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2009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꼬꼬 (gogohua)
프로필     
전체 글보기(1083)
불사조 풍물패
사물놀이/민요
◐ 기상천외
◐ 요리조리
◐ 잡동사니
◐ 해석남녀
◐ 건강상식
◐ 좋은글/시
◐ 포툰/카툰
◐ 컴퓨터공부
◐ 유머/엽기/이미지
◐ 엽기조선왕조실록
㈜ 영화이야기
㈜ 출판이야기
▶ 친구들자작글
나의 - 隨筆
나의 - 메모장
나의 - 웃긴글
나의 - 연재방
나의 - 노래방
▦ 앨범 - 親久들
▦ 앨범 - 불사조
▦ 앨범 - 나의사진
▦ 앨범 - 디카촬영
▦ 앨범 - 여행故事
♬ 동영상/뮤직
♬ 노래(중국,연변,한국)
▒ 중국조선족력사상식
▒ 중국조선족사진자료
▒ 중국조선족문학작품
▒ 중국조선족소식마당
☞ 문학리론강좌
☞ 수필/소설/시
※ 中文小說
※ 亂七八糟
▩ 나의 소장함
개설일 : 2004/05/04
 

[소설] 검은 불가사리- 지하 (상)

2006.03.16 16:12 | ☞ 수필/소설/시 | 다르마

http://kr.blog.yahoo.com/gogohua/701819 주소복사

검은 불가사리- 지하

…여기 앉으면 되나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기분이 어떠냐고요? 네, 아주 좋아요. 왜냐하면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났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선생님이 이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시라고요.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들은 제가 듣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지만요. 제가 미쳤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봐요. 어제는 제 앞에서 그러더군요. 만약 정신이상으로 판명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형, 하늘이 도우셔서 운이 엄청나게 좋아도 최소한 종신형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이 저를 미쳤다고 판정해 주시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인가 봐요. 참, 우습죠. 그러지 못하면 저는 죽을 수도 있다니. 미친 척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잘 알아요. 지금 노트에 '다어증'이라고 쓰고 계시죠? 말이 정상보다 훨씬 많아지는 증상 말이에요. 대학교 때 심리학과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서 대충 알거든요. 사실 제가 생각해도 지금 전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한 상태예요. 보통 이런 상황에선 미친 사람들은 의사가 무슨 질문을 해도 잘 대답하지 않죠? 눈을 맞추지도 않고, 자기 얘기를 하지도 않죠? 아뇨, 이건 영화에서 본 거예요. 하하. 그러면 의사가 말하잖아요. 이거 보세요 누구 씨,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야 해요.

하지만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아니, 저는 누구보다 할 얘기가 많아요. 미친 사람의 불안 때문에 나타나는 다어증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저는 미치지 않았고, 미치지 않은 상태로 살아서 이곳을 나가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제 얘기를 선생님이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마지막 희망이시잖아요.

잠깐만요.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부탁이에요. 선생님, 잠깐만 제 눈을 똑바로 봐 주시겠어요? 그렇게 피하지 마시고요. 조금만 더요.

네, 됐어요. 지금 본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사실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하지만 지금 대답을 듣고 싶진 않아요. 제 얘기가 끝나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다시 말하는데 부탁드려요. 잊지 말아 주세요.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네, 그 일이오. 그 일이 일어난 건 1월 초의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어요. 춥고 건조한 날이었죠. 십 년 만에 찾아온 따뜻한 겨울이라고 언론에서 연신 보도를 해댄 지 한 달이나 됐지만 추웠어요. 날씨가 발악을 하고 있었죠. 마치 헤어진 연인에게 자신이 잊혀졌다는 걸 인정 못 하는 젊은 여자처럼요.

춥고 건조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눈이 아파 왔을 때 콘택트렌즈 부작용이 또 도졌구나 하고 생각했죠. 오른쪽 눈에 빡빡한 이물감이 처음으로 느껴졌을 때 말이에요. 잊을 만하면 일 년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일시적인 고질병이었거든요. 남자친구와 영화관에 들어가 아홉시 반 영화표를 예매했는데 눈이 시큰시큰 아려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 끼고 있던 콘택트렌즈를 빼냈죠. 대신 안경을 꺼내 쓴 후, 거울 속에 비친 오른쪽 눈동자를 천천히 점검했어요. 만일에 대비해 안구 충혈을 막아 주는 안약을 충분히 집어넣기도 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오른쪽 눈동자에는 약간의 붉은 기운이 감돌았을 뿐 특별한 전조는 없었거든요.

남자친구는 어, 안경이야? 그저 그렇게 말했을 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어요. 제 남자친구요? 이제 사귄 지 이 년이 좀 지났어요. ……살아 있다면 이 년 육 개월쯤 되었겠네요. 요즘 같아서는 오래된 커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네, 조금은 권태로워질 법도 할 만한 시기에 아슬아슬 걸쳐 있었어요. 그는 더 이상 저와의 첫 키스나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전 더 이상 그에게 눈물을 머금어 가며 한 자 한 자 눌러쓴 편지를 건네지 않았어요. 제가 헝클어진 머릿결이나 부스스한 옷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그는 더 이상 불평하지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도 않았죠. 물론 처음엔 안 그랬지만요. 그렇다고 우울하다거나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으니까. 그 사람, 저를 더 이상 알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저도 그랬고요. 한때는 사춘기 소녀처럼 그런 일에 체념하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달라지더군요. 우린 더 이상 서로에게 매 순간이 찬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실이 딱히 가슴을 찢는 아픔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죠. 익숙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시기였다고 할까요.

그 사람 팔을 붙잡고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어요. 영화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잊혀진 슈퍼히어로 가족이 부활하는 얘기였어요. 신나고 통쾌한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이었죠. 아, 보셨다고요?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 저는 그 장면이 제일 좋았는데. 왜, 주인공이 사실은 슈퍼맨 뺨치는 초능력 영웅인데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사무실에 처박혀서 서류더미에 묻혀 있는 장면 있잖아요. 그 장면에서, 주인공의 커다란 엉덩이에 비해 앉아 있는 의자가 너무 작아서 참 많이 웃었던 게 기억나요. 정말이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웃었어요. 몸 구석구석의 아드레날린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내 터뜨려 주는 것 같았죠.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정말로 눈이 튀어나와 버리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안경알을 덮어 다 흐려지게 만들고도 남아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바지 위로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남자친구는 많이 당황했어요. 처음엔 제가 무언가에 감동해서 우는 줄 알았나 봐요. 재미있는 영화 보고 왜 울어?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이미 제 눈은 불타는 것처럼 아픈 상태였어요. 마치 모세혈관들이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 같았죠. 아마 눈동자 전체가 새빨갰을 거예요. 정상적인 눈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양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으니까. 그 사람 부축을 받아 집까지 겨우 돌아왔어요. 그리고 안약을 조금 더 넣고 잠이 들었죠. 웃으라고 만든 영화 보고 눈물이 쏟아지다니 참 웃기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영화,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요즘 세상에서 슈퍼히어로는 좋은 직업이 아니잖아요. 안정적이지도 못하고 지나치게 위험하고.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안과에 들렀어요. 의사 선생님은 예상대로 콘택트렌즈 부작용이라는 처방을 내리더군요. 그리고 일 년에 몇 번씩 들를 때마다 늘어놓던 설교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했어요. 양초 비슷하게 생긴 고체 안약을 눈에 넣고 열치료를 잠깐 받은 뒤에, 거즈를 대고 안대를 단단하게 고정시켰어요. 일 주일간 절대로 떼지 말라고 하더군요. 눈을 쉬게 해야 한다면서, 너무 많은 걸 보려고 하지 말라고요. 제 눈이 특히 민감한 편인데, 너무 많은 걸 보려고 시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던가요.

선생님은 아마 지금쯤 되는 타이밍에 한 번 묻고 싶으시겠죠? 공상과학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요. 아뇨, 전 그다지 공상과학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요. 한 번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중독돼 버릴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 그런 영화들은 피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종류의 책들도 읽은 적 없어요. 아마 읽었더라면 이제부터 들려드릴 얘기를 좀더 그럴 듯하게 꾸며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요. 제가 좀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렇게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 일은 실제로 제게 일어났던 일이라고요.

그날 아침 초인종이 울렸을 때, 저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 두 번인가 초인종이 울렸죠. 겨우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여섯시 반이었어요. 누군가가 찾아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죠.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을 때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리더군요.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면서 현관으로 다가갔죠. 누구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었어요. 현관문에 난 구멍으로 밖을 봐도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문 앞에 뭔가 놓여 있었어요. 소포처럼 보이는 상자였죠. 누런 소포지로 포장돼 있었고 가로세로 삼십 센티미터, 높이 이십 센티미터 정도? 수신인 부분에 제 이름과 주소가 깨끗한 흰색 종이에 프린트되어 오려붙어져 있었어요. 발신인 자리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고요.



이상했어요. 소포를 보낼 사람 따위는 없었거든요. 친구? 전 직장 동료? 그것도 아니면 언젠지도 모르게 응모했던 온라인 이벤트 당첨 상품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발신인이 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전 아무 생각 없이 단단히 포장되어 있는 소포지를 북 찢어냈죠.

흰종이 상자 하나가 나왔어요. 시험 삼아 흔들어 보니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쌀알이나 모래알 같은 작은 알갱이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은 소리였죠.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다시 매끌매끌하고 두툼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어요.

스니커즈 초코바, 처음엔 뭐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딱 그 크기였죠. 스니커즈 덕용포장 정도 되는 크기의, 불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무언가였어요. 정말이지 처음엔 누군가가 초콜릿을 선물로 보낸 게 아닌가 싶었어요. 안에는 무언가 작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고 겉에는 딱 한 문장밖에 씌어 있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영문으로 그렇게 인쇄가 되어 있었어요.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혹시 아세요? 그거, 노래 제목이기도 해요, 플레시보라는 그룹의. 참 이상했죠. 그 곡, 제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거든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곤 했어요.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쩐지 이런 게 연상되잖아요. 신은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 혹시 성서에 나오는 말이던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요. 참, 전 신을 믿지는 않아요. 교회에 몇 번 나가 보긴 했지만.

어쨌든 그 소포는 이상했어요. 제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제목이 적힌,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으면서 흔들어 보면 사락사락 소리가 나는 비닐 주머니라니. 꼭 저를 잘 아는 누군가가 보낸 짓궂은 깜짝 선물 같았죠. 요즘엔 그런 이벤트 선물 같은 거, 제작도 해주잖아요. 하지만 문제는 제게 그런 선물을 보낼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전 일단 보낸 사람이 밝혀질 때까지 그걸 뜯어보지 않기로 했죠. 한편으론 더럭 겁이 나기도 했고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좋지 않은 게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그걸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 두었어요. 그러고는 곧 잊어버렸죠. 그게 눈의 통증이 시작되기 약 한 달쯤 전의 일이었어요

……잠깐 물 한 잔만 마시고 계속해도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목이 말랐거든요. 선생님은 참 친절하시네요. 하긴 그러니까 이 일을 하시겠지만요. 지금까지 이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누구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어요. 하긴 미친 사람 얘기로 들리겠죠. 제가 생각해도 조금은 미친 소리 같다는 거 잘 알아요. 선생님, 그런데요, 제가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이세요? 제가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범같이 보이나요? 아뇨,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제 말은, 제 얼굴에 그런 무언가가 드러나는지 궁금해서요. 거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됐거든요. 이곳에는 거울이 없으니까, 제가 어떤 얼굴인지 확인한 지도 꽤 오래됐네요. 어쩌면 그게 다행인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아, 안대요. 일주일이 지나서 안대를 풀었어요. 통증은 처음보다 훨씬 덜해졌지만 그때까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죠.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안대를 감싸고 있던 반창고를 쥐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떼어냈어요.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오랫동안 빛이 차단되어 있었으니까. 방 안의 밝은 조명을 대하자 아주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어요. 그러다가 차츰차츰 보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전 거울에 비친 오른쪽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어요.

선생님, 선생님도 지금 보고 계시죠, 제 눈을요. 지금은 양쪽 눈이 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오른쪽에서 시작된 거예요. 네, 검은 별이 눈에 박혀 있었어요. 검은 별이오. 정확히 말하자면, 동공이 다섯 갈래로 뻗어나간 별 모양으로 변해 있었죠. 그때부터 이런 모양이 된 거예요. 이런 거 보신 적 없을 거예요. 그렇죠? 별 모양이라지만 사실 좀 웃겨요. 너무 전형적이지 않아요? 사람들이 지루할 때 연습장 한 귀퉁이에 볼펜으로 쓱쓱 그려 넣곤 하는, 정말이지 너무 별처럼 생긴 별 모양이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거울을 보고 처음엔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엔 막 웃었겠어요. 이건 뭘까, 농담의 한 종류인가?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실명도 아니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눈동자가 별로 변하다니요. 사랑에 빠진 순정만화 캐릭터도 아니고 말이에요. 믿을 수 없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서 찬물로 세수를 몇 번이나 한 뒤에도 눈에 박힌 별은 그대로였어요. 무슨 이유가 있었든 과정은 이미 끝난 상태였어요. 결과만이 남아 있었죠.



다행이었던 건 시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더 이상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앞을 보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죠. 그냥 어느 날 한쪽 눈동자가 별로 변해 버린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인 이상, 두렵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제 전화를 받은 그는 무슨 소리냐면서 당장 저희 집으로 달려왔죠. 그런데 현관문을 열어 주자 들어온 그가 저를 보는 순간,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게 느껴졌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안색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그의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죠. 그는 제 눈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내일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아. 수술하라고 하면 받아.' 그는 수술비가 모자라면 빌려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여전히 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래서 전 알았다고 했죠. 그리고 그는 평소와 같이 저와 시간을 보냈죠. 섹스를 하고, TV를 보고,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그러고는 돌아갔죠. 이상하게 들리세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랍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냥 제 한쪽 눈이 별로 변해 버린 것밖에는. 이렇게 말하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게 들리겠지요. 하지만 그 순간에는 어쩐지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랄까…… 울거나 소리지르면서 '내 눈이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넌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 거야?'라고 말해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공기 중에 있었어요. 마치 나쁜 꿈을 꾸다가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말을 해야겠는데 무언가가 성대를 붙잡고 그 단어가 튀어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죠. 정말이지 이상했어요. 이상했지만 저는 웃었어요. 그리고 섹스를 하면서는 기뻐서 신음을 했고, 밥을 먹으면서는 맛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상태를 설명하기가 힘들군요. 하지만 그럴 때도 있지 않나요? 선생님은 그럴 때가 없으세요? 상황이 악화하는 게 두려워서 스스로의 끔찍함을 눌러 버릴 때가요. 사람들의 눈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정하려는 자기 마음이 무서워질 때 말이에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말이에요.

돌아갈 때 보니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더군요. 어쨌거나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어요. 그날 밤, 저는 땀을 많이 흘리며 잠을 설쳤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더군요. 어차피 병원에 가볼 생각이었기에 저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일주일 전에 갔던 안과에 다시 찾아갔지요.

나이 많은 의사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몇 분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눈을 바라보았어요. 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저는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홀쭉하게 말라서 군살이 없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노끈으로 제 눈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았죠. 그리고 눈을 돌렸을 때, 그는 다시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죠. '보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어요. '여기서는 고칠 수가 없어요. 큰 병원에서는, 거기서는 또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 결과는 같을 겁니다.' 저는 불끈 화가 치솟았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꼴을 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아직 젊단 말이에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무언가가 제 입술을 붙들었어요. 분명히 해결책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수술 가능성에 대해서는 물을 수가 없더군요. 일 년에 몇 번 들르지 않는 병원이었지만 저는 그 나이 든 의사에게 일종의 신뢰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거짓으로 환자를 위로하거나 반대로 두려움을 품게 만들어 치료비를 우려내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제 눈에 들어 있는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그를 그렇게 어렵고 두렵게 만든다면, 아마도 없애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제가 가난하냐고요? 글쎄요. 오래 전에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렇지 않게 됐어요. 대학을 마치고 안정된 직장에 들어갔고, 꼬박꼬박 적금을 붓고, 독립한 뒤 집을 조금씩 넓혀 갔고 부모님에게도 매달 많은 돈을 보내드리고 있으니까요. 직장 생활도 아주 좋았어요. 모두 제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했죠. 무슨 일을 했냐고요? 사람들의 자서전을 썼어요. 대기업 사장들이 가장 많고, 젊은 나이에 무너지기 직전의 사업을 물려받아 크게 키워 성공한, 신문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이렇게 말하면 좀 쑥스럽지만, 전 그들의 인생을 멋진 문장으로 포장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실제로 그들은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역할은 그것을 약간 더 멋지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죠. 예를 들어 제 인생은, 아무리 멋진 문장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어떤 한계 이상으로 빛이 날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아니, 선생님은 좀 다르시려나? 죄송해요,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들은 아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어요. 마치 손가락 튕기듯 말이에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 일은 보수도 높았죠. 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제가 그 직업을 택한 것을 좋아했어요. 물론 저도 좋아했죠.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잠깐만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가 그런 걸 쓴 적이 있었나요? ……아, 그거요. 대학 시절 신문에 재미 삼아 썼던 거예요. 용케 가지고 계시네요. 정말 여러 가지 것들을 자료로 보관하고 계시군요. 그래요, 말씀하신 대로예요. 그 시절에는 시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누구나 한번은 그렇게 살아갈 때가 있지 않나요?

……그 시 제목이 '불가사리'였어요? 저는 잊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아니, 읽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알아요. 저 사람들이 따라올 테니 어차피 5분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잠깐 이것들이 움직였을 뿐이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은 아까부터 계속 제 얼굴을 보지 않고 계시니까 설명해 드릴게요. 이것들은 이따금씩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전해요. 다리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거죠. 지금은 15도 정도 돌아가 있을 거예요. 아뇨, 이제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처음엔 마취 없이 눈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죠. 잠들어 있다가도 종종 깨어나곤 했어요. 눈물은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눈의 흰자위 전체가 붉게 변해서 사람들은 제가 울었다고 생각하곤 하죠. 물론 저를 본 사람들은 다시는 제 눈을 쳐다보지 않게 되지만요.


네, 그들은 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아요. 문자 그대로 제 눈을 한번 들여다본 사람은, 다시는 저와 눈을 맞추지 못해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그것이 제가 감당해야 할 한 가지 나쁜 일이었어요. 이상했죠. 이상하고 슬펐어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들이 저를 바라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크게 달라진 건 없었거든요.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요.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죠. 모두들 조금씩 두려워하는 것 같긴 했어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요. 새롭게 제 영혼을 들여다보아 주는 사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죠. 하지만 따져 보니 전에도 제 영혼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큰 병원에는 가지 않기로 했어요. 그대로도 괜찮을 것 같았거든요. 게다가 시력은 오히려 더 좋아졌지 뭐예요.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으로만 세상을 보니 안경도 콘택트렌즈도 필요 없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부모님과 친구들과 직장 동료가 차례로 제 눈을 들여다보았어요. 공통된 게 있다면 그들이 그 즉시 그 화제를 피했고,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잘 지냈답니다. 직장에도 계속 나갔고 통증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요.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문득 그 비닐 주머니 생각이 떠오르기 전까지는요.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던 도중에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문득 집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들어 있는 그 비닐 주머니의 파란 색 포장이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오면서, 회의 문서의 글자들이 눈앞에서 흐려지기 시작했죠. 저는 그 소포를 받고 석 달 동안이나 그것을 잊은 채 내버려 두었던 거예요.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책상 서랍을 열고 그것을 끄집어냈어요. 그건 제가 넣어둔 대로 그 자리에 있었죠. 그런데 그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처음 받았을 때처럼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면서, 무언가가 그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죠.

선생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게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잘 알아요. 이제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거짓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답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할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댓글쓰기

댓글쓰기 입력폼

포스트 목록 닫기

목록보기
 
18,115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오늘 전체
방문자 219 933547
구독자 0 75
댓글 0 2629
참조글 1 797
최근 글
세기의 놀랍고 엽기적인..
[엽기조선왕조실록] 9..
[엽기조선왕조실록] 9..
연애하고 싶은 남자 /..
한국행 - 출발
최근 댓글 전체보기
감..
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우왕ㅋㅋ 남자가 굉장히..
저기 저도 시 한번 쓸..
최근 참조글 전체보기
Amoxicillin ..
Oxycontin va..
Hydrocodone ..
Valium withd..
Xanax xr cru..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s654565
- 백만돌
- UCC조아
- x04ji
- 야자나무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2009 12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