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란 서 생
김대우 시나리오
2005년 8월 1일
김윤서/ 36세 사헌부 장령(정4품)
이광헌/ 33세 의금부 도사(종5품)
정빈/ 24세 후궁
황가/ 오십대 유기전주인
필사장이
모사장이
조내시/ 32세 정빈의 육촌오빠
김정서/ 30세 윤서의 동생
1. 프롤로그, 상점거리 -새벽
어두운 거리에 궁등만이 꿈결처럼 넘실댄다. 밤의 상점거리엔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만이 가득하다.
유난히 걸음걸이가 빠른 한 하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고 있다.
문이 닫힌 한 상점 앞에 서더니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문을 조심스레 두드린다.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조금 더 세게 두드린다.
나무문이 빼꼼히 열리며 한 남자(유기전주인 황가)가 의심스레 내다본다.
황가/ (나즈막한 소리로) 뭔 일인데 두드리고 난린가 모르겠네...?
하녀/ (어색하게) 그릇 사러왔는데...
황가/ 문 닫은 것도 안보이나?
하녀/ (다시 닫으려는 문을 가로 막으며 급하게) 저... 아무것도 못 담는 그릇 없어요?
황가/ (물끄러미 보다가 짜증스레) 에이, 급하게 살 그릇이 있다고 먼저 말해야지!
하녀/ (낮은소리로) 아, 맞다, 급하게 살 그릇이 있어서...
황가/ ...누구 소개냐?
하녀/ 최참판댁 작은순이가...
황가/ (잠시 바라보다가) 제대로 가르쳐서 보내던지 하지...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한번 들어와 찾아보던가...
하녀가 주인이 열어준 틈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주위를 한번 돌아본 주인, 문을 걸어 닫는다.
담처럼 닫힌 문짝들을 배경으로 다시 궁등들이 지나간다.
주 조연의 이름들이 구석에 떠오르더니 페이드 아웃 되면서 메인 타이틀이 붓글씨처럼 날렵하게 쓰여진다.
2. 타이틀 “ 음란서생
^
”
3. 상점거리 -새벽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상점거리, 모든 상점의 문이 닫혀 있고,
길 한가운데에 개 한 마리가 무언가 먹고 있다가 육중한 땅울림에 흠칫 피한다.
횃불을 든 하인들이 소달구지를 몰고 오고 있다.
달구지에는 이불로 둘둘 감싸인 무언가가 놓여 있고, 곁에 서서 달리는 윤서의 표정이 다급하다.
4. 윤서의 집, 마당 -새벽
황급히 열리는 대문으로 달구지(정서 들것)가 들어온다.
대청마루에서 덜덜 떨며 바라보는 윤서의 아버지.
윤서부/ ...젖혀 보아라.
달구지를 몰고 온 하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윤서가 이불을 젖히면 산발을 하고 피투성이인 정서(윤서의 동생)의 모습이 드러난다.
순간 혼절하는 윤서의 어머니. 윤서의 처가 황급히 부축한다. ‘아이고’소리를 연발하는 나이든 하녀들.
윤서부/ 살아는... 있는 거냐?
윤서/ (고개 들며) 겨우... 숨만.
윤서부/ 어서... 방으로 옮겨라.
5. 윤서의 집, 안채마당 D
어린 하녀가 약탕관이 끓고 있는 화로에 다급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다.
6. 윤서의 집, 큰사랑채 D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정서를 둘러싸고 윤서부와 집안 노인들, 윤서와 윤서처는 문밖 마루에 서있다.
참담한 얼굴로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윤서부.
윤서부/ 그만들 우십시오, 운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이미 당한 것을...
노인1/ 참혹하고... 참혹해서... 어찌 사람을 이 꼴로...
노인2/ (소리치듯) 윤서야! 넌 어째 아무 말이 없나!
윤서/ (멍하니 동생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며) ...예?
노인2/ 우리도 임가놈쪽 꼬투리를 잡아 상소를 해야지. 너의 그 문장을 뒀다 언제 쓰려는가?
혹 상대가 좌의정이라, 주상도 어쩌지 못하는 권세라 겁먹은게냐?
모든 이의 시선이 윤서에게 쏠린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윤서.
윤서/ 그게...
윤서부/ 어르신 말씀 못 알아들은게냐? 임가놈이 무서운게냐?
윤서/ 하지만...아무리 사감이 끓어오른다 하여, 어찌 무고한 상소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노인2/ 하지만 저쪽은 그리 하지 않느냐!
윤서/ 상대가 악을 행한다고 어찌 공맹의 도리를 따르는 제가 똑같이 하겠습니까.
윤서부/ (화가 끓어올라) 그럼... 네 말인즉슨... 상대가 어찌하든
선비는 제 몸만 수양하면 된다는 것이냐?
윤서/ 저라고 왜 괴롭지 않겠습니까... 저도 괴롭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입궐해야 하니 다녀와서 다시... (돌아서는 윤서)
윤서처/ (고개를 드는데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다) 작은서방님이 저 모양이신데 입궐은...
윤서/ (작은 소리로) 어허, 당신까지 왜 이러시오.
윤서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윤서처가 방문을 가로막는다.
윤서처/ 안됩니다, 그냥은 못갑니다.
윤서/ 당신 정말...
윤서처/ (방으로 들어가서) 이보시오!
(정서의 발치께 이불을 확 젖히며) 이 다리를 보고도 공맹의 도리 운운이 나오시오!
시퍼렇게 부어오른 정서의 다리를 보고 다시 울기 시작하는 노인들, 마침내 윤서부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윤서처/ 당신은 분하지도 않으시오? 우리 집안이 이리 업수이 당했는데...
윤서/ (정서의 다리만 보고 있다)
윤서처/ 청렴? 조선 제일선비의 처신? 그게 다 무슨 소용 있소? 하다못해 복수심도 없으시오?
윤서/ (돌아서는데)
윤서처/ 사람들이 뒤에서 당신보고 뭐라고 수군대는 줄이나 아시오?
(잠깐 망설이다가) 제 몸 다칠까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겁쟁이라고 합디다.
잠깐 처를 돌아본 윤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대문쪽으로 향하는 윤서 뒤로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하인들이 보인다.
7. 궁궐 숲속길 D
새소리가 요란하다. 한 젊은 내시(조내시)의 뒤를 따라가는 관복 차림의 윤서. 새우처럼 허리를 숙이고 걷던 내시가 갑자기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덩달아 멈춰서서 주위를 돌아보는 윤서. 내시가 갑자기 허리를 쭉 펴며 윤서를 바라보는데 얼굴이 마르긴 했지만 의외로 윤서보다 키도 더 크고 위압적인 몸매다. 음울하면서도 어딘지 윤서를 비웃는 듯한 태도.
조내시/ (혼잣말처럼) 휴- 힘들어서 좀 쉬었다 가야겠네.
윤서/ 그러시게.
계단에 앉은 후, 소매자락에서 과일 말린 것을 꺼내서는 일정한 속도로 먹기 시작하는 내시. 윤서에게도 건성으로 권해본다.
조내시/ 살구 말린건데?
윤서/ (뒤돌며) 난 괜찮네만...
조내시/ 나와 정빈마마는 원래 먼 친척간이었소.
윤서/ (내려보며) 아... 그러시군.
조내시/ (픽웃으며) 말만 친척이지 머슴 이었지 뭐. 그래도 마마가 어렸을 때는...
황공하옵게도 날 오빠라 부르며 무척 따랐었소. 입궐한 후에 날 추천해서... 들어오게 되었지.
윤서/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먹고 있는 내시의 입을 바라보고 있는 윤서)
조내시/ 우리 환관들은 음양의 낙이 없으니까 다들 한가지씩 취미가 있지요.
윤서/ 그러시겠네.
조내시/ 벼라별 놈이 다 있지. 고양이를 모으는 놈, 천금을 주고 난초 화분을 사는 놈,
절에다가 온 재산 다 퍼주는 놈... 그런데 난 이거, 살구 말린 거만 있으면 되니,
제일 검소한거지. 근데, 김장령.
윤서/ 말씀하시지.
조내시/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런놈 저런놈중에... 제일 한심한 놈이 어떤 놈인지 아시오?
아직도 여자를 좋아하는 놈이지요. 음양의 낙이 없어 무언가를 좋아하는 놈이,
여자를 좋아하다니... 한심하지 않습니까?
윤서의 눈을 뚫어져라 보던 내시,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탁탁 털더니 일어서서 다시 허리를 새우처럼 만든다. 그리곤 고개도 들지 않고 앞서가며,
조내시/ 나도 예전엔 김장령과 비슷한 외모였었는데... 믿어지지 않지요?
8. 궁궐 숲속의 작은 공터 D
차양 아래 키높이 정도 되는 봉들이 반원형으로 죽 박혀 있고 봉마다 새장이 달려 있다. 각양각색의 새들이 지저귀고 있고 환관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왕이 그 소리를 음미하고 있다. 허리숙이고 들어서는 조내시와 윤서.
조내시(o.s)/ 사헌부 장령 김윤서 입시이옵니다. (뒷걸음으로 물러선다)
왕 바로 옆 의자에 앉아 윤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여자, 정빈이다. 어딘지 우울하고 약간 골이 난 듯한 표정, 그러면서도 단정하고 청아한 자태다. 흘긋 마주보다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는 윤서.
왕(o.s)/ 아,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지?
임대감이 뒤에서 귓속말로 무언가 속삭인다. 윤서를 뚫어져라 보며 듣는 왕.
왕의 뒤에 서서 조롱하듯 윤서를 바라보는 좌의정 임은.
왕/ 아, 그래, 그렇지.... 오면서 얘기는 들었겠지?
윤서/ 예, 간략하게나마 들었사옵니다.
왕/ 그럼 됐구만. (일어서서 나가는 왕)
다시 새소리에 빠져드는 왕.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왕/ (눈은 새를 보며) 이보시오, 좌의정, 저 김장령의 동생이 어찌 되었더라?
좌의정 임대감/ (허리를 더욱 조아리며) 하해와 같은 성은을 받자와 오늘 귀가 하였나이다.
왕/ 흠... 자네는 동생과는 아주 다르다지? 온순하고 시류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지?
윤서/ (의중을 몰라 허리만 숙이고)
왕/ 난 아무래도 얌전한 새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자네처럼 말이야.
윤서를 보며 씨익 미소짓는 왕. 그러자 왕 뒤에 서있는 환관들이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윤서를 바라본다. 다만 조내시만이 미소짓지 않고 윤서를 바라본다.
(점프)
새로 놓인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화들을 살펴보고 있는 윤서. 그런 윤서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는 정빈,
정빈/ 완전히 똑같아서 모르고 받았는데, 뒷면에 어렸을 때 내가 장난쳤던 흔적이 없어요.
(추억에 잠기며) 조내관, 기억나는가, 어렸을 적에 장난쳤다가 사랑채에서 혼쭐났던 것을.
조내시/ (낮고 엄중한 목소리로) 예...
윤서/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솜씹니다. 지질이나 낙관도 당송대의 그것과 똑같고...
정빈/ (놀라며) 당송대의 서화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윤서/ 조예는 없사오나 평소 관심은 갖고 있습니다.
은은히 미소가 번지는 정빈의 얼굴, 그 얼굴을 흘깃 보고난 조내시가 얼굴만 들더니 속삭이듯, 그러나 엄하게 말한다.
조내시/ 만전을 기하시리라 믿겠소. 꼭 표구한 놈을 잡아오시오.
9. 남산의 정자 D
매미소리가 요란한데 네 개의 사인교가 나란히 놓여있다.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윤서와 그의 동료들. 나무 그늘에 앉아 윤서일행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하인들. 땀들을 팥죽같이 흘리고 있다.
동료1/ 어쩐지 함정 같은데...
동료2/ 일부러 어려운 사건을 맡긴 거지. 왕실을 등쳐먹은 놈을 잡아오라니...
동료3/ 게다가 총애받는 정빈이 관련된 사건이니... 이거야, 원.
동료2/ 김장령을 걸어넣을려고 안달들이 난거지, 뭐.
윤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음식과 술만 마시고 있다.
윤서/ 누구 솜씬지... 이 너비아니... 참 일품으로 구웠구만.
동료1/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이거야, 쩝...
(다시 고개 돌리며)이런 시국에 너비아니 타령이라니...
(은근히 화가 나는지)게다가 집안에 우환까지 있으면서... 세상이,
(입에 넣었던 생선조각을 찬합에 뱉고는) 사상논쟁으로 두파로 나뉘어 치열히 다투는데,
천하제일문장이라는 사람이 너비아니 타령이라니...
윤서/ (뱉어놓은 생선을 바라보며) 그 논쟁은 무엇을 위함이오?
동료1/ (화를 벌컥내며)무엇을 위하다니! 백성을 위함이지! 몰라서 물으시오!
윤서/ ...찬합에 뱉지 마시오. 우리가 먹다 남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소.
젓가락을 들어 찬합에 뱉어놓은 생선을 털어내 버리는 윤서, 하인을 손짓해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다.
윤서/ 자네들, 가져다가 목이나들 축이게.
하인/ 아이고, 예,예...
윤서/ (술을 한 잔 마시고) 그나저나... 그런 방면으로 연줄과 경험이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동료들.
10. 의금부, 감옥 통로 D
의금부 스케치.
동료1(0)/ 그런 쪽이라면 아무래도 의금부에...
동료2(0)/ 의금부에? 누구말이지? 혹시...!
동료3(0)/ 아이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그놈을 두고 하는 말이면...
동료1(0)/ 하긴...
윤서(0)/ 누구 얘기요?
양쪽으로 감옥들이 있는 어둡고 축축한 통로를 카메라가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안쪽은 횃불로 밝게 빛나고 있지만 꺾여진 곳이라 보이진 않는다. 희미하게 들리던 비명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화면위로 동료1의 설명이 깔린다.
동료1/ 이광헌이라고, 체구는 크지 않지만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성품이 아주 잔인해서,
우리쪽 사람이 잡혀가면 사지육신을 보존하고 나온 이가 없는 지경일세.
....아무리 어명이 중하다 하나, 이 자와 관련을 맺느니, 사약을 택하겠네, 나라면.
아마 동생분도 그 인간이 그래 놨을거요, 모르긴 몰라도.
통로 끝에는 작은 의자에 윤서가 앉아 기다리고 있다. 안쪽에서는 살을 태우는지 고약한 냄새와 연기, 애원,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는 윤서. 잠시 헐떡이는 소리만 들리더니 광헌이 걸어나온다. 의외로 준수한 외모에 어려보이는 눈빛을 가진 광헌, 음수대에서 물사발을 들이켜면서 윤서를 외면한다. 일어서서 광헌 바라보는 윤서. 물마시던 광헌, 뒤에서 따라온 포졸의 손이 얼굴로 다가오자 몸을 확 젖히며,
광헌/ 뭐냐.
포졸/ 헤헤... 얼굴에 살점이 하나 묻으셔서...
얼굴을 닦으며 윤서를 바라보는 광헌. 두 사람의 눈빛이 날카롭게 오간다.
윤서/ 뭐 좀 하나 부탁합시다.
11. 상점거리, 유기전 맞은편 D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다. 처마 밑에 서서 유기전을 노려보고 있는 윤서와 광헌. 비를 쫄딱 맞아 초라한 생쥐들 같다. 비 그친 처마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광헌/ (혼잣말처럼) 체,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네. 나랑 관계도 없는 일에.
윤서/ (역시 혼잣말처럼) 어명인데 관계있고 없고가 어디 있나...
광헌/ 그나저나 간도 크구만. 내가 어느 쪽인 줄은 알고나 있으신거요?
윤서/ 어명인데 이쪽저쪽이 어디 있나... 그나저나 여기 상점거리 맞소? 장사하는 집이 없어?
광헌/ 밤에만 장사하는 놈들이니까. 아주 구린 동네지.
(윤서 돌아보며) 근데 올해 몇이신가 모르겠네?
윤서/ 나 말이오? 서른여섯인데... 어째 그러시오?
광헌/ 어째 나한테 약간 말을 놓는거 같아서...
윤서/ 몇이신데?
광헌/ (잠시 망설이다가) 서른셋...이요, 됐소?
윤서/ (다시 유기전 쪽을 보며 작은 소리로) 밑이면서...
근데 저 놈 아닌가 모르겠네?
황급히 바라보면 유기전의 문을 따고 있는 황가. 몸을 드러내며 나서는 광헌.
광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보게, 황가, (황가가 흠칫놀라 돌아보면) 말 좀 물으세.
황가/ 저 황가 아닌뎁쇼?
광헌/ 허, 사람도. 부르니까 돌아보구선.
황가/ (벌써 도망갈 준비를 하며) 아, 전 한가에요, 한가.
광헌/ (슬슬 다가가며) 어허... 인심하고는, 말이나 좀 묻재도?
황가/ 글쎄 거기서 물으시면... 좋겠는데 그러시네?
광헌이 달려들자 황가가 도망치기 시작한다. 덩달아 윤서도 달려간다. 비에 질컥이는 상점거리에서 쫓고 쫓기는 세 사람.
12. 유기전 안 D
문이 쾅 열리고는 황가의 목덜미를 움켜쥔 광헌이 들어오고 뒤따라 윤서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다.
평상에 황가를 거칠게 밀치고는 숨을 고르며 노려보는 광헌.
광헌/ 내가 무슨 일로 왔을 거 같으냐.
황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말투로) 본인도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광헌/ 호오, 요놈 봐라...
광헌이 손을 스윽 내밀어 황가의 어깨죽지 한 부분을 움켜쥔다. 금세 사색이 되어 신음 소리를 내는 황가. 한동안 고통을 주던 광헌, 놓아주더니,
광헌/ 어떠냐, 알듯도 하지? 사기친 표구놈 어디있냐?
광헌과 황가가 실갱이 하는 동안, 윤서는 가게 안을 둘러본다. 그릇도 만지작거리고 하는 동안 문득 벽을 이룬 나무쪽 하나에 손때가 많이 묻었음을 안다. 나무쪽을 가만히 밀자 벽이 안으로 열리며 빛이 새어 나온다. 흠칫 놀라 자기도 모르게 문을 닫으며 황가를 돌아본다. 광헌과 황가는 실갱이 하느라 정신이 없다.
광헌/ 내 이 안을 뒤져 장물이 하나라도 나오면, 너는 내 손에 뼈를 추릴 줄 알아라.
황가/ 장물이 도대체 뭡니까요? 간장 말씀입니까? 모를 말씀만 자꾸 하시고... 그것도 한가한테...
광헌이 투덜거리며 유기전 안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 틈을 타 갑자기 도망치는 황가. 광헌이 뒤따라 가고, 윤서도 따라가려다 멈춰선다. 무언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돌아보는 윤서. 벽쪽으로 다가간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벽을 미는 윤서.
13. 유기전 밀실 D
두 평정도의 작은 공간. 앉은뱅이책상이 놓여있고 사방에는 여러 개의 호롱불이 켜있어 꽤 환하다. 책상에는 두터운 돋보기를 쓰고 손엔 붓을 들고 있는 깡마른 노인(필사장이)이 앉아 있다. 윤서를 올려다보는 노인. 책상 위에는 두 권의 책이 펼쳐져 있다. 한권엔 방금까지 쓰고 있었던 듯, 반쯤 쓰인 글씨에 붓이 멈춰있다. 두어 발자국 들어서는 윤서.
윤서/ (책을 내려다보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요?
필사장이/ 책을 베껴쓰고 있습니다요.
하정배의 말투지만 묘하게 당당하다.
윤서/ 무슨 책을 베껴 쓰고 있는겐가.
필사장이/ ...난잡한 소설이올시다.
윤서/ (약간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가) 그럼... 나쁜 짓을 하고 있었군.
필사장이/ 옳은 일은 아니지요.
필사장이를 쳐다보는 윤서, 필사장이, 표정 역시 묘하다. 약간 당황하고 겁먹은 듯도 하지만 일을 방해 당한 불쾌감도 있는 것 같은 표정.
윤서/ 밖이 소란했는데... 겁도 안났던 모양일세.
필사장이/ 겁이야 왜 안나겠습니까만은... 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윤서/ ...!
필사장이/ 잡혀갈 때 가더라도 쓰는데 까지 쓸 요량이었습죠.
윤서/ (글씨를 묵묵히 바라보다가)...필체가... 제법일세.
필사장이/ (자신의 글씨를 내려다보고는) 천한 신분에 필체가 좋은들... 개발에 편자 올시다.
윤서/ 그래도... 명필일세. (밖에서 우당탕 소리 들리고, 윤서 돌아보면)
필사장이/ 일어... 설깝쇼?
윤서/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닐세, 계속 하게.
14. 유기전 안 D
문을 단단히 닫아 주는 윤서. 그때 문이 열리며 황가를 움켜쥔 광헌이 들어온다. 온통 흙투성이에 숨을 헐떡이는 두 사람.
광헌/ 이놈이 오늘 여러번 뛰게 만드네.
황가/ 그러게 왜 자꾸 따라 오시나 모르겠네? 약속 있어서 가는건데...?
그때 남자 너댓명이 유기전 안으로 들어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량스러운 건달들. 세사람을 안보는 척 하며 그릇 고르는 시늉을 한다.
건달1/ 허, 이거 내가 찾는 그릇이 있을라나 모르겠네.
건달2/ 니미, 그릇 가게에 그릇이 없을라구, 꼼꼼히 찾아보세나.
금방 낌새를 알아채고 긴장하는 광헌, 황가를 흘깃 보지만 황가는 영문을 모르는 척하고 있다. 잔머리를 잽싸게 굴린 황가,
황가/ 손님들, 가게 문 닫았으니, 다른 데들 가보시지요.
건달1/ 닫다니? 열려 있던데.
광헌/ 닫았다지 않나? 다른 데들 가게.
그제야 광헌을 쳐다보는 건달들, 연락받고 시비걸러 왔음이 뻔한 눈치. 광헌을 노려보다가 묘하게 웃는다.
건달1/ 이건 또 뭔일이래? 봐허니 양반네 같으신데? 몸소 그릇을 사러 오셨나?
건달2/ 살림하는 양반인가 보네? 별 양반 다보겄네...
낄낄대는 건달들. 그러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광헌/ 살림하고 안하고는 내 소관이고, 의금부 공무를 수행중이니... (음산한 목소리로) 가거라.
건달1/ 가거라? 못가겠다면?
한숨을 푹 쉬더니 허리춤에서 곤봉을 꺼내드는 광헌. 길이 한자반 정도의 거무스름한 가죽곤봉이다. 놀라서 유심히 광헌의 무기를 바라보는 건달들.
건달1/ 혹시 그거... 소의 자지로 만들었다는 쇠좆매 아니십니까?
광헌/ 그놈, 눈썰미는 있어서... 그럼 맛도 알겠구나.
건달2/ (약간 겁먹은 듯)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광헌/ 왜 잘못을 안해, 양반을 능멸하고, 공무를 방해한 죄, 죽어도 할말이 없지.
건달1/ 저거 좋아 보이는데? 우리거 보다 긴 거같지?
건달들도 무기를 꺼내드는데 모두 쇠좆매다. 그제야 안색이 변하는 광헌, 건달들의 얼굴에 모두 비웃음이 감돈다. 능숙하게 광헌을 둘러싸는 건달들. 이후 격투가 이어진다.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 질때마다 반짝이는 놋그릇들이 날아가고 무너진다. 광헌은 잘 싸우지만 상대의 숫자가 버겁다. 윤서는 안타깝지만 백면서생이 어쩔수 없다. 어리벙한 놈 세놈은 물리치고 이제 두 놈만 더 해치우면 되는 순간, 광헌이 곤봉을 놓치며 넘어진다. 광헌이 곤봉쪽으로 가려는데 건달1이 광헌의 손을 밟는다. 빙긋 웃으며 광헌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순간 윤서가 소리지르며 뛰어들어 건달1에게 매달린다. 그 틈에 광헌은 곤봉을 잡지만 윤서는 벽에 내동댕이쳐진 후 목부위에 곤봉 일격을 맞는다. 갑자기 암전.
15. 광헌의 사랑채 N
화면이 밝아지면 정신을 차린 윤서가 돌아눕는다. 책상에서 서류 정리하다 돌아보는 광헌.
광헌/ 닭잡을 힘도 없는 위인이 뎀비긴 어딜 덤비시오?
윤서/ 그놈들은?
광헌/ 다 가둬놨소.
부시시 일어나 앉는 윤서.
윤서/ (풀죽은 얼굴로) 나까지 정신을 잃어서... 번거로우셨겠소.
윤서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리는 광헌.
광헌/ 정신 났으면... 가보셔야지? 나도 내 볼일이 태산이오.
갓을 쓰려고 벽쪽으로 가는 윤서. 맞은 목이 아픈 듯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리던 윤서, 벽에 붙은 그림들을 보고 다가간다. 꽃과 나비, 게, 새를 그린 그림들 사이에 막 뛰어 나가려는 듯한 말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데, 윤서가 그 앞에 서서 눈을 떼지 못한다.
윤서/ 이 그림, 직접 그리셨소?
광헌/ (서류 챙기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만?
윤서/ 그냥... 그림이 하도 힘차보여서...
광헌/ 별걸 가지고... (나가며) 난 그 놈들하고 좀 볼일이 있어서...
광헌 나가면, 사각등을 들어 말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윤서.
16. 유기전 안 D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서. 한낮의 햇살이 어두운 유기전안으로 스며든다.
17. 유기전 밀실 D
밀실로 들어서는 윤서, 여전히 바삐 글을 쓰고 있던 필사장이가 고개를 든다. 필사장이가 베끼고 있던 책을 흘깃흘깃 보는 윤서, 엉거주춤 필사장이의 맞은편에 앉는다.
윤서/ 여전히 바쁘구만.
필사장이/ ...일어설깝쇼?
윤서/ 아, 아니네. 내 다시 온건 자네에게 부탁을 하나 할까 해서이네.
필사장이/ 저같은 놈에게 무슨...
윤서/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 표구하는 놈, 소재를 나에게 말해주게.
왕실을 능멸했으니 죽어 마땅한 놈인데 공연히 그 놈과의 의리를 지킨다고
이 유기전 주인 영감만 죽어나게 생겼으니 말일세.
필사장이/ (잠시 생각하다가) 쇤네도 사실 그 놈을 보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일에 그림을 모사하는 친구놈이 개입되어 있어서...
그 놈은 그림 똑같이 그리는 재주만 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놈입니다.
윤서/ 내 그 친구의 신변은 최대한 보장하지. 날 믿어 줄 수 없겠나?
필사장이가 의심의 눈초리로 윤서의 눈을 노려본다. 잠시 망설이더니 종이에 무엇인가 써서 윤서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본연의 일로 돌아간다. 종이를 받고도 연신 책을 흘깃거리는 윤서, 필사장이와 눈이 마주친다.
필사장이/ 한번 읽어 보시렵니까?
윤서/ 원 사람도 별소리를 다하는구만.
(잠시 우물쭈물 하더니) 정히 자네가 그리 권한다면 어디 한번 봐볼까?
호롱불을 당기고 책을 펴는 윤서. 조금 읽어 내려가는데 ‘젖가슴’이라는 단어가 눈을 찌른다. 순간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돌리는 윤서. 피식웃는 필사장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책으로 눈을 향하는데 이번에는 ‘굵은 음경을 작은 손에 움켜쥐고’라는 부분에서 그만 책을 황급히 덮고 만다. 윤서, 어색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는 필사장이를 바라본다.
윤서/ 에헴! 거 참... 해괴한 책이로고.
필사장이/ (체, 좋으면서) 그런 책이... 다 그렇지요, 뭐.
윤서/ 별반 대단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필사장이/ (약간 꼬운 눈길로 바라보며) 그런가요... 그 책을 쓴 분은 인봉거사라는 필명이신데...
이 바닥에서는 최고라고 불리는 분입지요.
윤서/ 인봉거사라...
필사장이/ 온 장안이 그 분의 새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지요.
윤서/ 온 장안이? (약간 비웃듯) 그런데 난 어째서 이름도 처음 듣는거지?
필사장이/ 그야 새는 하늘만 날고 물고기는 물속만을 헤엄칠 뿐이지요.
새가 물고기를 모른다고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요.
윤서가 ‘요놈봐라?’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필사장이도 당당히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 다시 책으로 눈이 향하는 윤서,
18. 궁궐 숲속 D
친예례에서 벼를 베는 왕. 신하들 앞쪽에 엎드려 있는 윤서와 조내시.
왕/ 종범들의 벌이 다소 경하지 않은가?
윤서/ 하오나,
왕/ (허리 펴고) 알았네. 그리 알아서들 하고...
밖으로 걸어 나오며 내시들의 시중을 받는 왕. 윤서가 뒷걸음으로 물러서려는데,
왕/ 참, 자네가 그리 필체와 문장이 도저하다면서?
윤서/ 얕은 재주로 부끄럽고 망극하옵나이다.
왕/ 흠...
물러서려는데 순간 정빈이 자신에게 미소를 보낸 듯 하여 당황하는 윤서. 조내시가 날카롭게 느낀다. 왕에게 부복하는 신하들.
신하들/ 진창을 무릅쓰고 백성을 위해 용각을 적시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19. 의금부 당직실 N
오나장(도사 밑의 벼슬)/ 아니됩니다! 풀어달라니요.
윤서/ 허허, 오나장, 윤허를 받았대도 그러시는가?
오나장/ 그렇더라도 우리가 다시 품의를 올려야 됩니다. 왕실을 능멸한 자들을 고작 그정도 벌로...
광헌/ 그렇게 해 드리게.
뒤쪽 책상에 앉아 무언가 쓰고 있던 광헌이 불쑥 나선다.
나장은 골이 난 듯 나가버리고, 윤서는 고마워서 광헌을 바라본다.
윤서/ 이거... 여러 가지로...
광헌/ 이걸로 서로 빚은 없는거요.
윤서/ (약간 섭섭하여)...언제 우리가 서로 빚을 졌었던가...
광헌/ 아무튼 다시 만나게 되면, 서로 모르는 사이요. (고개를 들며) 그러는 편이 서로 편하지 않겠소?
윤서/ (고개를 끄덕인다)
광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특히... 여기서 나와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요.
20. 상점거리 -새벽
안개가 자욱한 상점거리. 걸어가던 윤서가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황가와 모사장이가 서로 부축하며 비틀거리면서 따라오고 있다. 둘 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에서 옷을 다 적신 피가 밑으로 흐른다.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윤서. 양쪽으로 의지하라는 시늉을 한다. 놀라 물러서는 두 사람, 윤서가 고집을 부리고, 두 명의 평민이 윤서를 의지하여 안개 속으로 걸어간다.
21. 의원, 진찰실 D
방에 두 사람을 눕히는 윤서. 의원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며 돕는다.
황가/ (상체를 들며) 이거...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어째 이러시는지...
윤서/ 그냥. 그냥 자네가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네. 남자답고 씩씩한 거 같아서...
모사장이/ (순진한 목소리로)그럼 저는입쇼? 전 처음 보시지 않습니까요? 씩씩하지도 않고...
윤서/ 자네도 마음에 드네. 나라에 큰 인물만 있으면 쓰겠는가.
자네처럼 그림을 똑같이 베낄 줄 아는 사람도 있어야지, 안 그런가.
감동해 눈물이 나는지 모사장이가 몸을 돌아눕는다.
윤서/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는 자네같은 사람이 훨씬 더 필요한 시대가 올걸세.
모사장이/ (목이 잠겨서) 설마... 그럴리가요.
윤서/ 그만들 말하고 좀 쉬게나.
의원이 잠시 망설이다가 윤서에게 부탁하고 들이닥친 환자에게 간다.
황가 가슴에 쑥뜸을 보고 있는 윤서. 가까워진 거리에 어색한 두 사람.
윤서/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황가/ (외면한 채로) 그러시던가...
윤서/ 필사장이 영감이 말일세...
황가/ 그걸 또 문제 삼으실라구?
윤서/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인봉거사란 사람이 그런 글에선 최고라던데 무엇이 뛰어나서 그런가?
황가/ 하- 그 영감, 이름 막 말하면 안 되는데...
윤서/ 어차피 필명인데 뭐 어떤가...
황가/ 무엇이 뛰어나냐,,, 야... 막상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기 쉽지 않네...
뭐랄까... 진맛을 안다고 할까?
윤서/ 진맛이라... 그게 뭔가?
황가/ 아이고, 조선 최고의 명문장가라면서 그걸 모르십니까?
윤서/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주세나,
황가/ 그야... 꿈이지요.
윤서/ ...꿈이라니?
황가/ 꿈꾸는 것 같은거, 꿈에서 본 거 같은거,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거...
그런 맛이 꿈맛이고 그 맛이 진맛 아니겠습니까요.
충격을 받은 듯 윤서, 멍하니 황가를 바라본다.
황가/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하이고, 그것도 모르고 이때껏 글을 쓰셨나? 아, 뜨거.
22. 윤서의 집, 마당 D
피곤한 몸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던 윤서, 대청마루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인사를 하는 윤서.
윤서부/ (비꼬듯) 어명을 받잡고 충실히 수행하고 왔다지?
윤서/ ...
윤서부/ 게다가 만전을 기하려고 네 동생을 저렇게 만든 놈과 힘을 합쳤다면서?
윤서/ 그 일을 하긴 하나 당사자는 아니,
윤서부/ 시끄럽다!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윤서부. 오가는 하인들의 눈초리도 싸늘하다. 안방 몸종이 다가오더니,
안방몸종/ 저... 마님이... 당분간 안채에 들지 마시라고...
윤서/ 알았다.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윤서.
23. 윤서의 집, 뒤뜰 D
대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윤서 다가가면, 의자에 앉아 대숲을 바라보고 있던 정서가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웃는다.
윤서/ 몸은 좀 어떠냐.
정서/ 그저, 살만합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숲을 바라보고 있는 두 형제.
윤서/ 너도... 내가 원망스러우냐?
정서/ 원망스럽다니요. 무슨 그런 말을...
윤서/ 다들 나를 겁쟁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던데... 너라고 원망스럽지 않을 리가 있겠냐.
정서/ 형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늘을 원망할 따름이지요. 이제 제 나이 서른인데,
앞으로 몸을 맘대로 운신도 못하고 식구들의 짐이 될 생각을 하니, 하늘이 원망스럽고도...
원망스럽습니다.
정서가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가만히 동생을 내려다보는 윤서.
정서/ 형님... 제 원한을... 이 억울함을... 되갚아 주세요.
24. 윤서의 사랑채 N
천천히 먹을 가는 윤서. 붓을 집어 들더니 굳은 얼굴로 ‘종이에 써내려 간다. 붓을 바꾸고 몇 자 적다가 문득 어떤 생각에 빠져드는 윤서, 종이를 노려보며 무언가 망설이다가 ‘젖가슴’이라고 언문으로 쓰고는 황급히 지운다. 방안을 둘러보는 윤서의 부끄러운 얼굴. 종이를 새로 넘기고는 망설이다가 다시 ‘여인의 부끄러운 곳’이라고 써본다. 이번엔 지우지 않고 이어서 ‘굵은 음경이 여인의 부끄러운 곳을 파고들었다’라고 쓴다. 흥분되는지 윤서의 숨소리가 조금 커진다. 잠시 자기가 쓴 글씨들을 내려다보던 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구겨쥔다.
25. 윤서의 집, 부엌 N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윤서의 뒷모습. 타다 남은 잿불에 구긴 종이 뭉치를 집어넣는다. 환하게 밝아 올랐다가 어두워지는 윤서의 얼굴.
(F.O)
26. 궁궐, 연꽃이 있는 정자 D
조내시를 따라 다리를 건너 정자 앞에 다다르는 윤서. 갑자기 멈춰 돌아서는 조내시, 얼굴에 땀이 가득하다.
조내시/ 절대로 정빈 마마쪽을 보거나 움직이면 안됩니다. 혹시 선물을 주시더라도 절만 하셔야지,
윤서/ (이 자식이...)이보게, 나도 그쯤은 아네. 저번에 그 살구 말린 것, 있으면 좀 주게.
약간 당황하던 조내시가 말린 살구를 건넨다.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윤서.
조내시/ (불만스레) 절대로, 절대로 안됩니다.
27. 정자 안 N
윤서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 주는 상궁. 방 한가운데에는 발이 쳐져 있고 그 양쪽으로 윤서와 정빈이 앉아 차를 마신다. 그림처럼 물러나는 상궁. 발 너머로 윤서와 정빈의 눈이 마주친다.
정빈/ 이리 오시라 한 것은 제가 따로이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윤서/ 의당 제가 해야 할 일을...
정빈/ (미소 지으며) 그나저나 이번 일에 김장령의 완력도 크게 활약했다 들었습니다.
윤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빈/ 무뢰배 패거리들 하고 말입니다.
윤서/ (그제야 눈치채고) 아...
정빈/ (웃음을 참으며) 의금부 도사가 궁지에 몰리자 김장령이 벽력 같이 소리를 질렀다죠?
그리고는 표범처럼 덮쳤는데... 무뢰배가 한 팔을 쓱 이렇게 뿌리치자, (쿡쿡 웃으며)
그만 개구리처럼 벽으로 날라 가셨다면서요?
윤서/ 그것이...
정빈/ 그리고는 정신을 잃어 생사를 오락가락 하셨다더군요.
난처해진 윤서, 혼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억지로 웃음을 참아내는 정빈을 바라본다.
그때 갑자기 정빈의 표정이 굳는다. 열린 창문으로 커다란 벌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온 것. 그렇다 치더라도 지나치게 당황하는 정빈의 표정이 의아해 바라보는 윤서. 정빈은 겁에 질렸지만 내명부의 체통으로 참고 있는 눈치다. 윙윙거리고 날던 벌이 공교롭게 정빈의 어깨에 앉는다. 공포에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정빈. 정빈의 상태를 눈치채고 어찌할까 망설이던 윤서가 조용히, 그러나 재빨리 발을 들추고 정빈에게 다가가 벌을 후려쳐 쫒는다. 창밖으로 날아가는 벌, 윤서 뒤로 차르륵 떨어지는 발, 정신을 추스른 정빈, 윤서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을 느끼고 헛기침을 한다. 윤서, 황급히 뒤로 물러나 떨어져 앉는다.
정빈/ ...고맙습니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윤서를 바라보는 정빈, 두 사람의 눈길이 잠시 마주친다. 살풋 미소를 짓는 정빈.
윤서/ (모르는 체) 무슨 말씀이신지...?
못볼 것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윤서.
28. 상점거리 D
바닥을 보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며 걸어가는 윤서. 뒤에서 하인들이 멘 초헌이 건성으로 따라오고 있다.
정빈/ 아무튼... 고맙습니다. 제가 소싯적에 땅벌이란 놈에게 호되게 쏘인 후로는 벌만 보면...
정빈의 귀여운 모습을 되새김질 하고 있는 윤서. 그렇게 걷다가 황가의 유기전 앞에 다다른다. 여전히 닫혀 있는 문. 문을 두드릴까 망설인다.
29. 윤서의 사랑채 N
흰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서. 마침내 결심한 듯 붓을 든다.
30. 유기전 앞
서성이는 윤서.
31. 유기전 안. D
황가, 윤서를 보더니 말없이 몸을 비킨다. 들어와 서는 윤서. 평상에는 필사장이와 모사장이가 노름을 하고 있다. 엉덩이가 아픈 모사장이가 엎드려 있다가 인사하려하자 만류하는 윤서. 다시 엎드려 노름을 계속하는 황가.
윤서/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그래, 가내 두루 평안하신가.
황가/ (어이없어 하며) 홀아비한테 그 무슨 망발이시우.
윤서/ 아, 그렇던가...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그럼, 양친께서도 별고 없으시고...
황가/ 우리 노친네들이 세상 달리 한지가 언젠데... 자, 난 백냥 갔어. 죽을려면 죽고.
머쓱해져서 입을 다무는 윤서, 황가와 모사장이 사이에 앉아 두 사람의 패를 흘깃거린다. 그때 모사장이가 황가를 날카롭게 보더니 이백냥으로 올린다. 당황하는 황가, 망설이다가 죽는다. 놀라서 모사장이를 바라보는 윤서.
윤서/ 호- 자네 놀랍지 않은가, 패는 더 나빴는데?
순간 당황해서 황가의 눈치를 살피는 모사장이, 기분이 상한 황가, 턱으로 둘 다 들어가라는 사인을 보낸다. 윤서에게 눈을 부라리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모사장이.
황가/ 거, 뭔일인지 모르지만, 뜸들이지 말고 말씀하시우.
윤서/ (망설이다가 책을 한권 조심스레 꺼내며) 내... 이거... 소일삼아... 아니 장난삼아
한번 써 봤는데... 한번 읽어 볼라는가?
황가/ 이게... 무슨 책이우?
윤서/ 음... 난잡한... 책일세.
황가가 윤서의 눈과 책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내민다. 그러자 윤서가 금방 후회하고 책을 거둔다. 그러나 손을 계속 내밀고 있는 황가. 윤서가 마지못해 책을 건넨다.
황가/ 추월색... (놀리듯) 가을달빛이라... 필명을 벌써 지신게요?
윤서/ (부끄러워하며) 있긴 있어야겠기에... 흉은 보지 말게나.
뜨악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하는 황가, 그러나 한 장을 읽기도 전에 놀란 눈으로 윤서를 바라보는 황가. 윤서는 좌불안석이다. 책에 빠져드는 황가.
(점프)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는 황가. 공연히 유기들을 살피고 있던 윤서가 황가의 눈치를 흘깃 본다. 다가와 윤서가 만진 유기들을 닦는 황가. 나란히 서서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두 사람.
윤서/ 어떤가...
황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윤서/ (어색하게 웃으며) 그럴줄 알았네, 그러게 그냥 장난 삼아 써봤다지 않나.
내 가져다 바로 태울 요량이야. 그나저나 이 놈은 유난히도 반짝거리는구만.
황가/ 양반이 무섭긴 무섭소.
윤서/ 건... 뭔 소린가?
황가/ 멀쩡해 보이는 위인의 머릿속에 무슨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원...
윤서/......
황가/ 물건은 물건인데...
윤서/ (조급해져서) 그런데?
황가/ 우리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짧게 끝낼것이 아니라 연재를 하는거요. 처음 만나는 과정에서부터
그러니까... 거시기 할 때까지의 과정을 조금씩 책으로 만드는 거지요. 할 듯 말 듯, 응?
읽는 이들의 애간장을 태우는거요.
윤서/ (표정관리하려 애쓰며) 뭐... 그럴 정도까지 되긴... 하는 건가?
황가/ 그럴 정도?
마주보는 두 사람.
황가/ 나... (밑을 가리키며) 이게 서서 죽는 줄 알았는데?
이런 찬사가! 좋은 표정을 감추려고 얼른 다시 그릇을 보는 윤서.
32. 윤서의 사랑채 N
글에 몰두하는 윤서의 모습들. 파지를 만들어 구겨 쥐기도 하고, 방안을 서성이기도 하고, 자기 글에 혼자 감탄하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윤서부가 방으로 들어선다. 황급히 쓰던 글을 밑으로 감추는 윤서. 성큼 성큼 다가와 윤서 앞에 서서 내려다보는 윤서부. 그런 아버지를 올려다보다가 주춤거리며 일어서려는 윤서.
윤서부/ 그냥 앉아 있거라. 너, 그 밑에 감춘 것이 무어냐?
윤서/ 그게... 저... 별 것 아닙니다.
윤서부/ 별것 아니다? 별것도 아닌데 왜 황급히 감추느냐?
윤서/ 그저... 사적인...
윤서부/ 네 놈은 이 애비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냐?
네가 요즘 그 밑에 감춘 걸 쓰느라고 밤잠도 자지 않는다는 걸 내 모르는 줄 아느냐?
윤서/ (죄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윤서부/ 네가 이 애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모르겠다만,
이 애비! 그리 목숨에 연연하는 사람 아니다. 네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만
너의 그 글로 인해 우리 일가가 멸문 당한다 해도, 이 애비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알겠느냐?
윤서/ ...예.
윤서부/ 내 나갈 터이니, 계속 쓰거라. 그리고, 정서에게도 내 말하마.
윤서/ 그게... 아직은...
윤서부/ 그러냐? 알겠다. 온 세상이 너를 함부로 평해도 나는 너를 믿고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것, 기왕에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니 후회없이 하거라.
아버지가 나가자 잠시 죄책감에 빠지는 윤서, 그러나 얼른 다시 종이를 올려놓고 써나간다. 이미 쓰는 재미에 푹 빠진 눈치다.
33. 사당앞 계단 N
계단을 오르는 황가, 땀을 닦으며 바라보니 윤서가 등을 보이고 앉아있다.
황가/ (들으란 듯이) 아, 가게에서 보면 될 것을 가지고... 이 삼복에 누구 잡을 일 있나?
윤서/ (돌아보는데 얼굴이 까칠하다)
황가/ (올라다가 앉으며) 아니, 얼굴이 어째 이리 상하셨수?
윤서/ 내 좀 밤잠을 설쳤더니,
황가/ (윤서의 주위를 훑어보며) 그런데, 어째 책이 안보일까 모르겠네?
윤서/ (한숨을 푹 쉬며) 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만하고 교만했네.
설핏 읽다보니 나도 할만하겠다 싶어 덤빈 일인데...
황가/ (얼굴이 굳으며) 일인데?
윤서/ 쓰다보니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구만. 아무래도 난 그쪽에... 소질이 없는 듯 하이.
황가/ 그렇다면, 안 썼다는 얘긴데! (작은 다이어리를 꺼내더니) 보자, 이날 업자들한테
주기로 했는데... 베껴쓰고 할려면 오늘까진 나와야 되는데? 이거 약속 못 지키겠는데...
그건 심히 곤란하고 복잡한 문젠데? 업자들... 굉장히 거칠어질텐데?
윤서/ (풀이 잔뜩 죽어서) 쓰긴 썼네만...
주위를 돌아보더니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 있던 책을 꺼내는 윤서. 뭐라고 더 변명하려는데 황가가 냉큼 빼앗아 간다.
황가/ 흑곡비사라... 검은 계곡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뜻?
윤서/ 그렇게 지어 봤네. 어째... 이상한가?
황가/ (약간 부끄러운 듯) 그게 아니라... 심히 노골적이라서...
윤서/ 어차피 노골적인 내용 아닌가.
황가/ 그래도 이쪽 관례가 제목은 점잖게 짓는 거라서...
윤서/ 문제는 제목이 아닐세. 내용이 영 시원찮아서...
윤서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몇 장 읽어 내려가던 황가, 갑자기 손바닥을 위로 해서 윤서에게 손을 내민다.
윤서/ 이게 뭔가?
황가/ 내려 치시우.
윤서/ 그건 왜?
황가/ 아 글쎄 치라면 치시지 뭔 잔말이...
윤서/ (잠시 망설이다가 가볍게 친다)
황가/ 그럼 계약을 맺은 거요.
그리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책을 움켜쥐고 계단을 내려가는 황가. 몇 번 부르다가 포기하는 윤서.
34. 기생집, 마당 N
군데군데 횃불이 켜져 있는 기생집. 한 하인의 뒤를 따라 안내되는 윤서, 악기를 조율중인 악사들 앞을 지나간다.
35. 기생집, 방 N
이미 얼콰하게 취한 채, 양쪽에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고 있는 조내시. 맞은편에 앉은 윤서. 두 사람의 눈빛이 잠시 얽힌다.
조내시/ 이렇게 좋은 집으로 모셨는데, 어째 표정이 그러시오?
윤서/ 관리가 내관과 이런 집에서 어울리는 거, 그른 소치 아니겠나.
조내시/ 그르다, 그르다... 어찌 그리 옳은 일만 하려 드시오?
윤서/ (약간 찔리는지)
기생1/ 그렇게 그른데, 뭐하러 오셨을까?
윤서/ ...
조내시/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기생들이 일어서 나가고 나자 품에서 작은 봉투를 하나 꺼내 상에 올려놓는다.)
오시라 한건 이것 때문이요.
윤서/ 이게... 뭐요?
조내시/ 뭔진 말 안하겠소. 다만... 김장령보다는 인생에서 고통을 더 겪어본 사람으로서 충고하겠소.
윤서/ (봉투와 조내시를 번갈아보는데)
조내시/ 나라면... 열어보지 않고, 그냥 일어서서 가겠소.
윤서/ 그런 물건을 왜 전해 주는 거요.
조내시/ 시킨 일이니까.
잠시 망설이던 윤서, 봉투를 연다. 종이로 싼 포장이 하나 있고, 그 위엔 서찰이 놓여있다.
조내시/ 아직도 늦지 않았소. 읽지 말고, 그대로 일어서서 간다면.
윤서, 그 말에 조내시를 노려보다가 서찰을 편다.
36. 정빈의 처소, 그림방 D
후궁의 공식행사 복장을 하나씩 벗고 있는 정빈. 몸만 빌려준 꼴이다. 그러나 얼굴은 천천히 미소가 번진다. 그 위로,
정빈/ 노고에 감사코자 모시고선 수선만 떨다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저를 해량하옵소서.
어리석게도 미물에 겁을 집어먹은 저를 보시고, 일신의 오해를 무릅쓰고 다가와 구해주신
고마움, 잊지 않겠습니다. 작은 물건을 보내니, 받아주신다면 제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37. 기생집, 방 N
서찰을 접고는 종이를 펼쳐보는 윤서. 안에는 직접 수놓은 듯한 손수건이 들어 있다.
조내시/ 도로 넣어서 나에게 돌려주면, 안 본 걸로 해 드리지.
내가 아는 당신은... 그걸 가져갈 배포가 없는 위인이오.
윤서/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지?
조내시/ 나만 그리 생각하나? 온 조정이, 온 장안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손끝을 조금 보이며) 용기라곤 요만한 양반 아니신가?
빙그레 웃으며 조내시를 바라보던 윤서,
윤서/ 가서 전하시오. 감사히 잘 받았다고... 받을 자격은 없소만.
봉투를 들고 일어서서 방을 나가는 윤서. 윤서가 나가고 나자 비웃음을 흘리더니 혼자 술을 따라 마시는 조내시.
38. 유기전 안 N
평상에 마주 앉아 있는 황가와 윤서. 짧은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며 윤서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황가와 뭔가 죄지은 듯 시선을 피하는 윤서. 필사장이와 모사장이도 엄한 시선으로 윤서를 바라보고 있다.
황가/ 아, 글쓰는 속도가 너무 느린데?
윤서/ 그래서 내 말했잖나, 아무래도 난 소질이 없는 거 같다고...
황가/ 아, 미치겠네, 정말...
우울해 하는 윤서에게 피우던 담뱃대를 건네는 황가, 윤서, 망설이다가 받아들여 한 모금 빨고는 기침을 하며 돌려준다.
윤서/ ...평들은 어떤가?
약간 당황하던 황가,
황가/ 그거야... 신인이니까... 아직 거칠고...
윤서/ (그말에 풀이 팍 죽어서) 그렇겠지... 그럼... 없던 일로 하세. 아무래도 난 안되겠어.
윤서가 일어서자 당황해서 앞을 막는 황가,
황가/ 아 진짜 성격... (한숨을 쉬더니 필사, 모사를 보고) 뭐, 말하지 뭐.
필사, 모사/ (고개를 끄덕이고)
황가/ 아직 완전히 터진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거 같애!
윤서/ ?
황가/ 지금 장안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최고 문제작이라고 보면 된다니까?
하녀년들은 모조리 흑곡비사 구하려고 쏘다니고 있다고 보면 돼! 하, 썅년들!
윤서/ 진짜로... 그렇게 좋아들 하는가?
황가/ 좋아하는 정돈가? 입소문이 쫘악나서 다음편 언제 나오냐고 숨이 넘어가요, 숨이.
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돌쭐이야... 그나저나, 다음편, (다그치듯) 어떡할거에요, 응?
윤서/ (넋이 나가서) 그렇게 좋아한단 말이지....
황가/ 하긴 보통 글이래야 말이지. 그렇게 쉽게 써질 리가 없지. 그럼, 이걸로 우선 기운을 보충 하시고,
황가가 건네는 보따리가 척 보기에도 돈꾸러미다. 윤서의 안색이 바뀐다.
윤서/ 자네 정말... 내 아무리 자네와 흉허물 없이 지내기로손... 양반을 뭘로 보고...
황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며) 나도 그 정도는 알지만, 이걸 보시우.
윤서에게 너덜거리는 책을 건네는 황가.
황가/ 나으리가 쓴 책이오. 벌써 너덜거리지? 맨 뒤를 보라니까?
맨 뒷장을 보면 여러 필체로 쓰여진 글들이 보인다.
윤서/ 이 글들이 뭔가?
황가/ 나으리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감동을 주체 못해서 소감들을 써놓은 거요.
그런 글은 뭐라고 해야 하나,
나도 이장사 십년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 대꾸한 글들이니까... 댓글이라 해야하나?
윤서/ 댓글이라, 거 말 되는구만.
황가/ 읽은 이들도 그렇게 감사를 표시하는데 제일 이익을 많이 본 주제에 이 놈도,
뭔가 감사 표시를 해야 할 것 아니오.
윤서/ (감동해서 댓글들을 보고 있다가) 뜻은 고맙네만... 어찌 글을 돈으로 바꾸겠나.
황가/ (웃으며) 하, 정말... 대쪽이야, 대쪽. 그럼 어쩌나... 아, 그래, 그럼 이거 가지실라우?
윤서/ 이건 색안경 아닌가? 난 눈 괜찮은데?
황가/ 에헤이... 이걸 누가 눈 나빠서 쓰나? 작가는 원래 이런 거 쓰고 다니는 거라니까?
윤서/ 작가라...(뿌듯해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39. 댓글들의 몽타쥬. N
화면에 부잣집 마님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마님1/ 님의 글을 읽고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소이다. 어쩌면 아낙네들의 마음을 그리 잘 아시는지.
마님2/ 이제부터는 님의 글만 읽겠어요. 인봉거사 죽어라! 인봉거사 글 좋아하는 것들은 다 쓰레기!
마님3/ 이 글을 쓴 작자는 파렴치한 인간 말종이군요. 다시는 이런 글을 읽지 않겠어요.
마님4/ 이상합니다. 바로 제 얘기에요. 이글을 쓴 자를 만나야 되겠어요. 그 이에게서 들은 건가요?
마님5/ 글을 읽을수록 부끄러운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넘쳐납니다. 다음 편을 기다리겠어요. 꼭이에요!
(F.O)
40. 유기전 안 D
대본소 주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황가. 모두들 혼자 먹을거냐는 둥, 나눠 먹자는 둥, 잘 나갈 때 봐달라는 둥, 황가에게 매달려 애원들이다. 그때 윤서가 들어온다. 그러자 갑자기 모두들 그릇을 고르는 시늉을 하느라고 분주하다. 윤서도 그릇을 보는 시늉을 하자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대본소 주인들. 그러면서도 낮은 소리로 협박반 애원반 읍소를 하는 주인들.
황가/ (작은 소리로) 아, 글쎄, 쓰신 양반이 우리하고만 하겠다는 걸 난들 어째? 안그래?
자기 책을 찬양하는 소리인줄 알고 흐뭇하게 그릇 보는 시늉을 하는 윤서.
사람들이 다나가자 쑥스러운 표정으로 황가를 바라보는 윤서.
윤서/ 대본소주인들인 모양일세.
황가/ 와, 이번 권은 스무 권을 돌리는 데도 양이 딸리네.
윤서/ 내 책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가? 허- 종이값이라도 나왔다니 다행일세.
황가/ (그제야 알아채고 난처하게) 아... 그게... 나으리 책도 물론 잘 나갑니다만...
저 사람들이 저러는 건... 인봉거사가 이번에 쓴 옥령낭자 때문에...
윤서/ (자존심 완전히 상해서) 아, 그런가. 그랬었군. 난 또... 어쩐 일인가 했네 그려...
마주보고 어색하게 웃는 두 사람.
윤서/ 그 인봉거사라는 사람, 한번 보고 싶구만. 어째서 그리 내는 책마다 난리란 말인가.
황가/ 나으리 책도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다만...
윤서/ 다만? 무슨 얘긴가? 말해 보게...
황가/ 나으리 책은 좋아하는 이들은 무지하게 좋아하지요. 그런데 말이야... 문제는...
인봉거사만큼 대부분의 이들이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거란 말이야...
윤서/ 그 이유가 뭘까? 아직도 그 진맛이란게 없는겐가?
황가/ 진맛이야 최고지요. 다만 뭔가 좀... 잰체하는 구석이 있다고 할까요?
그 말에 황가를 바라보는 윤서. 황가는 자신이 실수한줄 알고 움찔하는데,
황가/ 제 말은 그러니까...
윤서/ 잰체라...
황가/ 그래도 옥령낭자 다음으로 잘나가는 책인데 뭘 그러실까. 욕심도 많으셔...
윤서/ 옥령낭자 다음이라...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윤서.
41. 광헌의 집 앞 D
선글라스를 끼고 우두커니 서 있는 윤서. 돌아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광헌. 광헌처와 몸종이 뒤따르고 있다. 윤서를 보고 멈칫 서는 광헌.
42. 광헌의 사랑채 D
차를 마시는 두 사람. 광헌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초리로 윤서를 바라본다.
광헌/ 그냥 인사차 왔을 리는 없고... 분명 사연이 있으신 듯한데?
윤서/ 혹시... 난잡한 소설 읽어 보신 적 있소?
광헌/ 난잡한 소설이라니?
윤서/ 남녀가 나와서... 교합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오.
윤서를 노려보는 광헌. 차를 훌쩍 마셔버리더니 유과 하나를 집어 씹어 먹는다.
광헌/ 농이 지나치시오. 내가 그런 글을 읽어 봤을 리 없지 않소. 누가 그런 얘기를 한거요?
윤서/ 당신이 읽었다는 게 아니고...
광헌/ 그럼! 무엇 때문에 와서 그런 수작이야!
윤서/ 사실은 내가 지금... (선글라스 벗고) 그런 소설을 쓰고 있어서...
충격 받은 듯 유과를 씹던 입을 멈추는 광헌. 잠시 윤서를 노려보다가 찻물로 유과를 넘기는 광헌.
광헌/ ...그런데?
윤서/ 그런데 그 소설에 삽화가 필요해서... 그걸 그려 주실 수 없나 해서...
광헌/ ...그러니까 당신이 쓰고 있는 난잡한 소설에 들어갈 삽화를 그려달라? 나보고?
윤서/ 그렇소.
윤서를 노려보던 광헌이 헛웃음을 웃고 만다.
광헌/ 동생이 그 모양이 되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군. 의금부 도사인 나에게,
그것도 반대편 인물인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이요?
윤서/ ...
광헌/ 당신 이거, 정말 위험한 행동이란 건 알고 있소?
윤서/ 물론.
광헌/ (드디어 화가 나는지 벌떡 일어서 나가며) 별 놈의 위인을 다 보겠네!
문을 쾅 닫으며 나가는 광헌. 혼자 남은 윤서, 찻잔을 들어올리는데 다시 들어오는 광헌.
광헌/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와서 그따위 소릴 하는 건지나 말해보쇼, 엉!
윤서, 일어서서 말없이 벽에 걸린 말그림을 가리킨다.
광헌/ 그, 백마도? 그게 뭘 어떻다고?
윤서/ 저 그림을 그린 사람에게 삽화를 맡기고 싶었으니까... 비록 난잡한 소설이지만...
온 장안이 애타게 기다리는 책이라서... 아무 그림이나 넣을 수가 없었소.
저 앞으로 막 뛰어 나가려는 약동성, 마음속에 이글거리는 고통과 분노, 움찔대는 근육에서
느껴지는 음란함...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이 필요해서 온 거요. 낸들 왜 모르겠소,
경솔한 행동이란 거... 그래도 꼭 필요하니까...
자신의 그림을 보고 있는 광헌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뀐다. 그림에 대한 찬사로 우러나오는 자부심, 그리고 누가 자신을 이렇게 꼭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단 말인가. 하지만...
광헌/ 내, 못들은 걸로 해주겠소. 당연히 지금 바로 잡아다가 옥에 가둘 일이지만,
의금부에 몸을 담은지 십년, 처음으로 국법을 어기는 거요. 그냥 조용히 돌아가시요.
이번엔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가는 광헌. 윤서, 들고 있던 잔을 마시고는 다시 백마도를 본다.
43. 윤서의 사랑채 D
종이에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을 그려보고 있는 윤서.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다, 좌절하여 엎드린다.
조잡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
44. 의금부 뒤뜰 D
광헌이 축구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윤서. 광헌은 신경이 쓰여서 연신 헛발질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토커처럼 바라보고 있는 윤서, 말린 살구를 씹고 있다. 그때 조내시가 뒤에서 다가와 윤서 옆에 앉는다. 윤서를 보지도 않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조내시.
조내시/ 정빈마마가... 김장령을 보고자 하시오.
윤서/ 그야... 뵈오면 될 일 아니오. (말린 살구를 조내시에게 건넨다)
조내시/ 궁 안에서가 아니고... 밖에서 말이오.
윤서/ (충격 받아서 돌아보며) 밖에서... 라니?
조내시/ 모레 밤에 선화사에서 연등제가 있소, 거기에 은밀히 납실테니 김장령도 오시라는 분부요.
윤서/ 무, 무슨 소린지 원...
무작정 일어나 가려하는 윤서. 소맷자락을 붙들며 따라 걷는 조내시.
조내시/ 아니, 그냥 가버리면 어쩌자는 거요.
윤서/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 어떻게 그런 소리를...
조내시/ (한숨을 쉬며) 그러게 내가 경고 하지 않았소. 그 보따리를 풀지 말라고.
윤서/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조내시/ 물건을 받으면 마음도 받는 거지... 그리고 우리마마는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안가지고는 못배기는 성품이요. 오죽하면 열살부터 골동품수집을 했겠나.
윤서/ (아, 제기랄...)
조내시/ 아무튼 난 전했으니, 가고 안가고는 맘대로 하시오.
45. 선화사, 경내 앞뜰 N
엄청나게 많은 수의 등들이 걸려 있고, 그 불빛 밑으로 장옷을 입은 아낙네들과 남자들이 경을 외우며 탑을 돌고 있다. 사람들의 물결을 때로는 거슬리며, 혹은 물결을 따라 움직이며 정빈을 찾는 윤서.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 툭 부딪쳐 오는 사람이 있어 내려다보면 슬쩍 장옷을 젖혀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는 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