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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네 회사가 자리 잡은 빌딩 2층 커피숍에서 그토록 기대하던 수영이를 만났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크기 마련이다.
기대한 바 하고는 달라도 한참이나 달라, 쌀쌀맞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으로부터 베여 나오는 그런, 반가움 같은 건 더더욱 아닌 듯싶어 마주 보는 서로가 싱겁기 그지없었다. 상투적으로 인사수작이나 건네고 바로 부탁에 들어갔다. 내민 노트북은 받아 들였지만 수표만은 한사코 거절하여 속으로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공주병은 아직 남아있지만 순수함은 옛날 그대로 간직한 수영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다시 집안 안부 주고받다가 또 다시 기나 긴 침묵 속에 빠졌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사이였기에 이런 분위기속에서 마주 보고야만 했었나? 혹시나 어떨 가 싶었던 어리석은 내 소견이 나의 기대를 허망으로 가득 부풀렸을 거고 아마 수영이도 나를 덕칠이 녀석하고 똑 같은 인간으로 몰아부쳐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된 듯싶다. 그렇다면 변명 할 여지도 없다. 친구라면 최소한 금녀와의 동거를 막는 척이라도 해야, 그것도 수영이 앞에서 만이라도 막는 척이라도 해야 했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오늘 수영이가 일년 전보다 많이 달라진 듯싶다. 예전처럼 장난도 치고 애교도 떨고 싶지만 애써 참는 눈치가 역력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다시 옛날처럼 아무 생각 없는 오랍누이로 되돌아가고픈 마음뿐이다. 괜히 덕칠이 녀석, 다시 한번 미워난다. 사내 넘이 그새 못 참아 갖고, 차라리 나처럼 홀 애비신세 라면 핑계거리라도 생길 텐데.......
진회색 정장에 받쳐 입은 흰색 블라우스가 약간 수척해진 수영이 얼굴을 더 해쓱하게 비춰서 내 가슴 아려온다. 홀몸으로 낯선 이곳에서 많이 시달린 듯싶었다.
저녁 함께 하자는 제의는 거절했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분위기에 음식 놓고 마주 앉기가 더욱 부담스러울 것이다. 먹기도 그렇고, 안 먹기도 그렇고, 서로 권하다 집어 주다 시간은 흘러 갈 것이고 그리하여 더 민망할 것이고, 서로 더 가슴 아플 것이고.
물론,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행여 꺼냈다 하더라도 본전도 못 찾을 것임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말조차 못하고 간다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슬퍼 질 이유였다.
커피숍 빠져나오기 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언제면 다시 만날까, 만날 수도 있을 런지 하고 돌아보니 앙증맞게 깨작깨작 손 흔들어 보이는 수영의 눈가에는 선명히 이슬이 맺혀있었다. 혹시 수영이가 아직도 옛날처럼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던 건 아닐까? 종종 원인으로 접어야만 했던 그때 그 결말을 다시 시작하려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으나 강하게 부정하고 나와 버렸다.
잘했다, 잘한 거다 하고 자신을 도닥거리며 다시 전철역으로 향하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나는 것만은 어찌 할 바가 없다. 촉촉한 비속에서 후줄근히 젖은 모습으로 이 눔의 먼지! 하고 괜히 눈만 찍어대는 나를 주시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사람 간질이 지 말고 그냥 성질 것 부어버려 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멋있는 척 비속을 걸어가면서 눈물만 이라도 실컷 쏟아보게.
흔들거리는 전철 안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자신에게 새삼 질문을 해댔다. 진정 수영이를 사랑하는 건지,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진정 사랑했던 건지 아니면, 이쁜 여동생으로 그냥 보듬어주고 지켜주고 싶었던 건지. 나조차 헛갈릴 정도로 답은 안 나온다. 이것도 같기도 하고 저것도 같기도 하고, 슬펐지만 아예 끊어버린 것도 잘한 것 같았다.
없는 술 재간에 오후에 들이켰던 소주 몇 잔이 이제 서야 슬슬 용쓰는 모양이다. 술 때문인지, 아님 수영 때문인지 배 잡고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고 있는 내 눈에 맞은편에서 주위 시선 아랑곳없이 수작질 해대는 이십대 초반의 남녀 한 쌍이 들어온다. 터질 것 같은 욕망을 겨우 참고 이리저리 주물럭대는 머스마와 즐기면서도 아닌 척, 느껴지는 따가운 눈총에 그 손을 밀어내는 척 오도방정을 떨고 있는 가스나! 전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지만 오늘 따라 눈꼴사납기 그지없다. 아무리 표현자유가 신세대 개성이라 하지만 이런 건 좀....... 얼른 여관 가라, 가! 하고 말이 튀여 나올 뻔 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그런 걸 질투하거나 시샘할 수도 없는 일, 딴 데로 시선 돌렸다.
전철에서 내려서 시계를 보니 밤 열시가 다 되간다. 이 기분에 숙소로 들어가기도 그렇고 해서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프집으로 향했다. 연거푸 석 잔, 천오백 씨씨나 들이켜고 담배 한 대 꼬나무니 그제 서야 마음 차분해진다. 이제부터 다 잊고 다시 어제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거야, 암 그래야지 하면서 몇 잔을 더 들이켜고 나서....... 나는 취했다. 비틀 비틀, 어기적어기적 숙소와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점점 나아졌고 급기야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가락까지 흥얼댔다. 숙소 문을 떼고 들어서니 그때까지 안 자고 놀음에 열중이던 식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 함께 일년이나 있으면서 아마 취한 모습은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말은 안 해도 무사히 전해줬냐 라고 하듯 빤히 쳐다보고 있는 피리아저씨한테 엄지와 식지를 꼬부려 멋있게 오케이를 만들어 보였다. 꼬불꼬불 영어는 몰라도 수화는 용하게도 알아보고 훤한 웃음을 짓는다. 내가 얼마나 아프게, 힘들게 전해 주었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잽싸게 밖에 나갔다 들어 온 피리아저씨 손에는 소주며, 냉동시킨 돼지발쪽이며 그런 것들이 들려 있어 식구들 우야 하고 탄성 내지른다. 머가 어케 돌아가던지 일단 먹을 것 생겼다는 그 자체만 으로도 즐거운 우리 식구들, 평소에는 우락부락 무식하게만 비춰지는 우리 식구들이지만도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기에 자랑스런 우리 식구들이다.
기분에 덩달아 취해, 평소 같았으면 목에 칼을 들이대도 안 먹을 술을 녹초가 되도록 마셔댔다. 그리고 어떻게 잠든 지도 모른 채....... 도깨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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