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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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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 (gogoh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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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5/04
 

46. 선화사, 부식창고 N

윤서의 소매를 이끌며 창고로 들어가는 정빈, 창고 안에는 나무 상자와 수박 따위의 과일, 커다란 얼음덩이들이 쌓여 있고 여기저기 희끄무레 하게 엉켜 있는 남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침내 멈춰서며 나무상자에 기대 윤서를 올려다보는 정빈. 걸어와서인지, 긴장해서인지 숨을 크게 들이내쉰다.

윤서/ (역시 헐떡이며) 어째 이러...십니까...
정빈/ 몰라서 묻습니까.
윤서/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입니다.

갑자기 윤서의 목을 끌어 당겨 입을 맞추는 정빈. 키스를 하고나자 정빈의 가슴이 더욱 크게 오르내린다. 그런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는 윤서의 눈길을 의식한 정빈, 윤서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쪽으로 향하게 한다. 최후의 순간, 윤서가 손을 빼내버린다. 원망스레 윤서를 올려다보는 정빈.  

정빈/ 그리도... 용기가 없소?
윤서/ 도저히... 난....
정빈/ 사람들이 당신을 겁쟁이라 해도 믿지 않았더니... 서슴없이 다가와 벌을 후려치던 그 양반 맞소?
윤서/ 뭐라 하셔도 좋습니다. 난... 내려가겠소.

정빈을 놓아두고 돌아서 나오는 윤서. 뒤에서 바라보던 정빈이 소리친다.

정빈/ 내가 나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이나 아시오!


47. 선화사 경내 N

창고에서 나온 윤서, 의관을 다듬더니 경내를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윤서의 뒤로 후드득 쏟아지는 비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연등의 초도 비로 하나 둘 씩 꺼진다.


48. 윤서의 사랑채 D

갑자기 방문을 열며 아버지가 뛰어든다. 글을 쓰고 있던 윤서. 문득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의식하고는 고개를 드는데,

윤서부/ 어서 감춰라, 감춰!
       의금부에서 널 찾아왔다! 대체 어찌 알았는지... 지독한 놈들!
윤서/ 의금부요?

윤서가 쓰던 것을 황급히 병풍 뒤로 감추는 윤서부,

윤서부/ (비통하게) 제대로 뜻도 펴보지 못하고 이렇게 끝난단 말이냐...

아무 일 없는 척 대청으로 나오는 윤서부와 윤서.

윤서부/ 무슨 일이시오?

윤서 부자의 뒷모습 너머로, 내리는 빗속에 지우산을 들고 있는 한 남자. 지우산이 들리면 광헌이다.

윤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 말고 가 계십시오.

(점프)
(인서트)비 그친 대숲.
서탁 위에 흑곡비사 일 권이 놓여 있고, 광헌은 손에 이 권을 들고 읽고 있다. 다 읽은 듯 책을 내려놓는 광헌. 분재를 다듬고 있는 윤서와 눈이 마주치자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쉰다.

광헌/ 이건... 도무지...
윤서/ 말해보시오.
광헌/ 난잡하기도 하거니와 불경스럽기 이를 데 없군. 말도 되지도 않고.
윤서/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이런 책의 생리가 그러니까... 그래서 그릴 거요, 말거요?
광헌/ ... 그려보고 싶소.

분재를 툭 자르고, 흠-하는 표정으로 광헌을 바라보는 윤서, 갑자기 우위에 선 느낌이다.
잠시 뜸을 들이며 승리감을 맛보던 윤서, 들창을 열어 본다.

(점프)
대숲으로 들어서는 윤서.

윤서/ 삼권은 이렇게 시작할까 싶은데... 그리워하다 못해 윤비가 남자를 만나러
     몰래 궁을 빠져 나오는 거요. 두 사람은 어떤 절의 연등제 인파 속에 묻혀 조우하지요.
광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윤서/ 말도... 안되다니?
광헌/ 어떻게 내명부의 여자가 궁을 빠져나와  외간남자를 만난단 말이요.
     궁궐출입도 해본 사람이 그런 엉터리소리를... 아무리 이런 소설이라도
     어느 정도는 현실성이 있어야지.
윤서/ (말해줄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숲쪽을 돌아보며) 원래 현실이란 비현실적이오.
     그게 이런 소설의 핵심이기도 하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거...꿈꾸는 것 같은거, 꿈에서 본 거 같은거,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거...그런걸 쓰는게 핵심이지.
     우리 세계에서는 그걸 진맛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광헌/ (전문용어에 왠지 주눅들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숲쪽 돌아보고) 진맛...
윤서/ (갑자기 엄한 표정으로)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은 나요. 그걸 가지고 삽화를 그리는게 당신이고.
      그 구별을 좀 해주었으면 싶은데...?
광헌/ (으이, 이걸 해야되나?) ...알았소.
윤서/ (광헌 일으켜 세우며) 여기서부터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아무튼, 두 사람은 연등제 탑돌이에서 서로 만나, 아, 이 부분엔 물론 두 사람의 내심에 대한
     촘촘한 묘사를 곁들일거요.


49. 선화사 부식창고, [윤서의 소설] N

윤서(o.s)/ 탑을 돌다가 (잠시 생각에 빠지는 윤서)
          남자가... 윤비를 갑자기 창고로 끌고 들어가지요. 여기서부턴 잘 들으셔야 하오.

이번엔 윤서가 정빈을 끌고 창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겁에 질려 안 끌려가려고 버둥대는 정빈. 그러나 윤서의 힘이 더욱 가해진다.

정빈/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적당한 곳을 찾으며 정빈을 끌고 오는 윤서의 눈빛이 번들거린다.

정빈/ 진정 이러시면... 소리치겠습니다!
윤서/ (멈추더니 돌아보며 하드보일드한 목소리로) 소리칠 주제나 되시오? 아닌걸로 알고 있는데?
윤서(O)/ 바로 이 부분에서 윤비는 다리의 힘이 쭉 빠지면서 기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오.
광헌(O)/ 그건 또 어째서 그렇소?
윤서(O)/ 생각해 보시오, 어렸을때부터 귀하게 자라 궁에 들어온 여자가 이런 대접을 받아나 봤겠소?
        겁도 나거니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드는거지. 오늘, 꼼짝없이 당하겠구나... 뭐 이런.
광헌(O)/ 허, 거참... 여자들이란 도통...

마침내 좋은 장소를 발견하지만 이미 먼저 온 남녀가 있다. 여자를 껴안고 있는 남자의 다리를 툭 차는 윤서. 남자가 돌아보면 딴데로 가라고 턱짓을 한다. 약간 반항해 보려는 남자에게 험악한 표정을 짓는 윤서, 슬금슬금 피하는 남녀. 정빈을 나무상자에 기대 세우고 잠시 바라보는 윤서.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정빈. 거칠게 키스하는 윤서. 조금 반항하다가 윤서의 목을 휘감는 정빈. 윤서의 손이 저고리 속으로 들어가 정빈의 가슴을 주무른다. 그러면서 입은 정빈의 목을 애무한다. 어두운 천정을 올려다보며 신음을 참아내는 정빈.
그때 윤서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정빈 앞에 앉는다. 천천히 갓을 벗는 윤서. 영문을 몰라 윤서를 내려다보는 정빈. 윤서가 치마를 들추더니 그 속으로 들어간다. 당황해 어쩔줄 모르는 정빈, 윤서를 밀쳐내려 애쓰지만 아랑곳 않고 파고든다. 마침내 윤서의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젖히는 정빈, 난생처음 맛보는 쾌락에 신음을 내지른다.

광헌(O)/ 그만 두시오! 갓을 벗다니!


50. 윤서의 사랑채 D

등을 보이며 돌아앉는 광헌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윤서.

윤서/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시오?
광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니까... 갓을 벗고... 구강으로... 그, 그곳을 탐한다... 말씀이요?
윤서/ 물론이요, 뿐만 아니라 글에는 그 음부의 형태며 상태를 세밀히 묘사할 작정이요.
광헌/ (고개만 홱 돌려 윤서를 노려보더니) 으, 음부라니... 어떻게 사대부 입에서...
윤서/ (광헌을 지그시 노려보더니) 음부.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광헌.

윤서/ 그런데 왜 등을 돌리고 앉아 계시오?
광헌/ ...
윤서/ 혹시... 발기하셨소?
광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맞소, 맞소만... 당신, 어찌된 사람이...
      그 얼굴에, 그 명성에, 그 행동거지에... 그런 생각이 들어 있소...
윤서/ ...그러게나 말이오. (고개를 들며) 어째, 그릴 수는 있겠소?
광헌/ (목멘소리로) 뭘 말이오? 내명부를 나무에 기대 세워 놓고 음, 음,(차마 못하고)
      그곳을 구강으로 탐하는 것 말이오?
윤서/ (일어서서 광헌에게 가며) 기왕이면 바닥에 장옷을 깔고 눕히고는,
     본격적으로 탐하는 것으로 그려주시오. 그러니까 남자의 뒤쪽, (손으로 시선의 각도를 보여주며)
     약간 우하방에서 바라보는 각도로...
광헌/ 당신 정말...


51. 유기전 앞 N

문을 열려던 윤서,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에 잠시 손길을 멈췄다가 조심스레 연다.


52. 유기전 안 N

하녀 둘이 책을 쥐고 다투고 있다. 구경하던 하녀들도 우르르 몰려든다. 슬그머니 어둠속으로 몸을 감추는 윤서. 장내를 통솔하고 있는 황가, 그러나 여의치 않다.

황가/ (허준이라도 된양) 줄을 서시오, 줄을 서시오!
하녀1/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낮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이년아, 새치기를 해?
하녀2/ 이게 어디서 이년저년이야? 어느집 종년이!
하녀1/ 어느집인줄 알면 놀래 자빠질 년이!
하녀2/ 말해봐, 어느집이냐?

말하려다 다시 책을 밀고 당기는 두 하녀, 황가는 책이 찢어질까 어쩔줄 모른다.

황가/ 허, 이것참, 책 찢어지겄다, 아, 거기, 줄을 서라니까?
     
(dis)


53. 유기전 밀실 N

모사장이가 광헌의 그림을 똑같이 옮겨 그리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윤서와 황가. 옆에서 베껴 쓰고 있던 필사장이가 흘깃 보더니 타박을 한다.

필사/ 허- 그리도 손이 느려서야, 언제 스무권을 만드나...
황가/ 그러게 말이야. 아, 예술해? 적당히 그리지?
모사/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기술자곤조풍) 제가 마음에 안드시면 가보고요...
황가/ (일어서려는 모사장이를 주저앉히며) 아, 알았어, 얼른 그리기나 해.
모사/ (다시 그리기 시작하며) 이상하게 피곤하네...
황가/ 알았다니까... 내가 더 신경쓸게.
모사/ 누군지 몰라도 이 화가, 잘 고르셨습니다요.
     내 수많은 그림을 옮겨봤지만 이렇게 힘찬 그림은 처음입니다요.
윤서/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가...
황가/ 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단 말입니까... 삽화를 넣다니... 충격이올습니다.
윤서/ (으쓱해서) 뭔가 달라야 하질 않겠나.
황가/ 집에서 쓰시기 힘드시면 어디 경치 좋은 곳을 잡으면 어떨까요?
윤서/ 괜찮네. 눈치가 좀 보이긴 하지만...
황가/ 뭐든지 필요하면 말씀만 하십시오. 외람된 말씀이오나,
윤서/ 뭔가, 말하게, 자네와 나 사이에,
황가/ (수줍어서 외면하며) 나으리는 저의 보물이라고 말씀드려도 될는지.
윤서/ (역시 수줍어하며) 원 사람도...
황가/ 그나저나 다음 권은? 많이 나가셨나 모르겠네?
윤서/ 쓰고는 있네만.
황가/ (약간 인상이 굳었다가 얼른 펴며) 캬... 노상 이렇게 애를 태우신다니까?
      근데 요번 호에는 (손바닥으로 삑삑 소리를 내더니) 이거 나오는 거 확실한겁니다?
윤서/ (황가의 손을 보며)허, 재주가 신묘하구만. 그 소리와 똑같지 아니한가.
황가/ 이거요? 별걸 다 신기해 하시네. 아, 이렇게 해서 요렇게 하면 (삑삑) 쉬운건데?
윤서/ 우리 책에도 그런 소리까지 담을수 있다면 좋으련만...
황가/ 소리까지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요?
윤서/ 글에다, 그림에다, 그 소리까지 담을수 있다면 그 아니 좋겠는가.
황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체, 그런데, 거시기... 구상하고 계시는 그 장면은...
      어떤... 그 뭐냐... 어떠한 자세일는지?
윤서/ 무슨 자세...? (그제야 알아듣고) 아, 그거 말인가?

필사와 모사도 궁금한 듯 손을 멈추고 윤서를 바라본다. 황가의 눈이 궁금증에 반짝인다.

윤서/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그야, 뭐, 교합의 자세라는게, 다 그렇듯, 그거지 않은가.
황가/ 이럴줄 알았어, 이럴줄 알았어. 내 양반들 그걸 아니까, 그래서 내가 확인해 본거라니까?
      내가 아까 얘기 했잖아, 그치?
필사,모사/ (고개를 끄덕인다)
황가/ 이번호 삽화로 얼마나 기대치가 높아졌는데, 아, 고작 남자가 위에서
     (삑삑) 이러는걸로 될 줄 아시우?
윤서/ 그럼... 어쩌란 말인가.
황가/ (필사와 모사를 쓰윽본다. 얼른 고개를 떨구는 두 사람. 필사를 가리키며) 자네 이리좀 오게.
필사/ 나? 난 글 쓰잖어?
황가/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이리 오라니까?

필사가 엉거주춤 다가오자 시범을 보이며 설명을 시작하는 황가.

황가/ 보통 양반들이 하는 자세는 이거 아니우. 이러구선 나올 때까지 계속 하는 거지, 뭐.
     계속 이것만 하는거야. 무슨 재미가 있겠어. 방아깨비나 보고 좋다 그러지.
     자 지금부터 여자들이 좋아하는 자세를 보여 드려야지. 자, 이렇게 해봐.
     아니, 아니. 이렇게. 왜 몸에 힘을 빳빳하게 주고 그래?
필사장이/ 이렇게?
황가/ 그렇지. 자, 여자를 이렇게 해놓고 남자는 이렇게 앉는다.
     그리고는 자, 한쪽다리를 이렇게 하고는 허리만 가지고, 자, 샥샥샥샥... 이런게 하나 있고...
     자, 이렇게 해봐, 여자를 이렇게 해놓고는 남자는 이렇게 선다 이거지.
윤서/ (놀라서) 그러고... 한단 말인가? 금수도 아닌 인간이...
황가/ 금수가 누구유? 아무튼 이러고서는 샥샥샥샥... 이런게 있고... 또 뭘 보여 드리나...
     아 그렇지 그거. 그게 있었지. (약간 망설이더니) 좀 심한가... 그건?


54. 광헌의 사랑채 N

화구를 앞에 놓고 윤서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광헌. 어색한지 헛기침만 하고 있던 윤서.

윤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길 바라오. 나로서도 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니...
     한번의 설명으로 이 일을 마치도록 합시다.
광헌/ 뭘 그리 쩔쩔 매시오. 내명부의... 그곳을 구강으로 탐하는 그림도 그린 나요. 얘기 하시오.
윤서/ 그러니까... 여인이 먼저 바닥에 하늘을 응시하며 눕는 거요.
     (여기에서 탁자 위로 멍석이 올려져 죽 펴지고 모사장이의 얼굴이 나타난다.
     모사장이의 도움을 받아 탁자 위로 올라오는 필사장이와 황가. 시범조교처럼 윤서의 말에 따라
     자세를 선보인다.)
     곧이어 여인은 각부를 들어올려 두부 쪽으로 완전히 넘기는 거요... 완전히!
광헌/ (멍하니 상상하고 있다)
윤서/ 왜 그러시오, 이해가 잘 가지 않소?
광헌/ 아니오. 심히... 음란해서... 계속하시오.
윤서/ 벌써부터 그러면 내 어찌 뜻을 전달하겠소.
광헌/ 아니오, 내 잘못했으니 계속 말하시오.
윤서/ (짜증나게...) 아무튼, 각부를 완전히 넘기다 못해 족부가 땅에 닿아야만 하오.
     (따라하는 필사장이가 힘들어한다)
광헌/ (가는 붓으로 스케치하며) 슬부는 상호 붙어있는 상태요, 다소라도 벌어져 있는 상태요?
윤서/ 그것은 재량에 맡기겠소. 어느 쪽이라도 가하오.
     (필사장이가 무릎을 붙였다 떼었다 해본다) 여기서 남자 차례요. (황가가 한손을 든다)
     남자는 각부를 두자 정도 벌린 채 여체를 양 족부사이에 위치하고 정립하는 거요.
     (광헌의 스케치를 보다가) 아니지, 아니지. 여자의 머리쪽과는 반대방향을 보고 서는 거요.
광헌/ ...잘 이해가 가지 않소. 여자를 등지고 선단 말이요?
윤서/ 그렇소. 그 상태에서 남자가 슬부를 굴하는 전굴자세로 들어가는거요.
     기마자세라고 해도 좋소, 이후 양수로 여인의 둔부를 인상하여...

두 사람이 잠시 마주본다.

윤서/ 삽입하는거요. 
광헌/ (의혹과 놀라움에 찬 표정)
윤서/ 그릴 수 있겠소?
광헌/ 그게... 도대체... 사람의 신체구조로 가능한거요?
윤서/ (고개를 끄덕이고)
광헌/ 그리고... 이런 말은 그렇지만... 남자의 소중한 곳이...
윤서/ 음경말이요?
광헌/ 그렇소. 삽입운동을 하던 도중 파손될 위험성도 분명히 내재되어 있다고 보이는데...
윤서/ 그런 위험이 없다고는 할 수 없소, 허나, 남들이 갖지 못하는 쾌락을 얻자면
     그깟 위험이 무에 그리 대수겠소.
광헌/ 그깟 위험이라니...
윤서/ 아무튼 음부에서 이탈치 않도록 만전을 기하면 될 일이요.
광헌/ ...신묘막측하기 이를데 없는 자세요.
윤서/ 이 그림을 포함해 이번호에는 세 장의 삽화를 넣을 작정이오. 그동안 나의 책, 아니 우리의 책을
     아껴준 독자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광헌/ 그런데 이 자세... 김장령은 해보셨소?
윤서/ (눈썹을 꿈틀하더니) 우리 집안을 어찌 보고 그런 질문을 하시오. (쾅!)

계속 삽입운동을 하던 황가와 필사장이, 쾅 소리에 놀라 자세가 풀리며 쓰러진다. 주섬주섬 탁자 아래로 내려가고, 모사장이가 멍석을 걷어서 탁자 아래로 사라진다. 


55. 선화사 N

꽤 강한 비바람이 치고 있다. 시간이 지나 낡은 등들이 비바람에 찢겨 나간다.


56. 의금부 당직실 D

통로 끝 의자에 앉아 있는 윤서. 광헌이 들어와 윤서를 발견한다.

광헌/ 어쩐 일이시오, 여기까지?
윤서/ 어쩐 일은, 날짜가 가고 있지 않소?
광헌/ (우물쭈물) 그게...
윤서/ 아직 안 되었다는 얘긴데... 그럼 일정에 몹시 차질이 생기는데?
광헌/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그야 내가 왜 모르겠소.
윤서/ 심히 복잡하고 곤란한 문젠데? 업자들이 몹시 화낼텐데. 자세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요?
광헌/ (고개를 저으며) 그리긴 그렸는데...

광헌이 책상 밑에서 꺼내는 그림을 빼앗아 펼쳐드는 윤서. 곧 실망한 표정으로 바뀐다. 좌절하는 광헌.
 
윤서/ ...이 여자 얼굴은 혹시... 부인 아니시오...
광헌/ (울컥) 맞소, 나도 내 처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란 건 알고 있소!
윤서/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러시오, 그냥 물어 본건데.
광헌/ (억울함에 목이 메어서) 내 처가 이 그림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 줄이나 아시요?
윤서/ 그랬겠소...
광헌/ (그림 말며) 나도 미치겠단 말이오. 다른 사람과는 그래본 적이 없으니...
      내 그림들을 보셔서 알겠지만... 나는 말이오, 뭐든지 직접 봐야...
윤서/ (그림을 다시 광헌에게 주고, 돌아 나오며 혼잣말처럼) 그렇게 상상력이 없나...
      그러면, 실물을 직접 보면 잘 그릴 수 있겠소?
광헌/ 실물이... 있단 말이오?

잠시 생각하던 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어버린다.

윤서/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소. 그냥 하는 소리지.
     (다시 그림을 펼쳐 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허, 참. 아무리 그래도...


57. 궁궐의 주방 D

커다란 솥들이 줄지어 달려있는 어둑한 주방. 밖에서는 계속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윤서가 머뭇거리며 들어서자 한쪽에 몰려 있던 상궁들과 숙수들이 경악해서 바라본다. 뭔가 요리를 하고 있던 조내시가 뒤를 흘깃 돌아보더니 씩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조내시/ 어서 오시요.
윤서/ 보자고 했다던데?
조내시/ 잠깐 좀 나가들 있게.

쑥덕거리며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 번철에 치지직 소리를 내며 부어지는 밀가루 반죽.

조내시/ 부침개를 하고 있던 참이요. 날씨가 이런 날이면 정빈마마가 드시고 싶어 하셔서...
       사가에 계실 때부터 내가 부쳐 드리는 걸 좋아하셨거든.
윤서/ (익어가는 부침개를 바라보고 있고)
조내시/ 어찌된 일인지, 선화사에 다녀오신 후부터는 내내 자리에 누워만 계시니, 원.
       혹 어째 그러시는지 짐작가는 바라도 없으신지?
윤서/ 글쎄...
조내시/ 옛날에는 뭐 가지고 싶은걸 못가지시면 저러셨는데...  지금에사 그런게 있으실 리도 없고...

윤서를 흘깃 바라보는 조내시, 윤서는 시선을 돌린다.

조내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데?
윤서/ ...
조내시/ 미처 못다한 말이 있다면서.(피식 웃더니) 모든 일이 모자란게 좋은 것인데...
윤서/ 장소는?
 
천천히 윤서 쪽으로 돌아서더니 노려보는 조내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니,

조내시/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기서 내리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 법.
       (사타구니를 가리키며)여기서 나오는 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따랐다가는 모든게 엉망이 되어 버리지.
윤서/ (부침개를 턱으로 가리키며) 그거 다 타겠는데... 장소는 어디요?
조내시/ (한숨을 푹 쉬더니) 그쪽에서 정하라더구만.

그 말에 펀뜻 무언가 생각하는 윤서.


58. 유기전 앞 N

비가 더욱 거세졌다. 짚으로 만든 패랭이와 비가리개를 갖춰입은 조내시가 음울한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내려다보며 처마 밑에 서 있다. 원망스러운 듯 유기전 문을 노려보는 조내시.


59. 유기전 안

십여개의 호롱불빛이 유기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실내. 윤서와 미복차림의 정빈이 평상에 앉아 마주 바라보고 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빈이 눈만 살짝 치켜뜨며 윤서를 바라본다.

정빈/ 어찌하여 불을 이리도 많이 켜 놓았습니까.
윤서/ (순간 당황하다가) 아... 그저... 어색하십니까?
정빈/ 어색하고 말구요. 
윤서/ 모습을 조금 이라도 잘 보고 싶어서...
정빈/ (푸훗 웃고는) 그런 말씀도 할 줄 아시네요.
윤서/ 그런가요... (잠시 정빈을 바라보다가) 나, 그것보다 훨씬 더 나쁜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정빈/ 더 나쁜 말이라면... 어떤 말 말인가요?
윤서/ 더 지독한 말... 시정잡배도 부끄러워 감히 못 쓰는 말...
정빈/ (재밌다는 듯) 말도 안됩니다. 김장령같은 선비가 어떻게 그런 말을...
      듣기 전엔 믿을수 없습니다. 한번 나에게 해보세요.

무릎으로 약간 다가와 앉는 정빈, 그런 정빈을 바라보는 윤서의 눈빛이 착잡하다. 정빈이 귀를 윤서의 입에 가져다댄다. 무언가 윤서가 말하자 놀라서 바라보는 정빈, 윤서가 다시 정빈을 끌어당겨 무언가 더 말한다. 정빈, 어쩔줄 모르고 고개를 숙이는데 윤서의 손길이 스르르 다가온다. 정빈을 껴안지도 않고 옷고름을 풀기 시작하는 윤서. 정빈은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지만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윤서의 눈길에 꼼짝을 못한다. 옷이 다 벗기운 정빈이 윤서의 품안으로 들어온다. 이미 흥분해서 숨을 가쁘게 쉬며 윤서에게 몸을 부비는 정빈. 무언가 이해 못할 속삭임을 윤서의 귀에 지껄여댄다. 고개를 천천히 밀실 쪽으로 돌리는 윤서,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는 눈동자가 보인다. 자신의 옷을 벗는 윤서.


60. 유기전부근 막술집 D

처마밑 툇마루에 작은 술상을 놓고 나란히 앉아 내리는 비 너머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윤서와 광헌. 마당 구석에 황구 한 마리가 소뼈를 핥고 있다. 슬그머니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황급히 서로 고개를 돌린다.

윤서/ 어째서 아까부터 저 개 한번 보고 날 한번 보고 하는게요?
광헌/ 내가 언제... 보다보니 그런거지...

술을 마시는 두 사람.

윤서/ 초벌 그림이라도 보여주시오. 그나마 보람이라도 좀 있게...
광헌/ 초벌이 어딨겠소, 그 급박한 상황에... 다 머릿속에 있지.
윤서/ 그럼...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보길 잘했다고라도 해주시오.

물끄러미 윤서를 바라보는 광헌. 윤서는 후회와 죄책감에 괴로운 얼굴이다.

광헌/ 그런데 아까 그 사람... 어딘지 눈에 익던데...
윤서/ 그럴 때 얼굴은 다 비슷한 거니까...
광헌/ 그런가...
윤서/ (잠시 개를 바라보다가) 우리가 단군왕검이래로 가장 음란한 놈들일거요, 안그렇소?
      아마 이후로도 우리같은 놈들은 나오지 않을거요.
광헌/ (자기도 개를 바라보며) 세월이 흐르다 보면 혹 나올지도...
윤서/ 거, 제발 부탁이니 개 좀 쳐다보지 마시오.
 

61. 궁궐의 뒤뜰 D

연못가를 거닐고 있는 정빈. 살풋 바람이 불어오자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며 눈을 감는다. 뒤따르던 상궁 하나와 조내시가 정빈을 바라본다. 마냥 행복해 보이는 정빈의 표정.

정빈/ 자네들도 숨을 한번 들이 마셔보게나. 어디선지 달콤한 향기가 풍겨오는 거 같지 않은가?

순진하게 따라하는 상궁. 조내시는 따라 하긴 커녕 정빈의 눈감은 옆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상궁/ 이상합니다. 저한텐 안납니다?
정빈/ 그래? 조내관도 모르겠나?
조내시/ (비꼬듯) 아마도 정빈마마의 심기가 하도 즐거우셔서 미세한 향기도 집어내시는 줄 아옵니다.
정빈/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떠 조내시를 바라보더니) 내가 즐거운 게... 싫은가?
조내시/ (정빈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제가 어찌...

정빈이 잠시 음산한 시선으로 조내시를 바라보다가 다시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든다.

정빈/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어째서 이 향기를 그동안 몰랐을까...


62. 의금부, 당직실 D

죄수 하나가 겁먹은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광헌을 바라보고 있다. 광헌은 심각한 얼굴에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다.

광헌/ (문득 정신을 차리며) 내가 개인적으로 뭐 하나 물어 봐도 될까?
죄수/ (침을 꿀꺽 삼키곤) 개인...적?
광헌/ (진지하게) 잘 봐봐, 이중에서 어떤 게 제일, 그러니까, 완전히 쾌락의 극치에 달한 표정인가?
      자, 이거... 그리고 이거...
죄수/ (겁먹어서) ...미친척하는 거냐?
광헌/ 이건 좀 가식적이지? 이건 어때, (스스로 감탄하며) 꼭 아픈거 같지? 근데 약간 다르지?
      얘기 좀 해봐, 뭐가 제일 나은가?
죄수/ 네이놈! 아무리 내가 묶인 신세지만 어디서 감히 반말이냐, 이놈아!!
광헌/ (안색이 굳으며) 뭐가 제일 났냐니까?
죄수/ (겁먹었지만 큰소리로) 세 번째다, 이놈아!


63. 유기전 안 N

윤서와 복면을 쓴 광헌이 안으로 들어오다가 놀라 멈춰선다. 유기전안이 온통 엉망이 되어 있고 황가와 필사장이가 청소를 하고 있다.

윤서/ 아니 이게 어찌된...
필사장이/ (침통한 목소리로) 난리가 났었소.
황가/ 흑곡비사를 내놓으라고 백명도 넘는 하녀년들이 쳐들어 왔었다니깐? 하, 썅년들...
윤서/ ...그럼 우리 책이!
황가/ (쓱 윤서에게 다가오더니) 완전히 장안을 평정! 빌려가선 읽고, 또 읽고... 돌려주질 않는다니까?
     흑곡비사 읽느라고 전부다 폐인이 되버렸어, 폐인!

기쁨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 얼른 놓고 딴청을 부린다.

황가/ 그런데 이분은...?
윤서/ 삽화가시네.
황가/ 근데 왜 복면을...

(점프)
황가와 윤서, 광헌이 술상을 놓고 마주 앉아 있다.

황가/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시더라도 술은 한잔 받으셔야 되는데... 수훈갑이신데...?
광헌/ (목소리 변조해서) 마신거나 진배없네.
황가/ 아, 그 절정의 순간의 표정... 최고였습니다. 꼭 아픈거 같기도 하면서... 죽을거 같은, 응?
윤서/ 그랬나? 난 좀 못마땅하던데...
광헌/ (샐쭉해서) 그럼 더 나은 표정이 있단 말이요?
윤서/ 보통 그럴땐 재채기하는 표정 아닌가?
광헌/ ...재채기?
윤서/ 이렇게...(윤서가 해보인다)
광헌/ 이보시요, 김장령! 이 무슨 체신머리없는 행동이요! 아랫사람들 앞에서!

순간 광헌의 복면이 스르르 풀어진다. 황당한 실내... 광헌을 노려보는 황가. 광헌이 비실비실 웃으며 스스로 한잔 마신다.


64. 상점거리, 평상

술에 약간 취해 평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윤서. 앞을 지나던 남자를 불러세운다.

윤서/ 이보게, 자네 혹시 내가 누군지 아나?
지나던 남자/ 예? 모르겠는뎁쇼...
윤서/ 그렇겠지... 모르겠지. 가보게. (남자가 가자) 나도 날 모르겠는데 당연하지...

그때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는다

목소리/ 이보오, 추월색.

윤서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머리에 포대가 뒤집어 씌워지고 암전.


65. 어느집 안방 N

작고 연약한 남자. 수려하게 생겼지만 어딘지 그늘이 있다. 옷은 무명인데 전신에 금과 보석패물을 두르고 있다. 괴한들이 묶인 손을 푸는 동안 방을 둘러보면 바닥부터 천정까지 빈틈없이 각종 장이 쌓여 있다. 괴한들이 스르르 방을 나가는 동안 윤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남자.

무명옷남자/ 나, 추월색님의 광적인 독자요.
윤서/ 그런데?
무명옷남자/ 장안 최고의 음란작가께 부탁 드릴께 있어서...
윤서/ 최고는 무슨 최고... 인봉거사도 있는데...
무명옷남자/ (미소지으며) 인봉거사라... 인봉거사는 원래 당신 발끝도 못따라가.
윤서/ 어째서 그렇지?
무명옷남자/ 인봉거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을 쓰지. 당신은 당신이 꿈꾸는 걸 쓰고.
           그런데 어떻게 상대가 되겠어. 당신은 첨부터 최고였어,
윤서/ (싫지 않은 표정으로) 말이라도 고맙구만.
무명옷남자/ 고맙긴, 내가 고맙지. 나 진짜 당신 책 좋아해. (갑자기 표정이 슬퍼지는 남자)
           그런데 말이야,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윤서/ 그게 뭔데...?
무명옷남자/ 꼭 그렇게 남자의 상대는 여자여야 하나?  한번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면 안되나?
윤서/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말도 안되는 소릴...무슨 소리 하는거야, 그리고 그런 책을 누가 읽어?
무명옷남자/ 나... 나같은 사람.

순간 말문이 막히는 윤서. 남자가 애절한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본다.

무명옷남자/ 역시 어렵겠지? 아무리 음란작가라도... 그건 쉽지 않겠지?
윤서/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다가) 그런데 뭘 하길래 이리 방꼴이 거창한거야?
     보아하니 관직에 있을 리는 없고, 장사치도 아닌거 같고...
무명옷남자/ 나, (잠시 망설이다가) 나, 어떤 높은 사람 정인이야.
윤서/ 높은 사람? 얼마나 높길래? 왕이라도 되나?
무명옷남자/ 왕은 아니지만... 무척 높지. 아무튼 당신한테 이 부탁을 하고 싶어서 데리고 온거야.
           나 하나만을 위해 책을 써줄 수 없나 하고.
           대신 원하는 것은 뭐든지, 재물이든... 부탁이든... 뭐든지.
윤서/ 써주면... 뭐할건데? 비슷한 처지들끼리 돌려 읽을건가?
무명옷남자/ 아니, 절대 그런일은 없을거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러니까... 영감하고 나란히 엎드려 둘이서 읽고 싶어서...
윤서/ (물끄러미 남자를 보다가) 인간사는 정말이지... 알수가 없어.
무명옷남자/ 그런 거지 뭐. 사람이란 게... 진짜 무서운 거야. 사람처럼 무서운 게 없어.
            왠줄 알아? 다들 비밀이 있기 때문이지. 당신만 해도 비밀이 있잖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윤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밝아지는 남자의 표정.

윤서/ 써주지. 대신 아무것도 받진 않겠어. 부탁할 것도 없고.
무명옷남자/ (약간 얼굴색이 바뀌며) 그러니까...지금 동정하는건가?
윤서/ 내가 누굴 동정할 주제나 되나. 다만... 당신... 진심인 것 같아서... 그래서.

두 사람의 눈빛이 한동안 마주친다. 이해못할 이해심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른다.
남자가 따라주는 술을 훌쩍 마시는 윤서, 그런 윤서를 바라보던 남자.

무명옷남자/ 그나저나 글만으로도 이미 최곤데... 왜 그림까지 넣어?
윤서/ 인봉거사... 이기고 싶어서.
무명옷남자/ (픽 웃더니) 바보구만. 자, 한잔 더 받아.

점차 남자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윤서.


66. 주막집 평상 D

깨어나는 윤서. 아침 하늘에 구름이 밝아오고 있다. 일어서다 비틀하는 윤서, 천천히 걸어간다.
그 위로,

무명옷남자/ (소리) 너무 욕심부리지마. 최고가 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행복해야 되는거야.
                  행복하지 않으면 최고가 아니지. 난 이 방안에만 있지만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
윤서/ (소리) 그야 사랑 받으니까.
무명옷남자/ (소리) 사랑받아서 행복한게 아니고 행복하니까 사랑받는거야, 역시 바보구만. 


67. 정빈의 처소, 그림방 D

각종 음식들이 연이어 들어와 상에 올려지고 있다. 밝은 표정의 정빈이 귀족부인들 예닐곱을 모아놓고 회연을 벌이고 있다. 귀족부인들은 어딘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정빈을 흘깃거린다.

정빈/ 오늘 이 자리를 마련 한 것은 그동안 제가 몸이 시원찮아 부인들께 소홀했던 것을
     사과하는 의미이니 흔쾌히 즐겨주세요.
부인들/ 황공하옵니다.
정빈/ 앞으로는 자주 이런 자리를 마련할테니 저에게 바깥소식도 전해주시고
      바깥양반들 흉도 봐주시고 하세요.

갑자기 조용해지는 좌중.

정빈/ 농담입니다. 흉보실 것 없는 부인께서는 안보셔도 무방합니다.

입은 벌리지 않은 채 웃는 정빈. 그러나 부인들은 또 서로 눈짓을 교환할 뿐 반응이 없다.

부인1/ 어찌 이리 씻은 듯 쾌차하실 수 있는지 기쁘면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빈/ 어의의 신묘막측한 의술 때문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다시 웃음소리를 내는 정빈. 역시 썰렁한 좌중. 그제서야 이상한 느낌을 받는 정빈.

정빈/ 제가 오늘 기분이 좋은터에 자꾸만 실없는 소리를 해서인가요, 어째들 어색해 하시는 느낌입니다?
부인2/ 그럴리가요.
부인1/ 그나저나 바깥소식이 궁금하시다고 했는데 어떤 소식이 궁금하십니까?
정빈/ 그야... 그저 항간의 소식 말이지요, 뭐 특별히 알고 싶은 이야기야 있겠습니까?
부인1/ (다시 눈짓을 교환하더니) 저희는 마마께서 특별히 알고 싶으신 소식이라도 있으신가 했습니다.
부인2/ 바깥소식이랄까, 풍문이랄까... 그런 것을 자주 듣고는 계십니까?
정빈/ (이미 싸늘해진 분위기) ... 예를 들자면?
부인2/ (약간 겁먹으면서도) 그러니까... 추문이랄까 뭐 그런 것 말이죠.

당황하는 부인들, 부인2에게 눈짓을 보내지만 정빈도 그것을 보고만다. 정빈, 고개 돌리면 궁녀들이 고개를 황급히 숙인다. 얼버무리듯 잔을 드는 부인1.

부인1/ 아이고, 이거 음식이 들어온지가 언젠데 술을 아직 한 잔도 안했습니다.
      정빈마마의 쾌차를 축하하며 건배함이 어떤가요?

정빈, 따라서 잔을 들면서도 의혹에 찬 눈길로 부인들을 훑어본다. 뒤를 돌아보면 부복하고 있던 궁녀들도 정빈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는 눈치다. 어쩐지 자기만 모르는 일이 있는 것 같다.


68. 정빈의 처소, 침소 D

정빈이 눈앞에 새장을 놓고 들여다보며 엎드려서 안마를 받고 있다. 안마를 하고 있던 상궁,

상궁/ 아, 저 암놈은 이상하기도 하지, 숫놈이라곤 달랑 하나 있는데 그 꼴을 못봐주고 쫘서 죽였네.
정빈/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
상궁/ 다른 암놈이 있어서 바람을 피웠을 리도 없고, 죽으면 저 혼잔데...
정빈/ 자네 혹시 육시라고 아는가?
상궁/ 예? 육시라면... 육시랄놈할 때, 황공하옵니다. 아무튼 그 육시말입니까?
정빈/ 음.
상궁/ 그야, 알긴 아옵니다만... 말에 사지를 묶어서 찢어죽이는 형벌 아니옵니까?
정빈/ (피식 웃으며) 그렇게 통쾌하다면 누가 그 형벌을 두려워하겠는가.
      원래 그 형벌은 이가 빠지고 녹슨 칼을 가지고 하는거야.
      잘 들지도 않는 칼로 천천히... 스걱스걱... 팔 다리를 잘라 나가는거지.
상궁/ (겁먹어서 잠시 손길을 멈췄다가) 끔찍하게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정빈/ 어디 그뿐인가, 다리를 자르다가도 잠시 볼일이 있으면
      반쯤 다리 속으로 들어간 칼을 그냥 두고 가기도 하지.
상궁/ (울상을 지으며) 갑자기 왜...
정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 형벌을 받게 될지도 몰라. 알겠느냐?
상궁/ 마마...
정빈/ 오늘 그 부인년들이 어째서 내 얼굴을 흘깃흘깃 보며 쑥덕거린게냐?
상궁/ 그건,
정빈/ 네가 육시를 아직도 만만히 보는게로구나.
상궁/ 그게 아니옵고...

벌벌 떨리는 상궁의 손길.


69. 유기전 안 N

윤서와 황가가 마주 앉아 마케팅 회의 중이다.

황가/ (윤서의 눈치를 보며) 북촌은 모두 반댄데...
윤서/ 그렇게 가고 싶은걸 어쩌겠나.
황가/ 그래도... 북촌에서 모두들 싫다는데.
윤서/ 이 사람아, 북촌에서들 싫어한다고 내 쓰고 싶은대로 못 쓴다는게 말이나 되나.
황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우? 북촌은 우리책의 제일 고객들인데? 그쪽 독자들이
      죽이지 말아 달라면 절대로 죽이면 안된다니까, 절대로!
윤서/ 허, 독자들이 글의 결말을 좌지우지 하다니, 고금에 없는 망발일세.
황가/ (다시 샐샐거리며) 아무튼 살려서 북방쪽으로 둘이 도망치는걸로... 응?
윤서/ 그런 무책임한 결론은 내 글에는 없는걸로 알게.
황가/ (삐져서 벌떡 일어나며) 하여간, 이렇게 삽화가가 회의시간을 안지키니, 원!

황가가 밀실로 들어가자마자 덜컥하고 문이 열린다. 불빛을 등지고 들어서는 여인(정빈)의 실루엣! 장옷으로 얼굴을 완전히 감싼 채 눈만 형형하게 좌중을 쏘아보고 있다. 윤서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외면한다.

윤서/ 문 닫았소.
정빈/ 그릇 사러 온게 아니라 책을 빌리러 온걸세.
윤서/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지만) 여긴... 그릇가게인데? 
정빈/ 잘못 온건 아닌 것 같은데...? 추월색의 책을 빌리러 왔는데, 추월색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니.

외면하고 있던 윤서의 눈이 커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장옷을 벗는 정빈. 두 사람의 눈이 한동안 마주치고, 윤서가 천천히 평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 윤서를 스쳐 지나 평상위에 있던 책을 집어들고 펼쳐보는 정빈. 몇 장을 넘기다가 삽화부분이 나오자 충격에 짧게 숨을 들이 마신다. 헛짚단처럼 평상에 주저앉는 정빈. 윤서를 바라보는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 흘러내린다. 유구무언의 윤서, 몸을 일으키지만 고개를 들지 못한다. 한동안 흐느끼고 있는 정빈을 바라보는 윤서의 뒷모습.

정빈/ (의외로 차분하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신 겁니까...
윤서/ 나도 잘 모르겠소... 마음이 동하여 한자 한자 쓰다보니 여기까지 왔소.
정빈/ 이 책 때문에... 절 이용하신 겁니까?
윤서/ 이용하려던 것은 아니나 최고의 책을 만들고 싶은 맘에... 그리 되었소.

정빈,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을 다시 펼쳐 넘긴다. 삽화부분에 이르자 손길이 멈춘다.

정빈/ 이 그림을 그린 자는... 모든 것을 본건가요?
윤서/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빈/ (그말에 분노가 치미는지) 누굽니까. 솜씨로 보아 항간의 잡배는 아니고...
윤서/ 그림을 그린 자는... 말씀드릴 수 없소.

정빈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어이가 없어 눈이 동그랗게 커져있다.

정빈/ 말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윤서/ 말씀... 드릴 수가 없소.

경악하는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보는 정빈,

정빈/ 어떻게... 절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면서... 고작 그림 그린 자도 말해 줄 수가 없다구요?
윤서/ (괴로운 표정) 정말이지... 내가 죽일 놈이오.
      그는... 나만 믿고... 나의 약조를 믿고 이 일을 맡은 것뿐이오.
      그러니 허물을 모두 나에게 씌워 주시오.
정빈/ 그러니까... 그 약조는 중요하고... 목숨을 걸고 궁밖으로 나온 제 맘은 아무것도 아닙니까?
윤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의 이름은...

정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정빈, 잠시 윤서를 바라보다 천천히 장옷을 입으며 일어선다.

정빈/ 그랬군요... 그랬었군요.


70. 상점거리 N

조내시가 들고 있는 궁등을 따라 가고 있는 정빈을 따라가 팔을 붙드는 윤서, 순간 조내시가 윤서의 팔을 잡아 꺾는다. 장옷을 벗으며 조내시에게 표독스레 외치는 정빈.

정빈/ 네 놈이 감히!  어디서 나서는게냐!

팔을 놓으며 몸은 외면한 채 궁등만 두사람을 비추는 조내시. 얼굴은 수치심에 가득하다.
윤서를 바라보던 정빈의 얼굴에 스르르 미소가 번진다. 천천히 장옷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정빈. 멀리서 여명이 솟고 큰 종을 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돌아서가는 정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황가가 옆 골목에서 머리만 내민다.

황가/ 궁에서 나온거 같은데?
윤서/ (고개를 끄덕이고)
황가/ 아, 일 크게 만드시네... 이름 말해줘 버리지...?
윤서/ ...자넨 궁을 모르니까... 그런 소릴 하지.
황가/ 에이... 그리고 여자를 진짜 못 다루네. 책에선 그렇게 청산유수더니.
     아, 사랑한다고, 사랑해서 그런거라고 그러면 다 믿는데...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윤서/ ....

그때 광헌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다가온다.

광헌/ 이상하네... 내시 같은데?
황가/ 내시는 무슨 내시! 맨날 늦구...(돌아서 가며 혼잣말처럼) 하, 찝찝하네.
     여자, 녹녹치 않아 보이는데...?


71. 정빈의 처소 D

왕이 그림방에 들어서다가 어리둥절하여 멈춘다. 내시들 따라 들어왔다가 빠진다. 미닫이문 앞에 있던 상궁 둘이 왕을 마중하여 평상으로 앉힌다.

왕/ (주위를 두리번대며) 아니, 무슨 일이요?
정빈/ (웃으며) 왜요, 불안하십니까? 어느 부인 하나가 옷을 좀 보냈기에 한번 봐 주십사 하고...
왕/ 옷을?
정빈/ 속옷입니다. 속옷이라면 전하마음에 드셔야겠기에...

당황하는 왕, 안절부절하는데 잠시 후 정빈이 자극적인 속옷을 입고 나온다.

정빈/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시는지요.
왕/ ...허 이런...
정빈/ 다른 것으로 입어볼까요?

정빈이 다시 침소로 들어가고, 이런 저런 속옷을 입으며 왕을 유혹한다.
어쩔줄 모르는 왕, 마침내 닫히려는 침소 문을 턱 막으며.

왕/ 자네들은 좀 나가있게.

상궁들이 스르르 나가자 황급히 침소 안으로 들어오는 왕.

정빈/ 이런, 여기는 들어오시면 아니됩니다.
왕/ (정빈을 껴안으려 들며) 무슨 소리요,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정빈/ (요리조리 피하며) 아직 다 입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왕/ 아, 날 죽일 작정이요?

마침내 정빈을 제압한 왕, 두 사람이 침소 안에서 뒤엉킨다.
정빈을 이끌고 그림방 평상으로 가는 왕.

(점프)
그림방의 평상에 누워있는 두 사람.

왕/ 그나저나 평소의 정빈답지 않소이다.  
정빈/ 제가 그리도 무뚝뚝하였습니까?
왕/ (약간 당황하며)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정빈/ 요즘에서야 전하의 심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하를 가지신 분이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우실까... 앞으론 더욱 잘하겠습니다.
왕/ (정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허허, 우리 정빈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정빈/ 철이 들은게지요. 게다가 요즘 제가 좀 속상한 일이 있고 보니
     더욱더 전하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 넓은 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어찌보면 전하와 저 둘만이 살고 있는거나 진배없다는 생각도 하고요.
왕/ (뭉클한듯 외면을 하며) 허... 사람도... 날 울리실 작정이요?
정빈/ (눈물을 한방울 흘리며) 울리다니요... 망극하게도...

다시 정빈에게 다가들던 왕의 손길이 문득 멈춘다.

왕/ 그런데 그 속상한 일이란 건 무에요?


72. 윤서의 사랑채 D

아침운동 하는 윤서.
하녀가 놋대야에 떠다 받친 세숫물에 얼굴을 씻은 윤서. 모시수건으로 닦는데, 어디선가 까마귀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들창 밖을 바라보는 윤서.


73. 의금부 뒤뜰 D

의금부 관리들이 공을 차고 있다. 제일 열심히 뛰고 있는 광헌. 흰색 차일 밑에는 구경하는 사람들. 그때 관리 둘이 오더니 광헌을 소리쳐 부른다. 

관리1/ 빨리 좀 나와보시게.

(점프)
광헌/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꼭 제가 가야 됩니까?
관리2/ 그럼?
광헌/ 반역죄도 아니니... 문초할 것도 아니고...
관리1/ 에이. 그거야 아니지만... 뭐, 그냥 사대부 체통을 깬거니까 겁이나 주고 보내는 거지.
      아, 뭐하시나? 얼른 채비하시게.

돌아서서 가는 관리들.

관리2/ 아! 우리 의금부는 꼭 무슨 행사만 할라 그러면 이런 시시껍절한 일이 생긴다니까?
광헌/ 그런 책을 쓰는 것도 죄가 됩니까?
관리1/ (돌아서며) 풍속문란.


74. 의금부 감옥통로 D

의관을 갖추는 광헌. 끌려가는 윤서를 보고 얼어붙는다. 감옥통로 끝으로 멀어지는 윤서.

내시(o)/ 상감마마 납시오.

돌아보는 광헌.


75. 의금부, 고신장소 D

왕이 의자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윤서를 노려보고 있다. 주위엔 의금부 최상급자들과 광헌이 부복하고 있고 내시들이 왕의 뒤에 서 있다. 뒤로 묶인 윤서의 손은 이미 핏기를 완전히 잃어 새하얗게 변해 있다. 윤서를 한동안 노려보던 왕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왕/ 이 자는 어쩐지 눈에 익은데?

내시가 스르르 왕의 귀에 대고 알려준다. 고개를 끄덕이는 왕.

왕/ 그래, 그래... 그렇다면 그때 보고서 이런 짓을 벌린거로군. (웃으며) 죽어 마땅한 놈이구만.
윤서/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왕/ 이런 경우엔 어떻게 처리하지?
상급자/ (왕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굴리다가) 보통 사대부 풍속사범의 경우 직계와의 간통만 아니면
        관직을 삭탈하는 정도에서 마무리 되는줄 아뢰오.
왕/ 무어라? 이게 단순한 풍속사범으로 보이느냐?
상급자/ (당황해서) 하지만 이 경우엔 내명부가 관련되어 있으니 중형에 처하는 것이 옳은 줄 아뢰오.
왕/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지금 내명부가 관련... 운운 하였느냐?
상급자/ (아, 미치겠네) 그런 뜻이 아니옵고, 몹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줄 아뢰오.
 
고신장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왕. 당황하는 내시들. 다시 윤서를 노려보는 왕.

왕/ 내 네 놈 생각을 좀 했지. 네 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말이야.
    (용포자락이 핏물에 젖고 내시가 옷을 들려하자 손으로 저지한다.)
    죄로야 몇 천번을 죽은들 갚아지겠냐만... 그러자면 내명부의 체통도 상하고...
    그리고 네놈의 글은 사실 누구를 지칭한 것은 없어, 그렇지 않은가?
상급자/ (당황하다가) 그런줄로 아뢰오.
왕/ 그래서 그냥 풀어주겠다. 하긴 그런다고 네놈이 인간구실 하겠냐만...
    네놈 집안에선 산 초상을 치를테고... 네놈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것도 아닌...
    그런걸 뭐라 불러야 되나...?
상급자/ 산송장이 어울릴 듯하옵니다.
왕/ 그래, 그거지... 산송장. 하지만 그림 그린 놈은 달라,
    그놈은 정빈... 내명부의 얼굴을 묘사했단 말이지. (피 밟고) 그놈은 용서를 할 수가 없어.
상급자/ 지당하신 줄로 아뢰오. 하면, 그림을 그린 자는 누군가?

잠시 침묵이 흐른다. 광헌의 고개가 스르르 숙여진다.

윤서/ 저... 본인 올시다.
광헌/ (고개를 들고)
상급자/ 본인이라면 자네가 직접 그렸단 말인가?
윤서/ 그렇습니다. 제가 쓰고, 제가 그렸습니다.

윤서를 노려보는 왕의 얼굴에 스르르 미소가 번진다.

왕/ 허, 그놈... (의자로 가 앉으며) 네놈이 지금 누굴 감싸주려는 게냐?  네놈 처지를 알고나 있느냐?
윤서/ 처지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제가 직접 그린 것이기에 사실을 여쭈올 따름입니다.
왕/ (윤서를 노려보다가 웃는다) 허- 이놈 봐라. 내 이미 너를 용서했는데 어찌하여 분을 돋우느냐.
    그러지말고 그린자의 이름을 말해라.
윤서/ 진정으로 제가 그렸나이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왕/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놈이로고. 사대부의 본분, 공맹의 도리, 다 져버린 놈이 그런 의리를...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고신하여 물어볼 밖에. 내일부터 시작하게.
상급자/ 전하... 이 사안은 고신의 사안은 못 되는 줄 아옵니다. 평문으로 충분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왕/ (담담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그 소신에 명운을 걸 수 있겠나.
상급자/ 아, 아니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76. 의금부 감옥통로 D

윤서를 광헌과 오나장이 데리고 나온다. 먼저 나와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있던 상급자,

상급자/ (윤서에게) 자네... 국문할 때... 한번도 안 와봤나?
윤서/ ... 예.
상급자/ (한숨쉬듯) 그렇겠지... 그러니 고집을 부리지.
       (부하들에게) 휴, 어쩌겠나... 준비들 하게.
광헌/ 예.

광헌과 오나장이 윤서를 데리고 나가고, 물을 마저 마시는 상급자.


77. 의금부 감옥 밖 D

담벼락 아래 칼 찬 죄수들. 


78. 의금부 감옥 독방 D

바깥의 수런거리는 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윤서의 감옥 안은 고요하다. 짚이 깔린 바닥에 정좌로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윤서. 무릎 앞에는 조밥과 멀건 국이 한 그릇 있지만 손도 대지 않은 모양새이다. 옥리가 열어주는 문으로 광헌이 들어온다. 천천히 눈을 뜨는 윤서. 광헌을 보는 윤서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광헌/ (윤서 앞의 밥그릇을 보며) 입에 안 맞아도 드셔야 하는데...
윤서/ 입에 안 맞아서가 아니고... 아직 손이 말을 듣지 않는구만.

고개를 들어 윤서를 바라보는 광헌, 윤서의 얼굴과 목, 옷에 벌써 이와 벼룩 따위가 바글바글 기어다닌다.

광헌/ 정말... 내 이름을 말하지 않을 거요?
윤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생각인데...
광헌/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하게 될거요. 결국엔... 고신이 뭔지 모르니까 그런 소릴 하는거지.
      그런데 이상하게 내입으론 말 못하겠소. 이상하지... 너무 두렵소...
윤서/ 그런 생각 할 필요도 없는데... 이런 일 하나만 겪으면 되는거지...
      내 내일 좀 참아 보리다. 명색이 사대분데 그만한 일로 심하게야 하겠소.
      좀 물어보다가 정 고집부리면 그만두겠지.
광헌/ (윤서를 바라보며) 염치없는 말이지만... 날 용서해 주시오.
윤서/ 내가 할 말이요. 싫다는 사람 공연히 끌어들여서. 어서 가시오, 그쪽으로 벌레 갈까 무섭소.

그 말에 눈물이 핑 도는 광헌,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린다.
화면이 천천히 암전된다.


79. 윤서의 집, 큰사랑채 D

큰사랑채에 집안 원로들이 윤서부를 둘러싸고 반원형으로 앉아 있다. 윤서부는 눈을 감고 원로들의 말을 듣고 있다. 바닥에는 흑곡비사 몇 권이 놓여있다.

노인1/ (책상을 내리치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말일세! 망신도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지 않은가!
노인2/ 책을 보는데 손이 떨려서 내 읽을 수조차 없었어!

그러면서 다시 책을 들어 필요 이상 들여다보는 노인2.

노인1/ 긴말 할 것 없고 어떡할 것인가만 말하게.
윤서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노인1/ 어찌하긴! 호적에서 완전히 파버리고 장례를 치러야지! 위패도 없애고,
       그러니 제사도 없지! 살아 이룬 것이 없으니 태어나지도 않은 것으로 해야지!
윤서부/ (처음으로 눈을 뜨며) 어른들께선 이 책이 고작 음란서로 밖에 안 보이십니까?
노인2/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음란서가 아니면?
윤서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우리 윤서, 몰라도 너무 모르십니다. 좋습니다, 책을 한번 볼까요?
       (책상 위로 몰려드는...) 여기서 주인공은 김가입니다, (책에 글씨를 쓰며) 그런데 내명부의...
       그곳을 탐할 때 갓을 벗지요?
노인1/ 통탄할 노릇일세, 사대부가 갓을 벗고 구강으로 허, 참...
윤서부/ 김에서 갓을 빼보시요, 뭐가 남습니까! 바로 임금왕이 남습니다.
노인2/ 점이 두 개 남는데... (윤서부가 째려보면, 고개 끄덕이며) 아- 수염...
윤서부/ 이것은 황실이 외척의 치마폭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좌중이 조용해진다. 어이가 없어서 윤서부를 바라보는 노인들.

노인4/ 좀... 억지 아닐까...?
윤서부/ 억지라뇨! 오십칠 쪽을 보세요. (잠시 기다렸다가)두 남녀가 서서 교합하는 삽화가 있을 겁니다.
       이걸 보고도 떠오르는 게 없으십니까? 바로 수풀림자! 임가 놈을 조롱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뿐만 아닙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글과 그림에 비밀이 숨어 있으니
       제 자식놈이지만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노인1/ (불만스럽지만) 음... 글쎄... 그렇다손 치더라도 굳이 이런 방법을...
윤서부/ 만약 이게 단순한 음란서라면 관직이나 삭탈당하고 나올겝니다. 하지만 두고 보십시요,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를 챌 겝니다. 물론 안 채길 바랍니다만,
 
그때 정서가 쩔뚝이며 들어온다.

정서/ 이를 어쩝니까! 고신으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순간 노인들이 모두 윤서부를 놀란 눈으로 돌아본다. 코로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며 눈을 감는 윤서부...
      
윤서부/ 잠시나마 심려 끼쳐 드린 점 어른들께 죄송스럽습니다.
노인1/ 그러면 그렇지! 조선 제일 문장이라는 우리 윤서가 그럴 리가 없지.
노인2/ 고신은 크게 걱정말게, 아마도 의금부 속어로 봄 정도 일걸세. 손가락에 젓가락을 끼워
      비트는 거지. 거기서 참으면 풀어줄 걸세. 특별한 물증은 없으니...
노인1/ 봄이라면 그다음 여름은 무엔고?
노인2/ 땡볕에 세워 놓는 것 아닐까요?


80. 의금부 고신장소 N

정빈의 얼굴에 간혹 핏방울이 날아든다. 윤서가 허공에 매달려 얻어맞고 있다. 하지만 눈 하나 깜작않고 바라보는 정빈. 때리던 나장들이 숨을 헐떡이며 몽둥이를 늘어뜨린다. 광헌은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윤서를 올려다본 나장들이 상급자를 바라본다. 상급자는 정빈을 돌아본다. 윤서의 발밑으로 떨어지는 피를 보고 있는 정빈. 작게 헛기침하는 상급자, 수건을 내민다.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든 정빈,

정빈/ 뭡니까, 벌써들 지친 것은 아닐테고?
상급자/ 그게 아니옵고... 이 정도면 그만하는 것이 원칙이옵니다.

정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서를 올려다보면 정신을 잃은 윤서의 목불인견의 참혹한 모습, 그러나 정빈은 눈살을 잠시 찌푸리더니,

정빈/ 고작... 고작 이정도란 말이오? 저렇게 중한 죄를 지은 죄인에게?
      시작 전에는 혀가 나올 때까지 한다고 하지 않았소!
광헌/ (그 말에 울컥하지만 허리를 깊게 조아리며) 고작이란 말씀은 거두어주소서.
      죄인은 지금 황천을 넘나들고 있사옵니다. 대역죄인도 아닌바...
      그리고 혀는... 혀는 하도 꽉 다물어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정빈, 다시 물끄러미 윤서를 바라본다. 정빈의 표정이 복잡하다.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빈/ 말할까봐... 자기도 모르게 말할까봐 꽉 다문거구만.
     (바라보다가 다시 미움이 용솟음치는지) 고신이 이정도일 리가 없지. 이보다 윗길은 무엇이요?
상급자/ (떨리는 목소리로) 우선 주리를 틀고, 그 다음은 인두로 지지는 가을이 남았는 줄 아뢰오.
       하지만 이런 사안에는, 특히 사대부에게는 대역죄가 아닌한 곤란한줄 아뢰오.
정빈/ 뭐라구요?
광헌/ 우선 내려야겠습니다. 이러다 죽겠습니다.

광헌이 윤서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 서슬에 슬그머니 사람들이 자리를 비키는데 정빈, 윤서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광헌, 정빈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심한다.

광헌/ (윤서만 보면서 말한다) 그 그림 그린 자가 잡히면... 끝나는 것인지요...
정빈/ (고개를 들어 노려보며) 무슨 말이지요?
광헌/ 그린 자를 말하지 않아 저렇게 된 것이니 그가 잡히면 끝나는 것인가요?
정빈/ 그린 자를... 알고 있소?
광헌/ 그 사람도 스스로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을겁니다. 하지만  잡혀와서...
      고통을 못참고 모든 것을 말해버리게 될까봐... 못나오는 것이면 어떻게 하지요.
   
천천히 광헌에게 다가오는 정빈, 얼굴이 다시 표독스럽게 바뀌어 있다.

정빈/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어요. 난 저 사람의 입에서 그 얘기를 들어야겠으니... 
      이제부턴 주상이 친견하실테니 단단히 준비들 해두세요!

정빈이 나가고 나자 윤서를 부축해 일으켜 윤서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는 광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안타까운 표정.


81. 왕의 집무실 N

어두운 집무실, 왕이 의자에 앉아 구석에 서 있는 조내시를 바라보고 있다.

왕/ 넌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놈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조내시/ ...갑자기 무슨 말씀이온지...
왕/ 난 항상 너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평생 보기 위해 남자를 포기한 놈... 불쌍하지 않느냐?
조내시/ (허리를 쓱 숙이며) 무슨 말씀이시온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왕/ (웃으며)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아느냐... 바보 같은 놈... 상관없다. 그런데 말이다,
    이 밤에 너와 이렇게 둘이 있으니 누가 더 불쌍한지 알 수가 없구나.
조내시/ ...전하.
왕/ 니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조금은 알 것도 같구나.

어둠속에서 조내시의 눈물이 흐르는 것 같다.

왕/ (일어서며) 가보자, 그 놈... 얼마나 잘난 놈인지 가보자.


82. 궁궐 복도 N

복도를 걸어가는 조내시와 왕. 그 위로 윤서의 비명소리가 점점 커진다.


83. 의금부 고신장소 N

윤서의 다리가 부러진다. 기절한 윤서의 비명이 멈춘다.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토하는 광헌. 노려보고 있는 좌의정과 정빈. 고조되는 사운드들이 가라앉으며 실내는 정적을 되찾는다.

왕/ (좌의정 돌아보며) 별놈 다 보겠군. 주리를 틀어도 말을 않는구만...
좌의정/ (윤서를 노려보며 고개만 끄덕인다)
왕/ (윤서 쪽으로 오며 광헌을 본다) 매일 겪는 사람이 비위가 그래서야 ... 다음은 뭐지?
오나장/ 다음은 낙형이라 하여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이 있사옵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윤서를 바라보는 정빈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정빈의 손을 보며 뭔가 묘한 태도를 취하는 왕. 조내시를 바라본다.

조내시/ 한식경 후에 다시 시작할 터이니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오.

왕이 급하게 일어서 나가자 내시들이 허둥지둥 뒤를 따른다. 일어서는 정빈, 윤서의 부러진 다리와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나간다.


84. 의금부 감옥, 통로 N

드문드문 횃불이 밝혀진 통로를 윤서를 업고 걸어가고 있는 광헌. 부러진 윤서의 다리는 흔들거리고 광헌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85. 의금부 감옥 독방 N

윤서를 짚단위에 내려놓는 광헌. 그 서슬에 윤서가 깨어난다. 광헌을 알아보고 희미하게 미소짓는 윤서.

윤서/ 이거... 다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광헌/ 부러졌소. 부러뜨렸소, 내가.
윤서/ 어디 사람이 그랬겠나, 나무가 그랬겠지. 그나저나 힘들게 뭐하러... 그냥 거기 둘 일이지.
광헌/ 밤하늘이라도 보게 해 드릴려고... 마지막으로...
윤서/ ... 마지막으로?
광헌/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인두로 지질테고... 어차피 살긴 어려울 듯해서...
     또 살아도 사람 구실하기 어려울 테고 그래서... 내가 김장령... 죽일 셈이오.

말을 마치면서 광헌이 흐느낀다. 윤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 창살 밖의 밤하늘을 바라본다.

윤서/ 숯이라는 게...
광헌/ (고개를 든다)
윤서/ 숯이라는 게 한번 피기 시작하면 금방이니까...

그 말에 광헌이 칼을 꺼내들고 윤서에게 다가 앉는다. 칼을 천천히 윤서의 목에 대는 광헌,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린다.

윤서/ 그런데, 이러면...?
광헌/ 상관없소, 나도 곧 뒤따라 갈꺼요!
윤서/ (조금 더 말리려다가 힘드는지) 만나서 좋았소. 저승에서 만나면... 백마도 한 장 그려주시오.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광헌,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광헌/ 나도 만나서 좋았소, 정말 좋았소, 잘 가시요!

그때 갑자기 창틀이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의아해 올려다보는 두 사람. 그러다가 창틀이 통째 뜯겨져 나간다. 놀라 광헌이 일어서는데 뜯긴 창틀로 상체를 들이미는 황가. 평소답지 않은 낮은 목소리.

황가/ 괜찮은거유? 영감쟁이들이 암소를 데리고 와서... 겨우 뜯었네.
윤서/ (놀라며) 이게... 무슨 짓인가?
광헌/ 어떻게... 경비가 없었소?
황가/ (윤서를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사람을 저 모양을 해 놓고... 나한테 말을 걸어?
광헌/ (역시 울먹이며) 그렇게 됐소... 할말이 없소.
황가/ 빨리 이리 올리슈.

그때 옥안으로 들어서는 오나장.

오나장/ 아니, 왠 놈이냐! (창틀을 보고는) 이놈 봐라?

순간 다가서서 오나장의 목을 후려치는 광헌. 숨소리를 컥 내며 오나장이 쓰러지자 윤서를 들쳐 매려는 광헌.

광헌/ 가십시다!
윤서/ 지금 무슨 소리 하는게요?
광헌/ 예?
황가/ 예?
윤서/ 나더러 국법을 어기고 도망을 치자는 얘기요?
황가/ (조바심이 나서) 하- 미치겠네? 지금 무슨 국법,(말하려다 말며) 말하면 뭐해,
     말해봐야 소용도 없어. (광헌에게 눈짓하며) 자 얼른!

잠시 어리둥절하던 광헌이 눈치채고 강제로 윤서를 들쳐 업어 창틀 쪽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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