를 눌러 도로 앉힌다. 왕/ 그렇다고 대답해라. 날 의심하지 말고...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면 끝나는 게야. 그러하냐? 윤서/ (숙였던 고개를 들며) 죄지은 자가 어찌 거짓을 아뢰리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왕/ (한숨을 쉬며 뒤로 기대더니) ...죽어도 말이야? 윤서/ 그러하옵니다. 묵묵히 윤서를 바라보는 왕. 욕조에서 오르는 김만이 움직인다. 왕/ 네 놈이 저지른 가장 큰 죄가 뭔질 아느냐? 난잡한 책을 쓴 것? (픽 웃더니) 사대부 명예야 손상시켰겠지만 죄도 아니지. 그럼 내명부의 여자를 건드린 것? 그리고 그 여자와 음란한 행동을 한 것? 그거야 큰 죄지. 죽어 마땅하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죄일까? 그럴까? (잠시 멈추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들어오너라. 그러자 약간 당황하는 내시들. 정빈의 눈치를 흘깃보다가 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경악하는 정빈과 윤서. 옷을 벗은 내시들이 욕조안으로 들어가 왕을 중심으로 머리만 내놓고 동그랗게 둘러 앉는다. 왕/ 그정도 음란한 생각과 하지말아야 할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당장 나를 보거라. 한나라의 국왕이라는 자가 이런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자들과 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지 않느냐? 그뿐일까? (킥킥대더니) 물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맞춰보거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거 같으냐? 정빈/ (공포에 질려) ...전하....전하... 왕이 갑자기 욕조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다. 왕의 뒷모습과 겹쳐 왕의 성기를 바라보는 윤서의 얼굴이 보인다. 왕/ 이걸 보거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욕조 밖으로 나오면서) 이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너도 이해한다. (뒤에서 가운을 입혀준다) 그럼 넌 어떤 죄를 저질렀을까? (잠시 말을 끊고 정빈을 돌아보더니) 너는 너에게 반하여 어쩔줄 모르는 여자를 유혹했다. 그리고 네 놈의 글을 위하여 여자를 이용도 하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 여자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한 것이라면 다 용서하겠다는데도 넌 태도를 굽히지 않았어. 바로 이 점이야! (붉어진 눈으로 윤서를 바라보며) 어째서 빈말이라도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하지 않는거냐? 윤서/ ...... 왕/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는것인데... 어째서 한마디 해주지 않는거냐. 어째서 이 여자와... 그리고... 나를... 이 여자를 사랑하는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냐.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더냐? 누구보다 그 점이 궁금한 사람은 정빈, 타는 듯한 시선으로 윤서를 바라본다. 윤서, 담담하게 정빈을 마주 바라보다가, 윤서/ 밖은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마마는 저를 놀리셨지요. 그러면서 즐거워 하셨습니다. 벌이 한 마리 날아 들었고, 제가 쫓아드렸지요.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정빈. 윤서/ 황공하옵게도... 그날 이후로 한시도 마마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에 음란한 상상이 자리잡아 사랑인지, 음란한 욕심인지 분간이 아니되었나이다. 분간이 아니되는데 어찌 사랑이라 쉽게 말하겠나이까. 게다가 사랑이라 말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데 어찌 사랑이라 말하겠나이까. 오늘 전하께서 저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시니 우린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닌게지요. (가슴에 손을 얹더니) 다만 이 안에 담아두고 저승에서 만나뵈올 뿐입니다. 정빈이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빈/ 그러면 되었습니다, 그러겠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왕도 눈물을 흘린다. 왕/ 내 앞에서... 그러면 되었다고? 그러겠다고? 정말로 좋아하는 구나... 구중궁궐에서 자라나... 여자들 틈에서만 살아온 나다. 처음부터 알았지. 니가 이놈을 좋아하는 것을... 내 한평생...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며 살았고... 수많은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너의 사랑만큼은 꼭 받아보고 싶었다. 근데 너는 이놈을 좋아하는 구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그냥 둔채 고개를 드는 왕) 알았다, 그렇다면 저놈을 죽이지 않겠다. 내 곁에 둘터이니 평생 보면서 살거라. 시술태감 들여라. 옆문이 열리더니 작고 마른 맹인 하나가 들어온다. 묘하게 공포스러운 느낌의 노인이 윤서 바로 옆에 부복하여 선다. 창백해지는 정빈의 표정. 윤서가 앉아 있는 나무 침상의 서랍을 열자 여러 가지 형태의 시술도와 작은 병들, 헝겊 따위가 나온다. 여기까지 능숙한 손놀림이던 노인이 어색한 손길로 윤서를 더듬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왕/ 어째 그러느냐. 시술태감/ 시술 연령을 지난 자라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왕/ 죽으면... 너도 죽는다.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정빈에게 다가오며) 그자는 몹시 음란한 자이니 다시 싹이 나지 않도록 뿌리 깊숙이 도려내도록 하여라. 정빈/ 전하! 아니되옵니다! 정빈이 일어서려 하지만 내시들에게 제압당한다. 시술태감이 신중하게 도구를 고르더니 윤서의 눈앞에서 작은 숫돌에 갈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하얀 가루(마취약)를 조금 덜더니 윤서의 얼굴에 훅 분다. 윤서에게 다가와 측은하게 바라보는 왕. 왕/ 참, 너무 걱정 말아라. 물건은 잘 보관했다가 네가 죽을때 함께 묻어주니까. 선반위의 종지들을 가리키는 왕. 점점 의식을 잃어가며 정빈을 보고 있는 윤서. 천천히 윤서의 몸을 더듬으며 사타구니 쪽으로 다가오는 시술태감의 손길... 그때 욕조 뒤쪽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좌의정이 들어선다. 좌의정/ 전하! 잠시 고정하시옵소서. 왕/ ...임대감? 윤서는 마침내 의식을 잃는다. 왕/ 뭐요, 나를 가로막겠다는 게요? 좌의정/ 그렇다고 하셔도 감수하겠나이다. 왕/ 임대감이? 이유는? 도리어 좋아할 일 아닌가? 좌의정이 굽혔던 허리를 펴올린다. 담담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눈빛. 좌의정/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안되겠습니다. 왕/ (어이없는 표정으로) ...안되겠다? 좌의정/ 사람에겐 누구나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저 이 늙은이 체면을 한번 봐주신다 생각하시고... 왕/ (천천히 좌의정에게 다가오며) 그렇게는 납득이 안되겠고... 이유를 말씀하셔야겠소. 좌의정/ 정히 그리 물으신다면...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이자의 다음 책을 기다리고 있어서 이옵니다. 왕/ 고작... 그런 이유로 군주의 행동을 가로막으신다...? 좌의정/ 황공하옵니다만... 그렇사옵니다. 제 체면을 한번 봐주시옵소서. 이번에 그리 해 주신다면 그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왕/ (바로 앞에 서서) 싫다면? 좌의정/ 그렇다면... 전하께서 저를 가장 가까운 신하로는 여기시지 않는 것으로 알겠지요. 몹시 서운한 마음 금할길이 없을 것이옵니다. 왕의 얼굴을 다가가자 좌의정이 귀를 가져다댄다. 왕/ 남색가 주제에... 좌의정/ 그만한 허물이야 누군들 없겠습니까... 저도 여러 가지 소문들을 알고 있으니까요. 실내에 갈등의 침묵이 흐른다. 좌의정을 노려보던 왕, 윤서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왕/ (혼잣말처럼) 희안한 놈이로군. 잘한 짓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사랑받는거지? 임대감이 나서서 살려달라고 할줄이야... 좌의정/ 송구하옵니다. 왕/ (씁쓸히 웃으며) 저 놈보게... 표정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다들 윤서를 바라본다. 정말 의식을 잃은 윤서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왕이 나가버린다. 뒤따르는 내시들. 긴장이 풀리는지 의자에 털썩 앉았던 정빈이 윤서를 바라보며 일어서 다가온다. 좌의정이 깊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서려는데... 윤서를 바라보고 있던 정빈이 부른다. 정빈/ 좌상 대감... 좌의정/ 예, 말씀하시지요. 정빈/ 감사합니다. 그리고 좌상의 그 소중한 분에게도... 감사 말씀 전해주세요. 좌의정/ 그리 하겠습니다. (잠시 윤서를 보다가) 알다가도 모를 자 아닙니까. 천하의 겁쟁이라더니... 정빈/ 그러게 말입니다. 좌의정/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으실 겁니다. 정빈/ 아무 상관없습니다. 측은한 듯 바라보던 좌의정이 다시 허리를 숙이고 나가자 윤서에게 가까이 가서 멈추는 정빈. 떨리는 손을 뻗어 윤서의 얼굴을 매만진다. 정빈, 입술을 조금 열어 길게 한숨을 토해낸다. 윤서의 얼굴에 뺨을 대는 정빈. 윤서의 귀에 속삭인다. 정빈/ 정말 아무것도 상관없어요... 어떻게 되어도 다 참을수 있어요... (F.O) 88. 제주도 바닷가 D
나룻배 한척이 두 명의 삿갓 쓴 남자를 태우고 뭍으로 다가오고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닷가에 작은 초가가 댕그머니 자리하고 있다. 뭍에 내리는 두 남자. 광헌과 황가다. 광헌은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다. 89. 귀양지 초옥 D
마당에 일군 작은 밭을 매고 있는 윤서의 뒷모습. 사립문을 열고 들어선 광헌과 황가가 반가워서 부른다. 광헌/ 김장령! 김장령! 윤서/ (돌아보지는 않고, 낮은 목소리로) 누구시오? 광헌/ 접니다... 황영감도 같이 왔소이다. 잠시 망설이던 윤서가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린다. 어이없어서 바라보는 광헌과 황가. (점프) 초옥의 방문을 여는 광헌. 전형적인 선비의 단아한 방. 작은 느티나무 책상위에 읽고 있었던 듯 책이 펴 있고 벽에는 다 낡아 꿰맨 도포 한 벌과 갓. 구석에는 이부자리 한 채가 펴 있다. 그런데 방구경도 하기 전에 윤서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광헌과 황가. 자신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윤서의 얼굴에 눈 부분만 뚫린 종이봉지가 씌워져 있다. 황가/ 아니, 왜 봉지를 뒤집어쓰고 있으슈? 윤서/ 보기 흉해서... 광헌/ 얼굴을... 인두로 지진거요? 윤서/ 그런건 아니고... 황가/ 아니, 그럼 왜 답답하게 그런걸 뒤집어 쓰고 있나 모르겠네? 황가가 냉큼 달려들어 피하는 윤서의 봉지를 벗겨낸다. 순간 고개를 돌리던 윤서, 천천히 다시 두 사람을 올려다 본다. 넋을 잃고 윤서를 내려다 보는 두 사람. 윤서의 이마에 검은 글씨로 선명하게 ‘음란( ^)’이라고 새겨져 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광헌, 못본척 고개를 돌리는 황가. 광헌/ 어떻게 사람 얼굴에 이런 짓을... 윤서/ 그리 되었소... 음란작가이니 음란이라고 새긴들 무슨 할말이 있겠소... 방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 황가. 윤서/ 그나저나 시장들 하시겠소? 90. 제주도 바닷가 D
바닷가를 걷고 있는 세 사람. 어두운 표정의 윤서와 광헌을 보던 황가, 갑자기 사타구니를 움켜쥐더니, 황가/ 아, 두 사람이 그렇게 처량하게 걸어가니 마음이 아프네. 윤서/ 마음이 아픈데 왜 거길 움켜쥐나? 황가/ 어? 남자는 맘이 여기 있는거 아니었나? 어이없어 웃는 두 사람. 그러나 다시 분위기가 어두워진다. 다시 걷는 세사람. 광헌/ 그때 기억나시오? 비오는 날인데... 김장령 집에 처음 찾아 갔던 날... 윤서/ (고개를 끄덕이고) 광헌/ 그날 김장령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는데... 들어갈까 말까 하고... 윤서/ 그때 안들어 왔더라면 좋았을텐데... 광헌/ 무슨 소리요. 얼마나 좋았는데... 그때 갑자기 윤서가 돌아선다. 광헌을 바라보는 윤서. 윤서/ (광헌에게) 혹시 남자를 좋아해 본 적 있으시요? 그 말에 멈춰서는 광헌. 의심찬 표정으로 광헌을 노려보는 황가. 광헌/ 아니, 날 뭘로 보고 그런 질문을... 혹시... 내가 김장령을 남색가로서 좋아하는 걸로 오해하는거요? 황가/ 그런 느낌도 있어, 맞어. 윤서/ 그게 아니고... 이런 얘기 어떻겠소? 의금부에 있는 고신관이 한 죄수를 취조하는데... 91. 의금부 고신장소 [윤서의 일루젼] D
윤서(O)/ 죄수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거요. 죄수의 머리를 움켜쥐고 들어올리는 광헌, 놀랍도록 미남자다. 얼굴이 붉어지는 광헌. 윤서(O)/ 게다가 이 죄수는 어찌된 노릇인지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쾌감에 빠지는 체질이요. 엉덩이를 때리는 광헌, 쾌락에 신음하는 죄수. 당황하는 광헌. 92. 제주도 바닷가 D
의심스레 광헌을 바라보는 황가의 눈빛. 광헌/ 어떻게... 그럴수가... 당신은 정말.... 미친사람이오! 윤서/ 세상엔 그런 사람들도 존재하니까... 그런 사람들도 자신들 이야기가 있어야지 않겠소. 광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소. 남자와 남자가 서로 반하는 것도 해괴한 노릇인데... 괴롭힐수록 좋아한다? 윤서/ (황가를 보며) 어떨 것 같소? 황가/ (어울리지 않게 생각에 빠져 있더니) ... 충격적인데? 윤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이 책으로 행복해지지 않겠소. 황가/ 행복해진다... 윤서/ 누군가 한명이라도 행복해 진다면 써볼만 하지 않겠소. 황가/ 그럼 이번에도 삽화가 들어가는거고? 윤서/ 이렇게 최고의 화가가 곁에 있는데 당연하지! 광헌/ (으쓱해져서) 누가 그런 그림을 그린데나? 황가/ 좋소, 해봅시다. 안 그래도 그 바닥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난리야... 근데 질문이 하나 있는데... 윤서/ 물어보시오. 황가/ 그럼 자세는 그거 하나 밖에 없지 않수? 광헌/ 그거 하나라니? 그 자세는 뭐요? 황가/ (광헌에게) 약간 수그려 보시오, 아니 좀 더... 그렇지. 잽싸게 광헌의 뒤로 돌아가 후배위 자세로 허리를 놀리는 황가. 황가/ 남자끼리 한다면 이 자세밖에는 없을거 같은데... 그림이 너무 단조롭겠는데...?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험악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는 광헌. 황가가 순간 겁을 먹지만 광헌이 어이없다는 듯 윤서를 보고 웃는다. 윤서/ 제목도 생각했는데... 황가/ 또 노골적이겠지, 뭐. 음... 몽둥이가 두 개니까... 쌍봉비화? 윤서/ 이번엔 아니요. 잘 들어 보시오, 오랫동안 가까이 두고 사귄 벗. ‘동무’ 어떻겠소.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를 이해해 주는거니까... 황가와 광헌이 서로 잠시 마주 보다가 동시에 웃는다. 광헌/ 하이고 동무라니... 황가/ 바닥을 너무 오래 떠나서 감을 잃었구만. 완전히 감을 잃었어. 윤서/ 이상하네... 난 좋은 거 같은데... 광헌/ 좋긴... 혹 모르지, 한 이삼백년 지나면 어떨지... 황가/ 그땐 세상이 더 음란해질텐데? 제목도 진짜 음란해야 될껄? 세 사람이 작은 점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위로 크레딧이 오른다. M
93. 귀양지 방 D
갑자기 화면이 다시 들어온다. 장소는 윤서의 귀양살이 방안. 윤서가 책상에 두터운 책을 올려놓자 맞은편에 앉은 광헌과 황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광헌/ 아니 어느새 한권 써놓으신게요? 윤서가 씩 웃으며 한페이지를 넘기자 조악한 남녀교합장면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 실망하는 두 사람. 황가/ 에이 하지 말라니까...? 그러자 윤서가 페이지를 후르륵 떨어트린다. 플립북방식으로 움직이는 그림. 광헌과 황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황가가 수선을 떨기 시작한다. 황가/ 와, 이, 이거, 뭐야! 광헌/ 허- 신묘막측하고 재기발랄이오, 움직이지 않소! 황가/ 와, 이건 돈이야, 돈. 근데 이건 뭐라 불러야 되지? 움직이니까 동인데... 윤서가 한자한자 또박또박 말한다. 윤서/ 동영상! 어떻소! 그말에 감동하는 두 사람. 황가가 말없이 양손바닥을 내밀고, 윤서와 광헌이 내리치면서 계약이 성사된다. 손바닥치는 소리가 박수소리로 변형되면서 템포빠른 음악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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